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구자명씨
고정희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히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작가소개: 고정희(高靜熙, 1948 ~1991)는 대한민국의 시인.
전남 해남에서 출생하였고, 한국신학대학을 나왔다. 《현대시학》에 〈연가〉가 추천되 어 문단에 나왔으며, ‘목요시’동인으로 활동했다. 1983년 《초혼제》로 ‘대한민국문학 상’을 탔다. 1991년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 사고로 작고했다.
시를 쓰는 한편 광주 YWCA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 법 률 상담소 출판부장 등을 지내며 사회 활동을 했고, 특히 1980년대 초부터 여자와 남자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동인으로 참여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작품감상: 이 시는 1980년대 고정희 시인이 발표한 시입니다.
버스 속에서 졸고 있는 풍경이 젊은 날의 제 모습 같아서 공감이 갑니다. 일하는 여성의 역할은 셀 수 없이 많은데 여성의 진정한 휴식(?)은 버스나 전철 안에서의 잠깐 조는 시간뿐일까요? 팬지꽃 아픔, 안개꽃 멍이라는 시어에서는 모든 가정의 안정과 행복이 여성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이 구자명씨와 같은 경우에 놓여 있지 않겠지만 어느 한 시대의 여성사를 보여 주는 것 같아 소개해 올립니다.
첫댓글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여자가 받쳐 든 한 식구의 안식' 고단한 줄도, 부당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살아낸 우리 어머니 세대, 그리고 우리 세대의 여성 자화상같은 시, 잘 읽었습니다.
저는 가끔 고정희 시인의 시를 만나면 마음속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예전에 기억했다가 지금은 잊었는지 모르지만, 생전에 있는지 알았는데 44세에 지리산에서 실족하여 세상을 떠난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왜 괜찮게 생각한 시인이었는가 이 시를 다시 읽어보고, 인터넷을 두루 섭렵하니, 생가도 보이고 고정희 시인의 다른 시도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구 씨 중에 자자 돌림 자들이 있습니다. 구자명 씨는 아기 엄마입니다. 출근 버스에 아침 햇살을 받으며 졸기 시작합니다. 살림하는 보통 여인네들의 모습으로, 바깥 풍경, 계절을 묘사하고 그 여인의 삶을 상상하며 시를 썼습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살아가는 모습은 같은 것 같습니다. 좋은 시, 좋은 시인 알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이런 시가 있었군요. 직장 다니는 위킹맘의 애환이고 위대함이기도 합니다. 지난 날 제 모습 같기도 하고, 당시 함께 일했던 선배들 모습이기도 합니다. 5060세대 우리 모두가 구자명씨와 똑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좋은 시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현실입니다 작장 맘들 거의 구자명이 아닐까요 내 딸도 며느리도 내 젊은날에도 흔하게 보이는 모습을 한편의 시로 표현 했습니다
죽음 의 잠 거부의 화살 이란 좀 어렵습니다 새로운 시각입니다
고정희 씨의 시를 소개해 주셔서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
그분의 시는 현실적이고 감동할 수 있는 시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갑 시인이라 과거에 관심있게 그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비명횡사? 했다는...
아까운 시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란 시도 저는 참 좋습니다.
상처를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헤쳐 나가자는 메시지인데 요즘 힘든 제게 주는 북돋움 같아 가끔 읽습니다.
선생님들 모두 말씀해 주신 내용들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