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는 매우 정치적인 인간이었고. 만약 그에게 온전한 정치적 무대가 주어졌더라면
그는 모두를 살리는 상생(相生)의 정치를 폈을 것이고. 만해가 출가한 지 30년이 지난 때에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쓴 짧은 글 〈나는 왜 중이 되었나,1)에서도 그의 정치적 성향은 극명하게 나타나는 듯 *
“어느 날 육체는 사라져 우주의 적멸과 함께 그 자취를 감추기라도 하리라. 그러나 나의 마음은 끝없이 둥글고 마음 편한 것을 느낀다. 그렇더라도 남아 일세에 나서 중으로 그 생애를 마치고만 말 것인가. 우리 앞에는 정치적 무대는 없는가? 그것이 없기에 나는 중이 된 것이 아닐까?”라고 자문하고 있는 듯*
실상 만해가 태어나던 때는, 외세의 침탈이 날로 가혹해지던 난세였기에.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혼란스런 나라의 소식은 피 끓는 젊은 청년의 마음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했고. 외세의 개입과 청일전쟁·러일전쟁·갑신정변의 실패와 개화파·수구파 혹은 친일파·친청파·친러파로 나뉘어 부화뇌동하는 구한말의 세력다툼은 백성들의 삶을 나날이 피폐하게 했고.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백성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인물인 듯*
어린 시절 부친이 수시로 역사적 위인·걸사들의 행적을 들려주던 유가적 가풍 속에서 지적인 성장을 이룬 만해는 서당의 숙사가 되어 학동들을 가르칠 정도로 전통 한학에 깊은 조예를 가졌으니, 우선 *대학의 이른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화*治國平天下”라는 기본이념이 무의식적으로 훈습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전통적 유가사상의 기반 위에서 만해는 불교의 중생 구제사상을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실천함으로써 불교를 혁신하고자 헌신 했던 인물*
“나는 왜 중이 되었나? 내가 태어난 이 나라와 사회가 나를 중이 되지 아니치 못하게 하였던가? 또는 인간 세계의 생사변고 같은 모든 괴로움이 나를 시켜 승방에 몰아넣고서 영생과 탈욕을 속삭이게 하였던가?”라는 진술에서 보듯, 만해의 출가는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가 분화되지 않은 막연한 충동의 상태에서 이루어 진 듯*
나는 나의 전정(前程)을 위하여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것과 또 인생 그것에 대한 무엇을 좀 해결하여 보겠다는 불같은 마음으로 한양 가던 길을 구부려 사찰(寺刹)을 찾아 보은 속리사로 갔다가 다시 더 깊은 심산유곡의 대찰(大刹)을 찾아간다고,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까지 가서, 그곳 동냥중, 즉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불도(佛道)를 닦기 시작한 듯*
조선왕조 오백 년의 유구한 전통을 급격하게 무너뜨리는 신호탄이라 할 갑오경장(1894)과 잔인한 일제의 마수에 의해 저질러진 국모살해사건인 을미왜변(1895)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청년 유천(만해의 속명)은 ‘지금 이렇게 시골에 묻혀 있을 때가 아니구나!’ 하고 ‘불같은 마음’으로 구세(救世)의식과 시대정신에 눈을 뜨게 된 듯*.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농민군으로 혹은 의병으로 죽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천은 어린 시절 읽은 원나라의 희곡 *서상기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가지게 되고.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청년 유천은 마침내 눈 밝은 도사를 찾아 고향을 떠나 방랑의 길에 오르게 되어. 폐포파립(弊袍破笠)으로 홀연히 집을 나온 유천은 서울로 향하게 되지만. 온갖 풍문의 진원지인 서울로 가 봐야 했던 것인 듯*.
만해의 출가는 유가적 충동과 불교적 충동이 착종되고 있는 듯하고.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는 ‘큰 뜻’의 구세의식과 인생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참된 자아발견을 추구하려는 실존적 동기가 분화되지 않은 채, 포괄적인 장래의 인생에 대한 구상과 진리에 대한 열렬한 구도심의 발동으로 집을 나온 듯. 시대적인 불안감과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에서 촉발된 그의 충동적 가출이 실존적 한계에 부딪치게 되면서 보다 더 근원적인 사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은 개인의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양상이라 할 수 있는 듯*
자신의 미망(迷妄)도 해탈하지 못한 개체가 역사 현장의 제반 모순에 대응하여 이를 변개(變改)시켜 나아갈 전체적 자아 혹은 전체적 삶을 해방시켜 나가기엔 아직 역부족이었던 것이기에. 이러한 한계를 자각한 그는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행로를 바꾸고*.
‘에라,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것부터 알고 일하자’ 하는 결론을 얻고, 나는 그제는 서울 가던 길을 버리고, 강원도 오대산의 백담사(百潭寺)에 이름 높은 도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산골길을 여러 날 패이어 그곳으로 갔었다.
