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제 37 강 본문 (14-11-26)
37. 백성을 계수함(민26:1-65)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민26: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 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이 계수된 수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 그 다소를 막론하고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나눌지니라(민26:52-56).“
Ⅰ. 음행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을 염병으로 정화함
민수기 26장에서 다시 백성을 계수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렇게 백성을 두 번이나 계수를 했기 때문에 이 책의 이름을 민수기라고 한다. 음행하는 자들과 우상 숭배하는 자들은 염병으로 죽었는데, 이 일은 민수기 중 백성들이 이만사천 명이나 죽은 가장 큰 실패에 속한다. 알곡에서 쭉정이를 걸러내듯 백성 안의 불순하고 더러운 것을 염병을 통해 정화한 것이다.
민수기 11장에서 진 끝 쪽에 섞여 사는 무리와 이민족으로부터 불평과 불만, 원망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약에 와서 교회가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교회의 예표이다. 이는 교회 속에도 이런 섞여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를 들면 열두 사도 가운데 가롯 유다라는 사람이 섞여 있었고, 사도행전 5장의 순수한 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섞여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재산의 얼마만을 가지고 와서 자기 재산 전부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아시아에서 바울의 사역을 따르고 돕다가 뒤에는 배반하고 가버린 구리 장색 알렉산더와 세상을 사랑하여 간 데마 같은 사람도 섞여 있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 무리들 속에서는 항상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나온다. 100% 순전하면 불평과 원망이란 게 없다.
교회의 변방에도 섞여 있는 것이 많아서 교회의 참 영광과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순전한 것을 누리지 못하면 자연히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부정적인 상황을 특이한 방법으로 교회를 정화시킨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생은 어디서 완전하게 정결케 되는가? 바로 십자가 안에서다. 죽음 앞에 놓이면, 운명 앞에 딱 놓이면 그 사람은 깨끗해진다. 이 정결케 하는 속에서 살아남은 것, 생존하는 것, 이것은 이미 정화된 자들이다.
우리가 한번 십자가를 통과하면 다시 십자가를 통과할 필요가 없다. ‘한번 죽으면 다시 죽음이 없나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설죽으면 늘 죽어야 된다.
이 정화된 사람들이 남게 되니까 다시 재계수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두 번째 계수의 목적은 대치와 재편이다. 부정하고 섞여 있고 온전치 않는 것을 대치하여 온전한 군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재편을 해야 될 필요가 생긴 것이다. 내 인생도 세상과 접하는 부분에서 오염되고 섞여 있는 부분들이 많으므로 이런 부분들을 제해 내고 생명의 재편이 필요하다.
내 생명의 재편성을 요구하는 어떤 일을 겪게 될 때, 괴로워만 하고 있을 게 아니고 ‘아, 뭐가 끝에 섞여 있는 건 없는가? 떨어져 나가야 할 건 없는가?’ 이렇게 재정비해야 된다.
우리가 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한편으로 항상 전쟁이고, 한편으로는 누리는 것이다. 전쟁 없이는 누릴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섞인 사람들로 말미암은 실패와 교훈을 통해서 교회를 정화시킨다는 것이다. 만일 거기서 어떤 사건이 생기지 않으면 정화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인 상황으로 바꾸어 가시는 분이다.
Ⅱ. 여리고의 요단강 근처 모압평원에서 계수함
1차 계수는 아직 광야를 통과해야 되는 여정이 남아 있는 시내광야에서 있었고, 2차 계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시작된다. 의미가 서로 다르다. 1차 때는 광야를 통과하고, 진군하고, 전투하기 위한 군대편성을 위한 계수였다면, 2차 때는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그곳을 정복하는 데 목표를 둔 계수였다. 2차 편성에서는 정복하고 좋은 땅을 누리기 위해서 정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1차 과정에서는 유월절과 홍해와 시내광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옛 생명이 죽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또한 우리의 애굽적 요소를 장사 지내고 새로 났음을 의미한다. 표면적으로 애굽 사람만 죽은 게 아니라 사실 우리의 애굽이 죽은 것이다. 이렇게 된 후에 하나님의 군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아말렉과 여리고성 등을 점령하면서 승리하게 되었다.
