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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묵상글 ( 연중 제1주간 토요일. - 넌 할 수 있단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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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넌 할 수 있단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내가 부르는 나의 사람아
넌 할 수 있단다
나를 따르렴
내가 믿는 나의 사람아
넌 할 수 있단다
나를 믿으렴
내가 바라는 나의 사람아
넌 할 수 있단다
나를 바라렴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넌 할 수 있단다
나를 사랑하렴
내가 함께하는 나의 사람아
넌 할 수 있단다
나와 함께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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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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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단순히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 가치관의 변화를 요청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르 2,16)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의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의 방식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로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저고 그처럼, 용서하라 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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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죄인을 부르러 왔다
가능한 1개월에 한 번 정도는 고해성사를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성사를 보면서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성사를 보고 나서 그 거룩해진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데 작심삼일입니다. 허물을 벗은 기쁨이 큰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자유를 얻고는 곧 옛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예수님과 깊이 만나지 못하고 그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위선을 떨면서 여전히 사랑을 받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 징수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이스라엘을 식민 통치하는 로마인들의 하청을 받아서 세금을 거두어 바치던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 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받았으며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민족적인 시각에서는 압제 세력인 로마에 빌붙어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요, 반역자입니다. 세리는 직업상 이민족인 로마인들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늘 부정한 상태에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건한 이들은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고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 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고, 더군다나 하느님과의 친교 자리를 상징하는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깨끗한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데 죄인들을 그 자리에 불렀다면, 그것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행위입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은 선택받아서 행복했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가 아니어서 행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나를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서 오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결코 주님의 부름을 받는 데는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죄인을 끌어안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의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적 환경에서 살아야 하고, 복음적인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려면, 먼저 익숙하게 앉아있던 고정된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누구를 따라나설 것인가? 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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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터넷 세상의 힘을 실감한 경험이 있습니다. 운동 중에 한 분이 핸드폰을 분실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요즘 핸드폰은 예전에 허각이 ‘천 년을 살아도 그대 사랑하는 마음뿐인 바보 였죠. 그대 핸드폰이 난 너무 부럽습니다. 지금도 니 옆에 같이 있잖아요.’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모두가 소중하게 여기는 필수품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한분이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애플에 접속해서 비밀번호를 입력하니 핸드폰의 위치가 지도 위에 깜빡거렸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밤이지만 알람을 울려주는 핸드폰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무실 복사기의 토너를 갈아야 했습니다. 저도 직원도 방법을 몰라서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신부님이 문제없다고 하면서 복사기 토너 가는 법을 검색했습니다. 친절하게도 복사기 토너를 가는 동영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영상을 보면서 쉽게 토너를 갈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직접 경험한 일입니다. 블루투스 이어폰이 잘 들리다가 한 쪽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새로 사야 하나 걱정이 컸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정말 친절하게도 해결 방법을 알려주는 글이 많았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방법대로 하니 양쪽이 모두 잘 들렸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울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사울은 종과 함께 에프라임 산악 지방을 돌아다니고, 살리사 지방도 돌아다녔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사알림 지방까지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도 없었습니다. 다시 벤야민 지방을 돌아다녔으나 역시 찾지 못하였습니다. 인터넷 검색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주면서 사울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암나귀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원수들의 손에게 구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따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죄가 되고 안 되는 것을 따지는 엄격함은 있었지만, 죄인을 이해하고 함께 받아들여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생각하는 너그러움이 부족했습니다.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누는 것은 잘하지만 세상은 다양성 안에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 살아야 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인상적인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 마귀 들린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가르치는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굳이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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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한 형제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성당에는 좋은 사람들, 착한 사람들이 다니는 줄 알았는데, 세례를 받고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성당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도 다툼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고, 죄인들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망입니다.
사실 그때 그분에게 작은 거울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그분 손에 거울을 쥐여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도 스스로 ‘선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 말 자체가 교만에서 나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선하고 저 사람은 악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어둠의 크기는 다르겠지만 우리는 하느님 앞에 모두 부족한 사람, 죄를 품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모여 기도합니다.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겸손해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들이 이루고 있는 공동체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선인이나 천사들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꽃이 피어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변화의 은총이 다가올 것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그저 죄인입니다. 그러니 주님 부디 제 손을 잡아주소서. 부디 제 굽은 허리를 잡아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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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끝입니다.
‘시작이 반입니다.’라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 말 안에는 누군가를 응원하는 힘을 담고 있습니다.
‘시작했으니, 반은 한 거야’라고 응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이 끝입니다.’라는 광고를 접했습니다.
이 광고는 마약에 대한 광고입니다.
한번 손 대면 그대로 끝이라는 내용입니다.
시작하면….
젊음도 끝, 건강도 끝, 인생도 끝, 그냥 모든것이 끝.
우리 신앙생활에도 마약 같은 것이 있을까요?
시작하면 끝인 것 말입니다.
