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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목요일. - 기도의 본보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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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기도의 본보기
연중 1주 목요일-2014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이것은 하나의 기도다!”하고 뇌까렸습니다.
더 나아가 기도일 뿐 아니라 청원 기도의 본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병 환자와 주님 간에 오간 대화는 진정 본보기로서 손색이 없지요.
왜 그런지 한 번 볼까요?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라고 하는데 이런 대화가 오가지요.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청원 기도를 할 때 이 나환자보다 더 완벽한 청원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자기의 청을 아뢰면서도 겸손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절실하고 간절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청원기도라기보다는 신앙 고백이라고 함이 맞을 겁니다.
그것도 주님의 능력뿐 아니라 주님의 좋으심까지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가 어떻게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시라고 믿을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나병 환자도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믿을 수 있습니다.
허나 최악의 고통을 겪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좋으시다 할 수 있을까요?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악까지 간 사람이기에
그는 진정 하느님의 좋으심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진정 최악까지 간 사람입니다.
잃을 게 더 없을 정도로 이 세상에서 모든 걸 잃었습니다.
하나하나 잃어갈 때마다 그는 절망하고 또 절망하였으며,
하나하나 잃어갈 때마다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잃을 것이 남았을 때는 불안하고
얼마 남지 않은 것마저 앗아가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는데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니 오히려 마음도 편안하고
어두운 밤에 별이 떠오르듯 도리어 선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최악의 선>입니다.
더 나쁠 것이 없는 악은 악이 아니고 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악은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더 좋은 것을 바라기에 현재의 것이 악이 되는 것이고요.
이렇게 최악의 상태에서 최악의 선을 발견한 사람은
이제 최악을 허락하신 최고선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최악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의 더 진실한 기도는 말에 있지 않고 동작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청하였다.”
무엇이 존재의 기도에 더 가까울까요?
입으로 하는 기도가 더 가까울까요?
동작 또는 행위로 하는 기도가 더 가까울까요?
제 생각에 당연히 동작과 행위가 더 존재적인 기도에 가깝습니다.
사실 나병 환자가 주님 앞에 나아온다는 것 자체가 존재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도 모든 기도에 앞서 해야 할 것이 주님의 현존 앞에 현존하는 겁니다.
성당에 들어갈 때 그냥 성당에 들어간다고 생각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도 그냥 기도한다고 생각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왔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온 사람이라면
오늘 나병 환자처럼 겸손한 동작을 취할 것입니다.
제가 저희 수련자들에게 가끔 불만인 것이 성당에 들어와 털썩 앉는 겁니다.
하느님 앞에 나아온 사람이라면 오늘 나환자처럼 겸손하게 무릎을 꿇겠지요.
이렇게 나아온 나환자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
이 동작 하나에 나환자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모든 응답이 들어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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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의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받은 한 나병환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치유 받은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나를 치유하신 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일이고,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구약의 율법규정(레위 13,45-46 참조)에 따르면,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서, 혹시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자’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엿볼 수 있습니다. 곧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피해간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감싸주시고 치료해주십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 이야기에서도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한 여인이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이처럼, 규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해줍니다.
한편, 나병환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스승님의 바람이 이루어지소서! 라는 의탁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바람에 대해 하느님께서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람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에 대한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주인께 속한 이로서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동시에, 당신의 치유의 능력, 곧 권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행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기에, 주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탁하며, 주님의 원의에 순명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희망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로 자신을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바를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저도 바라게 하소서.
당신이 하시고자 한 바를 저도 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만지소서.
저의 바람과 하는 일을 깨끗하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저를 새롭게 하시고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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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릎을 꿇어라
저는 한때 허리통증으로 고생했습니다. 아무리 기도 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한의사에게 침을 맞기도 했고 통증을 완화 시켜 주는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매일 같이 ‘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아프고 나서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고통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이기도 하지만 견디고 이겨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님,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 시간이 단련의 시간으로 성화 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그런데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 존엄을 말하면서 ‘개 식용 금지법’은 만들고 더 중요한 ‘낙태 금지법’, ‘사형금지법’에는 소홀할까요?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용기 있게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를 인식했으면 해결 방법을 찾아야지요.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고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주님, 당신께 온전히 의탁합니다.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은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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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인구가 오천만이니 5명 중에 1명은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정도면 역대 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는 명량을 비롯해서 열아홉 개가 있었으니 서울의 봄은 20번째 천만 관객 영화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장충동에서 신문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주보에 ‘광주’에 대한 글을 게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어딘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나중에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자들은 매일 성당에 모여서 본당 신부님이 무사히 돌아오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형은 군 복무 중이었습니다. 나중에 ‘국난 극복 훈장’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삼청 교육대’에 끌려갔다가 온 동네 형들도 있었습니다. 군인 출신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정부에서 과외 금지를 실시하였습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교복 자율화와 두발 자율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제가 기억하는 서울의 봄입니다.
