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的家在山的那一邊…鄧麗君第十年的真相_有田芳生 著:
우리 집은 산 그 옆에 있어요…덩리쥔 제10년의 진상…有田芳生 저술:
要旨 요지:つぐない,愛人,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 등의 히트곡으로 사랑을 받았던 가수 테레사 텐(덩리쥔)이 여행지 태국에서 급서하고
10여 년. 간첩 설, 중국 정부의 음모, 천안문 사건과의 연관... 남겨진 수수께끼의 여러 가지. 진실된 사인은 무엇이었던가?
중국과 대만의 현대사의 틈새에서 우뚝 서서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면서 (원문:翻弄되면서) 노래로 살았던 아시아의 여가수의 진실,
(역주: 翻弄_객관적이지 않은 단어로 생각됨)
덩리쥔의 눈부신 빛_중국판의 발행
序 서문:
대체로 일본인은 덩리쥔 소저에 관한 인상은 그녀의 노랫소리가 부드러우며 아름답고 리드미컬하다는 것으로
설령 그녀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오랫동안 스러지지 않고 있다.
2005년 덩리쥔 소저가 서세한 지 10년이 되는 이때 일본의 여러 텔레비전 방송국은 모두 덩리쥔의 삶과 관련된
기록 또는 콘서트 특별 프로그램을 잇달아 방송하기 시작하였는데 뿐만 아니라 모두 좋은 시청률을 나타냈다,
이 책도 역시 많은 신문이나 간행물 그리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널리 알려져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더 나아가 어떤 작가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내게 보내 주었으며 또한 작가는 이렇게 말을 하였다:
이것은 한 번 읽으면 눈물이 나는 작품이다.
지금 덩리쥔 소저의 CD는 일본에서 다시 새롭게 발매되고 있으며 아울러 또한 많은 새로운 팬들이 늘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그중에는 덩리쥔의 중국어 노래를 처음으로 듣고는 감동이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덩리쥔 소저가
앞으로도 반드시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삶 속에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요, 덩리쥔 문교 기금회 회장 덩창시(鄧長禧)에게
이 책을 중국어판으로 출간하는데 승인을 얻었는데,작가로서의 내가 이보다 더 흥분되는 일은 없었다,
나는 또한 덩리쥔 소저를 통하여 일본과 대만의 우호 관계를 촉진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005년 9월 18일 有田芳生
제1장: 추억의 여백
프랑스의 가을날이 빨리 왔다. 공기가 건조한 여름철이 끝나고 9월이 오니 사람들이 좋아하는 맑고 상쾌한 가을철이 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원인은 당연히 프랑스가 매우 많은 역사 유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자연 경관이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 阿尔查尔·蓝波는 일찍이 어찌하여 이 아름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아름다움에 놀라게 할 수 있나? 하며 이 곳의 자연을 그려냈었다.
布达拉斯와 罗马尼惠를 둘러싸고 있는 샹젤리제 거리와 여유롭게 흐르는 센 강가에서 대체로 1989년 부터 93년 동안 4년간
일찍이 등려군 소저가 이 근처를 산책하는 것을 보고 하였다,(布达拉斯:Potalas,罗马尼亚:Romania)
등려군 소저는 분홍빛깔의 외투를 입고 천천히 이 거리를 걸어다녔으나
그녀가 아시아에서 널리 알려진 대 스타라는 것을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했다.
개선문에서 출발한 뒤 샹젤리제(Champs-Élysées) 거리를 향하여 凯格尔(Koegel) 광장을 바라보며 가면은
福蘭克林 路易士貝尔(Franklin Louies Bell) 거리가 교차하는 길 끄트머리에 닿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센 강에 놓여있는 阿尔瑪(Alma) 다리를 지나는 이 蒙特羅(Montero) 거리도 파리의 20개 구 가운데 8째 구이다.
이 거리에는 상젤리제 극장과 붉게 타오른 꽃들이 피어 있는 처마가 있는 고급 호텔들이 있다:
거리 양옆에는 샤넬, 루이 뷔통, 크리스챤 디올.. 등 고급 명품점이 있어서 파리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가라고 할 만하다.
羅馬尼惠(로마니에?)를 따라서 옅은 녹색의 가로수 길을 천천히 걸으면 나는 이 곳을 확실히 알고 있어요. 몇 채의 건물을
지나치면 바로 내가 찾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아파트_蒙特羅(몬테로?)거리의 8호이다.
관리인과 몇 번 이야기를 한 뒤에 직접 넓다고는 할 수 없는 홀로 들어가 길 끄트머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바깥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엘리베이터에 들어간 뒤 6층을 누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 천천히 올라가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출 때 거의 어떤 진동도 없으며, 엘리베이터 문이 저절로 열린 뒤에 곧바로 외짝 문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등려군 소저가 일찍이 살았던 2개 방과 2개의 홀이 있는 아파트이다. 등려군 소저는 1987년 홍콩의 赤柱에 집을 산 뒤에
이 집을 작업하는 주요한 곳으로 생각하였으며, 여자 제작자인 매이(麥)소저와 81년에 개설한 TNT 制作公司를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이 제작 회사는 오리지널 녹음 테이프 관리, 영상의 권리, 그리고 회계 처리를 하였다.
등려군 소저는 일찍이 늘 이처럼 이야기를 하였는데 홍콩에서는 언어의 벽이 없고 매우 맛있는 중국 요리가 있으며
자유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일찍이 영화 [慕情]으로 인하여 유명해진 천수만에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에 녹음실을
만들 생각을 계획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등려군 소저는 갑자기 홍콩을 떠났는데 가장 믿던 어머니와도 의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파리에서 머무를 곳을 찾았는데 사실 이것은 등려군 소저가 넉 달을 쓰면서 여러 면으로 생각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1987년 11월 홍콩을 떠났던 그녀는 개선문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佛布尔·桑·多諾雷 거리 230번지에서
가구가 딸린 방 하나 거실 하나의 아파트를 빌렸다,이뒤로 1990년 6월에 蒙特羅(몬테로?) 거리의 아파트를 사게 된다,
도대체 무슨 까닭에 홍콩을 좋아하는 등려군을 말도 통하지 않는 파리 생활로 이사할 결심을 하게 하였나?
주:佛布尔·桑·多諾雷:포부르 쌩-또노레 거리(Rue du Faubourg Saint Honore/ Rue du Faubourg Saint-Honoré)
문을 들어서면 입구의 중간에는 원형의 대리석 탁자가 있는데 그위에 중국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징더전(景德鎭)에서 만든
청백호(淸白壺) 자기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는 바로 응접실인데 약 6평 정도이고 한가운데에 표범 무늬의 소파가 놓여져 있으며,
곁에는 전자 오르간과 하얀 빛깔의 음향기기가 있고, 또한 수많은 CD가 놓여 있다. 두 개의 아마 빛깔의 소파가 있고 한 켠에는
작은 흰빛의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전화와 靑瓷壺가 놓여 있으며, 게다가 탁자 위에는 많은 등소저의 편지들이 가득 쌓여 있다. 응접실에 이어서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침실이다, 鮮紫色의 침대보가 덮혀져 있는 이인용 침대에는 분홍 빛깔의 베개가 놓여 있다.
침대 곁에는 작은 탁자가 있는데 골동품 등불이 놓여 있고
등불 아래에는 [証嚴法師靜思語]가 놓여 있다,바닥에는 흰색 레이스 오색 끈의 분홍빛깔의 밀짚모자 전용 함이 있다.
등려군 소저가 가장 좋아하는 빛깔은 분홍빛인데 왜냐하면 그녀는 분홍빛은 행복을 불러올 수 있는 빛이라고 깊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침실의 창문 커튼은 분홍빛의 레이스 천으로 만든 것이고 모든 방문도 모두 다 분홍빛이다. 벽에 가로로 걸려 있는
나무도 분홍빛으로 칠하여져 있다. 욕실의 타일도 분홍빛으로 붙여져 있으며 욕실 수건조차도 모두 분홍빛이다.. 가지고 있는
물건은 모두 다 분홍빛이다. 흰빛의 벽 이외에는 방안의 모든 곳이 그녀가 고집하는 좋아하는 것들이다.
지하실에 멈추어 있는 速可達 자동차도 분홍빛으로 칠해져 있다.
그녀의 약 3평 크기의 작업실에 들어가 창가로 가니 바깥에 새파란 백양 수풀과 그리고 차분한 대로를 볼 수 있다.
방안의 의자와 일인용 침대 보조차도 모두 분홍빛이다. 창가의 탁자에 기대면 바른손 켠에 흰색의 전화기가 놓여져 있고
가운데는 한정판의 Power Book 170 多彩苹果電腦(Apple Computer)가, 왼쪽에는 중국어 사전과 [曹雪芹別傳]이 놓여 있고,
그리고 査理布朗(찰리 브라운:Charlie Brown) 만화책 한 권, 또 계산기, 스테플러, 잉크, 도장, 수정액, 투명한 필통에는 볼펜,
풀, 보랏빛 빗 등이 있다..
주: 曹雪芹(CáoXuěqín, 약 1715~1763년경) 청(淸)나라 때의 소설가, [홍루몽'紅樓夢] 저작,
흰빛의 책장과 파란 빛 그리고 보랏빛으로 칠한 책꽂이로 나뉘어진 것을 바라보면 그 가운데에 모자에 달려 있는
토끼 장식이 있고 이어서 津本陽이 쓴 [夏天夢], 大友克洋의 만화 [AKIRA], 프랑스로 도망친 학자가 쓴
[政治多麽簡單: 정치는 너무나 간단하다], 프랑스 사전, 高陽이 쓴 역사 소설 [延陵劍], [五陵游], [茂陵秋] 등이 책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 세트 10권의 아름다운 고전 시집이다.
[宋詩選], [唐詩選], [淸詩選], 가수 등려군 소저는 힘을 다하여 이런 시집 안에 있는 독특한 세계의 비결을 추구하였다,
대체로 그녀는 30전후에 장차 자기가 작사한 노래를 부를 생각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진열된 고전 시집을 등려군 입장에서 보면은 바로 꿈을 실현하는 길로 이어지는 길이다.
