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이방인들의 목자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정과 신앙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감동적이고도 눈물겹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많은 일을 해냈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나름 일인다역을 하고 있고, 몸 사리지 않고 죽기 살기로 뛰어다닌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오늘만 해도 제 삶을 돌아보니, 제가 생각해도 웃겼습니다.
주방에서 열심히 감자를 깎다가, 부랴부랴 올라가서 강의하고, 초스피드로 내려와서 매운탕 펄펄 끓이고, 또 올라와서 미사 준비하고, 촛불켜고, 입장하고...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와 비교하니 저는 포크레인 앞의 삽 한자리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살아생전 따라다니던 애칭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백개의 팔을 지닌 사나이’였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전도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랴, 틈틈이 여러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랴, 여기 저기 공동체 건설하랴, 지도자 양성하랴...
바오로 사도는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인해 개인적인 삶, 안락한 삶, 편안한 삶과는 영영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펄펄 끓는 열정과 넘치는 에너지로 활활 타오르던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업무 추진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는 건강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으로부터 불림 받지 않았더라면 잘 나가던 검투사를 했어도 이름을 날릴 수 있었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말못할 평생 지병이 하나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던 많은 학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고질병을 지칭하는 ‘가시’가 과연 무엇인가, 오랜 세월 두고두고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그 병명을 밝히지 않은 이상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추측만 할 수 밖에요.
어떤 학자들은 그 가시를 안질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 사도는 이미 눈에 큰 충격을 입어 사흘간이나 실명 상태에 놓여있었기에 그 후유증이 상당하리라는 추측입니다.
다양한 가설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봤을 때 질병이라기보다 성격적 결함이 아니었을까, 추측도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불같은 성격, 순식간이 끓어오르는 분노, 그래서 이웃들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그런 실수를 말하는 것을 아닐까요? 그도 아니라면 나와 맞지 않는, 끊임없이 나를 곤경으로 몰고 가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약점이랄까 취약점, 감추고 싶은 상처를 용감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는 바오로 사도의 용기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밝히는 것을 넘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을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대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의 참된 사도요 스승이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납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어떡하면 자신의 약점이나 취부,부끄러운 과거를 한사코 감추려고 기를 씁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쟁력, 수상경력, 업적만을 과대 포장해서 자랑스럽게 내놓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솔직하게 밝힙니다. 자신이 저질렀던 지난 과오들, 자신의 약점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부끄러운 과거들조차 아낌없이 다 밝힙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자랑할 약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힘이 내 우리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할 가시는 무엇입니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4주일
<함부로 누군가를 안다고 단언하면 안 되는 이유>
복음: 마르코 6,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인정받지 못하십니다. 그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30년 동안 안 변한 사람이 몇 달 만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 어떤 판사는 여자 친구를 총으로 쏘려다가 미수에 그친 남자를 가벼운 벌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 날 바로 여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세상엔 수없이 많은 무죄한 사람들이 죄인으로 심판 받아 죽고 수많은 죄인이 뻔뻔하게도 의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판사들은 같은 판례를 가지고도 아침과 오후가 판단이 달랐다고 합니다. 판결이 과학적인 것 같지만, 사실 판사들의 기분에 좌지우지 되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알려주려 목숨까지 바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무조건 계속 물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신고하려는 이에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일이 ‘경건’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 당신이 쓰는 단어인 경건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신들이 좋아하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만약 내가 사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건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에요!’라고 대답하는 게 옳으냐?”라고 되묻습니다. 그건 사과의 본질에 대해 말한 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경건함이라는 뜻이 신이 좋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쓰는 단어 하나도 의미를 알고 쓰지 못했음을 알게 되고 겸손해집니다.
이런 일로 겸손해지면 좋겠지만, 화를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던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제자들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당하는 것이 굴욕스러웠고 자신들은 엄청난 액수의 수업료를 받는데 소크라테스는 무료로 교육하는 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무리 중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는 상대적이다, 고르기아스는 보편적인 진리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이 진리의 주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신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니체가 받아들여 신은 죽었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기 힘으로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하였듯이, 소크라테스도 죽어야 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초인이 될 수 있는 인간이 신이 아니면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소크라테스를 신을 모독한 자요, 젊은이를 올바르지 못한 길로 빠뜨리는 사람으로 모함하여 사형에 이르게 합니다. 사실 그들이 믿는 신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진화론이 그렇습니다. 진화론자들은 타인을 심판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새로운 창조자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또 자신들이 아는 판단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그러한 판단을 받으신 이유는 나자렛 사람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창조자는 자기 자신들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면 내가 그것을 창조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만들 수도 있고 고칠 수도 있어야 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비행기를 아느냐고 물으면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만들어보라거나 고쳐보라거나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안다고 말하면 무지한 것이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부모를 만나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성령으로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녀로 인정받으십니다.
