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소위 서양사에 약간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
배운것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국가의 역사도 마찬가지이지만....원사료를 접해야 함은 필수
임에 불구한데도....현 시점에서 원사료를 한글판으로 번역되어
나온 자료가 적지않기에....^^
원사료를 접하지 못하는 실력이 없음이 안타까울뿐입니다...
원사료의 정의와 접해야 하는 이유..접하는 방법을 정리해봅니다...
-역사를 原史料에 의거해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
(Why Study History Through Primary Sources)
James Harvey Robinson
역사공부에 있어서 사료의 중요성을 논한 본문은 Medieval Source Book에서 취재하였는데, 이하에 별도의 출전을 밝힌 바와 같이 20세기초 미국에서 새로운 역사학의 조류, 이른 바 New History의 사조를 대변하는 James Harvey Robinson이 1904년에 저술한 것이다. 이하는 Robinson의 텍스트를 우리의 목적과 실정에 맞게 다소 변형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한편 Medieval Source Book 의 설치, 운영자인 Paul Halsall이 추가한 주석이나 자료는 필요에 따라서 번역하기도 하고, 그대로 두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본문텍스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 자료는 일체를 보존했다.
史料 (The Sources of History)
과거의 사건이나 상태에 관한 우리의 모든 정보를 일정한 종류의 증거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러한 증거를 우리는 史料라고 한다. 때때로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하여 다수의 양호하고 신빙성있는 사료가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1649년에 있었던 영국왕 찰즈 1세의 처형에 대해서 라든지, 또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에 대해서 라든지. 그러나 때로는 단지 하나의 그리고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사료가 전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강변에 매장된 알라릭(Alaric)의 장례에 대한 보고와 같은 경우이라든지. 우리가 알고싶은 허다한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조차 불행하게도 도대체 단 하나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그저 어떠 했으리라는 추측만이 겨우 가능할 뿐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가 당도하여 간략한 기록이나마 하기 전에 게르만인이 무엇을 하고 있었던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대 이전의 로마주교(교황)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를 읽거나 공부한 사람들 중에 原史料 또는 1차 사료 (primary or first-hand sources)를 접해본 이들은 거의 없다. 이들은 그들의 지식과 정보를 대개 한다리 걸쳐서 2차적으로 획득한다. 실로 현대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8세기 영국의 역사가, 1776년에 大著 로마제국쇠망사를 발표. 이 글의 필자는 기번과 기번이 이용한 사료의 시대적 거리를 고려하여 18세기 중엽에 활동하였던 기번을 '현대의 역사가'라고 표현했다 - 편역자]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대해 서술한 것을 읽는 것은 유세비우스(Eusebius)나 유트로피우스(Eutropius), 그리고 기타 고대의 저술가를 직접 참고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한 일이다. 결국 기번과 같은 역사가들도 이들에게 의존하기 마련이었지만. 더구나 기번은 모든 原史料를 주의깊게 연구하고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감히 이렇게 주장할 수 있으리라. 기번은 그 시대에 대하여 고대의 저술가 어느 한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신빙성있고, 완전하고 보다 매력적인 서술을 제공했다고. 그의 로마제국 쇠망사(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는 틀림없이 최상급의 작품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타인의 報告에 대한 보고( report of others' reports)"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原史料가 아니라 2차 자료인 것이다. (not a primary but a secondary source)
한다리 걸쳐 얻은 지식의 문제점 (The Problem of Secondhand Knowledge)
