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37/170830]1박2일 "꽃보다 회갑여행"
초등학교(우리는 아무래도 국민학교라고 해야 어울린다. 그것도 국민핵교라 해야 마땅하리) 졸업식 노래를 아시리라. 거의 반 세기만에 조용히 한번 불러본다. 1970년 2월 며칠이었을까? 운동장에 400여명이 모여 졸업식이 있었고, 그날 6학년 50여명이 졸업을 했다. 졸업식 노래는 별 것도 아닌데, 부를 때 어찌 그리 눈물이 났던지. 생각해 보면 가난한 시골동네(전북 임실하고도 봉천)인지라 상급학교(중학교)를 가는 친구도, 못가는 친구도 있고, 헤어지는 것이 슬퍼서 못내 목이 메었으리라. 그래서 더욱 그랬으리라.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그렇다.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노랫말처럼 2017년 8월 28일 12시, 전남 여수 돌산대교 옆 ‘궁전횟집’에서 50여명 중 19명이 졸업한지 47년만에 다시 만났다(여자동창 2명은 밤 10시 펜션에서 합류, 모두 21명이 모였다). 물론 대부분 1년에 한두 번씩 정기 동창모임에서 어울린 친구들이었으나, 서울 등지에서도 합류, 실제로 처음 만난 친구들도 몇 있었다. 전북팀 10여명은 전주에서 대절한 관광버스로, 서울팀은 용산역에서 KTX로, 여수와 광양에 사는 친구는 승용차로 합류했다. 전북지역에 터잡은 동창회에서 기획하여 성사시킨, 이른바 ‘환갑기념 여행’. 참말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반갑다” “오랜만이다” “살아있으니 만나는구나” 악수 행진이 이어지고, 남녀를 불문하고 서로 껴안고 포옹하기에 바빴다. 어느 친구는 실제로 이름과 매치가 되지 않아 얼굴을 들여다보며 확인하기도 했으니, 세월이 솔차니 흐른 것은 틀림이 없었다. 10대 초반(13∼15세)이었는데, 환갑이 되어 만났으니 그럴만도 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이날 행사에 오지 않은 친구들을 원망했다. “이런 날은 아무리 바빠도 와야 하는 것 아닌가. 나쁜 쉐끼”
자, 우리의 국민핵교를 소개하자. 지금도 생각나는 교가(校歌)의 한 구절은 “여섯 마을 300호 세운 전당에…”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전북 임실군 둔남면(현재는 오수면)의 여섯 마을(봉산, 냉천, 종동, 평당, 대판, 오촌) 300여호가 힘을 모아 ‘봉천들’ 가운데에 세운 배움의 전당이 ‘봉천국민핵교’였던 것이다. 우리는 21회. 지금은 폐교된 지 오래, 한동안 공사현장 장비 보관소로 쓰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빈터로 묵어버려 우리를 씁쓸하게 하고 있다. 당시 전교생이 400여명이었고, 두 개반인 학년도 있었다. ‘봉천들’은 좌우로 봉화산과 수리봉이 우뚝 선 분지였다. 성수천에서 내려오는 오수천이 흐르고, 한 가운데에는 이리(솜리)∼여수의 전라선(全羅線)이 지나갔다. 냇물과 철로(鐵路)는 우리의 놀이터였다. 못을 갈아 칼을 만들고, 괜히 기차승객들에게 ‘감자’를 멕였다.
