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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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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인물록 스크랩 파평
용연봉강재사랑 추천 1 조회 468 13.11.09 05:02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제  3  부  선조약사

시조태사공약사....................................121                    10세 어사공 순                    

2세 공신공 선지............................. .....125                     11세 문현공 보                    

3세 복야공 금강............................. .....126                     12세 찬성공 계종                  

4세 문정공 집형                                   127                     12세 대언공 안적                     182

5세 문숙공 ①약사                                128                     12세 양간공 안숙                     182

      문숙공 ②영조어제(치제문)             132                     12세 소부공 암                        183

                    치제문 해설                     132                     12세 태위공 안비                     183

      문숙공 ③조칙                                132                     13세 영평군 척                        184

                    조칙해설                         132                      14세 야성군 혁                        185

      문숙공 ④순종의 치제문                  133                     14세 전의공 승휴                     185

                   치제문 해설                      134                     14세 충간공 승순                     186

      문숙공 ⑤열전(고려사에서 역제)     135                     14세 판도공 승례                      186

      문숙공 ⑥신도비명                         142                             치제문 

      문숙공 ⑦심묘사적                         146                     15세 소정공 곤

      문숙공 ⑧묘소약기                         150                             소정공 묘소

      문숙공 ⑨동상 및 사적                    151                             세종대왕 치제문

6세 어사공 언순                                   151                      15세 원평군 목

6세 복야공 언식                                   152                      15세 소도공 향

6세 문강공 언이 ① 약사                       153                      16세 상호군공 희이

6세 문강공 언이 ② 묘지해설                158                       16세 한성공 희제

6세 봉어공 언민                                  161                       16세 영천부원군

7세 문정공 인첨                                  161                       16세 교리공 돈

7세 시랑공 돈신                                  164                       17세 상호군

8세 남원백 위                                     165                       17세 주부공 당

8세 화산군 인직                                  166                       17세 영원부원군 호

8세 유수공 상계                                  167                       17세  정호공 당

9세 덕산군 은형                                  167                       19세  효성공 인경

10세 함안백 돈                                   167

 

 

 

                 始祖 太師公 誕降 說話   

  京畿道 坡州市 坡平山 서북맥내령 기슭에 아득한 太古적부터 큰 연못이 있어 이를 용연(龍淵, 一名 嘉淵)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傳說에 따르면 이 못 속에는 龍人이 살고 있어 연못이 불결해지면 雷聲이 震動하고 風雨가 몰아친다고 전한다.

  예전부터 우리 宗中에 傳해오는 가첩 언전(家牒 諺傳) 및 그 밖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113年 前 즉, 新羅 眞聖王 7年(西紀 893年)癸丑 陰曆 8月 15日 龍淵위에 갑자기 雲霧가 자욱하게 끼고 요란하게 天動과 번개가 치면서 소나기가 내리는 가운데, 연못위에 한 玉函이 떠오르자 마을사람들이 奇異하게 여기어, 고을 太守에게 고하여 태수가 연못가에 와서 보니 玉函이 가운데로 沈水하는 것을 보고 헤어지게 되었는데, 이날 해가 질 무렵 연못가에 빨래하러왔던 한 老婆가, 무지개가 찬란하게 뜨며 玉函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이를 건져내어 열어보니, 그 속에 5色의 羽毛에 쌓인 어린 시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이 玉函에 관해서 일부 文獻에는 石函이라고 記錄하고 있고 太師公 墓誌에는 金櫃로 되어있다.)

  찬연한 瑞氣를 발산하면서 玉函에서 나온 사내아이는 융준용안(隆準龍顔)의 상으로 코가 우뚝하여 龍의 像을 닮았고, 양쪽 어깨에는 붉은 점이 있어 日月을 상징하였으며, 좌우 겨드랑이에는 비늘이 81개가 돋아 있었고,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어서 北斗七星의 形象과 같았으며, 온몸에는 光彩가 솟아나와 눈을 부시게 하였으니, 이 어른이 바로 坡平尹氏의 始祖이시다.

