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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세계통일교회의 중앙성지, 전본부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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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 전본부교회여, 통일식구들을 초창기 열정으로 다시 깨어 기도케 하소서!
10월 18일 목요일 오후 12시, 청명하고 드높은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이 우리(임현진 교수, 도현섭 박사과정)를 스친다. 천일국 시대 참부모님이 안착하신 완성된 본향 청평에서 초창기 통일교회의 중앙성지였던 청파동 전본부교회를 향하여 심정의 순례를 떠난다. 이제는 통일교회의 새 역사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기쁨과 영광이 가득하지만, 초창기에 참부모님과 신앙의 선배님들께서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설움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인류구원을 위해 희생과 헌신의 피땀을 흘려 세운 정성의 터전이기에, 전본부교회를 향한 순례 역시 가슴이 시린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세계 각지의 식구들이 그리워하며, 깨어 기도하게 하였던 청파동 전본부교회를 다시 찾는 것은, 그 때 당시의 소박하고 부족한 우리의 현실 가운데서도 어떤 억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하늘 뜻 실현을 위해 정성을 모았던 열정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통일교회 시대, 첫 소유권을 확정한 전본부교회 1954년 5월 1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는 참아버님이 세 들어 계셨던 서울 성동구 북학동 391-6호 일명 세대문집에서 창립되었다. 참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이 준비하셨던 기독교계 신령집단과 독립운동을 이끌며 순수한 신앙을 지켰던 민족주의적 기독교단의 모심을 받지 못하게 되자, 준비한 기독교 기반을 신령과 진리로 통일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의지와 열정으로 소수의 무리를 이끌고 분연히 일어서셨다. 그리고 통일교회 전도의 황금시대가 도래했다. 지성과 신앙을 겸비한 수많은 아벨적 기독교계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전도의 열기에 따라 창립 후 1년 남짓 본부교회는 세대문집에서 성동구 흥인동 241-44번지로(1955년 1월 17일 이전), 다시 중구 장충동 1가 37번지로(동년 4월 27일) 이전을 거듭했다.
통일교회에 대한 이단정죄의 사회분위기 속에서 참아버님께서는 병역법 위반과 불법감금, 풍문에 편승한 간통혐의 등으로 1955년 7월 4일 치안국 특수정보과(중부서)에 연행되셨다. 결과적으로 무죄석방 되셨지만, 악화된 여론은 바로잡히지 않았다. 통일교회가 이단이자 사교로 둔갑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무렵의 일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가족사회 구현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며, 개인의 인격완성과 3대권(조부모-부모-자녀) 사랑이상을 실현하는 가정완성에 기반한 세계구원, 자연만물에 대한 인간의 보살핌과 돌봄의 주관성 완성을 구체적 실현방법론으로 삼는 통일운동에 대한 왜곡이 시작된 것이다. 참아버님은 1955년 10월 4일 서대문형무소를 출감하시면서 본격적으로 통일교회를 중심한 통일운동을 펼쳐 나갈 것을 다짐하셨다. 그리고 직접 장충동교회 전세자금 200만원으로 용산구 청파동 1가 71-3번지 일본인 적산가옥이었던 목조 2층 건물을 매입하셨다. 10월 7일 참아버님 출감 후 3일 만에 통일교회가 복귀한 하나님 소유권의 첫 안식처로서 본부 건물이 마련된 것이다. 참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용산(龍山: 최고 높은 산을 상징)과 청파(靑坡: 푸른 언덕, 이상을 상징)는 궁극적인 이상세계를 의미하며, 이에 따라 용산구 청파동은 그런 세계를 소망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된다고 한다. 또한 1가 71-3은 통일원리에 따라 1은 첫째(하나님)를 의미하고, 71-3은 완성수 70(7수는 하늘수 3수와 땅수 3수의 결합이며, 창조 이후 안식하신 7일을 의미하여 완성수에 해당)을 기반으로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1-3)가 출발한다는 뜻이다. 