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조선인 학교에도 출현한 군사교련제도와 배속장교의 존재
미성년자 금주금연법과 삭발령도 학원통제의 수단으로 사용
조선인의 참정권(參政權) 및 병역의무(兵役義務)에 대하여는 당국자(當局者) 간에 숙의(熟議)한 결과로 약 10개년 간 후에 부여(賦與)하기로 정하였는데 특히 외국(外國)에 재주(在住)하는 조선인에게는 외무성(外務省)의 주장으로 일본관민(日本官民)과 동일한 자격을 여(與)하기로 결(決)한 후 각국정부(各國政府)에게 통첩(通牒)하였다더라.
이것은 원래 『황성신문』이었다가 경술국치와 더불어 제호(題號) 변경을 강요당한 『한성신문』 1910년 9월 6일자에 수록된 「조선인 권리의무(朝鮮人 權利義務)」 제하의 기사 내용이다. 여길 보면 막 일본제국의 신영토(新領土)로 편입된 조선에 대해 병역의무의 부과를 10년간 유예한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으나 무엇보다도 언어(言語) 차이로 인해 지휘통솔이 쉽지 않은데다 함부로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판단이 깔려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식민통치자들이 “조선인의 병역문제는 언어통일(言語統一)과 의무교육(義務敎育)의 보급이 철저하게 이뤄지는 것이 선결과제”라는 언급을 곧잘 내뱉은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가 된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의 충직한 본토 신민(臣民)들만으로도 제국 군대의 유지를 감당할 수 있다고 보았으므로 구태여 ‘이등국민(二等國民)’에 불과한 식민지 백성을 대상으로 병력충원을 시도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이 더 큰 이유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은 어디까지나 제국헌법의 시행구역 밖에 있는 식민지(殖民地)였던 탓에 일본정부의 직할구역을 뜻하는 이른바 ‘내지(內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별지역의 하나로만 취급되고 있었다. 경술국치 당시의 시점인 1910년 8월 29일에 제정 공포된 칙령 제324호 「조선(朝鮮)에 시행(施行)할 법령(法令)에 관한 건(件)」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에 적용되는 법률은 조선총독의 명령(命令)인 ‘제령(制令)’의 형태이거나 “법률의 전부 또는 일부를 조선에 시행한다”는 별도의 칙령(勅令)이 있어야만 했다. 따라서 이곳은 법률상으로도 처음부터 「징병령(徵兵令)」의 적용대상지역에서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1931년)을 거쳐 중일전쟁(1937년)에 이르러 소모적인 침략전쟁이 지속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급변하기에 이른다.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인 1938년 4월 3일에 맞춰 시행된 「육군특별지원병령(陸軍特別志願兵令)」은 부족해진 병력자원을 식민지 조선에서 긴급 조달하기 위한 응급조치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다시 태평양전쟁(1941년)의 확전에 따라 1942년 5월 9일에는 조선에 대한 징병제 실시계획이 공표되었고 여기에는 일시동인(一視同仁)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현하여 명실상부한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도록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이 내세워졌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징병제 실시에 관한 연혁을 죽 살펴보노라면 이것과 맞물려 항상 함께 등장하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한 ‘군사교련제도(軍事敎練制度)’의 시행여부가 바로 그것이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24년 4월 12일자에 수록된 「조선학생(朝鮮學生)에도 군사(軍事)를 교련(敎練), 위선 공립학교부터 시작, 금년(今年)부터 실시방침(實施方針)」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중등 정도 20학교에 육군장교(陸軍將校)를 배치하여 군사교련(軍事敎練)을 하여 왔으며 조선에서도 일본인 중학교와 일본인을 위주(爲主)하는 실업학교에서는 벌써 군사교련을 실시하여 왔으나 조선인을 위주하는 고등보통학교나 일본인과 조선인이 공학하는 실업학교와 전문고등학교에서는 조선인에게 군사교련을 시키는 것이 국책상으로 보아 적당치 못하다는 해석으로 지금까지는 군사교련을 실시치 아니하고 지내왔었는데 최근에 이르러 일본인과 조선인이 공학하는 학교에서 조선인 때문에 일본인 학생에게 군사교련을 실시치 못하는 것은 균형(均衡)을 잃은 일이며 그렇다고 일본인에게만 따로 떼어 가르칠 수도 없으므로 마땅히 조선인에게도 가르치는 것이 옳은 일인데 그렇다면 공학하는 학교에 다니는 조선인에게 군사교련을 시키면서 조선인만 위한 학교에는 실시치 않는다는 것은 또한 모순이라 하여 총독부 내에서 여러 가지로 물론이 분분하던 바 결국은 일체로 조선인학교에도 군사교련을 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낙착되어 조선군사령부의 동의까지 얻은 후 벌써 학무국원을 도쿄(東京)로 파송하여 육군성(陸軍省)과 문부성(文部省)에 장교파송과 총기공급을 교섭케 하였는데 모든 경비는 총독부 비용으로 하리라 하며 교섭이 즉시 낙착될 터이므로 금년부터 실시하게 되리라더라.
