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칼 타 고 이야기 Tunis - Carthage's History
| | Dido preparing to kill herself with Aeneas ' sword
나의 知識이 毒(독)한 懷疑(회의)를 救(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愛憎(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病든 나무처럼 生命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亞刺比亞(아라비아)의 沙漠(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不死神 같이 灼熱(작렬)하고 一切(일체)가 모래 속에 死滅(사멸)한 永劫(영겁)의 虛寂(허적)에 오직 알라의 神만이 밤마다 苦悶(고민)하고 彷徨(방황)하는 熱沙(열사)의 끝.
그 烈烈(열렬)한 孤獨(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運命(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對面ㅎ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生命이란 그 原始(원시)의 本然한 姿態(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砂丘(사구)에 悔恨(회한) 없는 白骨을 쪼이리라.
生命의 書 - 柳致環-
| Fethia KHAIRI(1918 - 1986) - Mahla lay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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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June-03 午後 5時 반포에서 인천공항行 셔틀버스로 출발, 19:50分發 CX419편으로 홍콩까지, 다시 23:35分發 CX261편으로 파리 CDG공항 17-June-03 06:30分着으로 무려 14시간이나 걸려 드골공항에 도착하니 너무 피곤하였다. 예정했든 관광여행지인 샤모니 알프스行 TGV승차를 돌아올때로 미루고, 12:35分發 파리-튀니지行 AF2484便으로 BOOKING & TICKETING 하였으나, 20년만에 모처럼 다시온 드골공항은 나를 아침부터 오후 3時까지 붙잡아두고 괴롭혔다. 왜냐하면 12시35분 TAKE-UP예정이든 AF2484는 Technical controller이상으로 2시간반이상 Delay되어 출발, 튀니지아의 수도 튀니스-칼타고 공항에 18시이후에 도착하였다. 여기가 바로 알프스를 넘어 이태리로 쳐들어가 로마인들을 전율케 한 그 유명한 명장 ‘한니발’을 배출한 고대 카르타고(Carthage), 곧 오늘날의 튀니지아(TUNISIA)인 것이다. (항공편으로 파리에서 2시간정도, 로마에서 45분정도의 거리)
그 老年은 무려 20여년만의 나들이 탓인지, 이젠 나이든 체력탓인지, 저도 모르게 빈 손바닥만 만지작거리며, '왜 여기 이 낮선곳, 낮선 얼굴들속에 서 있단 말인가?' '나의 停滯性에 새로운 변화와 탈피의 계기이길 바라며 무작정, 별 부담 안 갖고, 現 有緣한 것들로 부터 떠나 보자는 안이함과 공허한 기대가 내 困한 영혼을 더하게 하는 것만 같구나' 가 보면 나의 진 모습을 보게 될까 어떨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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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June-03 튀니스-칼타고 공항에 도착하였다. 同行한 우성氏의 知人인 前 駐韓 튀니지대사관의 재정관이든 Mr. 화들라위(Fadhlaoui Salah)에게 call하니 1시간이나 지나서야 그의 운전수가 픽업하러 공항에 나타났고, 결국 화들라위씨의 안내로 시내 중심가에 있는 Hotel Du Lac에 여장을 풀고나서야, 샤워도하고 휴식을 할 수 있었다. 한 두어시간 휴식, 수면하고 나니, 또 다른 知人, 前 駐韓튀니지 대사관 1等서기관 兼 副大使 이었든 Mr. 사독 부알리(Sadok Bouali)가 찾아와 우리를 지중해변가의 아름다운 항구의 고풍스런 싱싱-생선전문인 고급 레스토랑으로 안내, 여러가지 해물과 도미찜을 먹으며, 맥주 마시며 회포를 나누는 등등, 거한 대접을 받고, 밤 늦게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누우니 그만 골아 떨어젔다.
18-June-03 습관데로 아침 5시경 기상, 샤워하고, 아침 散步에 나서니 어젯밤에 온통 젊은 남녀들로 웅성대든 거리 길목들은 텅비고, 고요한 아침 靜寂에 신선한 지중해의 산들바람과 Date-palm tree(대추椰子)와 빠알간 정념의 꽃들을 지나치면서, 異國의 色다른 정경에 취해 보며, 먼데까지 걸어보았다.
"어쩌면 그렇게 여기 오기로 예정되었을까!?."
호텔식당제공 Breakfast를 하고, 로비에서 쉬고 있으니, 어제의 사독 부알리씨가 그의 車로 튀니스에서 50Km 떨어져 있는 그의 공장건설현장(Society Sadok Stationary)견학을 하였다.
튀니스시내를 벗어나 郊外로 나서니 막 보리수확이 끝난 넓은 들녁과 車 달리는 길을 따라 연이은 올리브나무 숲을 이룬 농장들이 Olive油와 열매가 주요 농산품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Factory 견학을 한 후 로먼 칼타고(Roman Carthage) 전성시절에 축조된 Mt. Zaghouan(자그완 山. 1,295m)의 Roman Temple(샘의 發原地)과 칼타고의 판데온신전과 이어지는 엄청나게 길고, 높게 축조된 거대한 水路(마치 長城같은)의 유적들이 길를 따라 파괴된채 군데 군데이어져 있다.
가장 높은 자그완山의 地下 貯水井에 모아진 물(spring source)은 조금씩 해발고도가 낮아지는 경사의 大水路를 따라 칼타고 대평원으로 물공급과 판데온신전(바알 神: 多産의 神)으로 풍요로움을 전송하고 있었다. (The Nymphaeum is a basin built under of Hadrian collecting the spring water from the region to be conducted to Cartago by the aqueduct of 132-Km length and with a daily rate of 32 million litters.)
그 자그완山(Mt. Zaghouan)아래, Roman Temple Eaux의 정원카페에 앉아 눈아래 펼쳐진 칼타고 대평원을 굽어보면서 스트로베리 fruit 한 잔씩 마시고, 사진도 몇컽 찍고 다시 수도 튀니스로 돌아오니 벌써 온도가 섭시 34도가 넘어 점심을 들고 곧 씨에스터(siesta, 낮잠)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현대식 건물의 총리집무실과 정부청사옆에 옛날의 메디나 대 모스크가 있는데 그 모스크 둘레엔 매우 큰 재래식 시장인 '수우크'를 둘러보고, 그 시장안 가장 유명하다는 양고기구이 식당에서 점심을 하는데, 갑자기 에어컨과 천정에 달린 선풍기-fan이 멈추며(재래시장이라 전기용량의 과부하탓인듯) 조금 어두운 상태에서 식사를 하니 땀이 비오듯 했지만 맛은 일품이였다.
