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호(廟號) ■■
⊙ 묘(廟) : 사당 묘 | 어3/진2급 广 15획 | 집 엄(广) + [아침 조(朝)→묘] ⊙ 호(號) : 이름 호 | 어6/진5급 虍 13획 | 号 + [범 호(虎)]
● 풀이 : 사당(廟)에서 사용하는 이름(號)
■ 설명 :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사람이 이름을 귀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호를 지어 불렀습니다. 왕의 경우에는 죽은 후, 시호(諡號)를 지어 이름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때 부르는 이름은 별도로 만들었는데, 이를 묘호(廟號)라고 합니다. 이러한 묘호에는 '~조(祖)'나 '~종(宗)'이 붙습니다.
중국에서 사용한 이러한 묘호를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태종 무열왕이 처음 사용하였으나, 당시 당나라에서 사용하지 말라는 협박(?)이 들어와 이후 사용하지 않다가, 고려 태조 왕건 이후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충렬왕 이후부터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쓰지 못하다가 조선 시대부터 다시 사용하였습니다.
☞ 참고 : 조선 시대 왕의 이름을 보면 태조(太祖), 정조(正祖)와 같이 '~조(祖)'로 끝나는 왕도 있고, 태종(太宗), 세종(世宗)처럼 '~종(宗)'으로 끝나는 왕도 있습니다. '~조(祖)'와 '~종(宗)'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예기(禮記)에 보면, "공이 있으면 조(祖)를 쓰고, 덕이 있으면 종(宗)을 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 반정으로 임금이 된 세조(수양대군)과 인조, 임진왜란에서 이긴 선조가 이런 원칙에 따라 조(祖)를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영조, 정조, 순조는 불분명한 기준으로 붙여졌습니다.
☞ 관련되는 단어 : 호(號),시호(諡號)
■■ 태조(太祖) ■■
⊙ 태(太) : 클 태 | 어6/진5급 大 4획 | 큰 대(大) + 점 주(丶) ⊙ 조(祖) : 할아비/조상 조 | 어7/진5II급 示 10획 | 보일 시(示) + [또 차(且)]
● 풀이 : 큰(太) 조상(太)
■ 설명 : 태조는 원래 큰 조상이란 뜻이지만, 나라를 세운 첫째 임금에게 붙였던 이름이기도 합니다. 태조 왕건은 고려를 세운 임금이고,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임금입니다.
☞ 관련되는 단어 : 태종(太宗),묘호(廟號)
■■ 태종(太宗) ■■
⊙ 태(太) : 클 태 | 어6/진5급 大 4획 | 큰 대(大) + 점 주(丶) ⊙ 종(宗) : 마루 종 | 어4II/진3급 宀 8획 | 집 면(宀) + 보일 시(示)
● 풀이 : 큰(太) 마루(宗)
■ 설명 : 마루 종(宗)자에서 '마루'는 '집 안에 깔려 있는 마루'가 아니라, '산마루'나 '지붕마루'에서 보듯이 '꼭대기'나 '높다'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 입니다. 태종은 원래 '큰 꼭대기'라는 뜻이지만, 한 왕조에서 공덕이 태조(太祖: 나라를 세운 임금)에 버금가는 임금에게 붙이던 이름입니다. 보통은 나라 초창기의 혼란을 잠재우고 새 나라의 기틀을 잡은 왕에게 붙이는데, 주로 2번째 임금에게 붙여 줍니다. 예를 들어 당태종은 당나라의 2대 임금이고, 병자호란 때 조선을 쳐들어온 청태종은 청나라 2대 임금입니다.
☞ 참고 : 조선시대 2대 임금은 태종이 아니라 정종(定宗)입니다. 정종은 왕에 오른지 2년만에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큰 일을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3대 임금인 이방원에게 태종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 관련되는 단어 : 태조(太祖),묘호(廟號)
■■ 시호(諡號) ■■
⊙ 시(諡) : 시호 시 | 어1/진급 言 16획 | 말씀 언(言) + [더할 익(益)→시] ⊙ 호(號) : 이름 호 | 어6/진5급 虍 13획 | 号 + [범 호(虎)]
● 풀이 : 시호(諡)의 이름(號)
■ 설명 : 시호는 왕이나 공을 세운 신하, 유명한 학자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의 이름(광개토대왕, 법흥왕, 태조, 태종, 세종)은 모두 시호입니다. 이러한 시호를 잘 살펴보면 그 사람이 살아 생전에 했던 일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왕의 이름을 암기할 때에는 그 왕의 업적이 무었인지를 연관지어 암기합시다.
