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浮石寺)
부석사(浮石寺)는 사철 어느 때 가도 그 맛이 다르며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감회를 주는 명찰이자 경승지이다. 그것은 아마도 종교적 신념에 따른 창건 의지가 분명하고, 그 터와 1,300년을 넘게 지켜온 가람이 종교적 신념을 고스란히 받들어 지금까지도 한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창건조인 의상대사(義湘大師)를 받드는 선묘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교리에 어둡고 신심도 없는 중생들의 마음까지 붙들어주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나라 절은 일반적으로 아늑한 산속에 자리잡게 마련인데, 부석사는 모습이 훤히 드러나는 산등성이에 길다랗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매우 분주하게 오가는 데에는 부석사가 지닌 이런 풍광이 큰 몫을 한다. 부석사는 신라의 삼국통일기인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은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돌아온 뒤 다섯 해 동안 양양 낙산사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
의상이 주석하여 화엄사상을 닦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부석사는 화엄 종찰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인 의상의 문하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는 노비 출신도 있고 홀어머니를 봉양하는 가난한 군인도 있었으며 법을 물으러 오는 학자들도 있었다. 의상의 손제자인 신림 이후 9세기에 들어 부석사는 ‘대덕’(大德)의 호칭을 받은 법사가 많이 배출되었고 승려가 되기 위해 부석사에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대중적인 지위를 확보하였다. 의상 때에 조촐했던 규모도 제법 커져서 대석단 위에 여러 당우를 갖춘 거대한 가람이 이루어졌고, 지금의 강릉지방인 명주(溟州)에 장사(莊舍)를 보유할 만큼 재정 기반도 넉넉해졌다. 부석사는 초창 때보다도 9세기 이후 왕권과 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후삼국이 쟁투를 벌일 때 궁예가 부석사에 쳐들어와서 벽에 그려진 신라 왕의 초상을 칼로 내리쳤다는 기록으로도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나한전 앞마당에서 바라본 부석사 건물들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 16년(676) 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한 부석사의 규모는 조촐했는데 손제자인 신림 이후 차츰 중창되면서 비로소 화엄종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화엄종의 종찰인 부석사에서 하대의 새로운 기운인 선종의 산문을 여는 승려들이 출가 초기에 화엄학을 수학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신라의 화엄종은 교종이었고 이는 호국불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신라 하대의 선종은 지방의 호족들을 기반으로 하여 그 사회적 성격이나 기반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부석사에는 선종 구산 가운데 동리산파의 개조인 혜철(785~861)이 800년부터 7년 동안 머물렀고 성주산파의 무(800~888)도 820년 무렵에 여러 해 머물다 당나라로 유학갔으며, 문경 봉암사의 창건주인 희양산파의 개조 도헌(824~882)은 9세에 출가하여 17세에 계를 받을 때까지 부석사에서 공부했으며, 사자산파 도융의 제자인 절중(826~900)도 15세에 부석사에 와서 화엄경을 들었다.
고려시대에는 원융대덕(圓融大德, 964~1053)이 주석하면서 대장경을 찍었는데, 그 경판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고려 말에 이르러 공민왕 때에 국사로 봉해진 진각국사 원응(圓應, 1307~1382)은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건하였다. 아마 공민왕 7년(1358)에 입은 왜적의 병화로 무너진 전각들을 다시 세워야 했을 것이다.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선달’이란 ‘부석’의 뜻을 풀어 한글로 적은 ‘선돌’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세월을 거듭하면서 부석사는 초기에 의상이 터를 잡을 때의 조촐한 모습보다는 규모와 위엄을 지닌 면모를 더해갔다. 배불숭유의 조선시대에도 부석사는 웬만한 사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고 1493년에는 단청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1555년에 소실된 안양루를 20년 뒤인 1576년에 중건하는가 하면 범종각도 1746년 불탔을 때에 곧바로 다시 지을 만큼 부석사는 힘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기록인 『순흥읍지』에는 무량수전, 조사당말고도 취원루, 그 북쪽에 장향대, 무량수전 동쪽에 상승당, 안양문 앞에 법당·선당·승당과 종각 아래에 당우가 대여섯 채나 있던 모습을 전하고 있으니 지금보다도 절이 더 꽉차 보였음직하다.
근대에 들어서는 1916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수리하였고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이라고 하였다.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전체 사역을 정비하면서 일주문과 천왕문, 승당 등을 새로 지었으며, 1996년 초에는 유물각을 개수하여 유물전시각으로 꾸몄다. 부석사에는 9세기 때 쌓았다고 여겨지는 대석단과 함께 아름다운 석물들이 많다. 무량수전 앞의 석등은 균형미에 장식미를 더한,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아름다운 석등이다. 절 초입의 늘씬한 당간지주도 석등과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무량수전 마당 동쪽에는 균형미를 갖춘 삼층석탑이 있으며 경내에는 1967년에 인근 동쪽 골짜기의 옛절터에서 옮겨온 삼층석탑 한 쌍과 비로자나불, 아미타불도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의 유물로 대표적인 것은 무량수전에 모신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이며, 조사당에 있던 14세기의 고려시대 벽화는 지금 유물전시각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이와 함께 고려대장경 각판도 귀중한 유물이다. 부석사의 건물 가운데 무량수전과 조사당은 고려시대의 건축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사에서 거의 시조격에 해당하는 고식(古式)을 보여준다. 무량수전 앞의 안양루와 한 단 아래의 범종각은 조선 후기의 건물이지만 그 터에 알맞은 규모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석사의 가장 큰 멋과 맛은 뭐니뭐니 해도 부석사가 앉은 자리, 소백산 연봉을 바라보는 시야와 더불어 그러한 시야를 마련해주는 절집의 조화로운 화음, 유물들이 어우러짐을 하나하나 겪어가며 느끼는 체험일 것이다.
