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코르토
Alfred Cortot
1877-1962
프랑스
코르토는 일찌기 쇼팽의 음악과 떼어놓기 어렵게 결부된 존재였다. 그보다 그의 연주가 쇼팽 그 자체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연주 양식이나 음악적 감수성은 쇼팽의 작품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데, 아마도 이 피아니스트의 멋진 표정이나 화려한 피아노적 효과의 고양, 그리고 빛나게 농후한 색채도 이에 기여하고 있는 것 같다.
알프레드 코르토는 1877년 9월 26일, 스위스 제네바 근교의 니용(Nyo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인, 어머니는 스위스인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매우 흥미를 가졌고,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서는 명교사라고 일컬어졌던, 리스트의 제자인 루이 디에메르(Louis Diemer,1843-1919)에게 배웠다. 그는 음악원에서 뛰어난 재능을 높이 평가받아, 1896년에는 파리 음악원에서 "단독 우등상"을 받았다. 그는 10대때 파리를 방문한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앞에서 '열정' 소나타를 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코르토에게 "연주만하지 말고 재창조(reinvent)하라"고 말했다는데, 이 충고를 코르토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모르지만, 그는 후에 연주가의 주관을 중요시하는 길을 밟게 된다.
코르토는 19세기말, 프랑스 엘리트들을 휩쓴, 일종의 유행이기도 했던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해 지휘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코르토에 일찌기 주목하고 있던 에두아르 리스렐은 코르토를 바이로이트에 끌어내어 음악제의 연습 피아니스트로 추천하고 여기서 바그너 공연의 실제 경험을 가지게 되며 1901년 바이로이트에서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의 보조 지휘자가 되어 지휘를 배우게 된다.그는 프랑스 귀국후 우선 신진 피아니스르로서 빛나는 성공을 거두고, 1902년에 소시에테 데 페스티벌 릴리크를 창설했다. 여기서 그는 지휘자로 데뷔해 25세의 젊은 나이에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상연하였고, 다시 <신들의 황혼>으로 프랑스에서 초연을 감행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지휘자로서 인정을 받은 코르토는 1904년에 소시에테 내셔널의 지휘자에 취임, 4년간 릴의 콩세르 포퓔레르에 등장했다. 그는 후에 베토벤의 <장엄미사>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의 프랑스 초연도 지휘했다.하지만 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도 끊임없이 계속하여 카잘스, 티보와 더불어 유명한 카잘스 트리오를 조직하여 이후 25년간 이 멤버로서도 활약했다. 또 1907년부터 17년까지 파리음악원의 피아노 교수로 있었는데, 교육방침의 차이를 이유로 사임하고 1918년 에콜 노르말 드 뮈지크 드 파리(Ecole Normale de Musique de paris)를 창립하여 교장으로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이와같이 코르토의 활동범위는 매우 넓다. 많은 악보의 교정이나 저술도 잘 알려져 있어 그가 단지 연주자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서는 <쇼팽>과 <프랑스 음악>등이 번역, 출판되었는데 이런 문장에서도 그의 음악이 들려오는 것 같다.