그래서 곧 동냥중이 되어 물욕·색욕을 모두 버리고, 한갓 염불을 외며 도를 닦기에 몇 해를 보내었고. 그러나 수년 승방에 묶여 있어도 결국은 인생이 잘 알려지지도 않고, 또 청춘의 뜻을 내리 누를 길 없어 다시 번민을 시작하던 차에, 마침 *영환지략(瀛環地略)이라는 책을 통하여 비로소 조선 이외에도 넓은 천지가 있는 것을 인식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원산을 거쳐 시베리아에 이르러 몇 해를 덧없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여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에 파묻혀 참선생활을 하였고. 그러다가 동양 문명의 집산은 동경에서 되니, 동경으로 갈 차로 이듬해 봄에 처음으로 서울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
설악의 수려한 자연의 품에 안겨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가며, 독경과 선 수행으로 여념이 없던 행자 유천에게 그의 은사인 연곡 스님이 건봉사에서 구해다 준 두 권의 책은 새로운 세계 인식에 눈을 뜨게 하고. 주지하다시피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대장이었던 사명당 유정(惟政)이 700여 명의 승군들을 이끌며, 의병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유서 깊은 사찰로서 일제 강점기에는 금강산 일대의 사찰을 말사로 두고, 많은 승려들과 민족지도자들을 배출하기도 했던 곳*.
또한 건봉사는 백담사의 본사(本寺)로서 비교적 빨리 개화된 곳이었고. 갑신정변의 주도자인 김옥균의 이념 제공자 역할을 한 *이동인(李東仁)과 같은 개화 승을 배출하기도 했던 사찰이고, 봉명학교(鳳鳴學校)를 운영하여 불교적 강론과 더불어 일반학교의 수업에 해당하는 외사(外史)를 두루 가르친 듯*. 만해도 종종 방문하여 강연을 통해 어린 학생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건봉사의 사지(寺誌)를 작성하기도 했던 곳으로 지속적으로 이 절과 인연을 맺게 되는 듯*
이 절에서 연곡스님이 구해다 준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20세기 초반 한국 지식인들의 이념적 지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유신변법운동(維新變法運動)의 주역인 중국의 계몽주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요, 다른 하나는 세계의 지리를 설명하고 있는 지리서 *영환지략이었고. 당시 한국의 진보적 지식층에게 양계초는 믿을 만한 서구문화의 전신자(轉信者)였고, 한국이 처한 세계사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공식의 제보자였으며 박은식· 장지연·신채호 등과 같은 한국의 근대지식인들이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데 지대한 사상적 영향을 끼친 듯*
특히 변화야말로 우주적, 인간적 질서를 꿰뚫는 근본원리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던 양계초의 사상이 청년 유천에게 준 충격은 이후의 혁신적인 만해의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으며, 무변광대한 미지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 준 *영환지략과의 만남은 그로 하여금 드넓은 세계에로의 모험을 추동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해가 양계초를 매개로 하여 서구사상을 접하였지만,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수한 것이 아니라 이를 당대의 시대 상황 속에서 창조적으로 변용시켜 독창적인 사상을 창조했다는 데에 만해의 탁월함이 보이고.
이처럼 한국불교사뿐만이 아니라 동양불교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는 만해 불교의 이념과 성격을 점검해 봄으로써 그 현대적 의의를 파악하고 오늘의 한국 불교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는 것이 필요한 시점인 듯. 즉 만해는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 특징적 성격은 무엇인가? 한국불교사와 당대의 현실 속에서 만해 불교의 의미는 무엇이었으며, 그 역사적 위상은 어떠한가? 나아가 이러한 만해 불교의 현대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하는 것인 듯*
*현실주의적 종교관과 구세주의·평등주의(불교사회주의)
만해는 종교심이 사람의 본능이라 전제하고, 종교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파악한 듯.
사람은 무한이 아닌 유한이기에. 유한에는 결함과 공포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정신과 육체와 수명을 가진 것이다. 육체에 있어서는 공간적으로 촉감의 위해를 피하고자 하고, 수명에 있어서는 시간적으로 죽음을 공포하며, 정신에 있어서는 沖淡寧虛를 요하느니, 촉감의 위해와 죽음의 공포와 정신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하여 거의 전심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라고*
특히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각 지역의 종교방식이 다르게 나타남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존재이기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죽어야 하는 인간존재의 부조리성과 그것에 대한 반항을 통해 참된 자아에 이르는 한 고독한 이방인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준 작가 카뮈는 *이방인에서 자연사·살인·사형과 같은 서로 다른 세 개의 죽음을 다룬 바 있다. 우리는 늘 서로 다른 형태의 다양한 죽음에 직면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죽음 속의 존재인지도 모른 듯*.
