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밑줄 친 ㉠, ㉡에 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 사대부가 수백 년 동안 관직에서 막혀 있어도 존부(尊富)를 잃지 않는 까닭은 집집마다 각기 한 조상을 떠받들고 넓은 농지를 점하여 종족이 흩어져 살지 않으므로 그 ㉠풍습이 견고하게 유지되고 근본이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유당전서>-
∙ 퇴계 이황이 영남 예안에 역동사(易東祠)를 창건하고 ㉡족보를 손수 필사하여 그곳에 보관하였다. …(중략)… 산이 있으면 물이 있는 것이니 백파(百派)가 순류하여 끝내 한곳에 모이는 것인데 이는 종합(宗合)의 뜻이다. - <단양우씨 족보서> -
① ㉠-친영이 일반화되었다.
② ㉠-이성불양의 관념으로 양자 제도가 확산되었다.
③ ㉡-동성 마을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④ ㉡-적서 차별과 가족 간의 위계를 중시하였다.
[정답] ③
[해설]
제시문은 모두 성리학적 종법질서가 강화된 조선 후기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내용으로, ㉠은 집성촌, ㉡은 족보에 대한 설명이다.
① 조선 전기에는 외손이 제사를 지내거나(=외손봉사) 여성을 포함하여 자녀 모두가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경우(=윤회봉사)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양자를 들여 대를 이을 필요가 적었다. 일례로 조선 전기의 족보인 <안동권씨 성화보>(1647, 조선 성종 7)에서도 자손이 없을 경우 무후(無後)라고만 기록할 뿐 양자를 들인 사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 성리학적 종법질서에 따라 부계혈연을 중시하고 ‘사속(嗣續, =대를 잇는다)’ 관념이 강해지면서 자손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이는 풍습이 확산되었다. 이처럼 양자를 들일 경우 대체로 형제 등 같은 부계 혈연의 동성(同姓) 친족 중에서 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② 조선 후기에 들어 성리학적 종법질서에 따른 부계 혈연이 중시되면서, 족보에 대한 보학(譜學)이 발달하고 또한 같은 동성동본(同姓同本)이 모여 거주하는 집성촌이 증가하였다.
④ 조선 후기에는 족보를 매개로 적서 ‧ 남녀 ‧ 항렬에 따라 위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차등적으로 대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일례로 조선 후기의 족보에서는 대체로 장남으로 이어지는 종가의 계승을 중시하였으며, 여성 및 모계 혈연에 대해서는 가급적 배제하거나 서열을 낮게 기재하였다.
[오답해설]
③ 고려 말~조선 전기까지는 결혼 후 남성 측이 처가에서 생활하는 서류부가(壻留婦家) 풍습이 더 일반적이었으나, 조선 후기부터는 여성이 남성 측의 친가에서 시집살이를 하는 친영(親迎) 풍습이 보편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