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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은 혜화동이고 1942년 10월19일이다.
이날 무슨 급한 물품을 구입하실 일이 있으셨는지 전차를 타고 동대문시장을 가셨는데
우연히 만난 아버지 사촌누님이 "아니~ 애가 곧 나오게 생겼는데, 외출이라니 잔말 말고 빨리 집으로 가!"
집으로 돌아 오시자마자 산기를 느끼셔 삼선교 산파를 불러오라 사람을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혼자서 낳셨단다.
3살짜리 작은형은 내가 태어나는 과정을 열심히 보고, 산파를 데리고 온 큰형은 나중에 사람들 보고
"우리 엄마는 애도 낳고 염통도 낳어요." 자랑을 했단다.
내가 태어난 시각은 오후 7시 조금 전이라 하셨다.
5촌아주머니 아니였으면 동대문 시장바닥에서 아니면 전차간에서 태어낳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찌되었던 가을에 말띠로 태어낳으니 먹을 것 일생 동안 걱정 없이 살거라 했다.
사실 태어 날 당시 아버님은 한국인으론 제법 높은 직위로 조선총독부 근무하셨고 집안 살림 역시 대대로
유복하여 부러움 없이 지냈고 세살 때 해방이 된 후엔 미군정청 그리고 정부 수립 후엔 상공부 광산과장으로
계시다가 관료 보다는 학자의 길을 택하시고 서울대 공대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아버님 7살 때 서방에서 한문을 배우시고 신나게 친구들과 놀고 집으로 들어 오니 집안의 어르신들이 많이
모이시고 아버님을 신식교육을 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냥 서당으로 보낼까를 의논을 하신 후 앞으론 신학문이
주를 이를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시곤 처녀들 처럼 머리를 뒤로 길게 따서 기른 댕기머리를 깍고 까까머리로
교동국민학교에 임학을 시키셨단다.
교동국민, 제일고보를 거처 고려대에 응시 하셨으나 낙방을 하셨단다.
이 사실이 너무나 나에겐 충격적이라 여줘보니 주저 주저하시다가
낙방한 이유는 수험시간에 들어 가질 못하셨단다.
일생 동안 그러하시듯 항상 화장실에 가시면 삼사십분을 계신다.
수험시간 전에 화장실 가셨다가 늦으셨다고...
대신 연희전문(당시 2년제) 數物科를 나오시고 京都帝國大 採廣科를 다니셨다.
이미 연희대에서 수학을 2년간 배우셨기에 수학에 남다른 면모를 보이셨고 학기말 시험 때는 예상문제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돈 받고 파셨다고 한다.
그 예상문제에서 많이 출제가 되어 좋은 호응을 받았는데 한번은 예상문제가
나왔지만 문제를 아버님이 푼 답이 틀려 예상지를 산 친구들이 모두 틀려서 받은 돈을 돌려 준적도 있으셨다.
한번은 수학교수가 개인적으로 불러서 가니
"홍군. 이번 시험 자네 점수는 백점이다. 허나 백점을 줄 수가 없다. 내가 교편생활 40년이고 다음 달 은퇴를 한다.
여태 40년 동안 백점 맞은 학생이 없었다. 내 자존심 때문에 100점을 못 준다.(더욱 한국인이기에?)
95점을 주지만 넌 백점이니 이해해다고."
"그렇게 하세요."하고 돌아 나오시면서 내가 이 깐깐한 日人교수를 이겼다고 쾌제를 부르셨단다.
아버님의 수학기질을 이어 받았는지 아우 병익군도 서울대공대 입학시험에서 수학과목 일등으로 들어 갔다.
서울대 입학시험지 체점을 할 때 맨위 수험생 이름을 못 보게 철을 해 놓았는데 한 교수가 체점을 하다 보니
모두 답이 맞았는데 맨 마지막 문제( 10점?짜리)에서 문제를 설정하고 푸는 방식이 조금 결여된 상태이고
답은 정확이 나왔단다. 답이 정답이지만 푸는 방식에 문제가 있기에 만점을 못 주고 몇점을 깍어서 주곤 하도
아까워 누군가하고 이름을 보니 홍교수 자제임을 알고 아버님께 너무 아깝다면 알려 주었단다.
후에 동생이 말하기를 마지막 문제를 푸는데 시간이 없어 암산으로 답을 먼저 쓰고 제대로 쓸 시간이 없었단다.
京都帝大 채광과에서 전공을 고등수학을 要하는 地下水개발을 택하셨는데 이미 학부 졸업 당시에 이분야의
세계적인 전공자로 인정을 받으셨기에 일본 정부에서 상공부에 특채로 발탁하신다.
아버님은 일본에 남기가 싫으셔서 날 일본 정부가 쓸려면 조선총독부로 발령을 내라.
장남으로써 연로하신 부친을 섬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총독부 광산기사로 서울에서 근무를 시작하셨다
.
전국의 광산을 다니시며 관장을 하셨는데 특히 광산이 많은 강원도을 많이 다니셔 그곳의 광산기술자들과
가깝게 지내셨고 해방 직후 군정청에서 강원도 도지사서리로 근무하시면서 강원도 광산 근무자 가족들의
일본 귀환을 위해 특별 열차를 배차하여 부산까지 안전하게 보내 한사람도 한국인에게 보복 당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1960년 중반 일본광산학회 연사로 초청 받으시고 나갔을 때 강원도 광산기술자들이 특별히 모시고 20년 전
무사히 귀국함에 감사드렸다고 한다.
아버님은 체육에도 탁월하셨다. 고교시절에는 육상 단거리 200M(제일고보 신기록), 마라톤(경성마라톤 2위입상). 연희전문 때는 권투. 경도제대 때는 조정(구령),야구선수로 활약하셨다.
이 분이 못하시는 것이 있는데 음악이다. 특히 노래를 정말 못 부르신다.
국민학생 때 노래를 시키면 무슨 노래 할까요? 선생님이 무슨 노래 하라 하면 책 들고 가사를 읽으셨단다.
그런 아버지가 어디서 배우셨는지 내가 4살 때 "Oh, My darling Clementine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기분 좋으신 날이면 약주를 거나하게 드시고 들어 오시면서 "메기의 추억"를 몇구절 부르셨다.
몇해 전에 아래와 같은 글을 써 본적이 있다.
음악은 그 음률의 강약 따라서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혹은 미친 듯이 몸을 흔들게 한다.
나에겐 후자는 없었고 주로 조용한 노래를 좋아한다.
나의 아내는 공부할 땐 꼭 라디오를 옆에 두었다며 요즘도 항상 노래를 들으며 지낸다.
임신 했을 때는 물론 갓 태어난 아들 머리 맡에 라디오를 틀어 베토밴,모찰트,브람스,슈벨트 노래가 밤낮으로
감돌았다. 중학생이 된 아들과 우연히 크라식에 대해서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모든 노래가
낯설지 않고 그 음을 자연스럽게 따라간다는 말을 듣고 태교가 중요하구나! 여겼다.
요즘 아이들 노래 속에서 자라지만 나의 부모님은 태교란 단어조차 모르셨을 것이다.
내가 갓난아이일 때 주위에 음악이 없었을 것이고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제 의사를 말로 표현하기 시작한 4살 때(?)쯤 아침 아버님 이불 속에서
팔을 베고 배운 노래가 "나의 사랑 크라맨타인"이었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다."
찾아오는 손님 앞에서 아버님의 명에 따라 기쁨조 노릇을 많이도 했다.
아버님께서 아시는 노래는 딱 두 개였는데 다른 하나는 "메기의 추억"이다.
6남매 중 오로지 나에게만 크라맨타인을 가르처 주셨다.
그 만큼 셋째 아들인 나를 어릴때 편애 하셨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간 후부터 다른 자식들에게 그러하듯이
엄하시고 가까히 가기 조차 무섭게 느껴 지시는 분이었다.
약주를 건하게 드시고 늦게 들어 오시어 자고 있는 내 얼굴에 뽀뽀를 해주시면
그 술냄새와 까칠한 수염 때문에 질색하며 눈을 드면 언제 뽀뽀를 했느냐?하는
식으로 엄한 어버지로 변하신다.
그러니 자연히 집안에서 크라맨타인 노래는 없었젔고 산토끼 같은 동요를 혼자 불렀다.
아버님은 한가하신 날엔 가끔가다 시조를 읊프시었는데 동요에 익숙한 나에겐
신기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청산리 벽계수야~를 한 음절로 부르시면 될것을 청~산~리~~~
길게 뽑으시고 음률도 오르락 내리락 하시는데 웃음이 나지만 아버님의 새로운 면모를 보았다.
또 한복에 두팔을 벌리시고 흥에 맞추워 춤을 추시기도 하셨는데 마지막 춤을 추신것이
집에서 두분의 은혼식때 기생들하고 추셨고 어머님은 웃음을 머금이시고 우리와 구경만 하셨다.
기분이 좋으신 날 약주 한잔 드시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를 몇절만 부르셨다.
끝까지 부르신 적이 없으시다.
평소 노래를 안 부르시던 분이라 쑥스러워서, 아니면 다 모르셨는지 모른다.
늦은 시각 대문에 들어 오시며 "옛날에 금잔디~" 노래가 들리면 온 식구가 속으로
"아~ 아버님 오늘 기분 좋으시구나 ." 했고 특히 어머님 표정이 밝아지셨다.
연세가 90을 앞 두시고 심근경색으로 쓸어지시어 6개월간 병원에 누워만 계실때
큰형님내외분,누이,셋째 아들인 나 이렇게 아버님 손을 잡고
"엣날에 금잔디~"를 부르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모두들 아버님이 항상 그리하셨듯이
끝까지 부르지를 못했다. 우린 모두 끝까지 부를 줄 아는데도...
아버님은 들으시는지 안들리는지 별 반응이 없으셨지만
다음 날에도 다 부르지도 못하면서 또 불려 드렸다.
난 지금도 이 노래 끝까지 부르지를 못한다.
이 노래를 부를때면 무섭던 아버지가 어찌 그리도 따스한 아버지로 변하여
내 가슴을 어르만저 주시는지...
부모님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넓고 넓은 바닷가에~"는 부를 엄두도 내지를 못했다.
끝 구절에 "늙은 애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가 비롯 노래가사지만
내 어찌 내 입으로 그 대목을 부르겠는가?
내가 두 아들을 키우면서 그 녀석들 4살이 되었을때 아빠가 할아버지한데 배운 노래라며
"넓고 넓은 바닷가~"를 내가 그랬드시 팔베개로 가슴 팍에 눕히고 가르처 주웠다.