전주서 출발한 대절버스는 엔진오일이 바닥나 차량을 바꾸는 등 해프닝이 있었다한다. 그래도 간만에 꾀복쟁이-여기에서 꾀는 옷을 뜻하는 사투리인 듯. 냇가에서 홀라당 빤쓰까지 벗고 헤엄(水泳)을 치거나 죽마(竹馬.대나무막대기)를 갖고 놀던 어릴 적 친구들-들을 만날 생각에 소풍나온 기분이어서 싫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서울팀도 마찬가지. 수원에서 새벽부터 온 여자친구는 마음이 설레어서 간밤을 거의 샜다고 한다. 남자 13명, 여자 8명. 일행은 전복죽 등으로 식사 후 먼저 유람선 ‘미남크루즈’를 타기로 했다. 1시간 40여분, 오동도와 돌산을 도는, 큰 배이다. 말로만 듣던 크루즈다. 1층 무대에서는 뽕짝 트로트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야간이나 주말엔 러시아공연단이 쇼를 한다고 한다. 4층 선상에서 드넓은 남해를 구경하다 모두 1층무대에 몰렸다. 갈매기도 간만에 봤다. 수평선을 바라보니 눈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무대를 1시간 5만원으로 쇼부치고 우리가 독차지했다. 여자친구들이 유감없이 노래솜씨를 선보인다. 쌍쌍이 블루스를 치며, 우리는 어느새 예전에 우리가 약간씩 경멸했던 유원지와 관광버스 속의 춤꾼들이 되어 대낮부터 개다리춤이면 어떻고, 막춤이면 어떠랴. 마다하지 않는다. 어디 수줍어 빼고말고, 내외(內外)할 일이 있겠는가. 김제에서 ‘7순기념여행’을 온 패들과 마치 친구처럼 어울리기도 한다. 이제 같이 늙어가는 것이니 같이 놀아도 좋다는 속셈이다. 모두 다 어찌 그리 노래들을 잘 부르는지 모를 일이다. 뻔한 레파토리, 소양강처녀, 비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 고장난 시계 등등 열창을 한다. 회장은 사진찍어 즉석에서 카톡방에 배달하기 바쁘다. 순식간에 1시간여가 흘렀다. 음치인 친구들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몸이 안좋은 친구는 VIP실에서 눈을 붙이기도. 승선하면서 크루즈를 뒤로 두고 단체기념사진을 찍을 때였다. 선장이 셔터를 막 누르려 하는데, 일부가 자기들끼리 사진을 찍느라 늑장이다. 빨리 오라는 뜻으로 한 친구의 고함소리를 들어보라. “야이-, 니미들아” 아니, ‘니미들아’라니? 이런 막말의 욕설을 하다니? 그 욕 한마디에 뒤집어진다.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우리식의 ‘희한한 욕’이지 않은가.
다음은 해상케이블카를 타는 거다. 굴수협(水協)에 다니는 친구가 "여수(麗水)는 엑스포(EXPO)로 망하고 케이블카와 밤바다축제로 일어섰다"고 한다. 인기 관광상품인 모양이다. 케이블카는 야경(夜景)이 볼만하다는데 별 수가 없다. 반기문 유엔총장이 머물렀다는 MVL호텔은 꼭 배의 돛형상인데, 스위트룸이 300만원이라나.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20여분 타는 케이블카는 제법 탈만 하다. 통영 미륵산의 케이블카 생각도 났다. 전망대에서 거북산대교를 뒤에 놓고 기념사진을 찍어대기 바빴다. 하산 후 동백섬으로 유명한 ‘오동도’까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전동차를 탔다. 모두 동심(童心)이 된 듯 재재거린다. 예전에야 섬이었지만, 연륙교(連陸橋) 놓인 지는 오래. 동백꽃을 보지 못해도 음악분수 앞에서 또 찰칵찰칵. 입구 큰 돌에 새겨진 이충무공이 말했다는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글귀의 뜻을 새겨본다.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전라도)의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리라. 친구들은 삼삼오오 짝을 이뤄 오동도를 걸어나오며 이런저런 수다 떨기에 바쁘다. 낮술에 취한 친구들은 취기(醉氣)가 도도하다. 한 친구는 취미이자 특기인 ‘갈치낚시’에 코를 벌겋게 데었다던가. 어느 때에는 100여마리를 넘게 잡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10마리도 잡지 못한다는데, 시시콜콜 그 세계에 대한 설명도 재미있다.