  그런데 우리始祖 太師公이 得姓하신 緣由에 관해서 宗中에서 예전부터 傳해오는 바에 의하면 玉函을 건져낸 윤온(尹?)할머니의 姓을 따라 尹姓이 되었다고 傳하나, 家牒 및 그밖에 文獻에 따르면 玉函자체에 尹字가 세겨져 있었기 때문에 尹姓이 되었다고도 하며, 또한 玉函에서 나오실 때 손바닥에 尹이란 글자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고도 傳한다. 太師公의 諱는 莘達이신데 또 하나의 휘로는 화신이라고도 傳해지고 있다. 玉函에서 玉童子로 나오신 公께서는 老婆의 極盡한 精誠과 사랑으로 養育을 받으시었는데, 파평산과 용연부근에서 자라나심에 따라 기골(肌骨)이 장대(壯大)하시고 재기(才器)가 뛰어나셨다고 전한다.

                        坡 平 貫 鄕 錄

같은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만나게 되면 혹시 자기와 혈통이 같은 일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서로 본(本)을 물어보게 된다.

  성은 같은 조상을 갖는 같은 혈통임을 나타내는 이름으로서 딴 혈통의 씨족들과 구별하게 되나 성은 같으면서 시조가 다른 경우가 있어 혈통을 완전히 구별하기 어려웠으므로 성 앞에 본을 붙여서 다른 혈통과 완전히 구별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성이 생기기 이전부터 부족이름을 사용하여 같은 혈통임을 나타냈으므로 이것이 본의 성격을 띠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을 본관(本貫) 본향(本鄕) 관향(貫鄕) 관적(貫籍) 선향(先鄕)등으로도 부른다.

  본은 시조가 출생한곳이나 정착하여 살았던 곳을 말한다. 또 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는 백(伯)이나 군(君) 또는 부원군(府院君)등을 봉작(封爵)하게 되는데 함께 봉토(封土)하게 되는 지명(地名)을 따서 임금이 본을 하사하는 경우가 있으며, 후손들이 선조의 영광을 기리누리기 위한 방법으로 봉토된 지명을 따서 본을 삼았던 경우도 있었다. 파평윤씨 성을 갖고 있는 우리의 본(本)은 파평(坡平)이다파평은 현재 경기도(京畿道) 파주시(坡州市) 파평면(坡平面)을 말한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파주시 파평면 눌로리(訥老里)에 있는 파평산(坡平散) 아래 용연(龍淵)이라는 못에서 우리시조 태사공(太師公)이 탄강하셨는데 이곳은 우리 일백만 혈족의 영원한 고향이요 자랑스러운 본향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본향인 파평의 역사적인 변천과정을 고찰해 보면 파주시는 경기도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파주시는 고려인종 23년(서기1145년)에 간행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때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이라 했던 것을 신라35대 경덕왕(景德王)때 파와 평을 따서 파평현(坡平縣)이라 개명하고 내소군(來蘇郡)에 예속시켰다가, 고려 예종1(1106)년에 감무(監務)를 두게 되었다.

  또 조선 단종2년(1454)에 간행된 고려사(高麗史)와 조선 중종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순종 2년(1908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파주읍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때 술이홀현(述爾忽縣)이라 하던 것을 신라35대 경덕왕때 봉성현(峯城縣)으로 개명되어 교하군(交河郡)에 속하게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양주(楊洲)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명종2년(1172)에 서원현(瑞原縣)으로 고쳐서 감무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가, 고려 우왕13년(1378)에 현감(縣監)으로 바꾸어 두게  되었다. 조선태조 2년(1393)에 현을 고쳐 서원군으로 승격시켰다가 태조7년에는 파평군을 합병하고 서원과 파평을 합쳤다해서 원평군(原平郡)이라 하였다. 태종 15년(1415)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태종18년에 다시 원평군으로 환원되었다. 조선조 제7대 세조대왕(1417∼1468)은 세종의 2남 문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청송심씨이고, 할머니는 원경왕후 여홍민씨이며, 비(妃)는 파평윤씨 윤번의 딸 정희왕후이다.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에 봉해지고 단종이 어린나이로 즉위하자, 한명회와 권람의 모의로 세조는 왕위를 빼앗기 위한 계획을 구체화하여, 단종의 중신이었던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죽이고, 왕위 경쟁자로 지목된 아우 안평대군 부자를 강화도에 유배, 군국대권을 장악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 육종영(六宗英) 육절신(六節臣)등 수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영월에 유배사사 하는 등, 계유정난을 일으켜 1455년(단종2년) 왕위에 즉위하였다.