이 녀석들 처음 배운 노래가 아빠 와 똑 같은 상황 똑 같은 노래를 배운 것이다.
그런데 아들 녀석들이 자기 아들한데 이 노래를 가르치지를 안아 내가 가르처 주웠다.
둘째아들에서 난 손자(5살)가 청승 맞게도 아주 잘 부른다.
발음이 조금 이상하게 나오는 단어도 있지만 음정 하나 틀리지 않고 자기 보다 두살 많은
누이의 피아노의 반주에 맞추워 혹은 혼자서 흥얼거리며
이 할아버지를 그 옛날 아버님 팔을 베고 어리광 부리던 시절로 인도 해준다.
이렇게 대물림 해주는 노래가 나에게 있다는것이 또 다른 기쁨을 주니 사는 맛이 이렇구나.
오른쪽 부터 : 누나(혜정), 아우(병익), 큰형(병흠), 아버님 그리고 나.
1980년 X-Mas. 큰집에서 모두 자고 아침에 내양말 한짝이 없어젔다. 온 식구가 모두 한집에서 잤으니
복잡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바지 안 없어진 것이 다행이다. 소파에 아버지와 앉아 있는 사진을 작은형(병택)이
찍는단다. 아버님이 "얄말 한짝 신은 그 모습으로 찍을래?" "아뇨,"하면서 양말 안 신은 내발을 아버님 두발 사이에 놓고
이러면 전 양말을 다 신은 것이고 아버님이 한 짝만 신으신것 같습니다."하니 모두들 파안대소 하는 것 보고 누나도
" 내 두발도 끼자."면서 두다리를 쭈욱 뻗는다.
아버님은 연세가 드시면서 엄하신 모습은 사라지고 아주 다정다감하신 분으로 변하셨다.
섯다, 포카케임도 아들, 며느리와 하시고 마작도 가르쳐 우리집안 며느리들 도박성 케임을 잘안다.
그저 즐기는 편이지 도박이 아니다.
해방 후 혜화동에서 용산우체국 옆에 있는 큰 목조 일본인이 살던 적산가옥으로 이사를 했다.
얼마 후 순경 가족이 들어 와 옆에 살았는데 원래 두집이 살림 할 수 이쑈게 지은 집이라 서로 불편함 점이
없었던 것 같았고 우리가 사는 쪽에 큰연못이 있었는데 작은형과 둘이 연못가에 앉아 잉어들 노는 것 보고 있었는데
형이 벼란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연못으로 밀어 버린다. 4살백이 어린 나는 허우적거럿고 어머님이 구해 주셨다.
이 때 추웠는지 홍역을 시작했다. 덩 다라서 작은형도 홍역을 해 집안 식구 모두 동생을 찬 연못에 밀어 넣었으니
싸다고들 했다.
언덕 넘어에 일본군이 살던 막사에 미군이 들어 왔다. 밤이면 온 마을이 비상이 걸린다.
외출 나온 미군이 여자를 못살게 군다는 것이다. 저녁 때 미군이 보이면 서로 연통하여 집집마다 여자들은 숨었다.
중학생인 누나 와 30대 중반인 어머니가 이층 창문을 통해 지붕에 숨었던 것이 생각난다.
"당했구나!"하는 말이 이 때 생겼다고 한다. 이런 방면 삼촌은 경기고 2학년이라 학교서 배운 영어을 익히고저
미군부대 앞에 가서 미군을 만나면 영어로 대화를 하며 산영어를 익히셨다.
삼각지에 3층빌딩 높이의 화재전망대가 있었고 정오를 알리는 싸이런이 울려 점심 먹을 때를 쉽게 알았다.
숙명여중 3학년생인 누님 친구가 자주 왔는데 이름이 이경희였다. 얼굴이 길고 말상이라 집에서 말대가리라고
불렀는데 하루 그 누나가 왔기에 누나에게 알리기 위해서 "누나~ 말대가리 왔어!" 이 누나 얼굴이 붉어지면서
"너희 집에서 날 말대가리라고 부르냐?" 난 그 때 4살이지만 무엇인가 잘못했구나하고 느꼈다.
이 말대가리 누나는 1950년대 중반 KBS 인기방송 스무고개에 한국남, 조풍년씨와 퀴즈를 푸는 박사로 명성을
날린다. 재치 있던 이경희박사의 코멘트가 돋보였다. 1960년대 후반 누나가 미국서 잠시 귀국했을 때 돈암동집에
오셨는데 그 때 생각이 나고 속으로 누나 얼굴 아직도 길구나했다.
우리 큰고모님도 얼굴이 길어서 딸들이 엄마 별명을 붙치기를 경부선이라 했다.
사실 우리 豊山洪氏 집안 얼굴이 긴 편이다.
나는 둥근얼굴이라 오탁을 했다고 한다. 어릴 적엔 다리 밑에서 주서 왔다고 많은 놀림을 받았다.
아버님이 강원도도지사서리로 발령 받아 춘천 도지사집에서 살았는데 어찌나 크고 정원도 넓고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높아 어린 나에겐 아직까지 무서운 집으로 기억된다.
아주 더운 여름 날 삼촌, 형과 소양강 옆 토마도 밭에 가서 토마도를 먹고 체해서 아직까지도 토마도를 싫어한다.
춘천집에서 서울대 교수에게 지급 된 동숭동 일식양옥집으로 이사를 왔다.
아담하고 우리 식구 살기에 적당하고 좋은 집이였고 여기서 난 창경국민학교에 입학하고 6.25사변이 나고
2학년 6월까지 다니다 성북동으로 피난 그리고 수원, 부산으로 내려갔다 3년만에 동숭동집으로 돌아 오니
젊은 교수 김중업이 적산가옥이라 서울대교수면 누구나 살 수 있다는 억지로 살고 있으면서 선배이고 전주인인
우리에게 내놓을 생각을 않는다. 동숭동에 많은 공대교수님들이 살아는데 집을 이렇게 빼앗긴것은 우리가 유일하다.
할수 없어 급하게 청진동 작은 한옥을 전세하였다. 다시 노량진으로 전세 갔다가 광나루 땅이 팔려 그 돈으로
돈암동 집을 구입하고 그곳에서 16년을 살다가 미국으로 들어왔다.
내가 살었던 곳을 열거하면 혜화동, 삼각지, 춘천, 동숭동, 성북동, 기장대(내촌), 수원, 부산(초량,기장), 청진동,
노량진, 돈암동. 제일 오래 산 돈암동을 빼면 19년 동안 11곳에서 살았다. 국민학교는 창경1학년,이학년 2달,
초량피난국민 4학년 두달, 사하국민 4학년 7-8개월, 종로국민 5학년 두달 6학년. 2,3,4학년은 안 다닌 폭이다.
왜정 때 태어나 해방정국, 6.25사변, 4.19, 5.16 의 혼란한 정국, 생면부지의 땅 미국 속에서 자란 강한 잡초가 아닐까?
연세가 드신 여인을 보통 할머니라고 부른다.
한자를 써서 老婆라고도 말하는데 글 쓸 때, 말할 때는 할머니라 쓰는 것이 훨씬 情感을 느껴진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젊은 시절 밭도 매고 집안일을 많이 하고 자식, 손주들 업어 키워서
그런지 나이가 드신 후 허리가 많이 굽으신 할머니를 애교 있게 꼬부랑할머니라 불렀다.
꼬부랑할머니란 단어는 힘들게 사신 인생역정이 그대로 보이기에 친근감이 가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나도 할머니 등에 업힌것이 생각나지만 우리 할머니는 허리가 굽지 않으셨지만 배에 주름이 많아
왜 그렇지요? 물으면 "네 아빠, 삼촌, 고모가 이 속에서 자랐거든, 그래서 그래" 무슨 뜻인지 몰랐다.
보통 할머니께서는 손주에겐 자신을 할머니 대신 부르시기를 할미라고 많이 하신다.
"할미가 해줄게, 할미한테 말해, 할미하고 놀자. 등등" 연세가 많아 힘이 벅차지만
희생하심을 나타내신다.
지금은 없어진 단어지만 할멈이란 말도 있다.
낮은 계층의 할머니를 그리 불렀다.
할아버지, 할머니, 누나(7살), 큰형(4살) 1938년 봄.
나의 할머니께서는 구한말 때 6부 중 5부 판서(대료직으로 예조판서)를 지내신 洪字澈字柱字이신
나의 증조부의 장남이신 洪字祐字祿(아호는 輝山 예명 洪琳)할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다.
첫째, 두째 아드님을 2살 되기 전에 잃으시고 세번째 태어나신 분이 나의 아버님이시다.
두번의 자식을 잃은 쓰라린 경험 때문에 혹씨 배탈이 나지나 않을까? 조심에 조심하시니
자연히 아버님은 어린 시절 항상 배고픔에 시달리시고 어느 때는 너무나 배가 고파 간장을 마신 적도 있었다.
아버님(제일고보 5학년)과 어머니 신혼.
아버님은 어린 시절 이렇게 왕자와 같은 보살핌에서 성장 하신 관계로 내가 보아도
지나치게 자기 중심이고 이기적이시며 오만함까지 하셨다고 할까? 唯我獨尊이란 말이 옳겠다.
어느 정도인가?하면 京都帝大 다니실 적 방학 때 서울에 오시면 밤에 좋아 하시는 약주을 거나하게 드시고
혜화동 집으로 오르는 골목길 모퉁이에 있는 혜화파출소(현재도 있음.혜화초등교 옆에)에서
보초 서 있는 일본순사을 세워 놓고 근무 잘하라면서 따귀를 때리셨단다.
그 당시 교복을 입은 本土제국대생의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양반 종가집의 며느리로 집안의 권위와 권세에 따라 행동하시며 자손을 크게 성장 시키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셨다. 아드님한데도 유교사상인 女必三從에 따라 대하셨다.
여름이면 통마늘을 호박잎에 싸고 찰진흙으로 둥글게 마른 다음 불에 구워서 아드님 건강을 챙겨주시고
내가 어렀지만 할머님이 아버지를 나무라시던가 화를 내시는 것을 보질 못했다.
항상 아드님을 어려워(?)하시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셨다.
그런 할머니가 아드님의 임종도 없이 6.25사변 때 공산 치하에서 돌아가셨다.
당시 아버님은 북으로 납치되어 가셨다가 탈출하여 몇달간 할머님과 한께 지내셨지만 북괴가 다시 내려 올 때
잡히면 큰일을 당하실까봐 혼자서 남쪽으로 몸을 피하셨다.
