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설날이 다가오면 한국인들은 고향에 갈 생각에 설레여하는 것 같습니다. 여건이 좋지 않은 올해 설은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모르겠네요. 설날에 다가갈수록 방송에서는 고향을 노래한 대중가요들을 많이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각박한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푸근한 고향 노래는 마음의 안정을 주지 않을까요.
고향에 대한 노래를 가장 많이 부른 가수 중 한 분이 바로 나훈아 님이 아닌가 합니다. 나훈아 님의 고향 가요를 대표하는 곡으로는 <너와 나의 고향>, <머나먼 고향>, <고향역>, <고향으로 가는 배>, <물레방아 도는데> 등을 꼽을 수 있지요.
이상의 곡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던 시기는 1970년을 전후한 때였지요. 고도경제성장시기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났지요. 도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은 고향의 아늑한 풍경과 정든 사람들을 담은 고향 가요를 들으며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고향 가요들이 엄청난 인기를 누린 배경이지요.
<고향역>(1972)은 나훈아 님의 고향 노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곡이지요. 명절 때면 어김없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기차역 바로 옆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이 노래가 유독 정겹더군요. 이 곡은 본래 <차창에 어린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1970년 발표된 바 있습니다. 이 곡은 무명 작곡가가 자신의 곡을 불러달라고 애원하여 겨우 빛을 본 케이스입니다. 즉 작곡가 임종수 님은 나훈아 님을 3개월을 찾아다닌 끝에 겨우 만나는데 성공했고, 결국 이 곡은 나훈아 님의 노래로 세상에 알려지지요.
< 차창에 어린 모습 >의 뮤직 비디오 (화면에 노래 제목이 잘못 표기된 것이 보입니다)
< 차창에 어린 모습 >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떠돌다 머무는 낯선 타향에
단 한번 정을 준 그 사람을 홀로 두고서
혼자만 몸을 실은 열차는 외로워
눈 감아도 떠오르는 차창에 어린 모습
2. 우연한 인연에 만난 그사람
이별이 있을 줄 알면서도 잊지 못하고
기적에 작별인사 열차는 무정해
멀리가도 떠오르는 차창에 어린 모습
<차창에 어린 모습>의 내용은 주인공이 연인과 철도역에서 이별하며 처절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기적 소리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처연한 작별 장면은 마치 <대전 부르스>(1959)의 가사를 방불케 합니다. 그런데 이 곡은 가사 중에 ‘열차는 무정해‘라는 부분이 불건전하다는 지적을 받아 방송금지 처분을 받습니다. 그러자 나훈아 님은 곡이 아까우니 가사와 리듬을 바꾸자고 제의했고, 작곡가는 그를 수용하여 가사를 대폭 수정합니다. 작곡가는 자신의 열차 통학 경험을 가사에 반영했고, 리듬도 경쾌하게 수정했으며, 제목도 <고향역>으로 바꿨습니다.
< 고향역 >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 역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 역
2.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 역
다정히 손잡고 고갯마루 넘어서 갈 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 역
<고향역>에 등장하는 증기기관차 (1950년대 경기도 이천역)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철도역
가사를 비교해보면 연인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노래가 연인과의 만남을 상상하는 노래로 탈바꿈한 것을 알 수 있지요. 철도역도 절망의 장소가 아니라 희망의 장소로 바뀝니다. 이 무렵 운행하던 증기기관차는 달릴 때 칙칙폭폭 소리와 빼~애~애~액~하는 기적소리가 인상적이었지요. 나훈아 님이 1972년 재취입한 <고향역> 음반에는 기적소리를 집어 넣어 생동감을 불러일으켰고, 공전의 히트를 칩니다.
<차창에 어린 모습>을 감상해보면 가창과 멜로디 모두 좋지만 역시 사춘기적 감상을 담은 가사가 발목을 잡는것 같더군요. <고향역>은 가사 바꾸기를 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춘기 소년의 이야기가 민족의 이야기로 비약했으니까요. 그 결과 명절 때 가장 많이 불리는 곡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지요.
한국 정상의 가수들이 젊을 때 교류하던 모습 (왼쪽부터 조용필 님, 조영남 님, 나훈아 님)
<고향역>은 기차역에 나와 반겨줄 여자 친구 생각에 설레이는 주인공의 심정을 잘 묘사하지요. 또 이 곡은 시각적 이미지가 탁월합니다. 가을이 돌아오면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는 고향의 기차역, 여자 친구와 손잡고 고개를 넘는 모습 등이 선명하게 떠오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