사독씨는 우릴 호텔에 데려다 주고 2시부터 6시까지 휴식후 밤에 다시 화들라이씨와 함께와서 今 방문의 主인공인 Mr. Jelil Pou Rabeh(現 駐韓튀니지대사관 1등서기관)의 결혼식前 축하파티장에 가기로 하고 돌아갔다.
저녁 6시경 두 지인이 와서 우릴 픽업, 21일 결혼식예정인 제릴씨의 집을 방문하게된다. 메리아트라는 이름의 동네에 들어서니 많은 방문차량과 손님들이 와 있었고, 정원엔 천막을 치고 테이불, 의자들이 준비되고, 음악연주을 위한 악사밴드까지 불러다 갖추어 손님을 맞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主賓대접으로 중앙 상석에 제릴씨의 부친과 숙부와 자리를 같이한 테이불로 안내받아 가족, 친지들, 친구들과 일일이 소개받으며 인사를 나눈후 좌정하여 양고기구이와 과일, 양주, 샴펜, 맥주, 음악과 춤으로 이어지고, 여흥이 무르익자 그집의 모든 老少여인들만이 뜰로 나와 한동안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남녀가 같이 춤추지는 않는다. 제릴씨의 아저씨는 내옆에 붙어 서툰 영어로 갖은 호의를 베풀며, 악사에게 대한민국, Korea!를 가사로 하는 음악을 주문하여 부르며, 나와 함께 뜰로 나가 손잡고 춤을 추기도하였다. 이렇게 밤 12시가 지나도록 여흥은 고조되는데 나는 졸음이 몰려왔고 물러 나오기가 어려웠으나 1시경에는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너무나도 순박한 사람들의 환대에 당혹하고, 감사와 축복의 마음을 아낌없이 보냈다.
19-June-03 아침 6시에 일어나 조용하고, 상쾌한 바람으로 가득한 호텔주변거리를 산책하는데 한국에는 요즘 보기드문 수많은 제비떼와 각종 새들를 보며, 튀니지가 자연생태보존지역임을 상기시켜준다. 7시에 호텔제공 Breakfast하고 로비에서 빈둥빈둥.., 9시30분경 화들라이씨가 보낸 운전수가 튀니지아 명승 해안도시 '수스(Sousse)' 와 하마멧(Hammamet)으로 데려다 주는데, 그 샤우퍼는 영어 한마디 못하는 먹통이라, 동문서답이 다반사라, 헐수없이 세월속에 잊혀져 간 20녀년전의 내 貧한 아랍어라도 쓸수밖에 없었다. 알 함두릴라!(알라神께 감사하라!)
좌우간 튀니스에서 120Km 떨어진 수스에 당도하니 가슴이 탁 트이는 푸르른 지중해 물결이는 하얀 모래사장과 그 위에 줄비한 파쇼들은 함께 어우러진 한폭의 그림이었는데, 도착시간이 점심 참이라 우선 수고한 운전수 Mr. 무니르에게 점심대접도 할겸 가까운 이태리식당에서 요상한(?) 식사를 하고, 사진도 찍고, 모래사장거닐며, 많은 관광객들도 감상하다가, 다시 긴 해안선따라서 드라이브하면서 다시 上京길에 올랐다.
途中에 '라밧 하마메트'라는 아름답고 유명한 해안과 전략요새 성채를 구경하였다. 그러나 점심한 것이 잘못되어 배탈이 나서 구경이고 뭐고 정신이 없었고, 결국 힘겨운 낮과 밤을 보내게 된다.
20-June-03 어제의 배탈이 조금은 가라앉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니 살것만 같다. 이른 아침 산책하다가 마음을 바꿔, 시내 중심가를 가로질러 시외곽까지 縱橫으로 운행하는 Metro Tram-car(電車)를 타보기로 하고, 바로셀로나驛에서 엘 인텔라카驛(終点)까지의 왕복구간을 갔다 오면서 조금은 튀니지 소시민들의 日常과 변두리 삶도 엿볼 수 있었다. 여기 이사람들의 첫인상은 한결같이 내게 호의와 친절로만 느껴온다. 이 나라는 군인이나, 타 공직자보다도 경찰의 끝발이 가장 돋보인다. 한 시간이상을 보내고 7시반경 호텔로 와서 Breakfast끝내고, 다시 휴식하는데, 사독 부알리씨가 보낸 젊은이의 안내로 다른 시장(Souk)을 둘러보니 마치 동대문 재래시장같더라. 점심이되자 아무데서 식사하다 배탈이 또 날까봐 호텔식당에서 해결중인데 갑자기 사독 부알리씨가 나타나, 오늘은 자신의 '모친의 점심초대날인데..' 라며 서로 컴뮤니케숀인지 코드가 안맞아 난감해 하면서도, 식사도중의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의 집은 옛날 프랑스 식민지배시절 프랑인들이 거주하든 높은 지대의 서구식 주택가 (한국의 성북동, 꿩의 바다근처 같은 곳)에 있었다. 집집마다 주차장이 있고, 집주변과 노상주차가 허용이 안되는 곳이라나.. 아무튼 집안에 들어서자 집의 서재와 거실의 두 방을 터논 넓은방의 소파에 앉아 둘러보니 벽면에 두 점의 낮익은 그림, 오케아노스 (해양신)가 있는 그림과 샤갈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의 고인이 된 부친이 정치인시절 이태리친구의 선물이란다. 아직 미 장가인 부알리씨와 그의 모친이 이집 식구의 모두고 여동생은 출가했고, 남동생은 미국 유학중이란다. 그의 모친이 정성스레 손수 만든 튀니지식 케익(너무 달다)과 야채소스와 곁들인 민스로 채운 과자, arab-tea를 들며 모친의 인정넘친 대접을 받았다.
집을 나와 오늘은 꼭 가봐야할 곳, 칼타고유적지(Archaeological Roman Carthage)와 박물관으로 向하는데, 안내하는 사독 부알리씨의 해박하고, 자랑스런 역사설명을 들으니, 당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는 다시는 카르타고가 재기치 못하도록 그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은 로마의 것들이라고 한다.
500여년의 번영을 누렸던 Punic Carthage(페니키아人의 칼타고)는 완전 파괴되고 그 폐허위에 Roman Carthage의 거대하고 방대한 스케일의 신전과 공중목욕탕, 원형경기장등이 건설되고 배후 시가지도 더욱 확장되었단다.
