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관한 시모음 28)
눈 이야기 /고 명
1
첫눈 오시는 날 둥둥둥둥 하늘북이 울려 그리움 그리움의 설렁줄이 울려 생각날 듯 말 듯 누군가 목소리 보일 듯 들릴 듯 어쩌면 뒤란 꽃그늘 은밀한 약속이 있는 것만 같아 꼭 있을 것만 같아 하루 종일 수첩을 뒤진다 수첩 속에서 방랑자처럼 천지를 떠돌아 헤매ㄴ······다
2
저녁 뉴스 시간 영동에 폭설이 내렸다고 성탄카드처럼 설레인다 은세계의 산맥이 굽이치며 술렁이며 방안에 들어오는데 들어와 슬로우비디오로 사슴 눈망울도 그렁그렁 풀어 놓는데 언제던가 동백처럼 가슴 붉던 날 가로등 불빛에 매화 눈송이 피고 지던 날 내 언 창문을 두드리던 그 사람 그 눈사람의
3
오늘은 그 어느 눈길을 헤쳐 왔는가 봄눈 내리는 내 수첩에서 저물도록 자취조차 없더니 수런수런 피어 오르고 있는가 산수유 잃어버린 그 시간들처럼 매화꽃 봄눈이 내리고 있는가 한겨울 추위 다 잠재우고 있는가
흰 눈이 내려요 /원영애
흰 눈이 내려요
하늘 가득 당신의 말씀
부드러운 가슴이 열려요
면사포 쓰던 날 날리는 꽃처럼
온통 사랑에 눈빛
내 진작 그렇게 오실 줄 알았어요
나는 날마다 하얀 세상에
작은 씨앗
행복으로 발아되는 꿈을 묻어요.
눈 속의 나무 /권도중
눈이 온다 한없이
꽃잎 지고
나무는 행복하다
부대끼며
비바람 쓰러지지 않던 나무는
빼앗기고 추운 계절이 와서
남은 건 웅크리고 견디는 세월
칼바람 매워도
얼어죽기 전까지 견디며 한 계절
죽었다고 참으리
인간의 길에서 눈감고 이제 깊은 곳으로 가리 가서
바람 새로 불 때 그 때 눈뜨리
그런데 따뜻한 눈이 와
뿌리에 있는 희망도 행복하다
눈이 온다 꽃잎 져서
천지 수북이 쌓인다
이불처럼 솜사탕처럼 부드러워
들판으로 문 밖으로 마음껏 뛰쳐나가
눈 속에서 눈이 내린다
나무는 행복하다
눈 /김기택
바람을 타고 흰 발바닥들이 뛰어다닌다.
고양이에서 몸과 다리를 뺀 가벼움이 날아다닌다.
고양이에서 털과 이빨과 발톱을 뺀 탄력이 날아다닌다.
고양이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고양이 몸을 떠난 후에도 없어지지 않는 가벼움이
허공에다 제 몸을 마구 휘갈긴다.
얼마 전까지 고양이였다가 이제 막 고양이를 벗어던지고는
새로 입은 가벼움을 못 참겠다는 듯
반쯤 기화된 발로 허공에 발길질한다.
제 가벼움과 몸 없음과 투명함이 근질근질하다는 듯
추위 돋친 발톱으로 허공을 할퀸다.
고양이에서 다 벗어났는데도
아직 고양이를 버리지 못해 제 꼬리를 쫓아 빙글빙글 돈다.
공기조차 답답하고 가벼움조차 무거워
떨어지다 말고 어리둥절 머뭇머뭇 갸웃갸웃 서성거린다.
헤매다 돌다 마지못해
떨어진다.
사뿐,
땅에 닿자마자 발바닥들 녹는다.
녹아 동그랗게 스며드는 발자국들 찍힌다.
조금씩 지워져가는 땅바닥은 느닷없이 가벼워져서
어쩔 줄 모르다 사라지고
(땅바닥 밑에 눈 내리는 또 다른 허공이 있을 것만 같다)
고양이 흰 발바닥들만 남는다. 쌓인다.
