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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는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11.14km2, 해안선 길이 36km, 583가구 984명(2014년)이다.
위도는 전라북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서울 여의도 면적(2.95km2)의 4.8배쯤 된다.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서쪽으로 14km 거리에 있으며 위도를 중심으로 주위에 6개의 유인도와 24개의 무인도가 있다. 위도는 격포항에서 정기여객선으로 5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생김새가 고슴도치와 닮았다 하여 고슴도치 위(蝟) 자를 붙여 위도(蝟島)라 했다고 전해진다.
위도는 고려조 이전 상고시대에는 문헌이 없어 어느 지역에 속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수군의 요지였고, 조선시대에는 멀고 먼 유배지이기도 했다. 조선 단종 임금 시절 계유정난으로 김종서의 유일한 혈육을 여종이 숨겨 와서 위도에서 길렀다. 그들이 바로 순천 김씨 후손이다. 조선 말엽에는 대유학자였던 간재 전우선생이 위도의 왕등도에서 제자들과 여생을 보내겠다고 건너왔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의 간청으로 3년 만에 위도를 떠나 계화도로 옮겨 그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고종 33년인 1896년, 전라도를 전라남북도로 개편할 때 고군산열도와 더불어 전남 지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지도군이 없어지자 영광군에 편입되었다. 이후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북 부안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위도는 서해안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해군무관에 해당되는 첨사라는 수군첨절제사가 주재하며 사법 · 행정권을 총괄하는 업무를 관장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부안군 위도만큼 보배 같은 섬이 또 있을까?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위도는 여러 개의 보배 같은 섬들 중 으뜸의 자리에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풍요로운 섬이다. 위도에는 여러 가지 매력이 있지만 그중 가장 먼저 꼽을 만한 것은 육지에서 가까이에 있으면서 섬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위도보다 아름다운 섬이야 많이 있겠지만 대부분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여행객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다.
위도의 또 다른 매력을 들자면 바다와 갯벌에서 건져 올린 싱싱하고 풍성한 먹을거리가 있고, 섬 특유의 민속과 전통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조기 파시로 유명한 섬이었으며, 갯벌 체험과 낚시, 등산까지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으니 이만한 섬이 어디 또 있으랴.
여객선이 닿는 위도 장금항은 격포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제일 먼저 닿는 곳이다. 그리고 한때 대규모 조기 파시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다. 위도 남쪽 바다가 바로 조기잡이의 보물창고였던 ‘칠산어장’이다. 영광군 백수(白岫)해안도로에서 보면 바다 저 멀리 일곱 개의 섬이 펼쳐져 있는데 바로 칠산도다. 7개의 크기와 모양새가 엇비슷한 섬들이 모여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 바다는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어장이었다.
조기는 동중국해에서 겨울을 보낸 뒤 봄철이 되면 서해를 거슬러 올라 산란 길에 오른다. 3월은 흑산도 바다에서, 4월에는 전남 영광과 위도 근해의 칠산어장을 지나며, 5월에는 충남 태안의 격렬비열도
이곳에 집결한 안강망 어선들은 물이 많이 빠지는 사리 때 바다에 나가 그물을 내려 조업을 하고 조금 시에는 파장금항으로 들어와 휴식을 취하면서 배와 그물, 어구를 손질했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바다는 장소를 잘만 선택하면 그야말로 ‘고기 반, 물 반’이었다. 단 한 번의 그물질로 만선을 이루었다. 그물은 흘림걸그물(유자망)인데 그물을 수면에 수직으로 커튼처럼 내려 조류를 따라 흘려보내면서 물고기가 그물코에 꽂히게 하여 잡는 어법이다. 유자망을 바다 속에 내렸다 올리면 고기가 그물코에 가득해 미처 떼지도 못하고 그물째 싣고 입항해야 한다. 지금도 가거도나 목포항에서 아주머니들이 한 줄로 서서 조기 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위도의 조기파시는 우리나라 3대 어장 중 하나인 칠산 바다의 한복판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동해안은 물론 전국 각지의 어선과 일본에서도 고깃배가 몰려와 조업을 했다. 위도 치도리에는 일본인 어부를 위한 유곽까지 들어서기도 했다.