오늘날 횡행하고 있는 역사지식의 대부분은 그나마도 기번이나 그에 버금가는 권위있는 저술과 같은 2차 사료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교과서나 백과사전적인 이야기, 劇本 그리고 잡지기사에서 획득되는 것이다. 대중적인 讀本이나 토막기사는 일반적으로 原史料에 대한 지식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 쓴 것들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최상의 2차 자료에 토대를 두었다해도 기껏해야 3차 자료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이렇게 널리 횡행하는 歷史物이라는 것들은 대개 낡은 독본이나, 토막기사를 엮어 만든 것으로, 지식의 근원적인 자료로부터 4 단계, 5 단계 또는 6 단계나 벗어나기 일쑤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어느 報告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수록 신빙성과 정확성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상상력에나 호소할 만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부사항이 과장될 것이며, 반면 아주 본질적인 事安은 비록 散文的이고 상투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쉽사리 잊혀진다. 역사가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멋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며 몇몇 잘못된 소문에 미혹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소문이라는 것은 한번 돌기 시작하면 매번 반복될 때마다 진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아주 탁월한 敎會史家 바로니우스 추기경(Cardinal Baronius)은 1600년경에 저술활동을 했었는데, 아주 불충분한 증거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한 바 있었다. 즉 기원 1000년이 가까워지면서 유럽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세계가 곧 종말에 이를 것으로 믿었다는 따위로 말이다. 매우 인기있었던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역사가 로버트슨(Robertson)은 이 진술을 반복하면서 그 공포의 해가 다가오면서 죄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무시무시한 충격을 묘사하는 지경으로까지 나갔다. 그 다음 시기에 등장한 역사가들은 꽤 탁월한 사람들도 일부 포함하여 로버트슨의 서술을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그러나 약 30여년전에 어떤 프랑스의 학자가 이 기이한 이야기에는 실제로 적절한 근거가 전혀 없음을 지적했다. 그 시대의 연대기작가들에게 1000년 이라는 해는 997년이나 1003년 보다 유별나게 불길하거나 공포스러운 것이 결코 아니었다. 기원 1000년을 둘러싼 이 공포와 충격에 관한 설화는 약 300여년 동안이나 역사적 사실로 통했었는데, 바로 2차 자료에 의존하였을 때 발생하는 위험을 아주 탁월하게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원편자주(1998): 이 경우는 수정주의적 견해가 활발히 등장하고 있는 예이기도 하다. - 오늘날에는 많은 역사가들이 기원 1000년은 문화적으로 의미가 심장한 해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역사학의 著作에 대한 질문 (Questions to Ask about a Historical Work)
역사학의 어떤 저작물을 집어들었을 때 최초로 제기하는 질문 중의 하나는 "도대체 著者는 어디에서 정보를 취했는가?" 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의 진술을 그다지 신빙성이 없고 낡은 것이지만 잘 아는 언어로 되어 있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존의 저작에서 베껴낸 것인가? 아니면 그와 같이 불확실한 자료에 실망하여 저자는 어떤 言語로 출간되었든지 간에 가장 최근의 연구를 비롯하여 해당분야에서 저명한 학자의 저작을 충분히 섭렵하였는가? 아니면 더 낫게도 저자는 문제가 되고 있는 사건이나 상태에서 직접 유래하는 근원적 證據(原史料)를 몸소 연구했는가?
예를 들면 샤를마뉴[Charlemagne: 8-9세기경에 생존하였던 프랑크왕국의 왕, 부활한 서로마제국의 황제. 당대의 라틴어 기록에 Carolus Magnus로 표기된 경우가 알려지고 있다. 이에 의거하여 유럽각국에서는 자기식의 현대어 표기가 생겨났다. 영어권에는 한 때 Charles the Great라는 우스꽝스런 표현이 진지하게 사용된 적이 있었지만, 대체로 이 글의 필자가 쓰는 프랑스어식의 표기가 관철되었다. 독일어권에서는 Karl der Große 라고 표기하고 있다. - 편역자] 에 관한 소책자나 소논문은 호지킨(Hodgkin)의 저작 Charles the Great나 웨스트(West)의 알퀸[Alcuin, 샤를마뉴가 프랑크제국의 학술을 進興하기 위해 브리타니아 - 오늘날의 영국 - 에서 초빙해온 대학자, 성직자 - 편역자] 그리고 이 주제에 관해서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한 두 권의 책에 의거해서 쓸 수 있으리라.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샤를마뉴의 치세에 관한 프랑스나 독일학계의 高文大冊으로 눈길을 돌리고 이 주제에 대하여 역사학계의 전문학술지나 고급학회의 정기간행물에 발표된 모든 논문들을 섭렵할 수도 있으리라. 모든 양심적인 역사가들은 그러나 그 보다 더 멀리 나가 직접 일차적인 증거를 보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하기 바란다. 훌륭한 역사가는 사료자체로 돌아가서 로르쉬 수도원의 연대기(Annals of the Monastery of Lorsch)와 샤를마뉴의 비서였던 아인하르트 (Einhard) 의 샤를마뉴傳記을 주의깊게 읽고 검토할 것이다. 그와 같은 연구는 또한 샤를마뉴시대에 발포되었던 모든 법령을 꼼꼼히 검토하고 황제나 그에 관련된 사건을 언급한 모든 당대의 저작을 참조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 주제에 대하여 과거가 우리에게 전해준 모든 것과 그 사안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을 비로소 통달하게될 것이다. 가장 신뢰할 만한 역사가는 따라서 직접 사료를 검토하는 연구자들인데, 이들은 또한 동시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원사료를 연구했던 학자들이 제시한 제안, 비판 그리고 설명을 援用할 줄 안다.
