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老巨樹 이야기(책)/ 노거수이야기· 19
수로왕릉 '후원림後園林' - 늙은 신하처럼 역사를 지키고 선 나무들
2020.12.26 노거수 탐사 8차/김해시
합성초교 담너머에 있는 수로왕릉.
아이들과 현장학습을 가기도 했다. 산책도 했었고, 그때는 아이들이 타고 노는 늙은 왕버들을 보는 게 힘들었다.
김해 사람들의 놀이터였던 수로왕릉...5년이 지난 지금 후원림의 모습은 약간 달라져 있었다.
작은 오솔길을 만들어 왕버들이 숲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놓았다.
잘했다는 생각이 들다. 그리고 나뭇잎을 나무들 아래 넣어둔 건 참 맘에 들었다.
겨울이라 그렇겠지만 특히 왕버들이 많이 힘들어 보인다.
나무둥치가 거의 썩었는데도 맹아지를 올리며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소리치고 있는 왕버들...
중간에 나무 한 그루는 소임을 다 하고 잘려서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내 생각에는 고사목도 그냥 세워두면 좋겠다.
추억찾아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죽어서도 그 자리를 지키면 나무가 좋아할 듯 하다.
지리산이나 소백산을 오르면 고사목을 만난다. 고사목도 살아 있는 나무처럼 20년전에 왔을 때나 지금이나 그대로 서 있으면 왠지 반갑고 행복한 마음이 드는 건 나만 그런가~~~
오늘 도감따라 수로왕릉의 후원림을 찾았다.
도감 내용중 마지막 '천덕꾸러기로 전략한다'고 하는데 맘이 아프다.
내 조상... 국가의 태동이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다.
김해 사람들의 생활속에서 350년을 후원림 나무들은 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했고, 늙은 왕버들을 아이들은 놀이기구처럼 타고 놀았던 곳이다.
알레르기 있는 사람들은 참기가 또 쉽지 않을 것이다. 서로 상생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봄이면 먼지 청소차가 많이 오가는 것을 봤던 기억을 생각난다.
김해시에서 꽃이 필 땐 먼지 청소하는 차로 청소를 잘해 주면 좋겠다.
군계일학이라는 상수리나무. 몇 그루 있는데 어느 나무인지...
수로왕릉을 빙 둘러 소나무가 서 있다.↓ 후원림 돌아보고 나오는 곳에 대나무도 있다.↑
수로왕릉 오른쪽에 서 있는 나무(무슨 나무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들어서면서 왼쪽 후원림쪽으로 가면서 해마다 올라오는 유명한 사진속의 능소화 군락이다.↑
어린 느티나무도 많지만 큰나무도 있다.
김해민속박물관쪽 주차장으로 가면서 담너머 연못쪽에 서 있는 은행나무다.
노거수이야기 · 19 수로왕릉 후원림後園林
”늙은 신하처럼 역사를 지키고 선 나무들 |
“수로대왕首露大王 이 돌아가셨다!” 서기 199년 3월 29일, 가락국에 봄이 오고 있었다. 남해바다를 건너며 몸을 데운 남풍은 분산盆山이며 신어산 神魚山의 온갖 초목들을 흔들어 깨우느라 바빴다. 제비는 부지런히 처마 밑을 드나들며 집짓기에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들판으로 나간 듯, 골목에서는 아이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 평화로운 정적을 흔들고 삽시간에 퍼져 나간 슬픈 소식은, 가락국의 아홉 부족 7만 5천 백성을 깊은 슬픔에 빠뜨렸다. 수로대왕이 붕어崩御한 것이다. 왕비를 잃은 지 10년만이었다. 매양 외로운 베개에 의지해 몹시도 슬퍼하시더니, 10주기 제례를 봉행한 지 스무이틀 만에 눈을 감으시다니, 춘추春秋158세, 누릴 만큼 누린 장수였건만 백성들은 “대왕이 세상 떠난 왕후를 너무 그리워 해 옥체玉體를 해쳤다”며 못내 애석해 했다. 대왕은 백성들에게 인자한 어버이이자 벗이고 이웃이었다.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을 비롯한 아홉 촌장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후에도 아랫사람들을 핍박하거나 힘으로 다스린 적이 없었다. 왕궁을 세울 때부터, 좋은 자리를 다 제쳐두고 신답평新畓坪에 자리를 정하면서 “여뀌잎처럼 협소하지만 여기에 의탁하고 강토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오히려 신료臣僚들을 다독였던 그런 와이다. 