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맹호 자서전 책, 박맹호, 민음사, 2012, 3-22.
1. 용의 연못 1933-1952년
비룡소
날이 풀리고 햇볕이 좋은 날 모처럼 비룡소에 다녀왔다. 이제 봄이 시작되려는가 싶다.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생각하고 새삼스럽게 태자리를 돌아보는 일은 아득하다. 비룡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옛날만큼 수량은 풍부하지 못했다. 이무기가 날아오른 못이라는 작명인데, 청소산 아래 깊은 소를 이르는 고유 명사이다. 내가 태어난 충북 보은군 보은읍 장신2리를 지칭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나는 비룡소를 300년 넘도록 지켜 온 초가에서 1933년 12월 31일 태어났다. 호적에는 1934년 1월 4일생으로 기록돼 있지만 음력 계유년 갑자월 신미일(11월 15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보면 1933년 마지막 날에 태어난 게 맞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새해 관공서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가 1월 4일쯤 출생 신고를 하면서 신고일을 생일로 기재한 것 같다.
내가 태어난 세 칸 초가집은 최근 (2010년 9월 3일) 충청북도민속자료 제18호로 지정됐을 정도로 오래된 집이다. 나중에 이 집은 그대로 둔 채 옆쪽에 따로 기와집 세 채를 지어 살았다. 1990년대 중반 보은에 집중 호우가 내려 저수지 둑이 터진 적이 있다. 그로 인해 초가는 물론 기와집까지 물에 반쯤 잠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이 빠진 뒤 살펴보니 기와집 두 채는 허물 수밖에 없는 상태였지만 정작 초가집은 멀쩡했다. 오랜 세월을 버텨 온 뒷심이 새삼 놀라웠다.
저수지 둑이 터지는 것 같은 사달이 아니라면 비룡소의 범람은 축복이었다. 비룡소에서 넘쳐 난 물이 집 앞 너른 논밭을 찰랑찰랑 채우고 담벼락 아래까지 흘러들곤 했다. 마루에 서서 내려다보면 사방이 바다처럼 보였다. 장관이었다. 그런 해에는 어김없이 풍년이 들었다. 나일 강의 범람 수위를 재는 기록관이 기적의 수치까지 올라가는 수위를 관찰하고 기쁨에 들떠서 춤을 추며 왕에게 보고하러 달려가는 소설 『람세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나일강의 범람이 주변 경작지를 기름지게 했다는데, 비룡소의 범람도 아마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비룡소를 떠올리면 늘 아늑하고 넉넉한 느낌이다. 비룡소에서 처음 수영을 배웠다. 그곳은 옛날 조무래기들의 수영장이요 천렴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은 제방이 버티고 있지만 당시에는 모래와 자갈이 널려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예전에는 비룡소에 이르는 하천가의 둑이 낮아서 물이 쉽게 범람했다. 낮은 둑 위로 나란히 열을 지어 선 대추나무들은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특히 가을 풍경이 압권이었는데, 길게 늘어선 대추나무에 매달린 대추가 일제히 붉게 물들 때면 황금 들판과 어우러져 황홀한 색채의 향연이 펼쳐졌다. 보은은 예로부터 대추가 유명해서 대추 농사가 풍년 들어야 큰아기 시집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대추나무를 없애고 수리 조합에서 하천 위쪽에 보를 쌓아 수량이 줄어들면서부터 동네가 삭막해진 것 같다. 뒷산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서고, 앞쪽으로 줄지어 선 대추나무와 텃논에 황금 이삭이 가득한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넉넉하고 평화롭다.
비룡소 집 마루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눈앞으로 후평 들녘이 펼쳐졌다. 왼쪽으로는 청소산 너머 금적산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멀리 속리산이 숨어 있다. 청소산은 비룡소 쪽으로 머리를 두고 길게 드러누운 용의 형상인데, 나는 그 용의 허리를 넘어 에미뜰을 건너 삼산소학교에 다녔다. 겨울이면 바람이 살을 에는 것 같다고 하여 ‘에미뜰’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차가운 바람이 부는 그 벌판을 지나 일단 청소산 고갯길만 넘어서면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세상 모든 풍파로부터 보호받는 듯한 아늑함이 있었다.