삼촌은 의용군으로 끌러 나가시고 경기중 2학년생인 큰형은 어머님이 너희들이라도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느냐면
누님과 함께 고모부의 고모가 사시는 용인으로 피난을 보내셨다.
남과 다름없은 형과 누님을 맡아 주시고 그 어려운 시기에 숙식을 제공해주신 용인의 어르신네가
고맙기 그지없다.
용인의 갑부댁이라 장독에 간장, 된장, 고추장도 많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반잔이 없으니 간장, 된장으로
밥을 비벼 먹어서 독이 다 비웠다고 한다.
형님과 누님은 언제까지 그집 신세를 지울 수도 없어 용인 장터로 나가 장사를 시작했는데 양키물건을
취급을 했다. 미군부대에서 가지고 나오는것을 사서 비싸게 팔았는데 물건을 대주는 미군병사와
친했다고 한다. 나중에 수원서 함께 살 때 누나와 형이 대화에서 켈리라는 이름을 많이 들였다.
그 때 큰형이 입은 옷이 빨간색 짭바였기에 용인 시장에서 빨간짬바하면 다 알았다고 한다.
수원에 살면서도 자전거 타고 용인을 다니면서 장사하며 집안 생계를 도왔고,
누나는 수원 양공주(당시 갈보라 비하했다.)판쯔를 재봉틀로 만들어서 팔았기에 양공주가 자주 드나 들었다.
내가 방에 있는데도 양공주 돌아서서 판쯔를 벗고 입어본다. 내 나이 9살이지만 곁눈질로 훔처 보았다.
그 집에 좀 모자란 20대후반의 아들이 있었는데 방에서 나오는 날 항상 불러서 "오늘도 갈아 입던?"
"응"하면 날 그렇게 부러운 눈으로 볼 수가 없다.
하루는 큰형이 기운이 하나도 없이 들어 와 마루구석에 쭈구려 앉아 있다.
잔사 잘하고 돌아 오는 길목 언덕에서 깜둥이들한데 강도를 당해서 현금, 시계를 빼았겼다고 한다.
물론 한국을 위해서 참전을 했지만 어떤 사상, 이념을 가진 사람들만 온 것이 아니고 그저 불리움을 당해서
온 그렇고 그런 녀석들도 많아 참전의 의미를 회색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집안은 세토막,네토막이 난 셈이다. 아버지는 이북으로, 큰형과 누나는 용인 그리고 연약한 어머니가
노환의 할머니, 폐병으로 몸이 쇠약한 작은고모, 그리고 작은 형, 나, 3살짜리 어린 동생.
얼마 후 작은 고모, 형과 나는 시골 산지기 집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4토막이 난 가족이 되었다.
그 때 어머님의 근심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남편, 큰아들과 딸, 또 떨어져 있는 시누이, 어린 아들 두 명 모두 잘들 있고 안전한가?
12살 적은 형, 3살 동생, 9살인 내가 집안의 남자라 작은 형과 내가 돈암동 미아리고개 밑에서
할머니 관을 사서 짚푸리기줄로 묶어 형제가 앞뒤에서 교대로 그 무거운? 관을들고, 키가 작아 땅에 달까 봐
있는 힘을 다해서 될 수 있는 데로 높이 들고 성북동까지 오니 그 추운 겨울 정초인데도 땀이 났다.
솔직히 난 어린 시절 할머니가 싫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론 미웠다.
3살 위인 형만 사랑하시고 언제나 난 뒷전이고 야단 치시고 미워하셨다.
나의 어린 시절 주위 사람들은 모두 내가 잘 생겼다고 칭찬하였다.
어머니께서 어린 나에게 쌔르복(해군 복장)을 입히고 외출하면 일본인들이 사진을 찍곤 했단다.
단아하신 어머니는 항상 곱게 가르마에 쪽을 찟이고 옥비녀 아니면 금비녀를 꽂고 한복을 입으셨다.
한복의 한국의 전형적인 미인, 그리고 예쁘게 생긴 어린아이 그들의 사진 모델감으로 충분했었나보다.
그런 나를 할머니는 "얼굴도 둥글고 눈깔이 큰 녀석이 뭐가 잘 생겼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어린 나의 자존심은 말 없이 무너진다.
여기에 작은 형은 내 얼굴이 둥글다고 전기 다마(전구의 일본말)라 부르며 놀렸다.
나의 옆에는 항상 어머니가 괜찬다!하는 뜻으로 미소를 살짝 보내신다.
누구나가 그러하듯 어릴적 나도 형과 싸움을 많이 했다.
어쩌다가는 치고 받는 싸움도 했는데 나의 주특기는 입빨로 무는 것이라 형은 자기에게 가까이 못오게
상대적으로 손가락으로 할키는 방어태세로 두손의 여덜 손가락을 앞으로 젓히고 공격을 했다.
내 큰아들도 애비를 닮았는지 어릴적에 물기를 잘해서 이런것도 닮나?하며 웃었다.
항상 내가 잘한 것은 아니지만 또 잘못한 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나만 야단을 치시고 형만 어루만지신다.
이런 나를 조용히 달래주시는 분이 어머니였다.
그러니 난 누구보다도 어머니를 좋아했다. 이 말은 할머니와 각을 이른다는 말과 같다.
그 당시 어느 집안이고 며느리 사랑하고 아니 좋아하는 시어머니 계셨는가?
누워서 침 뱉기지만 우리 할머니 그래셨다. 어머니를 많이 나무라셨다.
시어머니 입장에선 집안의 기강을 세우고 집안의 풍습을 가르치기 위함이시겠지만
어린 나에겐 구박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니 할머니를 좋아할 수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서 9살 짜리 어린 녀석이 정말 할 만큼 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여름에 便秘로 고생을 하셨는데 뽕나무 잎으로 다린 茶가 좋다는 어느 분 말을 듣고
우리가 살던 동숭동 어느 집안에 뽕나무가 있는 것을 기억하신 어머니와 그 집에 가니
피난 가고 문은 잠기고 아무도 없다.
뽕나무는 담가에 있어 곡예사 처럼 어머니 어깨를 발로 딛고 올라서니 내가 무거웠나?
아니면 어머니가 기력이 없으셨나? 성북동에서 동숭동까지 여름날씨에 먼길을 걸어 오셔서 그랬나?
어머니 몸이 흔들리니 자연이 내 몸도 흔들렸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뽕잎을 따 온 적도 있다.
할머님이 돌아가신 1951년 정월은 왜 그리 추었는지? 머릿맏에 떠 놓은 양쟁이 자리기의 물은
얼다 못해 더 얼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지르는지 쩍~쩍~ 소리를 내며 이불 속에서 간신히 추위를
이기고 잠든 어린 녀석 잠을 깨우기 일쑤이다.
우린 냉방에서 유단뽀(日語:양철로 만든 것으로 뚜거운 물을 담는다.) 끼고 그런대로 지낼 수 있지만,
노환으로 고생하시는 할머니가 주무시는 방은 어느 정도 냉기는 없애야 하기에 어린 우린 야산 무너진 비탈에
삐져 나온 나무뿌리를 낫으로 자르고 낙엽을 모아 군불을 지피곤 했다.
눈이 오는 어느 날엔 아깝지만 30cm 가령 두꺼운 바둑판을 토끼로 패서 장작을 만들었다.
지금도 그때 느낀 기분이 생생하다. 아깝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두꺼운 것이 어찌 그리도 잘 뻐개 지는지?
도끼로 내리치면 쉽게 일자로 짜악 갈라진다. . 어린 녀석 손에 무슨 기운이 있다고,
무슨 나무이기에 그리도 잘 쪼개 졌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식량문제는 정말 심각했다.쌀밥은 고사하고 조밥, 납작보리밥은 없어서 못 먹었다. 밥을 하실 양식이 없었는지
갓난 어린아이인 3살 동생의 벼개 속에 든 조로 죽을 쑤기도 했고 봄철 따스한 날엔 작은형, 식모아이
그리고 나는 뒷산에 올라 씀바귀, 냉이, 꽃다지등 나물를 캐서 국을 끓여 먹곤 했다.
한번은 원추리가 한곳에 모여 새싹이 막 나오는 연한 것을 잔뜩 따오니 시금치국 처럼 된장을 넣고
국을 끓이셨는데 그 맛은 지금도 입맛을 돋운다.
지금 우리 집 정원에 원추리, 쑥을 심어 놓고 배고파던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들을 보면 현재의 나는 충만 속에서 행복을 만끽하고 있음을 안다.
당시 어쩌다 달걀이 생기면 껍질은 버리지 않고, 당시 칼슘이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고모가 칼슘? 보충키 위해 먹으라해서 입안에서 여러번 씹어 많이 먹어 보았다.
참 지혜로우신 영양 보충식이다.
어느 날 의용군으로 나갔던 먼 친척 형이었는지, 아저씨벌인지 남루한 옷차림으로 들어 온다.
일단 살아 있었다는것에 반가웠다. 혹시 아버지, 삼촌 소식을 들었는가? 물으니 알 길이 없었단다.
먹을 입이 한명이 더 늘어서 반갑지만 난감한 어머니의 심정을 읽었는지
등 뒤에 둘러메고있던 보자기에서 얼마간의 납작보리가 나온다.
당시 후퇴 중(?)이던 중공군 두 명이 다음 날 들어 와 무어라 쏼라 된다.
형님이 창문을 열더니 중국말로 소리를 치고 종이에 무어라고 쓴다.
이놈도 무어라 쓰곤 웃으면서 나간다. 한자로 대화를 한 모양이다. 글자(배움)의 힘을 알았다.
또 다음날은 모택동이 즐겨 쓰는 모자를 쓰고 총구가 두 개인 엽총을 메고 내무서원이 들어 오더니
이북으로 올라갈 준비 안하고 무엇하는가! 나무랜다.
前에도 자주 와서 우리 집은 反動分者집이라며 지랄발광을 여러번 했던 험악하게 생긴 녀석이다.
이때도 형님이 나선다. 몰랐는데 형님은 괴뢰군 장교였던 모양이다.또 한번 무사히 넘겼다.
당시 괴뢰정부 부수상 碧初 洪命熹이가 먼 친척벌로 할아버님 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나에겐 조카벌이 된다.
아마 홍명희 이름을 댄 모양이다. 반동분자 가족이 졸지에 혁명가 가족이 된 모양이다.
냇가에서 가재를 잡을 때 가재가 뒤로 도망치듯 슬그머니 뒷걸음으로 나간다.
다음날 그형님은 이제 안심하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북으로 떠났다.
그후 그형님은 生死不明이다.
휴가철이면 미국 각지를 여행 다니면서 도시 가운데에 있는 공원에 가면 전몰장병 추모비가 있다.