다만 이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이기는 하다. 그러므로 죽음은 곧 삶의 한 부분이다. 죽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처음으로 초자연의 관념을 얻고 눈에 보이는 것을 초월한 어떤 세계에 대한 희망을 얻게도 된 듯*. 드쿠란즈의 말처럼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사고를 가견(可見)에서부터 불가견의 것으로, 일시성에서 영원성으로, 인간성에서 신성(神性)으로 향하게 했는지도 모를 일*.
모든 종교의 출발이 또한 그렇다. 톨스토이도 죽음의 공포를 ‘해결되지 않는 삶의 모순’이라 한 바 있지만, 아득한 원시시대부터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가까운 사람들이 어느 날 죽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의 공포, 그 어떤 부자도 권력자도 이겨내지 못하는 한계인 이 죽음의 공포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모든 종교는 태어났다. 사막이나 척박한 땅에서는 군집성이 강한 유일신교가 태어나고 아열대 지방에서는 움직이기만 하면 땀이 나고 괴로우므로 나무 아래 고요히 명상하는 명상적 종교가 태어나는 반면 희랍이나 한국처럼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온대지방에서는 삼라만상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적 종교가 태어난다고*.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처럼 인도-유럽어족 언어권에서는 죽음의 공포 문제를 ‘시간 밖(beyond time)’에서 해결하는 반면 극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서는 ‘시간 안(within time)’에서 해결한다. 전자는 ‘천국’ 혹은 ‘극락’사상을 통해서 지상적 삶의 고통을 해소시키는 환상의 체계를 성서나 불경 속에서 제시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제사’라는 하나의 제도를 통해서 지극히 현실적인 방법으로 해소시킨 듯*
내가 죽더라도 나의 정(精)과 기(氣)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때맞추어 제사를 지내준다는 사실은 죽는 자에겐 크나큰 위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제도와 문화를 창조한 것이 결국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예이츠의 말처럼 사람이 죽음을 창조한 셈이 된다. 죽음의 공포에 대한 각기 다른 해결방식이 다른 유형의 종교를 낳았음을 알 수 있는 듯*.
그런데 만해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구하여도 항구불변의 안전과 쾌락과 위안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유한한 인간은 결국 자신의 약점을 시인하고 자기보다 위대한 존재의 힘을 빌어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유한인간이 무한절대에 연결되려는 자기구원의 본능적 욕구와 충동이 지자·우자·현자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표적을 내세워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무수한 종교들을 탄생시켜 온 현실을 확인한 듯*.
여기서 그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왜 종교를 믿는가? 그것은 인간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종교가 그에 대한 일정한 해답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희망은 생존과 진화의 자본이므로 희망이 없다면 사람은 도덕적 행위의 지표를 상실할 것이고, 삶의 의의 자체를 상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상승적 발전의 욕구를 포기하고 찰라적 쾌락주의에 안주하고 말 것이다.
결국 세상은 아귀다툼과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필연적으로 내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교의 천국, *유대교가 받드는 신, 마호멧교의 영생(永生) 따위’는 그 구체적인 사례가 될 것이고. 그러나 만해가 보기에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속임수요 미신이라 생각한 듯. ‘미신으로써 어찌 사람을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 수 있겠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당면하여 만해는 비로소 불교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불교는 ‘민중의 지혜에 부당한 제약을 주는’ 미신과 미혹에서 떠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천당이니 영생이니 하는 초월적인 환상에 의하지 않고 불교는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마음속에 진리에 이르는 최종적 근거(진여, 불성)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불교는 중생에게 희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중생이 이런 더 없는 보배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대자 대비한 마음으로 이들을 위하여 설법하시고*
이와 같이 만해는 불교가 철저한 자력신앙이며 마음의 종교이므로 문명의 이상에 부합하며 현실 정합성이 앞선다고 보는 듯*. 만해는 불교가 미신을 타파함으로써 참된 자아 안에서 불생불멸의 삶을 얻도록 가르치는 희망의 종교라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종교가 지니고 있는 신비주의의 허상을 깨뜨리고자 하는 합리주의자·계몽주의자 만해의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인 듯*.
많은 미신의 종교들이 민중의 지혜를 속박하고 미신으로써 사람의 생명을 낚는 미끼로 삼아 소중한 목숨까지 잃게 하는 폐단이 많다고 지적. 그러나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로서 마음 안에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다고 보는 유심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지닌 진여(眞如)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지혜의 종교라고 만해는 불교의 종교적 성질을 규정한 듯*.
그는 *선불교유신론의 제2장 *불교의 성질〉에서 생존과 진화의 자본인 희망을 주는 것이 종교의 본령이라고 전제하고, 장래의 문명에 적합하지 않을 때는 종교는 존재 의의가 없다고 하여 종교의 현실 정합성을 중시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고. 따라서 만해는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이 불교라고 하는 종교가 부단히 진보해나갈 인류문명의 미래에 적합할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 하는 문제제기로써 출발점을 삼는 듯*.