미국의 락 토마스라는 사람도 처음엔 루저였다가, “나는 핸섬하고 터프한 사람이다.”란 말을 하루에 500번씩 하고 삶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가 가능한 존재가 인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변하려고 하는 이들만이 성령과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런 것으로 인간이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반면 겸손한 인간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창조자의 진리를 찾을 뿐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6,1-6: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역사를 통하여 인간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는커녕 어기기만 하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만을 고집하여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계속 사랑하셨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제 2,5).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의 표지이다. 그 예언자가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되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최고의 값진 선물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들의 완고함과 거부감이 최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매우 역설적이지 않은가?
오늘 복음에서 역시 예수께서 당신 고향에서 복음 선포에 실패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불투명하고 무장되어있지 않을 때는 예수와의 진정한 만남이 어렵다는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2절). 예수께서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혜와 그 기적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분을 거부하는 반응은 왜 나타났을까? 그것은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데서 오는 시기가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여러 가지 표징은 믿음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데,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3절). 이는 믿음의 단절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출생상태나 성장배경 가족 상황을 모두 아는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예수로부터 그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이해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의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일상의 평범한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서 드러내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유다의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품위를 보존한답시고 예수님을 단죄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 그분을 오르게 하는 것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예언자의 길이며 예수께서 가셔야 할 길이다. 이렇게 볼 때, 기적은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의 표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기적이 있으려면 적어도 어떤 신앙의 발단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을 통해서, 권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약성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나자렛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기적은 단순한 목수에 지나지 않은 비천한 마리아의 아들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특별한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는 그분의 권능에 더 집착하려는 신앙에 맞서는 것이다. 특별한 징표를 추구하다가 자칫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실망하고, 더구나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주님을 거부하는 잘못도 범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2,9). 일상적인 평범한 것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고통과 가난의 “징표”를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외적으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여, 성성의 커다란 표지가 되지 못한다고 꺼리는 교회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더 성실히 우리의 일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을 거부했던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끌어내는 교훈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을 가지고 하느님께 우리의 신앙을 강요하면서 진정 참 하느님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의 모든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자. 모든 일은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가 있으며, 그 하나하나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며, 일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 모든 삶의 순간을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그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눈을 지닐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겸손되이 청하도록 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자기 삶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곤 합니다. 그런데 그 구분을 대부분 은퇴라고 생각합니다. 은퇴 시점을 기해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처드 로어의 ‘위쪽으로 떨어지다’라는 책에서는 조금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전반부는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시기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일, 관계, 삶에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후반부를 맞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누군가는 정체성에 들어갈 내용을 담아가면서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바로 이 모습을 위쪽으로 떨어진다고 리처드 로어는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 위쪽으로 떨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전반부 삶의 태도와 접근 방식이 그대로 지속되면서 어떤 변화도 없을 때 그렇게 됩니다. 여기에 신체적 노화까지 오면서 점차 아래쪽으로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삶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시점은 언제였을까요? 바로 공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삶을 마치고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수님 삶의 후반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반부의 삶에 충실하면서 공생활을 준비하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살면서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줄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 사셨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삶이 아닌 위쪽으로 떨어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당신이 먼저 그렇게 사셨습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과거의 모습만을 생각합니다. 놀라운 말씀과 많은 기적에도 예수님의 후반기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를 사는 예수님이 아닌, 과거에 살았던 예수님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는 모습에서 믿음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믿음 없는 곳에서 하느님의 활동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에만 연연하는 사람은 지금을 사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위쪽으로 떨어지는 변화도 없습니다. 세상에만 집착하고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니 계속 아래쪽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변화된 많은 성인 성녀를 바라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철저하게 변화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변화를 지향하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세상은 선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선한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당신이 선한 사람이 되세요(성 마더 데레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단톡방)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반항의 집안도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2-5
2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5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12,7ㄴ-10
형제 여러분,
7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