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사목자 일기 - 양병묵 루카 신부
2008년 3월 4일. 정자동 주교좌성당에서는 한 사제의 서품 50주년 기념 금경축미사가 거행됐다. 금경축 미사에 참석한 많은 사제와 신자들은 휠체어에 앉아 힘겹게 미사를 드리는 노(老) 사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제가 지금 받고 있는 것은 분에 넘치는 사랑이며 은혜로움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참석한 많은 이들의 눈가가 붉어졌다.
2009년 1월 라자로마을 내 장주기요셉관(공동사제관)에서 양병묵(루카) 신부님을 다시 뵈었다.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시는 모습에서 절로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그땐, 금경축 미사가 장례 미사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금경축 미사 때를 회상하며 근래 건강에 대해 여쭙자, 완쾌되는 병은 아니지만(파킨슨병) 많이 좋아지셨다면서 농담을 건네신다.
신부님의 신앙은 신부님으로부터 6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경기도 용인에 살던 16대 조부님이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인 후,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내 천주교 집안이 되었다.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신부님께는 박해시절을 견딘 그의 조상들이 그랬듯,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다. 만 16세의 어린나이에 형님을 대신하여 징용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 돌아오고, 한국전쟁 중 포탄세례를 피할 수 있었던 것도, 교구 분할, 50여 년의 사제생활, 그리고 지금, 비록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교구 행사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참석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섭리라고 말씀하신다.
신부님은 교구청에서의 2년 7개월을 제외한 40여 년을 ‘본당신부’로 사목하셨다. 첫 주임 갈전리(현 미양)성당에서 직접 동네 우물을 파고 전기를 끌어오던 그 시절을 지나, 개간사업을 하여 신자들의 삶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노력하던 남양성당(만 8년 6개월 간 천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큰 교세에 맞게 일치를 위해 애썼던 안양(현 중앙)성당, 직접 터를 닦고 지은 사강성당, 수녀원, 사제관, 유치원을 만들고 은경축을 맞이한 평택성당을 비롯해, 장례미사를 가장 많이 치른 광명성당, 은퇴를 한 조원동주교좌성당 까지…, 매번 본당을 건축하거나 리모델링 하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오랜 세월 여러 본당에서 펼쳐오신 신부님의 사목지침은 ‘일치와 평화’였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온 신부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말씀대로 살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었기에, 그 무엇보다도 교우들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한평생을 달려오신 것이다.
삶의 모토를 묻는 말에 신부님께서 말씀하신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이 모토지.” 그 짧은 말이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다.”라는 말과 겹쳐진다.
양병묵(루카) 신부님은 1958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 안성(보좌), 미양, 남양, 중앙, 사강, 평택, 광명, 교구청, 조원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목하셨다.
연락처 : 의왕시 오전동 87번지 장주기요셉관, 031-451-7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