그곳엔 각 전쟁에서 이 도시 출신 젊은이 이름이 새겨저 있는데 한국전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 이름을 보며
옛 생각에 감기곤 한다. 혹시 이 친구인지도 모르지 하면서, 잊을 수 없는 눈동자가 있기에...
1950년~1951년 사이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고 한다.
그때 내 나이 9살로 한창 자라고 모든 것이 새롭고 배울 때지만
학교는 전쟁이라 다닐 수 없고 집에서 작은고모님이 글 읽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당시 나 자신이 신통하게 여긴 것은 아라비아 숫자 특히 한자로 99까지 쓰고 百을 쓴 다음 얼마든지
계속해서 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참 신기하고 배움이 주는 즐거움을 느꼈다.
10월 중순경에 신문팔이 노릇 하느라 성북동 골목을 뛰어다녔고 친구들과 성북천에서 썰매를 신나게
타고나면 추위는 느끼지 못하고 얼굴에서 무럭무럭 김이 오르기도 했다.
밤이면 추위는 그야말로 맹위를 떨쳐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단뽀(일본말. 타원형 양철로 된 것)의 더운물을
이리저리 이불 안을 굴리다 보면 낯에 논 것이 피곤한지 어느새 잠이 든다.
밤에 잠을 깨는 것은 포성도 있을 때가 있었지만, 어머님이 떠놓은 양재기의 자릿기가 얼은 다음
더 이상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듯 짝짝 소리 내며 갈라지는 소리 때문이었다.
1950년 12월 말인지 1951년 1월 초인지 우리를 유난히 챙겨주고 보살펴주던 파출소소장이 전선이 이상하다며
남쪽으로 피난 가기를 종용한다.
납북되신 남편이 찾아 올 곳은 이곳이고 병환 드신 시어머니, 3 살된 어린애까지 있으니 갈 수 없다니
"사모님 죄송합니다. 못 모시고 가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무사하실 겁니다. 편안하세요"하며 돌아서든
인자하신 파출소장이 지금도 고맙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때가 바로 1.4 후퇴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당시 상황으로 1월7, 8일?) 국군, 미군이 서울을 떠나고 다시 인민군이 들어 왔지만
사상이 없는 나이 어린 우린 그런가 보다 하고 여느 때처럼 삼선교와 성북동 첫 번째 다리 중간지점 어름이 넓게
언 곳에서 십 여명이 썰매 치기를 하고 있었다.
한 녀석이 위를 가르치며 "야~ 양키 봐라. 잡혀간다."
내가 보기에도 스물 살 안팎의 양키가 뒤로 손이 묶여 앞에서 걷고 뒤로 인민군 3명이 따콩총을 들고 걸어간다.
따콩총은 어린 우리에겐 신비스런 총이었다.
총을 쏠 땐 "땃" 소리가 나고 총알이 목표에 도달한 순간엔 "콩"소리가 나기에 따콩총이라 했다.
어쩌다 따콩총을 들고 있는 인민군을 보면 따콩소리를 듣고 싶어 우린 한번 쏴보라고 조르기도 했다.
썰매를 타던 우리 모두 행동을 멈추고 끌려가는 미군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은 하하 웃으며 "양키~양키"하며 조롱조로 웃으며 손가락질도 한다.
미군과 같은 또래의 인민군은 우리에게 웃음을 보낸다.
난 맹세하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그저 불쌍한 기분이 들었다.
미군이 우릴 쳐다본다. 아니 나만 쳐다본다. 그렇게 느꼈다.
폭파인 개천 아래 자신도 미국에서 어린 시절 이렇게 보낼을 철없은 아이들을 처다본다.
실제 거리는 7-8 메타 정도.
그런데 그와 나의 거리는 2-3 메타 정도를 가깝게 느껴지고 그의 파란 눈동자의 눈빛은 나를 본다.
무슨 말을 나에게 하는것 같다. 그의 그 때 심정이 눈빛에 담겨 있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무엇을 나에게 말을 할려고 했을까? 내 비롯 당시 9 살이지만 인간으로서 그 무엇을 느꼈다.
썰매에 앉아 얼어 붙었다.
아이들은 하하 웃으며 좋아라 한다. 양키~ 양키~하는 소리도 여전히 들린다.
그들은 성북동 위쪽으로 사라졌다.
다시 우리들은 썰매을 이리저리 치고 다니며 놀고 있었다.
땃소리가 숲 속에서 나더니 콩하고 메아리가 들린다.
아~~ 파란 눈빛이 떠오른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할려든 그 눈빛
얼마 후 인민군 3명이 걸어 내려온다. 파란 눈을 가진 젊은 미군은 보이지 않는다...
며칠 후 나이 든 친구가 말해준다.
삼선교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오른쪽에 새로 지운 조선집에 미군들이 자고 갔는데
너무 피곤하여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미군 한 명이 잡힌것이라고...
난 그 후 파란 눈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잊고 싶은 그 눈빛이 참전 용사 뭐 이런 말만 들으며 떠오른다.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눈빛이다.
그 눈빛은 한국을 지키고 발전케한 원동력이다.
2013년 San Francisco 시내 안에 있는 Presidio 국립공원 안에 한국전 참전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기금모금에 참여하고자 준비위원회 부회장인 John Stevens 예비역 해병 중령 사무실을 찾았다.
John Stevens은 장진호 전투 때 동상으로 왼쪽 발가락이 몇 개를 잃으신 분이시고 자기 연금을 몇 년간
참전비 건립에 기부한 금액이 $86,000 이상이고 94세인데도 모든 준비, 실행을 직접 하신 분이다.
이 분이 "왜 기부금을 내는 특별한 동기가 있는가?"하고 묻는다.
"한국인이며 무슨 동기가 있겠는가? 당연히 참가해야죠"하니 웃는다.
하지만 나에겐 잊지 못할 눈빛이 있다며 위 얘기를 했다.
말하는 동안 양키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올 때 옆에 있던 비서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본다.
"지금 너 누구 앞에서 양키라고 하느냐? 그 말이 얼마나 미국사람들에게 치욕적인데"하는 눈빛이다.
Mr.Stevens는 .웃으며 계속하라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 어린아이들은 당시 어른들이 부르는 말 그대로 양키라 했지요." 사실 당시 미군을 가르키는 고유명사였다.
숲 속에서 따콩 소리가 났다는 말을 할 때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65년이 흐른 그 시각에 겁에 질린 그 얼굴과 눈빛이 떠올라 미안한 마음이 가득 찼기 땨문이었다.
Mr. Stevens도 알지도 못한 아니 알고 있었던 병사인지도 모른 부하의 최후를 듣는 순간 눈물과 아픔을
참고 있음이 역력했다. 잠시 침묵이 흘렸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책을 집어서 내게 준다.
"내가 얼마 전에 받아 아끼는 책인데 선물로 주고 싶다. 난 다시 신청하면 된다"
6.25동란 60주년을 맞아 한국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한 "KOREA REBORN A GRATEFUL NATION"이다.
동란의 참상 고생하는 미군의 모습, 전후 발전한 현재의 한국의 모습을 담아 한국전 참전 용사에게
무료로 배분한 책이다.
2016년 8월1일 참전비 개막식에 참석하여 Mr. John Stevens의 파란 눈빛을 보며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했다.
2016년 8월 19일 -홍 경 삼-
아래 글 역시 한국전 참전용사를 만나고 쓴 글로 6.25사변 60주년 기념으로 발간된 한국논단 2010년 6월호에
추천작가로 "Thank Sir!"란 제목으로 게재되었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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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여행객들과 대화도 하게 되고 그러다
아무런 일 없었던것 처럼 헤어지곤 한다. 그저 스처 지나 갈 뿐이다.
조금 얘기들을 하다간 형식적으로 악수를 하며 자기 이름들을 말하지만
굳이 기억 할 필요도 없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바다州의 유일한 국립공원인 Great Basin National Park 안에 소재한
Lehman Cave를 Ranger의 안내를 받으며 대부분 은퇴자들 10명이 투어를 나섰다.
내뒤를 따라다니던 60대후반(?)인 할머니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San Francisco에 산다고 하면 십중팔구 중국인이라고 생각들 할까봐
여행 다니면서 꼭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을 해준다.
할머니 뒤에 있던 할아버지가 "안녕 하세요?"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반갑다. 그리곤 가끔 우연히 스치는 또 다른 한명의 한국을 다녀 온
G.I구나 했다. 하지만 반가웠다.
투어가 끝나고 할머니 친구 내외 우리 모두 6명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한국이라는 공통분모가 잡어 놓은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근무를 했습니까?"
"1959년 원주에서 했는데 그곳에 아주 높은 산이 있는데 무슨 산이죠?."
"아~ 치악산을 말씀 하시는것 같습니다."
"치악산~ 당신 잘 기억해두세요." 중요한것은 부인에게 기억케 한다.
"나 그곳에 있는동안 좋았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기념품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갖고 있는데 보여 줄까?"하며 웃는다.
도대체 무슨 대단한 기념품이기에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다닐까?
목각제품 십자가? 아니면 한국을 상징하는 특수 모양의 인형?
나름대로 이것 저것을 떠올리면서 "보여주세요."
하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왼발 바지를 조심스럽게 걷어 올린다.
카우보이의 부츠가 나오고 바지가 조금씩 올라간다.
목이 긴 쇠조각으로 장식된 가죽구두가 다 나온 후에
내 손목 보다도 가는 다리가 10cm 정도 나오더니 멈춘다.
차마 더 이상 걷어 올리지를 못한다.
가늘고 장단지라고는 없다. 마치 나무 토막 같고 살색이 아닌 붉은 색은
엷은 가죽으로 감싸여 있다.
인간의 다리가 아니다. 짐승의 다리도 아니다. 하지만 결코 징그럽다는
생각이나 느낌은 아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런 다리를 하고 50년을 살아
왔고 누구를 위해 이렇게 되셨나요?
그 순간 이 분에 대하여 그저 미안하고 고맙고 무어라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그 분 앞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군대식으로 거수경례를 올렸다.
"Thank You Sir! 내 조국을 위하여 봉사해 주심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진심은 서로 통하는 법인가?
기대치 않았던 나의 돌출 행동에 이 분 감격한 모양이다.
두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 하고 볼과 입가에 경련이 일어 난다.
나를 다정스럽게 쳐다 보던 두눈에선 눈물이 넘처 주름살을 타고 옆으로
흘려 내리기도 하고 주름이 깊은 곳에서 고이기도 한다.
나 역시 눈물이 흐른다. 옆의 부인들도 눈물을 훔친다.