原史料를 이용해야 할 필요성 (The Necessity of Using Primary Sources)
우리들의 [즉 미국의 - 편역자] 고등학교 및 대학 학부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교육의 방법을 개선하는 작업에 있어서 학생들을 과거의 사태에 대한 1차적인 증언(the firsthand accounts of events), 즉 전문적인 용어로 말해서 원사료(primary sources)와 직접 접촉시키는 계획보다 더 성과가 많은 방법은 다시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일부 人士들에게 구부정한 어깨로 책상머리에 고독하게 눌러앉아 누르끼리한 양피지에 기록된 모호한 라틴어 略語를 고통스럽게 해독하고 있는 歷史狂의 환상을 연상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사료가 항상 파악하기 어렵고, 지루하고 해독하기 곤란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그 반대로 때로는 원사료가 접근하기 더 용이하고, 종종 기번이나 매콜리[Macaulay, 19-20세기에 생존하였던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 편역자]와 같이 천재적인 역사가의 펜이 이루어낸 가장 흥미진진한 묘사보다 더 생생하고 흥미롭다.
최고의 권위를 누리는 역사연구와 사료의 관계는 巨匠이 창조한 예술품이나 문학작품의 묘사와 原作의 관계와 비슷한 것이다. 우리가 그림 자체 또는 위대한 詩나 戱曲를 무시하고 우리의 시야를 이러한 원작에 대한 다른 누군가의 평론이나 해설에 제한할 수 없는 것과 바로 마찬가지 이유로, 역사연구와 학습에서 우리는 결국 역사 자체가 의존하는 토대, 즉 사료를 스스로 검토하는 모든 기회를 붙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도 제기될 수 있으리라. 즉 상대적으로 덜 숙련된 학생들 보다 숙달된 역사가들만이 특정한 시대의 사람과 상황에 대한 知見을 충분히 습득한 다음에 사료를 더 잘 이용할 수 있다고.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의 설득력을 인정하면서도, 아주 숙달된 역사가들조차 再現할 수 없는 것을 원사료의 연구에서 배울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리하여 진지한 학생이나 독자는 원사료에 접근할 수 있다면, 2차적인 서술에 결코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사료는 그 것이 작성된 시대의 정신으로 不知不識 간에 그 틀이 주조된다. 사료텍스트의 한 줄 한 줄마다 그 필자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암시를 제공하고, 또 여러 권의 2차 문헌이 결코 창출해낼 수 없는 인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순전한 정보 역시 우리가 쉽사리 잊지 못하는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료가 전하는 사실들은 우리의 기억속에 깊이 침투된다. 아틸라와 실제로 이야기해본 적이 있거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우리 시대의 어떤 역사가보다 우리의 흥미를 보다 더 강렬하게 일깨우기 쉬운 법이다. 비록 그 현대인이 훈족의 왕이나 1차 십자군원정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 해도. 단테시대의 학자들이 다시금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古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듣는 것은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전혀 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단테의 詩作[神曲 - 편역자]에 묘사된 장면, 즉 詩人이 지옥에서 古代 異敎文學의 기라성같은 대표들 - 호머,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그리고 루카누스 - 에게 따뜻이 영접받고 있는 광경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
게다가 사료학습은 과거에 대하여 우리 자신의 견해를 어느 정도 형성할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저 늘상 하나 아니면 두어 권 정도 있으며, 사료자체와는 동떨어져 있는 敎本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게된다. 우리가 사료자체에 도달하면, 더 이상 그저 읽고 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목전에 놓여있는 진술에서 '무엇을 안전하게 추론할 수 있겠는가'라는 따위의 숙고를 시작하며, 가장 중요한 批判能力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사실을 수집하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실들의 진정한 본질과 의미를 결정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역량은 단지 학문적인 작업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도 아주 중요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사료를 공부함으로써 루터가 그의 적에 대해서 극도로 불공평했으며, 그들이 수미일관하게 그리고 그들이 진리라고 생각한 바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을 때에도 그들의 행동을 나쁜 동기의 탓으로 돌렸던 것을 틀림없이 간파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루터의 적들도 루터를 마찬가지로 불공평하게 다루었으며, 자신들의 견해를 거부한다고 해서 루터를 사악하고 방탕한 인물이라고 공격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바로 이와 같이 불공평한 처사를 비일비재하게 접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방선거의 경우를 보면 각 정파가 상대방에 대해서 나쁜 소리만을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얼마든지 보고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행위와 