2023-02-04 주일 블레싱 예배 / 탁신철 목사(중부명성교회)
말씀 : 마가복음 8:21-24
제목 : 베드로처럼, 베드로 가치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일편단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봉사자로서, 보냄 받은 자로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섬길 수 있도록 도우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님의 깊은 은혜가 이 시간 풍성하게 넘칠 줄 믿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처럼 베드로 가치"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라 일컫습니다.
사도의 말뜻은, '보냄을 받았다' 그런 뜻입니다. 그 말의 뜻을 풀어보자면
베드로는 교회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일꾼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들과 다름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특별히 이 베드로를 통해서 같이 우리가 지금 어느 정도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섬기는 지점을 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처럼'이라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베드로처럼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 그 연약성을 나눌 것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가치'라는 의미는, 우리의 주인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베드로를 높여주셨듯이 우리 또한 높여 주신다 그런 차원에서 잠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계속합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는 연약해요.
베드로의 연약함을 첫 번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요.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절에 보면,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다 그랬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 저나 여러분들이나 아시지요?
절대로 그러면 안 될 짓을 한 것입니다. 좀 전에 예수님에 대한 근사한 고백을 했습니다.
칭찬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셔야 될 것이 있는 것이지요.
"곧 예루살렘으로 간다, 내가 십자가를 진다" 그 말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이 말을 해도 될까 예수님이 제자들의 눈치를 살피신 거예요.
그런데, 이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 예수님의 마음을 정확히 알아야 할 베드로가
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강력하게 말한 것입니다. 판단력이 없는 거예요.
사실은 이 베드로를 한마디로 평가하면, 판단력을 비롯해서 영적 자질 자체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삼은 이 마가복음 초반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난 아름다운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물을 드리웠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나오지요.(마가 1:16-18)
그런데 바로 그 장면 전에 어떤 장면이 또한 부각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어떻게 받았는가, 요단강에서 세례 받았지요
집례자는 누굽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당시의 풍속은 그저 요단강에 머리는 올라와도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잠겨서 그렇게 세례받는 것이 아니라 머리는 요단강 위에 내밀은 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례는 독특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는 그게 강조가 되는데, 예수님은 아예 요단강에 잠기신 거예요. 푹 잠겼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다"라는 특별한 전치사를 눈여겨 볼 수 있습니다.
'was'라는 전치사인데요. 그것은 영어로 보면 'in the Jordan'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냥(요단 강물) 안으로 들어갔다 잠겼다 그런 뜻입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에서는 그 예수님의 세례는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따라서 남들, 그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이 목 위를 내밀고 받는 세례가 아니라
예수님은 물 안으로 푹 잠기는 그런 세례를 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장면 뒤에 오늘 본문에 주목 받는 베드로가 그물을 드리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드리우는데 이것은 into(물 위로 던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에이스' 하면서 요단강에 푹 잠겼던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앤'이라는 헬라어 전치사를 쓰는데요.
그물이 이렇게 드리웠는데, 그저 반은 밑으로 갔는데 반은 떠오르는,
그러니까 얕은 물가에서 그물을 드리우는 것, 그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례를 받듯이, 그물이 깊은 물가에 던져서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얕은 물가용으로 그저 조금만 잠기는 그런 그물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배를 타고 그물을 드리운 것이 아니지요.
배를 타고 나아가는 그물이 따로 있고요. 얕은 물가에서 던지는 그물이 또한 따로 있습니다.
어떤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베드로는 지금 그물을 저 넓은, 그리고 깊은 그런 바다에 드리울 수 있는 어떤 능력이나 상황 자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배를 탔지요. 그 배를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부각은 아예 배가 없는 것과 같은
그런 가난한 모습, 헐벗은 모습, 바로 영적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우리 예수님과 더불어서 영적 바다에 푹 잠겨
그분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여건, 조건, 모든 상황이 되지 않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 판단력 한 가지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정도 판단력입니다.
그토록 예수님께서 뜸 들이고 뜸 들이셔서 "이제 드디어 때가 됐다" 하며,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내가 죽는다. 그것이 내가 받는 영광이다"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영적인 자질 자체가 전무했으므로 그저 그렇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 베드로는 누가복음 5장 3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말씀드렸듯이 누가복음에서는 이제 배를 타지요. 밤이 맞도록 수고했는데 고기를 잡지 못했지요.
그래서 다시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으로 나아가 만선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참으로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누가복음 5장 8절에 그렇게 말을 하지요.
그때 예수님이 떠납니까? 그렇지 않아요. 더 바짝 베드로에게 다가가셔서
"너,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 너, 나를 따르라" 말씀해 주십니다.
가장 중요한 베드로의 교훈은,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
다른 것, 필요가 없어요. 영적 자질, 좀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단 한 가지,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이 자각입니다.