원리적인 의미를 갖는 장소에서 비로소 통일교회 본부가 안착한 것이다. 통일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을 보게 될 전본부교회로 이사하던 날, ‘선생님 출감 환영 및 본부교회 성전 입당 환영’을 의미하는 화동회가 열렸다. 참아버님은 튀밥과 사과를 일일이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격려하셨다. 모두 기쁨에 화동되어 손바닥이 피가 날 정도로 손뼉을 치면서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아버님만을 바라다 보면서 울고 웃었다. 본부로부터 실체화된 통일운동 오후 2시 무렵 도착한 전본부교회는 조용하기 그지 없었다. 닫힌 대문을 손수 열고 들어서니, 지난 4월 28일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방문하였을 때, 보랏빛 꽃으로 만발하였던 앞마당의 등나무는 이제 가을을 맞아 조금씩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을 견디면서 참부모님과 선배님들의 정성과 심정을 기억하고 있는 전본부교회 건물이 우리를 조용히 맞이해 주었다. 주변 건물들이 저마다 신형가옥으로 리모델링 되거나 재건축되는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적산가옥의 형상을 유지한 채 역사시대의 증언자로 남아 있는 전본부교회. 이곳을 지키는 김경선 목사님은 참부모님께서 “청파동교회는 기둥 하나, 기화 한 조각, 창문 하나 마저 그대로 보존해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이 건물을 송두리째 보존해서라도 지켜 전하고 싶은 심정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부교회로 들어서기 위해 미닫이 문 손잡이를 잡으며 참아버님의 말씀 한 구절을 떠올렸다. “본부교회의 문을 열고 수많은 통일교인들이 드나 들었지만 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떨리는 손으로 문을 당기면서, ‘아버지, 그리워하던 본부교회를 찾아왔습니다’라고 통곡하는 식구를 만나보기를 심히 고대했지만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했다. 본부교회의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될 때, ‘제 가슴에 못을 박았으면 박았지 이러한 모습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겠습니다. 하늘의 정성 어린 터전이 어찌하여 이렇게 초라합니까? 제 일대에 이 초라함을 웅장함으로 바꾸어 드리겠습니다’라고 충성을 다짐하는 아들딸이 되어야겠다.” 옷깃을 여미며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찾아 세우려는 통일운동의 역사적인 본부의 초라한 모습 배후에 깊은 심정의 세계가 있음을 상기했다. 우리는 1955년 10월 7일 전본부교회 처음 이사하셨던 식구의 심정으로 건물 안을 들어가 보기로 결심했다. 본부교회 성전 안으로 들어서자 낡은 칠판과 마루 바닥이 우리를 반겼다. 성전을 빙 둘러서 걸려 있는 역사적 사진들이 시간의 두께를 보여준다. 당시에 이 좁은 공간에 참아버님과 식구들은 통곡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노라 다짐했을 것이다. 고 유효원 협회장님은 하루 14~16시간 이곳에서 원리강의를 하셨고, 처음에는 참아버님도 허름한 잠바나 평상복을 입고 식구들과 마찬가지로 마룻바닥에 앉아서 계셨고, 나중에는 식구들이 준비한 의자에 앉으셔서 현장을 영적으로 지도하셨다. 수많은 식구들이 주일에 본부교회를 찾아 참아버님의 말씀을 듣기를 청할 때, 참아버님께서는 서너 시간은 보통인 뜨거운 말씀으로 화답하셨다. 전도자 수련회가 이곳에서 실시될 때면 비좁은 성전에서 식구들이 새우잠을 자기 일수였다. 주일이면 예배 후 식사를 마련해야 했는데, ‘위하여 사는 참사랑’의 자기희생정신으로 사는 통일교회는 항상 의식주 생활이 쉽지 않았다. 부실한 취사설비로 밖에서 옥수수 죽(일명 강냉이 껍질 죽) 등을 끓여 함께 나눠 먹었다. 식구들이 많아서 한 그릇 이상 먹기도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도 밤새도록 찬송과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영적인 현상도 벌어졌다. 계시, 방언, 환상, 진동과 같은 현상이 벌어졌으며, 영통인 스스로 자제하지 못할 경우 참아버님이 직접 자제시키기도 하셨다. 이 성전 안에서 1960년 4월 11일(음 3월 16일) 역사에 없는 참부모님 성혼식도 거행되었다. 이어 36가정, 72가정 축복식과 124가정, 777가정, 1800가정 약혼식도 거행되었다. 통일운동의 핵심인 축복운동도 전본부교회가 발상지이다. 기록으로만 보고 들었던 성혼식 현장의 장면들이 영화처럼 스쳐간다. 통일교회의 주요 명절인 참하나님의 날(1968년 1월 1일), 참부모의 날(음 1960년 3월 1일), 참만물의 날(음 1963년 5월 1일), 참자녀의 날(음 1960년 10월 1일) 등 4대 명절도 이곳에서 선포되었다. 참가정의 희생과 헌신, 추억이 어린 공간들