[비용관계(費用關係)로 점진적 실시(漸進的 實施)]
군사교련을 조선인에게 실시하는 것이 원칙으로 보아 옳다는 의론이 성립되어 별항과 같이 실시를 보게 되었으나 공사립을 일제히 실시하자면 많은 장교와 경비가 소용되므로 도저히 일조일석에 일시에 실시할 수는 없으며 또한 조선인에게 군사교련을 시키는 것이 과연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할는지 의심되지 않는 바도 아니므로 총독부에서는 우선 금년도부터는 공립학교에만 실시하고 차차 점진적으로 사립학교 전부에 보급하리라는 바 공립학교에만 실시하자도 4, 50명의 장교가 필요하며 총검도 필요하나 육군성에는 한꺼번에 그리 많은 인원과 기구를 내어줄 수 없다는 의향을 가지었으며 더욱 총독 전부 무료로 대여할 능력이 없다는 회답이 있었으므로 일부에서는 혹은 목총(木銃)을 사용하게 될는지도 모른다더라. …… (하략)
이를 테면 ‘태생적으로’ 병역의무를 지닌 일본인 학생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법률적으로’ 아무런 병역의무를 질 필요가 없는 조선인 학생들까지 끌어들여 군사교련의 대상에 포함해야 하는지가 계속 논란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른바 ‘일선공학(日鮮共學)’의 형태로 운영하는 관공립학교도 여럿 존재하였으므로 이 경우에 조선인 학생들은 제외할 것인지의 여부도 현안문제로 떠오르곤 했다.
아무튼 이러한 논의의 결과로 1926년 4월 1일 이후에는 병역의무와 직접 관계가 있는 공립중학교(公立中學校, 일본인 전용학교)의 전부(全部; 10개교가 여기에 해당)와 일본인 위주의 관립경성사범학교, 경성공립상업학교, 인천남공립상업학교, 부산제일공립상업학교 등 14개교가 일괄 군사교육의 대상학교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28년 9월에 개시되는 제2학기(第二學期)부터 전문학교(專門學校) 과정에 대해서도 군사교련을 실시하는 방침이 결정되면서, 그해 7월 3일에는 경성제국대학(본과 및 예과), 경성고등공업학교, 경성고등상업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 등 각 학교에서 복무할 육군현역(陸軍現役)인 배속장교(配屬將校)의 임명이 이뤄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 학교에 대한 군사교련의 실시와 배속장교의 배치가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은 1934년 하반기의 일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조선일보』 1934년 7월 18일자에 수록된 「제일(第一) 제이고보(第二高普)에 금추(今秋)부터 장교배치(將校配置), 평양상업(平壤商業), 의전(醫專) 양개소(兩個所)에도, 조선인 군사교련(朝鮮人 軍事敎練)의 일보(一步)」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기보=조선인의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에 현역장교를 배속(配屬)시켜 군사교련을 시키려는 안은 이미 결정된 이래 그 배속관계를 당국에서 고구하던 중 낙착되어 각각 관계 학교에 통기하였다는 바 이것은 예산과 및 배속장교 수효관계로 각 학교에 일시에 다 하지는 못하고 우선 경성의 제일, 제이의 두 곳 공립고등보통학교와 대구(大邱), 평양(平壤)의 두 곳 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립상업학교(平壤公商) 등에만 우선 배치키로 결정하였는데 오는 2학기 초부터는 실제 교련에 착수하게 되리라 한다.