이제 저녁식사를 하려 점심때 그 식당으로 향했다. 1인당 3만5000원. 모듬회정식이다. 다섯 테이블. 먼저 회장이 이 여행의 취지를 설명한 후 일제히 건배를 한다. 첫 건배사는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한 친구의 건배사도 재밌다. 먼저 ‘천만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말?’하면 일제히 ‘사랑해!’로 답해야 한다.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와 감회를 한마디씩 했다. 공통된 주제는 ‘건강 관리’이다. 남자친구 12명 중 6명이 비주류(非酒類)이다. 오마이갓! 우리가 언제 이렇게 되었을까? 목디스크, 대장암, 간암, 갑상선암, 전립선암, 당뇨, 고혈압… 가지가지다. 우리 부모들처럼 이제껏 오직 가정과 자식들을 위하여 헌신한 만큼,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자고 이구동성. 자식도, 마눌님도 결국은 필요없다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한 친구는 노후생활의 포부를 밝히기도 하고, 한 친구는 공무원생활 30년에 대한 회고를 한다. 모두 할 말이 얼마나 많으랴. 웃음은 계속 그칠 줄 모른다. 여자친구가 걸쭉한 농담과 함께 소줏병을 가슴에 넣고 한 잔씩 따라주는 통에 난리가 났다. 웃느라고 숨이 꼴깍 넘어갈 판이다. 이런 장면을 어디에서 보랴. 남자친구들에게 선을 보이는, 이른바 ‘유두주(乳頭酒)’이다. 재미있으라고 오버를 하는 그 친구가 고맙다. 값에 비하여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을 ‘가성비’라고 한다던가. 현지 친구는 모듬회정식이 가성비로는 형편없다고 했지만, 맛의 품질을 따지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다. 이렇게 모처럼 마음 터놓고 저녁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것만이 즐거울 뿐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 어찌 가족에만 해당될까? 초딩시절 고향친구들과 이렇게 웃음꽃이 피는 것을. 이런 오진 자리를 만들어준 회장과 남녀총무에게 고맙다며 일제히 박수를 보낸다.
이제 시내 한바퀴 버스로 순례를 하다. 이순신대교의 야경도 볼만하다는데, 평일인 관계로 푹죽놀이를 하지 않아 좀 아쉽다. 밤바다 축제를 하면 온통 장관이라는데, 숙소인 ‘새싹펜션’으로 향할 수 밖에. 임실에서 뒤늦게 승용차로 여성 두 명 도착. 한 친구는 진짜 귀빠진 날이란다. 이 야밤에 어디에서 생일케이크를 구할 것인가? 회장단의 아이디어를 보라. 버스속에서 낫낫하게 먹으라고 만들어온 비닐로 싼 손가락만한 떡들을 조각조각 쌓은 위에다 영어로 써진 ‘HAPPY BIRTHDAY' 사인판을 주인집에서 구했단다. 양초를 밝힐 수는 없지만 궁여지책으로는 최고. 생일축가를 부른다. “해피 버스데이 투 유” 세리머니를 하니 정말 ’아름다운 밤‘이 되었다. 이윽고 8명으로 가장 많이 참가한 한 동네친구들은 즉석에서 ’동네향우회‘를 하면서 이웃동네 동무들을 하나씩 초청하여 노래잔치를 벌였다. 버스 속에서 ’사철가‘를 불러제친 회장의 특기는 들을만한 정도가 아니라 아무도 흉내낼 수 없다. 춘향가의 ’사랑가‘를 부르고, 흥보가의 박타는 장면도 부르는데, 이미 동호회에서 십수년 갈고 닦은 솜씨란다. ’전국노래자랑‘애서 예심을 너끈히 통고한 한 친구는 가수 뺨을 친다. 어떻게 나훈아의 ’분교‘라는 신곡까지 배워 저렇게 잘 부르는 걸까. 노래솜씨도 타고나는 걸까. 한 친구는 자기 아니면 어디에서도 이런 노래는 못들을 거라며 정태춘과 범능스님의 노래를 돼지 멱따는 소리로 불러 일행의 혼을 빼놓았다. 회장는 일일이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즉석에서 카톡방 배포에도 신경을 쓴다. 12시, 그래도 일정이 제법 ’대근했든지‘ 잠을 청하는데, 1층 여자방에서 물달팽이와 바퀴벌레가 나왔다하여 주인집에 강력한 항의를 했다. 이런저런 얘기에 2시 반까지 수다를 떠는 친구들도 있었다. 한 친구는 영업문제로 그 밤에 급히 광주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 밤의 수다 몇 토막을 글로 남기자.
△들판 가운데 사는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인형처럼 예뻤다한다. 입대를 앞둔 한 친구는(20살은 되었으리라), 첫사랑이었는지 못내 아쉬워 그 친구를 느닷없이 껴안았다던가. 그런데 또한 라이벌은 아예 입을 맞추고 도망을 했다던가. 그런데 정작 그 여인의 첫사랑 상대는 따로 있었다는 최초 고백을 들었다. 이제 와 향일암 오르면서 손 좀 잡아주리로서니 무슨 흠이랴.