☞ 관련되는 단어 : 호(號),묘호(廟號)
■■ 소수림왕(小獸林王) ■■
⊙ 소(小) : 작을 소 | 어8/진8급 小 3획 | ⊙ 수(獸) : 짐승 수 | 어3II/진2급 犬 19획 | 개 견(犬) ⊙ 림(林) : 수풀 림 | 어7/진5II급 木 8획 | 나무 목(木) + 나무 목(木)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소수림(小獸林)에 묻힌 왕(王)
■ 설명 : 소수림(小獸林)은 말 그대로 해석하면 '작은(小) 짐승(獸)들이 사는 숲(林)'이라는 뜻인데, 고구려에 있었던 지역의 이름입니다. 왕이 죽은 후 소수림에 묻혔는데, 이 곳의 이름을 따서 소수림왕(小獸林王)이라고 불렀습니다.
소수림왕(小獸林王, ?~384년)은 고구려 17대 왕으로,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5세기 고구려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 참고 : 소수림왕의 동생인 19대 고국양왕까지는 고구려 왕의 이름들은 대부분 묻힌 장소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경우가 많습니다. 20대 광개토대왕 때부터는 왕의 업적을 알 수있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 관련되는 단어 : 태학(太學)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 광(廣) : 넓을 광 | 어5/진4II급 广 15획 | 집 엄(广) + [누를 황(黃)→광] ⊙ 개(開) : 열 개 | 어6/진5급 門 12획 | 문 문(門) + 손 맞잡을 공(廾) + 한 일(一) ⊙ 토(土) : 흙 토 | 어8/진8급 土 3획 | ⊙ 대(大) : 큰 대 | 어8/진5II급 大 3획 |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넓게(廣) 땅(土)을 개척한(開) 대왕(大王)
■ 설명 :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3)으로, 북쪽의 만주로 영토를 크게 넓혀 광개토대왕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백제와 신라를 위협하였습니다.
▶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 광개토대왕이 죽고 난 다음,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려 만든 비로, 중국 만주의 길림성(吉林省)에 세웠습니다. 높이는 6.39m, 너비는 2.00m로 한국 최대의 크기이며 장대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비문에 새겨진 내용은 고구려 건국 신화로 부터 광개토대왕 때 이루어진 정복 활동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 장수왕(長壽王) ■■
⊙ 장(長) : 긴 장 | 어8/진5II급 長 8획 | ⊙ 수(壽) : 목숨 수 | 어3II/진3급 土 14획 |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장수(長壽: 오래도록 삶)하였던 왕(王)
■ 설명 : 장수왕(長壽王, 394~491년)은 고구려 제20대 왕으로, 98세까지 살아 장수왕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장수왕 다음으로는 조선시대 영조 대왕(1694~1776년)이 83세까지 살았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로 427년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 정책을 펼쳐, 고구려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아버지 광개토대왕과 함께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 참고 : 광개토왕과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왕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우리나라 지도의 위쪽(북쪽)으로, 장수왕은 지도의 아래쪽(남쪽)으로 영토를 넓혔습니다. 아버지의 위치는 위니까, 위쪽(북쪽)으로 영토를 넓히고, 아들은 위치가 아래이니까, 아래쪽(남쪽)으로 영토를 넓혔다고 암기하세요. 또 남쪽으로 땅을 넓히기 위해 서울을 남쭉인 평양으로 옮긴 것도 함께 암기하고요.
■■ 근초고왕(近肖古王) ■■
⊙ 근(近) : 가까울 근 | 어6/진5급 辶 8획 | 갈 착(辶) + [도끼 근(斤)] ⊙ 초(肖) : 닮을 초 | 어3II/진2급 小 7획 | [작을 소(小)→초,소] + 고기 육(肉/月) ⊙ 고(古) : 옛 고 | 어6/진5II급 口 5획 | 입 구(口) + 열 십(十)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백제 5대 왕인 초고왕(肖古王)의 업적에 가까운(近) 왕
■ 설명 : 근초고왕(近肖古王, ?~375년)은 백제 13대 왕으로, 백제가 가장 번성하던 시기의 왕이었습니다. 근초고왕 때 백제는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고구려 군사를 대동강에서 무찌르고 평양성을 점령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습니다. 또 바다 건너 중국의 요서지방과 산둥지방, 일본의 규슈지방까지 진출하였습니다. 근초고왕(近肖古王)이라는 이름은 백제 5대 왕인 초고왕(肖古王)의 업적에 가까운(近) 왕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초고왕은 말갈과 신라의 여러 성을 쳐서 함락시켜 백제의 영토를 넓힌 왕입니다.
