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7일이다. 추석이 바로 내일이다. 나는 텔레비전을 껐다. 벌써 오후 다섯 시다. 여섯 시까지는 당직근무 교대를 해줘야 한다. 나는 냄비에 물을 받았다. 가스불에 냄비를 올린 다음 멸치를 몇 마리 집어넣었다. 멸치 국물이 우러나면 라면 맛이 한결 좋아질 것이다. 나는 찬장에서 라면을 꺼냈다. 라면을 두 손으로 잡고는 가운데를 힘주어 틀어쥐었다. '뿌지직' 하면서 라면이 둘로 쪼개졌다. 때맞춰 물이 끓는 소리를 냈다. 나는 라면을 냄비 속에 집어 넣었다. 양파, 감자, 파, 매운 고추도 넣었다.
라면은 맛있었다. 면발이 쫄깃쫄깃했다. 국물도 여간 얼큰한 게 아니었다. 나는 전기밥솥에서 밥을 한 공기 펐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튼튼하게 먹어둬야 할 것 같다. 오늘은 법원 근처에 있는 식당들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냉장고에서 고추와 된장을 꺼냈다.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라면 그릇에 밥을 말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아내였다.
"저예요, 저녁은요?"
"지금 먹고 있어. 힘들지. 다들 오셨어?"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하고 김해 형님만 오셨어요. 양덕동 둘째 형님은 방앗간 일이 바쁘신가봐요. 내일 아침 일찍 오신다고 했어요."
"금산 형님은?"
"못 오신다나봐요. 깻잎농사로 비닐하우스를 비울 수가 없대요. 몇 시간 간격으로 물을 뿌려주고, 깻잎을 솎아줘야 한 대요. 하루만 안 하면 깻잎이 엉망이 된다나봐요."
"응, 알았어. 당신이 고생이 많군. 그리고 큰형수님께 말씀드려. 내일 먼저 제사 지내라고. 아무래도 나는 열 시나 돼야 도착할 것 같아."
나는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마음이 사뭇 심란했다. 고향에 있는 셋째 형님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나는 이번 벌초 때 고향인 금산(錦山)에 가지 못했다. 물론 나만 못 간 게 아니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형제들 모두가 가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금산 형님께 전화를 해야할 것 같다. 형수님께서 전화를 받았다. 서운한 감정이 목소리에 배어있다.
"아이고, 왜들 그래요. 다른 집들 좀 봐요. 다들 와서 벌초하고, 고기 구워 먹고, 얼마나 보기가 좋아요."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산소가 어디 한두 개여야지요. 그렇다고 한 곳에 모여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깻잎농사가 하도 바빠서 한참에 시간을 낼 수도 없어요. 하루에 몇 빈상(묘를 이렇게 부른다) 씩 해서, 일주일 넘게 걸렸어요. 형님이 골병이 다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달리 드릴 말씀이 없네요."
"호호,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제가 좀 성격이 급하잖아요. 감정이 앞서다 보니 할 말 못할 말 다해버린 것 같네요. 형님 바꿔드릴게요."
"형?"
"희우냐? 고생하지?"
"아니, 힘 안 들어. 형, 미안해."
"뭐가 미안해?"
"벌초 때 못 가서?"
"네 형수가 뭐라고 쫑알댄 모양이구나. 전혀 신경쓰지 마라. 원래 네 형수가 잔소리가 좀 심하지 않니. 하여튼 여기는 괜찮다. 희우야, 내가 할 일이 뭐 있겠니. 조상님 묘라도 잘 돌봐야지. 미안하다. 이번 추석에도 마산(馬山)에 내려가지 못할 것 같다. 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시다고? 네가 고생이 많구나. 어머님 자주 찾아 뵙고 큰형수님에게도 안부 여쭈거라."
"형, 고마워."
나는 다시 식탁에 앉았다. 라면국밥을 한 숟가락 입에 떠넣지만 제대로 넘어가지를 않는다. 아버지는 종손이시다. 그렇다 보니 제사도, 산소도 남들보다 많았다. 산소는 뚝뚝 떨어져 있었다. 수박골, 호랑이박골, 구릉고개, 노루고개, 통수골, 장질끼, 비범이고개, 선산이 있는 배미실. 무슨 조상님들의 산소가 그렇게 많은지 아버지께서는 아예 조그만 책까지 만드셨다. 이 많은 산소를 셋째 형님 혼자서 다 하셨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셋째 형수님의 푸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고향에 남아 있는 게 죄지요."
나는 숟가락을 놓았다. 주섬주섬 반찬 통을 챙겨서 냉장고에 넣었다. 빈 그릇은 물에 담갔다. 그런데 어쩐지 허전하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게 이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렇질 않았었다. 집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었다.
어머니와 뜻이 맞지 않아 집을 나갔던 큰형님도 이때만은 돌아오셨다. 서울에서 공사판을 전전하던 둘째 형님도, 식모살이하던 누님도 이때만은 어김없이 고향을 찾았다. 불과 며칠이었지만 내게는 이때가 가장 행복했었다. 추석이 끝나고 수 삼일이 지나면 누님은 다시 서울을 향했다. 밤새 얼마나 울었던지 눈이 퉁퉁 부어있곤 했었다. 그때 누님의 나이 고작해야 열여덟 살이었다.
나는 사무실을 향했다.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당직실에는 허윤호 주임과 김정희씨가 미리 대기하고 있다. 당직교대가 끝나고 우리는 한자리에 모여 앉는다. 두 분께서는 저녁 대용으로 부침개와 튀김을 싸왔다. 우리는 그것을 먹는다. 고소한 것이, 그제야 추석 기분이 제대로 나는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아무 것도 준비를 하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서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