왕궁이라야 지붕에 올린 이엉 끝도 자르지 않은 초가에, 오르는 계단은 흙은 쌓았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도,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추수가 끝난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농한기를 이용해 지었다. 행차때는 논밭의 민초民草조차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어가를 멈추어 올해 농사는 어떠하냐, 고되지는 않느냐 묻곤 하던, 참으로 어진 성군이었다. 성군 수로왕 잠든 납릉納陵 그런 임금이 돌아가셨다. 하지만 마냥 넋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신하와 백성들이 힘을 모아 궁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무덤)을 세우니 높이가 한 길一丈이요 둘레가 3백보였다. 그 자리에 장사 지내고 이름을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했다. 당시 조성된 수릉왕묘는 김해시 서상동 일원 약 6만2천㎡로, 지금의 ‘수로왕릉首露王陵 ’(사적 제73호)이다. 능은 원형봉토분에 높이 약 5m이다. 그러나 현재 모습은 임진왜란 때에 도굴로 파괴된 것을 지방민들이 다시 쌓아 올려 이루어진 것이다. 그 이전에도 고려 문종 때와 조선 세종 때에 정비사업이 있었다. 또 1580년(선조 13)에는 수로왕의 후손인 영남관찰사 허엽許曄이 허왕후릉과 함께 다시 쌓은 바 있다. 1647년(인조 25) 왕명에 의하여 허적許積이 묘비문을 지어 비를 세웠고, 1865년(고종 2)에는 숭선전崇善殿을 중수했다. 수로왕릉은 정문인 가락루 가락루를 들어서면 정면에 능역이 있고, 좌우에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 숭안전崇安殿, 안향각安香閣, 전사청典祀廳, 제기고祭器庫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숭안전은 지난1989년 신축한 전각이다. 2대 도왕 도왕(거등왕)부터 9대 숙왕肅王(구형왕)가지의 위패를 모셔, 수로왕릉이 가락국 창건부터 신라 합병가지 모든 왕의 제례를 봉행하는 종묘宗廟를 겸하게 됐다. 김해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로왕릉에 대한 이야기 한 두 개쯤은 지니고 있다. 도, 그 대부분은 왕릉보다 왕릉 후원에서 만들어진 추억일 것이다. 볼거리도 놀거리도 마땅찮던 시절, 수로왕릉은 초등학교의 단골 소풍지였다. 봄에는 신록으로 가을에는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정경과 넉넉한 그늘로, 왕릉 숲은 아무리 많은 인파가 몰려도 내치는 법이 없었다. 몇 아름이나 되는 속이 빈 왕버들은 술래잡기하는 아이들을 숨겨 주었고, 세월의 무게에 눌려 기울어진 느티나무는 미끄럼틀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청년 시절, 혹은 어른이 되어서도 다시 왕릉을 찾았다. 막 풋사랑을 시작하는 청춘남녀들에게 왕릉 숲은 더 없이 좋은 데이트 장소였다. 매점에서 사이다 한 병 사들고 빨대 두 개를 마주 꽃으면, 눈과 이마를 맞대고 몇 시간의 행복한 밀회가 가능한 곳이었다. 어쩌다 아는 사람과 마주쳐도, ‘아베크족族을 모른 척 지나가 주는 불문율도 있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봄에는 꽃놀이 가을에는 단풍놀이를 즐기기 위해 왕릉 숲에 모이곤 했다. 가락문화제의 사생대회나 백일장이 열리는 곳도 변함없이 수로왕릉이었다. 60년대까지는 선거유세도 심심찮게 벌어졋으니, 왕릉 숲은 ‘예술 무대’이자 김해의 대의代議를 논하는 광장이기도 했다. 주민들 공원으로 이용된 후원림, 나무에는 고통 이처럼 생활 속에서 수시로 접하다 보니, 수로왕릉은 지역민들에게 성역聖域이 아니라 ‘놀이터’처럼 친숙했다. 아예 ‘왕릉공원’이라 보르기도 했다. 60~70대 노인들에게는 지금도 입에 익은 이름이다. 그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워낙 많은 발길에 눌리는 바람에 숲이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쉴 새 없이 찍히는 발자국에 반들반들 다져져, 왕릉 후원 전체가 숲이 아닌 마당으로 변한지 오래다. 나무들이 아무리 많은 열매를 맺고 씨앗을 떨구어도, 후계목後繼木들이 자라나지 못하게 되었다. 고목의 그루터기에서 움트는 새 가지, 그늘 사이로 이리저리 몸을 틀며 햇빛을 향해 목을 빼는 어린 나무들이 있어야 살아있는 숲이다. 그런데 왕릉 후원에는 그런 생기가 없다. 가진 것 모두 바쳐 키운 자식들은 외지로 나가고 빈 둥지를 지키는 오늘의 농촌 노인들처럼, 이제 왕릉후원에는 늙어 꼬부라지고 중병을 앓는 나무들만 남았다. 