△한 친구는 한 동네 '인척관계'의 여자동창이 첫사랑이었다고 고백했다. 하여 좋아한다는 얘기도 못하고 청소년시절 내내 끙끙거리다 포기했다고 한다. 당사자가 옆에 있었는데 눈치챘을까? 한 친구는 고등학교 다닐 때 여자동창이 17살에 시집을 간다고 하여 참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때는 식구 입 하나 더는 것이 큰 문제였던 보릿고개 시절이었다. 덕분에 40대초에 할머니가 되었다던가.
△별명(別名)이야기이다. 나를 부르는 호칭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초딩때의 별명 “알록이”이다. “알록아”라고 부르면 보나마나 꾀복쟁이 중의 한 명이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날도 여기저기서 별명을 불러대는데, 내내 행복했다(동네 어른이 예쁘장하게 생겼다하여 '알록달록'이라는 별명을 지었다). 하여 친구들의 별명 순례가 시작됐다. 한 친구의 별명은 ‘딸랭이’였다. 2학년때인가 전주에서 전학왔는데, 선망의 가죽가방을 갖고 다녔다. 걸어다닐 때마다 그속에 든 필통이나 도시락(벤또) 소리가 딸랑딸랑 나서 딸랭이였다. 당시 그런 가방이 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책보’를 아시리라. 남자들은 'X'로 어깨에 걸쳐 메고, 여자들은 허리에 매고 다녔다. 그 친구는 또 '뚜부'(두부의 사투리)라는 별명도 있었다. ‘곤실랑’이나 ‘곤두’라는 별명은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고, ‘꼬추자지’는 징채만한 성기의 소유자 별명이었다(뱀에 물렸는데, 치료를 안해서 그렇게 되었다던가). 여자친구의 별명 중 ‘해보’가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보조개가 있는데다 툭하면 잘 웃어 그렇게 놀렸던 듯하다. '떠버리'도 있었는데, 그날도 유독 떠버리였다. 그것 참, 사람 쉽게 안변한다.
△은사들의 이야기. 한 친구가 고백하는데 3학년 담임이 옛날 이야기를 그렇게 잘 해주었다는 것을 기억해내니, 당시 급장이었던, 현재의 회장이 ‘이우상’라고 이름을 댔으며, 6학년 담임선생님 이름을 정확히 ‘ 양복규’라고 기억해 박수를 받았다(이름으로 별명이 '복지깨'였다). 1학년 담임을 10년 넘게 했던 여선생님 이름은 ‘지연자’였다(나의 경우는 큰형부터 막내동생까지 7명의 담임이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신다며 근황을 아는 친구도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친구들을 추억하는 얘기들도 많았다. 미망인과 아이들 소식도 처음 들었다. 벌써 5명이 죽었다니? 우리는 이제 막 ‘한 살’이 되었는데, 앞으로 스무 살까지 살 수 있을까? 서른 살까지 살까? 오래 사는 게 장땡이 아니라 건강하게 사는 게 장땡인 것을. ‘구구팔팔이삼사(9988234)’. 99살(이것이 백수白壽다)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시나브로 앓다 죽는 게 최고라는 뜻. 그러자. 우리 꼭 그렇게 살자. 한목소리다.
△복숭아농장을 경영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6개 마을중 5개마을에 정착한 친구들은 2명이 동네이장을 20년 가까이 했다고 한다. 박스로 1만개를 넘게 수확하여 가락시장에 내어도 이것저것 제하면 연봉으로 5천만원 이쪽저쪽이라고 하며 서로 정보교환에 바빴다. 정말 농사짓는 일은 골을 빼먹는 일일 것이다. 농촌에 뿌리를 깊게 박고 사는 친구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다.