  1459년(세조4)시국이 안정됨에 따라 정변으로 즉위할 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세조비 파평윤씨, 정희왕후의 고향을 승격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원평군(原平郡)을 목(牧)으로 승격하는데 있어 파평윤씨의 파(坡)자와 주(州)자를 따서 파주(坡州)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할머니 태종비 역시 고생을 많이 하였다 하여 여홍민씨에 고향인 여흥(驪興)도 또한 여주(驪州)로 동시 승격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조 개국한 이성계 태조대왕은 태조 3년 8월 송도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하고 정도전(鄭道傳)과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궁월인 경복궁을 건립하고 사직을 봉안하는 종묘 27간반을 건립, 창엽문(蒼葉門)이란 현판을 설치한 것은 이미 조선조는 28왕 28세로 끝이 난다는 예측을 한 것이라 하며, 태조 3년(1394) 10월 한양으로 천도 후 욕망에 불탄 태종과 세조대왕의 왕권 다툼으로 모의를 계획 형제와 종친을 위시 수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도, 세상만사 우리나라 운세이며 이 세상에 타고난 개별적 인생의 운명인 것이다.  연산군 10년에 파주를 사냥터로 삼고 나머지 땅을 이웃 고을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중종1년(1506)에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사냥터를 폐지하고, 다시 파주목으로 환원시켰다가 고종32년(1895)에 파주목을 파주군으로 다시 고쳤다. 일제(日帝)에서 해방된 1945년에는 연천군(連川郡)이 북위38도선 이북에 속했으므로, 그 일부 지역인 적성면(積城面)만을 파주군에 병합시켰다. 1996년 3월 1일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법률 4664호에 의해 파주시로 승격됐다. 동국여지승람이나 파주읍지(坡州邑誌)에는 파평윤씨 여러 선조에 대한 유적지의 기록이 많다. 파평윤씨 시조가 태어나신 용연(龍淵), 시조께서 성장하시고 무술을 연마하셨던 파평산, 시조께서 사셨던 집터에 손자이신 복야공(僕射公) 금강(金剛)께서 세우신 금강사(金剛寺), 지금은 없어진 이 절터 경내에 세워진 미타사(彌陀寺), 문숙공(文肅公)을 시중 들었던 여진(女眞) 여인 웅희(熊姬)의 슬픈사연이 서린 낙화암(洛花岩)과 웅담(熊潭), 시조께서 조정으로 출퇴근 하실 때 건너시던 여음진(如飮津)이 임진(臨津)으로 개칭(改稱)되고, 문숙공께서 울분의 나날을 독서로 보내시던 상서대(尙書臺)와 공께서 영원히 잠들어 계신 분수원(焚修院)등이 있다.  또 파주읍지의 인물조(人物條)에는 이 고을 인물에 태사공(太師公) 신달(莘達), 복야공(僕射公) 금강(金剛), 문정공(文靖公) 집형(執衡), 문숙공(文肅公) 관(瓘), 문강공(文康公) 언이(彦?), 문정공(文靖公) 인첨(鱗瞻), 양간공(良簡公) 안숙(安淑), 소부공(少府公) 암(?), 판서공(判書公) 해(垓), 정후공(靖厚共) 호(虎), 등 거룩한 선조들이 기록되어있다.〈이외에도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남계(南溪) 박세체(朴世采)등의 이름도 기록되어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파주를 원평도호부(原平都護府)라 기록하였고 인물에는 문숙공(文肅共) 관(瓘)만이 기록되어있다. 여지승람(與地勝覽) 파주읍지(坡州邑誌)의 능묘조(陵墓朝)에는 문숙공 관의 묘, 소정공(昭靖公) 곤(坤)의 묘, 대제학공(大提學公) 봉조(鳳朝)의 묘가 기록되어있다.