왕릉 정원의 맨 서쪽, 담장 앞에 잘 가꾸어진 못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가 정원과 후원이 나뉘는 지경地境이다. 못을 한 바퀴 돌아 후원 입구에 섰다. 몇 아름씩 되는 거목들이 즐비했던 곳이다. 그러나 숲은 이제 성글고 야윈 모습이다. 어린 시절의 소풍날,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응석과 해코지를 너털웃음으로 받아주던 그 우람한 고목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래도 가장 먼저 눈에 잡히는 것이 늙은 왕버들나무들이다. 숲의 가운데 족이 엉성해진 것과 달리 담장 주변에는 아직도 둘레 4~5m 짜리 거목들이 서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의 발길이 나무에게는 얼마나 혹독한 시련인지 알겠다. 이 숲에는 예부터 유독 왕버들이 많았다. 버드나무목 버드나무과의 낙엽교목인 왕버들은 높이 20m, 지름 2m 가까이 자란다. 속이 잘 썩는 탓에 바람의 피해를 많이 입는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으로 길이 4~12cm 사이, 어린잎은 적갈색을 띠고 뒷면은 흰색이다. 수꽃에는 수술이 4~5개씩 있어 대개 2개인 버드나무속 중 특이한 종이다. 한국, 중국, 일본에 분포하는데, 물가에 특히 잘 자란다. 왕릉 전설 알려주듯 곳곳에 선 왕버들 개울도 없는 수로왕릉 후원에 왕버들이 군락을 이룬 데 대해서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수로왕이 세상을 뜨자 조정은 능陵을 어디로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장례가 아니라 일국의 시조始祖를 모실 유택이 아닌가, 자리의 길흉에 따라 나라의 앞길이 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결국 뜻을 모아 중국에서 유명한 지관地官을 모셔 오기에 이르렀고, 그는 지금의 능역을 지목했다. 좌청룡 우백호는커녕 지기地氣가 맺힌 혈穴 하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관은 “ 이 곳보다 좋은 자리는 없다”고 했다. “천손만대天孫萬代가 발복할 명당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정작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광壙을 파다 보니 물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바닥에는 송곳처럼 뾰죽한 바위 하나가 불거져 있었다. 그런 자리에 대왕의 관을 안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성질 급한 무관武官들은 지관을 참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갖은 시위示威에도 꿈적 않던 지관은 ”정히 그렇다면 뾰죽한 바위 끝을 깨어 내시오. 무덤자리의 물기는 없어지겠지만 땅의 기운도 함께 약해질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가 이르는 대로 하자 정말 순식간에 무덤의 물기가 사라졌다. 그 대신 생림의 무척산 꼭대기에 물이 솟아 올라 생긴 못이 바로 지금의 무척산無隻山 천지天池못이라고 한다. 능침 안의 바위 끝을 개자 무척산에 물이 솟았다는 건, 옛사람들이 그 자리를 무척산 정기가 맺힌 곳으로 보았다는 뜻이 된다. 더 위쪽에 있는 왕비릉을 분산의 지맥地脈으로 본 것과는 배치되는 시작이다. 아무튼, 김해김시는 명당 덕분인지 수로왕 단일 후계이면서도 흔히 ‘6백만 문중’으로 일컬어지는 국내 최대 문중을 이루었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金庾信, 고려 공민왕 때 여러 차례 반란을 평정한 김 유金庾, 스승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衣祭文’을 사초史草에 실어 연산군에게 희생당한 김일손金馹孫, 이 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김 완金完, 정조正祖의 어진御眞(임금의 초상화)을 그린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등 문文· 무武· 예藝에 걸쳐 배출한 인물도 부지기수다. 숲 가운데 상수리남 ‘군계일학’ 숭선전 뒤 대숲의 바람 소리를 귀에 담으며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분재盆栽를 크게 확대해 놓기라도 한 듯, 눕고 선 나무들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형태를 하고 있다. 