그가한 피아노 공개 강연은 한번에 신청자가 800명이나 됐다고 하는데 이외에 일상적인 연주활동과 다양한 저술활동, 콩쿨의 심사위원등을 합하면 아마 몸이 두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카잘스는 그를 '자신의 일에 대해 고도로 치밀하고 무엇보다도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코르토는 나치가 1940년 파리를 점령했을 때 공개적으로 협력했고, 나치 점령지역과 독일에서 연주를 했다. 이때문에 1944년 자유 프랑스가 회복되자 프랑스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스위스 로잔(Lausanne)으로 이주했고, 여기를 중심으로 다시 활동했으나 이미 전성기는 지나 있었다. 그래도 유럽및 일본 등지로 연주여행을 했고 관계를 회복한 카잘스의 요청으로 1958년 프라드 음악제에서 카잘스와 듀오로 연주하고 1950년대 부터는 프랑스에서도 간헐적으로 연주와 녹음을 하게 된다. 흐랑스에서 다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고 공개적으로 이 전력에 대해 사과했기 떄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1962년 6월 15일 스위스, 로잔의 한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카잘스는 코르토에 대해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시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며 무한한 약동감과 놀랄만한 힘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어딘가 돌진하는 힘, 격한 감정의 기복, 놀랄만큼 개성적인 곡의 파악을 느끼게 한다. 그외에 피아노의 음색이 매우 풍부하고 아름다우며 수시로 음색이 변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952년 10월, 75세의 피아니스트는 좀 마른 몸을 꼿꼿이 세워 무대에 나타나 똑바른 자세로 피아노 앞에 앉아 소리없이 긴장하고 있는 청중들에게 쇼팽의 <24의 전주곡>을 들려주기 시작했는데 그 음은 청중을 깜짝 놀라게했다. 그당시 전쟁전의 피아노가 놓여있는 홀도 많아 악기의 사정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고 그때 코르토가 사용한 피아노가 어느 정도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소리는 양동이의 밑바닥을 두들기는 것처럼 탁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그 어떤 피아노의 소리와도 달라 '아 이제 코르토는 끝장이구나'하고 느낀 관객들이 있어는데 이상하게도 첫 곡 아지타토의 곡이 끝날 무렵 그 연주에는 형용할 수 없는 풍요로운 색조가 있고, 그것도 무수한 색으로 마치 유화물감을 파레트 위에 펼쳐놓고 섞어 놓은 다음 그 파레트를 각도를 달리하면서 빛에 비친 것 같은 색채를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피아노의 역사'라는 레코드를 들어보면 그 당시의 양동이의 밑바닥이나 대야를 두들기는 것 같은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는데 아마도 코르토는 그 음색을 파악한 순간, 어떤 기괴한 매력을 고담한 표정속에 나타내며 청중을 끌어가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코르토는 2개의 <12연습곡>으로 넘어가자 더욱 악상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네어 변화무쌍하게 각 곡을 표현했다. 코르토가 연주한 쇼팽곡은 루바토와 색책의 예술이었다. 그속에 사람을 도취시키는 풍성한 향기를 아낌없이 뿌리는 것이었다.
코르토는 <낭만의 작품집>이라고 명명된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멘델스존의 <엄격한 변주곡> 슈베르트의 <악흥의 한때> f 단조 베버의 <무도에의 권유> 쇼팽의 <발라드 1번>외 4곡, 그리고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끝으로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2번>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었는데 아마 지금은 이런 곡목으로 짜는 피아니스트는 없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대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코르토의 연주는 이 곡목을 연주한 날이 가장 빛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코르토의 음반을 다시 들어보면, 이를테면 쇼팽의 <왈츠집>등, 콘서트와 같은 정도로 미스터치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음반으로 만든 것을 보면, 그자신은 음악의 기분의 표현을 중요시하고 다소의 실수 같은 것은 괘념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가령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미스터치를 허용하지 않는 레코딩 디렉터와 충돌했을지도 모른다. 하나하나의 프레이즈가 자유분방이라고나 형요할 수 있는 즉흥성에 찼고, 변화무쌍한 그의 연주는 부분적으로 다시 고쳐 연주해서 테이프 편집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게 생각된다.
그는 쇼팽의 녹턴처럼 노래부르는 작품에서는 화음을 어긋나게 아르페지오처럼 연주하는 일이 있고, 또 두 손을 어긋나게 해서 음악적으로 무너진 느낌을 일부러 내는 일도 있다. 그것은 피아노라는 악기가 아직 미완성이어서 울림이 지금처럼 매력을 갖지 않았던 시대에 자주 행해진 일이었지만 특히 레셰티쯔키의 문하나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에 그런 방법이 많이 쓰였던 것 같다.