주: 大友克洋 (Katsuhiro Otomo, 1954년생~) 일본 만화가, 阿基拉(アキラ: Akira) 1988년 작품,
중국 고전 시와 노래에 대하여 등려군이 가장 커다란 흥미를 가지게 되어서 [淡淡幽情] 앨범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 앨범의 제작과 기획은 바로 남당, 송나라의 옛 시와 노래를 가지고 작곡자에게 부탁하여서 편곡을 하여서 만든 것이다,
이 주제를 생각해 내어서 기획한 것은 한 광고 회사의 사장 谢宏中이다. 1979년 가을철 어느 날 밤 謝宏中은 마침 서실에서
李后主의 시와 노래를 베껴 쓰고 있던 중 한 여자분이 들어오더니 그 노래를 들고서는 명랑하게 읽기 시작하였다,
謝宏中은 이 소리나 말이 높낮이와 곡절이 조화롭고 음률미가 있고 다채로운 아름다운 목소리에 빠지게 되었는데,마음속에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옛 시와 노래를 현대식의 음악으로 노래할 수 있게 가사를 붙이게 할 생각이었다,
謝宏中은 李后主의 [烏夜啼'오야제]를 곡조에 가사를 붙여서 노래를 불러 보았다. 그리고 다시 녹음을 한 후 들어 보았는데
느낌이 아주 좋았다. 이 뒤로 사굉중(謝宏中)은 다시 10여 수의 시와 노래를 편곡하여서 [淡淡幽情] 앨범을 녹음하여서 만들었다,
[주] 谢宏中(사굉중) 1972년 恒美廣告公司 설립,
词
본래 시는 四言,五言,七言의 韵文으로 되어있는데 詞라는 노래는 이런 제한이 없어서 아주 많은 속된 표현이 될 수 있어서
중국 문학의 커다란 특색이라 할 만하다,謝선생은 곧바로 음악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제안하고
烏夜啼를 시험 삼아 불러 보았지만,반응은 도리어 매우 차가왔다. 그러나 謝선생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난 뒤 1980년 가을 謝선생은 어느 모임에서 우연히 등소저를 만나자 그때 등소저에게 [淡淡幽情]의 구상을 이야기 하였다,
그때 등소저는 매우 흥미를 보여 주었는데,
이리하여 곧바로 홍콩의 寶麗金 음반 회사의 사장인 鄭東漢에게 제안을 하였으며 기획이 시작되었다,
대략 가을로 들어서면서 등소저, 謝宏中, 鄭東漢 그리고 제작자 鄧錫泉 모두 4인이 홍콩의 雷格尔斯貝依 호텔의 커피점에서
구체적인 토론을 진행하였다,토론한 내용은 대부분 어떻게 현대 음악을 사용하여서 송나라의 옛 시와 [詞]라는 노래를 표현할 수 있는가와
그리고 어떻게 중국문화 등등의 고사를 잊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가에 집중되었다. 이런 뒤 홍콩과 대만의 작곡가들에게
작곡을 부탁하였고 마침내 1983년 2월 2월 [淡淡幽情'담담유정] 전집(앨범)이 발행되었다.
노래 속에는 담담한 애처움과 슬픔이 떠돌고 때로는 마치 속삭이는 것같은 창법도 있지만 떄로는 아름답게 사람을 감동시키는
목소리도 있다. 마치 망국을 넋두리하는 듯 李后主가 부르는 [獨上西樓'독상서루]는, 어찌할 수 없는 심정으로 가득히 채워져 있다,
전집 속에는 송나라의 소식(蘇軾), 류영(柳永), 구양수(歐陽修) 등 모두12 수의 노래가 편집되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3수는 이후주(李后主)의 작품이고, 이 뒤에는 중국 화가 단우흠(單祐欽)이 그린 12수의 노래를 대표하는 그림
그리고 등소저의 옛 복장을 찍은 작은 책자 있는데 또한 아주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집(앨범)이 발행된 뒤 대만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대만 텔레비전은 또한 [淡淡幽情]이라는 특집 방송을 하였다,
당시 기획 내용은 등소저가 옛 옷을 입고 노래하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등소저는 스스로도 옷을 고르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촬영하는데 겨우 3일의 시간만 썼었다,뒤에 등소저는 젊은이들이 이 전집을 듣고는 저절로 당시와 송사를 외우게 되자
감격하여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그녀에게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여서 교과서에 알기 어려운
당시와 송사를 노래에 붙이면 쉽게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이것이 30살이 지나가는 등소저에게 또한 홍콩의 음반 대상 年度大碟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더 나아가 1990년에 일본에서
발매가 되었는데,가장 몽환적인 CD라고 불렸으며 유명한 음악 평론가 가운데 村東洋선생은 또한 이 전집(앨범)을
[邓丽君在音乐领域上最杰出的作品](음악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등려군의 작품)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래서 등소저는 쭉 속집을 내기를 매우 바라서 1990년 스스로 앨범 이름을“春夢秋云”이라고 정하였는데,이것은 李白이
성당 시절을 크게 찬양한“清平詞'청평사”속에서 3수의 노래를 골라서 작곡을 하였다. 게다가 금나라 말기 그리고 북송 시절의
시인의 작품 모두 15수를 수록할 예정이었고 게다가 이미 노래도 완전히 준비가 되었고 음악의 녹음 제작도
다 끝났으나 등소저가“問世間情是何物”라는 첫 번째 노래를 다 녹음한 뒤에 제작이 잠시 멈추어졌다。
이 앨범이 완성이 되지 못한 까닭은 등소저가 노래를 고를 시간을 바랐기 때문이지만 작곡가에 대한 부분도 오히려 만족스럽지 않았다,
당시의 작업한 사람들의 의견에 의하면,등소저는“淡淡幽情”은 중국의 맛을 표현한 것이라,두 번째 앨범은 그녀가 현대적 느낌을
더할 생각이었을 뿐만 아니라 등소저는 또한 자메이카에 가서 녹음을 하여서 이 앨범을 제작할 예정이었다고 말하였다.
등소저는 또한 시험 삼아 자기가 가사를 써 봤는데 프랑스의 아파트에서 여러 편의 등소저가 남긴 詞가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연필로 B4 용지에다 쓴“冬夜里吹来一阵春风:恨不相逢未嫁時”것은,서정적인 詞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쓴 詞 중에 비교적 성숙한 작품을 든다면 홍콩의 집에 남겨진 글이다,등소저는 귤색의 가로쓰기의 필기책에
16행의 詞를 옮겨적었다,그녀가 세상을 떠난 곳…태국의 치앙마이의 호텔에서 찾은 커피 빛깔의 卡地亚·Cartier·까르띠에
가죽 필기 책에서도 쓰여져 있었다。
星願:
지난 일은 차마 그리워할 수 없고
세상 일은 미리 헤아리기가 어려워라
마음의 근심을 시로 쓰지는 마라
꿈이 짧든 꿈이 길든 모두 다 꿈이라…
이 모두 다 젊은 야심을 위한 것이니
정처 없는 이 신세,부평초가 비를 맞고 있네
하늘 저 멀리 어딘가에 참 벗이 있을 진데
그저 노래와 춤이 흩날리어 오색구름이 되어 떠도는 걸 걱정만 하네…
이 모두 다 물처럼 따스한 마음씨를 위한 것이니
아무리 달이 뿌옇다 하더라도 언제나 거리낄 것이 없네
어찌 꽃들을 보더라도 말이 없나
다정함이 무정함으로 변했단 말인가?
외로운 불빛이 말 없이 홀로 자는데 비추니
사랑은 아무리 부침이 있다 하더라도 고해일 뿐이네
어찌 할 수 없이 꽃들이 떨어져 지니
그저 기나긴 강물은 말없이 동녘으로 흐르기만 하네…
이 노래는 애절하고 서글픔을 지닌 詞로 나중에 3부는 작곡가가 곡을 붙여서“星願”으로 만들었다,
만일 이 노래가 등소저가 스스로의 속마음의 심정을 그린 이야기라면 어째서 등소저는 이처럼 외롭고 쓸쓸함을 느꼈는지요?
일본에서 등려군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가라오케 엔카는 언제나 Top10 안에 드는 인기 가수이다,
설령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일 년 뒤에도 단지“償還”이 노래가 약 300만 차례나 불려지었는데 환산하여 보면은 하루에 거의
8000명 정도가 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이와 같은 것 이외에도 등소저는 아직도“償還”보다 더 인기가 많은
“任時光流逝”,“愛人”,“离別的預感”…의 수많은 명곡이 있다,등소저는 비록 좁게는 엔카 가수라고 말하여지지만은
등소저의 업적은 보편적으로 전 중화권에 두루 퍼져 있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다,
만일 그녀가 일본에서만 한 것을 보게 되면은 그녀의 온전한 성취를 왜곡할 수도 있다.
게다가 현실 생활에서도 그녀 음악에서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정치에 대해서도 강렬한 관심을 드러내었다.
그녀의 홍콩 친구들은 등려군이 언제나 정치적 화제를 토론하였다고 이야기 하였는데 예를 들면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
많은 오류가 있다는 등, 언제나 중국과 대만의 국제 관계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다. 또한 작업하는 동료들과 일본의 자민당의
부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는, 細川(호소카와)首相은 매우 좋은데 자민당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하는 등의 평을 하였다.
그녀는 정치에 대한 정열은 그녀가 자란 대만이 처한 특수한 국제 관계와 특별한 시대적 배경 아래에 자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등소저는 아시아의 대 스타로서 사람들을 화려한 활동에 감동하게 하였으나 그녀의 정신에,
만일 우리들이 단지 겉모습만 본다면 아마도 단언하기 어렵지만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1992년 7월22일 등소저는 신곡 [愛的陽光: 愛の陽差し~アモーレ.ミオ]을 홍보하기 위하여, 그리고 24일 히로시마에서 개회되는
음악제 공연에 참가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얼굴에 웃음을 가득히 지으며 친절하게 내게 악수를 하였는데,
분홍빛 바지를 입고 긴머리는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으며 얼굴에 밝은 표정이 나에게 준 인상은 매우 명랑한 것이었다.
살이 쪘기에 마침 체중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에요! 등소저는 입을 열자 이렇게 말을 하였다,비록 제대로 된
일본어는 아니었지만 말하는 목소리는 맑고 투명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편안함을 느끼게 하였다,이 한 해에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19회 평화 음악제가 음악을 통한 평화의 중요성을 선전하고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을 표방하였는데,
등소저 이외에도 공연에 참가하는 가수로는 또한 일본의 和田秋子,IRUKA,伍代夏子,海蒂·柯斯·媛坦(인도네시아),
玛莉婉·吉梅娜(태국) 등 몇 몇 여자 음악인의 공연이 되었다,당일 방문한 伍代夏子와 IRUKA는 원폭 의원을 예방하고는
아울러 성금을 기탁하였다,등소저는 또한 내게 평화 음악제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벤트라고 이야기 하였다.
