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근로자기념관
“그럼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 탄광에서 그런 참사가 있었나요?” “아닙니다. 그건 영화의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픽션으로 꾸민 것이지요.” 세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던 파독근로자기념관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였다. 내가 속한 단체의 신년인사회가 끝난 후, 행사장인 군인공제회관에서 전철역 하나 사이라고 해서 곧바로 찾기로 했던 곳이다. 양재시민의숲역 3번 출구를 오르자 나타난 S부동산에서는 벽에 걸린 대형지도를 보면서도 공인중개사가 쉽게 위치를 알려주지 못하는 걸로 봐서 파독근로자기념관은 찾기가 쉽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랬다. 기념관은 그곳에서도 신호등을 건너고 좌우로 이리저리 돌아 거의 막다른 지점에 초라하게 붙어 있었다. 4층을 오르는 소라계단은 칠팔십 대 노인들에겐 안전이 걱정될 정도로 폭이 좁고 경사가 급했다. 사무실을 노크하자 기다렸다는 듯 방문객을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비회원이 멀리 부산에서 찾아온 때문에 그처럼 환대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늦긴 했지만 서로 안부를 물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는 친목단체를 만들어 건물까지 확보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무실에서 만난 그들도 자신들의 절박했던 삶의 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영화 ‘국제시장’을 진즉에 본 듯했다.
나와 연배가 같다는 김행남은 괄괄한 성격에 우람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씨름판에 어울리는 그런 체형과 얼굴로 눈은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가 주로 나와의 일대일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회원명부’를 몇 차례나 앞뒤로 뒤지다가 탁 덮고는 내가 찾는 ‘이영수’를 한 차례 더 크게 부른 다음 '그런 사람 없다'고 잘라 말했다. 반세기도 더 지난 인연을 찾으러 먼 길을 찾아왔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돌아설 수야 없지 않겠나 싶어 내 앞으로 그 명부를 끌어당겼다. 그가 없다는 ‘이영수’를 난 기어코 백과사전처럼 두툼한 그 책자 속에서 찾아내고 말았다.
김행남은 파독 관련 업무 외에도 국내 정치권에도 인맥이 있음을 흘리면서 자신이 가진 다양한 지식과 정보로 입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념관의 위치와 건물구조 등이 잘못 만들어진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면서 언론의 큰 조명을 받았던 초대 권이종 관장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모든 것이 자기과시를 위해서였고 단체를 위한 봉사정신은 제로라는 극언을 퍼부었다. 하지만 권 관장은 50년 전 독일의 광산 막장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일념에 6년 동안 그 생활들을 꼬박꼬박 일기로 써온 위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면서도 김행남은 우리가 배워야할 독일 국민의 올바른 정신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정직과 근면 성실 그리고 안전의식은 세계 어느 나라도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그 나라에서 직접 부딪치며 살아본 사람이 그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데 믿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반세기 전 젊은 날의 체험을 그로부터 듣자니 갑자기 독일이란 나라가 부러웠다. 그런데 그는 독일 예찬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 한국 사람들이 고쳐야 할 병폐를 푸념으로 털어놓았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국민성이 나쁘다고 했다.
단결 잘 안 되고 시기질투와 이간질 반목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당장 이곳 협회에도 현재 미꾸라지 몇 마리가 강물을 흐리고 있다며 목청을 높였다. 이영수 형은 반백년도 더 지난 시절에 대전에서 나와 같은 방 하숙동기였다. 그는 군 제대를 한 후 직장을 따라 대전에 첫발을 디뎠으니 아마 스물대여섯 전후였을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은 대전시민관 옥상에 삼학소주 애드벌룬 광고를 띄우는 일이었다. 그 전 해인 1962년 경복궁 만국박람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공중에 높이 띄우는 광고가 빠르게 지방까지 확산된 것이다.