조기떼가 몰려들고 조기 울음소리가 칠산바다를 덮을 때면 어선들과 장사꾼들이 칠산어장의 중심지인 위도로 몰려들었다. 파장금항에 3월에서 6월까지 파시가 서면 파장금항 맞은편에 있는 식도
파장금 포구가 번창할 당시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릿집이 6개, 한국인이 경영한 음식점이 35개나 되었다. 술집 색시만도 400~500명이 북적거렸다니 위도의 파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조기 파시가 들어서면 좁은 어촌이 일시에 번화한 어촌으로 변했다. 따라서 어부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판매하는 상인들과 음식점, 술집, 선구점, 기계수리점, 잡화상, 이발소, 미용실, 식당, 다방, 세탁소 등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었고 파장금항은 소도시를 이루었다. ‘파장금’이라는 이름은 칠산어장을 끼고 있어 많은 어선들이 왕래하고 폭풍이 몰아치면 어선들이 대피하는 마을이며 물결이 길면 어선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혹은 파도가 치면 금(金) 즉 돈이 몰려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파시 때에는 해안과 마을 중심가를 따라 술집과 요릿집이 많았고, 업주들이 건축자재를 가져와 판잣집, 양철집 등을 만들어 사람들이 임시로 살다가 파시가 끝나면 철거했다. 이런 가옥은 술과 음식을 팔고 야간에는 어부들에게 숙소로 내주었다. 그러다가 파시 한철을 잠시 보내고 나면 대부분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봄이 되면 제비처럼 다시 찾아와 그 자리에 집을 지었고 어선들이 몰려와 조기 파시가 섰다. 풍랑이 심하면 조업을 나갈 수 없어서 선원들이 술집으로 몰려들었기에 술집은 돈이 돌았다.
이때 이들이 건져 올리는 조기는 배 한 척당 50~60동이었다. 1동이 1천 마리이기에 1,100척의 고깃배가 건져 올린 조기는 5~6천만 마리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잡힌 조기는 영광의 법성포로 실려가 염장으로 가공되어 ‘영광굴비’라는 브랜드를 가지고 전국에 판매되었다. 전북 소속의 위도굴비가 아니라 전남의 영광굴비가 된 것은 행정구역의 개편 때문이다. 위도는 원래 전북 부안군에 소속되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전남 영광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다시 부안군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 칠산어장을 비롯한 서해에서 조기가 사라지자 흥청거리던 조기 파시는 끝이 났다. 조기가 사라진 다음 위도의 바다는 또 다른 파시가 시작되었다. 이때 잡힌 고기는 조기보다는 못하지만 고등어를 비롯하여 삼치, 병어 등의 어장이 주류를 이루었다. 당시보다 어황의 규모가 많이 작아졌지만 아직도 삼사백 척의 어선이 정박하면서 선원들도 천 명 정도가 북적거린다.
사통팔달로 길이 뚫리기 전에는 위험하지만 바닷길이 육로보다 빠르고 편했다. 특히 쌀과 소금, 목재 등 무거운 화물을 나르는 데 바닷길은 제격이었다. 바다는 고속도로였고, 또 어장 철에는 시장이 서기도 했다. 민어와 조기, 삼치 등 철따라 몰려드는 풍어기 때에 바다에 서는 장이 파시(波市)였다. 수십 척, 수백 척의 어선들이 만선이 되어 돌아오면 파시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40여 년 전의 이야기일 뿐 지금은 다 꿈같은 이야기다.
파시가 사라진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어선의 대형화와 현대화로 인한 남획이다. 사방에 넓고 빠른 육로가 생기고, 냉동 기술 발달과 유통구조 변화로 대형 냉동 차량이 싱싱한 조기를 대도시까지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빨라진 배의 속도로 인해 가급적 제값을 받고 싶은 선장은 소비지로 직접 가기를 원했다.
조기파시가 열렸다는 위도의 파장금항에 여객선이 도착했다. 파장금은 이제 위도의 관문으로 항구 역할만 하고 있다. 과거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골목길을 걸으면 그 흔적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
바다를 끼고 도는 해안도로가 잘 닦여 있다. 여객선이 닿는 파장금에서 시작해 섬을 한 바퀴 도는 해안도로는 20km 정도이다. 언덕으로 올라서서 보는 서해바다는 드넓게 펼쳐져 있어 신선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진리’에서 파장금으로 가다가 파장금 못 미쳐 작은 마을이 나타나는데 ‘시름’이라는 곳이다. 지형이 떡시루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시루’로 불려오다가 지금은 ‘시름’이라고 불린다. 위도 전체의 전기를 공급하는 내연발전소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시름마을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위도면사무소가 있는 진리마을이 나타난다.