만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의 종교로서 불교가 본질적으로 중요 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과연 인류를 행복과 문명으로 이끄는 데 현실적으로 기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하나의 고정불변의 절대적 가치나 관념으로서의 종교는 별 의미가 없었기에. 그런데 불교야말로 만해가 보기에는 문명의 이상과 상충되지 않는 합리적 종교였던 것이라고*.
다음으로 불교의 철학적 성질에 관해서는 여타 종교들이 철학적 진리와 자신들의 종교적 진리가 부합하지 않아 마찰을 빚어온 데 비해 불교는 거의 모든 철학적 진리를 포용할 수 있는 포괄적인 진리임을 구체적으로 논증해 나가고. 비록 양계초 등의 견해를 인용한 단편적 견해이긴 하나 동서철학의 주요사항들을 불교의 내용과 비교하여 명쾌하게 그 요체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간 듯*.
즉, 중국의 경우 외국에서 발생한 불교와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와 불교는 크게 번성하고 기독교는 크게 번질 수 없었던 것은, 기독교의 교리가 협애하고 단순하여 종교성만 내세우므로 철학 성이 결핍되어 중국의 지식층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한 데 비해 불교는 종교성과 철학 성의 양면을 고루 갖추어 그들을 만족시켰던 데에 원인이 있다고 보고, 결과적으로 불교가 중국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양계초의 견해를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경우 불교가 들어온 지 1천 5백 년이나 되었으나 이렇다 할 조선철학의 이채를 보이지 못했음을 만해는 지적한 듯*
역시 양계초의 견해를 인용하여 칸트의 ‘도덕적 성질’―자유성과 부자유성을 기준으로 한 ‘참된 자아’와 ‘현상적 자아’의 개념을 설명한 뒤, 이를 불교의 진여(眞如)·무명(無明)의 논리와 연관 짓고, 칸트와 부처의 다른 점을 지적한 듯*. 또 진여·무명의 논리와 같은 불교사상의 도움을 받아 중국유학을 혁신시킨 성리학의 비조(鼻祖) 주자의 의리지성(義理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명덕(明德)과 기품(氣稟) 혹은 인욕(人欲)의 개념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어서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의 주장과 *능엄경의 내용이,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주장과 *원각경의 내용을 대비하여 같고 다른 점을 지적하고 이외에도 플라톤의 대동설, 루소의 평등론, 육상산(陸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선학(禪學)이 불교의 내용과 부합됨을 지적한 듯*
결론은 동서고금의 철학이 금과옥조로 삼아온 내용이 결국은 불경의 주석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종교이면서 철학인 불교는 미래의 도덕과 문명의 중요한 원천의 구실을 할 것이라는 것이고. 이와 같이 미래의 역사전개에 대한 비전의 제시와 동서양 철학사상과 불교의 비판적 대비가 가능했던 것은 난삽한 철학이론들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만해의 명석함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불철주야의 오랜 정진에서 오는 불경 전반에 관한 도저한 섭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이어서 제3장 *불교의 주의(主義)〉에서는 불교의 이념을 평등주의(平等主義)와 구세주의(救世主義)에서 찾는다. 사물의 현상이 어쩔 수 없는 법칙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것이 불평등이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얽매인 바가 없는 자유로운 진리가 평등이라고 정의하고, 불평등한 거짓 현상의 미혹을 벗어나 평등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불교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근세의 자유주의와 세계주의는 평등의 자손이라고 해명하고 진정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써 그 한계를 삼는 것이며 서로 침탈함이 없이 세계 다스리기를 한 집안 다스리는 것같이 하는 것이 참된 세계주의라고 명명한 듯*.
만해의 이러한 평등 개념은 불교를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만 보지 않고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차원에서 해석함으로써 그 독창성을 갖는 듯. 뒷날 그는 이러한 생각을 ‘불교사회주의’9)라는 말로 개념화한 적도 있지만, 개개인의 자유가 모두 수평선처럼 가지런하게 되어 조금의 차이도 없게 되는 것이 평등의 이상이 실현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다. 만해는 나아가 불교의 평등정신이 다만 개인과 개인, 인종과 인종,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동식물과 모든 사물에까지 미치는 철저한 성격이라고까지 말한다. 구세주의(救世主義)는 이타주의(利他主義)의 다른 이름이다.9) 석가의 경제사상을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뭐라 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만해는 ‘불교 사회주의’라는 말로 답하고 있고. 재산의 축적을 부인하고 경제상의 불평등을 배척하며 무소유의 이상을 지향하는 불교사회주의에 관해 만해는 한 권의 책으로 저술하겠다고 하였으나 이루어지지는 못한 듯*
잘못된 이기주의적 기복 신앙은 불교의 본령과는 배치되는 것이므로 비판하고 *화엄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지극한 중생구제의 이념을 지향하는 불교의 본의를 논증하고. 아울러 현실 도피적 은둔주의를 퍼뜨린 소부·허유·양주 등 신선도의 무리를 질타하고. 이 또한 만해의 철저한 현실주의 사상을 보여주는 대목인 듯. 만해는 불교를 현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해석하였다. 흔히 불교가 참선과 고행에 의해 자기 한 몸만의 구원을 성취하려는 이기주의적 종교로 오해된 적도 있으나, 부처의 모든 설법은 중생제도의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만해는 역설한 듯*.