〈이외에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묘가 있고 조선 예종(睿宗)의 계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의 공능(恭陵)과 조선 성종비(成宗妃)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능인 순릉(順陵)이 있고 서쪽 기슭에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서자(庶子)인 담양군(潭陽君)의 묘가 있다고 한다. 명승고적(名勝古蹟)으로는 봉서산성(鳳棲山城), 파주 용미리(龍尾里)의 석불입상(石佛立像), 공릉(恭陵), 영릉(永陵), 장릉(長陵), 파산서원(坡山書院), 검단사(黔丹寺)등이있다〉

 

             시조 태사공 약사(始祖 太師公 略史)

  시조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성지(聖地)인 파평산(坡平山) 아래에 있는 용연(龍淵)에서 탄강(誕降)하시어 파주(坡州)지역에 사시면서, 어려서부터 학문(學問)과 무예(武藝)를 익히셨다.

  그리고 무예를 하실 때에는 언제나 말을 타셨으며 공께서 말을 타시고 파평산마루의 치마대(馳馬臺)에서 무예를 연마(硏磨)하시다가, 때로는 임진강(臨陣江)을 건너서 다니셨는데 공께서 이 강(江)을 건너실 때는 강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고 하며 이곳을 여음진(如飮津)이라고 전한다.

   학문을 익히시고 파평산에 올라가 무예를 연마하신 그 후, 성년(聖年)에 접어든 公께서 어느 재상(宰相) 댁에 문객(門客)으로 묵게 되었을 때, 그해  극심(極甚)한 가뭄으로 산야(山野)의 초목(草木)이 고사(枯死)할 지경에 이르자 國王께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 위해, 그 재상에게 제문(祭文)을 지으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재상은 집으로 돌아와 제문을 지으려하였으나 서문(序文)이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太師公께서 『이렇게 지으면 어떠하리까?』 하면서 祭文을 지어 올리기를《宣君臣之有罪甘受災殃 奚草木之無智等 蒙焦熱》「군신이 죄가 있으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초목을 마르고 타게 하나이까?」라고 써서 재상에게 제시하자 재상은 글귀를 보고 과연 명구(名句)라며 탄복하였다 하며, 祈雨祭를 지낸 후 비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재상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자세한 문헌은 없다.

  공께서는 문무(武文)를 겸전 인의지도(仁義之道)를 제창 하였으며, 『修德行 仁以利天下』덕을 닦아 인의토대위에서 천하를 다스려야한다는 간곡한 권유로 太祖 王建이 큰 뜻을 이루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신라는 귀족사회의 부패(腐敗)와 국왕의 난정(亂政)으로 도처에 도적이 횡행(橫行)하여 각지에서 토호(土豪)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신라의 국력이 극도로 쇠퇴한 시기에, 궁예는 송도(松都:지금의 개성)에 후고구려를 세워 강원도 황해도 및 평안도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그 뒤 철원으로 국도(國都)를 옮기고 있었는데, 왕건은 그 휘하에 대장으로 있었으며 태사공께서는 그 동료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궁예는 천성이 잔인 횡포하여 폭정과 학살을 자행하여 민심이 완전 이탈되었기에, 공께서는 서기 918년(신라 54대 경명왕 2년)에 동료(同僚) 신숭겸과 홍유 등과 협력하여 태봉(泰封)의 왕이었던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궁예의 부하(部下)였던 왕건(王建)을 국왕(國王)으로 추대(推戴)하였으며, 그때 궁예는 궁중에서 주색에 빠져 있다가 왕건이 쳐들어온다는 전갈을 듣고 『왕건과 윤신달이 함께 쳐들어온다니 이제 끝이다.』하고 절망하면서 궁중을 빠져나와 도망치다가 강원도 평강산골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한편 왕으로 추대된 왕건은 등극과 함께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 하였으며 송도로 도읍을 옮겼다. 이렇게 되어 고려의 태조(太祖)가 된 왕건은 백성들의 호응(呼應)을 얻으니 삼한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그 후 신라를 자주 침범하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劒)을 수차 정벌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공께서는 왕건과 같이 출정하였고,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기까지에 태사공께서는 항상 왕건에 대하여『인의와 도덕으로 백성을 다스려 천하를 이롭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충간(忠諫)하셨는데, 왕건은 그 충간을 감명 깊게 받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한 뒤에 조회 석상에서 태조 왕건은 중신들에 대하여,『이 대업을 이룬 데에는 윤신달의 힘이 크다.』고 유시(諭示)하였던 것이다. 