부석사 삼층석탑 앞에서 바라본 무량수전과 소백산맥무량수전 영역에서 바라다보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소백산맥이 장쾌하다. 이처럼 소백산맥의 수많은 봉우리들을 절마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봉황산 중턱까지 수많은 계단과 석축을 쌓으며 절을 지은 안목이 놀랍다. 왕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는 부석사. 의상은 왜 꼭 이 자리에 절을 지었을까? 부석사는 다른 어느 절보다도 그런 의문이 강하게 들 만큼 그 위치가 독특하다. 금강산이나 지리산 같은 어느 명산에 있는 절이라도 이처럼 자리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는 절집은 또 없으리라. 이 자리는 다만 뛰어난 경승을 누리는 곳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부석사가 자리한 봉황산은 태백산에 등줄기를 대고 있다. 태백산 산줄기는 남쪽으로는 각화산·청량산으로 뻗고, 서남쪽으로는 선달산·형제봉·국망봉·연화봉·도솔봉으로 이어지는데, 이 서남 방향의 천연 성벽은 곧 지금의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가르는 경계이기도 하다. 도솔봉의 바로 위쪽은 지금도 충청북도에서 경상북도로 넘어가는 주요한 길인 죽령이지만,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당시에는 신라의 변경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또 봉황산 북쪽의 마아령을 넘으면 충북 영춘인데 그곳에는 고구려 온달 장군에 얽힌 전설이 있는 온달성이 있다. 그 양쪽을 동시에 아우르는 곳이 이곳 봉황산 중턱이니, 부석사는 이곳을 발판으로 북쪽을 경영하려는 통일의 의지를 심기에 충분한 곳이다. 그런 뜻에서 왕은 죽령 근방에 절을 세우기를 명했고 의상은 다섯 해의 탐색 끝에 이 자리를 잡아낸 것이리라. 당나라의 침공 소식을 전하려고 유학을 중도에 접고 부랴부랴 돌아온 의상이고 보면 그가 창건한 절이 호국불교의 성격을 지녔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교통, 숙식 등 여행에 필요한 기초 정보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에 있다. 소수서원 앞에서 오른쪽 부석사로 난 931번 지방도로를 따라 10.4㎞ 가면 부석 면소재지인 소천리 사거리가 나온다. 소천리 사거리에서 앞으로 계속 난 935번 지방도로로 3.2㎞ 가면 부석사 주차장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부석사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영주에서 풍기·순흥을 거쳐 부석사까지는 하루 16회 시내버스가 다닌다. 영주에서 935번 지방도로를 따라 진우를 거쳐 부석사까지 다니는 시내버스도 하루 15회 있다. 부석사 주차장 주변에는 음식점과 민박이 여러 곳 있다.
가람 배치
부석사의 참맛은 아래로부터 차근차근 걸어올라가면서 절집이 들어앉은 모습을 하나하나 음미할 때 점점 깊어진다. 산자락 경사를 최대한 이용하여 아래에서부터 위로 상승해가는 절의 배치는 절대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만큼 올라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발견해내는 기쁨이 남다르다. 부석사의 공간을 크게 나누어보면 아래로부터 일주문 공간, 천왕문 공간, 안양루 공간, 무량수전 공간이 차례로 이어지고, 무량수전 뒤쪽으로 조사당과 자인당 공간이 있다.
부석사 가람배치
주차장에서 부석사 쪽으로 접어들면 자신도 모르는 새 개울을 건너게 된다. 흔히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부석사의 영역은 여기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절은 개울을 건너면서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매표소를 지나 경사 느린 박석길을 따라 은행나무 사이로 어느 정도 가면 ‘太白山 浮石寺’라는 현판이 걸린 훤칠한 일주문이 나온다. 부석사가 앉은 곳은 봉황산 자락이지만 봉황산은 크게 보면 태백산의 한 봉우리이니, 부석사는 태백산 품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일주문은 1980년 부석사를 정비할 때 새로 세운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양쪽에 빽빽하고 탐스러운 사과나무밭이 펼쳐진다. 길의 왼쪽에 삐죽이 솟은 당간지주가 보이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그곳에서 멀리 몇 계단 위로 보이는 문이 천왕문이다. 당간지주 못미처에는 최근에 세운 부석사 중수기적비가 있는데 너무 커서 어쩐지 어색하다. 천왕문 양쪽으로 사천왕이 버티고 서 있는데, 무서운 표정을 지으려 하면서도 어딘지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1980년에 새로 마련한 이 천왕문과 사천왕은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문을 나서면 너른 축대가 양옆으로 펼쳐진 대석단이 있는데, 마주하는 이의 기를 압도한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레 오르면 단아한 삼층석탑 한 쌍이 여름이면 탐스러운 불두화가 피어 길게 이어지는 길 양쪽에 서 있다. 석가탑을 본받았지만 쌍탑을 이루고 있는 점이나 아담한 크기에 지붕돌이 점점 작아지며 왜소해진 점으로 미루어 볼 때 9세기쯤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부석사에 세워졌던 것이 아니고 인근 동쪽 골짜기 옛 절터에서 1958년에 옮겨온 것이다. 삼층 쌍탑의 서탑 뒤편으로 나란히 있는 불상 세 분은 1994년에 인근 북지1리에서 모셔다놓은 것이다.1) 이런 탑이나 불상은 애초의 부석사 가람 배치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1,300년 역사가 켜켜이 쌓인 절집이니 어찌 처음의 모습만 고집할 수 있을까. 그 왼편으로 요사채가 자리잡았는데 최근에 확장하여 부석사 전체의 균형이 깨어지는 듯도 하다. 오른쪽으로는 1996년 초에 두 채를 연이어 완성한 유물전시각이 있다.
부석사 삼층 쌍탑
부석사 인근 동쪽에 있는 절터에서 옮겨온 탑으로 아담한 크기에 지붕돌이 점점 작아지며 왜소해지는 모습이 9세기쯤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계속 나아가면 범종루 아래로 길이 이어진다. 누각 밑으로 빠져나오면서 오른편으로 안양루를 바라보게 되지만, 그보다 먼저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곳에 낮은 돌기둥 두 쌍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괘불지주2)로, 큰 행사가 있을 때 내거는 괘불을 붙들어 맬 장대를 양쪽에서 버텨주는 기둥보조돌이다. 그 서쪽에 있는 단정한 집이 조사당 옆에서 옮겨온 취현암인데 본래 1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이다.
정면을 바라보면 다시 엄청난 대석단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대석단 위에 있는 안양루의 ‘安養’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니 안양루를 지나면 극락이 되는 셈인데, 극락에 다다르는 길은 이리도 멀고 숨가쁘다. 다시 계단을 두 단 오르면 이제 안양루 밑으로 해서 무량수전에 이르게 된다. 이 안양루 축은 이제까지의 남서향이었던 축과는 살짝 비껴서 정남을 향하고 있다. 이런 방향 전환으로 숨을 틔워 엄격한 대칭이나 계층이 주는 위압을 누그러뜨리면서도 수직의 권위는 한껏 살리고 있다. 누각 밑으로 빠져나가면서 자태가 매우 단정한 석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무량수전 앞에는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무량수전 왼쪽 뒤로 큰 바윗돌이 비스듬히 얹혀 있는 부석이 있고, 오른쪽 뒤편으로는 1칸짜리 작은 집이 있는데 의상대사와 인연이 있는 선묘를 모신 선묘각이다.