우리 주님을 머물게 하고,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게 하는 고백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봉사자인 여러분들, 그리고 성도로서 예배 드리는 여러분들, 우리가 왜 이 자리에 있습니까?
죄인이라는 고백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두 종류의 죄인 뿐이에요.
하나는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모르는 죄인, 또 한 부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어떤 부류입니까? 베드로를 위시해서 "내가 죄인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부류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만일 그 고백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인이므로로 더 나아가야 한다.", "죄인이므로 주께서 우리를 붙잡는다."
기억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 영적 자질이 없는 것, 더불어서 정서적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이 베드로에게 정서적 장애가 있었어요. 이 부분도 우리의 연약한 점이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베드로가 "항변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32절입니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본문의 "항변했다" - 이 말은요, 정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인데요.
'에피티마오'라는 헬라말입니다. 제가 헬라말을 세 번째 썼는데요. 마지막이에요.
중요해서 그렇습니다. '에피티마오'라는 '항변했다' 이것은요, 실은 먼저 베드로가 쓴 단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로 쓰셨고, 마가복음은 그것을 주목합니다.
언제 예수님이 쓰셨는가, 1장에 보면 축사하실 때, "귀신을 꾸짖어" 바로 그때 '에피티마오' 하셨어요.
그러니까, 굉장히 강도가 센 아주 거친 그런 표현입니다. 이 단어를 쓰면 다 긴장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단어를 지금 누가 쓰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쓰고 있어요.
저 항변한 게 베드로인데, 이 '항변했다'라는 이 단어가 '에피티마오'입니다..
아니, 제자가 어떻게 스승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순 없거든요.
절대로 이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문화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공인 랍비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 이전에 랍비 급이었어요. 공식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광야인데도 불구하고 몰려온 것이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인정합니다. 그 이후부터 예수님도 공식 랍비가 된 것입니다.
랍비의 문화는 그거예요. 제자들은 랍비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해야 됩니다.
대답하는 일, 또 명령에 따르는 것, 모든 것이 다 긴장해서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문화적으로도 이렇게 하면 안 되는 베드로의 행색을 보십시오.
얼마나 흥분했으면 정서적인 핸디캡이 없지 않은 거지요.
게다가, "붙들고 항변했다" 그럽니다. 이때 '붙들었다'는 이 단어는 '멱살을 잡았다'는 뜻입니다.
아니 저는 사실 마가복음을 공부하면서 이 부분에서 흠칫 놀랐습니다. 화가 났어요.
감히 베드로가 누구인데, 어떻게 예수님에게 이럴 수 있는가,
그 베드로에게 놀랍게도 우리 주님은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33절)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이때 '꾸짖어'라는 단어도 '에피티마오'예요. 우리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연속해서 혼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제일 분내 하면서 제일 강력하게 혼낸 것은 바리새인이 아니에요. 바로 베르로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한 '화 있을진저', '화 있도다' 이런 뜻은요, 그저 감탄사에요. 우리말에 아! 아! 뭐 요 정도 뜻일까요...
즉, 베드로를 엄청나게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좀 솔직해지십시다. 우리가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사실은 우리 아내는요, 온갖 잡다한 정서의 더러운 것들이 있습니다.
불순물 같은 것, 정말 확실히 봉사자에게 있고요. 앞에 서 있는 저에게도 있습니다.
왜 그걸 아는가, 여러분 다윗을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욥을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다윗' - 우리는 대표적으로 다윗이 시편 23편을 썼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표시가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요, 그것을 다윗의 대표시로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대표시지만, 더 대표된 것이 있으니 그게 시편 3편입니다.
왜냐, '다윗이 지은 시'라고 처음으로 다윗의 이름을 걸고 나온 시가 시편 3편입니다.
이 시편 3편은 연속시예요. 3, 4, 5, 6 연속이 됩니다. 그런데 시적 분류는 [탄원시]라는 거예요.
시편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감사시, 하나는 찬양시, 하나는 탄원시입니다.
이 탄원시는 "나 진짜 힘듭니다. 나 진짜 하나님의 대하여 불쾌합니다. 나 짜증나요"
사실은 비난하고 원망하고 그런 내용이에요.
그래서 시편 3편도 "하나님 여호와여, 내게 왜 이렇게 대적이 많은지요?"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래서 탄원시예요. 그 탄원시의 다른 제목이 있는데, "아침의 시", "아침에 탄원하는 시"
그러면 4편은요, "저녁에 탄원하는 시"
그 다음 5편은요, "그 다음 날 아침에 탄원하는 시"예요.
6편은요, "그 다음 날 저녁에 탄원하는 시"예요.
뭘 의미하냐면, 아침에도 저녁에도 연속적으로 기도하되 이 불쾌한 감정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욥은 어떤가요? 욥이 정말 근사한 사람입니다. 맞잖아요.