위도는 북동-남서로 길쭉하게 드러누워 있다. 고슴도치라는 동물 형상에 비추어보자면 북동쪽 목덜미 근처에 망월봉이 최고봉으로 솟았고, 등줄기 중간쯤에 망금봉이, 그리고 엉치 근처에 203m 봉우리가 솟아 있다. 망월봉과 망금봉 사이는 해발 50m 정도로, 움푹 낮아지는 고갯마루가 2개 있는 등 높낮이의 변화가 있다. 파장봉(162m), 망월봉(255m), 도제봉(152m), 망금봉(243m) 등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차례로 늘어서서 위도의 하늘선을 만들고 있다.
위도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정착해 살았다는 마을은 알 수가 없다. 수군진영이 있다 하여 ‘진말’(진마을)로 불려오다가 일제 때 진리라 칭했다고 한다. 보통 섬마을들은 세찬 바람에 노출되어 있는데 비해, 진리는 온화한 바람과 조용한 파도를 끼고 있는 마을이고 다른 지역에 비해 논을 갖고 있어 논농사도 짓고 있다. 현재 진리에는 위도중학교와 위도고등학교 및 우체국, 농협, 농협하나로마트, 위도보건지소 등과 같은 행정기관과 편의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해안도로에는 민박을 운영한다는 안내판이 집집마다 내걸려 있다. 집들은 대부분 단층 가옥인데 외관이 깨끗하고, 구릉이나 밭이 많은 편이다.
면사무소 뒤쪽으로 가면 앞면 5칸, 옆면 3칸짜리 건물인 위도관아가 있다. 조선 숙종 8년(1682)에 설치한 수군진영인 위도진의 관아 건물이다. 위도는 전북 서해안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해군무관에 해당되는 수군첨절제사가 주재하며 사법, 행정권을 총괄하는 업무를 관장했다.
그리고 진(鎭)의 설치는 임진왜란 이후 군사제도의 개편에 따라 각 지방의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되었으며, 위도진은 서해안을 방어할 군사적 목적으로 우수영의 관할 하에 설치되었다. 이 건물은 위도진의 진영장인 첨사가 업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섬 지방에 남아 있는 유일한 관아 건물이라 한다. 또한 진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자체방위대를 조직하여 향토방위를 하던 중 전사한 故 김길환, 김용만 두 사람의 넋을 기리는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진리에서 서북간 1km 지점 떨어진 곳에 자리한 벌금리는 조선 말엽 창녕 조(曺)씨와 평산 신(申)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오는데 지금은 다수의 성씨가 살고 있다. 벌금리에도 선착장이 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용머리 해안 들머리는 벌금항 옛 여객선터미널 옆이다. 벌금은 예전 위도의 관문이었으며, 1993년도 여객선 사고 당시에는 여기서 손님들을 싣고 나갔다. 80년대까지 간이조선소가 있던 곳으로, 바닷가에는 건조한 배를 내리던 시멘트 구조물이 남아 있다. 그리고 벌금 여객선터미널 앞에서 시멘트길을 따라가면 작은 두 바위섬까지 이어진다. ‘오재미’라 부르는 곳으로, 용머리의 오른쪽 끄트머리가 바라다 보이는 지점이다.
이곳은 원래 지대가 낮은 지역으로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아서 예부터 소금을 생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금을 생산하는 소금벌이라서 ‘벌금’이라 칭하게 되었다. 또한 이곳의 당집 근처 야산 정상에는 수백 년 된 후박나무 숲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 해식단이 있는데 해안도로 끝에 있다.
위도의 채석강이라 불리는 용머리해안은 서해답지 않게 깨끗하고 투명한 쪽빛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아낸다. 섬의 모습이 고슴도치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해서 고슴도치 위(蝟)자를 붙여 위도라 부르는데 바로 이곳이 고슴도치의 앞발 부분이다.
벌금선착장 뒤편에 위도해수욕장이 있다. 깊숙한 만 안에 펼쳐진, 고운 모래와 맑은 물로 유명한 위도의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차바퀴도 안 빠져 흔히 ‘공설운동장’으로 불린다. 길이 1km가 넘는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수심이 얕아서 가족 피서지로 최고이며 인근에 있는 깊은금, 미영금, 논금 등에서 자연의 여유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참으로 아름답다. 먼 바다의 왕등도 원경이 붉은 태양과 더불어 펼쳐지는 곳이다.
해수욕장 위쪽 도로도 멋지다. 도로를 따라서 그늘 천장이 터널을 이루고 그 옆으로 나무벤치와 스탠드, 발 마사지 길을 만들어 두었다. 야외무대와 조명 등의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근처에는 ‘도장금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지만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고 위도 주민의 식수원인 저수지가 있다.