점점 우리를 빛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점점 우리를 행복함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이제 그것을 끝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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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24년 주목하는 젊은 트랜드 중 하나가 ‘육각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어떤 대상의 여러 가지 특성을 비교 분석할 때 사용하는 육각형 이미지를 ‘헥사곤 그래프’라고 합니다. 모든 기준 축이 끝까지 꽉 차 완벽한 모습을 보이면 정육각형이 되기 때문에 육각형은 완벽이라는 의미로 종종 쓰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외모, 학력, 자산, 직업, 성격, 특기 등 모든 측면에서 흠이 없는 ‘육각형 인간’을 선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가능할까요? 올해의 트랜드라고는 하지만 모든 부분에서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그 완벽한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의 나약함과 부족함, 불완전한 모습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한 후배에게 신학생 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형은 너무 완벽해 보여서 싫어.”
가까이 하고 싶은데, 너무 완벽하게 보여서 가까이하기 힘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맞습니다. 사람들은 약간 나사 빠져 보이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 부족함을 보고서 “나도 괜찮구나.”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벽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이렇게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길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사 빠져 보이는 것 역시 괜찮습니다. 함께 살면서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완벽해 보이는 모습만을 보이려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겸손의 자세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지요.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 역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라면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사실 당시의 세리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 제국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기에 매국노였고 그래서 부도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거지들도 이들의 돈은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우월감에 가득 찬 바리사이들이 이들을 멸시하지 않았겠습니까? 이 멸시의 범주 안에 예수님까지도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나는 옳고, 나와 같지 않으면 틀렸다’라는 교만을 예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면서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주님과 함께하고 있습니까? 교만한 사람은 주님까지도 내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관심이란 곧, 나 아닌 타인에게 마음 한자리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나 아닌 타인에게 내 시간을 내어 주고, 내 삶을 조금 나눠주는 일입니다(송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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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주님을 따름의 여정
-“성소(聖召)는 선물(膳物)이자 평생 과제(課題)입니다”-
며칠전 노트북 수리후 원장 수사와 나눈 대화입니다.
“모든 답은 이 안에 있습니다.”
“컴퓨터 세계도 끝이없네요.”
“끝까지 알려할 것 없어요. 아는 만큼 살면 되요.”
새삼 버려야 할 걱정이요 욕심임을 깨닫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톨릭교회도 많이 분열되어 있다 하네요.”
“에페소공의회때는 얼마나 분열되어 있었는데요!”
심각한 분열이라 하는데 교황님의 일상이나 표정은 한결같고 평화로워보입니다. 분열의 일상화를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모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드리며 편안히 사는 모습입니다. 분열중에도 역시 내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저력입니다.
한밤중 일어나 맨먼저 확인해 보는 교황님 동향에 말씀입니다.
교황님께서 젊은이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가만히 있지마라, 위험을 감수하라. ‘위험, 쉬지 않음, 놀람’. 삶은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내주는 것이어야 한다.”
교황님께서 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너희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지 나눠라.”
세속의 선교 사제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위해서 세상안에 있어라. 그러나 세상의 것이 되지는 말라.”
89세 노령에도 쉴사이 없이 일하시는 영원한 젊음의 교황님 말씀에서도 활력이 넘칩니다. 새삼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칠줄 모르는 열정에 있음을 봅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마르코 복음과 사무엘 상권의 독서를 묵상하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 주님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침묵중에 쉴사이 없이 참 부지런히 일하시는구나! 교황님은 이런 주님을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중 내용도 잊지 못합니다. 심각하지 말고 낙천적이 될 것을 강조하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수도생활이 어렵고 힘들게 느껴질 때라도 부드럽고 편안해야 한다. 까닭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득 떠오른 어제 맑시스트회원들에 대한 교황님의 격려 말씀입니다.
“우리 아르티나사람들은 말합니다. ‘찌푸리지 마라, 뒤로 물러나지 마라.’ 다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저앉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기를 멈추지 마라.’”
얼마나 멋진 용기를 주는 말씀들인지요!
우리 모두 주님께 불림 받아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구체적 답을 말씀드렸습니다. 유다인 랍비이자 신비가인 여호수아 헷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와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불림 받았기에 무명의 존재감 없는 삶에서 이제 하나하나 하느님의 자녀로서 유명의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불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고맙고 반갑고 기쁜 일인지요! 말그대로 성소의 신비입니다. 어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주님은 오늘은 레위를 부르시니 참 분주한 일상이십니다.