종래 고등보통학교로는 전주(全州)와 청주(淸州)의 두 곳 고등보통학교에 장교를 배속시키고 교련하였는데 이는 그 두 지방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일본 내지인 학생도 공학을 하는 관계상 병역의무연한 때문에 그 학생들을 교련키 위하여 배속시켰던 것이므로 순수한 조선학생의 교련을 위한 장교배속은 이번이 처음이라 한다. 이 외에 19사단 관하 학교의 장교배속은 아직 결정되지 아니하였다 한다.
이보다 약간 앞서 『매일신보』 1934년 6월 27일자에는 「조선인(朝鮮人)에 대한 병역의무(兵役義務)의 전제(前提), 고등보통학교(高等普通學校)에 군사교련(軍事敎練)을 8월(月)부터 실시(實施)?」라는 기사가 등장한 바 있다. 여기에 나오는 제목에서 보듯이 이러한 조치는 그 자체로 “머지않은 장래에 조선인에 대해서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려는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해가 바뀌어 1935년 8월 1일에는 다시 동래고등보통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광주고등보통학교, 함흥고등보통학교, 경성(鏡城)고등보통학교, 춘천고등보통학교, 평양고등보통학교 등 7개 조선인 학교에 대해 군사교련을 위한 배속장교의 추가배치가 이뤄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결과로 각 학교에서는 때마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마치 군인들처럼 ‘교련사열(敎練査閱)’을 받는 것이 하나의 연례행사로 정착되기도 했다.
『매일신보』 1943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이 의기(意氣)를 보라, 징병진발(徵兵進發)의 각학교 교련사열 시작(各學校 敎練査閱 始作)」 제하의 기사에는 흡사 병영지(兵營地)의 연병장(練兵場)과 하등 다를 바 없이 변한 학교 교정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명년부터 실시되는 세기적인 명예의 징병을 앞두고 반도 청년은 감격과 동시에 교련으로서 황군의 자질을 닦고 있다. 이리하여 적 미영격멸에 불붙은 결의로 심신을 단련하고 전기(戰技) 훈련으로써 전선 8만 학도는 학원도 결전장으로 통한다는 굳은 결의 아래 징병에의 진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군 당국에서는 27일 중앙중학(中央中學)을 필두로 하여 징병제 실시 후 최초로 18년도(1943년도) 전선학교 교련사열을 실시하여 피 끓는 총후학도의 의기와 감투정신을 드날리기로 되었다.
사열 첫날인 27일 오전 8시 정각 사이토(齋藤) 중위 지휘 아래 8백여 중앙 건아 5개 중대는 군장도 늠름한 태도로 조선 제〇〇부대 오가와라(大河原) 대좌를 사열관으로 하여 사열을 받았다. 사열은 나카이(中井) 조선군 병무부장, 후지이(藤井) 도 학무과장, 이밖에 전선 각지로 파견될 사열관 12명과 부내 각 중등학교 배속장교들의 참관 아래 거행되었는데 우선 전교생은 오가와라 사열관의 사열을 받고 지축도 흔들릴 만큼 우렁찬 걸음걸이로 분열식을 한 다음, 각 학년별의 교련사열이 시작되었다.