섬 주민의 식수를 100% 공급한다는 상수원과 정수장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좌우로 해안 경관을 감상하기 좋은 전망대를 만난다. 돛단배 형상이 서 있는 곳이다. 해안 양쪽에 돌출한 악어 모습의 해안과 섬들이 이채롭다. 그 바로 뒤에 비석동과 용머리가 나온다. 왼쪽 앞 끝이 비석동이고 뒤쪽이 용머리다.
섬 일주도로 총 길이는 20여 km이다.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번갈아 깔린 왕복 2차선 길이다. 들쭉날쭉한 해안선이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 보이는 북서쪽 바닷가길이 더 아름답다. 차를 타고 섬을 돌다보면 어디에서나 들과 바다를 볼 수 있다. 해안도로에서 보는 풍경은 산에서 내려다보는 그것과는 또 다르다. 논금을 도는 해안의 모래는 부드럽고 또 곱다. 위도의 꼬리부분에 해당하는 논금은 논구미 또는 답구미라고도 부르는데 위도에서 유일하게 논이 있어 벼를 경작하는 곳이다.
위도 북동쪽 끝 파장금항의 반대쪽 끝, 고슴도치 꼬리가 시작되는 부분의 도로변에 팔각정이 있다. 갯벌체험 마을이기도 한 전막리이다. 아담한 마을과 넓은 갯벌, 그 앞에 펼쳐진 바다가 아주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 하늘이 정말 푸르게 보인다. 위도의 푸르름은 이곳에서 절정에 달한다. 아침저녁으로 바다에 그물을 쳐서 고기잡이를 했던 마을인 살막금(전막리, 箭幕里)을 지난다. 살막금에서 한참 오면 차바퀴처럼 생긴 거륜도
위도의 지명을 보면 순수한 우리말을 잘 간직하고 있다. 파장금을 비롯하여 벌금, 정금, 도장금, 논금, 깊은금, 미영금, 살막금은 모두 위도의 내만(內灣) 깊숙이 들어온 곳이며 배가 안전하게 피항할 수 있는 항구 역할을 할 수 있다. 위도에는 14개의 금이 있는데, 이 금들은 예전의 군사적 요충지와 관련이 있다. 이곳은 주민들이 유용하게 이용하는 포구지만, 외적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 침입하기도 좋은 장소여서 수군은 이들 지역에 식량을 자급할 수 있도록 경작지와 초소를 세웠다 한다.
위도는 아름다운 바다와 해안선, 아담한 산봉우리들을 골고루 갖춘 섬이다. 망월봉, 망금봉, 도제봉, 파장봉 등 줄줄이 솟아난 산봉우리들이 전망대 구실을 하고 있다. 등산 시에는 등산로 선택과 시작점을 잘 잡아야 한다. 어디서 올라가느냐에 따라 차량 이용이 달라진다. 위도의 종주 산행을 원한다면 위도를 일주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해안도로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위도의 최남단 전막리(살막금)까지 간 다음에 등산을 시작하면 좋다. 망금봉을 필두로 해서 도제봉과 망월봉 그리고 파장봉을 지나서 파장금항까지 걸어서 이동이 가능하다. 여기저기 마을로 가는 길이 여섯 곳이나 있지만 파장금항을 최종 목적지로 삼으면 된다.
전막리 도착 전 좌측 고갯길에 ‘위도등산안내도’가 보인다. 능선을 오르면 좌우에 멋진 해변과 섬과 바다의 풍광들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가파른 산길과 바위를 통과하면 1시간 반 만에 위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망금봉(243m)에 도착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위도는 가히 환상적이다. 위도의 모습이 한눈에 다가온다. 보물섬답다.
전망대 좌로는 논금, 미영금, 살막금, 위도해수욕장 등 4개의 해수욕장이 조망되고 우측에는 예전에 위도의 한양이라고 부른 치도리 마을로 가는 임도가 훤하게 뚫렸다. 치도 마을에 내려온 다음 위도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을 지나면 진말고개가 나온다. 곧 이어서 치도교를 지나면 나타나는 도제봉은 해발은 낮지만 망월봉과 망금봉을 좌우로 거느리고 있다.