그는 남들이 출근하기 전에 나가서 애드벌룬을 띄우고 또 저녁이 되면 끌어내려 보관해야 하니 일 같지도 않은 일이 신경을 쓰이게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듯 했다. 낮에도 기상이 악화되어 돌풍이라도 불 기세가 보이면 재빨리 달려가 애드벌룬을 수습해야만 했다. 나도 입사초기인지라 어렵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기업이었으니 그는 내 처지를 부럽게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 작은 하숙방에 그득하게 쌓아놓은 진행 중인 공사서류 중 빽빽하게 줄쳐진 '기별재료 명세서'가 말해주었는지도 모른다.
대전이 생기고서 가장 큰 설비공사라 할 정도로 대전-서대전-유성까지 이어지는 배전선로 승압공사는 매일 동원되는 인력이나 공사금액까지 규모가 컸다. 전국에서 모인 백여 명 전공들과 작업인부를 이끌고 매일 전투를 하다시피 현장을 누벼야만 했다. 주감독은 나보다 한 세대는 앞선 선배로 사람을 부리는 요령이 있는 분이었다. 그는 자식뻘 되는 나에게 언제나 ‘미스터 강’으로 부르면서 해라를 않고 신명을 바쳐 일할 수 있도록 사소한 일에까지 신경을 써주는 스타일이었다. 보조감독이야 말 그대로 주감독을 보조만 제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주감독은 자신이 해야 할 업무의 대부분도 햇병아리인 나에게 맡겨 그만큼 처리해야 할 일은 벅찼다. 모르는 것이 태반인 나는 일을 마치고도 비교적 젊은 선배들을 틈틈이 따로 찾아가 일일이 묻고 또 물으며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었다. 계산기가 나오지 않았던 시절이라 밤마다 끙끙대며 필산으로 집계를 끝내야만 했고 새벽같이 현장을 찾아나서야 했던 고달픈 나날이었다. 그런데도 막걸리집이 아닌 잠자리에 누워 이영수 형과의 대화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게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가 봐둔 여자 때문이었다. 하숙집은 나의 직장인 회사 정문 앞이었다. 그러고 여자는 바로 나의 직장에 같이 몸담고 있는 서무과의 김영은. 당시 영은은 여고생이었으며 직원이 아닌 사환신분이었다. 영은의 결혼상대를 나이로 따진다면 두세 살 차이인 내가 더 가까울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곧 결혼을 해야 할 연령에 도달했으니 다급하기도 했을 터이다. 그의 고향 성주만 해도 옛 풍습을 고수했을 것이므로 나이차를 문제 삼을 수도 있었을 텐데도 남녀관계란 것이 참으로 묘해서 적극적으로 만류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청소용역이 없던 시절이라 사환은 아침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를 해야만 했다. 이영수 형도 그 시각에 하숙집을 나섰으니 회사 정문 앞쯤에서 서로 마주칠 수 있는 기회는 잦았을 것 같다. 영은이 남자를 끌 수 있는 강점은 자색도 곱지만 남자들을 스칠 때 다소곳하게 눈을 내리깔고 잠시 기다리는 듯한 조신함이 조선시대 여인 같아 점수를 딴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자에 홀딱 반한 상사병이 이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그는 염체불구하고 나에게 매달려 어떻게 해서라도 영은을 좀 만나게 해줄 것을 통사정했다.
나는 기회를 보자는 핑계로 뭉그적거리면서도 그녀가 사환이란 걸 끝내 밝히지 못했다. 몇 차례 영은에게 전해 달라며 그가 적어준 쪽지도 어찌할 줄을 몰라 사무실 책상서랍에 넣어두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차라리 영은이가 직원신분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말을 꺼내보겠는데 고학하는 어려운 처지를 알면서 거의 무직이나 다름없고 칠팔 세나 나이 많은 남자를 소개해볼 용기가 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새벽별 보고 나가 깜깜해서야 돌아오는 공사판에 일 년 넘게 매달려 있던 나에게 이제 남녀 간의 사랑 문제까지 떨어져 일방적으로 독촉을 당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으니 기가 찼다.