금년 여름 가장 가치 있는 기억나는 일은 바로 히로시마 평화 음악제에 참가한 것이에요,“愛的陽光”을 부르려고 골랐는데 바로
전쟁으로 인하여 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명복을 위하여 받치고자 생각하였다. 속마음으로 감정이 충만하여
노래를 하였는데 이전에는 이번 처럼 이렇게 뜨거운 피가 끓듯이 하였던 무대 경험은 없었던 것이다,
등소저는 신곡 이외에 또“何日君再来”,“任時光流逝·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償還·つぐない”을 불렀다。
등소저는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사건을 국민학교 때 읽었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의 방문은 바로 2번째이었다,
그녀가 원폭 위령비(역자 주:전범국의 국민을 위한 위령비…피해 국의 국민인 조선인을 위한 위령비는 별도로 외곽에 있는 것을 잊지 말자)에
꽃을 헌화할 때 우연히 원자폭탄에 다쳤던 부인이 손자를 데리고 참배하러 온 것을 보았는데 부인이 등소저에게 이야기하였다,
원자폭탄 때문에 다쳤기에 상처가 매우 심하여 소녀 시절부터 일찍이 짧은 소매를 입지 않았다고 하였다,
등소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부인의 상처(역자 주: 이 부인의 상처가 수많은 미국의 국민인 미국 군인의 생명과 상처
그리고 조선인의 광복과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를 만져 주면서 또한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 하는 것을 멈출 줄 몰랐다.
위령비 앞에 서서 헌화를 할 때 원폭 Dome을 바라보니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의 폭발이
30만 명의 목숨을 빼았었다. 게다가 현재에도 여전히 몸과 마음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매우 많다는 것이
서러움과 아픔을 느끼게 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언제나 원폭의 자료관을 볼 때마다
목숨(역자 주: 가해국의 목숨인가, 피해국의 목숨인가 아니면, 전범국에 승리한 연합국의 목숨인가)의 귀중함을 깊이깊이 느끼게 하였다,
등소저는 그녀가 일본에 오기 전에도 히로시마, 나가사키가 원자폭탄의 투하와 관련된 영화와 텔레비전을 보았고,
실제로 매우 아픈 슬픔과 무서움을 느끼게 하였다고 말하였다, 등소저의 눈빛은 매우 진지해 보였으며 얼굴에는 진지함이 넘쳐흘렀다.
화제를 최근의 생활 이야기로 돌렸다: 어째서 홍콩의 집을 떠나 파리로 살려고 골랐는지요? 등소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예술인으로서 당연히 파리에 살고 싶어요! 파리를 고른 까닭은... 파리는 절차탁마의 시련을 겪은, 일종의 그다지 따스하지 않은
느낌이고, 이탈리아 사람 혹은 스페인 사람처럼 그같이 명랑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사람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만일 예술인의 처지로 보면은 파리는 공부할 가치가 있는 곳이에요 또한 말도 매우 듣기가 좋지요, 게다가 가장 즐거운 것은
칸(Cannes)이 있는 프랑스 남부는 매우 그곳의 날씨를 좋아하였다.
그녀에게 평소에는 프랑스에서 생활할 때 어떻게 보내는지를 물었다. 등소저의 표정은 명랑하게 보이면서:
파리에서… 역시 어떠한 큰일은 없어요(웃음), 날마다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때로는 녹음실로 가서 녹음을 하는데
이를테면 바쁘면 대체로 아침 6시에 일어난 뒤 수영하러 가고 일주일에 4,5일은 수영을 하고 대체로 한 시간 뒤에 집으로 돌아가고,
9시반 부터 오후 3,4시에 프랑스어를 배우러 가고 이 뒤에 집 부근에서 CD를 찾기도 하고 때때로 영화로 보기도 하고
그러나 횟수는 매우 적었어요. 인터뷰하는 동안에 연관된 생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녀는 가수 인생을 위하여 충전을 하려는 느낌이
아닌 것 같아 보였으며, 오히려 비교적 마음대로 생활하는 것처럼 보였고 단지 자유롭게 생활을 하는 느낌이었다.
또한 집에 있을 때는 비교적 많이 파아노 연습, 책 읽기를 하기도 하고 나는 날마다 노래 연습을 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날마다
피아노를 공부합니다. 최근에 이런 송사와 당시를 읽고 있는데 장래에 스스로 詞를 쓰고 싶기에 또 늘 중국 소설을 읽고 있어요.
토요일 일요일에는 매우 홀가분하게 지내는데 일찍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기에 가능하다면 4시에 기상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그때는 공기도 매우 신선하고 고요하여서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생각한 것을 할 수 있어요.
등려군 소저가 홍콩에서 파리의 집으로 이사를 하여서 그녀에게 이 두 개의 도시와 관련된 일을 물어 보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화제를 빌려서 내가 물어 보려고 하는 주제에 대해 파고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왼손으로 아랫턱을 괴고 있는 등소저는 마치 사색의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홍콩은 매우 쉽게 생활하는 곳인데 응…
말이 통하고 더욱이 그곳의 바다 생선 요리는 가장 좋은 먹을거리이에요, 그곳은 매우 한가롭고 생활도 매우 화려하지요.
상대적으로 파리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고 매우 쓸쓸하다고 느껴져요. 비록 홍콩에서 사는 것이 매우 좋더라도,
그러나 홍콩에서만 있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고 아마도 매우 순탄하게 생을 마치리라고 생각되어
그리하여 생명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내게 하나의 도전을 주려고 생각하였어요,
게다가 천안문 사건이 발생하여서 나에게 마치 꿈속에서 깨어나는 듯한 어떤 느낌을 주었던 것 같아요。
천안문 사건 이라는 단어를 듣자 나는 곧바로 이어서 어떤 문제를 물어보았는데,
내가 등소저가 이 천안문 사건을 항의하기 위하여 파리에서 공연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연관된 사건의 진행 정도를 알아내려는데 의외로 본래 기쁘게 파리에서의 생활을 이야기 하던 등소저는
돌연 얼굴에 어두운 빛이 잠시 스쳐갔었다. 앞으로 녹음 위주로 하려고 하고 결코 공연회를 열 생각이 없었어요,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뒤 부터 공연회를 열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마음은 내내 매우 움츠러졌어요. 왜냐하면 이 사건 전에는
우리는 매우 적극적인 지지 활동을 하지 않았고, 만일에 당시에 우리가 그처럼 지지에 노력하지 않았다면,
말하기 어렵지만 학생들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노래만을 부르기만 하면 울기만 할 수 있을 거예요,
속마음의 느낌도 내내 마음이 편해질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울보가 될 뿐이라고 간주되었지요. 눈물은 매우 흘리기가 쉬워요,
그래서 이때문에 나에게 노래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느끼게 하였지요。
등소저는 이처럼 처음 만난 사람의 내 면전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었다. 매우 긴 시간이 흐르도록 말이 없었다.
나도 다시는 어떤 문제도 물어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등소저는 마침내 천천히 마치 詞의 구절을 고르듯이
또 한편으로는 천천히 말을 하였다. CPC(Communist Party of China) 정권이 정권을 잡은 지 이미 40년이 되었는데
이 40년 동안 중국 인민은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모든 사람은 모두 다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반대로 말을 하자면 앞으로의 중국은 희망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해외의 모든 중화인이 [천안문 학생 운동]을 지지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희망이 있는 중국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지지하겠습니까?
때가 이르러 만일 좋은 정부로 바뀌어 진다면 모두가 좋은 날을 보낼 것입니다. 중국은 민주주의적인 국가로 바뀔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소원과 희망은 단지 중국 정부가 탱크로 사람을 죽이기 전에 멈추게 하는 것 뿐입니다.
등소저는 1989년 5월 27일에 홍콩에서 [天安門學生'천안문 학생] 활동 지지를 하는 집회에 참가하였다. 탱크가 사람을 죽이기 전에
홍콩의 경마장(跑馬場)에서 개최된 북경 학생 운동을 지지하는 자선 공연회에 등소저는 초청을 받아들였는데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빌어서 홍보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가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집에서 실황 중계를 보고 있으니 보면 볼수록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래도 문밖으로 나가 현장으로 나갔다.
내가 말하고 한 것은 모두 이 노래에 있으니, 여러분이 한번 들어 보기를 바라요, 나는 조금도 공연장에 간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도 여전히 후회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본래 파리에서 개최하기로 예정된 천안문 사건 추도회는,
결코 예정대로 사건 발생 3주년의 모년 모일에 거행하지는 않아요. 이 사건을 알아보는데 등소저가 아래의 설명을 하였다,
가수인 나로서는 공연회 방식이 될 수 있는 한 중국 인민에게 무슨 도움을 가져다 주는가를 고심하였는데
그러나 늘 불안함이 느껴지었고 왜냐하면 이 사건으로 많은 학생이 죽었기에 늘 공연회에서 노래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느꼈으며
사실 나도 매우 곤혹스러웠다...
사실 천안문 사건을 항의하기 위한 공연회는 이미 매우 구체적으로 준비가 되었으며 신문도 일찍이 보도가 다 되었고,
또한 국제적인 관심도 끌고 있어요,어째서 이 활동을 도중에 멈출 수 있나요?
등소저는 결코 이 활동의 진정한 이유를 중간에 설명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당연히 아마도 그녀 내심의 아픔이 그녀를 노래에서
멀리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나의 판단에 의하면 그녀를 곤혹스럽게 한 원인은,단지 그녀 개인의 감정 문제 만이 아니라,
곤혹... 이라는 말을 한 뒤에 등려군은 도대체 어떤 詞의 구절을 만나려 하는 것인가?
당시에 나는 결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 등려군 소저에게 어째서 홍콩을 떠났는지를 물었는데 그녀는 이처럼 내게 말을 하였다,
저 정부를 완전히 믿을 방법이 없었어요!만일 내가 그저 내자신의 향락적 생활만을 보내며 문제의 존재를 무시한다면,
필시 이 뒤에는 커다란 재난이 올 거예요,등소저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가리키는 커다란 재난의 예감은 어떤 것일까?
그녀는 결코 설명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녀가 말한 과정에서 분명히 천안문 사건의 아픔이
깊숙히 그녀의 마음속에 낙인찍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홍콩은 중국에 돌려주게 된 것은 1984년12월19일에 중영 공동성명에 결정된 것이다,반환 뒤에 일국 양체제 통치로
동의되었기에 그래서 87년부터는 수많은 홍콩 사람들이 미국,캐나다,호주,등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CPC One Party 집정의
중국에 대하여 불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천안문 사건 때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현실 상황을 분명히 보게 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대하여 불신감이 생겼고 더 나아가 이민 사태를 만들어 내었으며,등소저의 말에 의하여 내심으로는 중국
통치하의 홍콩은 도저히 어떠한 일이 생긴다는 불안감으로 가득채워졌다,그래서 비로소 진지하게 중국 체제하에서 직접 영향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숙고하게 되었다,한 자기의 의사와 많은 사건의 비판을 공개하였다,이로서 중국 이라는 이 나라가
커다란 파란을 일으키기에 등소저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홍콩에서 중국어 노래를 녹음하는데는 심지어 3일간의 연습을 해야만 비로소 마침내 녹음을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매우 쉽게 울기 때문이기에 매우 긴 시간을 써요, 중국이 매우 빠르게 민주주의화(Democratization)를 희망하는데,
그때가 이르면 많은 경축할 노래를 부를 수 있지요. 나는 지금 여전히 내 감정을 억제할 방법이 없어요, 매우 쉽게 울기 때문이지요.