도제봉(152m)은 위도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예전에 봉수산이라 불리던 이 산에서 정월 초이튿날 섬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드렸다 하여 도제봉(島祭峰)이라 불린다. 이 산은 위도8경 중 하나로 꼽히는데 늦가을 피어오르는 안개의 경치를 봉산출운(鳳山出雲)이라 한다. 도제봉을 천천히 지나서 개들넘까지 내려가면 위도에서 가장 높은 망월봉이 버티고 서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개들넘교를 지나서부터 오름길이다. 정상까지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위도의 최고봉인 망월봉은 해발 254.9m이며 산 정상에는 정상석과 함께 사각 정자가 세워져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정상의 동쪽으로는 격포와 변산반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북쪽으로는 식도
망월봉에서 내려가는 길가에는 전망 좋은 바위가 하나 있고, 좌측으로 내려가면 서해훼리호 위령탑으로 가는 길이다. 우측은 시름교를 통과해서 파장봉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등산로 이곳저곳에는 친절하게 안내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위도의 산들을 등산하면서 가장 인상에 남는 지점은 개들넘에서부터 망월봉으로 오르는 길과 시름교로 내려가는 능선길이다. 전막리에서 시작한 등산은 망금봉과 도제봉, 파장봉을 거쳐 위도항까지 오는데 약 14km, 5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또 다른 종주 길인 깊은금에서 시작하여 내원암을 지나 망금봉과 도제봉, 망월봉, 시름교, 파장금까지는 4시간 정도가 걸린다. 위도 산행은 아침 일찍이 도착하면 여유가 있다. 기껏해야 해발 255m라고 여겨 산행을 쉽게 생각했다가는 힘이 들 수도 있겠다 싶은 산이다. 파장금항에 도착하니 위도가 석양에 물들기 시작하여 위도와 식도의 낙조를 감상하면서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
전막리 마을에서 바로 언덕만 넘으면 위도 띠뱃놀이로 유명한 대리마을이 나타난다. 면소재지인 진리에서 치도리를 거쳐 서쪽으로 약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형태가 큰 돼지의 목 형국이라 해서 ‘대저항’이라고 불리어 왔는데, 그 후 대저항이 ‘대장’이라고 불려오다 큰 대(大)자에 마을 리(里)를 붙여 ‘대리’라 했다고 한다. 대리에는 일찍이 많은 어선들로 넘쳐났다. 이곳에 대리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폐교되었다.
마을 안쪽에 보면 전수관이 두 채 있다. 그중 현대식 건물은 2008년 12월에 띠뱃놀이 전수활동 지원을 위해 만들어진 ‘위도띠뱃놀이 다목적 전수관’이다. 170년 전부터 치러진 위도띠뱃놀이(중요무형문화재 82-다호)는 마을의 평안과 어민들이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으로, 대리마을에서 매년 1월초에 열린다. 띠뱃놀이는 만선, 평안, 행복 등을 적은 소원문과 오색 깃발을 매단 띠배를 임금 진상품인 ‘칠산조기’가 많이 잡히는 마을 앞바다에 띄워 보내는 풍어제다.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할 때 띠배를 띄워 보내기 때문에 띠뱃놀이라 불렸고,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인 원당에서 굿을 하기 때문에 원당제라고도 한다. 뱃노래와 술, 춤이 함께 하는 마을의 향토축제로 풍어와 안전을 기원하는 어민들의 신앙심이 담겨 있다. 띠배는 마을 인근에서 자라는 갈대를 길이 4m, 폭 2m로 엮은 모형어선으로 그 안에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어부와 선원들이 탄다. 특히 띠배를 바다 멀리 띄워 보낼 때에는 농악에 맞추어 술배소리, 에옹소리, 가래질소리 등 뱃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신명나는 굿판을 벌인다. 술과 음식도 넘치게 나와 위도 주민들은 매년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위도띠뱃놀이는 위도 주민들과 관광객이 하나되는 화합의 한마당 잔치인 셈이다.
띠뱃놀이는 마당굿, 당산제, 원당굿, 띠배 만들기, 용왕굿, 띠배 띄우기, 대동놀이 순으로 진행되는 바다굿이다. 이후에 대리마을의 주산을 중심으로 동편 용왕밥 던지기, 북편 주산 신령제, 서편 당산제, 우물굿, 주산돌기를 끝낸 다음, 마을 앞 부두에 모여서 신명나게 용왕굿을 한판 벌인다. 용왕굿을 마친 뒤 띠배는 모선과 연결해 서해 먼 바다로 띄워 보낸다. 띠뱃놀이의 절정은 띠배를 바다로 띄워 보내는 것이다.