유마 거사처럼 한 사람이라도 해탈에 이르지 못한 병든 중생이 남아 있을 때, 그것을 곧 자기의 병으로 여기고 소승적 해탈을 거부하는 정신, 이러한 대승적 보살정신이 바로 불교정신의 핵심이라고 파악하고, 만해는 이런 불교의 근본정신을 구세주의라고 불렀다. 만해는 이미 *유마경이나 *반야》, *화엄경 같은 대승경전에 심취한 바 있으므로 이러한 사상 형성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이러한 근본교리에 입각하여 만해는 절을 산 속에서 세간으로 옮길 것과 현실개혁 및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지향해 갔던 것인 듯. *
만해는 새로운 불교해석을 통해서 진보적인 계몽주의자가 되었고, 근대적인 자유주의를 불교적 평등의 개념 속에 흡수하였으며, 그러면서도 자유주의에 결부되기 쉬운 이기적 개인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불교의 보살정신을 사회개혁의 사상적 거점으로 확인하였고. 전통사상의 낡은 형태를 끝내 고집함으로써 시대의 발전에 역행하기도 하고 외래사조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려버림으로써 자기상실의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던 혼돈의 시대에 있어서, 근대사상의 진보적 측면을 불교 속에 철저히 여과시키고자 했던 만해의 경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우 값있는 교훈으로 제시되는 듯*
그는 경성과 설악을 오가며 불교인으로서, 당대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였고. 이점에서 그는 단순히 선사로만 규정할 수 없는 입체적·다면적인 성격을 지닌 인물이고. 시인인가 하면 독립지사이기도 하고 독립지사인가 하면 어느새 불교사상가이기도 하고. 어느 한 울타리에 가두면 이미 그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인물이 만해 인 듯. 그가 출가한 것도 단순히 실존적 개인구원의 문제만이 아니었으며 생사의 문제만도 아닌 듯*.
그보다는 오히려 위기에 처한 민족의 운명, 즉 독립과 자주의 쟁취가 발등 위에 떨어진 시급한 과제였고. 그래서 1917년 오도를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경성 한복판으로 들어와 민족구원의 길에 헌신하게 된 듯. 그는 주로 경성에 머물며 정치와 사회문제에 깊이 관여했지만, 수시로 산과 저자를 오가며 세간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추 스리기도 했고. 만해에게 있어서 ‘산’이란 무엇인가. 한 논자의 지적처럼 만해에게 있어 산은 깊이 있는 자기성찰과 깨달음의 도량이었고 도시는 그 깨달음을 실천하는 공간으로서 그 두 공간은 변증법적으로 상호 길항하면서 만해의 정신사를 성장시켜 주었던 것인 듯*
한용운은 정치적 자유가 있었더라면 승려보다 혁명적인 정치가가 되었을지 모을 일*. 그가 시골에서 도시로 향하는 순간부터 산과 도시를 넘나들고 나아가 국내와 국외를 숨 가쁘게 질주했던 것은 생리적인 해방적 욕망을 제한된 시대적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해소해야 했기 때문이고. 그는 해방적 관심과 정치적 부자유라는 모순 속에서 늘 방황했고. 그의 삶은 영혼을 찾는 탐색 그 여행이었다. 그는 산과 도시, 아니 성과 속의 차원을 넘나들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갱신하고 있었던 것인 듯*. 도시는 해방적 관심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산은 이 해방적 관심과 혁명적 정열을 더욱 내밀한 차원으로 이끌어 올려주고 감싸주는 정신적 도량인 듯*
그러나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기반하고 있는 만해의 이러한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는 급진적 개혁주의 노선이자 진보주의 노선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그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혁명을 부르짖는 사회주의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고. “예술이 오늘날 일부의 문학자들이 말하는 거와 같이 반드시 어느 한 계급이나 몇몇 개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12)라는 만해의 언급으로 보아 그는 이미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는 계급주의 사상의 허구성을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 만해는 근본적으로 중도와 중용에 기반 하는 동양적 수양주의와 유심론적 세계관에 깊이 훈습된 전통적 지식인이므로 만해와 같은 주체적인 사상가가 그러한 급진주의 노선에 쉽사리 매몰될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만해가 잠시 언급했던 ‘불교사회주의’의 이념도 계급투쟁론적인 전투적 개념이라기보다는 불교의 무소유 정신과 동양적 인본주의에 바탕 한 하나의 이상주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유심론적 세계관과 확장된 자아관
만해는 *내가 믿는 불교〉에서 석가의 말씀이라 하여 “심즉시불(心卽是佛), 불즉시심(佛卽是心)”을 제시하고 “오직 자기의 마음 즉, 자아를 통해서만 불을 성(成)하리라”고 하여 유심론적 세계관으로서의 불교를 강조한 듯*. 또, ‘삼계유심, 심외무물’이라 하여 삼라만상이 오로지 심의 발현임을 강조한다. 특히 불교가 말하는 ‘심’은 물을 포함한 심이라 하여, 물심이원론을 넘어선 포괄적 개념임을 강조한다. 만해는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불교의 여러 측면을 규정한 듯*.