거대한 한 마리 고양이의 흰 잔등 같은 들판 위로
몸무게가 누르는 발자국들이 찍힌다.
눈 눈 눈 /이영지
하늘의
메시지가
날아와
읽으려고
할수록
눈송이는
하야디 하얀빛을
읽으라 명령하고는 입다물다
눈
눈
눈
하늘의
명령만이 닥아와 사랑하려
할수록
수줍게도
먹으라 말해버리곤 입다물다
눈
눈
눈
눈 /박인걸
눈 내리는 들판을 바라보노라면
가슴 위로 그리움이 쌓이고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그대가
눈길로 달려 올 것만 같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하얀 눈길을 함께 걸으며
차가운 손 잡아주던 그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추억
고달픈 인생의 뒤안길에
잊고 살아 온 옛 생각들이
포근한 눈송이에 실려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있다.
오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행여나 하는 미련(未練)이
가슴 언저리를 맴돌고 있어서다.
눈 치우기 /신성호
밤새 내린눈이 발목을 잡는다
넓은 널판지로 집앞을 쓸려하니
금방 내린 눈이라서 별로 힘이 안든다
하늘이 밝아오고 햇살이 눈부신데
오던 눈은 속절없이 뻥뻥 내리고
쌓이는 눈을 다 치우려 애를 써 본다
쌓이고 쌓이던 눈은 햇살에 녹아
널판지로 밀려고 애를 써봐도
무척이나 무게가 느껴져 힘이 부친다
몇시간을 눈 치우기에 땀을 흘리고
잠시잠깐 쉬었다가 다시 나가보니
눈은 그치고 쌓였던 눈이 어느새 다 녹아
비가 왔는지 눈이 왔는지 헷갈려
헛되고 헛된 눈 치움이 깨우침이 됨이라
눈길 산행 /박태강
나무에
은백의 꽃
계곡에는 소복소복 장독대
쌓인 눈길을 걸어면
싸박 싸박
발끝의 감촉이 예민하게 살아나고
가는 곳마다
보는 곳마다
너무나 즐겁고 즐거워
마음은 즐거운데
눈이 아려 검정 안경을 쓰면
흰눈이 희검색하여 더욱 멋있다,
산정에서 보는
첩첩 겹겹히 늘어선 능선과 산
눈인가 구름인가 아득도 하다
가져간 들짐승 먹이
강냉이 알을
먹어라 곳곳이 쏟아놓고
님아
저 눈꽃을 보소
볼때 마다 다른 은백색의 꽃을 !
한기가 열기로 바뀌는
추운 겨울 눈길 산행
이 아름다움 님아 나누어 보자,
눈이 내리네. /박인걸
잔인한 바람이 광야를 스치고
무정한 태양은 허공을 헛돌았습니다.
차가운 수은주는 사슬에 매여
파스칼호로 돌아갈 꿈을 접었습니다.
눈 내리지 않는 긴 겨울은
아라비아 사막 길 보다 더 지루했고
미세먼지 자욱한 도시는
캄신바람 가득한 이집트 광야였습니다.
지루한 땅에 하얀 눈이 내리길
죽은 사람이 살아나길 바라듯 했습니다.
겨울이 가기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내 가슴까지 덮어주길 원했습니다.
사모하던 눈이 기대하던 대로
살구 꽃 잎처럼 기분 좋게 내립니다.
옛 추억들을 하나 둘 되살리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도록 내립니다.
산과 들과 나뭇가지에
소복소복 많이 쌓이길 기대합니다.
고운 풍경을 여러 장 찍어
마음 벽에 가득 걸어두고 보렵니다.
싸락눈 /이대준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
마당에 쌓이는 눈을 보면서
어찌 눈을 닮지 못했는가
언 땅에 통통 튕겨
쌓이고 쌓여서 또 다른 세상
비틀고 널브러진 것들에 대고
맨몸으로 부딪쳐 그냥
부딪쳐 나려 몸을 섞어서
어느새 하얀색 하나로
빛 발하는 대지를 보면서
어찌 눈처럼 살지 못하는가
몹시 추워 싸락눈마저 나려
세상살이 힘든 날
눈이 내리면 /이민정
진혼을 날리는 너와 속삭이며
어제를 떠나보내자 했다.