띠배는 만선을 상징하는 오색기를 달고, 배 안에는 각종 제물과 함께 선원을 상징하는 허수아비와 5방위 제액을 물리치는 짚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이 자리잡는다. 정성껏 차린 음식도 가득 실어서 바다의 용왕님께 바치고 주민의 평안과 무사고, 풍어를 기원하는 소원문을 배안에 넣고 바다에 띄워 보낸다. 띠배는 4척-5척의 어선들의 호위를 받으며 모선인 어선에 끌려서 바다로 나간다. 이때 모선에 탄 주민들은 농악에 맞춰 배치기 소리, 풍장소리, 가래질 소리, 에옹소리 등을 목이 아프도록 소리를 지르며 띠배가 멀리 떠나가기를 기원한다. 드디어 띠배를 떼어놓으면 바닷가에 있던 마을사람들은 모두 서서 합장을 하고 절을 하면서 마을의 모든 액을 띠배가 싣고 멀리 떠나기를 기원한다.
배치기 술배 소리는 다음과 같다.
닻 캐라! 예에~ 노 저어라! 예에~ 돛 달아라! 예에~/ 어기여차 닻 둘러메고 칠산 바다로 돈 실러가자 예~어야~/ 칠산 바다 들어오는 조기 우리 배 바장에 다 떠실었다/ 우리 배 선장 신수 좋아 오만 칠천 냥 벌어서 왔단다.
모선이 바다 가운데에 나가서 띠배를 떼어 놓고 돌아오면 바다에는 어둠이 내리고 띠배도 멀리 사라져가면서 이 행사는 막을 내린다. 공식행사를 다 마친 주민들은 단합과 함께 화합을 다지는 등 밤새도록 여흥을 즐기면서 대동놀이를 한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장영수 위도 띠뱃놀이 보존회장은 “띠뱃놀이는 액을 띠배에 띄워 바다 멀리 보내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전통문화 행사로 관광객과 주민이 어우러져 나눔과 화합의 자리”라고 설명했다. 위도 띠뱃놀이는 지난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 예술경연대회에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치도리마을은 꿩 모양을 하고 있기에 치도리(雉島里)라 했다. 치도리는 진리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곳으로 생업 역시 농업 위주였으나 예전에는 칠산어장의 중심지로 파시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위도의 중심 포구가 치도리에서 현재의 파장금으로 옮겨갔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치도리는 물이 빠지면 갯벌이 그대로 드러나 항구로서 기능을 잃었기 때문이다. 풍선은 수심이 얕은 모래밭, 갯벌, 자갈밭 등 아무 데나 올려놓아도 무방하다. 느린 풍선이 1970년대를 기점으로 기계배로 바뀌면서 항구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 때나 배를 가지고 신속하게 바다로 나가서 만선의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치도리는 물이 빠지면 간만의 차이가 심하여 거대한 갯벌이 드러나 어선들이 거기에 걸려 버린다.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치도는 마침내 동생인 파장금에 슬그머니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고슴도치의 입에 해당하는 파장금 마을은 북서쪽에 정금도, 북쪽에 식도
치도리에서 1km 떨어진 곳에 큰딴치도와 작은딴치도라는 무인도가 있다. 예전에는 사람이 살았었으나 지금은 무인도이다. 딴치도의 ‘딴’이란 순수 우리말로 ‘조금 떨어진’ ‘조금 떨어져 있는’이란 뜻이다. 멀리로는 쌍둥이 형제 전설이 깃든 형제섬이 바라다 보인다. 여기서 굴 등 해산물이 많이 나온다.
위도의 치도리마을 앞에는 딴치도라는 무인도가 있다. 물이 빠지는 썰물 때면 바닷길이 열려 걸어서 그 섬에 들어갈 수 있다. 위도에는 위령비(탑)가 2기가 있는데 딴치도에 있는 ‘조난어업자조령기념비’와 진리에 있는 ‘서해훼리호참사위령탑’이 그것이다.
이 딴치도(외치도, 外雉島)의 어선 조난사고는 1931년 한 해 동안 세 차례에 걸친 풍랑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돛배 500여 척과 어부 600여 명이 치도 앞바다에서 수장되어 버린 해난사고이다. 1931년 4월, 8월, 12월에 연이은 세 번의 대형 풍랑 사고였다. 일본의 전쟁준비에 필요한 어획량 확보를 위한 무리한 조업 독려로 일어난 사고였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지금만 같아도 사고가 나면 철저한 조사와 함께 대책이 수립되는 것이 상식인데, 같은 장소에서 한 해에 세 번의 대형 사고는 심한 편이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조령기념비(弔靈記念碑)가 그때를 말해주는데 내용은 이렇다.