부석을 돌아 아래쪽으로는 삼성각이 있고 그 옆의 요사채는 주지스님의 거처로 쓰이는 삼보전이다. 댓가지를 엮은 바자울이 속인의 호기심 어린 발길을 살짝 멈추게 한다. 그 앞으로 해서 내려가는 길은 석축을 옆으로 돌아 바라보는 맛도 좋거니와 기왓장으로 단을 이룬 층계를 밟아 내려오는 느낌도 좋다. 같은 부석사 안이지만 한 굽이를 돌기만 해도 이리도 다른 공간이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무량수전 마당에서 오른쪽 둔덕에 삼층석탑이 있고, 그 옆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갈래길이 나온다. 여기서 동쪽인 오른쪽 길로 가면 의상대사를 모신 조사당이 나오며, 서쪽으로 난 오솔길로 가면 응진전과 자인당이 나오는데, 이 두 전각은 세운 지 몇십 년이 되지 않은 건물로, 조사당을 본떠 지은 맞배지붕집들이다. 서쪽에 자리한 자인당 안에는 석불상 세 분이 모셔져 있다. 대좌와 광배가 완전한 양쪽 두 분은 함께 보물 제220호로,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이다. 가운데 분은 아미타불로 여겨진다. 양쪽의 두 석불은 범종각 아래의 쌍탑과 함께 동쪽 골짜기 절터에서, 광배가 없는 가운데 분은 부석사 동쪽의 강 너머 약사골에서 옮겨온 것이다. 오랜 풍우에 씻겨 부처들은 모습이 많이 닳아진 형편이지만, 광배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대좌는 단정하고 힘이 있으며 하대석과 중대석에 사자와 연꽃잎·향로·비천상 조각들이 유려하다. 그러고 보면 부처의 모습도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벌어진 어깨에 당당한 체구를 지녔다. 이런 모습은 대체로 신라 하대인 9세기에 조성되었다고 여겨진다. 마치 고려 때 건물처럼 살창을 낸 응진전에는 석가삼존불과 함께 어수룩하면서도 친근한 나한상들이 모셔져 있다. 뒤편의 조그마한 전각 단하각 안에는 쥐 한 마리를 무릎에 앉힌 나한상이 모셔져 있는데, 사리를 얻으려고 목불을 쪼개 땠다는 설화로 알려져 있는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선사를 모신 듯하다.
자인당 안의 삼존불상
부석사 인근 동쪽 절터에서 옮겨온 불상들로, 가운데 석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모두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부석사의 전체적인 가람 배치를 보면 아래에서부터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지세가 넓어져서 마치 큰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친 듯한 형상이다. 양 날개깃이 되는 서쪽에는 서부도밭이 있고, 동쪽에는 원융국사비가 있는 비각이 있다. 그보다 좀 높은 곳에 동부도밭이 있는데 부도들이 나란히 서서 발치 아래를 시원스레 굽어보고 있다. 이런 형상은 평면화할 수는 있지만 전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사진으로 전체를 담을 수도 없다. 그저 몸소 밟으면서 몸으로 익힐 따름이다. 19세기 중엽의 기록인 『순흥읍지』에 전하는 부석사 세부 모습은 지금의 것과 좀 다르다. 부석사의 전체적인 배치가 어느 정도 머리 속에 그려졌다면, 그 위에 『순흥읍지』에 전하는 다음과 같은 부석사의 모습을 덧입혀서 복원해보자.
무량수전과 조사당의 위치는 지금과 같다. 조사당의 서편, 곧 지금 자인당과 나한전이 있는 곳에는 영산전과 응신암이 있다고 했다. 금당(곧 무량수전)의 서쪽에는 취원루가 있으며 그 북쪽에 장향대, 동쪽에는 상승당이 있다고 했다. 취원루에서는 남쪽으로 300리를 볼 수 있다고도 했다. 한 단 내려와서 안양문 앞에 법당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가장 눈여겨볼 만한 기록이다. 그 자리는 지금 괘불대 바로 윗단, 낮은 석축 한 단으로 높인 자리로서, 범종각에 올라서서 보면 정면에 보이는 자리이다. 법당의 왼쪽에는 선당, 오른쪽에는 승당이 있다고 했으니 그 중심이 되는 법당에는 중심 부처를 모시고, 한편으로는 거처하며 한편으로는 선수행을 닦는 공간을 마련했던 듯하다. 그 앞에 종각이 있었는데 시야가 넓게 탁 트였고, 그 아래 대여섯 개의 당우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의 요사채가 있는 자리를 이르는가 싶다. 그 앞으로 회전문(조계문)이 있고 높이 4~5장4)이나 되는 큰 섬돌(석축)이 100여 보나 뻗쳐 있으며, 그 아래로 수십 보쯤 되는 곳에 일주문이 있다고 하였다. 회전문 자리는 대석단을 오른 곳인 듯하며, 일주문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 천왕문을 세운 자리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문 바로 바깥에 당간지주가 세워진 셈이니 이치로도 맞는다. 지금의 일주문은 당간지주보다 꽤 앞쪽으로 지어놓았는데 그것은 1970년대 후반 절 영역을 정비할 때, 민가들을 정비하면서 절 경역을 넓게 잡아놓으려는 생각에서 그랬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순흥읍지』에는 일주문에서 1리쯤 아래로 영지(影池)가 있어서 “절의 누각이 모두 그 연못 위에 거꾸로 비친다”고 했으니, 물속에 떠오른 부석사를 상상해보는 것은 정말 상상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일이다. 그러나 고작 150여 년이 지난 지금, 못의 흔적은 간 곳 없고, 개울 위쪽의 논이 그 자리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이런 배치를 염두에 놓고 부석사를 다시 보면 종국에는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발길이지만, 중심에서 법당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된다. 학자들은 그곳이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이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랬을 때 부석사의 전체 계획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에서 한번 마무리되며, 나아가 한 단 더 오른 영역에서 다시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으로 가도록 축을 한번 꺾은 셈이 되는 것이다. 알찬 답사,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부석사 주변에서 나는 사과는 다른 곳의 사과보다 유난히 맛이 달고 향이 좋다. 가을철에는 부석사 주차장에서부터 부석사에 이르는 길가 곳곳에서 사과를 파는데 값도 저렴하다.
당간지주
천왕문 못미처 왼쪽에 있는 당간지주는 그 자태가 매우 늘씬하고 수려하다. 1m 간격으로 마주한 지주의 높이가 4.28m에 이르면서 안팎으로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어 그지없이 단순하고 단단해 보인다.
당간지주자태가 늘씬하고 수려한 당간지주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좁아져 안정감도 느껴진다. 위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지다가 끝을 단정하게 반원을 그리며 마무리하였고, 안쪽으로는 깃대를 맬 홈을 냈다. 아래쪽 간(기둥)받침에는 지름 30㎝가 되게 둥근 구멍을 파 간을 받게 했으며 그 주변에 깔끔하게 연화문을 조각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마 단조로움을 메웠다. 보물 제255호인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군더더기 없는 긴장미가 아름답다. 부석사의 전성기에는 화엄종의 종찰임을 알리는 깃발이 이 지주 사이에 버텨선 당간 위에서 휘날렸으리라. 대석단과 구품만다라 사천왕 발 밑에 깔린 악귀들의 사실성에 일견 놀라고 섬뜩해 하면서 들어설 때, 막돌을 거침없이 쌓은 듯하면서도 크고 작고 모나고 둥근 것들의 조화가 절묘하게 이루어진 대석단(大石壇)은 절로 감탄의 한숨을 쉬게 한다. 대석단을 유심히 보면 잔돌들을 군데군데 오려맞추어 서로 절묘하게 엇물려 힘을 받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의 석축이 자연과 인공의 긴장미 넘치는 조화를 잘 보여준다면, 이곳 부석사의 석축은 자연이 극대화될 때 얼마나 장엄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이다. 어느 신이 하룻밤 새에 쌓았다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완벽하며 전체 높이 4.3m 길이 75m나 되는 거대한 석축이다. 석축은 안양루 아래에서 또 한번 만나게 되는데 안양루 아래의 대석단도 2단으로 높이 4m, 쭉 뻗은 계단만도 25단이나 된다.