■■ 무령왕(武寧王) ■■
⊙ 무(武) : 굳셀 무 | 어4II/진4II급 止 8획 | 그칠 지(止) + 창 과(戈) ⊙ 령(寧) : 편안할 령 | 어3II/진2급 宀 14획 | 집 면(宀) + 마음 심(心) + 그릇 명(皿) + [장정 정(丁)→녕]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무예(武)에 뛰어나고 나라를 편안하게(寧) 한 왕(王)
■ 설명 : 우리가 인사를 할 때 "안녕(安寧)하십니까?"라고 하는데 이때, 안(安)자와 녕(寧: '령'으로도 소리납니다)자는 모두 '편안하다'는 뜻입니다.
무령왕(武寧王, 462~523년)은 백제의 제25대 왕으로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후, 반란군을 정벌하여 혼란한 백제를 안정시키고, 고구려를 몇 차례나 공격하여 고구려가 감히 백제를 침범하지 못하게 한 후, 금강유역과 호남평야를 개발하여 농사를 짓게하고 세금을 거두어 나라가 편안해져서, 백제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무령왕은 무예(武藝)가 뛰어나고 전쟁을 많이한 후,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시호에 무(武)자가 들어가는 왕은 전쟁을 많이 하였습니다.
▶ 무령왕릉(武寧王陵) : 충청남도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에 위치하는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 도중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내부에서 많은 백제 유물이 발견되어, 역사학계에서 해방 이후 최고의 발굴로 꼽힙니다.
■■ 수로왕(首露王) ■■
⊙ 수(首) : 머리/첫째 수 | 어5/진5급 首 9획 | ⊙ 로(露) : 이슬/나타날 로 | 어3II/진3급 雨 20획 | 비 우(雨) + [길 로(路)]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첫째로(首) 나타난(露) 왕(王)
■ 설명 : 수(首)자는 사람의 머리를 본떠 만든 글자로 '머리'라는 뜻을 가졌지만, '첫째'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시험에 1등을 하면 수석(首席: 첫째 자리)을 차지하였다고 하지요.
수로왕(首露王, ?~199년)은 가락국(가야)의 시조입니다. 가락국에 임금이 없어 9명의 족장들이 백성들을 다스리던 42년 3월, 김해 구지봉에서 신의 소리가 들려 족장들이 모든 백성들을 구지봉에 모아 놓고 하늘에 빌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와 6명의 귀공자로 변하여 각각 6가야의 왕이 되었는데, 그 중 제일 큰 알에서 첫째로 나온 사람이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되었습니다. 알에서 첫번 째로 나왔다고 수로왕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 지증왕(智證王) ■■
⊙ 지(智) : 지혜 지 | 어4/진3급 日 12획 | 날 일(日) + [알 지(知)] ⊙ 증(證) : 증거/깨달을 증 | 어4/진3급 言 19획 | 말씀 언(言) + [오를 등(登)→증]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지혜롭고(智) 깨달은(證) 왕(王)
■ 설명 : 지증왕(智證王, 437~ 514은)은 신라 제22대 왕입니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에서 신라(新羅)로 정하고, 중국 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여러가지 제도를 개혁을 하였습니다.
지증왕은 마립간(麻立干) 대신 왕(王)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왕이 죽으면 부르는 이름인 시호(諡號)를 중국식을 따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중국의 군현제(郡縣制)를 도입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 많은 제도를 받아들인 것이 지혜롭고 깨달은 사람이란 뜻에서 지증왕이란 시호가 붙었다고 추측됩니다.
지증왕의 아들인 법흥왕 때에도 개혁 조치가 계속되었는데, 중국에서 들여온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였습니다.
☞ 참고 : 지증왕 때 이사부(異斯夫) 장군이 울릉도(당시 이름은 우산국이었습니다)와 독도를 점령하여 국토를 개척하였다는 것을 꼭 암기해야 합니다.