이어 제1학년의 각개훈련(各個訓練)과 체조, 제2학년의 밀집훈련(密集訓練), 4학년생의 일돌필중(一突必中)의 기세에 차 총검도와 사격으로 교련장은 가장 긴장된 가운데 평소의 훈련이 그대로 전개되고 사열관의 눈은 그들의 일거수 일동작을 살핀다. 오후에는 제3학년의 전장운동(戰場運動), 수류탄(手榴彈) 던지기, 방독구호작업, 5학년의 전투교련, 진중근무(陣中勤務) 상황 등으로 진지감투의 뜻있는 교련사열은 오후 4시 경 다음과 같은 오가와라 사열관의 강평으로 사열을 마치었다.
그런데 특히 이 날은 장차 군국의 어머니로서 책임이 큰 경기고등여학교(京畿高女) 4학년생 160여 명과 다음 날의 황군이 될 재동국민학교(齋洞國民學校) 6학년 학동들의 견학이 있어 더 한층 교련사열에 이채를 띄웠다.
[오가와라 대좌 강평(大河原 大佐 講評)]
정식 교련의 역사가 짧은 학교로서 오늘의 교련상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단 훌륭하였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볼 때 제군은 열의는 있으나 아직 적을 격퇴하고야 만다는 기백이 아직도 적음을 그 자세에서 알 수 있었다. 좀 더 기백을 갖추고 기술을 연마하여주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의 성과 연을 가지고 교련의 참된 정신을 파악하여 훈련을 받아 나간다면 1년 이내로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더욱이 이제의 우리 학도는 언제라도 총을 잡고 전선으로 나갈 수 있다는 책임을 자각하여 군사교련에 한층 분발 정진하여 주기를 바란다. (사진은 교련을 사열하는 광경)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한창 조선인 학교에 대한 교련교육의 실시를 강화하던 바로 그 시기와 맞물려 ‘미성년자에 대한 금주금연’을 대단히 강조하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이를 ‘법제화’하여 제재를 가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곧잘 신문지상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알고 보니 이 역시 일제에 의한 조선인 병력동원계획과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미성년자 끽연금지법 및 음주금지법의 제정과 적용 연혁
일자 | 내용 |
1900.3.7 | 법률 제33호 「미성년자 끽연금지법」 (시행일은 4월 1일) |
1922.3.30 | 법률 제20호 「미성년자 음주금지법」 (시행일은 4월 1일) |
1938.3.25 | 칙령 제145호 「미성년자 끽연금지법 및 미성년자 음주금지법을 조선(朝鮮), 대만(臺灣) 및 화태(樺太)에 시행하는 건」 (시행일은 4월 1일) |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8년 2월 2일자에 수록된 「지원병제도(志願兵制度)에 수반(隨伴), 미성년자 금주금연법령, 체위향상(體位向上) 사회교풍상(社會矯風上) 긴급문제(緊急問題), 4월부터 실시예정」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이러한 미성년자 금주금연령이 지원병제도의 실시에 앞선 선결조치로 시도된 사실이 엄연히 기록되어 있다.
이번 새로이 실시를 보게 되는 지원병제도에 대하여 한 가지 여기에 따르는 새로운 법령이 그 제정과 실시를 급히 하고 있는 것이 있다. 즉 총독부에서는 일반 청소년들의 체위향상을 위하여 미성년자(未成年者)들의 금주금연법(禁酒禁煙法)을 내지(內地)와 같이 시행하고자 얼마 전부터 원안을 작성하던 중 작년 가을에 법제국(法制局)에 회부하여 심의를 청하여 왔었다.