  고려건국 18년이 지난 서기 935년(고려태조 18년)에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 김부는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태자이하 모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투항하였다. 태조 왕건은 투항하여온 경순왕에게 왕녀를 하가(下嫁)시켜 별궁에 거주케 하면서 백관(百官)의 상위(上位)로 우대하였다. 그 후 서라벌에 동경(東京 : 지금의 경주) 대도독부를 설치하여 대도독으로 하여금 신라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고려에선 신라를 평화적으로 병합하고 그 이듬해인 서기 936년에는 후백제의 신검이 끝까지 반항한 것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아 완전한 민족통일(民族統一)을 이룩하셨는데, 공께서는 이 때에 세우신 큰 공로(功勞)로 그 당시 이등공신인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이 되시었다.

  이때에 책훈된 인물로는 1등 공신에 - 최응(崔凝), 홍유(洪儒 : 義城洪氏始祖), 배현경(裵玄慶 : 慶州裵氏始祖), 신숭겸(申崇謙 : 平山申氏始祖), 복지겸(卜智謙 :沔川卜氏始祖), 2등 공신에 - 윤신달(尹莘達) : 坡平尹氏始祖, 유검필(庾黔弼), 김선평(金宣平 : 신安東金氏始祖), 유차달(柳車達 : 文化柳氏始祖), 이도(李棹 : 全義李氏始祖), 장길(張吉 : 安東張氏始祖), 함규(咸規), 김선궁(金宣弓), 홍규(洪規), 왕희순(王希順), 김훤술(金萱述), 박윤웅(朴允雄)등, 3등 공신에 - 왕식렴(王式廉), 진평(秦評), 견권(堅權), 박술희(朴述熙), 능식(能寔), 권신(權愼), 염상(廉湘), 김락(金樂), 연주(連珠), 마훤(麻煖), 4등 공신에 - 김홍술(金洪述, 박수경(朴守卿)등 이다.  고래태조 왕건은 후삼국(後三國)을 완전히 통일하므로 비로소 민족의 한결같은 대염원(大念願)을 성취한 것은 오직 윤신달(尹莘達, 태사공을 일컬음)의 공(功)이 컸기 때문이었다는 말을 하고 그때의 공신은 1등 5명, 2등 12명, 3등 10명, 4등 2명으로서 모두 29명이 각각 분류되었는데 우리 시조이신 태사공께서는 2등공신(二等功臣)이라는 공호(功號)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라는 관작(官爵)를 받으시게 된 것이다. 태사라는 관작은 태부(太傅), 태보(太保)와 더불어 삼공(三公)의 예우(禮遇)를 받는 최고의 직위이다. 그 후 서기 944년(惠宗 1년) 혜종이 등극(登極)하여 동경대도독부(東京大都督府)에 대도독으로 태사공을 보냈다.  아드님이신 공신공(功臣公)께서는 종신(終身)토록 송도(松都)를 떠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천자(天子)가 작은 나라를 점령하고 제후왕(諸侯王. 오늘의 총독)을 대할 때에는 아무리 신임(信任)하는 사람을 보내도 반란(反亂)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제후왕의 장자(長子)는 볼모로 왕경(王京)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던 일에 근거한다. 따라서 혜종도 그렇게 신임하는 분을 보내면서도 신라의 유민(遺民)이 많았기 때문에 만일을 염려하여 공신공을 송경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공께서는 동경대도독에 부임(赴任)하여 30년 동안을 재임(在任)하시다가 서기 973년(高麗光宗 24년 癸西)에 임지(任地)에서 수(壽) 81세를 누리시고 서거(逝去)하시었는데, 그사이 한번도 부자(父子)분께서는 상면(相面)할 기회가 없었다고 전한다.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이 투항(投降)할 때 마의태자(麻衣太子)와 중신(重臣)들이 강력히 반대한 것이므로 신라백성들 가운데 고려에 대하여 불복(不服)하고 반항심(反抗心)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으리라 추측이 되지만, 그런데도 고려사나 기타 어느 문헌에도 신라유민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적(史籍)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공께서 대도독으로서 유민을 통치(統治)하는데 있어 얼마나 훌륭한 왕도정치(王道政治), 곧 도의정치(道義政治)를 베풀었는지 그 선정(善政)의 정도(程道)를 헤아리고도 남는다.  그뿐 아니라 조정(朝廷)에서도 30년이나 유임(留任)시킨 것도 태사공의 통치가 목민위주(牧民爲主)의 정치였다는 것이 입증(立證)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태사공의 묘소가 실전(失傳) 되었다가 여러 백년이 지나서 찾았는데 그 지방민들로부터 그 곳은 윤능(尹陵)골이라고 전해 온다는 말을 들은 것이 단서(端緖)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 유민들이 태사공의 덕치(德治)에 감동되어 마치 왕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께서는 서거하실 때까지 동경에 머무시어 30년 동안이나 신라 유민을 선치(善治)하여 완전하게 고려의 충성된 국민으로 감화(感化)시켰기 때문에, 공이 서거하신지 10년 후인 성종(成宗)2년에 대도독부는 폐지(廢止)되고 각 군은 그 고을 수령(首領)에게 맡기고 경주 1개 군만 다스리는 동경유수를 두도록 직제를 개정하였던 것이다.