요컨대, 불교는 그 신앙에 있어서는 자신 적이요,(자력신앙), 사상에 있어서는 평등이요, 학설로 볼 때는 물심을 포함 아니 초절한 유심론이요, 사업으로는 博愛 互濟인바, 이것은 확실히 현대와 미래의 시대를 아울러서 마땅한 최후의 무엇이 되기에 족하리라확신을*
*마는 자조물이다〉14)에서도 ‘마’라는 것이 ‘자심의 망각(妄覺)’에서 나오는 환영일 뿐이며, “심체가 광명하면 암실의 중에도 청천(靑天)이 있고, 심두가 암매하면 백일의 하에서도 여귀가 있다”라 하여 일체가 오직 마음이 만드는 작용임을 천명하고 있다. 일찍이 달마도
*혈맥론(血脈論)〉에서 ‘심즉시불(心卽是佛), 불즉시심(佛卽是心), 심외무불(心外無佛), 불외무심(佛外無心)’이라 했지만, 유심론적 세계관으로서의 불교의 심관(心觀)을 잘 보여주는 시가 만해가 자유시로 쓴 첫 작품인 〈심(心)〉15인 듯*
*심*
이 시에서 그려지고 있는 심(心)이란 일체의 이원적 분별을 벗어난 절대의 자유, 구경의 실재를 의미한다. 인간의 근원적 고통 또는 그 모순의 양상은 이원대립의 차별관에서 비롯된다. 삶의 세계가 고뇌에 차 있다는 관점이 생에 대한 불교적 접근의 기본인바, 이런 번뇌의 원인이 분별 심에 있으니 그것을 피할 것이 아니라 부딪쳐서 멸진시키는 것이 불교적 부정에 의한 초극인 듯*.
심리나 사물이 대립하거나 상대하는 것을 부정하고 의식의 충족이 아니라 그러한 의식을 비워내려는 불이(不二)의 사유방식에 의해 A와 비(非)A라는 대립을 떠난 진공묘유의 경지, 즉 해탈이라는, 고행을 거쳐 얻어진 마음의 삼매(三昧)에의 도달이라는 초연함의 실천(practice of detach-ment)을 심(心)을 통해서 진술한 것이다. 만해의 시 사상은 그 철학적 본질이 반야심경에 근간을 둔 공(空)의 체득과 유마경에 입각한 보살정신의 실천이라는 대승불교 정신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듯*
사람의 감각기관은 사물에 계박되기 쉬워서 온갖 구속으로 가득한 존재이므로 일체의 해탈을 얻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아를 해탈하라고 말한 듯*. 그러나 만해는 속세를 끊고 무리를 떠난다 해서 해탈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듯*. “자아를 해탈함은 나의 자유에 있을 뿐이요, 조금도 외물의 견제를 받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해탈함은 실로 용이한 일이 아니다.”17)라고 하여 그 지난함을 토로하고 이는 오로지 ‘수양’에 의해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만해의 이러한 수양주의는 *-조선청년과 수양〉, *조선 청년에게〉 등 그의 다양한 논설에 등장할 뿐만 아니라, 틈틈이 *채근담을 강의하고 불경을 읽고 * 유마경 강의하는 등 부단한 실행의 전범을 보이는 듯 *.