그리하여 조선인의 지원병제도 실시에 따라 청소년들의 체위향상은 현하의 절실한 문제로 되어 있는 만큼 위선 청소년의 건강을 해롭게 하는 음주 끽연을 절대로 금지하고자 하는 것이 선결문제로 되어 있으므로 총독부에서는 급속한 실현을 통감하여 법제국의 심의를 재촉하게 되어 이번 4월부터는 이것이 실시하게 되리라 한다. 물론 이 발령실시에 따라 반도 장래의 국방을 짐지고 나서는 반도 청소년들이 건강이 확보될 것으로 이에 대한 기대는 자못 큰 바 있으며 동법의 내용은 내지의 법률을 골자로 한 것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이 시기에 ‘삭발령(削髮令)’도 함께 내려진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시국(時局)의 각성(覺醒)’이라는 미명 아래 1937년 11월 5일에는 학무국장 명의의 통첩(通牒)이 발령됨에 따라 관립 대학교 및 전문학교 학생은 일괄하여 군대식으로 완전 삭발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더구나 정무총감을 비롯한 총독부 관공리들이 솔선수범하여 이른바 ‘마루보즈(丸坊主, 삭발머리)’를 하는 장면이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이밖에 『매일신보』 1942년 5월 7일자에 수록된 「존폐기로(存廢岐路)의 학원구기(學園球技), 최후(最後)의 단안(斷案)을 주목(注目), 각도(各道) 학무 체육관 회의(學務 體育官 會議)를 초집(招集)」 제하의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상황이 채록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전시하 국민의 중견층인 청소년의 체육훈련은 언제든지 총칼을 메고 전장에 설 수 있도록 유검도, 사격, 총검술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국방훈련에 중점을 두어야 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시체육훈련의 목표가 이와 같이 확립됨에 따라 종내 중등, 전문학교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로 주력하여 오고 있는 야구, 정구, 축구, 농구, 배구 등 구기(球技)가 재검토의 도마 위에 서게 된 것도 당연한 결과인데 이 경기가 모두 일반대중의 관람흥미의 초점이 되어 있는 것인 만큼 구기의 존폐문제는 사회의 주목을 끌고 있다.
4일 경성고등상업학교에서 열린 대학 전문학교 체육진흥회 평의원회에서는 금년 6월부터 순차로 거행하는 각학교 대항경기종목에서 구기는 전부 빼버리기로 된 것은 총독부 학무당국의 구기에 대한 취급방침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한층 더 경기관계자는 물론 일반의 큰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 문제에 관한 총독부 당국의 결해를 타진하면
1. 대학 전문은 전시하 수업연한의 임시단축에 의하여 2년 반 내지 3년 반으로 짧아진 것
2. 대학 전문학생은 졸업하면 곧 군, 기타 생산력 확충산업에 종사하는 것
3. 일부 선수만이 독점하는 폐해가 많은 구기를 학생수가 적은 대학, 전문학교에서 치중하는 것은 경비부담, 기타 여러 가지 관계로 불합리한 것
등 여러 점에 있어서 대학 전문학교의 경기종목에서 빼는 것이 적당하다는 견해이나 중등학교에서는 연령이 한창 발육하는 때인 것과 재학연한이 긴 것 등 대학 전문학교와는 사정이 다르므로 단체정신을 양성하는데 적당한 각종 구기는 선수제도의 폐해에 빠지지 않는 정도에서 필요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대항경기에 구기를 인정하는 여부에 대하여서는 신중히 연구할 필요가 있으므로 오는 12일 오전 8시 총독부 제2회의실에 각도 학무과 학교체육관계관 회의를 열고 충분히 협의한 결과에 의하여 총독부 당국의 최후 단안을 내리기로 되었으므로 이번 회의 결과는 크게 주목을 끄는 바이다.
흔히 단체경기로 인식되고 있던 구기종목조차도 전시체제 하에서는 총검술이나 사격과 같은 국방훈련종목에 밀려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별의별 학원통제의 수단을 강화하여 조선인 학생들을 거듭 옥죄는 것도 모자라서, 마침내는 그저 ‘이등국민’으로만 업신여기던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까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지게 만든 것은 그만큼 일제 패망의 순간이 임박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했던 셈이다.
[*] 이 글은 『민족사랑』 2023년 7월호에 게재하였던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각주 1) 1918년 4월 16일에 제정 공포된 법률 제39호 「공통법(共通法)」 (별도의 칙령에 의해 1918년 6월 1일부터 시행)에 따르면 일본은 크게 ‘내지(內地)’, ‘조선(朝鮮)’, ‘대만(臺灣)’, ‘관동주(關東州)’라는 지역으로 구분하며, ‘화태(樺太, 사할린)’는 내지에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1923년 3월 28일에 제정 공포된 법률 제25호 「공통법(개정법률)」 (시행일은 1923년 4월 1일)에 따라 지역 구분에 있어서 ‘남양군도(南洋群島)’가 새로 추가되었다.