풍수지리학자로 이름이 높은 최창조 교수가 내가 태어난 비룡소 집에 풍수 연구소를 차리고 제자들과 2년 정도 기거하면서 연구를 한 적이 있다. 최 교수는 ‘비룡소’가 용이 승천하는 연못이라는 지명 자체도 대단히 의미심장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곳에 가면 마음이 굉장히 편안하다고 했다. 그는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는 곳이야말로 명당의 기본 조건이라는 지론을 지니고 있다. 또한 마을 뒤쪽으로는 산세가 부드럽고 마을 앞쪽으로는 수량 변화가 큰 개천이 흐르는 덕분에 비룡소가 늘 마르지 않으니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을 충족시키는 곳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민음사 출판 그룹의 아동 청소년 전문 출판사를 만들 때 그 이름을 비룡소로 정했다. ‘비룡소’가 성장해 감에 따라 이제 비룡소라는 보은의 작은 마을은 전국 단위 혹은 글로벌 차원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셈이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후일 비룡소를 위한 기념사업을 해 볼 생각이 있다.
비룡소 고갯마루에는 1937년 보은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이 마을 출신 효자 은천 박영권(朴永權) 공의 효행비각이 서 있다. 은천공은 내 조부이시다. 청소산 절벽의 소나무 숲에는 1966년 은천공의 행실을 이어 가자는 뜻으로 ‘성미정(成美亭)’도 지었다. 선인들이 이룩한 미풍양속을 이어 가려는 마을 사람들의 장한 뜻이 서린 누각이다. 성미정 누각에 올라 비룡소와 후평 들녘을 굽어보며 추녀 끝에 걸린 현판 「성미정기」를 읽노라면, 비룡소의 풍광과 이 마을의 기품을 자연스럽게 체감할 수 있다.
정자가 송림 사이에 있어 환경이 매우 호화찬란하니 운천이 그 아래로 빗겨 흐르고 비룡소 마을이 그 곁에 즐비하고 남으로는 금적산이 솟아 있고 동으로 삼년성이 높았는데 멀리 속리산의 기운을 끌어당기고 구부리면 후평의 풍광을 즐길 수 있으며 또한 기와집들이 즐비하고 사람과 차가 복잡하니 시내가 번화함이요 모든 곡식이 어우러져 푸르고 닭과 개 소리가 서로 들리니 농촌의 넉넉한 풍경이로다. 이미 풍광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고 인물의 왕성함도 갖추었으니 아담한 정자가 이 가운데 적합하도다.
내 아버지 휘 기종은 선대인 조부 휘 영권의 효행각을 성미산 자락에 세웠다. 이어 성미산 전망 좋은 자리에는 성미정을 세워 비룡소 마을의 정신적 표상으로 삼고자 했다. 「성미정기」의 나머지 부분에 나오지만, 부친은 매년 4월, 조부의 생신날에 맞추어 마을 사람을 초청해 성미정에서 잔치를 벌였다. 나도 출향 전까지는 매년 이 시점이면 어른들 틈에 끼어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누항에 매인 몸을 답답해하고 외지의 화려한 삶을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흔히 그러하듯, 당시에 나는 이 행사가 번거롭고 귀찮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마 그런 마음에는 부친에 대한 일종의 작은 반감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고향 보은에서 정미업과 운수업을 크게 일으키고 건축업에까지 진출했던 부친은 불과 스무 살에 보은군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성공한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사업가로만 일관했다면 더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겠지만, 부친은 평생 정치에 뜻을 두어 국회 의원 선거 때만 되면 모아 놓은 돈을 모두 쏟아부어 거의 빈털터리가 되다시피 하곤 했다. 하지만 빈 곳간을 금방 다시 채우는 능력 또한 출중한 분이셨다. 게다가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까지 낭랑하고 커서 아버지의 호령은 늘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특히 내가 그랬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부친의 삶을 거부하고 그분 곁을 떠나려했지 한 번도 아버지에게 순응하거나 손을 내민 적이 없다. 부친은 내가 당신 일을 이어받아 사업체도 꾸리고 정치판에도 뛰어들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나는 한 나라의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자부심으로 부친의 바람과는 전혀 딴판인 출판에 매진했다. 부친은 나를 볼 때마다 “그까짓 책들 파지로 갖다 팔면 몇 푼이나 나오겠냐!”하고 힐난하시곤 했다. 그럴수록 나는 출판에 더 열심히 매달렸다. 말을 들을 때는 늘 서러웠지만, 요즈음에 와서는 어쩌면 아버지의 그런 냉대야말로 나를 키운 힘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부친이 온정적으로 나를 대했더라면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께 손을 벌렸을 테고, 그랬다면 다른 일을 하기 쉬웠지 오늘날의 민음사를 키워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정확히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부친은 결과적으로 나를 벼랑 끝에서 밀어내며 훈련시키는 사자 새끼로 키우신 셈이다.