맡은 공사야 한시적이지만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청춘의 사랑은 난감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내가 맡은 대규모 프로젝트가 끝날 무렵인 1964년 팔월 말, 난 부산으로 이동되어 이영수 형과는 헤어져야 하는 날이 오고 말았다. 여기까지라면 내가 굳이 그를 다시 찾아 나설 이유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7개월 뒤인 1965년 3월 서독광부 제1차 제4진에 들어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기꺼이 조국을 떠난다. 당시 언론이 전했던 것처럼 광부선발 경쟁률도 국제시장 영화 속과 별반 다르지 않게 치열했다.
그가 대학을 졸업했단 얘긴 못 들었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근면성실한 편이었기에 어딜 가든 제대로 된 직장에만 발을 디딘다면 난 그의 성공을 미리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서독에 가서도 직접 영은에겐 편지를 보내지 못하고 제3자인 나에게 봉함엽서 가득 애절한 사연을 담아 한두 달 또는 서너 달 간격으로 보내왔다. 어떤 땐 사연은 넘치고 지면은 모자랐던지 풀칠되어 붙어버릴 공간의 절반까지 뱅뱅 돌려가며 편질 쓰고 요령껏 봉해 보내오기도 해서 엽서를 뜯는 사람을 놀라게도 했다. 그러면서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은 이토록 큰 에너지를 가졌다는 걸 나에게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탄광 막장에서 펼쳐지는 작업의 세밀한 부분까지도 생생하게 적어서 우물 안 개구리에게 이국 소식으로 함께 전해주고 있었다. 이역만리 독일의 광산, 지구 내부의 마그마가 분출된다면 그것이 바로 시뻘건 용암일 터이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온도가 더워지는 현장을 마주한 것. 40도를 오르내리는 지하에서 기계채탄이 일으키는 각종 분진이 강한 바람과 만나면서 눈조차 뜨기 힘들고 방진마스크는 그나마 먼지를 덜 마시게 하는 유일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작업시간은 꼬박 6시간이지만 오가는 시간까지 더하면 8시간이다.
악조건에서 막장 작업이 끝나고 나면 남는 건 녹초가 된 몸뚱이뿐, 고국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무사생환에 그나마 안도하게 된다고 했지만 내가 볼 때 그는 자나 깨나 영은만 생각했을 것이 뻔했다. 지하 1200~3000미터 막장에서 땀과 탄가루가 범벅이 된 채 자기 몸만큼 무거운 동발을 쉼 없이 뽑았다가 또 세워야 하고 메탄가스가 폭발해 지반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지상으로 영원히 못 올라오는 경우도 생긴다고 하니 막장 작업은 차라리 목숨을 건 전투가 아닐 수 없다. 채탄 막장에서 쉬램발쳐schramwaltzer라 부르는 육중한 기계가 1.5미터 높이의 탄층을 오가며 400미터 길이로 깎아낸다.
더러는 대형 냉장고만 한 크기의 탄 더미가 사람을 덮칠 수도 있다. 기계가 깎아내지 못한 막장 양 옆 5미터 정도는 사람이 직접 작업을 해야 한다. 지하 막장에서 가장 위험하고 힘든 작업이 바로 이 작업이란다. 천장을 받혀주는 쇠로 된 기둥인 동발은 두 사람이 양쪽에서 어깨에 걸쳐 메고 나른다. 어깨 뼈마디에 원통형 쇠뭉치가 짓누르는 순간 그 통증을 호소할 곳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피할 곳은 더더구나 없다. 천장 암석층이 약해 무너지면 곧바로 죽음이다. 그래서 석탄층을 삽으로 퍼낸 즉시 동발을 1~2미터 간격으로 세워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막장에서는 한 치의 방심도 용납이 안 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광부들은 이곳에서 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위험한 만큼 작업수당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로를 푸는 유일한 방법은 휴식과 잠이다. 처지를 비관하거나 슬퍼할 틈도 없이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해야만 한다. 그리고 독일 돈인 마르크가 손에 들어오는 날, 지체 없이 은행창구로 달려가 ‘Seoul Korea’가 찍힌 송금영수증을 가슴에 품고 기쁨에 젖는다고 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는 고작 1인당 국민소득이 69달러였다. 유엔이 조사한 세계 120개국 가운데 인도 다음으로 가난한 나라였다.