카르타고 지역에 들어서니 옛 페니키아 항구, 카르타고 및 로마시대의 유적인 공중목욕탕, 극장 등이 있으며 국립박물관과 대통령궁도 이곳에 있었다.
인근에는 옛 순수한 아랍식 시가지로 시디부사이드(Sidi Bou Side)라는 高地帶에 마을이 있는데 흰 벽에 푸른(marine blue) 창들을 두른 민가들이 독특하며 일찍이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가 드나들었다는 오래된 카페도 유명하다. 시디 부 사이드의 그 카폐에서 저 아래로 한가로이 욧트들이 정박해 있는 칼타고灣을 굽어 보면서 茶한잔 마시며 감회에 젖어보기도 하였다.
칼타고 박물관을 관람하고, 잡초더미 속에 묻혀진 판데온과 바알신전의 Ruins와 지하의 貯水 물탱크등을 둘러보고, 여기를 점령하는 자가 지중해을 지배할 수 있는 천험의 요새임을 알 수 있었다 (內港과 外港으로 나뉘어 방어, 서로 소통할 수있는 신호체계 등을 갖추었다고 함).
오늘까지 시간을 서로 나누어 가며, 차량, 관람료, 음료수등등의 제경비를 부담하는 등 이 지인들의 우정어린 환대에 감동을 금할 길 없었다. 호텔로 돌아와 9시경까지 휴식하고 오늘밤도 지난번 자릴씨의 두번째 결혼식 파티에 참석하였는데, 손님도 더 많고 규모는 더 컸다. 이곳 상류층의 결혼은 이렇게 결혼전에 3-4번씩 파티를 갖는다는데, 신랑등골 부러지고, 얼마나 피곤하겠으며, 정작 혼인식날은 신부 봐주지도 못하고 골아 떨어질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오늘도 이색적인 풍습에 노래와 춤과 푸짐한 먹거리로 흥겹게 보내고, 밤12시 넘어 귀가하였다.
21-June-03 오늘도 이른 새벽공기를 마시며, 텅빈 거리를 거닐다 벤치에 앉아 쉬다하며 오전 6시 반쯤 돌아와 호텔식당에서 Morning Charge하고 10시까지 잠을 잤다. 화들라위씨와 운전수 Mr. 무닐이 왔다. 화들라이씨는 벤 알리 대통령의 사위가 맡고 있는 African Cup 의장의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오늘은 특별히 풀타임으로 우리를 튜니스북쪽의 하마멧-인(옛 터키 Governer가 상주한 도시)을 둘러보고 코르보스(Korbous)라는 지중해변의 천연 유황온천을 관광하였다. 섭씨 50도가 넘는 온천물은 자연 그대로 지중해 바닷물로 흘러들고 많은 남녀들이 바다(海水)온천욕을 하고 있었다.
멀리 바다 건너는 바로 시실리 섬이라는데 끝이 안 보이는 잔잔한 Wave이는(조수간만이 없다) 푸른 바다가 바라보이는 관망좋은 식당테라스에서 생선구이와 양고기구이 점심을 한 후 아랍티(茶)를 들면서 난간에 발을 길게 걸고 앉아 눈 지긋이 바다를 向하니, 마음 한구석엔 슬픔같은 그리움이, 또 한편에선 가슴바닥에서 움틀데는 짜릿한 충동이 내 영혼을 흔들고 있다. 午睡같이 밀려오는 젊음에의 그리움에 젖어 마냥 그렇게 있었다.
오후 4시경에 호텔에서 휴식하고, 저녁 8시에 있을 자릴씨의 결혼식장(양가집 모두 참석)에 초대받았다. 정작 식장에서는 신랑, 신부와 같이 기념촬영도하고 오늘밤도 12시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내일은 칼타고(튀니지아)를 떠날것이다.
내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독립 당시부터 튀니지는 주변의 정통 회교 국가들과는 달리 개방 정책을 채택하였다. 일부 다처제도 폐지되고, 여성의 경우 얼굴 가리개를 하지 않는 등, 사회 활동이 서구 사회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개방사회를 배경으로 전국 주요지에 관광단지를 건설, 유치하여 관광객을 적극 끌어들이고 있다. 평균 한 해 약 500만 명의 유럽인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BC 9세기에 시작된 역사와 전국에 산재해 있는 유적들을 바탕으로(또 여타 아랍국가의 도시에 비해 깨끗하고 나무가 많다) 오늘날 튀니지의 관광산업은 한 해 17억 디나르 (약 15억 불 상당)의 관광흑자를 올렸다고 한다. 국토의 1/3이 사막이고 북쪽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밋밋한 평지인 튀니지는 관광국으로서 뛰어난 자연여건을 크게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게다가 교통망 같은 사회간접 시설도 아직 미비한 형편인데도 서구인들은 튀니지를 즐겨 찾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맑은 공기와 조용한 바다를 즐기기도 하지만 특히 친절한 고객위주의 서비스에 끌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튀니지 인근의 알제리, 리비아 등의 국가들이 정치적, 종교적 요인으로 아직도 서구인들에게 거리감이 있는데 비하여 튀니지는 정서적, 문화적으로 친밀감을 주고 있다는 점도 관광정책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요인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튀니지에 비하면 천혜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뚜렷한 4계절, 풍부한 문화적 자원과 미국, 일본, 중국, 동남아 등 인근에 수십 억의 잠재 관광객을 두고 있는 등, 관광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는 우리 나라는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튀니지에게서 배워야할것이다. (발췌)
22-June-03
튀니스-칼타고공항에서 사독 부알리씨와 하들라이씨의 배웅을 받으며 10시45분發 에어프랑스로 파리 CDG공항에 도착, 즉시 TGV Information으로 가서, 샤모니 알프스 고속철도왕복권 및 체류지 호텔 노보텔부킹까지 마치고, 지하철편으로 d'Austerlitz역에 하차, 도보로 de Lyon역으로 가서 TGV를 타기위해 밤11시까지 기다리기로 했지만, 왠지 모를 강한 거부감과 내 깨름직한 망설임은 또 시작되어, 결국 리용역에서 알프스행을 취소, 환불받고, 파리시내로 일단 나와 지하철로 샤를르 드 골街 111번지의 건물4층에 있는 CATHAY PACIFIC 파리 예약사무실로 직접 찾아가 귀국날짜를 수정하고, 24일까지 HOLIDAY INN Hotel에 묵으며(할인받아 1박 105유로) 간단한 파리시내 관광하다 귀국하였다.