앞으로 닥아가서 그분을 두 팔을 벌려 껴안아주고 등을 토닥 거렸다.
그 분도 두 팔로 나를 안고 오히려 고맙다고 한다.
한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알지도 못하던 칠십대의 미국인과 육십대후반의
한국인 두 남자는 뜨거운 가슴을 맞대고 두 마음을 열어 놓고있다.
심각한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 나게 한것은 할머니였다.
"여보 당신 야전병원(MASH) 있을때 한국소년 한데 배운 한국말 왜 가끔
나한데 하던 말 해 보세요. 정말로 맞는지 확인해 보게요."
"나 당신을 사랑 합니다. 뽀뽀 해주세요."할아버지 말에 할머니가 나를 쳐다 본다.
"하하하 정말 Mrs.를 위해서 좋은 말만 배웠구나.
맞아요. Honey~ I love you, Give me a kiss."
너무나 좋아 하는 할머니.
할머니 인상이 처음 부터 좋았다.
Utah州의 여인들은 특히 아름답고 남자를 지극 정성으로 섬긴다.
한국에서 다리를 다친 남자를 지아비로 섬기며 사시는 분이라서
그런가 나에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Mr. Olson 과 함께.
"Bryce Canyon 가보았냐? 우리가 그곳에서 35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이름 주소를 알고 싶었다. 성탄절때 카드라고 보내고 싶어서...
그런데 아름다운 곳 Bryce Canyon에 산다고 하니 주소를 달라면 분명
놀려 오라 할것이고 아니면 오늘을 미끼로 앞으로 내가 신세라도 질까
생각 할까봐 묻지를 못했다.다만 姓만 물으니 Olson 이란다.
Oh,Mr.Olson 당신은 한국인의 영웅입니다.
당신에게 올린 경례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한국인 모두의 감사의 표시 입니다.
이제 한국인이 당신에 대한 고마움을 아섰으니 지난 아픔을 잊으시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국을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저는 압니다. 너무나 아픈 기념품을 한국으로 부터 가지고 오신것을…
정말 다행인것은 우리와 헤어저 친구가 운전하는 차로 천천히 걸어 가는데
그렇게 가날픈 다리를 하고도 평상인 처럼 걷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 진다.
Mr.Olson을 계기로 한국전쟁 3년동안 미군 54,000명이 전사했고
103,000명의 부상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
과연 그들은 누구를 위하여 희생 되었나?
Mr.Olson을 만나기전까지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나? 자문해 본다. Nov.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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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일년 후 최후방 平壤 북쪽 수용소에서 양심있는 서울대 공대생이였던 괴뢰군이 자기가 몇시에 보초를
서니 그 시각에 脫出하라고 암시를 주여 목숨 걸고 탈출하여 歸家를 하셨고 삼촌은 3년 후 반공포로 석방시
돌아 오시고 전쟁통에 할머니 한 분만 老患으로 돌아가시고 모두 무사한 편이라 福 받았다 말 할 수있다.
쇠고기 먹길 수 없는 때라 수구레라는 것을 삶아 주시며 먹기 어려워도 영양 보충하기 위해서니
먹으라 말씀 하셨다.
수구레란 소가죽과 살 사이에 있는 부위로 가죽 같다.
딱딱하고 가끔 거친 털들도 그대로 있어 어린 마음에 웃으면서 정말 맛도 없는 것을 먹었는데
이상하게 지금도 육질맛도 아니고 기름끼 맛도 아닌 맹땡인 맛이 생각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했나? 식솔을 줄이기 위하여 누나 형들과 나는 서울에서 백 리 밖 선산이 있는 곳
내촌으로 내려가 산지기네와 함께 산다.
산지기들은 세상이 바뀌었다며 아가씨,도련님이라 불이었던 누나,형과 나는 이름 그래도 불리고…
어린 우린 그런 것 개의치 않았으나 동네사람들과 말할 때 나리라고 호칭되던 아버지는 병길 아버지,
마님이시던 어머니는 병길 엄마라 부른다. 어쩌다 다닐려 오신 어머니와 직접 대면할 때는 그래도 마님이라 했다.
병길은 나의 어릴 적 이름이다.
누님과 동갑이던 산지기 딸 금순이는 우리보고 나무해 와라, 밭에 가서 호박 따와라,
밤 따 먹었다고 밤나무에 붙들어 매어 놓겠다는 등 구박까지 한다.
보리밥 밥상에서도 매번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얼마 지나니 보리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궁해져 생전 보지도
못한 도토리로 만든 이상한 것으로 허기를 채워야 했다.
20여 채의 마을주민은 대부분 우리 집 소작인들이었다.
나중에 커서 안 일이지만 전쟁이 났으니 모든 땅은 소작인들 인민것이 되었으나 그들은 타지방 사람들과 달랐다.
우릴 예전처럼 귀하게 대해주고 여유가 있는 어떤 집은 우리 형제를 저녁마다 감자가 많이 섞인 보리밥으로
대접해 주었다.
아침,점심을 제대로 못 먹을 때라 저녁때 되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누님은 차마 그 집을 가지 못하셨다.
허기를 달래기 위하여 소작인 집을 가시기엔 체면이 허락지 않았나 보다.
쌈 싸 먹으라고 나온 호박잎에 보리밥 안에 있는 감자를 슬쩍 싸서 주머니에 넣고 집에 와서
"누나 이거 먹어~" 하고 주면 고맙다는 눈짓을 하고 돌아 앉아 드신다.
가끔 그 때를 생각하시면서
"큰놈 두 명은 그럴 줄 모르는데, 어린 네가 그래도 누나를 생각해주었다."
요즘 나의 문안 전화를 기다리시다가 전화를 받으시곤 "응 감자 배달 왔구나." 하신다.
우릴 보살필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산지기 식구는 오히려 우릴 구박 하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런 행동이 옳지 않다고 느껴졌다.
9살짜리 어린 나는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졌고 그것도 구박을 받으며 지내니
자연히 어머니가 그렇게 보고 싶을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아버님 생사도 걱정되고... 어린 나에겐 큰 부담이었다.
그럴수록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 멍하니 전망이 좋은 행랑채 마루에 앉아
다리 건너 마을로 들어오는 모퉁이 길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 오시나 하고…
성북동에서 내촌까지 걸어서 올려면 8시간 이상 걸린다.
어느 날 모퉁이를 돌아서 걸어오는 여인이 어머니 같다.
아니어도 좋다 하며 막 뛰어 다리까지 가서 보니 오던 여인이 멈추신다.
아~ 그리던 어머니시다.
뛰어 가서 안기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천근이었지만 날아가듯 걸어서 다리 가운데에서
쑥스러워 엄마 품엔 안기질 못하고 어머니 손을 내 두 손으로 꼭 잡고 눈물을 감추며
큰 아이처럼 보이려고 무진장 애를 셨다.
이곳 생활이 무척 재미있다며 신이 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두서없이 종알거렸다.
잠시 후 어머님이 가지고 오셨는지 하얀 쌀밥 한 그릇을 지어 내 앞에 차려 주신다. 얼마만에 보는 쌀밥인가?
춘향전에 나오는 대사처럼 정말 마바람에 게눈 감추듯이 먹는데, 느낌이 이상하여
살짝 고개를 들고 뒤로 돌리신 어머님 얼굴을 살피니 옷고름으로 눈물을...
난 못 본 척하고 마치 이곳 지금의 생활이 무척 행복하다는 듯이 개울가,산에서
작은 형과 재미있게 놀던 얘기만 했다.
산지기 식구들의 악행은 고자질하질 못했다.
혹시나 어머님이 마음 아파 하실 것 같고 그들을 나무라실 때
무식한 그들에게 봉변을 당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스치고.
몇 년이 지난 후 탈출에 성공하고 돌아오신 아버님에게 조용히 말씀 드렸더니 혼내 주셨다.
혼날 때 옆에 있었는데 공연히 고자질했다고 뉘우쳤다.
작은형이 어머님께 그동안의 힘들었던 나날을 말씀드린 모양이다.
힘들어도 가족이 헤어져선 안된다며 우릴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성북동에서 여덟 식구가 사는데
경제적인 문제가 있었나 보다.
큰형이 주축이 되어 가족 생계를 위하여 일 할 수 있는 식구는 모두가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누나는 밤에 밀가루 반죽하여 찐빵 과 팥을 삶아 단팥죽 만들어
삼선교에서 혜화동 넘어가는 곳에 달구지 위에 벌려 놓고 팔며 작은형과
식모아이(15살)는 볶은 콩을 혹은 헌책, 신문지로 만든 봉투에 넣고 삼선교에서 팔고,
나는 큰형이 받아온 경향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성북동을 뛰어다니며 “내일 아침 경향신문”하고 외치면서 팔았다.
경향신문은 막 창간되어 별로 인기가 없었다.
큰형님이 어리고 풋내기라 동아,조선을 받아 오질 못했다.
그때 나의 소원은 아버지의 무사 귀환,밤에 막 만든 따끈한
단팥죽 한 그릇 먹는 것과 동아,조선일보를 팔아 보는 것이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목이 쉬어라 "신문이요~"하고 뛰어 다니는데 전쟁 돌아가는 상황이
궁금한 사람이 "야~ 신문"하면
달려가서 한장 옆구리에서 뽑아 주면 "동아 없어? 조선은?" 하면 못 팔고 돌아선다.
그땐 그런가 보다 하고 그놈의 두 신문을 팔고 싶어서 받아 오질 못하는
큰형을 속으로 원망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신문 내용은 다 같은 것 아닌가?
"아니 어른들이시여~ 어린것이 추운날씨에 뛰어 다니는것 불쌍치도 않았나?"
지금 생각하니 그 어른들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겨울의 무척 추운 어느 날 삼선교에서 성북동으로 올라가는 양쪽 길을 연결하는 첫번째 다리를
“내일 아침 신문”하며 그날도 힘차게 외치고 뛰어 가는데 좁은 다리 중간 부분 쯤하여
옆으로 비켜서서 나를 외면하고 서 계신 어머니를 발견했다.
무안하고 챙피했다. 어머니인데... 왜 그랬을까? 정말 어머님 쳐다 뵙기가 힘들었다.
많이 듣던 목소리라 멀리서부터 유심히 보니 당신의 금쪽같은 아들이었단다.
그냥 다른 곳으로 뛰어 가기를 아니면 못 보고 지나쳐 주기를 바라셨나 보다.
“춥지?” 하시며 신문을 뜬 차가운 내 손을 잡고 입으로 더운 김을 호호~불어 주시기도 하고
두 손을 모아 비벼 주신다.