범종각 아래에서 바라본 부석사의 석축부석사는 천왕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아홉 단의 석축을 올라야 한다. 부석사의 석축은 극락세계를 이루는 구품 만다라를 상징한 것이라 한다. 이 석축 자체만으로도 감탄할 만하거니와 석축이 가르는 큰 경계 셋이 다시 낮은 경계들로 갈라지면서 아홉 단을 이루는 데에는,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에 이르는 구품만다라를 이루고 있다고 풀이할 만큼 조화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사람에 따라서는 천왕문에 이르렀을 때까지가 하품, 천왕문에서 범종루까지가 중품, 범종루에서부터 안양루 누각 아래까지가 상품 영역이고,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 영역에 이르면 극락에 이른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혹은 천왕문에서 범종루까지가 하품, 범종루를 지나 안양루까지가 중품, 안양루 아래에서 무량수전 단 아래까지가 상품이며, 무량수전 안에 들어섰을 때에야 아미타여래가 주재하는 극락에 이른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모두 정토신앙을 기준으로 부석사를 해석한 것이다.
대석단 석축의 일부제멋대로 생긴 자연석의 형태를 다치지 않게 쌓으면서 틈 사이에는 잔돌들을 군데군데 오려맞추어 넣어 서로 절묘하게 엇물려서 힘을 받도록 하였다. 계단을 오르면서 마주하게 되는 대석단도 그러하거니와 이 구품을 지나 극락이 되는 무량수전 영역에 이르러서 이제 다 올라왔다는 안도와 함께 문득 뒤를 돌아다보면, 아, 이런 곳이야말로 정말 극락이로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입안에서 새어나온다. 겹겹이 펼쳐지는 산자락들이 끝간 데 없이 이어지며 모든 것이 발 아래에 있으니,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세계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다. 가을날 저녁 어스름 무렵, 안양루 아래로 펼쳐진 산들 너머 서쪽으로 길게 노을이 비끼는 가운데 종소리가 장엄하게 퍼져나가는 저녁 예불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 가슴 벅찬 경험은 없으리라. 이런 풍광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낄 뿐이다. 혜곡 최순우 선생은 이 장쾌한 감동의 여운을 「부석사 무량수전」이라는 글에서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면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라나 고려 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하였다.
부석사의 이러한 배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는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구품만다라의 형상을 펼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화엄사상에 근거하여 『화엄경』에 나타나는 34품 8회 10지의 단계를 상징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이를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부석사에 이르기 전까지는 세 칸이고 첫 석축부터 층단을 올라가면서 차례로 10지를 이루어가는데, 안양문 밑 석축 공간이 제9지가 되며 가람의 마지막 단계인 무량수전 단은 제10지로서 제34품인 ‘입법계품’ 대자재천(大自在天)이 되는 것이다. 괘불지주 바로 위 빈터에 있던 법당에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셨다고 보면, 화엄의 세계 맨 위에는 아미타불이 계신 화엄경과도 들어맞는다. 이러한 해석으로 보면 부석사는 화엄경을 현실로 펼쳐보인 화엄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람구조는 의상 당대에 이루어진 것일까? 왕의 뜻을 받들어 세운 가람이니만큼 그랬을 법도 하지만 의상의 수도행을 돌이켜보면 어울리지 않는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있는 기록으로는 궁실을 수리하고 높은 담을 쌓으려는 문무왕에게 의상이 만류하는 편지를 보내자 왕이 덕에 감복하여 그 뜻을 받아들이고 빈한하게 살고 있는 그에게 많은 땅과 노비를 보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또한 많은 사람이 모일 때면 내려와 초가를 짓고 강론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의상이 거처하던 곳은 조사당을 중심으로 한 자리에 있던 매우 협소한 초막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 지금과 같은 규모와 배치는 의상보다 훨씬 후대인 9세기에 들어서서 화엄종이 큰 종파로 성장했을 때에 이루어졌으리라고 본다. 그때에 대석단도 쌓고 무량수전도 세웠으며 석등이나 당간지주 같은 석물들도 세웠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구품만다라를 펼친 것이건 화엄경의 10지를 차례로 쌓아나간 것이건(부석사의 석단을 모두 12단이라고 보는 견해마저 있다) 그것은 어차피 후인들이 이해할 몫이고, 그런 이해보다는 부처의 뜻을 삶으로 보듬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그것이 오히려 의상대사의 뜻이었을 테니까.
무량수전
안양루 밑을 지나며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마치 네모진 액자틀 사이에 찍힌 ‘예술사진’을 보는 듯 그 자체로 완벽한 구도 안에 석등의 화사석 모습이 화사하게 보인다. 화사석 너머 빠끔히 보이는 ‘無量壽殿’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무량수전은 현재 부석사의 주요 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서방 극락을 주재한다는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분이라 하여 다른 말로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니 ‘무량수전’이 되는 것이다.
무량수전 현판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를 때 쓴 글씨라 전한다.
마주하는 무량수전은 의젓하면서도 육중하거나 둔하지 않다. 다시 최순우 선생의 말을 빌려보자.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에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게가 적당히 무거워 보이는 팔작지붕, 앞에서 보아 세 칸으로 단정한 격자문이 달린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1916년에 해체·수리할 때에 발견한 서북쪽 귀공포5)의 묵서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노로 건물이 불타서 1376년에 중창주인 원응국사가 고쳐 지었다고 한다. 무량수전은 ‘중창’ 곧 다시 지었다기보다는 ‘중수’ 즉 고쳐 지었다고 보는 것이 건축사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본래 있던 건물이 중수연대보다 대개 100~150년 앞서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1363년에 중수한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나이를 다투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같은 건축사적인 의미나 건축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전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랜 건물의 하나로 늠름하면서 완숙한 경지를 보여준다.
무량수전의 명칭도
정면에서 보이는 무량수전은 칸 사이가 비교적 넓은 다섯 칸에다 옆면은 세 칸이지만 기둥 앞쪽으로도 외목도리6)를 내 11량7)을 인 우람한 팔작지붕집이다. 기둥 위에만 포작8)이 있는 주심포집으로, 이 무량수전의 포작은 간결하면서도 공들여 가구를 짜나간 고려시대 장인정신을 맛볼 수 있는 주심포 방식의 교과서로 손꼽힌다.