오랜만에 비룡소에 들러, 부친이 영면하고 계신 금굴리 산소를 둘러보았다. 나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고은 시인이 썼던 비문이 보인다. 한 시절 '보은의 왕'으로 군림했지만, 이제 말없이 보은 땅을 굽어보고만 있는 부친의 행장은 이렇게 새겨졌다.
공의 휘는 기종(일명 창근, 정흠) 호는 용운이며 본관은 밀양이요 신라 왕의 후예이다. 보은군 보은면 장신리 비룡소에서 신해 6월 17일에 출생하여 속리면 장안 관선정 학사에서 한문을 배웠다. 한학의 대가 임창순 공과는 동문으로 실사구시의 학문을 좇았다. 학문을 닦은 후에는 기업에 투신하여 대동정미공장을 창건, 국가 양곡의 도정 생산 그리고 유통업과 운수 사업 등을 경영하면서 지역사회 선각자로서의 웅지를 십분 발휘하였다. (중략) 그 후 공이 제5대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위민 봉사, 국리민복에 헌신함은 물론 역대 정권 하에서는 초지일관 야당 지도자로 민주화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소년기에 나는 대체로 소극적인 편이었다. 약간 우울한 정조가 지배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촌이나 삼촌들을 포함해 내 주위에는 동갑내기들이 많았다. 그들과 어울릴 때 내가 제일 소극적이었다. 매사에 먼저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방에만 틀어박힌 건 아니었다. 또래들과 제기차기도 하고, 음력설에는 쥐불놀이에 참여했던 기억도 난다.
할머니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스칼렛 오하라 같은, 생명력이 아주 강한 분이었다. 자식을 열 명 넘게 낳았지만 몇 살아남진 못했다. 여장부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운이 좋은 편이었다. 소를 끌고 직접 연자방아를 돌리셨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몇 달 앞서 유복자를 낳으셨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당신의 막내 동생이 태어난 것이었고, 나에게는 동갑내기 삼촌이 탄생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일찍 결혼해 스무 살에 나를 낳으셨으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아버지는 열세 살 때 다섯 살 연상의 어머니와 결혼했고, 내 위로 누님 둘을 보셨던 터였다. 할머니는 젖먹이 아들과 손자인 나를 함께 키웠다. 할머니가 자신이 낳은 아들보다 손자인 나에게 더 신경을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젊은 나이에 나를 낳고 대갓집 살림 하랴, 시어머니 섬기랴, 어린 아들에게 따로 정을 쏟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동갑내기 삼촌과는 형제처럼 자랐다. 삼촌은 굉장히 순했다. 생물학적으로는 동갑내기여도 서열을 따져 어른 대접을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테지만 실상 그럴 일은 없었다. 내가 먼저 그를 삼촌으로 정중히 대했다. 아버지도 막내아우를 평생 돌보았고,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삼촌을 애지중지하셨다. 하지만 삼촌은 그렇게 대접받는 데 익숙했던 탓인지 평생 독립심을 키우지 못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내가 그를 돌보았다.
나는 대체로 조용하고 사색적이었다. 왜 아이답게 활달하지 못했는지 돌아보면 홀로 숨어서 풀피리를 불던 어머니와 강력한 카리스마로 군림했던 아버지가 그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세 살 터울의 동생 상호가 태어날 무렵부터 둘째 부인을 들여 보은 읍내에서 살았다. 기억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래 아버지와는 같은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비룡소 집에 가끔 다녀가는 손님 같은 존재였다. 명절이나 제사 때, 혹은 마을 잔치를 벌일 일이 있을 때면 아버지는 보은 읍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건너오셨다. 그때마다 비룡소 집은 분주해졌다. 아버지의 호령을 배경으로 일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버지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아버지는 내 머릿속 한구석에 강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는 분으로 각인되어 있다. 돌이켜보면 나의 출판 외길은 내면에서는 그런 아버지와의 전쟁이었다.