각주 2) 이 칙령은 1911년 3월 24일에 이르러 법률 제30호 「조선(朝鮮)에 시행(施行)할 법령(法令)에 관한 법률(法律)」로 대체되었다.
각주 3) 일본의 「징병령(徴兵令)」은 1873년 1월 10일에 태정관포고(太政官布告)로 처음 등장하였다가 1889년 1월 22일에 법률 제1호로 제정되었으며, 1927년 3월 31일에 이르러 법률 제47호 「징병령(개정법률)」 (시행일은 1927년 12월 1일)을 통해 이를 「병역법(兵役法)」으로 개칭하였다.
각주 4)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는 1942년 3월 2일 법률 제4호 「병역법 중 개정법률」 (시행일은 1943년 8월 1일)을 통해 징집대상자(徵集對象者)에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 중 호적(戶籍)에 관한 규정(規定)의 적용(適用)을 받는 자(者)”를 추가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각주 5) 이에 관련된 것으로는 『매일신보』 1926년 2월 25일자에 수록된 「군사교육 실시결정(軍事敎育 實施決定), 병역의무관계(兵役義務關係)로 원칙(原則)으로써 내지인 학생(內地人 學生)에게 과(課)할 방침(方針)」 제하의 기사 및 『조선일보』 1926년 2월 26일자에 수록된 「군사교육 실시범위(軍事敎育 實施範圍), 전부(全部) 14교(校)」 제하의 기사가 남아 있다.
각주 6) 교련제도와 육군현역 배속장교의 배치에 관한 규정으로는 1925년 4월 11일에 제정 공포된 칙령 제135호 「육군현역장교학교배속령(陸軍現役將校學校配屬令)」과 1925년 7월 2일에 제정 공포된 칙령 제246호 「문부대신 소할외(文部大臣 所轄外)의 학교(學校)에 육군현역장교(陸軍現役將校)를 배속(配屬)하는 건(件)」이 있다. 이에 따르면 “관공립의 사범학교, 중학교, 실업학교, 고등학교, 대학예과, 전문학교, 고등사범학교, 임시교원양성소, 실업학교교원양성소 또는 실습보습학교교원양성소에는 남생도의 교련을 관장토록 하기 위해 육군현역장교를 배속한다”고 하였고 “사립의 중학교, 실업학교, 고등학교, 대학예과 또는 전문학교 등은 당해학교의 신청에 따라 육군현역장교를 배속할 수 있다”고 정하였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궁내대신, 문부대신 이외의 각성대신, 조선총독, 대만총독, 관동장관 또는 화태청장으로부터 협의가 있는 때에는 육군대신이 소할학교에 육군현역장교를 배속할 수 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각주 7) 이에 관한 것으로는 『조선일보』 1935년 8월 4일자에 수록된 「7개 고보교(高普校)에 장교(將校)를 배치(配置), 군사교련을 시키기 위하여 1일(日) 육군이동(陸軍異動)에 발표(發表)」 제하의 기사 및 『동아일보』 1935년 8월 4일자에 수록된 「각지방 고보(各地方 高普)에 장교(將校)를 배치(配置), 1일부(日附)로 각각 발령(發令)」 제하의 기사가 있다.
각주 8) 교련사열은 1925년 4월 11일의 칙령 제135호 「육군현역장교학교배속령」에 포함된 “제4조 육군대신은 현역장교로써 본령에 의해 장교를 배속한 학교에 있어서 교련실시의 상황을 사열(査閱)토록 할 수 있다”라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진행되었다.