이것말고도 무량수전에는 눈여겨볼 수법이 많다. 기둥의 배흘림과 안쏠림, 귀솟음과 평면의 안허리곡 같은 것들이 우리가 미처 모르는 새에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는 수법들이다. 배흘림이란 기둥의 아래쪽 1/3쯤이 가장 불룩하게 배가 불러보이게 한 것을 말하고, 귀솟음은 건물 모서리기둥을 중앙보다 좀더 높인 것을 말한다. 이는 모두 사람의 착시를 교정하고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려는 보정작용들이다.9) 안허리곡은 가운데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게 하여, 위나 옆에서 무량수전을 보았을 때 처마 선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그리도록 한 것이다. 안쏠림은 그것이 가능하도록 기둥 위쪽을 건물 안쪽으로 경사지게 세우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기둥과 처마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벽면도 함께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니 벽면의 가운데가 은근히 휘어져 있다. 나무와 흙만으로 지은 집의 이런 교묘한 배려로 인해 우리는 육중하면서도 넓은 무량수전의 지붕이 활짝 펼친 새의 날개처럼 열려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처럼 눈에 드러나지 않게 한 옛사람들의 배려가 궁극적으로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으로 조화롭게 피어났던 것이다.
무량수전의 공포기둥 위에만 공포가 설치된 주심포 양식이다. 무량수전의 주심포는 매우 간결한데 주두에 굽이 있는 모습에서 고식의 잔형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은 옆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앞면의 경우 세 칸에는 분합문과 광창, 좀 좁은 맨 가장자리 칸은 두 짝 창으로만 되어 있다. 창들은 모두 위쪽으로도 올려 고정시킬 수 있는 들어열개 형식으로 되어 있어 큰 재를 올릴 때에는 활짝 열어 개방할 수 있다. 그러나 원래는 뒷벽처럼 문틀에 널판문을 달고 옆쪽에는 조사당에서처럼 살창을 두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고려 말 중수할 때 이러한 형식으로 바뀐 듯하다.
무량수전의 뒷벽고려시대 건물에 일반적이었던 살창을 다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면 맞은편(서쪽)으로 아미타여래가 자리잡고 있다.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높게 솟은 배흘림기둥이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어 절로 숙연해진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기둥과 보가 엮이고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을 볼 수 있다. 딱딱하지 않은 직선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조화와 함께 다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한 자신감이 드러난다. 그 모든 것이 각각 하나의 ‘디자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러한 결구방식은 ‘아름답게 보이려고’ 치장한 것이 아니라 지붕의 무게를 고루 분산시키는 노력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기에 최순우 선생이 말한 ‘필요미’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북부, 초판 1997., 15쇄 2010.,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목수현, 김성철, 유홍준, 김혜형, 정용기)
기단에 새겨진 마애명무량수전을 든든히 받치고 있는 기단도 예사롭지 않다. 면석과 기둥석, 갑석이 갖추어진 모양이 마치 석탑의 기단부 구조와도 같다. 이는 석탑이 목조건물에서 비롯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이 무량수전 기단은, 지대석 위에 원형 초석이 드러나고 계단이 돌출된 방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기단을 곧게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것이다. 또 계단 동쪽 벽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충원 적화면(忠原 赤花面) 석수 김애선(石手 金愛先)’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건축물에 대한 석수의 애정과 자신감을 드러내준다. 이 이름자는, 마치 이 기단이 600년 전이 아니라 방금 마무리되어 아직도 그 석수의 체온이 돌에 남아 있을 것만 같은 기분까지 느끼게 해준다. 바닥에는 본래 녹유를 두껍게 입힌 전돌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아미타경』에서 극락세계의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고려 때의 것으로 수습된 몇 점이 유물전시각에 진열되어 있는데 그처럼 두꺼운 유리질막의 전돌이 무량수전 바닥 가득히 깔려 있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휘황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녹유전을 걷어내고 마루를 깔게 된 것은 엎드려 절을 하는 풍조가 일반화된 조선시대의 예배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요즈음에는 그 위에 다시 카펫을 덮었다.
아미타여래좌상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서면 부처의 위치가 다른 절집처럼 건물의 가운데에서 남쪽을 바라보지 않고 건물의 왼쪽 끝, 즉 서쪽에 치우쳐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원융국사부도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조성하여 모셨다는 기록과, ‘무량수전’이란 말 그대로 이곳이 극락이란 뜻이므로 극락을 주재하는 부처인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세계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교리에 따라 앉힌 모습으로 여겨진다.10) 원융국사 비문에 따르면 의상은 아미타불의 존엄을 높이려고 협시보살도 세우지 않고 불전 앞에 탑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아미타여래좌상은 흙을 빚어 만든 소조상인데 고려시대의 소조불로는 가장 큰 2.78m이며 국보 제45호이다. 딱 벌어진 어깨에 건장한 체격으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 방식으로 옷을 입었다. 옷주름은 굵으나 자연스럽게 흘러내려서 석굴암 본존불과 흡사한 균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손 모양도 마귀를 물리친다는 뜻의 항마촉지인이다. 그래서 이 불상은 석굴암 본존불이 아미타여래상이냐 석가모니상이냐가 문제될 때에,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는 아미타여래상도 항마촉지인을 할 수 있다는 보기로 흔히 제시된다. 상호는 눈꼬리가 치켜올라가고 콧날이 날카로우며 입술이 두터운데 다소 엄숙한 인상이다. 무량수전 해체·수리 때에 발견된 「봉황산 부석사 개연기」(鳳凰山 浮石寺 改椽記)에 의하면 고려 말엽인 1358년에 왜구들이 불을 질러 불상의 머리가 불길 속에서 치솟아 서쪽 바위에 부딪쳤으며, 1376년에 개금하였다고 했으니 그때에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높이 3.8m인 나무광배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나 불꽃이 치솟아오르는 듯한 힘도 느낄 수 있다. 두광과 신광 안에는 화려한 당초문11)이 베풀어진 가운데 각각 3구와 4구씩의 화불이 붙어 있었던 흔적이 있으며, 불상과 함께 금단청을 입혀놓았다.
석등
무량수전 앞마당을 홀로 밝히는 이 석등은, 홀로이지만 마당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기품이 있다. 석등을 처음 마주 대하게 되는 것은 안양루 아래를 지나 나오면서부터이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마치 네모액자 틀 안에 들어 있는 풍경처럼 석등과 그 배경으로 서 있는 무량수전을 보게 된다. 좀더 앞으로 걸어나오면 석등은 점점 비껴앉으면서 무량수전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는데, 이러한 시각 체험은 석등이 무량수전 정면 축에서 조금 서쪽으로 비껴앉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가만히 서 있으면서도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석등! 이 모든 것이 치밀한 계산에 따른 배치이니 우리는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안양루 계단에서 바라본 석등안양루 아래에서 무량수전으로 오르다보면 네모틀의 중심에 있던 석등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점점 비껴앉으면서 무량수전에게 자리를 내주는데 이는 석등이 무량수전 정면 축에서 조금 치우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시각 체험이다. 이 석등은 부석사의 가람 배치가 이처럼 짜임새 있게 배치될 때인 9세기에 자리잡은 것으로 여겨진다.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대표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 석등은 국보 제17호이다.