2차 과정에서는 원망과 불평, 우상숭배 등이 연결된다. 이런 것은 모두 탐심 때문에 생겼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에서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타락한 최후의 결과이다. 우상숭배를 하다가 이만사천 명이 염병으로 죽게 되었다. 이 우상숭배 속에는 음행과 불평과 원망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탐심을 해결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데는 탐심이 방해가 된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자기 좋을 대로 하려고 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
우상숭배라는 말은 헛것을 경배한다는 말이다. 헛것을 사모하고 사라져 없어질 것들을 사모하면 교회생활이 안 된다. 하나님 나라가 누려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계속 기도하면 형제와 연합이 되겠는가? 내가 탐심이 없어야 형제와 연합이 가능하다.
Ⅲ. 열두 지파를 계수하는 방법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 조상의 집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무릇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라(민26: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열두 지파의 인수를 계수하라고 하였다.
일차 계수할 때의 인구가 603,550명이었고 이차 계수할 때 2만4천 명이 염병으로 죽어서 인구는 601,730명이 되었다. 안식의 땅을 누리려면 일종의 걸러짐이 필요하다. 어떤 지파는 숫자가 감소했고 어떤 지파는 증가했다. 이 지파 수에 의해 땅을 분배받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계수를 했는가? ‘조상들의 집을 따라, 20세 이상인 나이를 따라, 대리권위자들의 승인을 따라’, 이런 세 가지 조목으로 계수하였다.
1. 조상을 따라 계수함
첫 번째 ‘조상을 따라’는 말은 ‘생명의 계보를 따라’의 뜻이다. 조상의 집, 이것은 나와 생명이 연결된 사람들이다. 하나님 나라는 연합 안에서의 교통이다. 교통은 한 생명 안에서 이루어진다.
요한이 쓴 서신은 이 생명의 교통을 말하고 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1:7)” 할 때 사귐은 곧 교통이다. 다시 말해 한 아버지를 가진 한 생명이라면 한 교통 안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요한 1·2·3서(요한 서신)를 보면 서로 교통이 되는가 안 되는가는 생명을 보고 알 수 있다고 한다. 요한 서신은 신성한 생명과 참된 교통을 검산하는 것과 같다.
어느 종교든지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유지만 빛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은 사귐이 안 되고 사귐이 안 되는 것은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 안에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요일1:5).” 즉, 빛 가운데 거하면 사귐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들이나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는가? 우리의 죄를 사하고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는데도 목표가 있지만 그것보다 자기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의 신부를 거룩케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 다 천당 간다는 것은 좋은 말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백성일 수도 있다. 이 땅위에서 그 나라가 세워지지 않으면, 그의 왕권이 세워지지 않으면 예수님이 땅에 오신 목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참된 교통, 참된 교회는 생명에 근거한다. 조직이나 주님과의 제휴에 근거한 게 아니라 주님과의 연합에 근거한다. 결코 예수처럼(비슷하게 닮음) 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생명 안에서 우리가 동일시되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교통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너희는 조상의 집들을 따라서 계수하라’는 것이다.
2. 나이를 따라 계수함
두 번째는 나이를 따라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라고 하였다. 나이는 성숙을 의미한다. 가나안 땅은 성숙한 자가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생명은 자라고, 자라면 교통이 되고, 교통이 되면 누려진다. 생명은 20세 이상으로 성숙해야 전쟁을 할 수 있고, 교통이 가능하고, 완전히 누릴 수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성장이 안 된다. 성장케 하는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다. 성경에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히6:1)’ 라는 말이 있다. 초보라는 것은 가나안 입구에 와 있는 것과 같다. 깊숙이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땅에 농사를 지어서 토마토도 나오고 당근도 나오고 호박도 나오는 건 모르고 그냥 가나안 변방에서 ‘아, 저것이 가나안 땅이구나.’ 이렇게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너무너무 풍성한 하나님 나라를 온전하게 누리게 된다. 풍성하게, 골고루, 깊숙이, 속속들이 그것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그가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깊이 누리고 아버지를 얼마나 깊이 누리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원칙적으로 20세 이상의 남자만 계수하라고 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어떤 딸들은 계수되는 경우가 있다. 슬로브핫의 딸 다섯이 아들이 없는 우리에게도 아버지의 명의로 땅을 유업으로 달라고 소송을 하게 된다. 이는 생명은 반드시 유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업을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딸들이 목숨을 걸고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라도 자기들의 유업을 요구했다.