어느사이 25일 밤11시 나의 집이다. 파리에서 내가 받은 인상 두가지만을 언급하면, 절제되고, 심풀한(아니 불필요한 것이 배제된)사고방식. 검소한 생활습관이다. 배워야 한다. 일등국가이기를 원하면 아끼고, 검약하며, 법지킴을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이다. 허나 내 인상에 스며든 불란서의 오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여 내 모양없는 日常에서의 도망은 다시 제자리에 왔다. 空虛가 아닌 재 충전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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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칼타고(Carthage): 814 BC경, Foundation of Carthage by Phoenician settlers led by Queen Elyssa-Dido.
두번째 Punic Carthage : 포에니전쟁 [the Punic Wars. BC264~BC146] 로마와 페니키아의 카르타고와의 전쟁. 포에니라는 말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Phoenician:피니션)을 가리킨다. 지중해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전후(前後)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의 세계적 전쟁이다. 이른바 동서 결전(決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제1차(bc 264∼bc 241)】 주로 시칠리아를 전장(戰場)으로 한 싸움.
시칠리아 북동단(北東端)의 그리스 식민시 메사나를 에워싼 싸움이 발단이 되어 로마군은 시칠리아 남안(南岸)의 아크라가스를 점령한 후, 새로 강력한 해군력을 길러 bc 260년 시칠리아 북안의 해전(海戰)에서 카르타고 해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bc 256년 로마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아프리카로 원정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전장은 다시 시칠리아 서부로 옮겨져 시칠리아 서단(西端) 아이가테스해전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무조건 항복시켰다. 이 전쟁의 결과로 로마는 거액의 배상금을 얻는 한편, 카르타고 세력은 시칠리아에서 일소되어 시칠리아는 로마의 속주(屬州:프로빈키아, 해외속주의 시작)가 되었다. 이어 로마는 사르데냐 ·코르시카를 제2의 속주로 하였다.
【제2차(bc 218∼bc 201)】 한니발전쟁이라고도 한다.
용병의 반란을 진압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이베리아반도의 경영에 착수하였고, 그의 사위 하스도르바르와 아들 한니발(Hannibal)이 뒤를 이어 세력을 기른 후 한니발이 로마의 동맹시(同盟市) 사군툼을 공격, bc 218년 다시 로마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대군을 거느린 한니발(Hannibal)은 남프랑스를 석권한 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침입, 반도의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티키누스 전투). 특히 bc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의 칸나전투에서는 용병(用兵)의 묘(妙)를 발휘한 한니발이 로마군을 포위 ·섬멸하였으나, 반도에 있는 로마의 동맹시는 로마에서 이반(離反)하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世) 및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었으나, 로마는 이를 게릴라 전법으로 교묘히 저지하여 전선(戰線)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끝내 굽히지 않고 마침내 퇴세(退勢)를 만회한 로마군은 bc 206년 카르타고군의 거점인 이베리아반도를 완전히 평정한 대(大)스키피오(Scipio, 아프리카누스)의 인솔하에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한니발군을 격파, 두 번째의 전쟁도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카르타고는 해외영토를 모두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한니발은 동방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 곁으로 도망했다가 다시 비티니아왕에게 의탁하여 재기(再起)를 꾀하였으나 허사로 끝났다.
【제3차(bc 149∼bc 146)】 카르타고의 숨통을 완전히 끊은 전쟁.
카르타고와 그 이웃 나라인 누미디아의 마시니사전투에 끼어든 로마가 bc 149년 전단(戰端)을 열어 소(小)스키피오가 인솔하는 로마군이 마침내 카르타고를 포위하여 이를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3차에 걸친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카르타고의 옛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속주가 되었다.
200년 이상에 걸친 전쟁의 범위가 서지중해 전역에 걸쳤을 뿐만 아니라 제2차 포에니전쟁 때의 카르타고와 동방 마케도니아의 동맹이 보여주듯이, 이 전쟁은 고대에 있어서 세계대전의 양상을 띠었다. 따라서 민족적 시련을 극복한 로마가 일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에 걸친 세계제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Roman Carthage: 146 BC-439: Augustus's Establishment of the first Roman Colony, Africa, and its attachment to the Roman Empire. 439 AD: Takeover of Carthage by the Vandals. 533 AD: Takeover of Carthage by the Byzantines. Finally Carthage: conquered by the Arabs-Islamic period.
역 사 : 1.선사시대 BC 약 100만년 전에 당시 비옥한 지대였던 사하라에서 인류가 거주 시작하다. 사하라 지역의 사막화가 시작되기 전인 BC 15,000-5,000년 사이에 구석기 및 신석기 시대 집단 주거를 시작.
2.페니키아 및 칼타고 시대 BC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해안지대에 이주 시작 및 내륙지방의 거주민인 베르베르족과 접촉을 시작 한편, 튜니지 일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 인들이 아프리카 북부 해안선을 따라 탕제, 라바트 등지의 식민 항구도시 건설 BC 196년 로마에 의한 카르타고 멸망이후 카르타고 난민들이 동 식민 항구 도시로 유입.
3. 베르베르 왕국 및 로마지배. - AD 24년경 베르베르족에 의한 모리타니아 왕국 출현 - AD 42년 로마 황제 칼리귤라가 모리타니아 왕국에 대한 직접 통치 시작 - AD 253년 베르베르족의 저항에 따라 로마는 식민화를 포기하고 군대를 철수 - 로마군 철수에 따른 힘의 공백기를 이용하여 반달족이 지중해로 가는 해상 교역로 확보등을 위해 스페인 남부와 탕제, 세우타를 포함한 모로코 북부지역 점령 - 뒤이어, 비잔틴 제국이 반달족을 격퇴하고, 유스티니아수 황제의 동부 제국 수립.
4. 이슬람교 도래 - 680년 세우타 점령을 시작으로 이슬람교도들의 모로코 침입 시작 - 711년 경에 무어족에 의한 모로코 지배 확립 - 732년까지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베르족을 중심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
5. 이드리스(Idriss) 왕조 (8세기-11세기) - 787년 이슬람교가 순니파와 시야파로 분열되면서 시야파의 일부가 Moulay Idriss의 인솔아래 순니파의 박해를 피해 모로코로 피난하여 모로코 내 아랍왕조 수립의 기틀 확립 당시에 Moulay Idriss가 수립한 전통에 따라 현재까지도 모로코 국왕이 정치 뿐만아니라 종교에 있어서 최고의 지도자로서의 위치 점유 - Maulay Idriss II 시대에 건설된 페즈가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역지로 발달. 이슬람교 3대 중요 대학중의 하나인 카이라완(Kairaouine) 대학교 설립.