석등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된 석등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석등은 높이가 2.97m나 될 정도로 키가 커 절로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네 창 사이의 면에 볼록이 솟아나온 공양보살상은 우리 눈높이보다 훨씬 위에 있다. 사각의 대석 위에 여덟잎 연꽃이 피어나는 모양으로 하대석을 조각하였는데, 꽃잎 끝마다 귀꽃이 힘차게 솟아오르는 모습은 9세기 석등이나 부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단정한 8각 간주석이 쭉 뻗어올라 육중해 보이는 화사석을 끄떡없이 받쳐들고 있다. 상대석은 다시 피어오르는 여덟잎 연꽃인데, 꽃잎 한 장마다 보상화12)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다. 네 면으로 난 화창 사이사이의 면에는 다소곳한 자세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공양보살상의 모습이 너무나 고와서 눈을 떼기가 어렵다. 아마 석등이나 부도, 탑에 새겨진 어느 보살상도 이처럼 자연스러운 자세에 사람의 마음을 끄는 미소를 지니지는 못했으리라. 좀 무거운 듯한 지붕돌도 처마선의 반전으로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며 꼼꼼히 살펴보면 아래쪽으로 배수구 시설이 되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석등 화사석에 새겨진 보살상화창 사이사이에는 다소곳한 자세로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공양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석등 앞에는 연꽃 한 송이가 살포시 피어난 모양을 조각해놓은 배례석이 있어 석등과 연꽃이 서로 화답하는 듯하다. 『삼국유사』에는 “오진(悟眞)이 하가산 골암사에 살면서 매일 팔을 뻗쳐 부석사 석실의 등에 불을 켰다”는 말이 전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석실의 등이란 다름아닌 이 석등을 이르는 것이 아닐까. 하가산은 지금의 안동 학가산으로, 부석사에서 남서쪽으로 100리 남짓 떨어져 있는 산이니 의상 제자의 정성과 신이함을 드러내려 한 이야기인가 한다.
삼층석탑
무량수전에서 조사당으로 가는 동쪽 언덕진 곳에 육중한 삼층석탑 한 기가 있다. 본래 탑을 모시지 않은 의상의 뜻으로 보면 부석사 초창 때에는 없었으며 9세기에 중창되면서 자리하게 된 듯도 하나 분명치는 않다. 탑 앞에는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이 있어 서로 한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석사 삼층석탑탑은 법당 앞에 자리하는 것이 원칙인데 부석사 삼층석탑은 특이하게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세워져 있다. 9세기경 부석사가 중창되면서 함께 건립된 듯한데 탑에는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이 함께 있다.
삼층석탑은 높이 5.26m로 둔덕에 세워져 있어 올려다보게 된다. 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쌓아 석가탑을 본뜬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보물 제249호이다. 하층기단이 넓어 안정감이 있어 보이는 반면, 지붕돌은 다소 무거운 느낌이다. 1960년에 해체·수리할 때에 3층 몸돌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했지만 사리구는 없었고 기단부에서 철제 탑, 불상 조각, 구슬 등을 찾았다고 한다. 석탑이 여기에 놓이게 된 까닭은 대개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서쪽에 앉은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마주하는 자리가 동쪽 끝이므로 여기에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또 무량수전 마당은 이미 석등이 자리잡고 있고 탑을 앉힐 만한 너비도 되지 않으므로, 비껴 동쪽 언덕에 놓았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석탑이 거기에 있기에 우리에게는 즐거움이 있다. 이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안양루에서 보는 것 못지않다. 아니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양쪽으로 해서 펼쳐지는 소백산 연봉의 장엄함을 볼 수 있는, 어느 곳에도 견줄 수 없는 자리이다. 또한 무량수전에서 끝마칠 수도 있는 걸음을 그 뒤로 이어지는 조사당 가는 길로 잡아끄는 건축적인 배려이기도 하다.
조사당
삼층석탑 옆으로 나 있는 길은, 대명천지에 모든 것을 다 드러내듯이 온몸을 펼쳐보이던 부석사와는 달리, 갑자기 오롯해지는 숲길이다. 나무 사이사이 나 있는 산죽이 겨울이면 흰눈을 머금어 눈꽃을 피우기도 하는 정취 있는 이 길은, 바닥에 잔잔히 돌이 깔려 있어 예삿길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몇 계단 오르면 단정한 옆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조사당(祖師堂)이 보인다.
조사당창건주인 의상대사와 역대 조사들을 기리기 위한 전각이다. 이곳은 처음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세우고 수도하던 자리로 여겨진다. 국보 제19호인 조사당은 말 그대로 그 절의 조사스님을 기리기 위한 전각이니, 바로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을 모신 곳이다. 『삼국유사』와 『송고승전』 등에 나타나는 바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의상은 신라 경주사람으로 속성은 김씨라고도 하고(삼국유사) 박씨라고도 한다(송고승전). 경주 황복사에서 출가하여 수행하다가 당나라로 유학갈 뜻을 품고 열 살 연상인 원효와 함께 길을 떠났다. 이때에 원효는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은 바 있어 돌아섰으나 의상은 처음에 세운 뜻을 굽히지 않고 바다를 건넜으니 661년의 일이다. 당시 중국 당나라에 풍미하던 화엄학을 배우러 중국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을 찾아가니 그가 “어젯밤 꿈에 그대가 올 징조를 보았다”고 하며 정중히 맞아들여 제자가 되었다. 수학하는 도중 의상은 꿈에 신인(神人)에게서 비결을 얻고 깨달은 바를 간추려 ‘법계도’를 지었다. 670년에 이르러 당 고종이 신라를 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의상은 이를 전하려 급히 귀국하였다.
신라에 돌아와서는 671년에 낙산사를 창건하고 산천을 두루 다니면서 화엄사상을 펼칠 터전을 찾다가 676년에 마침내 부석사에 자리잡았다. 의상의 강론을 들으러 신라의 변방인 이곳 부석사까지 찾아오는 문도들이 줄을 이었으며 그 명성은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문무왕이 전답과 노비를 보냈으나 의상은 모두 거절하고 의복과 병, 발우 세 가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몸에 간직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의상을 부석사에서 모시게 된 것은 언제부터의 일일까? 절을 창건했거나 종파를 연 고승을 모시는 조사신앙은 사실 의상이 펼치려던 화엄이나 원융의 세계와는 좀 다르게 선종에서 하는 신앙방식이다. 깨달음이 곧 부처를 이루게 한다는 선종은 우리나라에서는 9산으로 분파하며 각 산문 개산조의 부도를 세워 기리고는 했으니 그것은 선종이 도입되어 어느 정도 자리잡은 9세기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 부석사의 조사당도 선종이 풍미하던 9세기 이후에야 세워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의상의 부도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고, 조사당은 의상이 초창하고 수도하던 자리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금 있는 조사당은, 해체·수리시 발견한 먹글씨에서 밝혀졌듯이 1366년에 원응국사가 부석사를 중창불사하면서 다시 세운 것이다.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작은 전각이지만 다소 무거운 듯한 맞배지붕이 엄숙성을 주어 조사당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정면의 가운데칸에는 문이 있지만 양옆으로는 바람과 빛이 드나드는 살창이 나 있다. 기둥 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집인데, 무량수전의 공포가 마무리선이 매우 부드러운 데 비해 조사당의 그것은 무뚝뚝하게 툭툭 끊어진 듯한 형상이다. 건축적으로는 계열이 다르다고도 하는데, 무량수전이 온갖 공력을 들인 당대의 대표적인 건물이라면 조사당은 비교적 평범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 보수하면서 부재를 많이 갈아끼운 탓에 옛 맛이 많이 줄어들었다.