그래서 심판관이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기업을 주게 된 것이다. 생명이 있다면 우리의 유업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법이 완벽할 수는 없다. 율법보다 생명을 우선하게 될 때 하나님의 법은 어겨지는 게 아니라 완성되게 된다.
3. 권세자들(두령들)의 승인에 따라 계수함
세 번째는 권세자들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 내가 아무개 집안에 태어났다 하는 것을 두령들이 승인을 해주어야 된다. 이것은 신성한 권위에 대한 상징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대리권위가 있다. 땅위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구약의 원칙으로는 그 사람의 능력과 상관없이 혈통이나 제도를 따른다. 그래서 레위인이 아니면 성막을 봉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구약의 혈통과 제도로 인한 성막 봉사에는 모순이 있기 때문에 폐해지고 신약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신약에서는 ‘생명의 무궁한 능력’을 따르고 있다. 제도로 된 모든 것은 신약이 아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는 생명의 능력이 충만한 사람이 최고다. 남을 평화케 하는 사람, 남을 자유케 하는 사람, 남을 살려내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생명의 무궁한 능력,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하라고 임명할 수가 없다. 멜기세덱을 일컬어 ‘난 날도 없고, 죽은 날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다(히7:3참조).’고 하였다.
우리는 영원히 신약 교회를 향해서, 신약의 경륜을 향해서 가야 한다. 되든지 안 되든지, 할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못하고 가더라도 신약의 경륜을 따라야 된다. 갈라디아서를 읽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밝히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 이미 율법이 폐해졌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게 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분명하게 신약 안에 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Ⅳ. 땅을 분배하는 규칙
1. 백성의 숫자에 따라 분배
땅을 분배하는데 원칙이 있다. 첫 번째는 ‘백성의 숫자에 따라서 하라’는 것이다.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고, 적은 자는 적게 줄 것이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많이 누리고 싶어도 내 생명이 증가가 안 되면 나는 많이 누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배의 범위는 생명의 증가에 따른다는 것이다.
2. 제비 뽑아서 나눔
‘이것을 제비뽑아서 나누라’ 했다. “그 다소를 물론하고 그 기업을 제비 뽑아 나눌지니라(민26:56).” 하였다. ‘제비 뽑는다’는 것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축복에 따르는 원칙이다. 위치는 축복에 따르고 넓이는 증가에 따른다는 그런 원칙이다.
하나님이 내게 정해준 위치를 가장 정당하고 적절하게 이해하고 인정할 때 우리에게 축복이 오게 된다. 하나님이 분배한 것에 이의가 없이,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나는 몰라도 하나님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수용해야 한다. 그러나 넓이는 내가 할 수 있다. 넓이는 내가 더 많이 받을 수도 있고, 적게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게으르면 적게 받게 되고, 내가 부지런하면 많이 받을 수 있다.
Ⅴ. 레위인들을 계수함.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을 계수하는 숫자 안에 들지 않고 따로 계수를 했다.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하여 이만삼천 명이 나왔다. 이는 레위인들은 땅에 있는 분깃이 없고 여호와 자신이 기업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인류 가운데 있지만 인류에 포함되지 않듯,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속에서 나왔지만 이스라엘에 포함되지 않는다.
제사장 또한 레위 족속에 속하지만 레위인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의 특수한 목적 때문에 그렇다. 다른 모든 백성은 전투부대인데 레위인들과 아론의 자손들은 하나님을 봉사하는 부대다.
Ⅵ. 여호수아와 갈렙만 첫 번째 계수자였음
여호수아와 갈렙만 첫 번째 계수자였다. 전에 처음 계수했을 때 있던 사람들은 다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2차 계수한 사람 속에 들어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메뚜기 같은 자기들의 입장을 보면서도 “그들은 우리 밥이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하며 담대한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생존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오직 이 두 사람뿐이다. 애굽에서 나와서 원망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고 오직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만 그 땅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육신의 눈이 아닌 더 깊은 눈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다. 무엇인가 다른 눈이 열려진 사람, 다른 세계가 보여진 사람, 이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가 있는 사람이다.
일차 계수에 든 사람들은 애굽을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차 계수에 들어간 사람들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가나안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