개인이나 국가나 가난을 당해낼 뾰족한 묘수는 없다. 오죽했으면 가난은 국가도 못 막는다고 했을까. 당시 미국에 돈을 빌리러 갔다가 퇴짜를 맞은 대통령은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국인 서독을 떠올렸다. 과부가 과부 사정 안다고 지구상의 같은 분단국가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만은 그나마 통할 줄 알고 찾았으나 독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쇠비름만큼이나 강한 생존력을 DNA속에 지닌 채 태어난 민족이 바로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그래서 건국 이래 일천 번 정도의 외침에도 끄떡 않고 살아남은 민족이다.
돈을 빌리러 우리 특사단을 독일로 떠나보내며 '성공 없이 조국 땅에 발을 들여 놓지 말라'는 대통령의 엄명이 떨어졌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독일 유학파로 경제학 박사였던 백영훈은 당시 대통령의 핵심참모였다. 그는 지금도 이 대목에서 힘들었던 당시 상황을 이야기할 때면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급기야 독일 돈 1억5천만 마르크를 빌리는데 특사단은 성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름 아닌 1천 미터가 넘는 지하에 묻힌 석탄을 캐내는데 광부를 보내주겠다는 조건이 붙었다. 파독광부가 곧 지급보증서요 인질이 된 셈이다.
간호사들의 조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돈으로 민족의 동맥인 고속도로가 깔리고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교역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 최초의 단초를 우리 광부 간호사가 마련했던 것이다. 물론 위정자의 확고한 신념과 성실한 국민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으리라. 1963년 12월 1진으로 광부 121명을 보냈다. 이듬해 2진으로 5백 명을 뽑을 땐 4만6천 명이란 지원자가 몰렸다. 1970년대 후반까지 광부 8천 명, 간호사 1만천 명이 서독으로 떠났다.
이들이 덜 먹고 덜 입으며 고국에 송금한 1억153만 달러가 고속도로 깔고 제철 시멘트 비료 자동차산업 일으키는 종자돈이 되었던 것이다. 독일 땅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코올 묻힌 거즈로 사망한 사람의 몸을 닦는 작업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서베를린에만 한국 간호사가 2천 명이 넘었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천만 달러로 한때 GNP의 2%대에 달하기도 했다. 이영수 형은 ‘영은을 끝내 포기할 수 없다’는 절박한 맹세로 편지를 끝내곤 했지만 난 그 편지를 본인에게 한 통도 전달할 수가 없었다.
기념관 사무실에선 갑자기 생각난 듯 숙소가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험하지 않았고 거의 호텔수준이었다고 묻지도 않은 얘길 들려주었다. 예순아홉 고영숙은 나의 고향과 가까운 상주에서 자랐다고 한다. 나를 떠보는 건지 어제도 조갑제 기자 강연에 갔다가 그의 책을 샀다며 출연 강사진과 강연장 분위기도 전해주었다. 조국을 떠나기만 해도 애국자가 된다는데 수없이 사선을 넘나든 이들이야말로 국가안보의 초석이 아닐까 싶었다. 고영숙이 서른 중반에 간호사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서 초등교사 임용고시를 거쳐 정년까지 마쳤다면 인간승리의 롤 모델일 수도 있겠는데 그저 남의 얘기하듯 담담히 전한다.
친절하게 커피를 내오고 할 때 얼핏 보니까 거동이 많이 불편해 보였는데 일전에 강원도 골프장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전하는 걸 들으며 안심을 했다. 이영수 형의 첫사랑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있던 그녀도 젊은 날엔 제법 남자깨나 울렸을 만큼의 미모가 느껴진다. 그녀는 나에게 그러고 보니 김천 말씨의 억양이 느껴진다며 에둘러 동향의식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국의 근로자 파독 반세기를 맞아 2013년 5월 파독근로자기념관이 문을 열었고 그 소식을 매스컴에서 접했을 때 전화로 문의하여 이영수 형을 찾아볼까도 생각했었다.