어머니가 불던 풀피리 소리는 애를 끊는 것처럼 슬펐다. 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한 불평을 내색한 적이 없다. 오히려 지극하게 아버지를 공대했고 자식에게는 물론 주변 사람에게도 신세 한탄을 하는 분이 아니었다. 끝없이 참는 전형적인 인종의 여인이었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낸 것이 호드기 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나이에도 그 피리 소리를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아버지의 카리스마에 아버지의 동생들도 전부 기가 죽어 살았다. 열한 명의 형제자매들 중 3남 1녀만 살아남았는데, 아버지는 부모 대신 여동생을 거두어 시집보내고, 남동생들과 그 가솔까지 모두 먹여 살렸다. 이미 말했지만 아버지는 스무 살 무렵에 벌써 보은군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능력 있는 사업가였다. 보은 읍내 중심가에 2000평이 넘은 땅을 사서 커다랗게 정미소를 차렸다. 그곳이 ‘보은의 왕’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나를 못마땅해하시며 나무라던 기억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 “야, 뭘 좀 제대로 해 봐라!”
그 시절 어른들은 대개가 칭찬보다는 나무람에 익숙한 세대였지만, 아버지는 특히 숨 쉴 구멍을 주지 않고 온 식구를 몰아붙이는 스타일이었다. 식구들이 모두 아버지를 겁냈다. 아버지는 사업과 연관된 공무원과 지역 인사 들을 대거 불러 비룡소에서 잔치를 벌이곤 했다. 그때 온 식구가 닦달을 당하던 기억이 머릿속에 각인돼 나는 판사를 운영하면서도 사람들을 불러 모아 행사를 벌이는 걸 싫어했다. 민음사에서 운영하는 ‘오늘의 작가상’이나 ‘김수영 문학상’ 시상식도 여느 회사들처럼 따로 장소를 빌려 거창하게 열지 않고 내 방에서 그냥 조촐하게 치르는 것이다. 그게 회사의 전통이 되어 버려 지금까지 남들에게 내세울 대규모 행사나 ‘ㅇㅇ 년사’ 등 겉치레뿐인 기념 서적보다는 차라리 그 자금으로 독서 문화의 진흥에 필요한 내실있는 책을 출간하면서 반백 년 회사를 운영해 왔다. 내 회갑을 기념해 출간되어 양서 읽기 붐을 일으킨 책, 어떻게 읽을 것인가나 민음사 30주년 기념 서적으로 당시 지성계를 떠들썩하게 한 『103인의 현대사상』이 그렇게 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당대의 일급 지식인들을 한데 불러서 대화의 향연을 펼친 끝에 인문 지식의 대중화를 이룩하고 이후 ‘대담 출판’이라는 출판의 한 양식으로 발전한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역시 계간 《세계의 문학》 100호 기념 서적이었다.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독대하는 경우는 읍내 정미소 집으로 등록금을 타러 갈 때였다. 아버지는 한학만 하신 분이라서 등록금 시스템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뭔 돈이 필요해? 천천히 내 천천히!”
보은의 최고 부잣집 장남이라는 내가 제 날짜에 등록금을 내 본 적이 없었다. 늘 추가 등록을 하곤 했다. 아버지는 원래 한 번에 돈을 내주는 스타일이 아니셨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은 집에 살면서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보은 읍내에서 함께 살던 둘째 부인은 평생 애를 낳으려고 노력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여인의 눈치를 보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평생 아버지가 나를 냉정하게 대했던 게 오늘날의 나를 만들어 낸 근원적인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이야기가 많지만 다시 유소년기로 돌아간다.