그는 내 것이 될 수 없었고
그는 내가 아니었음을
늦게 알아 버려 쓰린 속내
슬쩍 날려 보내자 했다.
밟고 가는 발 밑으로
한숨소리가 자박거리어도
슬쩍 돌아서 주자 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네 안에
나를 꼭꼭 숨기고
내일은 그를 보낼 거라 믿으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남루한 웃음으로 변명하듯
그리 걸어 버리자 했다.
어제 본 영화처럼
슬프지만 아니 슬픈 듯
그리 웃어 버리자 했다.
세상이 나를 재우려는 것처럼
미리 눈을 감아버리고
두 팔을 벌려 너를 받아
캄캄한 지하, 두려움의 소굴에
켜켜이 눌려진 사랑
그놈의 먹이로 주고
커다랗고 따뜻한 너에게
포근하고 다정한 너에게
나를 맡겨 버리자 했다.
눈이 내리면
함박눈이 내리면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다.
눈 내린 아침 /박 일
조그마한 냉기도 싫어
베란다 창문을 꼭 닫고 커텐을 내렸지요
흐느적거리던 담배 연기 잠들고
식탁 앞 의자도 잠들고
욕실에 떨어지던 윗집의 안부도 잠들고
별 수 없이 저도 잠이 들었지요
밤새 무섭고 황량한 꿈에 뒤척이다가
도망치듯 아침을 맞았지요
그 어떤 궁상도 싫어
커텐을 거두고 창문을 열었어요
어머나,
밤 사이 세상 모두가
하나의 꽃으로 피어있었지요
주차장에 그려진 각각의 네모난 선
저 멀리 빌딩과 허름한 판잣집
골프 연습장과 그 옆 공사장에 쌓인 목재들도
아무런 경계 없이
하나로 피어있는 아침 위를
노랑색 유치원 버스가
조심조심 발을 옮겨갔지요
그런 살맛나는 세상을 한 시간쯤 지켜보다가
전 지각을 했지요
참 아름다운 지각이었지요
조령산에 내리는 눈 /권순자
조령관문이 바라보이는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귀를 열어보지만 새 울음도 숨어버린 고갯마루는
눈바람만 숨 가쁘게 흩날렸다
어둠이 배어든 산 속은 저 혼자 속으로 깊어가고
눈바람은 이승을 추억할 자신의 살덩이를
산산이 부수어 흩뿌렸다
장례는 오랫동안 눈부시고 엄숙하게 치러졌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 뿌리고 뿌려
봄날 풀포기들 마시고 쑥쑥 자라라고
이승의 봄날을 미리 준비해 주는 것이라고
심연으로 가라앉는 눈바람이
어둠에 젖으며 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를 기념하고 나를 기억하라는
서늘하고도 부드러운 부탁을 드리는 것이다
눈 /이우걸
환각제 가루 같은
흰 눈이 내리고 있다.
버려진 지구의 육신을 문지르며
은밀히 감춰 두었던 어둠과도 입맞추며.
눈은 내리고 있다
일순의 현란한 위장
사람들은 말없이 창문을 닫고 있다
잠 깨면 다시 맞이할
덧없는 혁명 같은..
산동네에 오는 눈 /신경림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동네라서
눈도 제일 먼저 온다
깁고 꿰매고 때워 누더기가 된
골목과 누게막과 구멍가게 위에
눈은 쌓이고 또 쌓인다
때로는 슬레이트 지붕 밑을 기웃대고
비닐로 가린 창틀을 서성대며
남 볼세라 사랑놀음에 얼굴도 붉히지만
때와 땀에 찌든 얘기
피멍 든 노래가 제 가슴 밑에서
먹구렁이처럼 꿈틀대는 것도 눈은 안다
이 나라의 온갖 잘난 것들 모여들어
서로 찢고 발기고
마침내 저네들 발붙이고 사는
땅덩이마저 넝마로 만든
장안의 휘황한 불빛을 비웃으면서
눈은 내리고 또 내린다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동네라서
눈도 제일 오래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