영화는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이 서거하였고, 그 권력의 빈자리를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채우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권력의 빈자리는 몇몇 정치군인들의 총과 칼에 의해서 탈취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과정에서 권력에 비판적인 언론은 통폐합 되었습니다. 권력에 비판적인 민주인사들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권력에 저항하는 청년들은 고문을 당하였고, 군대에 징집되었습니다. 저항하는 국민과 폭력으로 진압하는 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현장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당시 신문은 폭도들에 의한 혼란이 있었고, 정부는 폭도들을 진압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권력은 막강했고, 민주시민들의 저항은 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들풀처럼 시민들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87년 저항하는 국민과 폭력으로 진압하는 권력이 정면으로 충돌한 현장이 ‘6.10 항쟁’입니다. 그리고 권력은 헌법을 바꾸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제도를 부활하였습니다. 그렇게 ‘서울의 봄’은 많은 민주인사들의 피와 땀 그리고 죽음의 제단 위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병환자의 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병환자는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나병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에게는 긴 겨울이 계속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는 죄인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육체가 병들어가면서 절망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도 헤어져서 외롭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는 바람결에 주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예수님께 다가와서 간절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육체의 병이 치유되는 것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세주를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나병환자에게 드디어 봄이 왔습니다. 나병환자가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았다면 우리도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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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한 나병 환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렇게 나병은 사라지고 그 환자는 다시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병실에 있는 모든 환자의 소망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을 원하는 것보다 이 병고에서 풀려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소망입니다.
그만큼 일상은 소중한 것입니다. ‘일상’이라는 말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가족들과의 대화, 식사, 웃음, 산책
일터에서의 땀 흘림과 성취감, 소소한 행복들
그리고 중간중간 자신을 위한 아름다운 시간….
이런 일상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평상시에는 이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갈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그것의 소중함을 연설해도 그것은 그저 알고 있는 것을 되풀이하는 지루한 말로만 여겨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환자들에게 일상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닙니다.
좋아 죽겠는데 어떻게 떠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해 죽겠는데 어떻게 입을 닫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살아났는데 어떻게 그 기쁨을 감출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병이 나은 나병 환자가 기쁨의 소리를 지르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소리 지름이 당신을 더욱 바쁘게 만들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저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실 뿐, 당신께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저도 느끼고 싶습니다. 나환자의 그 기쁨 말입니다.
누르고 눌러도 터져 나오는 그 환호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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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 계란밥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맛을 알법한 밥
설명하지 않아도 그 레시피를 알법한 밥
그 이름 ‘간장 계란밥’
밥, 계란프라이, 간장
밥, 계란프라이, 간장, 참기름
밥, 계란프라이, 간장(2/1), 고추장, 참기름
밥, 계란프라이, 간장, 마가린
밥, 스크램블(간장+참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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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가능한 레시피 조합….
수없이 늘어나는 체중계 숫자는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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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세기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은 마흔이 조금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평균 수명의 두 배 가까이 살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지내는 연명 수명이 아니라, 삶을 활발하게 사는 건강 수명으로 팔십을 훌쩍 넘기셨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입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젊은 시절의 총명함과 체력을 유지했고, 뇌는 전혀 노화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끊임없이 새로운 배움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이 듦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힘이 빠지고 정신도 맑지 못해서 후손들에게 짐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톨스토이처럼 계속해서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만이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더 열정적으로 지금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주님을 알고 따르는 것도 우리가 멈춰서는 안 될 것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을 알고 또 따르려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우리 삶의 의미조차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이기에 하느님 안에서만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 안에서 앞을 내다보며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병자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리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나병 환자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왔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모두 당신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사실 이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지요.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은총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주님 곁으로 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도 없고,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도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주님을 알고 따르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알면 알수록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을 따르면서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현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잡념을 없앤다는 뜻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중요한 것에 관심을 쏟는다는 뜻이다(스펜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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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교회의 성사(聖事)로 양육(養育)되는
-“우리 믿는 이들!”-
오늘 밤 꿈중에 묵상중 떠오른 강론 제목입니다. 연중시기 초반에 맞갖게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이 활발히 펼쳐집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의 공생애 첫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늘 새롭게 회개하여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살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복음선포와 더불어 온갖 치유활동이 펼쳐집니다. 앞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시몬의 장모와 많은 병자를 고쳐주신후 전도여행중 또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 주님은 고맙게도 오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와 똑같은 주님께서 오늘 미사전례를 통해 우리를 만나주시고 치유해 주십니다. 비단 전례가 아니더라도 참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는 이들을 만나 치유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제 열심한 50대 자매들이 눈에 밟힙니다. 낮기도때부터 저녁 끝기도때까지 참 오랜시간 동안 성전에 머물렀습니다. 몇 달전에 피정을 다녀간 인천쪽에 사는 분들인데 주님이 그리울 때 수도원 성전을 찾아 마냥 머물며 수도자들과 함께 기도하다 가는 분들입니다. 이중 한분의 며칠 전 보낸 메시지입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가도가도 또 가고 싶은 곳
어제는 꾸르실료 분단 모임이 있었는데
실컷 자랑했더니 다들 가자고 해서 6월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가도가도 또 가고 싶은 곳이 ‘주님의 집’ 성전이며,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은 분이, 만나고 또 만나도 만나고 싶은 분이 주님입니다. 날마다 주님 보고 싶은 설레는 마음에 한밤중 잠깨어 쓰는 강론입니다. ‘가도가도’란 말마디를 보니 떠오르는 제 가장 사랑하는 ‘하늘’이란 시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호수하니 윤동주 시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정지용 프란치스코 시인의 '호수'란 시도 떠오릅니다.