그 동기를 불편부당하게 관찰하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깊이 연관된 문제에 대해 공평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보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과거를 다루는데 있어서 공감과 불편부당성을 배양함으로써 우리는 현재를 냉철하고 온건하게 관조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기를 희망할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이 해서 진정으로 사려깊은 역사공부는 우리가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공감과 공정함 그리고 신중함과 같은 바로 근본적인 미덕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이용가능한 원사료집성 (The Modern Availability of Primary Sources)
19세기초만 하더라도 [원편자주 (1998): 로빈슨이 이 글을 쓸 무렵부터 약 100년전] 유럽역사의 원사료에 접근하는 길은 아직 가시밭길이었다.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중요한 필사본기록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규모의 수집처에 분산되어 있었다. 주로 수도원이 그러한 자료의 소장처였다. 고문서들은 어두운 방이나, 습기찬 지하실 그리고 먼지가 가득한 다락방과 같은 곳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이러한 문서자료들은 자주 부주의하게 베껴져 [이러한 작업을 轉寫 (transcription) 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고문서연구의 기초작업으로 간주되는 중요한 과정이다 - 편역자], 서툰 오류도 가득차 있어 古文字를 해독하는 기술 - [이런 종류의 전문학문, 훈련을 古文字學 (Palaeography)이라고 한다 - 편역자] - 을 특별히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면 읽을 수 조차 없었댜. 대개의 경우 목록조차 없었으며, 연구자들을 필요한 자료로 인도해주는 아무런 수단도 없었다. 학자들은 이 곳에서 저 곳으로 떠돌아 다니지 않을 수 없었으며 유용하리라고 생각되는 근소한 자료를 찾기 위해 쓸모없거나 관련이 없는 산더미같은 자료를 뒤져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변모했다. 학자들은 이제 안락하고 조명이 잘된 도서관에서 편안한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앞에는 깨끗이 인쇄된 책을 놓여 있게 되었는데, 그 텍스트는 해당 작품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필사본을 대조, 비교함으로써 확정된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텍스트는 전문가들이 校閱하여, 오류가 제거되어 있고 난해한 부분에는 주석이 붙여진 것이다. 자료는 주도하게 분석되어 색인이 붙어있어, 누구나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있는 바로 그 단락을 순식간에 찾을 수 있으리라.
원사료를 이용가능하게 만드는 과업은 참으로 오래 걸리고 고통스러운 일로서, 300년이나 400년전부터 지속되어온 사업이었다. 이미 16세기초부터 학자들은 중세의 연대기들을 수집하여 이용하기에 편리한 全集으로 출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대에는 베네딕투스 교단[Order of Benedictine: 우리에게는 분도 수도회로 잘 알려져 있는데, 서유럽 기독교 문화권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수도회, 6세기초 Benedictus of Nursia에 의해 창설 - 편역자]의 수도사 한 무리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료집을 간행하고 역사연구를 용이하게 하는 論著를 준비함으로써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수도교단을 위해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 [이들을 특히 Maurist 라고 하는데 유럽에서 중세사료의 엄밀한 교감본을 작성하는 학문분야의 전통에서 최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Maruist의 전통에서 프랑스에서는 고문서연구가 근대학문의 수준으로 발달하게 되었고. 나중에 국립고문서학교 (Ecole des Chartres Nationale) - 일종의 기록보존전문요원 양성 및 그 방면의 기초연구를 담당하는 기관 - 가 설립될 수 있는 토대가 놓였다. - 편역자]
19세기는 비판적 과학 정신의 비약적인 발달을 목격한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전에는 결함이 많은 형태로 나타났던 허다한 사료들을 새로이 간행할 것이 필요해졌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오직 필사본의 형태로만이 이용할 수 있었던 수천 권의 귀중한 사료들이 새로이 우리의 자료에 추가되기에 이르렀다.
수많은 사료집성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1826년부터 지금까지 간행이 지속되고 있는 독일의 사료간행사업이다. - 모누멘타 게르마니에 히스토리카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이 사업은 어느 학회가 주관하여 출범하였으나, 최초의 간행책임자였던 페르츠[Georg Pertz]의 사망에 즈음하여 정부의 위원회가 주관하게 되었다 (1875). 그 이후 출간된 사료집은 최고 수준의 학문적 기준을 확립했다.
영국에서도 巨帙의 사료집이 1858년부터 기록관(Master of the Roll)의 주관 아래 발간되었는데, 이 것이 이른 바 Rolls Series 를 구성하게 되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그리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크고 작고간에 나름대로의 사료집을 구비하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국가의 지원을 받았으나, 그 대부분은 역사학 관련 학회나 학자들이 개별적으로 수행한 활동의 결과였다.