등소저는 인터뷰에서 내게 말을 한것에 의하며 생각보다는 말한 것이 많았고 특히 천안문 사건에 관한 정치적 화제입니다.
담담하게 피하려 하지 않으며 말을 하였고 문제에 대하여서도 어려운 것을 피하고 쉬운 것만 이야기하지 않고 일을 다 마무리하였다,
내게 매우 자연스럽게 응답하는 어떤 느낌을 주었다. 등소저는 신곡 앨범 [難忘的] 즉, 또 그해 10월 28일에 중국어 판
최고급 [莫忘今宵]의 이름으로 일본에서 발행된 것을 내놓았다. 당시에 홍콩 대만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일지라도 등소저는
일년에 서너 차례일 뿐이다. 나는 내가 등소저를 인터뷰 하였을 때를 생각하면,
등소저는 천안문 사건은 내심 매우 커다란 충격을 받았기에 이 때에는 고심하여서 작업량을 제한하고 있다.
약 2년이 지난 뒤 1994년 10월 24일에 일본 센다이시의 宮城縣民會館 지하층의 무대 뒤 휴게실 앞에서 등소저를 다시 만났다.
게다가 이번 일본 여행은 뜻밖에 등소저의 마지막 일본 나들이가 되었다. 매우 영광입니다.. 등소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하였다. 나는 그녀의 삶과 중국 그리고 대만의 관련된 배경을 책으로
쓰려 한다고 그녀에게 말을 하였을 때 그녀는 이처럼 대답을 하였다. 게다가 그녀는 또한 나에게는 더욱 뜻밖인 말을 하였다.
나는 앞으로 삶의 중점은 중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서 노력하는 것이에요,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
나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였는데 그러나 동시에 내가 과연 이렇구나 하고 나로 하여금 놀라게 하였다,
저번의 인터뷰하는 중에 등소저는 이렇게 말하였다:아주 작은 폭력도 거대한 전쟁으로 바뀔 수 있어요,나는 가장 전쟁을 싫어해요,
그래서 평화를 위하여 나는 나 하나의 힘을 끝까지 다하길 바라오.
등소저는 이처럼 강렬하게 "중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노력하려는" 심정을 나타내었는데,나는 이것이 처음이자 또
마지막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저절로 마음속의 참된 말을 들러낼 수 있는 것은 마땅히 속마음이 오랫동안의 갈등을 겪어서
굳건하게 진심을 토로하는 것으로, 이것은 단지 신념을 남에게 전달하고자만 하는 것과는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다,
등소저의 말 가운데의 중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한 노력이라는 말의 뜻은 중국과 대만의 특수한 관계 배경하에서 일어난 것이다,
현대사에서 때때로 만나는 난관에 처할 때 뚜렸하게 한 여성의 정신이 이룬 것이 반영되었다.
등소저는 더 나아가 필자와 약속을 하였는데,정월을 보내고 홍콩에서 다시 시간을 짜내어 천천히 이야기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 약속은 결코 실현 될 방법이 없게 되었다,등소저가 하반기인 1995년 5월8일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서세하였기
때문이다. 등소저는 건강할 때도 여러 차례 사망설 소문이 있었다,제1차는 1990년 등려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등소저가 끝내 장례식장에 나타나지 않았기에 그래서 등소저가 충격을 받아서 신장병이 악화되어서 파리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풍문이었다,제2차는 1991년 때로 등소저가 미디어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고
등소저가 일찍이 천안문 사건을 지지하는 학생 운동 입장을 표명하였고 또 실제로 성원하는 공연장에도 참가 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이미 암살되었다는 풍문이어서 일본의 여성주간 잡지는 또한 이것을 홍콩에서 등소저의 괴이한 병사설
그리고 암살설 풍문을 특정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1년 9개월이 지난 뒤, 등소저는 1991년 신곡 [与悲伤共舞: 悲しみと踊らせて] 때문에 일본에 가서 프로그램 선전을 할 때
매우 경시하는 말투로 아래의 말을 하였다: 홍콩의 잡지는 이런 뜬소문을 실제로 너무나 추악하게 썼는데
본래 단지 2000권이 팔리던 잡지로 헐뜯어서, 잡지를 팔려고 생각하여서 뜬소문을 날조하였다.
4년 뒤, 등소저가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객사를 하자, 이전의 떠돌던 모살설이 더욱 철석같이 믿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치앙마이 이곳과 함께 연상될 때,더욱 약품으로 인한 사망,에이즈로 인한 병사 등등의 수많은 설들이 퍼졌다,
뒤에 또 높이 기려서 국장으로 장례를 하게 되어서 이 군부 간첩(軍方特務)이라는 설을 야기시켰는데,
이 특무의 화제는 대규모로 보도되었고 더욱이 믿을 만한 근거가 된 것은 등소저가 서세하기 전 5년 사이,몇 년간
모든 텔레비전의 출연을 모두 다 거절하고 단지 군 위문 활동에만 열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수도 받지 않았던 것이었다.
등소저는 비교적 대규모의 군 위문 활동으로는 이런 것이 있다: 미국에서 1년 7개월을 체류하고 난 후, 1981년 고심하여서 대만으로 돌아와서
金門(진먼도)의 古寧頭로 가서 군 위문 활동을 한 君在前哨,이 뒤로 1992년 台中(타이쫑)의 칭취엔강(淸泉崗)의 군 위문의 永遠的情人,
그리고 마지막으로 1994년 高雄(까오슝)의 鳳山(펑산)의 군 위문의 黃埔建軍七十年(황푸건군70년)이다,
최초로 등소저가 일찍이 군부의 특무라는 것을 보도한 것은 [獨家報導]라는 대만 잡지이다,뿐만 아니라
등소저는 특무라는 것을 실지로 증언하는 사람이 얼굴을 보였는데 바로 일찍이 대만 정보국를 담당한 고관 谷正文이었다,
그는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기자: 일본 매체는 대담하게 등려군이 일찍이 중화민국 군부의 특무라고 추측을 하였습니다.
谷正文: 나의 판단에 의하면, 등소저는 군부의 직원이라는 것이 틀릴 수가 없는데, 만일 내가 잘못 기억하지 않다면
마땅히 국가 안전국 제3처 관리에 속해야 맞는 것이다.
6월 23일 홍콩 [信報]는 이 [獨家報導]의 내용을 출간하였는데, 共同 통신사의 홍콩 지국은 [信报]가 출간한 기사를 펴내게 하였고
일본의 [每日新聞]도 대만 국가 안전국을 퇴직한 中將(사실은 정보국 퇴역한 少將)이 증언하는 특종의 기사인
[鄧麗君曾是諜報員?:등려군은 일찍이 첩보원이다?]을 게재(6월 20일에 보도되었다)하였다. 이 [獨家報導]의 기사는
일본에서 매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일본 잡지 [周刊現代] 7월8일자 호는 더욱 谷正文과 인터뷰도 아직 하지 않은 상황에서
[鄧麗君是台灣版的金賢姬: 등려군은 대만판의 김현희이다] 이라는 대 표제의 기사를 실었다,(김현희는 북한이 일본에 파견한 특무인데
일본의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뿐만 아니라 또 글 속에서 대만에 주재하는 평론가 福雷特(Foret) 吉野가 말한 것을 인용하였다:
등려군의 공작 활동은 마땅히 동아시아,특히 일본에서 가능성이 가장 컸을 것이다,이런 부류의 언론 증거는 더욱 널리 보도된 것은
1995년 7월 20일자의 [周刊寶石]에,[鄧麗君二十年來本來就是秘密情報員!!: 등려군은 20년 동안 본래는 바로 비밀 정보원!!] 이라는
큰 제목으로 특집으로 보도가 되었다,뿐만 아니라 실제로 증언하는 사람 즉 구정문(谷正文)이 얼굴을 드러내었다,
기사 첫머리에 바로 [驚人的眞相: 사람을 놀라게 하는 진상]_谷正文의 말를 인용하였다.
내가 情治局을 떠나기 전에 등소저는 받아들여져서 첩보원이 되었고,내가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는 그녀가 13살 때였다,
谷正文은 또 말을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 鄧樞(덩슈)는 본래 국민당 군대의 육군 중위로 나하고는 본래 알고 있었고
이후에 소개를 통하여서 등려군도 알게 되었다,받아들일 사람의 자료를 심사할 때 한 번 보니 바로 그녀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퇴직한 뒤에 그녀는 여전히 또한 안전국의 직원이었다,당연히 1989년 천안문 사건 발생했을 때에도 여전히 또한 내내
그녀가 태국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완전히 대만의 첩보원이었고 경력도 20년 이상을 넘었다.
특별히 인용된 [周刊寶石]의 기사 속에도 특히 [獨家報導]가 보도한 내용이 정말인지 가짜인지를 확신할 방법이 없었기에
그래서 "스스로 인터뷰한 谷氏" 라는 제목을 표방하였다,
"谷氏의 대만 집에서" "상세한 내용을 취재" 등등의 기사,도대체 무엇이야 말로 정말인가? 등소저는 일찍이 직접 말을 하였다:
"나는 국제 난민이에요",그녀의 삶 가운데에 너무나 많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남겼다,주: 独家报导(獨家報導周刊: Scoop Weekly Taiwan),
등려군 가족들이 파리의 아파트를 곧 팔아 버린다는 연락을 접하였기에 나는 특별히 1998년5월19일에 프랑스로 가서 인터뷰를 하였다,
방에는 일인용 침대 위에 분홍빛 줄무늬의 침대보가 덮혀져 있는데,베개를 따라 있는 벽을 쳐다보니,벽에는 프랑스 지도가 걸려 있는데,
또한 91년 발표된 신곡 [與悲傷共舞: 悲しみと踊らせて]의 홍보 포스터가 있다,이외에 또한 어떻게 하면 살을 뺼 수 있는가와
연관된 신문 스크랩 몇 장이 붙어 있다,어째서인지는 알지 못하나,이중에 한 장의 사진이 특별히 마음이 머물게 하는데,
이것은 사진 가장자리가 약간 말린 칼라 사진으로 등소저는 검은 테두리의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전신 사진인데,
온통 검은 빛의 양장을 전신에 입었고,겉에는 꽃무늬의 흰 빛 외투를 입었고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걸고 손에는 레이스로 된
망토를 들고 있으며,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눈빛은 보기에 편안하였다.
그녀의 검은 빛의 몸 그림자의 배경에 두드러지는 것은 프랑스 건축의 영향을 받아들인 折戶(접이식 외짝문?)식의 창문에,
아이디어가 넘치는 나무 막대기 모양의 차양 판이 있는 건축물인데 또한 마치 동남아의 식민 도시에서 언제나 볼 수 있는
哥洛尼亞 문예 이후 부흥기의 흰 색 건축물의 정원 앞에 하나의 커다란 진녹색의 鳳尾蘭을 한 손에 쥐고 허리를 곧추 펴고 있는데
작은 흰 꽃이 여기저기 활짝 피어 있고 다시 다른 곳으로 가도 또 수많은 붉은 波羅尼花가 심어져 피어나 있다.
