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제게 있어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실려 온 중풍병자’ 스토리에 대한 묵상은 손에 잡힐 듯이 실감이 납니다.
스스로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처지를 저도 200퍼센트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저도 한동안 꼼짝 못하고 똑바로 누워 천장만 올려다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몸에 미사도 나가야 하고 화장실도 가야하니, 일어나긴 하는데, 조심조심 침대에서 일어나는 데만 5분이 족히 걸렸습니다.
양말 신는데 5분, 옷 입는데 5분, 최소한으로 씻는데도 5분...평소 1분도 안 걸리는 거리가 10분 이상 걸렸습니다.
참으로 기기 막히고 비참해지더군요. 이게 과연 사는 건가?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삶의 질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닥 체험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나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게 되니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지체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이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또 한 가지 은혜로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접하게 되다보니 ‘나는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주님 자비 아니라면 나는 정말 비참한 존재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다가왔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세상 인자하신 한의원 원장님께서 “이 몸으로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어요?
마음 넓게 갖고 조금만 참으세요. 꼭 낫게 해 드릴께요!” 라고 말씀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동료 인간 존재 안에 굳게 현존해 계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고통만이 전부였던 중풍병자가 은혜롭게도 치유자 예수님과 대면하는 은총을 입게 됩니다.
환우를 향한 가족들의 큰 측은지심, 그리고 반드시 일어나서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치유를 향한 환우의 강한 의지가 마침내 기적을 일구어낸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춥고 어두운 긴 죽음의 터널을 잘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평화로이 구원의 창가에 앉아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생명의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자비하신 하느님의 업적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죽음 같은 오랜 병고, 그것이 한평생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끝까지 잘 견딘 결과 이제 참 하느님의 부드러운 구원의 손길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 외적 치유뿐만 아니라 영적, 총체적 치유, 완전한 자유와 해방감, 구원을 이 지상에서부터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오랜 질병, 그리고 예기치 않았던 하느님의 개입, 그리고 마침내 은혜로운 치유를 통해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투병생활 뿐이었던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 끔찍한 고통을 주시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고통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 끝도 없을 것 같은 고통 같지만, 그래서 쉽게 체념하고 쉽게 포기하는 우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말끔히 치유시켜주십니다.
하느님 편의 예고 없는 방문, 성령께서 주시는 뜻밖의 선물인 치유의 은총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마음을 활짝 열 필요가 있습니다.
내 병세가 너무 심각해서, 의사도 내놓은 사람이어서, 내가 너무 나이가 많아서, 더 이상 내게 좋은 일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가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십니다.
눈물을 거두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똑바로 서기를 바라십니다.
내면과 외면 모두, 육체와 영혼 모두 온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사람을 치유하는 이가 나쁜 사람일 수 있을까?>
복음: 마태오 9,1-8
“내 눈을 바라봐.”라고 하며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던 허경영 씨가 지금 성추행 등의 혐의로 피소 되었습니다. 허경영 씨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없다면 왜 수많은 사람이 수백억씩 바치면서 자기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했을까요? 혹시 마귀도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치유하십니다. 중풍 병자의 치유는 곧 당신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중풍 병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며 이분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지니신 하느님과 같으신 분임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것이 사탄의 힘으로 이루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사탄도 능력이 있을까요?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Rasputin)은 러시아의 신비주의자이자 자칭 성자로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차르 니콜라스 2세의 가족과 가까워져 엄청난 권력과 부를 누렸던 인물입니다. 물론 그로 인해 러시아 제국이 막을 내렸습니다. 라스푸틴이 러시아 왕권과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치유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특히 차르의 혈우병 아들인 알렉세이에 대해 치유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아들을 끔찍이 아끼던 황제와 왕비는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치유 능력에도 불구하고 라스푸틴은 부패하고 부도덕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어떻게 치유의 능력이 있는데 사악할 수 있을까요?
가만히 살펴보면 알렉세이는 혈우병으로부터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어느 정도 상태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다시 아파서 내쫓았던 라스푸틴을 다시 불러드려야 했습니다.