그래도 차가움을 느끼셨는지 4,5살때 찬 내 손을 가슴에 품고 녹여 주셨듯이 사람 다니는 곳에서
옷고름을 푸르시고 내 찬 손을 가슴에 넣으시려 한다.
얼른 제지하며 “엄마, 엄마 괜찮아, 하나도 춥지 않아, 막 뛰었거든…”
어머니를 뒤로하고 파출소를 돌아 혜화동쪽으로 뛰어 달아났다.
“내일 아침 경향신문”을 외치었으나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신문이요 라는 말도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어린 가슴은 메어지고 눈물 때문인지 앞도 보이질 않았다.
어느 막다른 골목길로 들어가 벽에 기대고 나오는 울음소리를 꾹 참고 울었다.
내가 이럴 지경인데 어머님의 그때 심경은 오죽하셨을까?
다음날 큰형님은 신문을 받아 오질 않았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어머니와 나는 이렇게 다리에서 잊지 못할 만남을 두번 가진다.
작은형님과 식모가 팔던 볶은 콩은 잘 팔리지도 않았지만
하루 종일 심심하여 둘이서 볶은 콩들만 먹어 배탈이 나서 이틀 만에
고만두게 하고 누님의 단팥죽 장사 역시 팔다 남은 식은것 동생에게 몇 번 먹여 주곤 끝이 났다.
신문팔이 첫날은 작은형에게도 반을 주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뛰어나갔는데
다 팔고 집으로 오니 작은형 신문은 한 장도 팔지 못하고 따스한 아랫목에 배를 갈고 엎펴저 있다.
나를 보곤 미안(?)했는지 변명도 하고 명령도 한다.
"신문 사시요?하고 입을 크게 벌렸더니 찬 바람이 뱃속으로 들어가 배가 아파서 그냥 들어 왔으니
네가 나가서 팔아라."
동생은 형들의 종인가?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치민다.
환갑들이 지난 지금 " 그 때 정말 배가 아팠어?" 하니
"아니~ 진짜로 신문 사세요 하는 말이 안 나와.. 죽어도...안나와~~"
"형 그때 형 나이 12살야, 난 9살이고, 무슨 놈의 체면을 따질 때야?"
"맞아, 하지만 사란 말을 못하는데 어떻게 파니,..나 어릴때 부터 참 꾀가 많았지?!!!..."
속 보이는 얄팍한 자기 꾀로 9살짜리 동생을 추운 날 밖으로 내친 형.
따지면 이렇지만 핏줄은 핏줄이라 형제들 간에 모든 것이 쉽게 용서가 되고
힘들었던 일도 이렇게 추억거리가 된다.
1969년 어머님 훈시를 듣고 있는 나의 모습이 진지하다.
내가 성장하고 취직한 다음 한 달 가량 저녁를 먹어준 집을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고 성의를 표시하니 옛날부터 받은 은혜에 당연히 할 일을 하셨다며 극구 사양을 하시는
그 마음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보답을 기대치 않은 사랑의 베품은 서로 오간다.
우리 집은 아버님,삼촌 모두 무사히 귀가들 하시어 예전의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왔으나 많은 사람은
아직도 그때의 아픔을 안고 산다.
할머니는 장례식, 영결식 이런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슬픔 속에서 하관식(?)만 있었다.
마침 동네에 지게를 가지고 계신 50대 아저씨가 있어 부탁하고 부탁하여 할머니 관을 지게에 지고
성북동 야산을 오른다.
봄 철에 나물 뜯던 편편하고 양지바른 곳을 골라 언 땅을 아저씨는 곡괭이로 파고 우린 삽으로 흙을 걷어 올린다.
언 땅이라 힘들었지만 고생하며 정성껏 할머님을 고이 모셨다.
이상의 힘든 시절을 아버지, 삼촌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짐작만 하시겠지만, 이렇게 고생하신 것 아실까?
나 역시 두 분이 어떻게 사경을 넘어 살아 오셨는지 알지를 못한다.
누구나가 겪었던 6.25사변의 민족의 비극을 알겠는가? 헤어저 지낸 가족간의 고생을 알겠는가?
마음의 상처를 서로 받을까 봐 숨기고 있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가족은 사랑이란 울타리 안에 있기에...
어느 정도 전쟁의 후유증이 가라 앉고 평온을 찾을 시기인 1960년 봄에 할머니 묘소를 선산이 있는 곳으로
이장을 했다. 난 학교를 갔기에 참석을 못했지만 작은 아버지가 자기 어머니 묘소를 파는데 보니깐
아카시아 뿌리가 이미 부패된 관을 감싸고 있었단다. 주위에 아카시아 나무가 많으니 그럴 수 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이를 지켜본 작은 아버지 심정은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을 느낀 모양이다.
며칠 후 안방에서 큰소리가 난다. 좀 처럼 이런 일이 우리집안에서 있은 적이 없는데, 안방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작은 아버지가 계셨는데
" 어떻게 그런 곳에 모실 수가 있습니까? 아주머니!!!, 나무 뿌리가 그렇게 무성한 곳에!!! 형님 생각해보세요?"
밖까지 들리는 이런 말에 내 가슴은 요동친다.
그 엄동설한에 어린아이가 관을 사들고 언 땅을 파고 모셨는데 무슨 나무뿌리를 생각하고
좋은 묘자리를 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가?
난리통에 산 어린 자기 자식을 버리고 간 부모도 많고 돌아가신분은 집마당에 모신 경우도 많았다는데...
안방으로 들어가 무릎은 끓고
"할머니 편찮으시고 돌아가실 때 집안의 두 어르신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버지는 납북 되시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작은 아버지는 의용군으로 나가시지 않으셨나요? 할머니 팽겨치고, 누가 모셨나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가만히 계시던 아버님이 "늦었으니 너 집으로 돌아가거라.네가 지금 안가면 내가 나가 마." 작은 아버지에
한마디 하시며 우물쭈물하시는 모습을 보고 옷장에서 웃도리를 꺼내신다.
이를 본 작은 아버지 얼른 일어나 아무 말 안하고 나가신다.
방안에 얼마 전에 큰소리는 연기 처럼 사라지고 고요가 흐른다.
어머니 아버지의 따스한 눈빛을 뒤로 하고 살며시 나왔다.
아버님 입장에서 동생 말에 동의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내를 미워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린 셋째가 들어 와
분위기를 바꿔 버렸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머니는 말할것도 없이 자기 편을 드는 자식이 있어 든든하셨으리라.
난 나오면서 그리 통쾌할 수가 없었다.
어릴적 부터 작은아버지한데 받은 미움을 조금 큰 후인 지금 한순간 복수한 그런기분이랄까?
"세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난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공포에 휩쌓였던 순간이 있다.
3살 때 받은 기분, 마음의 상처도 오래 간다는 말과도 상통하리라.
3-4살 때 내가 무슨 잘못을하면 나의 두다리를 두손으로 잡으시고 똥뒷간 변을 보는 두 널판대기 사이로 어린 나를 집어 넣는다.
삼각지에 있던 왜놈이 살던 적산가옥이라 연못도 있는 큰집이라 변소도 커 변이 쌓이는 곳도 넓직했다.
두눈 앞에 똥이 잔뜻보이고 곧 똥 솟에 빠저들것 같다.똥이 점점 가까워 질수록 공포는 가중된다.
어린 조카의 공포 분위기를 즐기셨나? 여러번 당했으니 아직까지 기억을 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3,4살 짜리가 이런 고통을 받을 정도의 잘못을 했으까?
"또 그럴래? 말해!"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아니 생각도 하기 전에 무조건 "잘못했어요"가 나오기 마련이다. 겁에 질려서.
나 보다 6살 아래인 아우도 3살 때 나와 똑 같은 방법으로 두다리를 잡힌 상태로 변소 속을 들어 갔었다고 한다.
어린 자식들이 변소 속에서 겁에 질려 소리치는 모습을 보시는 어머니 기분은 어떠하셨을까?
어머님은 양반 중에 양반인 安東金氏 가문 충남 예산에서 1911년 3월에 태어나셨다.
2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어 할머니와 유모 품에서 외롭게 자라셨다.양반집안이라 예의범절은 자연히 배우시고
당시 양가집 女兒들이 배우는 언문을 깨우치시고 楚漢志를 즐겨 읽으셨는지 연세가 80 이 되신 후에도 혼자서 초한지를
외우시어 나를 놀라게 하셨다.82세에 돌아가셨는데 치매란 단어는 생각치도 못하게 기억력이 또릿하셨다.
예산 대흥면에 사실때 산, 농토가 많아 집안 일을 돕는 사람(당시 종이라 부름)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집사노릇한 사람의 아들이 경성에서 학교를 다였고 방학 때면 내려 와 어린 우리 어머니를
업기도하면서 챙겨 주고 큰도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단다.
어느 해부턴가 보이질 않았고 십년 후 쯤 나이 18세 때 17세인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는데 (9개월 차이)
며칠 후 학교를 가신다면 옷을 입었는데 산지기 아들이 방학 때면 입고 내러 온 그 옷과 모자가 똑 같더란다.
어머님은 그 옷이 제일고보 교복인지 모르셨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 산지기 아들이 바로 朴憲永(1900-1956?)이며 아버지 보다 12살 많고 제일고보 선배가 된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23년간을 함께 지내셨다.
시어머니께 한번도 말씀을 거역하신 적,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신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싫은 내색을
하신 적, 나중에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후에도 자식들에게 시어머님에 대한 불평을 하신 적이 없으시다.
세월은 흘러 나의 어머니가 시어머니가 되신다.
시집살이를 많이 한 며늘이는 다음에 똑 같은 시어머니가 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내가 신혼여행에서 돌아 온 며칠 후 나에게 조용히 말씀하신다.
"사랑만 받던 철부지가 시집을 와서 남인 시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며 잘 할려고 애쓰는 네 처를,
너는 위해주고 보살펴 주는 것이 남편인 네가 마땅이해야 하는 일이다. 난 네 처가 딸 처럼 귀엽기만 하다."
손주들을 어찌나 귀엽게 보살피시는지, 어느 때엔 당신의 몸도 생각하셔야 하는데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할머니가 할미가 되신것이다.
자매간에, 형제간에 언쟁이 붙으면 항상 중립적인 입장에서 해결을 해주신다.
한국말이 서둔 손주들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눈치,코치로 알아 듣곤 진정들 했다.
흐뭇해 하시는 할머니의 모습. 나의 할머니과 다른 점이 많아 어머님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어릴 적 보다도 더. 아마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좋아하시기에 일단 안심이 되어서 그런가 보다.