마치 사진을 정리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날마다 볼 수 있는 곳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서 붙여 둔
한 장의 사진에는 촬영한 날짜와 장소를 특별하게 표시는 하지 않았다,단지 그녀가 때때로 그녀가 좋아하는 경치를 보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특별한 뜻이 있었는지? 나는 정말로 이 한 장의 사진에 어떤 뜻이 숨겨져 있는지,도대체 언제인지,어디서 찍은 것인지,
그리고 언제인지 등소저의 속마음이 어떤 모습이 반영되고 있었는지를 알고 있어요,
등소저의 발자취를 따라서 마침내 그 현장에 다다른 뒤에,바로 그녀가 아시아를 벗어난 뒤의 끊임없는 파란의 역사 같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묘사한 사진은 말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第2章] ふたたび [再次的] 제2장: 다시 (제2장)
趙素桂는 언제나 꿈을 꾸었는데 딸이 가끔씩 그녀가 홍콩의 음식점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모습의
꿈을 꾸었다. 종종 등소저가 아마도 30살 즈음에, 중화옷을 입고서 공연장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는 것의 꿈을 꿈꾸었다,
항상 꿈에서 깨어난 뒤에 깊은 쓸쓸함을 느꼈으며 또한 언제나 감격하였는데,미국을 가든 아니면 일본을 가든지 모두 다
"아! 우리는 함께 그곳을 갔었구나" 하며 깊은 시름에 빠졌다,
설령 지금껏도 언제나 이런 추억이 젖어 있더라도, 이로 인하여서 곳곳에 다 수많은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 남아 있어요。
딸의 CD를 듣는 것은 이미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으며, 더욱이 열네댓 살 스무 살 때 불렀던 노래는
그리워하는 것을 멈추게 하지는 못해요.
먼저 대만에서 데뷔를 하고 나중에 홍콩으로, 일본으로 진출하였을 때의 추억은 특히 생생해요,
가끔은 토요일에 한꺼번에 8개의 앨범을 다 듣고 있는데. 노래를 들으면서 가구 위에 놓여진 액자 사진을 바라보니
젊었을 때의 딸이 마침 미소 짓고 있어요!
달마다 늘 金寶山(진바오샨)의 묘원에 가는데 그러나 만일 꿈속에서 딸을 보면 하루 걸러서 반드시 묘원으로 가요.
金寶山의 묘원은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대만 지역인데 基隆 부근으로 내 삶에서 가장 깊은 그리움이 있는 거리이에요..
趙素桂의 본적은 중국 대륙의 山東省 東平縣(산동성 동평현)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흑룡강의 하얼빈의 출생이다,
중화민국 15년 즉 서기로는 바로 1926년 6월 20일에 태어났는데,내내 5살이 되도록 그곳에서 지냈다,
아버지 趙守業은 그때에 하얼빈 우정국의 국장을 담당하고 있었고,어머니 趙張은 가정주부이었다.
중일전쟁 때문에 온 식구가 어쩔 수 없이 河南省으로 달아나 피난을 갔었다. 남편 鄧樞와는 河南省의 洛陽에서 알게 되었다.
鄧樞는 민국4년 즉 1915년 1월 10일 하북성 대명현(河北省大名縣)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난 뒤 어머니가 바로 세상을 떠났다,
군인이던 아버지도 그가 4살 때 세상을 떠나게 된다,그때 국민당의 군대는 이리저리로 이동하였기에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 갔었다,아무런 의지 할 곳이 없는 鄧樞도 14살 때 군대에 들어가게 되는데,오로지 군대에 들어가게 되면 살아가는데
방법이 없는 것에 대한 염려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이 뒤로 26 살 때 趙素桂를 알게 되는 데,왜냐하면 趙素桂의
할머니 친구가 부근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열심히 소개를 하였다,그때 趙素桂는 겨우 15살 이어서,
부끄러워서 할머니 뒤에 숨었었다,16살에 약혼을 하였는데,맨 처음에 어머니가 자기에게 말한 것을 회상하며:
이 사람은 너의 남편이 될 것이야,그러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까닭은 마치 아버지가 군인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왜냐하면 趙素桂는 장개석 부인 宋美齡이 창립한 育英學校에서 공부를 하려고 생각하였기 때문으로
그래서 洛陽에서 陜西의 西安으로 이사를 하였다,이후에 결혼은 1943년 17살 때 하였는데 혼례는 洛陽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집이 西安이어서 남편도 결혼으로 인하여 군대를 그만두었으며 洛陽부근의 宣陽縣의 세무국에서 일을 하였다。
18살에 장남을 낳자 小狗(강아지)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정식 이름은 짓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때의 양식이 부족하여서
영양 실조에 걸려서, 10개월이 되면은 대체로 요절하였기 때문이다. 이 뒤로 1945년에 西安에서 차남을 얻게 되는데
그래서 또한 나중에 장남을 長安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왜냐하면 이전에 西安의 이름이 長安이었기 때문으로
이 지명에서 이름을 얻은 까닭이다。
이 뒤로 남편은 또한 河南省 鄭州(허난성 짱저우)에 군대가 돌아오자 군에 입대를 하였으며, 1948년에 차남 長順을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전쟁시기에 앞으로가 순탄한 생활을 하기를 바랐기에 그 이름의 뜻을 長順이라고 하였다.
1949년 9월에 온가족이 공산군에게 쫓기는 蔣介石 군대를 따라서 广東省汕頭에서 수백 명의 사병과 함께 철수하는
배를 타고서 대만으로 가게 되었다. 부부 두 사람과 4살과 1살의 아이는 두 사람의 군인 친구와 같이 피난선의 갑판 위에
앉아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다 선창으로 내려갔었고, 갑판 위에는 아주 적은 사람들 만이 있었다.
그때 趙素桂는 매우 심하게 배멀미를 하여서 물조차 마셔도 모두 다 곧 토해 버렸기에, 이로 인하여 3일 뒤 基隆항에
도착한 뒤에는 버틸 수 없어서 땅에 넘어져 버렸다. 좀 시간이 지나고는 의식이 돌아온 그녀는 비로소 대북의 北投으로
이동을 하였는데 현재의 北投 이 곳은 대만에서 이름 난 온천 지역이다. 이곳에서 약 2주간을 기다렸다。
1949년 12월 蔣介石이 重慶에서 대만으로 철수하자 鄧樞의 군대는 한 번 해산을 하였으며, 이 뒤로 다시 새로이 개편을
하였고, 鄧樞는 개편하고는 후비군으로 宜蘭縣으로 이동을 하였다. 또한 그때 趙素桂는 여동생의 소식을 찾으려 온갖 곳을
뛰어다녔는데, 듣기에 공군의 비행사인 매부가 1947년에 高雄으로 이동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곳에는 공군 기지가 있었다.
이 뒤에 여동생을 찾았고 趙素桂는 아들과 같이 잠시 高雄岡山에 다녀왔었다。
趙素桂는 1951년에 宜蘭에서 셋째 아들을 낳는데, 그때의 생활이 실제로 너무나 가난하여서 재물을 가져오기를 바라서
삼남은 그 뜻을 살려서 長富라고 이름을 지었다. 대체로 宜蘭에서 1년을 살고는 林縣 褒忠鄕 龍岩村으로 이동을 하였다,
방은 붉은 벽돌과 기와로 얹어서 만든 방이었다. 나무 문을 당겨서 열면 아주 작은 한 칸 짜리의 평상이 있는 방이 있었다,
대체로 이곳에서 4년 정도 살았고 온 가족은 대륙에서 도망 온 외성인이어서, 몇 해 동안은 마을 사람들과 말이 통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1953년 1월 29일 넷째 아이가 태어나는데 이 때는 딸이었다,아이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던 이는 바로 그때 집주인인
張素霞 아주머니가 산파를 담당하였다,부부 두 사람은 딸의 이름을 [麗筠]이라고 지었다,筠의 뜻은 갈라진 대나무를
가리키는 것으로 속에는 피리에 쓰이는 한 장의 얇은 막이 있을 수 있다,또한 투명하고 맑고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이것은 북경의 淸華大學을 졸업한 친구가 제안한 이름이었다,왜냐하면 첫째 딸이기에 특별히 아름다운 이름을
생각하였다,이 뒤로 교회에서 [TERESA]라는 영어식 이름이 있어지만,집안에서는 모두 다 그녀를 작은 계집애(丫頭)
혹은 계집애(丫頭)라고 불렀다,이때 남편도 정식으로 전역을 하고는, 군대와 관련된 부문으로 전직하여서 군을
도와 주는 일로 전환하여서 임무를 담당하였고 한 해를 걸러서 넷째 아들… 長禧를 낳았다。
딸은 평범한 어린아이로,입을 열어서 노래를 할 수 있던 것은 두세 살 적에야 비로소 할 수 있었고,그 아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는데 특히 인상이 깊은 것은 그아이가 세 살 때인데,그때 그아이는
혼자서 집 근처의 사진관으로 달려가서 주인에게 말을 하였다: "우리 엄마가 나더러 사진을 찍고 오래요",
그래서 사진관 주인은 그 연유를 알고서는 재미있게 그녀를 찍어 주었으나,나는 이제껏 그런 말을 한 것이 기억에 없다,
지금도 여전히 그때 찍었던 사진이 남아 있는데,어깨에 비스듬하게 작은 보따리를 매고 몸에는 아주 작은 양장을 입고
오른 손은 촬영대의 장식대 위에 올려 놓고 왼손은 마치 어떤 물건을 쥐고 있는 것 같으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렌즈를 바라보는 모습이다.
결코 딸아이가 유명한 가수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나,외동딸이어서 그 아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다
그 아이에게 해 주려고 하였다,그래서 네 살 때 그 아이에게 발레를 배우게 하였다,어머니는 아직도 그때의 선생님이
또한 칭찬하면서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 이 아이는 매우 잘 춤을 추어요,다리의 곡선도 매우 아름다워요.