만해는 ‘심’을 자아로 보고 자아를 확대하고 연장하여 부모처자와 사회 국가에 미치고, 전 우주를 관통하여 산하대지가 다 자아가 되고, 일체 중생이 다 자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니, 육신을 자아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 자아가 육신을 떠나서 전 우주와 일체중생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 공간적 확장이라면 과거 조상의 명예와 미래 자손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면 이는 자아의 생명이 삼세를 통하여 연장되는 것이니 따라서 “자아라는 것은 유한적인 것이 아니며, 상대적이 아니라 실로 무한아, 절대아가 되는 것이다.”18)라고 함으로써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자아확대를 강조하고 있는 듯* 자아확대는 현실과 민중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구현될 수 있으므로 이는 만해의 입전수수와 유마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보살행에 의해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는 듯
*보살사상 바탕을 둔 민중불교
세간과 출세간을 동시에 아우르는 불가의 이상적 인격으로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군자’에 비견되는 ‘보살’이 있다. 보살의 주요과업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라고 “불교의 사업은 무엇인가?”라 스스로 묻고 그에 대하여 ‘박애(博愛)와 호제(互濟)’라 답하고 있다. 이러한 보살의 인격을 성취한 이상적인 인물로 *유마경 주인공 유마거사를 들 수 있으며 만해 역시 어떤 측면에서는 유마의 현현, 한국의 유마라 할 수 있을 것인 듯*
만해가 흠모해 마지않아 * 유마경강의 집필할 정도로 하나의 행동전범이 된 듯한 이 인물의 유명한 말로 인구에 회자되는 ‘마음이 맑으면 국토가 맑아진다’라든가, ‘중생이 병들었으니 나도 아프다’라는 말이 표상하는바, 입전수수의 보살행, 이는 곧 어떠한 법에도 집착치 않고 “필경 적멸에 떨어지지 않는 보살의 행”을 실천하는 현실 참여불교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인 듯*
만해가 살았던 시대는 중생들이 아픈 참혹한 결핍의 시대였다. 정의와 자유와 평등도 없고 인격도, 민적도 박탈당한 시대인 듯* 상실되고 악마와 원수가 창궐하는 시기에 보살은 한없이 인욕하고 투쟁해야 하는 시기였다. 만해에게 문학을 포함하는 모든 문필행위 역시 이 결핍의 시대에 민중들에게 희망의 근거를 제시하고 민족을 구원해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수단이자 도구였다. 당시의 우리 민족이 처해있던 현실을 짐작케 하는 〈세모〉라는 시가 있고
산밑 작은 집에
두어나무의 매화가 있고
주인은 참선하는 중이다.
그들을 둘러싼 첫 겹은
흰눈 찬바람 혹은 따스한 빛이다
그 다음의 겹과 겹은
생활고, 전쟁, 주의, 혁명 등
가장 힘있게 진전되는 것은
강자와 채권자의 권리행사다.
해는 저물었다.
모든 것을 자취로 남겨두고
올해는 저물었다.
― 〈歲暮〉 전문
한 해가 저물어가는 1931년 세밑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시에는 한 개인의 운명이 사회 국가의 운명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듯 히 정치의 현실훼손에 대한 날카로운 자각이 나타난다. ‘자연의 시련과 위안, 삶의 힘겨움, 끔찍한 살육의 전쟁과 이념과 이데올로기, 강자와 채권자의 권리행사’가 전개되고 있는 사바세계는 각종 번뇌로 점철되어 있다. 이 시엔 소박하나마 만해의 세계인식이 나타나 있고그렇게 그 모든 삶의 모순과 애환과 비애를 남겨두고 또 한 해가 저물었음을 화자는 아쉬워 한듯
만해는 자신을 ‘세간(世間)의 열패자(劣敗者)’* 골 물라 규정하고 자연 속에서 자연의 설법을 듣는 듯 끊임없이 한양과 서울, 세간과 출세간을 오가며 인간사를 고민하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염려했으며 중생들을 연민했고자연과 인간사, 즉 생활고, 전쟁, 주의 혁명, 권력 등으로 점철된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을 불교적 관조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
문학활동을 포함하여 만해의 현실참여적 불교활동과 사회활동은 불교개혁운동과 삼일독립운동에의 참여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1909년 승려취처문제에 관한 건백서를 두 차례 총독부에 제출하고,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임제종 운동에 가담함으로써 이회광의 일본 조동종과의 친일적 연합맹약체결을 분쇄하였으며, 1919년 삼일독립운동의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의 연설을 하고, 거사 후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출감 후에도 끊임없는 대중강연을 통해 민족을 계몽하였으며, 끝까지 창씨개명과 조선인학병의 출정을 반대함으로써 민족의 자존과 지조를 지킨 인물*