걱정하던 그런 시어머니가 아니시고 어머니 처럼 딸로 대해주심은 아마 시집살이 하실 때
무슨 결심을 하신것 아닐까?
우리 집은 4형제라 며늘이가 4명인데 어머님이 어느 누구에게나 야단 치시는 것,
한 단계 아래라 할 수 있는 꾸중하시는 것 한 번도 들은 적 본적도 없다.
왜 못마땅하신 적이 없으셨겠지만 이해를 하셨거나 참으셨으리라 믿는다.
아~ 어머니, 우리 어머니, 정말 훌륭하신 어머님이셨고,, 할머니였고 더군다나 좋은 시어머니셨습니다.
그런 시어머님이 계셨기에 지금 저의 처도 훌륭한 시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손주들 데리고 온 큰아들네가 저녁 늦게까지 오랫만에 만나 화기애애하게 보내고 아침 일찍 꼬맹이들이
일찍 일어나 거실에서 떠들며 놀기에 나도 일어나 손주와 놀고 싶어 나가려고 하니 제손을 있는 힘을
다해 꽉 잡고 못 나가게 한다.
"며늘아이 아직 안 일어났나 봐요. 당신이 나가면 며늘아이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아이들 때문에 고생하는데 마음 놓고 푹 자게 당신 그냥 방에 가만히 계세요."
어떤 시어머니는 이리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 얘~ 일어나서 아침 준비 안하고 잠만 자냐!!!"
우리 집 할머니는 얼마나 예쁜 시어머니의 마음을 갖었는지 모르겠다.
10여년 전에 어느 모임에서 부인들이 며늘아니, 자기 아들 얘기로 한참 수다을 떨고들 있다.
주로 흉이 무슨 자랑인듯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웃으며 그래요? 우리 얘는... 흉은 계속해서
부인들 입에서 나온다. "요즘 한국에선 며늘아이들 시금치도 안 먹는다면서요?"
하두 여행어 처럼 떠돌아 이미 들어서 모두 알고 있는듯 한 눈치다.
"그럼 우린 며루치 먹지 말자!" 마치 고부간의 전투에서 승리한듯 기쁨의 웃음이 예쁜 입에서 나온다.
웃음만 짓고 있던 나의 처에게" 아무개 엄마는 며눌아이가 어때요? 아무 말이 없는것 보니 문제가 없나 보내?"
조롱조는 아니고, 무엇이 있겠지?, 아주 재밋고 당찬 어떤 행동이?, 하고 궁금들 한 모양이다.
잠시 가만히 있더니 조용히 한마디 한다.
"아무개가 누굽니까? 네가 사랑하는 나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을 사랑하는 여인을 어찌 미워할 수 있나요.
난 며늘아이가 고마워요. 내 아들을 사랑해주니깐요! 더 무엇을 바래요?"
돌아오는 차안에서 "당신 오늘 옆에서 들으니 명언을 말하는 것 같더라."
나의 마음을 꼭 잡는 말을 또 한다.
" 그게 다 시어머님한데 배우고 받은 사랑 때문에 제가 느낀 심정을 말했을 뿐입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칭찬을 시어머니한데 즉 나의 어머니한데 돌리니 아내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 후 그 모임에서 아들, 며늘아이 흉보는 일은 없어졌다.
빛바랜 아내의 사진.
소설이나 영화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장면이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며
힘들 때 혹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진이 등장한다.
난 이를 흉내 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우러나왔는지 미국에서 힘들 때면
이 사진을 꺼내보면 "여보 제가 있잖아요." 하는 눈빛을 보곤 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이 사진 대신 귀여운 손주들 사진이
지갑을 차지했다.
잊고 있던 이 사진을 서랍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진은 꾸겨지고 빛도 바래고 선명도가 떨어지지만 그 눈빛은 변함 없이 여전하다.
어느 시인은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라고 읊었지요.
여자는 다르기 힘들다, 여자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神도 어쩔 수가 없다고들 한다.
얼마 전에 부부 싸움할 때 여자가 내뱉는 소리로 남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돈이면 다냐?" 하면 밤일은 엉망인데 돈을 잘 벌어 온다는 뜻이고
"니가 사람이냐? 짐승이지!"하면 반대로 밤일은 잘하는데 돈은 못 벌어오고,
"그래 너 잘 났어! 정말 잘 났어!" 하면 둘 다 다 잘하는 놈이다.
그러나 둘 다 못하면 이런 소릴 듣는다." 니가 해준 게 뭐가 있냐? 이 새끼야!" 욕도 나온다.
우리 집에서 이런 소리가 하나도 나질 않는다.
神도 다룰 줄 모르는 여자 다루는 방법을 일찍이 알았기에 조용하다.
왜 우리 집인들 두 사람 의견이 마찰 안 생기란 법 없지만
집사람 심기가 틀리면 아무 말 없이 그저 닭똥 같은 눈물만 흘린다.
이런 모습 보면 난 수그러진다. 즉 난 눈물에 약하다.
반면 집사람은 사랑에 약하다.
서로 약점을 알기에 큰소리가 없는 집안이다.
환갑이 지난 며칠 후에 나에게 큰 부탁을 하나 하겠는데 꼭 들어 달란다.
뭘까? 고급 벤츠차? 3캐럿 다이아몬드반지? 아니면 일 년짜리 세계여행? 모두 아니다.
너무나 쉽고 반면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하루에 여섯 번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한 번도 아니고 여섯 번이다. 왜 여섯 번일까? six와 sex가 발음도 철자법도 비슷해서?
일단 해주기로 약속하고 다음 날 사랑 해를 연속으로 여섯 번을 읊조리니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해달란다.
단 둘이 살기에 보고 듣는 사람도 없어 눈치 볼 것도 없지만 어찌 어색하다.
어색하다는 말은 힘든다는 말과 같은 것 같다. 어물 정하며 지내기 일쑤였으니.
18th June 2015 McWay Falls
44년을 함께 살면서 서로의 사랑을 느끼기에 항상 웃음이 집안에 가득했다.
특히 큰 병이 들었을 때 약보다도 사랑을 느끼는 것이 특효약이라 생각하고
더 많은 애정 표시를 했다.
작년 어머니날을 맞이하여 써 놓은 글을 보곤 그리 좋아하고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해도 이 글을 보며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것으로 대신하는 모양이다.
2015년 6월17일
홍경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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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의 책상에 어떤 여자 사진이 있어 집어 보니 30여 년 전 내 사진이다.
유심이 보고 있는데 자기 고교 동문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읽어 보란다.
그 글을 읽으며 고맙고 감사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감을 느끼게 하였다.
살아가는데 건강, 돈 모두 중요하겠지만 여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랑이다.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라고 느끼게 만든 그이의 글을 나의 보금자리에
옮겨 놓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읽어보곤 한다.
2014년 5월20일
박순영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큰형님집에서 일주일 지내다 단독주택 이층(아파트형식)에 이년간 살다가
미국 올 때 정착금으로 쓰고 나중에 벌어서 갚으라고 친구가 빌려준 돈 만불에 있던 돈을 보태서
$16,000을 down pay 하고 $65,000 짜리 집을 San Mateo에 구입했다.
구입하고 어찌나 좋은지 쉬는 날이면 내려와 겉에서 보고 "이게 내집이다."하며 좋아 했다.
직장이 San Francisco라 출근거리가 20여마일이지만 먼지 모르고 다녔다.
미국에 살면 자동차는 필수이지만 좋은 차, 새차는 엄두도 못내고 있는데 어느 주말 큰형님이
Garage Sale에서 Chevy NOVA Station Wagon을 $300에 파니 사라고 하여
찾아가니 살 사람이 많다며 $350롤 올린다. 운전도 확실히 배울 겸 구입했다.
비록 10년이 지난 중고 차지만 내 자가용이 생겨 쉬는 날이면 아내와 어린 두아들 데리고
먼데는 못가고 가까운 공원으로 다녔다. 행복함을 느끼면서.
6개월 쯤 지나 이제 미국 시내 운전도 자신이 생겨 좀 더 좋은 차가 필요할 때
큰형님과 같은 직장에 다니시는 분이 VW Station Wagon을 파시다기에
그분이 원하는 가격 $1,600 그의 아파트로 가서 보니 노란색이고 깨끗하여
마음에 들어서 돈을 지불하는데 옆에 갓난아이를 안고 있던 부인이 한마디 흘린다.
"다른데 가서 팔면 $1,800을 받을 수 있을덴데~~~"
영 마음이 찜찜하다. 갓난아이가 눈에 발핀다.
아무 말 없이 $200을 더 주었더니 부인에게 혼이 날까 봐서 인지그대로 받는다.
San Mateo집에서 10년을 살고 $160,000에 팔고 애초에 살고 싶던 Foster City San Francisco Bay가에
꿈에 그리던 집을 구입했다. 이 집 살 때 어머님이 꿈을 꾸셨는데 돼지가 우굴거렸다고.
오늘 바람 부는 집앞 둑길을 걸으며 옛일이 생각이 나서 8년 전에 쓴 글을 찾아 읽어 봅니다.
이 글은 중앙일보 LA판에 실렸고 영어로 쓴 것은 LA에서 발행되는 영어 잡지 "KoreAm" 2009년 2월호에
Valentine's Day 기념으로 실렸던 글입니다.
닭살이 돋아도 참고 읽어 보세요.
27th June 2016 홍 경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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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할일이 특별히 없어 일찍 일어날 일도 없지만 토요일은
늦게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같은 시간에 저절로 일어 나게 된다.
창밖 하늘이 붉게 타오르는것이 맑은 날씨에 지금 태양이
"나 여기 있다.어둠아~ 물렀거라" 하며 떠 오르는 모양이다.
차거운 날씨라기 보다는 아침의 싸늘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상쾌하기
이루 말 할 수 없고 "당신 손은 항상 따듯해,"하며 손을 잡는 집사람의
마음이 내 손 보다도 더 따듯하게 느껴진다.
도요새들은 아침거리 찾기에 바쁘고...
San Mateo Bridge는 그 위용을 드러내며 Foster City 우리의 보금자리에 햇살이 내린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산다는것에 늘 감사하고 있다.
해변가의 땅은 흙이 아니라 모두 조개껍질들이다.
갯벌에 조개(바지락)가 엄청 많은데 잡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모두 새들 몫이다.
물이 지금 막 들어오고 있다.
"당신 어떻게 건넜어?"
"뛰어 넘었지?" 믿을 수 없다. 이렇게 넓은데???
"당신 못 넘겠지? 저리로 돌아 와,"
얼마 전까지만해도 해 보겠는데 이제 나이가 있어 뛰어서 못 넘겠다.