■■ 법흥왕(法興王) ■■
⊙ 법(法) : 법 법 | 어5/진4II급 氵 8획 | 물 수(氵) + [갈 거(去)→법] ⊙ 흥(興) : 일어날 흥 | 어4II/진4급 八 16획 | 마주들 여(舁) + 같을 동(同)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법(法)을 일어킨(興) 왕(王)
■ 설명 : 법흥왕(法興王, ?~540년)은 신라의 제23대 왕으로 520년 율령(律令: 법률)을 반포하고, 527년 불교를 공인하여 신라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갖추도록 하였습니다. 신라의 왕 중 처음으로 법률을 만들어 반포하였기 때문에 법흥왕(法興王)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 진흥왕(眞興王) ■■
⊙ 진(眞) : 참 진 | 어4II/진4II급 匕 10획 | 비수 비(匕) + 솥 정(鼎) ⊙ 흥(興) : 일어날 흥 | 어4II/진4급 八 16획 | 마주들 여(舁) + 같을 동(同)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참(眞)으로 흥(興)한 왕(王)
■ 설명 : 흥행(興奮)이나 흥분(興奮)에 나오는 흥(興)자는 '일어나다, 흥하다'는 뜻입니다. '흥부와 놀부'의 흥부(興夫)도 일어날 흥(興)자와 사내 부(夫)자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제비 다리 고쳐주고 크게 흥(興)한 사내라는 뜻입니다.
진흥왕(眞興王, 534~576년)은 신라 제24대 왕으로, 신라가 가장 흥하였던 시기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진흥왕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진흥왕은 백제 땅이었던 한강 유역 요지를 점령하였고,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죽였습니다. 이어 가야를 멸망시켯고, 새로 개척한 땅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습니다. 또한 화랑제도를 창시하는 등 군사적, 문화적으로 실력을 길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 참고 : 삼국 시대에서 신라가 가장 흥하던 시기는 진흥왕 때입니다. 왕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진흥왕이 갑지기 흥한 것은 아니고요. 앞의 왕들이 굳건한 기초를 닦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항 것입니다.
- 22대 지증왕(지혜롭고 깨우친 왕) : 중국에서 각종 제도를 도입 - 23대 법흥왕(법을 흥하게 한 왕) : 중국에서 불교를 들여오고, 율령을 반포 - 24대 진흥왕(진짜로 흥한 왕) : 화랑제도를 비롯한 각종 문화제도를 바탕으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음
☞ 관련되는 단어 :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 태(太) : 클 태 | 어6/진5급 大 4획 | 큰 대(大) + 점 주(丶) ⊙ 종(宗) : 마루 종 | 어4II/진3급 宀 8획 | 집 면(宀) + 보일 시(示) ⊙ 무(武) : 굳셀 무 | 어4II/진4II급 止 8획 | 그칠 지(止) + 창 과(戈) ⊙ 열(烈) : 뜨거울 열 | 어4/진4급 灬 10획 | 불 화(灬) + [벌릴 렬(列)]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태종(太宗)으로 무예(武)가 열렬한(烈) 왕(王)
■ 설명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02~661년) 신라의 제29대 왕으로, 이름은 김춘추(金春秋)입니다. 태종(太宗)은 묘호이고, 무열왕(武烈王)은 시호입니다. 시호에 무(武)자가 들어가는 왕은 정복 활동을 위해 전쟁을 많이 하였습니다. 무영왕도 아들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무열왕(武烈王)이라는 시호가 붙었습니다.
태종이라는 묘호는 나라의 초창기에 혼란을 잠재우고 새 나라의 기틀을 잡은 왕에게 내리는 묘호입니다. 무열왕은 아마도 삼국 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붙여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반대하여 이후에는 묘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 참고 :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는 원효대사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았습니다. 설총은 이두를 만든 사람으로 추측됩니다. 무열왕의 아내는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인 문희입니다.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입니다.
☞ 관련되는 단어 : 문무왕(文武王)
■■ 문무왕(文武王) ■■
⊙ 문(文) : 글월 문 | 어7/진6급 文 4획 | ⊙ 무(武) : 굳셀 무 | 어4II/진4II급 止 8획 | 그칠 지(止) + 창 과(戈)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글(文)과 무예(武)가 모두 뛰어난 왕(王)
■ 설명 : 문무왕(文武王, 626~681년)은 신라의 제30대 왕으로, 아버지인 태종무열왕과 함께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676년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하였습니다.