각주 9) 일찍이 1900년 3월 6일에 제정 공포된 법률 제33호 「미성년자 끽연금지법(未成年者 喫煙禁止法)」 (시행일은 4월 1일)에 따르면 “미성년자는 흡연을 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담배와 흡연기구를 몰수하고, 친권자 또는 감독자에 대해 1원(圓)이하의 과료(科料)를, 또한 미성년자에게 담배와 기구를 판매하는 자는 10원 이하의 벌금(罰金)에 처하도록” 했다. 그리고 1922년 3월 29일에 제정 공포된 법률 제20호 「미성년자 음주금지법(未成年者 飮酒禁止法)」 (시행일은 4월 1일)에는 “미성년자는 주류(酒類)를 음용(飮用)할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주류와 그 기구를 행정처분으로 물수 폐기하고, 이를 제지하지 못한 친권자 또는 감독자와 주류 판매자 및 공여자에 대해 과료(科料)를 처분하도록” 정하고 있었다.
각주 10) 여기에 나오는 ‘보즈(坊主)’는 ‘승려’를 뜻하는 표현이며, 이것과 결합하여 빡빡머리를 가리켜 ‘마루보즈’라고 하였다. 이것과 비슷하게 그 당시의 신문지상에는 ‘중머리’, ‘중대가리’, ‘백호머리(배코머리)’, ‘까까머리’와 같은 표현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032201 조선에 대한 징병제도(徵兵制度)의 실시가 확정된 사실을 알리는 『매일신보』 1942년 5월 10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애당초 식민지 조선은 이른바 ‘내지(內地)’와는 구분되는 특별지역인 탓에 ‘병역법(兵役法)’의 적용대상에서 빠져 있었으나 전세가 다급해지자 일제는 조선인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기에 이른다.
032202 병역의 의무가 없던 조선인 학교에 대해서는 군사교련의 실시와 배속장교의 배치가 결정된 사실을 알리는 『조선일보』 1934년 7월 18자의 보도내용이다. 이에 따라 1934년 제2학기부터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나중의 경기중학교)와 경성제이공립고등보통학교(나중의 경복중학교)를 대상으로 하여 최초로 군사교련수업이 개시되었다.
032203 『매일신보』 1928년 7월 6일자에는 조선 내 각 전문학교에 대한 군사교련의 실시와 관련하여 각 지역의 부대에서 선발된 육군현역장교들이 해당 학교에 ‘배속장교(配屬將校)’로 임명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032204 『조선총독부관보』 1942년 5월 23일자에 게재된 총독부 훈령 제29호 「육군현역장교의 배속을 받은 학교의 교련교수요목(敎練敎授要目)」의 말미에는 학교종류별 및 학년별 교련수업 시수표(時數表)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중학교(옛 고등보통학교 포함)에서는 매주 2~3시간의 교련수업과 아울러 매년 4~5일간의 야외연습(野外演習)을 이행해야 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032205 『매일신보』 1943년 9월 28일자에 소개된 중앙중학교의 교련사열(敎練査閱) 장면이다. 여기에는 징병제의 실시를 1년 앞두고 군사교련을 통해 총후학도의 의기와 감투정신을 한층 더 발휘해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032206 ‘미성년자 금주금연법’이 조선에서 실시된 지 1주년이 되는 때를 맞이하여 이 법령의 철저한 준법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9년 11월 7일자의 보도내용이다.
032207 『동아일보』 1937년 11월 7일자에는 조선 내 각 전문학교 학생들에 대한 ‘삭발령(削髮令)’과 관련하여 전문학교별 축발자(蓄髮者, 하이칼라)와 삭발자(削髮者)의 비중에 대한 조사내역이 수록되어 있다. 이 당시 관립전문학교는 물론이고 연희, 보성, 세브란스의학, 중앙불교 등 조선인 사립전문학교도 이러한 삭발령의 대열에서 비껴나질 못하였다.
032208 까까중머리가 된 오노 정무총감(大野 政務總監)의 모습이 소개된 『매일신보』 1938년 8월 2일자의 보도내용이다. 이 당시는 전시체제 하에서 질실강건(質實康健)을 내세워 총독부 관공리는 물론이고 각 학교의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군대식으로 삭발토록 독려하는 일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