등려군이 다섯 살이 될 때 집이 여러 차례 이사를 하였는데,台東,屛東에서 살기도 하였고 이 뒤로도 대북의
松山通化街에서도 살았고,또한 이곳은 지금도 유명한 야간 시장이다,두 부부는 台東으로 이사를 한 뒤로 鄧樞는
군대에서 제대를 하였고 생계를 위하여 작은 음식 노점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막 시작한 주된 것은 국수 음식 파는
것으로 대북으로 이사한 뒤로도 운이 나쁜 것인지 아니면 전반적인 경기가 나빠서인지 날마다 번 돈이 겨우 석탄을
살 수도 없을 정도이었다,화가 나 등려군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결심을 하였는데,한평생 다시는 국수를
팔지 않겠다고 하고는 이때 비로소 만두를 팔기 시작하였다,잘 만드는 만두를 학교나 가게에 도매로 공급을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유치원에 다니던 등려군이 졸업식장에서의 연설을 하려고 글자를
모르기에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연설할 때 키가 여전히 마이크에 미치지 못하여서
작은 나무 상자를 딛고 하여야 하였다. 유치원 규정에 의하여 반드시 하얀 스카프와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매달아야 하였는데 다섯째 長禧는 희미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등려군은 언제나 학교 문앞에서 동생이 손수건을
매다는 것을 도와주고는 함께 문을 나섰다. 그때의 집은 곳곳이 모두 다 논이던 전통적 농촌 지대에서 살았다.
등려군이 여섯 살일 때,온 가족이 대북현의 芦洲로 이사를 하였는데 바로 그녀가 蘆洲 국립 소학교에서 공부하던 때로,
중대한 전기가 있게 된다,아버지의 같은 고향 사람인 친한 친구 李成清이 집 근처에 살았는데,
그는 군대의 九三康 밴드에서 胡琴을 연주하였다,이 李成清은 독신이어서 늘 등려군 집으로 놀러 왔는데
그래서 등려군에게 노래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李成清이 말을 하였다:“이 아이는 매우 천부적이다,그래서 노래하는 이 길을 갈 수 있다”,이 뒤로 언제나 그녀를 데리고 군 위문 야간 공연을 다녔다,
맨 처음 무대에 오른 것은 소학교 3학년 때이었다,늘 라디오가 방송하는 美空雲雀·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를 불렀다,
그때의 노래 책에는 가사가 있으나 악보는 없었다,그래서 단지 라디오를 따라서 노래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밤에 가장 즐거운 일은 바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딸아이가 열 살 때 매우 유행하던 [梁山伯與祝英台]의 영화를 나도 아이를 데리고 보러 갔었는데,
그 아이는 뜻밖에 열댓 편의 삽입곡을 기억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대륙의 安徽省의 [黃梅調]이었다,
딸아이가 천부적인 재주가 있었기에, 그래서 그 아이가 중화텔레비전의 노래자랑 콘테스트에 참가 신청을 도와주었다,
나이를 나누지 않는 콘테스트에서 딸아이는 영화 [訪祝英台]를 불러서, 50여 명의 참가자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하여서,
우승 상장을 받을 때 매우 기뻤다. 그때 딸아이가 내게 말을 하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단지 콘테스트가 있기만 하면은 모두 다 참가하려고 해요, 그래서 이 뒤로 언제나 모두 이렇게 말을 하였다:
나는 상장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엄마는 집에서 저를 기다리세요 네. 이러고는 집을 떠나서 콘테스트에 참가하였고 또한 늘 대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의 국어 시간에 읽기를 할 때 언제나 발음이 맑고 깨끗하고 또 정확하다고 칭찬을 받았으며,
11살 때 전교 웅변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하였다,노래자랑 콘테스트에 참가한 일을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대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그는 노래하는 것이 또한 얌전히 공부를 하는 것보다 낫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며,
사회의 인식도 어떤 명문 학교에 합격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주된것 이었다,부근의 아이가 어떤 학교에 입학한 것이
모두 다 뜨거운 화젯거리이었다,그래서 등려군은 초등 중학교를 천주교회의 金陵女中에 합격하여서 공부를 하게 된다.
1966년 13살 때 그녀는 대만 텔레비전과 계약을 한 가수가 되었으며,이따금 매주 한 번 방송되는 음악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그때 대만에는 오직 방송국이 하나만 있었는데 바로 대만 텔레비젼 이었으며,
30분간의 프로그램인 群星會에서 그때의 상해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대표적인 인기 가수 周璇의 영향을 깊게 받았는데,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추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어머니와 딸아이는 모두 다 한 달 안에 프로그램에서
한 번 노래를 하였는데 매우 잘한다고 인정받게 되었다.
학교는 대체로 오후 4시경에 끝나는데 이후는 쭉 6시까지 복습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온 뒤에
대부분은 군대의 康樂隊 공연에 갔었다,그래서 그녀도 康樂隊에 소속되었기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대체로 거의 다
밤 11시가 되었다,하루 걸러서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숙제를 하고는 7시에 학교에 등교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학교에 알려진 뒤에는 등려군은 학교의 생활지도 교사에게 불려 갔는데, 말하기를:
너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다,조심을 많이 해야 하므로 끝까지 노래를 부르려면 그러면 학교를 쉬는 것이 좋겠다.
등려군은 쫓겨나게 되자 아버지와 어떻게 선택할 지를 의논하였는데 등려군이 초급 중학교 2학년 때이었다,
개성이 올곧은 아버지는 하루가 지난 뒤 학교로 달려갔다,화가 나서 선생님에게 따졌다:"어째서 이렇게 말을 하나요!"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휴학을 반대하였다,그러나 어머니는 오히려 휴학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다,
딸아이가 노래자랑에서 우승을 차지할 때마다,딸이 노래하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일찍이 이 길로 가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딸이 노래 홀에서 노래하는 것을 바라는 모양으로 보여서,
사람들에게 딸에게 한번 마땅히 해보라고 하는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친구도 찬성을 표시하였다:
그녀를 이 길로 가게 하면 비교적 잘 발전할 거야,등려군의 생각은 만일 가능하다면,
그녀도 공부하면서 노래하기를 생각하였다,그러나 학교의 태도는 오히려 강경하였다.
그녀가 휴학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을 그치지 못해 보이자 어머니는 딸을 美尔頓 영어 학원에 보내었다.
딸은 중화텔레비전의 전속 가수가 되어서 정식으로 노래하는 길에 발을 내딛게 되었는데, 이것이 每日一星
(날마다 별 하나) 라는 프로그램이다. 즉 날마다 한 초대 가수가 10분 동안 노래하는 프로그램이다.
한 주일 프로그램 공연 한 차례의 고정 출연이 바로 첫 번째 출연 프로그램이었다. 또 이때 본명 麗筠을
예명 麗君으로 개명하였는데, 왜냐하면 본명이 언제나 잘못 읽히기 때문으로 그래서 필획과 자형이 비교적
아름다운 君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것은 어머니가 그때 생각난 이름이었다.
이후로 한 집의 생계가 딸아이의 수입에 의존되게 되었는데 당시에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하였는데
이러고 날마다 노점의 수입은 대체로 2천元이었다. 비록 프로그램에서의 수입이 적었지만 그러나 음악 홀에서
공연한 수입은 오히려 많았다. 비록 딸의 명성이 점점 더 커갔지만 나는 이런 뒤에 날마다 노점에서의 수입은
한 달에 대체로 2천元이었다. 속으로 딸아이의 태도를 보아하니 전혀 바뀐 것이 없어요, 만일 좀 엄밀하게
어디가 바뀌었나 말을 하자면 그것은 예쁘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때 집안의 뜰에서 한 마리의 암닭을 키웠는데 날마다 달걀 하나씩을 낳았다,그래서 딸아이의 고생을 달래려고
갔다 주었는데 누나가 달걀을 가지는 것을 볼 때마다 동생인 長禧는 매우 부러워하였다. 아마도 長禧가 고급 중학교에
다닐 때로 음악 홀에서 노래를 다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등려군은, 동생의 고급 중학교 진학을 축하하려고 시계를 사러
가겠다고 말을 하고는 자동식의 고급 시계를 선물로 사주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첫 번째 시계이었다,
그 시절 장남은 인쇄 공장에서 일을 하였고 이 뒤로 스스로도 인쇄 공장 회사를 차리게 되었다,둘째 오빠는 배를 타러
갔고, 셋째 오빠는 사관학교에 갔고 그녀의 수입이 늘어나기 때문에 비교적 큰 집으로 이사하여서 살 수 있었다.
1967년 9월, 우주 음반 회사는 등소저 생애의 첫 앨범 음반을 출시하였는데 [鳳陽花鼓]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그 속에는 [桃花江], 민요 [鳳陽花鼓], [何日君再來]가 개명된 [幾時你回來] 등이 들어 있다. 이 앨범 음반의
제목으로 [鄧麗君之歌第一集]으로 씌여졌으며, 일련번호는 결과적으로 이 시리즈에서 모두 다 19장의 음반이 나왔다,
대북에는 夜巴黎(밤의 파리)라는 음악 홀이 있는데,한 번 공연은 90분으로 대체로 15명의 가수가 출연을 하는데
등소저는 이 음악 홀에서 연속으로 70일간 노래를 하는 놀랄 만한 기록을 만들었다. 그녀가 노래를 다 부를 때마다
청중들은 내내 앙코르를 외쳤다. 결과적으로 모두 두 곡, 세 곡, 네 곡 노래를 더하게 되어서 다른 가수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으며, 이 뒤에 마지막 순서(영광스러운 순서)에 노래하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등려군 어머니는 딸이
아직은 어리기에 더 나이가 많은 선배들이 마지막 순서에 노래하는 것이 훨씬 좋다며 핑계를 대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음반이 출시된 등려군은 자기의 노래를 부를 뿐만 아니라 또한 일본 노래인 [手提箱女郞], 비틀스 노래,
민요 등을 불렀다. 그리고 이전에 같은 무대에 서는 여자 가수가 매니저에게 등려군을 빼달라고 요구하였는데,
등려군 어머니는 딸을 달래며 말을 하였다: "이렇게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재주가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모두 다 살 수 있다."
제4의 앨범 음반은 마침내 자기의 신곡인 [晶晶]이 실렸으며, 이전의 음반은 모두 다 다른 사람의 노래를 불렀다.
대만에서 첫 번째의 연속극인 [晶晶]이 1968년에 방송이 될 때,그녀가 부른 주제곡이 바로 古月 작곡으로 음반이
인기가 있어서 반드시 줄을 서야 살 수 있었다. 매우 커다란 인기를 모았으나 등려군은 오히려 비교적 텔레비전 프로그램
출연을 기뻐하지 않았다. 1969년 16살 때, 영화 [謝謝總經理]에 출연하였는데 영화에서 한 젊고 유능한 사장이 경영하는
회사에 출근하는 역할을 연기하였으며, 어떤 빈곤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장과 사랑의 노래를 작곡한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대만의 영화관에서는 상영 전에 20분간 노래를 부르고 상영을 하였다,이후 10일간 날마다 2회 한정인 무대 현장에
많은 관객이 왔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등려군의 노래를 다 듣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이해에 등려군도 싱가포르 총리 부인이 주최한 자선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등려군으로서는 이번 여행이 첫 출국이었다,
그녀는 어째서 먹는 음식이 평상이 먹던 맛과 거의 같은 지가 의아하였는데 나중에 듣자하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다 福建省에서 왔다는 것을 듣고서는 까닭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1980년 홍콩 무대에 올라 발전을 하였다,
香港麗歌廳(홍콩 음악홀)과 공연 계약을 하여서, 홍콩에서 공연을 하기로 결정하였을 때,자기를 영어 이름으로
[TERESA TENG]을 골랐으며, 홍콩에서 출시되는 음반에도 모두 다 등려군과 [TERESA TENG]이라고 표시하였다.