6. 모라비드(Al moravids) 왕조(1062-1145) - 남부지방의 베르베르족은 이드리스 왕조가 유목민들의 침입으로 멸망한 공백기를 틈타, 마라케쉬를 수도로 하는 왕조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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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Carthage) '카르타고를 멸하라'는 명령으로 로마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카르타고이다. 그런데도 당시의 군항, 신전 등은 간신히 남아있고, 그후에 건설되었던 로마의 목욕탕, 극장 등의 유적이 흩어져 있어 중요한 관광 포인트가 되고있다.
시디 브 사이도(Sidi Bou Said) 앙드레지이드가 절찬했던 흰벽에 마린브르(marine blue)窓이 바탕인 집이 늘어서 있는 고지의 거리에 있다. 유럽의 예술가가 많이 체재했던 점으로도 유명하다. 카페에서 내려다보는 튀니스만(灣)의 경치가 훌륭하다.
스스 와 모나스튀티르(Sousse & Monastir) 유적은 없지만 아름다운 해안선에 무수의 리조트호텔 집단이 늘어서 있는 대규모 관광지이다. 튀니스에서 차로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기 때문에 외국인도 주말에 여행을 가는 사람이 많다. 호텔료는 놀랄만큼 싸다.
하마멧트(Hammamet) 스스와 닮은 느낌의 리조트지이고 튀니스에서 약600㎞ 거리에 있다.
남부의 사막, 오아시스지대 튀니스에서 남쪽으로 400㎞ 정도 아래에 있는 사막과 오아시스 지대이다. 사막지와 오아시스 그리고 그 주변 경관이 볼 만하다.
남부의 관광 남부의 사막지대와 북부의 아트라스산맥 동쪽 끝에 형성한 산악지대가 있고 코르크 등을 생산하는 아인도 라하므산맥, 알제리아 국경을 접한 항구도시 다바르카 등이 경쟁하듯 관광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국제공항도 완성되었고 유럽관광객을 유치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또 아프리카 최북단의 도시인 비제르타도 아름다운 해안선을 가지고 있어 여름에 해수욕을 즐기려고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붐빈다. 그밖에 로마의 유적이 있는 브라레지아, 도가, 에르지므, 온천이 나오는 코르브스, 남부의 지르바섬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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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Carthago) - 한니발
Hannibal (BC 247 - BC 181 or 183) |
포에니전쟁 <Poeni War> (BC 218-201) 참조-카르타고(Carthago)
로마와 페니키아의 식민시(植民市) 카르타고와의 전쟁. 포에니(Poeni)라는 말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가리킨다.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BC 3세기 중엽에서 BC 2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전후(前後) 3차에 걸쳐 있었던 고대의 세계적 전쟁이다. 이른바 동서 결전(決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The 1st Punic War) (BC 264∼BC 241,23년간)
주로 시칠리아를 전장(戰場)으로 한 싸움. 시칠리아 북동단(北東端)의 그리스 식민시 메사나를 에워싼 싸움이 발단이 되어 로마군은 시칠리아 남안(南岸)의 아크라가스를 점령한 후, 새로 강력한 해군력을 길러 BC 260년 시칠리아 북안의 해전(海戰)에서 카르타고 해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으며, BC 256년 로마는 대함대를 거느리고 아프리카로 원정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전장은 다시 시칠리아 서부로 옮겨져 시칠리아 서단(西端) 아이가테스해전에서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무조건 항복시켰다. 이 전쟁의 결과로 로마는 거액의 배상금을 얻는 한편, 카르타고 세력은 시칠리아에서 일소되어 시칠리아는 로마의 속주(屬州:프로빈키아, 해외속주의 시작)가 되었다. 이어 로마는 사르데냐 · 코르시카를 제2의 속주로 하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BC 218∼BC 201,16년간)
한니발전쟁이라고도 한다. 용병의 반란을 진압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이베리아반도의 경영에 착수하였고, 그의 사위 하스도르바르와 아들 한니발이 뒤를 이어 세력을 기른 후 한니발이 로마의 동맹시(同盟市) 사군툼을 공격, BC 218년 다시 로마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대군을 거느린 한니발은 남프랑스를 석권한 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 침입, 반도의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티키누스 전투). 특히 BC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의 칸나전투에서는 용병(用兵)의 묘(妙)를 발휘한 한니발이 로마군을 포위 · 섬멸하였으나, 반도에 있는 로마의 동맹시는 로마에서 이반(離反)하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世) 및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었 으나, 로마는 이를 게릴라 전법으로 교묘히 저지하여 전선(戰線)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끝내 굽히지 않고 마침내 퇴세(退勢)를 만회한 로마군은 BC 206년 카르타고군의 거점인 이베리아반도를 완전히 평정한 대(大)스키피오(아프리카누스)의 인솔하에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BC 202년 자마전투에서 한니발군을 격파, 두 번째의 전쟁도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 결과 카르타고는 해외영토를 모두 잃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한니발은 동방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 곁으로 도망했다가 다시 비티니아왕에게 의탁하여 재기(再起)를 꾀하였으나 허사로 끝났다.