오늘 직접 찾아와도 '그런 사람 없다'는 안내시스템에다 대고 전화로 묻는 것은 뻔한 결과를 얻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영수 형의 주소는 한국이 아닌 미국의 시카고였다. 김행남의 설명으론 귀국할 당시에도 한국은 너무나 못 살고 희망이 없는 나라로 이들에게 강하게 입력되어 있어서 귀국을 아예 포기하고 서독에 주저앉거나 미국 캐나다 등지로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옮겨갔다고 한다. 자기가 볼 때 서독에 남는 사람보다도 당시엔 미국 땅을 밟는 사람을 가장 부러워했다고 한다. 캐나다에선 지금 서독광부 출신들이 가장 큰 부자라는 소식도 보탰다.
그런데 그의 기억력이 놀라운 것은 십여 년 전 프랑크푸르트 여행에서 내가 관광지도를 사면서 만나 인사를 나눈 파독근로자 부부의 상점을 꺼내자 그 남편의 이름이 '김영구'라고 알려준다. 기독방송과 인터뷰를 마치고 뒤늦게 합류한 하대경 관장도 친절하게 내방객을 대해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파독 간호사였던 그의 아내가 받았던 임명장과 당시 일터에서 소그룹으로 찍은 사진 등이 걸린 전시관을 둘러보며 그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친절이 몸에 배인 하 관장을 바라보며 지구 반대편에서 열심히 살고 있을 이영수 형을 떠올렸다.
앞으로 해가 바뀌면서 파독근로자 숫자야 빠르게 줄어들겠지만 그들의 바람대로 국가 유공자 예우라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스스로 돈벌이 간 사람들'이 어찌 국가유공자냐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파독사업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엄연히 한국과 독일 국가 간의 계약이었다. 그러니 1970~1980년대에 양국 기업 간의 계약으로 중동으로 진출했던 근로자들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 더구나 수학 여행길에 재난을 당한 학생들을 의사자로 처리해 달라고 생떼를 쓰던 몰지각한 세력들에 비한다면 이들이야 말로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정부에서는 아직도 난색을 표하고 있다지만 기념관을 세웠고 세월이 빠르게 흐르고 있으니 자신들의 명예를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을 하 관장도 조심스레 털어놓는다. 지난 날 대전에서 그나마 형편이 좀 괜찮았던 내가 이영수 형에게 제대로 술 한 잔 대접한 기억이 없다. 그땐 내가 술을 배우기 전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내 생활이 그만큼 바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반백년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한때 방송에서 ‘헤어진 사람 찾기’ 프로그램이 등장했을 때 선뜻 머리를 스치던 사람도 이영수 형이었다. 같은 남성으로서 반세기나 세월이 흐르도록 나는 왜 이토록 그를 못 잊어 하는 걸까. 혹시 나의 아주 풋풋했던 시절에 강하게 각인된 그의 근면성실함을 못 잊은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의 순정을 바친 첫사랑 러브레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일까.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진정으로 영은을 사랑한 그에게 내가 해줄 말은 분명히 있을 것 같다. 형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영은도 반듯하고 성실한 남편 만나서 행복한 주부로 서울에서 잘살고 있노라고. 그러고 보니 그녀의 남편 나이도 형과 같고 그 남편은 나와 지금도 서로 가까이 만나며 지내는 사이라고. 그렇지만 이러한 대답이 아직도 그에게 유효한지를 먼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가 지난 시절의 아픈 추억 같은 것은 깨끗이 잊고 가정에만 충실하고 있다면 평화로운 가정에 풍파를 일으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첫댓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진정한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이 수필을 읽으니 새삼 그런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