조사당의 측면고려시대에 지은 작고 평범한 맞배지붕집이지만 단정하고 조용함이 느껴진다.
조사당의 공포무량수전과 마찬가지로 기둥 위에만 공포가 설치된 주심포집이다. 그러나 무량수전의 공포 마무리선이 매우 부드러운 데 비해 조사당의 공포 마무리선은 툭툭 끊어진 듯한 형상이다. 내부에는 의상대사상을 모시고 일대기를 그린 탱화를 걸었는데 다 20세기 들어서 조성된 것들이다. 바닥에는 고려 때처럼 전돌이 깔려 있다. 벽에는 본디 사천왕상과 보살상이 그려져 있었으니, 천계를 수호하는 이 천왕들을 조사당 벽에 그렸던 것은 그만큼 의상을 모시는 지성이 극진했다는 뜻이겠다. 이 고려시대의 벽화는 조사당을 해체·수리할 때에 벽채로 떼어서 보관하였다가 지금은 유물전시각에 진열해놓았다. 벽을 떼어낸 대신 지금 조사당 안벽에는 옛 색과 형태를 복원하느라고 한 보살상과 사천왕을 새로 그려놓았는데, 세월의 옷을 입지 못한 탓인지 아무래도 설익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조사당의 벽화
조사당 벽면을 장식하던 불화였는데 지금은 유물전시각 안에 전시·보존하고 있다. 우리나라 절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동쪽 창 밑에 조그만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싱싱하고 시들음을 보고 나의 생사를 알라”고 했다는 선비화(仙扉花)라고 전한다. 학명으로는 골담초(骨曇草)13)라고 하며 “스님들은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한다”고 이중환의 『택리지』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꽂은 바로 그 나무인지야 알 수 없다. 퇴계 이황은 이 선비화를 보고 「부석사 비선화시」
浮石寺 飛仙花詩)를 남겼다.
옥같이 빼어난 줄기 절문을 비겼는데
석장이 꽃부리로 화하였다고 스님이 일러주네.
지팡이 끝에 원래 조계수가 있어
비와 이슬의 은혜는 조금도 입지 않았네.
선묘각과 부석
무량수전의 동쪽 뒤편으로 숨은 듯이 자리하고 있는 한 칸짜리 조그마한 전각이 있는데 바로 선묘각이다. 이 선묘각은 의상을 사모하여 몸바쳐 그를 도운 당나라 아가씨 선묘(善妙)의 넋을 기려 근래에 세운 것이다. 선묘는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등주에 이르렀을 때 묵은 신도 집의 딸이었다. 37세의 훤칠한 의상을 사모하였으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가에 귀의하여 그가 뜻을 펼치는 일을 도우리라고 결심했다.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떠나는 배를 타던 날,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묘가 부두에 나아갔지만 이미 배는 떠난 뒤였다. 이에 선묘는 의상에게 주려고 마련한 옷가지가 든 상자를 바다에 던지며 “이 상자를 저 배에 닿게 해달라”고 서원하니 상자가 물길을 따라 배에 가 닿았다. 뒤이어 “이 몸 용이 되어 의상대사의 뱃길을 호위하게 하소서” 하며 몸을 바다에 던지니 소원대로 선묘는 용으로 변하여 의상이 무사히 신라땅에 닿을 수 있도록 호위하였다.
선묘각 안의 선묘상무량수전 동쪽 뒤편에는 숨은 듯이 자리한 선묘각이 있다. 얼른 눈에 띄지 않아 지나치기 쉬운데 그 안에는 의상대사를 사모하여 목숨까지 바친 선묘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선묘의 이적은 부석사에 터를 잡을 때에 또 한번 일어나게 된다. 의상이 태백산 자락인 이곳을 점찍었으나, 이미 ‘500의 이단의 무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선묘는 이번에는 사방 십 리나 되는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위협하였고, 이에 두려움에 떤 무리들이 물러나 마침내 의상이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선묘용이 변해서 떴던 돌이 지금 무량수전 서쪽 뒤에 있는 돌무더기라고 하는데 뒷날 누가 새겼는지 ‘浮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택리지』에서 이곳의 뛰어난 지리를 논한 18세기의 학자 이중환이 1723년에 와서 보고는 “실을 넣어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막힌 데가 없으니 정말 신기하다”는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뜬 돌인지 아닌지 하는 과학적 결과가 그리 중요한 것이랴. 다만 의상이 이미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토착 집단과의 갈등이 퍽 심각했고, 의상이 그 세력을 강력한 힘으로 물리쳤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이다.
부석의상대사가 지금의 부석사 자리에 처음 터를 잡을 때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자 선묘용이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하는 바위다. 선묘용은 그 뒤 다시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불상 밑에 머리를 두고 석등에 꼬리를 드리우고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일제강점기에 무량수전을 수리할 때 마당을 발굴해보니 땅에 묻힌 석룡이 임진왜란 때 칼에 맞아 허리가 끊어진 채로 드러났다는 얘기도 있다. 그때 부석사에서는 석룡을 보수하겠다고 하고 일본사람들은 안된다며 옥신각신했다고 하는데, 정작 어찌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사진으로 전하는 것도 없거니와 그 또한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노릇은 아닐 터이다. 그토록 의상의 뒤를 받쳐주는 신심이 있었다는 것, 또한 그런 선묘설화를 널리 유포시킬 만큼 의상에 관한 신비화와 절대화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또한 의상의 영향력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선묘설화는 중국 북송대인 988년에 고구려계 유민인 찬녕이 신라의 고승 10인을 정리하면서 전해 내려온 전설과 산동 신라방 등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쓴 『송고승전』 ‘석의상’조에 전한다. 그런데 정작 선묘에 관한 신앙은 일본에 전해져서 그곳에서 더욱 유명하다. 일본에서는 12세기에 만든 선묘의 목각상이 매우 소중하게 보존되어 오고 있다.
부석사에는 선묘의 이름을 붙인 우물인 선묘정도 있으나 지금은 유물각 뒤쪽에 거의 손닿을 수 없도록 파묻혀 있는 형세이다. 비가 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냈다는 우물 식사용정(食沙龍井)과 함께 부석사의 두 우물이었는데 이제 어느 것 하나 그 모습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식사용정은 마을사람들이 ‘한샘’(큰샘)이라고 부르던 것으로 서쪽 요사채 마당에 있었다고 한다. 명주실 한 꾸리가 들어가도록 깊고 좋은 우물이었다는데 이제는 건물 밑에 파묻히고 말았다.