제3차 포에니 전쟁 (BC 149∼BC 146)
카르타고의 숨통을 완전히 끊은 전쟁. 카르타고와 그 이웃 나라인 누미디아의 마시니사전투에 끼어든 로마가 BC 149년 전단(戰端)을 열어 소(小)스키피오가 인솔하는 로마군이 마침내 카르타고를 포위하여 이를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3차에 걸친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카르타고의 옛 땅은 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속주가 되었다. 200년 이상에 걸친 전쟁의 범위가 서지중해 전역에 걸쳤을 뿐만 아니라 제2차 포에니전쟁 때의 카르타고와 동방 마케도니아의 동맹이 보여주듯이, 이 전쟁은 고대에 있어서 세계대전의 양상을 띠었다. 따라서 민족적 시련을 극복한 로마가 일대 도시국가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에 걸친 세계제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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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인=페니키아인 로마인은 카르타고의 주민을 포에니(페니키아人)라 불렀으며,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지만 대개 BC 720년경으로 추측된다. BC 3세기 전반까지 서(西)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카르타고는 땅이 비옥하고 지중해 통상의 요충지로 해상무역을 통해 발전하였다. 특히 에스파냐와 아프리카를 잇는 통상로상에 있었으므로 BC 600년경에는 서지중해의 무역권을 완전히 잡고 코르시카섬 ·사르데냐 ·에스파냐 등지에도 진출하였으며, BC 6세기 중반기에는 전(全)시칠리아를 장악했다. 그들에게는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女神) 타니트와 남신(男神) 바아르아몽에게 산 희생물로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는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카르타고는 식민 도시로 출발했지만, 많은 곳에 그 자신의 식민을 건설하고 농업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 식민지는 이미 카르타고의 손에 절반을 넘겨야 했다. 사르다니아와 코르시카, 이베리아 반도의 동남부 해안과 아프리카의 북서부 등지에 많은 식민을 건설한 카르타고는 그들 고유의 전통적인 항해 기술을 이용하여 대외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얻었다. 그들은 당시의 주요 무역품인 주석, 청동 제조에 꼭 필요한 주석을 구하기 위해 지중해를 벗어나 멀리 브리타니아까지 배를 보냈다. 아프리카 서해안에서는 많은 황금과 상아를 거두었고, 내륙에서는 대규모로 밀을 경작했다. 후대까지 이름이 높았던 카르타고의 밀 생산량은 풍부한 식량 자원이 되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고대의 무역은 뛰어난 과학 기술을 필요로 했다. 바다를 통한 무역을 하자면 많은 과학 기술의 바탕이 있어야 했다. 배를 건조할 수 있는 조선 기술, 배를 운항하는 항해술, 게다가 바다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천체를 살필 수 있어야 아무런 지표가 없는 바다에서 살아남고 항해할 수 있다. 고대의 유명한 페니키아 상인들은 이 삼박자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 옛날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되풀이하였다. BC 6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人)과 결탁하여 그리스인과 충돌하였고 BC 540년경에는 코르시카섬에서 퍼카이아인과 싸웠으며 BC 480년에는 시칠리아 히메라의 싸움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하였다.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는 BC 5세기 후반에서 BC 4세기 중엽에 걸쳐 특히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와의 싸움을 벌였다. BC 4세기 중엽 시라쿠사의 티모레온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였고, BC 310년에는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격퇴하고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마침내 시칠리아의 패권을 재차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피루스 왕 피로스의 개입으로 결국 시칠리아에 대한 완전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한편 로마인과의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으나, 피로스전쟁 후 양자의 대립이 격화하여 BC 264∼BC 146년 사이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다.
카르타고는 고대의 약 5세기 동안을 지중해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상업국가인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남하해 오는 새로운 군사국가 로마에게 무참히, 흔적도 없이 멸망당하고 말았다.
1차 포에니 전쟁
포에니 전쟁의 발단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났다. 시칠리아섬의 메사나를 점령하고 있던 마메르티니(군신 마르스의 아들들을 뜻함)로 불리는 이탈리아인 용병대가, 카르타고와 손잡은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 2세의 공격을 받고 로마에 구원을 청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원병을 보낸다는 것은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로마의 원로원은 알고 있었다. 원로원이 망설이는 구원군의 파병을 민회가 결의하였다. 이로써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BC 264년의 일이었다. 히에론 2세가 카르타고를 배반하고 로마에 붙음으로써, 시칠리아 남부의 아그리겐툼(아그리젠트)도 로마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해군력이 카르타고에 미치지 못하는 로마로서는 함대를 구축할 필요를 느꼈다. 로마는 그리스인의 원조로 군함을 건조하기 시작하였다. 카르타고는 5단노선(노를 5단으로 장치한 배)을 120척이나 갖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3장선(돛대가 3개 있는 배)와 3단노선들로 구성된 뒤떨어진 함대만을 갖고 있었다. 새로운 함대는 BC 260년에 완성되었다.
당시의 해전은, 먼저 배와 배를 충돌시켜 적의 군함을 격파한 다음, 적의 배에 올라 육지전에서처럼 격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함대는 뱃머리를 쇠로 무장하고 적함의 약한 부분에 충돌함으로써, 배를 부수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항해 기술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코르부스(적교:弔橋)였다. 밧줄로 적교를 돛대에 묶어놓았다가 적함의 갑판에 내려놓고 쇠갈고리로 고정시켜 적함과의 연결을 튼튼히 함으로써, 배의 파손 없이 적의 배에 올라 격투를 벌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카르타고로 진격해 들어가는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용병군을 이끈 스파르타의 크산티포스에게 크게 패하였다. 그는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를 활용하여 로마의 집정관 레굴루스를 포로로 잡고 로마군을 섬멸하였다. 게다가 살아남은 부대를 구출하러 간 350척의 로마 함대는 귀환길에 태풍을 만나 80척만 남고 모두 침몰해버리고 말았다. 해를 거듭하면서 시칠리아섬의 각 도시에서 공방전이 계속되며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로마는 커다란 손해를 거듭하기만 하였다. BC 247년, 하밀카르 바르카스라는 청년 장교가 시칠리아에서 사병을 모아 이를 강훈련을 통한 정예 부대로 키워, 로마에 대항하였다. 이로 인해 전세는 로마에게 더욱 불리해졌다. 패색이 짙어지는 가운데 로마의 원로원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 무렵 로마의 부유한 몇 사람의 시민이 사재를 털어 함대를 마련할 군자금을 만들어주었다. 200척의 함대와 6,000명의 수병을 모아 대병력을 구성한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남은 함대를 전멸시켰다. BC 241년의 일로 전쟁은 무려 23년 만에 끝을 맺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화의를 청하였고, 거액의 배상금 외에 시칠리아를 로마에 넘기게 되었다.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해외의 속령을 갖게 되었다. 시칠리아는 로마의 첫 프로빙키아(속주)가 되었다.
한니발
시칠리아를 잃은 것은 카르타고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원주민을 차례로 정복하고 은광을 개발하는 등, 점차 국가의 부를 회복해 하고 있었다. 바르카스의 큰 아들이 바로 이름 높은 한니발이었다. 군대의 진영에서 태어난 한니발은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와 턱수염, 게다가 굉장히 검은 피부를 지녔다. 그 당시 대부분의 카르타고인은 셈족과 아프리카 흑인의 혼혈아였다. 한니발은 전쟁중인 군진에서 성장하였는데, 로마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남달랐다. 한니발은 원주민들로 구성된 용병대를 훌륭하게 훈련시켰다. BC 220년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스페인)를 정복한 한니발은 로마를 쳐들어갔다. 동부 지중해안에 있던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를 기화로 한니발은 8개월 동안 포위 공격을 함으로써, 끝내 사군툼을 함락시켰다. BC 218년이었다. 이로써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하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한니발은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모든 국면에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는 보병 5만 명, 기병 9천 명과 4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고, 알프스를 넘는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다. 아무도 그가 북쪽의 눈 덮인 산을 넘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BC 216년에는 반도 남부의 칸나에(칸네)에서, 결사의 로마군을 전멸시킨 한니발의 획기적인 전술은 명장으로서의 그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게 하였다.