아침에 주인아주머니가 졸지에 아파 입원하는 바람에 그리 됐다며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다. 아침밥조차 해줄 수 없다하여 긴급하게 수소문한 게 ’황태해장국‘. 속이 다 풀린다. 그 틈을 비집고 동백오일을 파는 보따리아줌마의 '공습'이 있었고, 회장단은 고맙게도 머릿수대로 2개씩 사서 안겼다. 이윽고 우리 일행은 금오산 향일암(向日庵)을 향했다. 향일암은 화엄사 말사로서 우리나라 4대 관음기도 도량(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중 하나이다. 2009년 대웅전이 화재로 불타 중창했다. 새해 첫날 가장 먼저 해가 떠오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르는 거야 중턱까지 차로 가니 30여분이면 충분한데, 반절은 포기를 하고 아래에서 동동주를 마신다. 관음전에서 남해를 조망한 후 원통보전에서 108배 대신 18배를 한 친구도 있다. 한 친구는 손편지를 써 우체통에 1천원과 함께 넣는다. 1주일 후이면 아내의 손에 도착하리라. 석문들 틈의 바위와 관음전 뒤편 바위에 동전을 붙이며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한다. 유구필을 감응도교(有求必應 感應道交).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는 부처님과 중생의 교감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점심은 간장게장정식. 한 친구가 카드로 한몫에 긁는다. 원래는 순천 정원박람회를 가기로 했는데, 햇볕이 너무 따가워 걸을 일이 심란하다. 하여 엑스포 수족관으로 대신하기로 하다. 돌고래 등 볼만 했으나 입장료 2만 얼마는 상당히 비싼 편이다. 전지현이 열연한 ’푸른 바다의 전설‘이 생각났다. 걸음마를 시작한 손자와 오면 딱일 곳이다. 오후 3시반. 1박2일의 여수여행은 막을 내린다. 서울로, 전주로, 현지에 머무르는 친구 등 악수를 하며 못내 아쉬움을 표하다. “잘 가라” “또 만나자” “건강하자” 약속은 일단 70살 때 ’고희여행‘으로 귀착됐다. 앞으로 9년 남았다. 우리 모두 건강하게 잘 살아 그때 다 만날 수 있으리라. 친구들아 잘 가라!
혹시 우리가 배웠던 교실 칠판에 아직까지 지우지 않은 이런 낙서(落書)는 없을까? 흐흐흐. 고은의 시이다.
여름방학 초등학교 교실들 조용하다
한 교실에는 7츰계 ‘파’음이
죽은 풍금이 있다
그 교실에는 42년 전에 걸어 놓은
태극기 액자가 걸려 있다
또 그 교실에는
그 시절
대담한 낙서가 있다
김옥자의 유방이 제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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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친구들이 머리를 굴리고 기억을 더듬으며 작성한, 같이 다녔던 동창친구들의 명단을 보자. 베이비부머 세대답게 한 반에 60명이 넘었다.
냉천(16명): 김종두 김종서 조계영 정대신 하재기 최영록(5학년 2학기때 전주로 바둑 유학을 떠남) 조동연 노재순 하조남 하영주 하금자 정귀자 조유순 하은숙 하원자 조귀자(고인)
봉산(12명): 한제욱 공흥규 장완철 한훈희 서인숙 장현옥 최덕순 김용일 허경욱(고인) 이주현(고인) 신재경(고인) 최현석(2학년때 전학. 교장 최준기의 아들)
종동(10명): 문진두 문병연 조운수 윤균호 강신호(신석) 문봉두(용두) 심병재 문종희 오순자 문옥주
오촌(14명): 김일곤 강정희 박기선 김영두 박지순 김기순 김만욱 김종미 김종니 김양옥 김형주 박혜숙(3학년때 전주로 전학) 박금남 김기곤(고인)
평당(8명): 신강호 김한식 김운한 김상운 김형대 김형찬(고인) 김형두(고인) 강봉순
대판(5명): 김선균 하분임 최영자 성정남 신봉순
소풍날 참석한 학생(21명): 냉천 8명, 봉산 3명, 종동 5명, 오천 2명, 평당 1명, 대판 2명
뒤에서 말도 안듣고 떠든 학생(2명), 그들은 그때 그 시절에도 그랬다. 그것 참. 여전히 '뺑돌뺑돌'한 것을 보고 모두 뒤에서 한 마디씩 했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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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봉을 2명이 냈고, 모두 십시일반, 500만원이 모였다한다. 지출 461만7500원. 그래도 조금은 ‘남는 장사’를 하여 다행이다. 한 친구는 타월을, 한 친구는 화장품을 협찬했다. 모두 고마운 일이다. 친구들을 위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오직 고마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회장단(회장 한제욱 총무 공흥규․박지순)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준 데 대해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자. 봉천국민학교 21회 회갑여행 "1박2일"을 위하여, 다같이 건배!
첫댓글 우천은 타고난 작가 선생님.그 모임의 흥겨움을 너무도 잘 표현했구려.'청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