* 불교지통해 발표한 다양한 불교관련 논설을 통하여 침체된 불교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주장함과 아울러 한편으로 만해는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불교교리와 경전의 대중화, 불교제도와 재산의 민중화에 대해 그 실천적 행위로서 불교대전을 편찬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승려들에게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하여 불교계의 유신을 호소한 만해는, 대중들을 위하여 불교교리를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불교대전》을 선사하였던 것인 듯*그러니까-조선선교신론》이 승려들을 대상으로 한 이념적인 저작이라면 불교대전다음과 같은 찬탄처럼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서서 자유자재로 노니는 듯한 관자재보살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행하기 어려운 일들을 만해는 거뜬히 해치우고 있는 듯*)
방대한 불교의 경전을 섭렵, 주제별로 재구성하여 불교의 기본적 교리와 수도 방법과 처신의 문제를 체계 있게 분류하여, 위로는 깨달음의 내용으로부터 아래로는 국가·가정의 문제에까지 이르도록 망라하지 않음이 없었고, 거기에 해당하는 말씀들을 經·律·論에서 초록하였으니, 인용 경전은 한역대장경과 남전대장경을 합해 444부에 이르고 ) 바다 속에 있는 것 같아 방향조차 잡기 어려운 대장경을 이같이 재정리해 놓음으로써 불교를 일목요연하게 만든 것은, 깨달음의 눈이 투철하신 만해인 듯*
이외에도 만해는 시집 《님의 침묵》과 《십현담주해》를 출간하였으며, 《유마경》을 강설하고, 많은 불교단체를 창설하거나 또는 지도자를 역임하였다. 《불교》 지를 비롯한 불교잡지를 운영하고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 논설이나 수필류의 글을 발표하였으며 나아가 신문소설을 연재하기도*
만해는 영원의 기쁨이나 현재의 충만에 안주하기보다는 그의 시대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와 싸워나갔다. 그리하여 그러한 시대와 민중의 결핍에 충실히 대응하려고 애쓰는 보살행의 실천자로서 만해는 선미(禪味)의 현재가 가져다주는 만족이나 자족, 또는 충만에 안주하지 않고 너무도 위태로운 시대의 한가운데로 걸어나간 현실참여적 지식인이었다. “선의 맛을 탐착함이 보살의 얽힘이요, 방편으로 태어남이 보살의 풀림”이라는 《유마경》의 가르침에 대해 만해는 “적정한 선미를 탐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고통을 피함, 이것이 곧 보살의 속박이요, 선교(善巧)의 방편으로써 생사에 출입하여 중생을 제도함이 보살의 해탈”이라고 강의하듯*
민중에 기생하여 기복이나 염불에 복무하며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전통불교의 문제점과, 전통적으로 있어왔던 유가들의 불교비판의 핵심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탁월한 논리로서 극복하였으며, 그러한 전통불교의 페단을 치유할 수 있는 대책으로 지속적으로 조선불교의 개혁을 주장했다. 허우성은 이러한 만해 불교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 듯*
중생구제를 위해서 ‘물긷고 나무하기’라는 妙道를 그 논리적 극점까지 밀고 나아가서 만해는 중생구제의 진정한 영역이 유위와 인과의 영역, 생사지도의 경지이며, 그것도 특히 역사와 정치의 영역임을 보였다. 여기가 비록 절대가치의 실현장소는 아니지만, 선악의 업이 망하지 않는(善惡之業不亡) 장소이며 칼과 황금이라는 악마가 판치는 곳이며 투쟁과 인욕이 필요한 곳임을 뼈저리게 인식한 듯*
이러한 불교이해에서 그는 인의를 무시하여 적멸지교로 타락한 조선전통불교를 개혁하려 하였고, 당대의 악마의 대표자로 인식되었던 일제에 갖가지 방편으로 맹렬하게 저항했고유가의 인의와 충효라는 덕목이 불교에서도 가르쳐지고 있다고 힘써 주장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는 전통불교의 결점과 전통유가의 비판을 극복하고 있으며, ‘물 긷고 나무하기’에만이 아니라 ‘진흙탕 속에서도’ ‘감옥 속에서도’ 대 해탈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실천했다. 이 점에서 만해는 동양불교사 내지 동양사상사 내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갖는 듯*
만해의 불교사상은 전통불교가 지닌 탈속주의와 몰 역사성, 윤리부재와 적멸주의를 비판하고 인륜도덕을 중시하며 현세적 성격이 강한 유가적 요소를 적절히 융합하여 독창적이면서도 민중적인 성격이 강한 참여불교를 주창하고 이를 실천했다. 이러한 만해 불교의 이념은 오늘날에도 미완의 이상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는 듯*
“돈오점오, 구세, 보살행, 민족, 민중, 독립, 이별, 분노와 눈물”이라는 키워드로 상징되는 만해의 구세주의적 민중불교와, “돈오돈수에 의한 견성, 간화선, 고불고조, 절속, 절학, 무위한도인”22)이라는 키워드로 상징되는 성철(性徹)의 순수주의 적 절대불교는, 이제 상호보완을 이루면서 한국사회와 정신문화 발전에 기여해야 할 때이다. 특히 민족의 현실에 눈을 감은 채, 극단적 개인주의와 당파적 이기주의에 침윤되어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어가는 한국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도 철저한 현실인식에 기반을 두고 적극적으로 민중 속으로 다가가 구세주의와 평등주의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노력했으며, 헌신적인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만해의 민중불교, 참여불교의 정신은 오늘에도 더욱 힘차게 계승되어야 할 과제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