‘본 비는 서기 1931년 위도면 치도리 앞 칠산어장에서 조업 중 3회에 걸친 강한 태풍으로 인하여 500여 척 어선이 전복되어 익사한 어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932년 3월 전라남도 수산당국이 건립함’이라고 쓰였다. 비석은 오랜 풍상을 겪는 동안 제단에 금이 가는 등 붕괴위기에 놓인 것을 1997년 5월 부안군의 재정지원과 치도리 주민들의 노력으로 전면 보수했다. 위도 사람들은 해마다 5월이 오면 그분들의 혼령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두 번째로는 1958년 음력 3월 15일 침몰한 위도-곰소간 여객선 사고이다. 서해에서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풍랑이 높았지만 평소처럼 위도를 향하여 출발한 낡은 목선인 통도호는 임수도와 격포 근해에서 기관고장으로 남쪽으로 표류하다 풍랑을 따라 마침내 차가운 바다로 침몰해 버렸다.
위도주민 61명 중 58명이 실종되고 세 명만 생존했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신을 찾지 못하고 바다에 수장되는 아픔을 겪었다. 부모 형제를 바다에서 잃어버린 당사자들은 슬픔과 한숨으로 지내다가 매년 음력 3월 16일이 되면 어김없이 제사를 지냈다.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위도 해역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할 또 하나의 대형사고 발생했다. 바로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훼리호침몰사고’이다.
이 무슨 또 청천벽력 같은 사고인가? 국내의 해상사건으로는 1953년 1월 9일 부산 다대포 앞 창경호 침몰사건(330명 사망)과 1970년 부산 제주간 남영호 침몰사건(323명 사망)에, 2014년 4월 16일 진도군 맹골수도에서 세월호 침몰사건(304명 사망 실종 9명)에 이어 네 번째 큰 해난사고이다. 서해훼리호 승선정원은 221명인데 그 날 배에 승선한 인원은 무려 362명으로 정원보다 141명을 초과했다. 그중에서 생존자는 70명이었다. 그때 위도 주민은 61명이 승선하여 3명이 생존하고 58명이 사망한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모진 슬픔을 당한 통한의 역사의 현장이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직전까지만 해도 위도는 전국 각지에서 온 낚시꾼들로 붐볐고, 고기잡이도 활발해 살 만한 섬이었다. 그러나 사고 이후 위도는 한동안 ‘비극의 기억을 안고 사는 섬’으로 추락했다. 22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위도 사람들에게 아직도 사고의 상처가 깊다. 파장금항에서 진리 쪽으로 향하는 해안 언덕에는 서해훼리호 위령탑이 상처처럼 서있다. 탑에는 당시 사고로 희생된 292명의 이름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광활한 서해를 끼고 살다보니 서해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막아내다가 여러 참사를 당한 것이다. 간혹 이 같은 재해도 있지만, 그래도 바다가 풍요로움을 주기도 한다. 고운 모래와 기암괴석, 울창한 숲, 빼어난 풍광이 위도의 여행자를 감탄하게 만든다. 아치형인 위도해수욕장, 미영금, 논금 등 아름다운 해변이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연안을 따라서 자리잡은 마을 주민들의 삶의 모습이 정답기만 하다. 하지만 위도 주민들의 마음속에 슬픔의 고뇌가 서려 있다는 사실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다.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꿈꾸었던 ‘율도국’ 위도, 격포항에서 위도 파장금 항구를 운행하는 카페리 선실에는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이 위도임을 홍보하고 있다. 위도는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꿈꾸었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2003년에는 위도에서 방폐장(放廢場)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과거사와 함께 현대사에서도 시련이 참 많았던 섬이다.
이제 이곳이 꿈과 낭만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으로 거듭나서 사시사철 관광객이 넘치기를 바란다. 빼어난 주변 경관과 기암괴석을 병풍 삼아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위도이다. 등산을 하면서 하루를 이곳에서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바다낚시, 생태관광, 갯벌체험을 개발하고 수산자원을 조성하여 허균의 율도국과 같은 이상향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보면서 다른 섬을 찾아 떠난다.
위도는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명소가 많다. 일찍이 위도사람들은 위도의 절경을 위도팔경으로 읊고 있는데 아마도 위도면 면소재지인 진리마을의 선비들이 모여서 이를 선정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① 내원모종(內院暮鐘) - 내원암의 저녁 종소리.
② 정금취연(井金炊煙) - 정금마을의 밥 짓는 연기.