등려군은 홍콩의 九龍에 東方이라는 음악홀에서 노래를 부를 때 홍콩 섬의 喜來登酒店(쉐라톤 호텔)에서 머물렀으며,
그때는 아직도 지하철이 없어서 반드시 배를 타고서 강을 건넜다. 평일을 말하자면 오후 2시부터 4시반까지,
밤에는 7시반부터 9시반까지, 10시부터 12시까지, 하루에 3차례 공연을 하고,만일 토,일요일에는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3시부터 5시까지 이런 뒤에 밤에는 2차례 하루에 4차례의 공연을 하였다,
한차례 공연은 대체로 10명 정도의 가수가 노래를 불렀는데 한 사람이 2곡을 불렀고,
처음에는 등소저가 노래 순위가 중간 쯤이었으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서 노래 순서도 점차로 뒤로 가게 되었다.
엄마! 오늘 아주 많은 관객들이 와서 매우 기뻐요! 등소저는 늘 이런 말을 하였다. 이때 [晶晶] 앨범을 출시한 宇宙公司는
경영이 좋지 않아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홍콩의 樂風唱片公司와 1971년 12월 12일 계약을 맺었다,
이 회사는 원래 말레이시아를 근거로한 회사이었고 이후에 싱가포르 홍콩 대만에 모두 지사가 있었다. 이때 古月을
필명으로 하는 左宏元이 등소저의 음반 제작자로 파견되었다. 古月은 歐陽菲菲의 첫 앨범 담당 제작자이었는데
또한 翁倩玉을 위하여 작곡도 하였다. 등려군을 담당하는 제작자인 古月은 등려군을 위하여 악보를 썼을 뿐만 아니라
홍보용 글조차도 모두 다 손수 썼었기에 등려군 어머니 素桂는 언제나 만두를 만들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古月에게
야식으로 등소저를 통해서 보내주었다.
경쾌한 노래는 발음이 비교적 짧아서 쉽사리 어려 보인다고 느낄 수 있는데,너는 이미 18살이 되었으니 따라서
마땅히 조금은 비교적 성인의 느낌이 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등소저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였다,
[謝謝總經理] 이 영화도 이 한 해 동안 홍콩에서 상영이 되었다,등소저는 사상 최연소로 白花油慈善公主로 뽑혔는데,
그때 18살이었다,또한 텔레비전 드라마 [天涯共此時]에도 출연하고 있었다,등소저는 유명해진 데 대하여
단지 어머니에게만 이야기하였다,“영광스러워요”
1972년 19살의 등소저는 홍콩의 10대 가수로 선정이 되었고,1973년에는 주연한 영화“歌迷小姐”로 인하여“千言萬語”
노래가 많이 팔리게 되었다,“彩雲飛”이라는 비극 애정 소설을 영화로 만들려고 할 때“千言萬語”를 삽입곡으로
쓰게 되었다,古月이 작곡을 한 뒤에 감독이 古月에게 물었다:“작은 아이가 어떻게 어른의 사랑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古月이 몇 사람을 찾아서 이 노래를 녹음하여서 감독에게 들려주었는데 마지막으로 여전히 등소저가 선택되었다,
또한 이해에 그녀는 北投에 별장을 한 채 구입하였고 다시 아버지를 위하여 아름답게 만든 스포츠카를 선물로 사드렸다,
아버지는 날마다 늘 엔진을 켜서 차를 따뜻하게 하였으나 부주의하게 차를 몰아서 벽에 부딛쳤었다。
중화인의 세계에서 이름이 난 뒤로 여러 곳에서 초청이 있어 등소저는 어머니와 같이 홍콩,월남,싱가포르,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시아를 순회공연하였다,공연한 곳은 중국 음식점, 식당, 나이트 클럽 등등 이었다,그중에서
등소저에게 인상이 깊었던 것은 월남에 가서 공연한 그때 일 것이다,식당에서 삼륜차를 타고 공연장으로 갔는데
수상 부인이 미국 군인과 월남 여인이 낳은 아이 900여 명을 초대하여서 사이공의 극장에서 등소저의 공연을 관람하였다,
등소저는 출국할 때마다 선물을 사는 것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출국전에 동생 등장희를 위하여 발 크기를 짐작하고
스케이트를 그를 위하여 샀었고,또한 아버지를 위하여 로렉스 시계나 양복감을 샀었다. 일단 대만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현지의 토산품과 특색에 대하여 이야기를 가졌다,싱가포르의 거리는 매우 깨끗해요, 대만의 오토바이와 택시는
너무나 혼란스러워요,왜 고칠 방법이 없나요? 동생 등장희도 언제나 이것 때문에 누나와 같이 한동안 논쟁을 하였다.
1973년 3월 일본의 寶麗多 唱片公司는 佐佐木幸男와 中村準良 두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홍콩 여행 3박4일을 하게 하였다,
佐佐木는 澤田硏二를 담당하였고 中村는 野口五郞를 담당한 제작자이었다,여행의 목적은 홍콩의 寶麗多에 가서
친선 방문을 하기를 바랐으나 사실상 그들의 평시의 업무의 고생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佐佐木 와 中村는 홍콩에 도착하자 바로 홍콩의 寶麗多唱片公司로 달려가서 그때 홍콩의 제작부서의 부장인 鄭東漢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어디를 갈 지를 물었다. 그들은 바로 노래를 들으러 가자고 대답하였고 鄭東漢도 바로 음악홀을 예약하였다.
다음날 그들은 鄭東漢에게 자신들을 위하여 등려군의 음반을 수집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음반을 듣고서는 그들은
목소리의 수준이 따스한 분위기가 있게 느껴진다고 인식하였으며,설사 일본에서도 상당하게 인정받는 인물로
인정되리라고 하여서 佐佐木와 中村는 이런 판단을 내렸다,일본 가요계에는 이미 홍콩의 陳美齡과 대만 출신의
歐陽菲菲가 이미 데뷔를 하였으나 그들은 등소저가 이 두 사람 같은 가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날 밤 그들은 음악 홀의 앞쪽 4번째 줄에 앉아서 콜라를 마시며 공연을 보았다,대단한 등소저의 공연을 다 보고는
매우 좋았다는 것을 좀 더 알게 되었다,단지 노래하는 것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종의 총명한 느낌도 있었다,
佐佐木에 의하면 가수로 성공하려면 지성을 갖추었는 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고 하였다,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佐佐木는 말을 하였다:나는 손수 이 가수를 위하여 제작을 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鄭東漢에게 부탁하여 계약과 관련된 일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동경으로 돌아간 다음날 世田谷區 池尻大橋에 있는 寶麗多唱片公司에서 五十嵐泰宏 제작 본부장이 마침 제작자 회의를
하고 있었다. 佐佐木는 회의 중에 출장 상황을 보고하였는데, 이런 뒤에 봉투에서 음반을 꺼내며 반드시 등려군과
계약을 하여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사실 佐佐木는 홍콩에서 동경으로 돌아온 밤에 흥분하여서 잠들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그녀와 계약을 체결하는데 하루도 빠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다른 회사와 계약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佐佐木는 매우 강하게 정곡을 찔렀는데 이런 박력에 의하여 겁먹은 제작 본부장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
"알았다, 舟木씨 당신이 내일 당장 홍콩으로 가서 계약을 하시오."
그때 제작을 담당한 계약부 부장인 舟木는 임명되어서 등소저와 계약을 하러 갔었다.
계약 교섭을 위하여 그들은 구룡의 尖沙嘴에 있는 美麗華 호텔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등소저는 계약 대행 회사가 없었기에
그래서 모든 작업의 세부 사항은 모두 다 어머니 素桂가 돌보아 주었다. 그래서 舟木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였다: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음악 시장입니다. 어머니와 같이 일본으로 가서 공부하는 것이 응당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계약 조건을 설명하는 때에 등소저는 갑자기 말을 하였다:"일본에 한번 가 볼까 생각합니다."
舟木가 희망이 있다고 판단을 하었다. 그러나 등소저는 "나는 가기를 바란다"고는 꾸물거리며 말을 하지 않았서
그를 매우 신경쓰이게 하였다. 몸매도 아름답고 날씬하고 감각도 매우 맑고 신선하여서 바로 스타 가수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舟木의 등소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나요? 舟木는 초대하고는 이 첫 만남을 끝냈다.
舟木과 헤어진 뒤에 등소저는 어머니에게 말을 하였다: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머니 素桂는 대만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얻은 대답은 반대이었다,딸아이가 대답하였다:
"그럼 가지 않겠어요." 어머니도 대답하였다:"좋아",그러나 이때 등소저의 속마음은,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이미 이름이 나서 일류 가수가 되었는데, 외국에 가 도전을 반드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절로 일어났었다.
설령 함께 尖沙嘴의 커다란 上海飯店에서 식사를 하였지만 그녀의 응대는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알 수는 없었다.
그녀는 관심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일을 하고 싶어요, 舟木는 홍콩의 寶麗多公司로 부터 받은 정보는, 이미 홍콩에서의 수입도 좋기 때문에 부모가
반대하고 있어서 고심하여서 일본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홍콩의 寶麗多公司의 직원들은 등소저와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그래서 다른 여자 가수를 추천하려고,다른 여자 가수를 찾아보는 것이
어떠십니까? 하였다. 鄭東漢조차도 말을 하였다:설령 그렇다 해도,됐어요! 舟木는 여전히 매우 집착을 하였다.
특히 한 일본통이 그에게 말을 하였다:"등려군은 대만의 미소라 히바리(美空云雀) 입니다",
더욱더 그더러 전력을 다 기울이게 하였다.