주님은 길을 지나가시다가 길목에 위치한 세관에 앉아있던 세리 레위를 부르십니다. 길에서 길이신 주님을 기다리던 레위의 내적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는 선입견도 편견도, 차별도 없습니다. 맨먼저 보시는 마음속 순수한 사랑이요 갈망입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즉시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 바로 레위의 내적열망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혼자 외로이, 쓸쓸히 지내던 레위를 부르시어 당신 제자들의 식탁 공동체에 합류시킵니다. 이제 혼자가 아닌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마침내 운명이 바뀌어 이제 불림 받은 존재로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 된 레위입니다. 죄인과 세리들과 식사를 함께 하시는 것을 비판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을 주님은 다음 말씀으로 제압해 버리니 참 통쾌, 유쾌, 상쾌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다음 복음 말씀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가 잘나서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라 죄인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잘 들여다보면 모두가 병자요 죄인입니다. 얼마전 ‘요셉수도원이 아니라 요셉종합병원’이라 하며 속으로 웃은 일이 생각납니다. 저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아프지 않은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 돕고 사는 수도생활입니다. 참으로 병자이자 죄인인 현실을 겸손히 받아들일 때 회개와 더불어 주님의 용서와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 주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임금으로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주님의 명령대로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르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이제 당신은 주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그 원수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요.”
부르심의 선택은 그대로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소는 평생과정입니다. 한두번 부르심에 응답이 아니라 평생, 살아있는 그날까지 시종여일 주님을 따라 닮아가는 성소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죽을 때까지 평생과제가 됩니다. 불림받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주님을 따름의 여정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따라가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입니다.
마지막 천국의 문턱에서 주님은 우리 마음의 얼굴이 얼마나 당신을 닮았나 검사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을 따름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늘 읽어도 늘 좋고 새로운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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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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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13. 연중 제1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르 2,14)
예수님을 따르는 선물
“나를 따라라.” 이는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입니다. 발걸음으로써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참조: 1 베드 2,21; l요한 2,6). 지상 사물을 탐내지 말고, 썩고 마는 돈벌이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세상 명예를 피하고, 하늘의 영광을 위해 세상의 온갖 것을 하찮게 여기십시오.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고, 누구에게도 쓰라린 상처를 주지 마십시오. 자기를 해치는 사람들을 참아 주고, 억누르는 이들을 위해 주님께 용서를 청하십시오. 언제나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창조주의 영광만을 찾고(요한 7,18 참조), 거룩한 것들을 사랑하게 하는 모든 일을 격려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주님의 명령 한마디에 마태오가 세상 돈벌이도 포기하고 재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빈털터리이신 그분의 제자무리에 합류했다 하여 놀라지 마십시오. 말씀을 통하여 그를 외적으로 부르신 주님께서, 내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선물을 주시어 당신을 따라나설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자연이 하는 말 가운데 가장 역동적인 말은 인간의 말이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이 가까이 있으며, 입맞춤만큼이나 가까이 있다고 말한다. 예언자의 발은 사람을 부추켜 전 세계의 일치를 이루게 하고, 지금 영원을 시작하게 한다. 사람 혹은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영혼이 하는 말을 귀담아듣는 게 특히 필요하다.
“진리가 분출하여 흘러 나오는 첫 순간에, 곧 하느님이 계신 집의 문에 이르러, 영혼은 일어서서 그 말씀을 표현하고 표출해야만 합니다. 영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말하고 찬양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창조적인 말씀에 이름을 불일 수 없다. 창조적인 말씀은 모든 말의 배후에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긴장을 무릅쓰고서 창조적인 말씀을 찬양해야만 한다.(100)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4. 이슬람교에서 나타나는 유일신 신앙
알라로부터 직접 영김을 받은 신의 참된 밀씀 <꾸란>
역사적 종교로서의 이슬람교의 권위는 알라의 유일성, 예언자 무하마드의 궁극성, 그리고 예언집 <꾸란>의 절대성 위에 놓여 있다. 이 세 가지는 마치 백두산 천지의 호수와 천지에서 흘러내린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그 물들이 합류되어 귀착한 동해와 서해의 관계와 같다. 그 삼자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슬람교의 신관 자체는 철저한 군주론적 유일신관(monarchial monotheism)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신관 같은 삼위일체론적 신관을 부정하지만, 알라의 유일성과 예언자의 궁극성과 <꾸란>의 절대성은 삼위일체적이라 말해서 틀린 말이 아니다.
<꾸란>은 무하마드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놓은 이슬람교의 경전이다. 총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300페이지 분량이다. 현재의 <꾸란>이 내포하고 있는 각 장의 길이는 각양각색이다. 제 2장과 제 3장처럼 각각 286절, 200절이나 되는 길이가 매우 긴 장도 있지만, 제 113장과 제 114장처럼 각각 5절과 6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장도 있다. 처음에는 무하마드와 그의 최측근에 의해 기억 암송되어 구전되거나 부분적으로 복사된 자료로 회람되어 오다가, 무하마드 사후에 온전히 권위를 갖춘 경전의 필요성에 따라 제 2대 칼리프 우마르(Umar)와 제 3대 칼리프 우스만(Uthman) 때에 이르러 완전히 문자화되고 편집되어 경전으로 확정되고 배포되었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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