코르토는 아마 그러한 전통을 쇼팽의 경우에 중시한 것 같다. 그것은 쇼팽이 선율선의 단조로움일 피하기 위해 장식을 많이 사용한 의미를 더욱 깊이 파내려가 화음에 의한 조성적인 변전의 전시를 보다 알기 쉽게 할 의도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코르토의 연주를 들으면 그것이 상습적인 버릇처럼 너무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장점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약점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주에는 그런 일 이외에 상성부의 선율과 반주부의 음형을 강약의 변화로 역전시키고 그럼으로써 내부구조를 표면에 밀어내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혹은 반복되는 음형의 머리 음을 강하게 취해감으로써 마치 바흐의 연주처럼 선율을 부상시켜 일종의 대위법적 효과를 내는 표현법도 볼 수 있다. 이런일은 악보를 철저히 다 읽고 모든 디테일을 모조리 안 결과로서 행해지는 것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코르토판이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교정악보에도 실로 면밀하고 상세한 지시가 적혀있다.
이렇게 보자면 코르토는 광신적 낭만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연주법을 따르는 피아니스트는 없다. 또한 코르토 자신도 교사로서 그의 표현양식을 제자에게 강효나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의 문하생은 한가지 색깔로 물들지 않고 다양한 경향으로 개성을 냈다고 한다.
지금 남은 그의 음반들은 거의 모두 HMV(지금의 EMI)에서 1920-50년대 초에 녹음했는데, 그는 사실 당시의 피아니스트 중에는 녹음이 상당히 많았고 지금까지 그중 대부분이 남아있는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다. EMI 외에 Music & Arts, Biddulph, Pearl 최근의 Naxos 까지 진지하게 78회전 시대의 음반을 내놓는 회사들은 모두 그의 음반을 내놓았다. 그의 쇼팽 연주를 자세히 살펴보면, 1933-34년의 전주곡은 명연으로 이름이 높은데 2번에서는 묘하게 흔들리는 루바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왼손은 규칙적으로 진행하느 오른손은 보통 약간 늦게 들린다. 또 끝의 강조된 V7화음은 감상자의 의표를 찌른다. 3번은 왼손이 매우 까다로운데 코르토는 왼손이 아주 매끈하지는 않으나, 강약 표현은 매우 자유롭다. 4번은 2번보다 루바토가 더 선명하다. 14번이나 24번에서는 박력과 긴장감이 넘쳐 자기도 모르게 손에 땀이 난다. 한마디로 곡 전체에 긴장과 정열이 감돌고 있다. 1933년의 뱃노래도 자유로운 연주인데 후반의 강렬한 고조는 (빠른 템포로 미스터치가 있기는 하지만) 이곡이 살롱 음악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데 충분하다.
슈만은 협주곡, 3중주곡 1번과 함께 상당량의 독주곡, 바리론 샤를르팡제라(Charles Panzera)와 <시인의 사랑>을 남겼는데 그의 낭만주의가 가장 잘 어울리는 작곡가가 쇼팽과 슈만일 것 같다. 프랑크의 곡은 <교향적 변주곡>이 훌륭하고 전주곡 코랄과푸가의 개성도 좋지만 무엇보다 티보와 연주한 소나타(1929년 녹음)이 압권이다. 인상파 작품들은 의외로 드뷔시보다는 라벨이 인상이 더 좋다. 전주곡 1집은 그의 낭만적인 접근에 다소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라벨은 작곡가의 고전적인 취향을 의식했는지 훨씩 상식적이며 그 속에 간혹 나타나는 코르토의 장점이 매력적이다. 왼손을 위한 협주곡도 물론 좋으며, 생상 협주곡 4번도 있다. 다른 작곡자들은 바흐에서 알베니스까지 다양한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3악장 주제의 끝무렵에서 난데없는 쉼표가 나와 사실 처음 듣는 사람은 황당함을 느끼게 된다. 좀 듣기 드문 레퍼토리인 베버 <소나타 2번>이나 녹음은 많이 낡았지만 <무도회의 권유>도 재미있다. 박진감있는 1929년의 소나타 b단조도 좋지만 1935년의 전설곡 2번 <물위를 걷는 성 프랜시스>의 훌륭한 묘사력도 많은 추천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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