초반부터 대패한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하여 한니발과 싸우게 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에게 싸움을 걸지 않고, 카르타고군의 자멸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파비우스의 반대파들은 그를 비겁자라고 욕하였다. 칸나에에서의 참패는 파비우스의 반대파가 무모하게 전쟁을 이끈 탓이었다. 로마군은 8만 6천 명의 군사 가운데 1만 4천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카르타고군의 전사자는 6천 명이었다. 전사자 비율은 로마군이 90%, 카르타고군이 12%였다. 칸나에 전투는 전쟁의 역사에서 전술 연구의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패전을 거듭했지만, 로마 국민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은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로마의 동맹시들도 한니발에게 점령된 도시들을 제외하면, 로마를 배반한 도시는 없었다. 한니발은 로마가 도시 동맹 공동체기 때문에, 쉽게 와해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BC 207년 한니발의 동생 하스두르발이 원군을 거느리고 왔다. 그러나 그의 밀서가 아쉽게도 로마군의 손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다. 하스두르발의 군대는 로마군에게 탐지되어 전멸하고 말았다.
명장 한니발도 이로부터 차츰 힘을 잃기 시작하여, 점차 이탈리아의 남부로 쫓기게 되었다. 카르타고에게는 경제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이베리아 반도의 전선이 오랜 고전 끝에 로마에게 제압되었다. BC 206년의 일로 전쟁이 시작된 지 12년이 지나서였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이베리아로부터 개선해왔다. 그는 여론을 들뜨게 하여 스스로 사령관이 되어 단숨에 카르타고를 쳐들어갔다. 대승을 거둔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는 화의를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급히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최후의 결전을 위해 방비를 튼튼히 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해상을 완벽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우티카에 상륙하여 육로로 쳐들어 왔다. 한니발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승패를 가른 BC 202년 자마의 전투에서 최후의 승리자는 로마였다. 지와 용을 겸비한 명장 한니발은 불운한 장군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15년간을 싸웠어도, 본국에서는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그나마 동생인 하스두르발이 원군을 이끌고 왔지만, 로마군에게 발각되어 전멸당하고 말았다. 만일 카르타고에서 한니발에게 지속적인 원조를 보냈다면 포에니 전쟁의 결말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한니발의 불행은 패배에 그치지 않았다. 한니발은 시칠리아, 소아시아 등으로 망명하여 떠돌게 되었다. 후에 로마가 더욱 힘을 불려 소아시아 지역에까지 그 세력권을 넓히자, 한니발은 스스로 자살하고 말았다. 카르타고는 패전국으로서, 20척을 제외한 모든 선박을 로마에 양도하고, 50년 동안 해마다 200 탈렌트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허락이 없이는 그 어떤 경우에도 외국과 교전할 수 없었다. 로마는 한니발을 도운 마케도니아왕 필립 5세와의 전쟁을 통해 동부 지중해에 대한 지배권을 넓혀 나갔다. BC 146년 마케도니아를 멸망시키고 로마의 속주로 삼았으며, 그리스의 오랜 도시 코린트를 격파하고 코린트 주민을 모두 노예로 팔고,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리스도 로마의 속주와 다름없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멸망시켜야 한다
카토는 집정관으로서 “카르타고는 멸망시켜야만 합니다.”라고 ‘카르타고 격멸론’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BC 174년 카토는 카르타고와 마시니시 간의 불화를 조사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었다. 그는 포에니 전쟁에서 패하고도 카르타고가 번영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는 카르타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하였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카르타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지중해의 무역권을 놓고 로마와 맞서고 있었다. 그는 원로원에서 아프리카산 무화과를 보였다. 사람들이 그 크고 탐스러운 열매에 감탄하자, “이것은 뱃길로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 땅에서 난 것입니다.”라고 말을 꺼내고는 카르타고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웠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원로원에서 발언하게 되면, 늘 말미에 “그건 그렇다 치고, 카르타고는 마땅히 멸망시켜야만 합니다.”로 맺곤 했다. 실로 대단한 집념이었다. 마침내 로마는 제 3차 포에니 전쟁(BC 149∼146)을 일으켜,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지중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토는 평생 소원처럼 입으로 부르짖던 카르타고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제 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 죽고 말았다.
굴종의 삶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죽음을 택하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명장이었다. 그는 카토의 ‘카르타고 격멸론’에 대하여 ‘카르타고 존속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그가 ‘카르타고 존속론’을 주장한 것은 카르타고가 있음으로 해서 로마 시민들이 경계심을 가지고 살아야 타락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르타고를 파괴한 것은 스키피오 일족이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 후에,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총독은 원주민(켈트 이베리아족)들을 지나치게 착취하였다. 이에 원주민들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는 오랜 고전 끝에 BC 133년 그들의 아성인 누만티아를 공략하여 이를 불사르고 간신히 진압하였다. 한편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외국과 교전을 할 수 없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카르타고의 옆 나라 누미디아왕 마시니사는 심심하면 카르타고의 국경을 넘나들며, 그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아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에는 카르타고의 잠재적 능력을 과장하여 보고함으로써, 로마가 카르타고의 군사적 대응을 막도록 하였다.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카르타고 격멸론’이 늘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카르타고의 대응을 막았다. 카르타고는 참다 참다 로마의 허락 없이 누미디아와 전투를 벌였다. 로마는 지체없이 카르타고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제 3차 포에니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로마와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카르타고는 사절단을 보내고 간곡히 사죄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카르타고에 파견된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완전히 무장해제하였다. 그리고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해안에서 1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퇴거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한다고 포고하였다. 이 포고를 들은 시민들은 “굴종의 삶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죽음을 맞자.”고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그들은 성문을 닫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무기를 만들고, 도시 방위를 위한 시설을 새로이 만들었다.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쇠뇌(노포:弩砲)의 탄력받이 스프링을 만들고, 노예들은 해방되어 전선에 참여하였다.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시작된 농성은 BC 149년부터 시작되어 장장 4년 동안 계속되었다. 로마군은 이 지루한 농성전에 탈진할 지경이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 즉 스키피오의 장남의 양자인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로마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대(大)스키피오라고 하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로를 작은 스키피오, 즉 소(小)스키피오라고 구별한다. 소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에 대한 공격을 훨씬 강도 높게 퍼부었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린 카르타고 시민들은 1주일 동안 시가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토록 결사적으로 저항한 카르타고도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카르타고의 주민은 총 인구의 10%도 되지 않았다. 처참한 결사 항전에 모든 시민이 동참하여 처절히 죽어간 것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다. 카르타고는 무려 17일 동안이나 불탔다. 카르타고 500년의 번영과 영화는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지금의 카르타고 유적지는 그 전쟁의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로마에 멸망당한 이후 카르타고의 이름을 다시는 역사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잔학한 파괴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절시키고 말았다. 카르타고는 이제 없어지고, 로마의 속주 아프리카만이 그 땅의 이름을 대신하게 되었다.