관리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도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허리 굽은 나무에는 지팡이를 쥐어 주었고, 당으로 기울어진 나무에는 일일이 받침목을 세웠다. 드러누운 채 살아남아, 둥치는 땅으로 가지는 하늘로 뻗은 나무도 있다. 안타까운 것은, 어느 것 하나 성한 나무가 없다는 점이다. 다른 수종보다 왕버들의 상태가 특히 심각하다. 대부분 비어버린 속을 채우는 외과수술을 받은 상태고, 가지나 잎도 밀도密度가 낮다. 마치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힘겨워 보인다. 숲 한 가운데 쯤에 이르자, 모처럼 힘이 넘쳐 보이는 거목이 앞을 가로막는다. 가슴 높이의 둘레가 2m 정도 될가, 상수리나무다. 곧게 뻗어 오른 주관主幹과 균형 잡힌 가지들이,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숲의 중심점을 표시한 깃대처럼 우뚝하다. 수로왕릉 후원은 중심부에는 왕버들이 주로 분포하고 주변부를 느티나무, 팽나무, 소나무가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북쪽 담장 옆 언덕바지에 올라선 팽나무 한 그루는 우람한 몸집을 절반이나 담장 밖으로 내놓고 서 있다. 가슴 높이의 직경이 1.4m가 넘고 높은 곳에 서 있어 더 돋보인다. 담장은 밖에서 바라볼 때는 안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안에서는 구속과 속박의 의미도 있다. 나인內人이나 내시內侍들은 왕궁에 한 번 들어가면 평생 나올 수 없는 신세를 ‘아홉 겹의 담장’에 비유해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 불렀다. 목을 빼고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는 팽나무도, 바깥세상이 마냥 궁금한 듯한 모습이다. 후원의 북쪽과 동쪽 담장을 찬찬히 둘러보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밖에서는 담장 안이 들여다보이는 것과 달리, 안에서는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담장 안쪽이 1~2m 아래로 비탈을 이루고 있는 탓이다. 담장이 없다면 주변의 빗물이 모두 후원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천지 못 전설이나 능역에 왕버들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설명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왕버들숲은 이제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있다. 해마다 5월경이면 인근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버들개지에서 날리는 꽃가루로 인해 알레르기성 비염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2천 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를 함부로 훼손할 수도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다. 주름지고 병든 몸으로 왕릉을 지키고 선 왕버들숲의 처지가 늙은 내시처럼 처량하고 딱하기만 하다. *가락국 옛터 김해의 노거수 이야기(도감) |
**소제목 '주민들 공원으로 이용된 후원림, 나무에는 고통'중 아래서 둘째 문단에서
버드나무속 수술 얘기가 나온다. 다양해서 정리해 보았다.
아래 자료를 보면 대개 수꽃 수술의 개수는 2개가 많다. 그 중 왕버들도 수꽃 수술의 개수가 많은 편이다.
버드나무속 수꽃의 수술의 개수
1. 수꽃 수술의 개수 2개
:진퍼리버들, 버드나무, 능수버들, 용버들(운용버들), 수양버들, 닥장버들, 여우버들, 호랑버들(섬버들,떡버들),분버들,
육지꽃버들, 눈산버들(난장이버들), 참오글잎버들(참오굴잎버들),
2개지만 합착해 1개처럼 보이는 것 : 제주산버들, 키버들, 갯버들
2. 수꽃 수술 개수 3개; 선버들,
3. 수꽃 수술 개수 3~5개: 왕버들(간혹 6~7개)
4. 수꽃 수술 개수 5개: 쪽버들, 채양버들(새양버들)
5. 수꽃 수술 개수 6~9개: 반짝버들(5~12개)
-한국의 나무(김태영.김진석)
#겨울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