사탄은 치유의 능력이 없습니다. 사랑과 능력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사탄도 능력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에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느님과 사탄은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사탄은 무능하고 하느님은 빛이시고 사탄은 어둠이고 하느님은 사랑이고 사탄은 증오입니다. 그러니 사탄이 치유의 기적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영화 ‘그린 마일’에 보면 험상궂은 흑인 살인범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는 살인범일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친절하고 착하고 심지어 치유의 능력도 있습니다. 사형수였던 그를 지키던 간수들은 그의 면모를 보며 사형수일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수 없어 그가 사형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는 이의 가족에게까지 치유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서지 않습니다. 사탄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영화 ‘블라인드’에 보면 자신을 피하는 못생기고 나이 많은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오게 하려고 자기 눈을 찔러 눈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내용이 나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내 피를 흘려야 합니다. 내 피를 흘리는 이가 타인에게 악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악하다는 말은 모기란 뜻입니다. 모기가 누구를 위해 피를 흘려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보여주시기 위해 치유의 기적을 택하셨다면, 치유의 기적은 당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믿기 이전에 먼저 그 사람에게서 치유의 기적이 나오는지 살펴야 합니다. 단순하게 믿어서 스트레스가 사라져 병이 낫는 정도는 안 됩니다. 루르드처럼 과학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치유의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악한 이들에게서 이런 기적은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치유의 능력은 하나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9,1-8: 중풍병자를 고치시다.
중풍 병자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실려 왔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이웃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가 아니라,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애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절) 하신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아들을 부르듯이 말씀하신다. 사지의 힘을 다 잃어버리고 누워있는 그가 주님 앞으로 들려왔다. 치유 받을 사람이 천사들에 의해 예수님 앞으로 옮겨졌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어서 병이 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4절)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따진다. 그들의 생각을 주님께서는 읽으시고 당신이 마음에 숨겨진 것들을 아시는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5절) 이것은 어떤 행위가 더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없다. 두 가지는 모두 전능하신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예수께서 이 모든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하시고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6절). 이 행위로써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과 건강을 회복시키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병자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잃었던 낙원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찬양을 드렸다.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과 하늘로 돌아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병자의 치유행위는 죄를 용서하는 행위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분은 영혼과 육신의 마비를 모두 고쳐주셨다.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는 주님께 우리 이웃도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도 하느님을 알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이 오늘의 환자와 같이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며, 우리도 그들과 같이 이웃의 천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저는 가톨릭 신부입니다. 1999년 1월 28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지금까지도 사제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은 했을까요? 당연히 안 했습니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신부는 독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저처럼 신앙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 또 사회적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들을 많이 보기에, 이제는 사제로 독신을 지킨다고 해도 그렇게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내가 세 명이나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곳에 사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이나 결혼했고, 세 번 모두 헤어졌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세 번이나 결혼하셨냐고 물으니, “다 다른 줄 알았어요.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달라질 줄 알았지만 살아보니 똑같더라고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아내가 문제라는 생각에 이혼하고 결혼했지만, 다음 아내도 또 다음 아내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결국 누가 문제일까요?
한 사람과 제대로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와도 제대로 지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과 잘 지내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도 잘 지낸다고 하더군요.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따라서 지금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좋은 관계인가요? 나쁜 관계인가요?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주님께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중풍 병자가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뜻에 맞게 산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저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서 치유를 받습니다. 어쩌면 중풍 병자와 데리고 온 사람들의 관계를 본 것이 아닐까요? 중풍 병자인 자신을 데리고 올 정도로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라면 주님 당신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보신 것이지요. 그래서 용기를 내라는 위로의 말씀을 듣고 더불어 죄의 용서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하고, 또 죄의 용서라는 특별한 은총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 나 역시 주님과 친밀한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만나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이웃에 대해 계속해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나 역시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면, 작은 일을 훌륭하게 해네세요(나폴레온 힐).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마태 9,4)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우리의 속마음을 다 알고 계신다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언젠가
세상과 하느님 앞에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며
악의와 자만심을 버리고
착한 생각을
품고 살아야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매일 묵상 단톡방)
‘병이 나았다’는 말보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씀으로
중풍 병자의 육체적인 치유보다도
죄의 용서에 초점이 놓여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육체적인 질병에서 벗어날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자유로워질 때
구원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사슬에 묶여
죄의 종살이를 살고 있다는 것은
구원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입니다.
내 마음속에 자기 기준과 잣대만으로
악한 생각을 품는다면
우리는 구원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미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고
구원의 삶을 살아갈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난 과거의 삶을 통해
배울 수 있는 평상을 들고
오늘 저는 용기를 내어
구원의 길을 당당히 걸어가 보렵니다.
복음말씀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10-17
그 무렵 10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가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집안 한가운데에서
임금님을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습니다.
11 아모스는 이런 말을 해 댑니다.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갈 것이다.’”
12 그런 뒤에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16 그러니 이제 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너는 ‘이스라엘을 거슬러 예언하지 말고
이사악의 집안을 거슬러 설교하지 마라.’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아내는 이 성읍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지며
네 땅은 측량줄로 재어 나누어지고 너 자신은 부정한 땅에서 죽으리라.
그리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호수를 건너
당신께서 사시는 고을로 가셨다.
2 그런데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3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고 생각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느냐?
5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6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런 다음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7 그러자 그는 일어나 집으로 갔다.
8 이 일을 보고 군중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