오죽했으면 사단이 넘어뜨리려고 유혹했을까요?
하나님이 인정한 그런 대단한 인물인데, 역시 욥기 3장에 보면, 1절이 험합니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여" -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거예요..
그런데 3장이 1절부터 26절까지 있는데, 앞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1절, 또 2절 "욥이 이르되"라는 그 단어를 빼면
계속 빼곡하게 원망, 불평, 탄식, 실망감이 가득합니다.
누구에 대한 실망인가요?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수 있느냐" 이거예요.
"어떻게 10명이나 되는 자녀가 한꺼번에 죽고,
어떻게 500마리 소들이 한꺼번에 죽으며, 천 마리 이상의 다른 가축들이 죽을 수 있느냐? 쫄딱 망하게 하시느냐?"
"내 몸은 어떻게 이렇게 괴로움에 쩔은 병에 걸리게 할 수 있느냐?" 원망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려하는 것 같은 메세지 전개가 나옵니다.
나중에 42장 5절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리가 꼭 암송해야 될 욥의 고백,
"내가 전에는 귀로 듣기만 하였었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제는 정서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욥은,(이건 제 해석입니다.) 그런데 맞다고 저는 확신해요.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어요.
왜 그러냐면, 아내가 2장 9절에 뭐라고 욥에게 얘기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이럽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입니다. 가부장 제도가 있는 그런 사회요,
사실 여성이 더 하나님을 가깝게 할 수 밖에 없는 그 현실성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지금 욥의 아내는 같이 걱정을 안 합니다.
남편도 힘들고, 아내도 힘들면, 보통 아내들은 같이 걱정하잖아요..(저희 아내만 그런가?)
자녀들이 힘들어지면 같이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욥의 아내는 이 욥을 향하여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하고 말합니까...
그 뜻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평상시에 어떤 정서적인 교류는 없었다는 것이며, 적어도 신앙에 대하여서 나눔이 없었다는 거예요.
자녀에 대하여서는 참 열심히 있는데, 아내와 또 그리고 욥기 4장부터는 욥의 친구들이 나오는데요.
그들과 말을 섞는 부분을 보면 '야, 이거 참 공감력이 엄청 욥이 부족하구나'
제 얘기가 아니라, 욥기를 연구한 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욥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욥이라도 안을 수 있으시고, 하나님은 불평하는 다윗도 껴안을 수 있으시고, 베드로도 안을 수 있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니까, 하나님이 창조자이시니까...
하나님이 인도자이시니까...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다 아시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친해지려면, 몇 번 싸워야 되잖아요.. 안 그런가요?
인격적인 깊은 교제권에 들어가려면, 정서의 나눔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그것을 원하는 거예요.
"너 괜찮아? 너 화내는 모습, 실망한 모습, 특별히 나에게 그렇게 하는 거 괜찮아!"
성경은 그렇게 허용하는 것입니다. 붙잡아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오늘 본문의 이 베드로의 나약한 모습은 오히려 귀한 모습으로 승화될 수 있어요.
베드로가 떠나지 않는다면, 그런데 놀라운 것은요, 베드로를 보십시오. 이게 가룟 유다와 다른 것 같아요.
베드로는 낙심했을 때요, 절망했을 때요, 더 그리스도께 가까이 갑니다.
가룟 유다는 안 그랬잖아요.. 다른 제자들은 느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는 항상 기분이 나쁘건, 낙심이 되건, 분노감이 있건... 바짝 그리스도께 따라갑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른 두 제자와 더불어서 이제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이 베드로였습니다. 변화산에도 갑니다.
사실, 십자가 끝까지 쫓은 이는 베드로잖아요. 멀찍이 섰는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쫓아갔지요..
정서적인 문제는 분명히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잡혀갈 때, 칼을 꺼내서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정서적인 잘못된 부분에도 불구하고 바짝 그리스도께 나아가려고 하는 그 모습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나눌 내용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사랑이 없는 그런 인물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십니다.
조반을 차려 주세요. 뭐라고 베드로에게 질문합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론 그때 '필레오'다, '아가페'다, 이거 다 중요한 내용이지만,
정확한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 너, 사랑 없다." 그걸 지적하는 거지요.
베드로가 사랑이 어디에 있어요? 적어도 감정적 사랑이 있을 수는 있지요.
그런데 성경의 사랑은요, 그 사랑을 넘어섭니다. 참사랑은요, 그런 사랑이 아닌 거예요.