성전을 둘러 보고 안쪽 복도를 통해 참어머님이 쓰시던 방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방이 아니었던 곳인데, 개조하여 방으로 쓸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참어머님은 이 방에서 주로 거하시면서 예진님, 효진님, 혜진님, 인진님, 흥진님, 은진님, 현진님, 국진님 등을 출산하셨다. 그 가운데 1964년 7월 28일 탄생하신 문혜진님은 탄생 7일 뒤인 8월 4일 승화하셨다. 바로 위 층이 참아버님 방인데, 참어머님께서는 참아버님과 각 방을 쓰시면서 빛이 드는 변변한 창문도 없는 어둡고 좁은 방에서 어려움을 홀로 겪으시며 기도와 정성을 드리셔야 했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가면 참아버님께서 종종 이발을 하시던 의자가 있고, 중심식구들과 말씀을 나누던 거실 공간, 기도하시던 공간, 참아버님이 쓰셨던 방, 협회 사무실 공간, 효진님과 흥진님이 함께 쓰시던 방, 고 유효원 협회장께서 사길자 사모님과 함께 쓰시던 좁은 방 등이 붙어 있었다. 지난 4월 방문 때는 목사님께서 참아버님 방에서 참어머님이 자녀분이 아프셨을 때, 건강상태를 확인하려고 맛을 보셨다는 대변이 기저귀째로 보관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셨다. 변이 산화되어 흔적만 남은 기저귀를 보고 있노라니 고래로 부모 사랑의 영원한 가치가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과 맞닿아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기도실 공간에서는 참부모님이 직접 사용하시던 책상과 필기구, 전화기, 의자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전화수첩에는 1970년대 중반 당시의 식구 전화번호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효진님•흥진님 방과 별채에 있는 예진님 방, 인진님 방, 은진님 방, 현진•국진님 방 등에서는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 시절까지 직접 쓰시던 학용품과 공책, 장난감, 악기, 작품이나 상장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더불어 자녀님들의 어릴 적 사진이 게재되어 있는데 독립된 사진집으로 엮어 출판이 된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녀님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다시 성전으로 내려와 통성기도를 드리는데, 이곳은 영성으로 충만한 곳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초라하게 남아 있지만, 역사적인 행적이 살아 있으며, 영원히 잊히지 않을 곡절 속에서 통일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함께 한 본부건물이기에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부모님은 이처럼 귀한 곳이기에 전본부교회를 1966년 1월 1일 성지택정을 위한 제1차 세계순회노정을 마치면서 세계에서 120번째의 완성성지로 택정하셨다. 통일교 신앙에서 세상을 복귀하는 중심기지로 축복하셨던 것이다. 이제는 참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1981년 10월 20일부터 전본부교회로 공식적으로 부르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통일 신앙하는 식구들이 이곳을 찾아 다시 초창기 열정으로 천일국 건설을 향해 희생적인 헌신의 길을 걸어가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전본부교회는 여전히 우리 심정 가운데 살아있는 본부여야 하며, 그것이 통일교회 새로운 역사를 전통의 기초 위에 세우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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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통일교회(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에서 보내온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