삼국을 통일한 후 법전의 정비, 행정관제의 정비, 행정관료의 확충정비 등의 율령체계에 대한 정비를 실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대규모적인 율령 정비는 통일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시호에 문(文)자가 들어가는 왕은 평화 시절에 나라의 체제를 정비를 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던 사람에게 붙였고, 무(武)자가 들어가는 왕은 정복 활동을 위해 전쟁을 많이 하였습니다. 문무왕(文武王)의 시호에는 이 두자가 모두 들어 있는데, 전쟁으로 삼국을 통일하였고, 통일된 나라를 잘 정비하여 나라를 잘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 참고 :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모두 한 집안 사람들입니다.
- 김춘추 : 문무왕의 아버지로 태종 무열왕 - 김법민 : 문무왕 자신 - 김인문 : 문무왕의 동생 - 김유신 : 문무왕의 외삼촌(아버지인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 사이에서 문무왕이 탄생) - 김흠순 : 김유신의 친아우이자 문무왕의 외삼촌 - 반굴(화랑) : 김흠순의 아들. 문무왕의 사촌. 김유신의 동생(김흠순)의 아들이며서 사위 - 김품석 : 문무왕의 여동생(고타소)의 남편. 김품일의 형, 관창의 큰아버지 - 김품일 - 김품석의 동생, 문무왕과 사돈관계 - 관창(화랑) - 김품석의 조카, 김품일의 아들
☞ 관련되는 단어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 충렬왕(忠烈王) ■■
⊙ 충(忠) : 충성 충 | 어4II/진4II급 心/忄 8획 | 마음 심(心) + [가운데 중(中)→충] ⊙ 렬(烈) : 뜨거울/세찰 렬 | 어0/진0급 灬 10획 | 불 화(灬) + [벌릴 렬(列)] ⊙ 왕(王) : 임금 왕 | 어8/진8급 玉 4획 |
● 풀이 : 충성(忠)을 열렬(烈)하게 하는 왕(王)
■ 설명 : 보통 왕에게 충성을 하지, 왕이 다른 사람에게는 충성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고려 25대 왕의 이름은 충성스러운 왕이라는 의미로 충렬왕(忠烈王)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시 우리나라는 원나라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시호(諡號: 왕이나 재상이 죽은 뒤 공덕을 칭송해 붙이는 이름)를 원나라에서 지어 보냈는데, 원나라에서는 공주를 보내 고려의 왕과 결혼시키고,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왕의 시호에 충성 충(忠)자를 붙였습니다. 아래는 원나라 지배 하에서 고려 왕들의 이름입니다.
▶ 25대왕 충렬왕(忠烈王) - 원나라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결혼 ▶ 26대왕 충선왕(忠宣王) - 원나라 진왕(晉王)의 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와 결혼 ▶ 27대왕 충숙왕(忠肅王) - 원나라 영왕(營王)의 딸 복국공주(濮國公主)와 결혼 ▶ 29대왕 충혜왕(忠惠王) - 원나라 관서왕(關西王)의 딸 덕녕공주(德寧公主)와 결혼 ▶ 29대왕 충목왕(忠穆王) - 8세에 왕에 올라 12세에 돌아감으로 결혼하지 않음 ▶ 30대왕 충정왕(忠定王) - 13세에 왕에 올라 16세에 돌아감으로 결혼하지 않음 ▶ 31대왕 공민왕(恭愍王) -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결혼. 충성 충(忠)자 대신 공손할 공(恭)자가 들어있습니다.
☞ 참고 : 조선 후기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도 조선 왕의 시호를 지어 보내어 사용하게 하여습니다. 16대 인조에서 25대 철종까지 중국에서 보낸 시호가 있는데,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외교 문서 외에는 이런 시호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병자호란 때 비록 청나라에 무릅을 꿇었지만, 오랑캐 나라로 생각하던 청나라의 시호를 치욕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입니다.
■■ 충무공(忠武公) ■■
⊙ 충(忠) : 충성 충 | 어4II/진4II급 心/忄 8획 | 마음 심(心) + [가운데 중(中)→충] ⊙ 무(武) : 굳셀 무 | 어4II/진4II급 止 8획 | 그칠 지(止) + 창 과(戈) ⊙ 공(公) : 공평할/벼슬 공 | 어6/진4II급 八 4획 | 여덟 팔(八) + 나 사(厶)
● 풀이 : 충성(忠)스럽고 무예(武)를 잘하는 공(公)
■ 설명 : 충무공은 이순신 장군의 시호입니다. 시호에 무(武)자가 들어가면 전쟁과 관련 있는 사람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 충성(忠誠)을 하였다고 해서 충무공이란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