안양루와 범종각
안양루 밑을 지날 때에는 ‘안양문’(安養門)이라는 현판을 보며 지나게 되지만 위로 올라 누각에 오르면 ‘안양루’(安養樓)라는 현판을 볼 수 있다.
안양루 전경안양루는 무량수전과 함께 부석사의 중심영역을 이룬다.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대석단과 어우러져 밑에서 올려다보면 매우 위세가 있다. 그러나 밑에서 보는 것과 달리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보면 소박하고 작은 건물이며, 허공 중에 떠 있는 것만 같다. 안양루와 범종각은 모두 2층 누각으로, 경사가 급한 자리에 누각과 문의 기능을 겸하여 지은 절묘한 건축물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아랫단의 앞쪽 기둥은 아래석축에 놓이고 뒤쪽의 기둥은 윗단에 짧게 놓이게 된다. 또 누각의 밑을 지나느라 머리를 조아리게 되므로 행동거지를 자연 조심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범종각 아래에서 본 안양루범종각 아래로 난 통로를 따라가다보면 누마루장과 계단 사이로 마치 액자와 같은 틀이 생겨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무량수전 구역으로 오르는 이의 시각을 고정시켜 이 구역이 신성한 곳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범종각은 앞에서 보면 합각이 보이는 팔작지붕의 옆면이어서 건물이 앞뒤로 긴 특이한 배치를 하였고, 뒤쪽은 맞배지붕으로 누각 밑을 나섰을 때 지붕선이 머리 위를 내리누르는 답답함을 피했으니, 체감을 중시한 목수의 인간심리학이 돋보인다. 「부석사 종각 중수기」에 의하면 안양루 아래에 승방·만월당·서별실·만세루·범종각이 있었는데 1746년에 불타 이듬해에 다시 지었다고 하니 만세루가 있던 자리에 누각을 짓고 이름을 그렇게 붙인 듯하다. 내부의 초각14)도 은근히 화려한 18세기 건물이다. 범종각에서 나와 좀 위쪽에서 내려다보면 맞배지붕의 처마선이 저 소백산 봉우리들을 향해 날아가느라 날개를 펼쳐오르는 듯이 보이니, 지붕의 앞뒤를 달리 한 깊은 뜻을 다시 한번 새겨보게 된다.
범종각범종각은 앞에서 보면 합각이 있는 팔작지붕이나 뒤에서 보면 맞배지붕인 특이한 건물이다.
범종각에는 법고와 목어, 운판만 있고 정작 범종은 서쪽에 있는 진짜 종각 안에 따로 있다. 겨울이면 오후 5시 무렵, 여름이면 6시쯤에 이곳 범종각과 진짜 범종각에 있는 이 법구 사물은 저마다 생명을 되찾고 아름다운 화음으로 예불한다. 한편 범종각을 지나면서는 안양루가, 안양루 밑을 지나면서는 누각 천장과 기둥 사이로 빼꼼히 석등이 들여다보인다. 기대감을 지니게 하는, 동선과 시선이 교묘하게 고려된 솜씨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또 안양루에 올라 내려다보는 소백의 연봉들은 다시 얘기할 필요도 없겠거니와, 이미 옛사람들이 그 광경을 시문으로 읊어 새긴 현판들이 누각에 걸려 있다.
알찬 답사, 즐거운 여행을 도와주는 유익한 정보
안양문 밑으로 들어서기 전 범종루와 삼보전 사이에서 좀 거리를 두고 안양루의 공포 사이사이로 보이는 무량수전을 보면 마치 불상이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이 다섯 분 보인다. 이를 두고 부석사에서는 부석사의 숨은 부처님이라 한다.
유물전시각
보배로운 유물을 간직한 건물이란 뜻의 보장각(寶藏閣)은 부석사 고려각판(보물 제735호)과 조사당에서 떼어낸 고려시대 벽화(국보 제46호)를 보관하던 곳이었는데, 1996년 3월에 관람하기 좋도록 내부를 새로 단장하여 유물전시각으로 만들었다. 이곳에 들어서면 조사당에서 떼어낸 벽화 여섯이 가지런히 벽에 기대어 있다. 입구에서 들어가 오른쪽부터 범천·다문천왕·증장천왕·광목천왕·지국천왕·제석천의 차례로 진열되어 있다. 1377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493년에 개채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니 600년 세월에 몇 번은 다시 색을 입혔을 것이다. 그래도 빛이 바랜 모습이나마 제석천과 범천은 화려한 복식과 빛깔로, 사천왕은 힘있는 자태와 간결한 복식으로 은근한 위엄이 서려 있다. 이어진 계단을 오르면 자연스레 윗건물과 연결되는데, 부석사가 간직해온 현판이며 무량수전에 깔려 있던 녹유전, 퇴계가 지은 시의 각판,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고, 13세기 원응국사가 주석했을 때 새긴 대방광불화엄경 각판이 있다. 여기에 진열된 것은 그 일부이며 부석사의 고려각판은 1568년에 새긴 보판과 함께 모두 634판이 전한다. 무량수전 닫집에 있었다는 용 조각상은 긴 판자 4매를 잇대어 새긴 것으로, 구름과 불꽃을 휘어잡은 용의 머리가 앞쪽으로 튀어나와 있어 매우 생동하는 모습이다.
원융국사비와 동부도밭
유물전시각 뒤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굽이돌아가면 펼쳐진 사과밭 비탈에 자리잡은 전각이 있다. 오른쪽에는 귀부 위에 얹힌 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가, 왼쪽에는 최근에 한글로 새긴 의상국사비가 있다. 원융국사(964~1053)는 고려 초기에 부석사에 주석하여 중창을 주도한 스님이다. 원융(圓融)은 시호이고 법명은 결응(決凝)인데 1041년에 부석사에 들어와 화엄법통을 이어받았다. 1053년에 원융국사가 입적하자 비를 세웠는데 비문에 의상 당대의 부석사의 모습과 이후 법손들이 부석사에 주석하였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어 부석사의 역사를 아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거북은 얼굴이 많이 닳았는데 고개를 틀어 올려다보고 있는 자세가 흥미롭다. 등의 무늬는 2중 육각으로 그 안에 왕(王)자가 새겨져 있다. 무너져 깨졌던 것을 바로 세워놓은 비신은 높이가 173㎝이다. 원융국사 비각 위쪽에 있는 동부도밭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석종형 부도 8기와 부재들이 좁고 긴 터에 한 줄로 나란히 모셔져 있다. 원융국사 비각이나 동부도밭에서 내려다보는 눈맛도 시원하기 이를 데 없으니 부석사 스님들은 열반하고서도 참으로 좋은 풍광을 누린다.
동부도밭조선시대의 석종형 부도들이 한 줄로 나란히 모셔져 있다. 부도밭에서 내려다보는 풍광 또한 무량수전 앞 못지않다.
출처:부석사 한국문화유산답사회,
2022-07-28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