결국 돌아서 몇분간의 헤어짐에서 다시 만나 왼발 바른발 맞추며 걷는다.
"발 시려 죽겠다."
"왜?"
"아까 뛰어 넘다가 한발이 물에... 양말이 다 젖었나 봐!"
"........."
기온이 싸늘한데 얼마나 발이 시릴까?
"내 양말 벗어 줄까?"
"그리 해 주시면 좋지요." 이 사람 사전엔 사양이란 없다.
걷다 말고 서서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하여간 한쪽 발을 공중에 처 들고
양말을 벗어서 주니 냉큼 받아 젖은 자기 양말과 바꿔 신고는
아유~ 따듯해라."
한편 나는 한발은 맨발이지만 신발을 신어 남들이 알 수 없고 젖은 양말
신은것 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보잘것 없는 양말 한쪽이지만 이 작은것으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다.
무척 큰 자비를 베푼양 으쑥한 모습을 한 멋진 남편으로 군림 하려 한다.
행복한 인생이란 가장 가까히 있는 부부 사이에서 별것도 아니고 값진 보석도
아닌 서로 위하는 마음에서 오가는 정들이 쌓이는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Dec. 16th 2008
지금 나의 두 며늘아이가 자식들 대하고 시부모 모시는 것을 보면 아주 훌륭한 시어머니가 될것 같다.
가까히 사는 둘째는 매주 주말이면 시부모를 모시고 점심 아니면 저녁을 대접한다.
450마일 떨어저 사는 큰아들네는 무슨 날이면 꼭 올라 온다.
학교 방학이 아닐 때는 우리가 내려가면 그리들 좋아한다.
안 올라 온다고 쾌심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바쁜 자식을 이해하고 시간 많은 우리가 힘이 들더라도
내려가서 지내면 되는 것이다. 사실 자식 보러가는 길 힘들어 하는 부모 있는가?
어떤 부모는 자식이 전화도 안한다고 불평인데 전화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부모가 먼저하면 안되나?
내가 젊은 시절 부모님을 어찌 대했는가도 생각하면서 자식들 입장도 이해를 해야한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좋아야 가정에 행복이 감돌고 웃음이 넘쳐난다.
家和萬事成이란 말을 다시 새겨본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느끼는 행복이 무엇인가?은 많은 재물도 아니고 건강을 유지하며
가족간의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순간 순간을 즐겁게 살며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2017년 10월 12일간 유롭여행을 다녀 왔으니 2주간을 같은 도시에 사는 둘째네 손주들을 못 본셈이다.
어제 장시간 비행기에 시달려 피곤하지만 밤새 라쿤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앞연못을 청소하다가
별 생각 없이 길 건너 둑길을 보니 두 아이가 내리막길에서 자전거을 끌며 내려 온다.
가을 방학이라 몇몇 아이들이 자전거 혹은 스케이트보드를 즐기고들 있기에 그런가하고
무심히 보고 손에 흙을 묻치며 일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하는 소리가 들린다.
손녀가 웃음을 잔뜩 머금고 자전거를 잡고 서있고 그 뒤로 손자가 보인다.
나도 모르게 흙 묻은 두손을 벌리니 내 가슴에 차례로 안긴다. 보고 싶던 녀석들 체온이 와 닿는다.
손자녀석이 "할아버지 좋아하는 것 드릴께요."하면서 백팩에서 초코파이 4개를 꺼내 내밀며
핼멧들을 벗으니 이마에 땀이 흐른다.
30여분 자전거를 타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고 싶어 빨리 왔으니 더운가 보다.
데리고 들어 와 냉장고를 여니 시원한 포도쥬스가 한팩밖에 없다. 누가 이걸 마실래하니 동생을 주라며
손녀는 냉수를 마시겠단다. 서씀치 않고 동생에게 양보하는 마음씨가 착하기만 하다.
어린 손주들의 이런 행동은 날 무한한 행복감을 맛보게, 흐뭇하게 만들고 대견스러워 더욱 사랑하게 한다.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할머니에게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소상하게 알려준다.
라스베가스에 가서 연등을 날리던 일, 쿠키공장 견학 간 일, 과학박물관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 것등등
2주간에 있었던 일들을 열거하기에 바쁘다.
이런 손주가 가까히 살고 있다는 현실이 우리에겐 무엇 보다도 큰재산이요 행복한 삶을 영유케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착한 두 며늘아이 보면 우리 참 복 많이 받은겁니다. 더 바랄것 없어요."
그리곤 이런 말도 자주한다.
"두 며늘아이, 두 아들, 6명의 손주, 그리고 당신~~~모두 나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지요,"
출가한 자식이 손주들을 데리고 가까히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 부부는 또하나의 축복 받은것이라 여기며 산다.
5월에 듬찍막한 아들을 순산한 둘째 며눌아이가
4개월간의 출산 휴가를끝내고 9월 부터 2년9개월된 딸과
갓난아이를 유아원에 맡기고 출근을
시작했는데 딸아이가 낮선 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첫주는 하루에 2,3시간씩 울었다고...
어린것이 엄마 품을 떠나
사회생활(?)을 해야하는 그 고통을 어찌 이길까?
불쌍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2주가 지나면서 울지도 않고 어느 정도 선생님,
다른 아이들과도 어울려서 지낸다기에
3주가 지난 어느 날 이 할아버지가 가서
유아원 분위기도 알아보고 손녀 용기도 주자는 의미에서
오전 11시에 방문을 했다.
운전면허증 사진과 대조하고 며눌아이 한테
전화로 면회허락을 받고서야
문을 열어 주며 손녀가 있는 교실로 가서
"에리스,누가 왔게?"
"할아버지!!!" 하더니 뛰여 오는데 넘어질까 겁난다.
내 목을 있는 힘을 다해서 끼여 안는다.
여태 그렇게 짤싹 안긴 적이 없었다.
다른 때 못 느꼈던 사랑이 전해온다.
그 사랑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할아버지에게 안긴 상태에서
부럽게 쳐다보는 다른 아이들을 여유 있게
쳐다보는 이 예쁜 것.
원장이 눈짓으로 내려놓기를 권한다.
내려놓는 순간 "내 핑크 코트가 어디 있지?"하며
옷들 걸린 곳을 쳐다 보는 것이 집에 가는 줄 안다.
"아빠가 나중에 올 거다."
얼굴이 굳어진다.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저 아이 이름이 뭐냐?"
한 남자애를 가리키니 엉뚱하게 울고 있는 다른 애를 가리키며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고 있어요. 많이 슬퍼해요."
자기 심정을 이 아이를 빗대서 말하는 것을 알겠다.
벼란간 할아버지 손을 놓고 다른 방으로 달려간다.
곧 이어 도라 그림이 새겨진 점심 가방하고
플라스틱 빽에 담긴 과자를
그 작은 손으로 꼭 움켜잡고 나온다.
"지금 집에 안가니깐 갖다 놓고 오너라."
실망한 표정을 보이면서
갔다 오더니 아래 입술이 튀어나오면서
"집에 가요."하며 울기 시작이다.
"Go Home, go home...Let's go home."
"디란(동생이름)이 자고 있어 갈 수 없다."
손으로 잠자는 사람 깨우는 시늉을 하며
"깨우면 되잖아... Wake him up, wake'm up, go home"
그 큰 두 눈에서 눈물이 마구 흐른다. 콧물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미안한 생각뿐이다.
11시 30분 낮잠 시간이다. 모두들 침대로들 간다.
선생님이 와서 내 품에서 억지로 떼여 안고서 간다.
계속 울며 할아버지를 원망하듯 쳐다본다.
집으로 운전하며 오는 내내 "집에 가요."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고 눈에서 쉴 줄 모르고 흐르는 손녀의 눈물은
그 작은 얼굴이 모자라는지 내 빰에서도 흐른다.
Oct.19th 2006
할아버지인 난 손주들에게 큰어른으로 존재되기 보다는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어릴적 배운 노래, 묵 찌 빠를 가르처 만나면 시도 때도 없이 음식점, 놀이터,
공항 대합실에서 묵찌빠를 하기도 하고 일곱살, 열살짜리 손자하곤 팔씨름도 한다.
이런 할아버지인데도 버릇 없이 행동하는 녀석 없고 과자 같은 것 먹을 때도 항상 먼저 챙겨준다.
이런 녀석들이 매년 자리는 모습을 보는것이 나의 낙이고 즐거움이다.
오밀조밀하던 녀석들이 이젠 Teenage에 세명이 되고 11살이 두명 9살이 한명이라
듬직하게 느껴진다.
열살이 막 지난 손녀가 대견하여 그저 물어 봤다.
"Elise 너 이제 몇살이지?"
열살입니다. 할줄 알았는데 이 녀석 대답이 너무 웃긴다.
"저 이제 할아버지 처럼 두자리 수의 나이랍니다." 하며 놀리듯 살짝 미소 짓는다.
어릴적 생일, 성탄절 선물은 장난감 보다도 책을 원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독서도 많이 해 시력이 나뻐젔다.
학교 성적도 좋다.
10살 때 North California Gymnastics Champion이 되고
11살 때는 Hawaii에서 개최된 국제대회(중국불참) Lavel 4에서 우승했다.
그 후 다른 대회에서 철봉종목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4개월간 물리치료를 받고 기계체조를 고만 둔다.
6년간 기계체조를 하면서 어찌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고만 둔것을 조금도 후회를 하지 않고
당시의 영광을 되새길 생각도 아니한다.
각종 대회에서 받은 메달.
Dec. 29th 2016 13살이 되었다.
이제 Teenager가 되었으니 조금 있으면 숙녀티가 날것 같다.
Teenager가 됨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온식구가 Maui로 7박8일 여행을 다녀왔다.
동생 Dylan(5학년)은 1월 29일2017년 태권도 승단대회에서 2단으로 승단됐다.
일요일엔 미식축구 선수로 뛴다. 공 가지고 달리는 15번 손자 Dylan. touch down!
다른 농구 선수보다 일년 늦게 입단하고 키도 작아 주전 5명에 들지는 않지만 교체선수로
뛰고 지난 주(Jan.26th 2017)에 San Mateo 지역 챔피온이 되었다.
10승2패로 play off game에 진출하여 2패를 안긴 두팀을 준결승, 결승에서 만나
2점, 1점 차이로 두번을 역전으로 이겨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뒷줄 맨가운데 36번이 손녀 Elise.
작은 아들 내외는 딸은 농구 챔피온, 아들은 태권도 2단이 되어 자식 때문에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즐겁기만 하다.
Jan. 2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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