어머니는 아무도 보지 않는 뒤란에 숨어서 호드기를 불었다.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당신만의 고통을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호드기로 발산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애간장을 녹이던 호드기 가락은 젊은 어머니의 가슴속 떨림판이 내는 소리였던 것 같다. 어머니가 호드기를 불면 내 마음도 처량해졌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머니에게 장남인 나는 유일한 의지처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연초에 신수를 보고 나서는 만날 나에게 “너는 큰 사람이 된다더라.” 하고 격려하셨다. 아버지와는 반대로 가없는 격려와 믿음을 보여 주었던 어머니의 태도는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1990년 1월 고향에 내려가 제사를 모시고 귀경하던 차 안에서 제수씨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나 그만 갈란다!”였다. 그 한마디 남기곤 서둘러 가 버리셨다. 환갑 가까이 된 그때까지도 나는 철이 없었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영원히 사는 존재인 줄 알았다. 아버지의 냉정한 성격을 싫어하면서도 닮아 버린 것인지, 어머니를 따뜻하게 모시지 못한 것 같아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아버지로 인해 생긴 설움을 내가 조금이라도 보상해 드렸어야 했는데 애석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해 뒤에 아버지도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비교적 편안하게 영면하셨지만, 아버지는 폐암에 걸려 여섯 달 동안 끔찍하게 고생하다 가셨다. 줄담배를 피우면서도 주변에서 우려하면 당신은 워낙 건강하니까 담배 정도는 소화할 수 있다고, 내 걱정을 말라고 큰소리쳤던 분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떨어져 살았던 부부였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홀로 비룡소 집을 지켰다. 두 분이 돌아가신 뒤에야 분묘를 하나로 만들어 내가 합방을 시켜 드렸다.
해방, 우리말을 되찾다
삼산소학교 시절, 4학년인지 5학년인지 기억이 선명치 않지만, 소년 작문 대회가 있었다. 전국 규모의 백일장 같은 것이었는데 나는 이 경연에서 일본어로 글을 써서 입선을 했다. 스스로 크게 기뻐하거나 주변에서 과분한 칭찬을 해 준 건 아니었지만, 그 수상이 내 안에 문학과 출판을 지향하는 씨앗으로 뿌려져 서서히 발아되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중학교 시절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이 수상이 촉매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리기도 했고 특별한 정보가 없던 터라서 일본이 패망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그날 오전에도 나와 동무들은 여느 때처럼 학교에서 조선어를 쓴다고 주의를 받곤 했다. 낮 12시 무렵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더니 라디오를 들려주었다. 일본 천황이 힘없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제국 신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이었다. 무슨 의미인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상태여서 잘 몰랐지만, 곧 여기저기서 조선 독립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은 어린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때는 잘 몰랐고 일본어로 글을 써 곧잘 칭찬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나에게 해방은 일본 말과 글에서 해방돼 내 나라 글과 말을 찾았다는 의미가 더 컸다. 사실 나는 어정쩡한 세대에 속했다. 해방이 조금 늦어졌으면 손창섭이나 장용학 같은 소설가들처럼 일본어가 사고에 더 익숙했을 것이고, 조금 늦게 태어났더라면 이청준이나 이문열 같은 작가들처럼 한글세대에 속했을 것이다. 소학교 교과서를 통해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배웠지만, 일본어로 사고하고 글을 쓰는 것은 늘 강요당했기 때문에 어딘가 불편했다.
그나마 빨리 해방이 되어 한글로 읽고 쓰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젊을 때에는 제대로 된 책이 거의 일본어 책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일본에서 출판된 책을 읽었고 바깥 세계에 대한 정보 갈증을 해소하려고 일본 신문을 구독해 읽던 습관이 아직도 붙어 있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는 투지가 불타오르곤 했다.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 한글로 고급스러운 서적도 만들고 자유롭게 정보도 주고받는 세상이 오기를, 그런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낼 것을 수없이 다짐하곤 했다. 내가 출판에 헌신하게 된 한 계기가 그 갈피에 숨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세로쓰기를 기본으로 하는 일본어의 특성 때문에 일본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시대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거의 모든 사업이 화면 위에서 이루어질 것을 감안할 때 우리가 가로와 세로를 자유롭게 전환해 쓸 수 있는 한글을 모국어로 쓰게 된 것은 그 말을 끌어안고 평생 책을 만들어 온 나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도 정말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나는 삼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청주사범학교에 진학했다. 사범학교는 지금 학제로 치자면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합쳐진 형태로 6년제였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취업이 큰 문제여서 사범학교는 청주중학교보다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비룡소를 떠나 청주시 문화동 이모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이모부는 점잖고 순한 분이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분은 전쟁 때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강요를 못 이겨 엉겁결에 보도연맹 가입 문서에 도장 한번 잘못 찍었다가 그리된 것이다.
