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의 잠영을 끝낸 밍크고래가 구룡포 부둣가에 누워있다 바위판화 속 바래어가는 이름이나 호기심으로 부두를 들었다 놓던 칼잡이의 춤사위이거나 잊혀지는 일만큼 쓸쓸한 것은 없다 허연 배를 드러낸 저 바다 한 채, 숨구멍이 표적이 되었거나 날짜변경선의 시차를 오독했을지도 모를 일 고래좌에 오르지 못한 고래의 눈이 칼잡이의 퀭한 눈을 닮았다 피 맛 대신 녹으로 연명하던 칼이 주검의 피비린내를 잘게 토막 낼 때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 조문은 한 점 고깃덩이나 원할 뿐 고래의 실직이나 사인(死因)은 외면했다 주검을 주검으로만 해석했기에 버텨온 날들이 상처의 내성처럼 가뭇없다 바다가 고래의 난 자리를 소금기로 채울 동안 고래좌는 내내 환상통을 앓는다 테트라포트의 느린 시간을 낚는다 주검의 공범인 폐그물도 인연이라고 수장된 꿈과 비명 몇 숨 그물에서 떼어내자 반짝, 고래좌에 별 하나 돋는다 바다의 정수리
밍크고래 한 마리가 잡혔나봐요. 바다의 로또라 불리죠. 그런 고래 한 마리가 구룡표 부둣가에 누워있으니, 자못 의심스럽습니다. 어떻게 누워있게 되어있는지 말이죠. 하지만 시인은 첫 소절에 '만녀의 잠영을 끝낸 밍크고래가'로 시작합니다. 의심을 게워냅니다. 수명을 다한 밍크고래라는 말이죠. 과연 그럴까요?
바위판화 속 바래어가는 이름이나 호기심으로 부두를 들었다 놓던 칼잡이의 춤사위이거나 잊혀지는 일만큼 쓸쓸한 것은 없다
세상에 가장 쓸쓸한 일은 잊혀지는 일이죠. 반구대 암각화에 있던 고래와 한 때 부둣가에서 고래를 해체하던 그런 모습들은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어쩌다가 고래는 여기에 누웠을까요?
허연 배를 드러낸 저 바다 한 채, 숨구멍이 표적이 되었거나 날짜변경선의 시차를 오독했을지도 모를 일 고래좌에 오르지 못한 고래의 눈이 칼잡이의 퀭한 눈을 닮았다
아하, 고래는 숨을 쉬러 올라왔다가 밀렵군의 표적이 되었군요. 아니면 저 혼자 길을 잃었습니다. 별이 되지 못한 고래의 눈이 칼잡이의 퀭한 눈을 닮았군요. 시인은 칼잡이의 인생과 고래의 인생을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배를 뒤집는다는 것은 생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절대로 배를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푸른 등을 보이고 바다 밑에서 보면 하얀 배가 보이죠. 보호색의 일종입니다.
피 맛 대신 녹으로 연명하던 칼이 주검의 피비린내를 잘게 토막 낼 때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 조문은 한 점 고깃덩이나 원할 뿐 고래의 실직이나 사인(死因)은 외면했다
드디어 해체 작업이 시작됩니다. 칼을 쓸 일이 없던 칼잡이가 주검을 가릅니다.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라는 표현은 시인의 창의력입니다. 사람들은 고래의 사인은 외면하죠, 칼잡이의 실직도 외면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이익 -한 점 고깃덩이-에만 관심을 쏟죠.
주검을 주검으로만 해석했기에 버텨온 날들이 상처의 내성처럼 가뭇없다 바다가 고래의 난 자리를 소금기로 채울 동안 고래좌는 내내 환상통을 앓는다
고래의 생이나 칼잡이의 생이나 우리의 생은 모두 겉모양에 의해서 판가름납니다. 속에 쌓인 상처들은 걸어온 역사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바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난 자리를 소금으로 채우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듯 고래별은 환상통을 앓습니다.
테트라포트의 느린 시간을 낚는다 주검의 공범인 폐그물도 인연이라고 수장된 꿈과 비명 몇 숨 그물에서 떼어내자 반짝, 고래좌에 별 하나 돋는다 바다의 정수리
아하, 이 고래는 폐그물에 걸린거였어요. 인간이 만든 환경오염의 희생양이었어요. 그물에 걸린 고래는 비명에 갔으며 숨을 쉬지 못했어요. 그물을 떼어내자 그제야 고래는 별로 승화됩니다. 바다의 중심이 되는거죠.
고래의 기원(암각화)과 칼잡이의 인생을 잘 버무려놓은 시입니다. 사람들은 고래의 생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저 고기만을 기다립니다. 칼잡이의 인생도 잊혀집니다. 하지만 바다는 그 모든 것을 다 채우죠. 우리의 인생도 고달프고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은 모두 우리를 보듬고 있는 것들에 의해 다시 채워지고 위로가 됩니다. 그런 시절을 견디면 별과 같은 희망이 보입니다. 고래는 제 몸을 희생하고는 별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두려움이 앞서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