“얼굴 하나야
손가락 둘로
푹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 밖에”
이래서 주님 그리울 때 묵상중 저절로 눈을 감게 되나 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바로 우리 믿는 이들 모두를 상징합니다. 나병이 상징하는 바, 각자 지닌 다양하면서도 고유한 병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건강한 이도 의인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모두가 병자요 죄인입니다.
그러니 치유의 구원을 위해 찾을 분은 예수님 한분 뿐입니다. 왜 나병환자가 되었나? 물음 부질없는 답없는 질문입니다. 세상에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원인은 몰라도 답은 압니다. 바로 답인 주님을 찾아 만나는 것이요, 이점에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를 제대로 주님을 찾아 만났으니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 마음입니다. 바로 가엾이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이런 마음을 지녀야 비로소 주님을 닮은 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엾은 마음에 손을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는 깨끗하게 치유됩니다. 주님의 1.가엾이 여기는 마음, 2.따뜻한 스킨쉽, 3.능력의 말씀이 삼박자가 되어 나병환자의 믿음과 만나 일어난 치유의 기적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주님은 침묵을 당부했지만 치유받은 나병환자는 이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니 저절로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나병을 통해 주님을 만나 치유받았으니 나병 역시 전화위복의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나병이 없었다면 그 병자는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며 삶도 깊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주님은 대중의 인기의 중심에 서기를 원치 않았기에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십니다만 그래도 사람들은 그분께 모여들으니 새삼 예수님은 우리 모든 병든 이들의 삶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눈만 열리면 바로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주님을 만나 치유받는 우리들이요 저절로 나오는 다음 감격의 고백일 것입니다.
“자리찾지도
자리탓하지도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내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바라보며
하늘 사랑 송이송이 꽃피어내면
바로 거기가 꽃자리 하늘나라이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상 이야기가 깊은 충격과 더불어 참 귀한 가르침과 깨달음을 줍니다. 필리스티아인들에 참패한 이스라엘은 보병 삼만이 쓰려졌고,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으니, 엘리 아들들의 죄로 인한 업보요 그대로 하느님의 엄중한 심판입니다. 탓할 것은 이스라엘 자신들이요 하느님이 아님을 처절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하여 내적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하느님의 계약 궤도 무력함을 깨닫습니다. 안으로부터 부패하여 무너지면 하느님은 물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아마도 이런 패전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하느님을 떠나 부패했던 삶에 깊은 회개가 뒤따랐을 것입니다. 주님의 참된 치유의 구원은 회개와 더불어 시작됨을 봅니다. 복음의 나병환자도 이미 주님을 찾았을 때 회개와 믿음으로 준비된 깨끗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를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어, 오늘 지금 여기서 꽃자리 하늘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교회의 성사(聖事)로 양육(養育)되는 우리 믿는 이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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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기도>
저와 늘 함께하시는
당신께서는
하지 못하시는 것이
없으시기에
그 무엇이든
제가
당신께 바라는 것을
하실 수 있음을 아오나
다만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제게서 이루어주시어
제가
당신께서
하고자 하시는 바를
오롯이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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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1.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치유를 원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에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에서는 한 사람이 나병에 걸렸는지를
사제가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또한 나병이 나았는지도
사제가 판단합니다.
그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제에게 보내십니다.
이것은 그가 다시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는
가장 합법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자신이 치유된 것이 너무 기쁘고 신기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일텐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려는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을
모든 사람이 좋게 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축하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것처럼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믿기 보다는
왜 그에게만 좋은 일이 생겼냐고
질투하기도 합니다.
그 질투는 더 나아가
그 좋은 일을 해 준 사람을 미워하는 것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칭찬을 듣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좋은 일을 하고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듣는 경우가
적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좋게 보게 하기 위해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드러내기 위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치유가 전해지면서
사람들의 이목은 예수라는 사람에 집중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보다는
질투나 미움으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긴 좋은 일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느님에게서 왔다고 생각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질투나 미움보다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하느님과의 관계에
더 집중할 것입니다.
이것이 치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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