사료들이 그와 같이 신속하게 편집, 간행되어 역사연구의 대부분의 분야에서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유럽의 도서관이나 기록보존소(archives)에 보관되어 있는 필사본에 의거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적어도 미국의 가장 좋은 대학이나 공공도서관 몇 곳은 이제 방대한 규모의 간행사료집을 갖추게 되어, 몇 개의 분야에서는 보스턴이나 뉴요크에서도 런던이나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 글이 20세기초에 작성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19세기에 편찬된 사료는 대개의 연대기류에 치중해 있었고, 그 사료에 의거한 연구는 현저히 정치사, 제도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역사연구의 시야가 한 없이 확대되었고, 연구방법이 갈수록 정교해지면서, 과거의 사료간행자들이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던 종류의 필사본자료 - 즉 기록보존소의 소장물 - 들이 대거 연구에 채용되기에 이르렀다. - 편역자]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와 같이 허다한 史料集叢書의 이름을 심지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한없이 열거하는 일은 이제 쓸모가 없을 게다. 왜냐하면 거대한 사료집의 대표적인 제목에서 어떤 특정한 저작이나 기록이 포함되어 있을지를 추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사료간행이나 조사보고 그리고 사료비판은 결국 다수의 불가결한 참고서(works of reference)를 갖추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이러한 참고서들은 직접 역사를 다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역사가들이 의존하게 마련인 자료를 찾는 일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졌다. 이하에는 널리 주목받는 소수의 참고자료만이 본보기로 언급될 것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모든 종류의 전문적인 역사연구에서 필수적인 道具(apparatus)로서 기능한다. [이하의 사항은 번역을 하지 않고 원문상태로 제시한다. 물론 이러한 참고자료는 오늘날의 연구수준에서 보면, 아직도 有效한 것이 없지 않으나, 대개 최근의 자료로 대체되었거나 대체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고자료들은 史學史적인 의미도 심장하기 때문에 한 번쯤 구경해둘 만 하다 - 편역자]
Guides to Using Primary Sources
To learn what the sources are and where they ma be found is the first requisite of historical investigation. A French writer, Langlois, has published a very useful bibliography of historical bibliographies, a catalogue of the best lists of sources and of historical treatises.
Langlois, Manuel de bibliographie historique, Part 1, "Instruments bibliographiques," 2d ed., Paris, 1901,
Such lists are very numerous and often voluminous The most useful and scholarly is Potthast's Wegweise,or "guide," in two stout volumes.
Potthast, Wegweiser durch die Geschichtswerke des Europäischen Mittelalters bis 1500, 2 Vols., 2d ed., Berlin, 18951896
The compiler has with infinite patience, sought to bring together in at alphabetical list the sources for the history of western Europe from the year 400 to 1500, and to state when and where they have been printed. One anxious to learn whether there has been a new critical edition of a particular chronicle, or whether there are any lives of St. Boniface, or Gregory VIII, or Frederick Barbarossa, written by those who lived in their times, can obtain the desired information from Potthast, as well as a list of modern works relating to the topic under consideration.
Admirable guides exist for the study of particular countries. German scholars have compiled a list of all the important books and articles relating to the history of their own country from the time of Tacitus to the present day.
DahlmannWaitz, Quellenkunde der deutschen Geschichte, 6th ed., Göttingen, 1894,
A still better and more extensive work by Molinier and others is in course of publication for the history of France.
Les sources de l'histoire de France, des origines aux guerres d'Italie (1494); to be continued to 1815 5 vols., (Paris: 1901-)
Of course the history both of France and of Germany is so closely associated with that of other European countries that the abovementioned guides are very valuable for the student of general European affairs. A similar collection of titles has been prepared by Professor Charles Gross for England.
Sources of English History, Longmans, 1901,
For an explanation of the many troublesome tern and expressions used in medieval writings one should turn to the monumental Dictionary of Mediaeval Latin originally compiled by Du Cange and first issued in 1678. In successive editions, later scholars have added many terms which Du Cange overlooked, but one is still often disappointed not to find words be would like have explained.
Glossarium mediae et infimae latinitatis, 7 Vols, Paris, 1840-
While but few of the aids to historical research are here given, those mentioned are of the utmost importance by reason of the range and accuracy of the information which they furnish and of the ease with which they can be consulted. No really advanced work in history can be carried on without their aid.
[Note (1998): These works of nineteenth-century scholarship remain valuable, but must be supplemented by newer and more recent guides. For current students whose primary language is English, the Dictionary of the Middle Ages is a good place to find basic starting points for research. Modern online library catalogues - such as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MELVYL Catalog - also provide help unimaginable to scholars of only twenty years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