다행히 이모는 홀로 된 처지에서 네 형제를 적수공권으로 대학 교육까지 시켰을 정도로 유능하고 영리한 분이었다. 어머니와도 의가 좋았다. 청주에서 어머니 대신 살뜰하게 대해 주는 이모 집에서 학교를 다녀서 비룡소를 떠났다곤 하지만 외지살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모는 물론 사촌들도 '비룡소 장손'을 잘 대접해 주었다. 어머니는 비룡소에서 넓은 농토와 큰살림을 관리하시느라 청주에 한번 다녀가실 짬이 없었다. 설혹 짬이 난다 하더라도 “농사짓는 사람이 어디를 나가느냐!”라는 아버지의 호령 때문에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원효로 양산박’ 시절의 책들
청주사범을 1년 남짓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가 경복중학교로 옮겼다. 통이 크고 강단이 넘치는 아버지의 다그침 때문이었다. 늘 야망이 컸던 아버지는 큰아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는 소박한 삶이 마뜩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평생 정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으셨고, 손을 대는 사업마다 성공시켜 내로라하는 사업가의 길을 걸으셨던 분이고 보면 이해 못 할 바도 없다. 아버지는 내심 큰아들이 당신 사업을 이어 크게 벌이기를 바라셨을 게다. 그러나 그 뜻과는 달리 이 결정이 나를 본격적으로 책의 길로 이끌어 지금까지 평생 출판 외길을 걷게 만들었다. 서울에 와서 비로소 문학을 제대로 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울 생활은 원효로에서 시작됐다. 당시 아버지는 서울에서도 사업을 벌여 동광건설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영어를 잘하는 하와이 출신 한국 여자와 살고 있었다. 원효로에는 또 다른 사업체인 비누 공장이 있었다. 원효로 집은 둘째 부인이 관리했는데, 보은에서 올라온 수많은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사촌, 오촌까지 그곳에 모두 모여들었다. 보은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면 으레 그 집에 들러 기식했고, 그래서 나는 따로 공부방 하나 차지할 수조차 없었다. 늘 청운의 꿈을 품은 사람들로 붐비는 수호지』의 양산박 같은 곳이었다. 시장 바닥 여인숙처럼 떠들썩했던 그곳 생활은 삭막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터라 급우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다.
전차 타고 학교를 오가는 중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도 몸이 약하긴 하지만 당시에는 젊은데도 병약한 체질이어서 언제쯤 죽게 될까 걱정하곤 했다. 집에 와도 삭막하고 학교에 가도 정붙일 친구도 없고, 밖으로 나서도 전차 지나간 자리에 풀풀 먼지만 날리는 풍경이었다. 전차가 지나갈 때마다 바퀴 소리가 묘하게 쓸쓸함을 부추겼다. 불행하다기보다는 외롭다는 느낌이 더 컸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성장기에 내 인생의 멘토가 없었다는 사실이 뼈아프다. 진로나 학교를 선택하는 데 주변에서 특별히 나에게 영향을 준 인물은 없었다. 인사성이나 사교성도 없어서 학교에 가도 선생님들이나 친구들과도 가깝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책과 음악이 나의 유일한 멘토였던 셈이다.
로맹 롤랑의 『베토벤의 생애』나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같은 책에서 내 자화상을 발견했다. 『베토벤의 생애』는 그중 희망을 품게 만든 책이었다. 귀가 안 들리는 상태에서도 환희의 합창을 만들어 낸 베토벤의 불굴의 의지가 나를 휘감았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서머싯 몸의 대표작이자 자전적인 소설로 역시 많은 감동을 주었다. 폐쇄적인 성격으로 평생 제대로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우울한남자 주인공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밤으로의 긴 여로』, 『적과 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외국 문학 작품에도 심취했다.