출처 : 미스테리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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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2003년 7월 부록|올 여름 바캉스엔 여기가 딱!]
| 가족과 함께 떠나는 색다른 해외여행지 베스트 8 | |
튀니지 · 페니키아 상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시디 부 사이드 |
지중해 연안에 자리한 튀니지는 작은 나라지만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곳곳에 숨어 있는 고대유적에서부터 로마와 이슬람의 역사도시에 이르기까지. 그 수많은 여행지 가운데서도 단연 눈부시도록 빛나는 곳이 시디 부 사이드(Sidi bou Said)다.
시디 부 사이드의 언덕을 내려가면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도시 카르타고가 모습을 드러낸다. 명장 한니발 장군이 로마와 벌인 포에니전쟁에서 패하기 전까지 약 1000년 동안 이 도시는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경제의 중심지였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카르타고 유적지는 상당부분 소실되었지만, 지금도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둥과 성벽에 남아 있는 조각, 상징물들은 하나같이 세련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페니키아인들의 높은 문화적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상과 지하로 이루어진 카르타고 유적에는 커다란 광장과 시장 등 당시의 생활공간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다를 향하여 우뚝 솟아있는 커다란 기둥과 회랑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물품 거래소 터다. 이곳에 서면 지중해를 누비며 문물을 이동시키고, 장차는 알파벳 문자를 만들어 인류가 자신들의 흔적을 영원토록 간직하게 해 놓은 페니키아 상인들의 삶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비즈니스와 교역이 단순히 경제의 영역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임을 자녀들에게 느끼게 하려면 카르타고 유적만한 여행지도 다시 없을 듯.
그렇다고 시디 부 사이드에서 오로지 옛 역사의 진지함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미로를 연상케 하는 좁고 복잡한 골목마다 재스민 꽃향기가 나그네를 유혹하고 양편에 늘어선 대문과 창문이 예쁜 크고 작은 주택들은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아기자기하다.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 같은 이 도시의 자랑거리 가운데 으뜸은 시대와 주인의 개성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를 간직한 대문과 창문이다. 이를 하나 하나 살피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지적경험이 될 정도.
창문과 대문의 시대별 특성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은 마을에 자리잡고 있는 10여 곳 남짓의 카페다. 시디 부 사이의 카페들은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 중에서도 지중해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낭떠러지 위에 위치한 ‘카페 나트’는 튀니지는 물론 유럽과 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튀니지의 명소다.
카페 나트가 유명해진 것은 멋진 풍경과 더불어 수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페 나트에는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앙드레 지드, 모파상, 화가인 폴 클레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세계의 스크린을 주름잡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즐겨 찾았다. 이들이 카페를 찾을 때면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문학도와 시민들이 찾아와 작품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우곤 했다고 한다.
카페 나트는 운영하는 방법도 흥미롭다. 커다란 계단을 중심으로 각 테라스마다 손님을 접대하는 종업원이 배치되어 있는데, 회교국답게 종사자가 모두 남자다. 이런 이유로 손님들은 빈자리가 있어도 스스로 찾아가는 법이 없다. 입구에서 단골 종업원을 부르거나 그 종업원이 담당하는 테이블로 가 앉는다. 아름다운 풍광과 독특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카페 나트의 또 한 가지 자랑거리는 소나무 잎을 우려내 만드는 솔잎 차(茶). 동양차와는 다른 그윽한 향이 일품이다.
시디 부 사이드의 카페엔 시간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해가 서쪽 수평선 너머로 고개를 숙이는 저녁 무렵이면 발길이 부쩍 늘어난다.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감상하려 카페를 찾는 이들이 많기 때문. 저녁놀이 지고 여기저기 걸려있는 램프에 불이 들어오면 재스민꽃을 바구니에 담아 파는 행상이 카페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닌다. 꽃행상이 지나간 자리는 온통 재스민 향기의 바다로 변한다.
시디 부 사이드는 한적하고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면서 역사의 힘을 되새길 수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어느 골목, 어느 카페를 가더라도 꽃향기와 감미로운 선율이 감도는 곳, 다양한 문화와 삶을 한꺼번에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여행지다.
◆ 가는 길
인천에서 파리,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여 수도인 튀니스로 입국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고 빠르다. 튀니스 공항에서 시디 부 사이드까지는 승용차를 이용하여 20분, 튀니스 시내에서도 기차와 승용차로 20분이면 갈 수 있다.
◆ 볼거리
시디 부 사이드는 작은 휴양지지만 볼거리가 많다. 아름다운 골목과 창문을 비롯하여 카페 나트, 카르타고 유적지, 국립 박물관, 로마 시대에 건설한 목욕탕과 수도교 등. 인근에서 볼 수 있는 명소는 지상 최대규모 모자이크가 전시되어 있는 국립 바르도 박물관, 인류문화유산인 튀니스 메디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테라스 등이다.
◆ 기타
시디 부 사이드에는 예쁘고 아담한 숙소가 여러 곳이 있다. 수도 튀니스에는 국제적 체인 호텔인 메리디앵, 힐튼부터 저렴한 호텔까지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다. 4인 가족이 3박4일 가량 머물 경우 600∼1000유로가 필요하다. 시디 부 사이드나 튀니스 모두 국제적인 휴양지답게 치안상태가 양호해 안전한 편. 그러나 늦은 저녁시간 여자 관광객 혼자서 골목을 다니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 튀니지는 3개월 동안 비자 없이 여행이 가능하다.
※ 제목 : 칼타고(Carthage) 旅行記. 2003년 06월 30일 06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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