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도척면 도웅리의 마을 유래
마을의 유래와 위치
이 마을은 조선조 말의 행정구역으로는 웅동(雄洞)과 도현리(陶峴里)의 두 마을이었다. 1912년 일제 강점기에 도현동(독고개)과 웅동(웅골)이 합쳐 행정구역(行政區域)을 개편, 도웅리(陶雄里)로 칭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이를 1리와 2리로 구분하여 독고개를 1리로, 웅골을 2리로 정하였다.
이 마을은 도척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329번 도로를 따라 실촌면 곤지암 방면으로 가다가 궁평리를 지나 첫 번째 닿는 마을이 독고개(도웅1리)이고, 그 다음에 닿는 마을이 웅골(도웅2리)이라는 마을이다.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나들목에서 불과 3km 거리에 위치한다.
마을 앞으로 노곡천이 흐르고 있어 예로부터 물이 풍부하여 벼농사를 많이 지었다. 이 마을에는 골프장이 있다.
마을의 문화유적
조선백자도요지
도웅리 111번지 안웅골 마을 일대에서 조선시대의 백자 대접을 굽던 곳이 발견되었다. 고해(古海)마을에서도 19세기 말에 사기를 굽던 도요지가 발견되었다.
충혼비(忠魂碑)
6.25 한국전쟁 당시 후퇴하는 인민군과 마을 청년수비대가 교전하여 마을 청년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독고개마을 입구에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다.
독고개(도웅1리)
이 마을은 사기그릇과 질그릇을 생산하던 곳으로서, 생산된 질그릇을 짊어지고 마을 옆 고개를 넘어 한양(漢陽) 등지로 내다 팔았다. 예전에 한 때는 질그릇을 지고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이 매일 줄을 이어 넘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독을 지고 넘어가는 고개라는 '독고개'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이 마을 동쪽은 도척면 궁평리, 서쪽은 용인시 모현면, 남쪽이 도척면 상림리, 북쪽은 초월읍 산이리다. 도척면 소재지에서 5km 거리에 위치한다.
현재 경주 김씨, 기타 성씨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으며, 6.25 동란 시에는 1950년 9월 후퇴하는 인민군과 마을 청년수비대(靑年守備隊)와의 교전(交戰)에서 많은 희생자를 낸 관계로, 마을 앞에 동리 사람들의 힘으로 충혼비(忠魂碑)가 세워져 있다. 지금도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는 마을 사람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
도궁초등학교
도웅리와 궁평리의 학동들이 다니는 학교이며 아울러 상림리도 이 학교 학군이다.
동편(東便)
독고개의 동쪽에 위치한 들을 '동편'이라고 한다.
벌덕골
농경지가 넓은 벌이라고 하여 예전부터 '벌덕골'이라고 불러왔다.
도궁초등학교 옆에 있는 들이다.
상지골
부락의 맨 위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한자(漢字)로 '상지곡'(上地谷)을 '상지골'로 부르고 있다. 실촌읍 삼리로 넘어가는 고개의 골짜기를 말한다.
욕골
옛날 이 골짜기에서 여자가 괴한에게 욕을 당했다고 하여 이 골짜기를 '욕골'로 부르고 있다. 독고개 마을에서 궁평리로 넘어 가는 곳이다.
웅골 모퉁이
연료(燃料)를 나무로 쓰던 시절에, 이 곳은 땔나무를 많이 하러 다니던 길로, 다른 동리 사람들이나 이 마을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쉬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웅골로 들어가는 길의 모퉁이라는 말이다.
용인고개
독고개에서 용인을 가려면, 이 산 고개를 넘어야 용인으로 갈 수 있으므로 '용인고개' 라고 부르고 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용인시 모현면에 있는 한국외국어 대학 캠퍼스가 나온다.
풍족골
옛날 이 곳에서 풍새가 나왔다 하여 '풍족골'로 전해지고 있다. 용인고개로 올라가면서 펼쳐져 있는 골짜기이다.
노고봉
독고개에서 서편(西便)으로 건너다보이는 높은 산으로, 이 노고봉 정상에 옛날 마귀할멈이 밥 짓던 곳이 있었는데, 돌기둥이 삼발이 같이 솟아 있고, 거기에서 1 km 지점 아래에 물동이를 놓던 암석이 있으며, 사방 약 6척 넓이의 큰 암석(놋동바위) 위에 물동이 자국이 선명하게 있고, 또한 젓가락을 구르던 자리라고 하여 길게 자국이 나있다. 이 봉우리를 넘으면, 오포읍 매산리가 나온다.
웅골(도웅2리)
예전에 옹기(甕器)를 만든다 하여 '옹골'(甕谷)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웅골'로 발음하고 있다. 행정리로는 도웅2리에 속한다. 현재의 곤지암 골프장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농경지가 적어서 농사는 신통치 않은 마을이다.
곤지암에서 궁평리를 거쳐 노곡리로 통하는 도로가 이 마을 앞으로 지나고 있어 비교적 교통이 좋은 곳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은 상림천(祥林川)이며 궁평리로 흐르고 있다. 이 부락은 순흥 안씨(順興 安氏)와 경주 김씨 (慶州 金氏)그리고 고안 임씨(古安 林氏)가 대성이며 5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아랫말
웅골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고 윗쪽에 있는 마을은 '안말' 또는 '안웅골' 이라고 한다.
고해(孤海)(古海)마을
예전에 하천(河川)이 마치 바다같이 넓다고 하여 옛 바다, 즉 고해(古海)라고 하였고, 한편 이 지점이 상림리에서도 외지다고 하여, 상림리로 포함하기를 꺼려하였으며, 또한 웅골에서도 외지고 멀다하여 도웅리로 포함하기를 기피하던 곳으로 '외로울 고'(孤)자 '바다 해'(海)자 '고해'(孤海)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앞의 하천이 넓었던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1900년 경부터 사기그릇을 굽던 도요지가 있는데, 1920년대까지 이 곳에서 사기그릇과 백자를 생산하던 곳으로, 지금도 폐 사기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방뎅이
이곳은 웅골에서 보아도 모퉁이가 되고, 독고개에서 보아도 모퉁이가 됨으로 인하여 한자(漢字)로 '모 방'(方) 자를 써서 '방텡이'(방뎅이)라고 칭한 듯하다. 지금의 곤지암 골프장 입구를 말하는데, 예전에는 이 곳에 주막(酒幕)이 있었다.
군량골(軍糧谷)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군량미를 생산하여 보내던 곳이라서 '군량골'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통미산
'군량골'에서 생산된 쌀을 이곳 통미산에 집적(集積)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이 산의 형태가 곡식을 야적한 것 같아서 곡식을 통가리한 듯 하다고 해서 쌀을 통가리 했다고 하여 '통미산' 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덕골
이 산에 골짜기를 바라보면 마치 장군(將軍)이 앉아 있는 듯 우람하게 산 형태가 되어 있어, 한자(漢字)로 '대도독'(大都督)을 '대덕'으로 발음하여 부르게 되었다.
세걸미보(洑)
윗말(안웅골)에 있는 보인데, 삼면으로 6m정도이고 세 갈래가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큰보(洑)
아래말 하천에 설치되어 있으며 견고한 보(洑)로서 보폭(洑幅)이 28m나 되어 이 마을에서 제일 큰 보(洑)라고 하여 '큰 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