김내성의 『진주탑』이나 펄 벅의 『대지』 등도 이때 읽은 책들이다. 『진주탑』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번안한 작품인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우리말로 완역되지 않은 상태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기억난다.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불굴의 정신은 당시 외로움에 갈피를 잃었던 나에게 좋은 채찍질이 되었고, 나중에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많이 들려주었던 내용이다. 조지 오웰의 『1984』는 지금까지도 내 독서 편력에서 으뜸으로 꼽는 책이다. 한 인간이 전체주의에 저항하다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전체주의가 얼마나 끔찍하고 인간과 세상을 희화시키는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고도 정보 사회를 구가하는 지금도 이 작품은 인간의 자유와 사랑의 본질에 대해 여전히 일깨운다. 이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다.
서양 문학에서 사람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동양 작품에서는 삶의 방법을 배웠다. 경복중학교 시절 『임꺽정』과 『수호지』 그리고 『삼국지』에 푹 빠져 살았다. 학교 오가는 길목의 삼각지 지하도 건너 로터리에 ‘대동서점’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규모의그 서점이 바로 내게 위안과 희망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맨 처음 구입해 읽은 책이 『삼국지』였고 이어 『수호지』에 빠져들었다.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현실에서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기쁨을 얻었다. 삶이 이렇게나 재미있고 살아 볼 만한 것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접한 기분이었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은 1928년부터 10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돼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대하 역사 소설이다. 연재가 끝난 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네 권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지만 내가 읽은 것은 1948년에 여섯 권으로 완간된 을유문화사판이었다. 신간이 나올 때마다 대동서점에 달려가서 샀다. 임꺽정의 의형제 중 박유복의 표창 던지는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는데, 그가 활약하는 대목이 가장 통쾌했던 기억이 난다.
『삼국지』는 박태원이 번역하다가 다 끝내지 못하고 월북해서 나중에 외솔 최현배의 큰아들인 최영해 정음사 사장 이름으로 나왔다. 『삼국지』는, 내 생각에, 역사소설이라기보다 ‘인간학’에 가깝다.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책이라는 말이다. 이때 읽은 후 내 인생에서 늘 교과서처럼 존재하며 철학과 행동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면서, 난관에 부닥쳤을 때 옛 선인들은 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수호지』는 세상에 대해 항거하는 내용이 재미있어서 몰입했다. 후일 출판사 이름을 ‘백성의 소리’라는 뜻의 ‘민음사(民音社)’로 지은 것도 『수호지』의 영향이 컸다. 본래 ‘백성의 소리’라고 하면 민성사(民聲社)로 하는 게 한문 문법에 맞지만, 당시 그런 이름의 출판사가 이미 존재했기에 동양에서 악부(樂府)가 백성들의 다양한 노래를 채록하면서 그대로 하지 않고 고급한 시의 양식으로 승화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세상의 낮은 목소리를 담되 세계에 내놓을 만큼 우아하고 품위 있게 해 보자는 뜻으로 과감하게 민음사로 지은 것이다. 서양 문학을 접하다가 굳이 동양 쪽으로 경도된 이유는 따로 없다. 너무 재미있어서 그냥 몰입한 것이다.
월 듀런트의 『철학 이야기』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준 첫 번째 인문학 책이다. 서양 철학사를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게 쓴 책인데 굉장히 재미있었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도 그때 읽고 뇌리에 깊이 각인된 책이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친구와 이웃을 늘 칭찬하라는 말이 깊이 와 닿았다. 이 책의 핵심은 “남한테 공손하고 남을 험담하지 말고 늘 남을 칭찬하라.”는 것인데, 사실 모든 사람이 이를 실천하기만 하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하우가 모두 담긴 인간 경영의 바이블처럼 다가왔다. 큰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도 꼭 읽으라고 추천했던 책이다.
이 시절에 읽었던 책들은 내 삶의 철학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어린 시절의 독서는 정말 중요하다. 독서야말로 인격 형성의 기초 공장 역할을 한다. 똑같은 책이라도 어려서 읽을 때 다르고 청년, 중년, 노년에 읽을 때 다른데, 이것이 책의 고유한 능력일 것이다. 나는 책을 통해 만들어졌고, 따라서 책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