舟木은 먼저 동경으로 돌아간 뒤에 다시 대만에 날아갔다,아버지 鄧樞를 설득하기 위하여서였다,대북시德惠街에 있는
統一飯店에서 鄧樞의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하면서,이야기를 한 뒤에 寶麗多의 정보가 정확하였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아버지는 현재의 수입도 매우 많아서 일본에 반드시 가야 할 필요가 없고 게다가 딸이 사람도 땅도 낯설은 곳으로
또 익숙하지 않은 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인식하고 있었다,그러나 舟木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 등소저 본인은 일본 진출에 흥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舟木는 더욱더 직접 北投의 등려군
본가로 가서 일본 진출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할 생각을 하였다,이때 舟木는 반대하는 정도가 이전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긴 설득을 하고는 마침내 등려군 아버지의 "그럼 당신에게 허락하겠소,舟木先生" 이런
대답을 얻었다,어머니는 이상의 말을 듣고는 또한 딸아이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결정하였다,舟木는 그들의 내놓는
모든 요구를 받았들였다:예를 들면 일본에서의 거주 문제,계약금,희망의 조건 등이었다,舟木는 모든 문제마다
등소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물어 보았는데 그녀는 언제나 대답하였다:“어머니에게 여쭈어 주세요”
느낌으로 그녀는 결코 불안감이나 걱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머니 素桂는 딸이 일본으로 가기 전에 일본어로 인사 등을 할 수 있도록 공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설령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동안이라도 중국인 가정교사에게 딸아이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등소저는 곧바로 졸리워하였는데 또한 이렇게 말을 하였다: 지금은 공부할 마음이 없어요,일본에서 일할
동안에 쓸 이름을 생각하여야 해요,어머니 素桂는 중국어 이름을 쓰는 것을 좀 더 좋아하였으나 그러나 등려군은
鄧·麗·君이라는 발음이 듣기에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여서 이 이름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홍콩에서 쓰는
TERESA TENG이라는 예명이 있기에,그래서 그녀는 어머니께 말을 하였다: 어머니,이것을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일본에 가게 되면 TERESA TENG이라는 예명으로 음반을 낼래요,일본 회사에도 이 이름에 동의하였어요.
일본에 진출하고서의 업무 경영은 와타나베(渡邊) 制作公司가 관리를 하고, 음반의 제작은 일본 寶麗多가 책임을
지게 되었다,일단 2년의 계약을 하였고,첫 계약의 일시는 1973년4월12일이었고 등려군 어머니와 등소저의 동의에
의하여 체결된 첫번 계약서에 첫해의 보수는 매월 일본 돈으로 25만元이었다,그때 일본 대학 졸업의 공무원의 최고직의
월급이 일본돈 55,600元이었다,계약 회사는 渡辺制作公司에 속한 자회사인 桑梓와 직접 등소저와 경영을 계약하였다,
다시 桑梓公司가 寶麗多와 계약을 맺는 형식이었다,잠시 신주쿠(宿在)의 아카사카(赤坂)의 新日本飯店에 머물렀으며
경비는 渡邊制作公司가 부담을 하였다,음악은 寶麗多와 渡辺音樂出版公司가 같이 공동으로 제작하기로 하였다,
등소저는 2%의 인세를 받게 되었다,이어서 일본에 진출하는 것에 대한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다,
1973년11월에 등려군 어머니와 등소저는 처음으로 일본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등소저는 겨우 20살이었다。
하네다(羽田) 공항에 직접 온 사람들 속에는 桜井五郎(사쿠라이 고로)도 그 안에 있었다,桜井五郎는 그때 渡辺制作公司의
유명 가수인 石田歩,大信田礼子,安妮·路易斯(앤 루이스)등 유명한 가수 등을 총괄 담당하는 매니저이었다,
어느 날 상사인 井沢健에게 불려 갔는데 일본에 진출한 등려군의 매니저 담당이 되라는 지시를 받았다,이래서 櫻井는
등려군의 모든 음반을 다 듣고는 무슨 노래를 골라서 데뷔하는 등려군이 부르게 할 지를 기획하기 시작하였다,
하네다(羽田) 공항에서 등소저를 본 첫 인상은 마치 福婆婆 같은 모습이지만 밉지는 않았다. 아름답지 않은 "福婆婆"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로 오히려 인정이되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소녀가 인기를 만히 끌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등소저는 태도가 온화하고 겉모습이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었다. 수많은 가수를 보았던 櫻井는 그녀에게서 일반적인
소녀와는 다른 장점을 발견하였는데, 예를 들면 비록 예술인은 아니지만 그러나 길거리를 가다가 한 번 보면 사람을
이끄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나 등려군은 훈련을 거친 뒤에 자연히 일종의 광채를 발산하는 인물에 속하였다.
어떤 방식으로 일본에 데뷔하여야 하는지 도대체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하는지? 사실 櫻井의 마음속에는 많은 불안감이 있었다.
데뷔한 노래는 渡邊制作公司가 주도하였는데 우상 트렌드를 시도하였다. 70년대의 일본 가요계 초기는 小柳琉美子의
[我的城下町: わたしの城下町] 天地眞理(아마치 마리)의 [水色之戀: 水色の戀], 歐陽菲菲의 [下雨的御堂筋: 雨の御堂筋] 등의
유행가가 인기가 있었는데,그래서 신곡은 天地眞理에게 부탁하여서 陳美齡이 작사하고 山上路夫(야마가미 미치오)가
곡을 쓰게 하였고,다시 南沙織(미나미 사오리)에게 부탁하여서 歐陽菲菲가 썼고 인기가 있던 筒美京平에게 작곡을 하게 하였다.
佐佐木와 櫻井는 함께 등려군을 데리고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가서 견학을 하였다,월요일 일본 NTV 방송국의
[紅白前十名]과 후지 텔레비전의 [夜晩的熱歌舞台: 한밤의 뜨거운 노래 무대]를 보러 갔었고,화요일에는 TBS의
“唱吧!演奏曲 부르자 연주곡”,하여간 날마다 여러 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을 가서 견학하였다,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모든 TV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을 참관하였다,"왜냐하면 장래에 우리는 반드시 이런 일본의 일류 유명 가수만이
오를 수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야 합니다," 佐佐木의 이런 격려의 말을 듣자,등소저의 눈동자는 곧바로 반짝이었고,
게다가 등소저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이었다,어떤 음악 프로그램이건 간에 모두 다 큰 악단이 반주를 하였다,
"동경은 실제로 너무 좋았어요,왜냐하면 시장이 매우 컸어요"
등소저는 잘못하는 일본말로 그녀가 받았던 인상을 이야기 하였다. 일본 활동이 결정된 뒤부터 등소저는
곧바로 노트에 일본어를 쓰면서 연습을 하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만일 질문을 받게 되면: "H~ai", (好嗎?:안녕하세요?)
어머니는 즉시 대답을 하였다: "H~ai", 전에 일본어를 말해 본 적도 없었고 일과 연관된 것도 일찍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아무도 모르게 그저 딸만 돌보았는데, 일반적인 일본의 스타 어머니와는 같지 않았다.
佐佐木 등은 식사하기에 적합한 음식점을 찾는데 진력을 하였다,어느 날 有樂町의 전철 아래에 있는 燒肉店에서
돼지 다리를 먹고 있었는데,등소저는 여러 차례 맛이 있다고 말을 하였는데 표정은 보기에 매우 기뻐보였다,
처음으로 일본 음식을 먹은 것은 涉谷東急广場의 9층에 있는 味田之屋라는 일본 요리점으로 鮭魚茶泡飯(연어お茶漬け)를
먹은 것이다. 그녀도 일본의 涮涮鍋和茶碗蒸(샤브샤브 냄비와 ちゃわんむし)를 매우 좋아하였다,
1974년2월7일 등려군은 감기 몸살로 집에서 하루 종일 잠을 잤었다,밤에 일어난 뒤 창가로 가서 밖을 보았는데
그녀는 하얀 빛깔의 물건이 바람이 휘날리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태어나 처음으로 눈 내리는 것을 본 것이었다,
등소저는 감동에 겨워서 환호를 하였다,일본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신선한 자극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중 등소저는 한차례 대만으로 돌아갔었고 일본에서 정식으로 1974년 2월15일에 출시를 위하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羽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赤坂王子飯店 구관의 기자 회견장으로 달려갔는데,회견장에는 이미
백명이 넘는 인터뷰 매체가 모여 있었다,등려군이 회견장으로 들어서자 간간히 사진 플래쉬가 끊임없이 터졌다,
이런 뜨거운 반응을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매우 놀랐다,등려군의 양켠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일본의 寶麗多회사의
五十岚 제작 본부장과 渡邊制作公司의 井澤이었다,등려군은 음반 출시 전에,회사는“香港的紅玫瑰 홍콩의 붉은 장미”라는
것으로 작사한 것을 홍보하였는데“香港最紅的歌星 홍콩의 가장 인기 있는 유명 가수”를 의미하였다,
그때 등소저는 이미 21살이었다,그러나 회사는 오히려 19살로 회견장에서 발표하였고,작년 11월에 등소저가 처음으로
일본에 와서 녹음한“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是今夜還是明天”를 내놓았고,미니스커트를 입은 등소저는 마치 정말로
같이 노래하는 것 같았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회견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 사람씩 장미꽃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佐佐木正가 막 떠나려 할 때 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TBS 방송국 기자인 鈴木明가 그에게 말을 하였다:
"이러면 너무나 지나친 것입니다. 일본과 대만의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을까요? 등려군은 대만 출신이니 당연히
그녀를 대만의 장미라고 고쳐 불러야 하지 않나요?"
사실 铃木는 일찍이 등려군이 16,7살 때 대만의 음악 홀 무대에 올라 공연할 때, 그녀의 공연을 보러 가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었다. 그때 그녀가 만일 일본 가요계에 있다면 반드시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등려군은 정말로 일본에 진출하게 되자 그를 매우 기쁘게 하였고 아울러 "최고의 대만 인기가수"를 오히려
"홍콩의 인기가수"로 불리게 되는 것이 그로서는 참을 수 없게 하였다. 佐佐木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는 홍콩에서 우연히
등소저와 만나서 계약을 하였기에 등소저는 "香港的玫瑰"의 가수라고 생각하였으나 사실은 정말로 지적된 것과 같았다.
등려군은 유행곡“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是今晚还是明天”로 데뷔를 하였는데, 겨우 석 달만에 45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였다. 渡邊公司와 같은 소속이었기에 최고 인기 가수인 森進一가 하는 4월26일부터 5월3일까지의
日劇의 공연 show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발행된 3만 장의 음반은 팔리지 않았는데 일본에서 당시의 노래
판매 순위표에는 겨우 75위에 진입하였을 뿐이었다. 등소저는 이 결과에 대하여 자책감을 느꼈다. 팔리지 않는 것은
내가 잘하지 못해서입니다, 나는 반드시 좀더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舟木는 여러 차례 자책하는 등소저를 위로하는
말을 하였다: 막 시작한 것은 모두 다 이렇습니다. 사실 홍콩에서 등소저를 발굴하였기에, 등소저와 의논하지 않았을 때,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 우아한 사람이라고 고쳐서 홍보하면 어떨까? 하는 그 사람이 우아하게 일본에 이미
진출하였고 게다가 등소저의“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是今晚还是明天”가 순위표 제75위 올라가 있으며,
우아한 처녀항(處女航)이 오히려 순위표 제24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물어보게 되었던 적이 있다,홍콩에서 자기의
지위는 우아한 수준을 훨씬 넘었으나 일본의 성적은 그녀를 오히려 지치게 하였고 이점이 등소저를 매우 우울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