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동 음악다방과 DJ 계보] “경남상고 다닐 때 응원 부장을 했어요. 또 방송반 일을 하다 보니까 방송에도 익숙했고, 음악도 좋아하고요. 저는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2세다 보니까 친척도 별로 없어서 사람 사귀는 게 취미가 된 거죠. 군대에서도 군 방송 요원을 했어요. 군 제대 후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게 본업이 된 거죠.” 피난민의 아들인 김영수 선생은 어쩌면 약점으로도 작용할 수 있었던 자신의 커리어를 외향적인 성격으로 외려 장점이 되게 했다. 외로웠기에 더 적극적으로 친구를 사귀었고, 표준어를 구사하는 이방인이었기에 일찍부터 방송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생길의 선택에는 항상 음악이 있었다. “당시 ‘무아’ 음악실이 부산에서 제일 유명했고, 거기에 백형두, 배경모, 이영철, 강동진, 세미[본명 유문규], 지명길 등이 있었는데, 이분들이 부산 DJ의 주류였어요. 저는 그 중에 주로 강동진이라는 분께 영향을 받았는데, DJ이기도 했으나 MC를 주로 했지요. 그때 광복동 일원의 ‘심지 다방’, ‘왕 다방’, ‘중앙 다방’, ‘아카데미 음악실’ 등이 부산 DJ들의 본산이자 팝송 전파의 첨병 역할을 했었지요.” 김영수 선생이 그려 보이는 광복동 음악다방과 DJ의 계보다. 훗날 강동진과 배경모는 MBC 피디가 되었고, 김영수 선생은 ‘별들의 고향’에 있다가 MBC DJ 겸 리포터, MC, 시사 프로그램 앵커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으니, 음악뿐 아니라 인생길도 DJ 선배들을 따른 셈이다. ‘무아’와 ‘별들의 고향’은 1970년대~1980년대 부산의 청년 문화를 견인하는 쌍두마차의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둘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는데, ‘무아’는 전문 DJ들이 팝송을 소개하는 음악 감상실이었던 반면, ‘별들의 고향’은 포크(folk) 가수들의 연주와 노래를 술을 마시면서 즐기는 펍 레스토랑이었다. 부산은 물론, 서울이나 타지에서 부산을 찾는 젊은이들도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무아’, 생맥주 마시면서 젊음의 낭만을 구가하려면 ‘별들의 고향’으로 각각 향했다. “‘무아’와 ‘별들의 고향’은 다르지요. ‘무아’는 음악 감상실이고, 여기[별들의 고향]는 술집이고. ‘무아’ 음악실은 입장료를 내고, 차는 따로 사먹어야 돼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서 3시간이든, 4시간이든, 아니면 10시간이든……. 리포트 쓰기를 음악실에 가서 한다 이거죠. 내부를 극장식으로 해놨어요. 반면에 ‘별들의 고향’은 무대가 있고, 조명이 있고, 음향도 최고 성능의 시스템을 갖춰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놨죠.” ‘무아’는 광복동 입구, 지금의 용두산을 오르는 계단 쪽에 있었는데, 1층은 ‘수 다방’, 3층은 당구장인 건물의 2층에 있었다. ‘별들의 고향’보다 일찍, 1975년경 문을 연 ‘무아’는 팝과 클래식을 모두 취급했지만, 젊은 층이 고객의 다수인만큼 팝을 주로 틀었고, 클래식은 늦은 오후 1~2시간 들려주는 정도였다. 실내조명을 어둡게 하고 대학 강의실용 책상과 의자를 정면 스피커를 향해 줄 세워 놓은, 흡사 교실과 같은 분위기였다. 음악 감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 놓은 이러한 류의 음악 감상실에서는 어둠 속에서 연인의 손이라도 잡거나 떠들다가 음악 들을 자격이 없다고 추방당하는 일도 간혹 있었다고 하니, 모든 것이 편하고 빠르기만 한 현대의 정서로는 정말 먼 나라 얘기 같기만 하다. 반면, ‘별들의 고향’과 같은 펍 레스토랑은 ‘술’이라는 매개체로 인해 보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