③ 식도어가(食島漁歌) - 식도에서 들려오는 어부들의 노랫소리.
④ 망봉제월(望峰霽月) - 망월봉에 떠오르는 달.
⑤ 봉산출운(鳳山出雲) - 진리 뒷산에 떠오르는 구름.
⑥ 선소귀범(船所歸帆) - 벌금 앞바다에 귀항하는 돛단배.
⑦ 왕등낙조(旺嶝落照) - 왕등도의 낙조.
⑧ 용연창조(龍淵漲潮) - 진리마을 포구에 가득찬 바닷물.
위도 띠뱃놀이는 당젯봉의 원당제와 바닷가의 용왕제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띠뱃놀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용왕제 후에 마지막으로 띠배를 바다에 띄워 보내는 데에서 유래한다. 이는 산에서의 당굿과 바닷가에서의 용왕굿이 주를 이루는 풍어제이며, 당굿은 배에서 1년 동안 모시게 될 뱃신의 서낭을 내림받고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이다.
이 띠뱃놀이의 전래지는 위도면 대리마을이다. 위도 띠뱃놀이의 전수자로는 예능보유자 이복동 씨와 조금례 씨가 있다. 한편 위도 띠뱃놀이는 조선 중기 때부터 정월 초사흗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빌며 마을의 모든 재액을 바다에 띄워 보내는 서남권 해안마을의 토속신앙 행사로 보존의 가치가 인정되어 지난 1985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 수군의 요지였고, 조선시대에는 유배지이기도 했던 위도에는 섬치고는 드물게 옛 관아가 지금도 남아 있다. 1682년(숙종 8)에 지어졌으며 첨사라는 종3품의 무관을 두어 통치했다고 한다.
부안군 위도면 벌금리 주변의 산들이 조심스럽게 감싸고 있는 아담한 모래사장이 1969년에 개장한 위도해수욕장이다. 1km에 달하는 고운 모래사장과 멀리 보이는 왕등도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아치형의 해수욕장은 마치 소쿠리 안처럼 아늑한 느낌을 준다.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깊지 않아 여름철 가족 단위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이다. 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일몰 풍경도 일품이다. 특히 원양 전망이 좋아 모래사장에 앉아 있으면 왕등도의 원경이 그림과 같이 펼쳐진다.
위도의 유일한 사찰인 내원암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찰이라기보다는 어느 수도승이 머물렀을 법한 작은 암자인 이곳은 법당 옆 약수의 물맛이 일품이고 절 주변에는 기관지에 좋다는 인동초가 분위기를 더욱 고즈넉하게 만든다. 아들 낳기를 기원했다는 소지부인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며 절터가 여인의 자궁을 닮아 이곳에서 기원하면 득남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막리에서 서쪽 해안가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넓은 모래사장이 있는 조용한 미영금해변이 보인다. 멋들어진 해안절벽과 바위 사이에 조심스럽게 들어앉아 있는 이곳은 섬의 정취를 느끼며 조용히 휴가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미영금해변 뒤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거나 인근 갯바위에서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다.
수려한 해안선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총 12km 길이의 해안일주도로가 나 있어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드라이브를 즐길 수도 있다. 승용차로 시종 푸른 바다를 낀 해안일주도로를 따라 달리는 드라이브 맛이 환상적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산이다. 여느 섬과 달리 병풍처럼 둘러싼 산들로 분지를 이룬다. 서해안 최대의 김 양식장을 자랑하듯이 해안절벽 너머 보이는 것은 온통 ‘해태’ 재배지다.
멀리 법성포
위도는 전설이 많아서 전설의 땅이라고도 불린다. 그러한 위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설은 단연 홍길동의 ‘율도국’과 효녀 심청이의 ‘인당수’를 들 수 있다.
우리는 효녀 심청전의 본고장을 백령도
허균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 위도는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이상세계를 꿈꾸었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의 섬이다. 그는 봉건사회의 변화를 열망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낭만주의자로 평생을 살았다. 그는 ‘홍길동전’을 통해서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은 신분의 고하가 없는 사회, 탐관오리가 없는 율도국을 그려냈는데 홍길동의 신비한 모험과 활약상은 통쾌하고 재미있는 우리 고전 문학의 백미이다. 위도가 율도국이란 전설은 구전뿐만 아니라 수많은 자료가 이를 증명해 주기 때문이다. 위도를 배경으로 집필한 허균의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자연 환경의 축복을 많이 받은 위도 사람들이 부럽고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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