제가 존경하는 '스캇 펙'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도 많이 읽어보신 책이지요. 『아직도 가야 할 길』
거기에 보면, 사랑을 근사하게 정의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또는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뭐 여기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요게 좀 어려운데요.사실은 그분이 성경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사랑은 감정이 아니에요. 내가 좋으면 이렇게 좀 좋게 대하고 내가 싫으면 냉랭해지는,
얼굴빛이 싹 바뀌어서 아는 척도 안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의지가 담겨 있어야 돼요.
성경의 사랑은 이런 모습입니다.
내가 지금 마음으로는 싫어요. 그런데, 이 앞에 있는 권사님들을 이렇게 목회자로 제가 보면서 싫은데 웃어줘야 돼요.
이게 사랑인 거예요. 왜냐, 이건 내 의지가 담겨있는 거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 성숙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담보하시며 내어주시며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원망, 우리의 불평을 들으실 각오도 하시면서
그리고 절대로 다른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질투하는 하나님], 그 '질투'라는 단어에 나타납니다.
히브리말로는 '엘칸나' - 그런데 그 질투하는 하나님은
분명히 다른 쪽을 보고 다른 것에 만족을 찾으면 휑한 거예요.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의 자리, 루터의 말인가? 생각이 안 나네요.
여하간 루터인지, 칼빈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자리에는 하나님의 빈자리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으로 만족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자꾸 끼워 넣으려고 하니까 안 되는 거지요.
그런 모습을 하나님은 견딜 수 없는데, 그 하나님의 그런 특별한 상황을 '엘칸나 하나님'이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연약한 것 세 가지를 이미 제가 말씀을 드렸어요.
그것은, 첫 번째 영적 자질 부족,
두 번째, 정서적인 문제, 낙심될 때는 안 하고 싶어지고,
세 번째, 하나님의 진짜 사랑 없음
그런데, 이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이제 베드로를 세워주시고 사용하면서
그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내어놓은 작은 부분을 너무나 큰 가치로 귀하게 여겨주십니다.
첫 번째, "저는 죄인입니다." 이 고백,
두 번째, 예수님에게 끝까지 붙어있는 그 모습,
그리고 세 번째, 요건 말씀을 안 드렸어요.
모든 것을 망라하는 그런 가치, 베드로의 닮을 점이기 때문에 아껴둔 것입니다.
요거 나누면서 마칠 것인데요,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기다리고 성령 충만 받아" - 이 [성령 충만의 명령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 받았다는 거예요.
베드로는요, 사도 바울과 완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요, 언제든지 부인을 대동해서 이렇게 전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일인 가구형이고, 베드로는 2인, 3인 그런 전도하는 가정용 사도의 사역을 했습니다.
이 부인과 더불어서, 이제 '네로에게 잡히면 우리는 죽겠다'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도망을 갔습니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도 나오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딱 보니까 반대 방향으로, 로마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뭐라고 질문합니까?
라틴어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 "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네가 버린 로마로 간다. 다시 십자가 지러 간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주여, 제가 가겠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로마의 현장에 부인과 같이 갑니다.
우리는 거꾸로 베드로만 죽은 줄 알지만, 그 부인도 같이 죽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음성을 끝까지 듣고 볼 수 있는가, 성령 충만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 일을 할 때, 어떤 일이 되었든 성령 충만하면 끝입니다.
봉사자의 자질이 다른 것이 없어요.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께서 다 하셔요.
얼마 전에 책을 읽다 근사한 말을 발견했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큰일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작은 일을 큰 사랑, 하나님 사랑으로 하기를 원하신다"
좋은 말이지요..
하나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넘치기 위해서는 다른 것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주목하면 됩니다.
저는 정말, 저와 여러분들이 더욱 성령 충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주안 성전에 와 보니까, 어우! 뜨거워요. 섭씨 100°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아! 기도했구나! 그것을 확 느껴요..
보니까, 아주 이곳에서 금요 성령 집회, 'Touch' 이러면서 하는 거군요.
여러분 너무 귀합니다. 승리하게 됩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지지 않아요. 잠깐 휘청댈 수 있지요.
그러나,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나아가는 겁니다.
베드로가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께 집중하고,
성령 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성령으로 승리한 줄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멘!
그런 저와 여러분들 되기를,
우리는 베드로처럼 연약하지만,
주께서 그 베드로를 사용하시며 가치 있게 들으셨던 것처럼,
"나, 죄인이에요.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것......
"더 가까이 주께 나아갑니다." 바로 그것......
그리고, "성령 충만"
그런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귀한 교회, 우리 주안장로교회를 이렇게 섬긴다는 것, 위대한 일인 줄을 믿습니다.
아버지, 참으로 귀한 일꾼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아무쪼록 베드로처럼
스스로 생각하면 보잘 것 없고 아무것도 아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이 붙잡아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10년 후, 20년 후, 시간이 지나가면서 더욱 더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
다음에 만날 때, 못 만나면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인정과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전우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이들이 더욱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