  그보다 앞서 왕건(王建)과 그 부인 류씨는 태사공의 인품(人品)이 비범(非凡)함을 알고 류씨의 형부로 맞이하였다 하며, 배위(配位)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서 그 아버님은 월흑산장(月黑山長) 보림(普林)이고 조부는 해평산장(海平山長) 무선(茂先)이며 문화유씨 시조 차달(車達)의 누이가 되시며 장절공 신숭겸부인의 동생이고 고려태조 비(妃) 유씨의 언니로 전해지고 있다.(류씨가정간행보. 柳氏嘉靖刊行譜에 의함) 현재는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종친(宗親)들 사이에 의견대립(意見對立)이 있는 실정이다. 시조 태사공(始祖太師公)의 묘소는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운주산 구봉하(慶尙北道 浦項市 杞溪面 鳳溪里 雲柱山 九峯下)에 모시었으며 배위 묘소는 경주 남면 봉동산(慶州 南面 鳳洞山) 아래 박달리(朴達里), 감룡자좌오향득수진파동서분(坎龍子坐午向得水辰破東西墳)으로 모시고 비석을 묘아래 묻었다고 전하나 태사공 묘표기(墓表記) 및 묘지(墓誌)에는 합장(合葬)되시었다는 기록이 있어 분명하지 못한 실정(實情)이며 앞으로 규명(糾明)되어야 할 숙제(宿題)로 남아있다.

                 2세 공신공 선지(壁上功臣公 先之)

  아아! 이산은 우리 선조 고려 벽상공신 휘 선지(先之)와 그 아드님 복야공 휘 금강(金剛)의 양세가 묻히신 곳이다.

  대가 멀어지자 그 곳을 잃어 버렸는데 후손의 집에 사사로이 기록하여 대대로 전하던 것이 있는데, 그 기록에 「공의 산소는 풍덕 덕물현 남쪽 이십 오리 증택의 위 인좌의 언덕에 있는데, 공이 인질로 송경(개경)에 머무르다가 돌아가시자 상여가 경주로 향하여 괘감형 고개를 넘다가 영구차(상여)의 가운데가 부러지기 때문에 여기에 장례 되시고, 아들 복야공 산소도 같은 언덕이다 」라고 하나 보책에는 상고할 수가 없어서 증거 하여 그렇다고 할 수가 없다.  그런데 후손 승지 숙(塾)이 일로 인하여 산하에 이르르니 지방 사람들의 말에 윤씨 선조 양세의 무덤이 이곳에 있는데 서로 전하기를 윤금능(尹金陵)이라 하여 그 봉우리를 윤금봉으로 삼았다. 그렇게 된 것은 봉아래에 두 개의 무덤이 있고 아래무덤에 짧은 표석이 흙 속에 묻혀 있고 윤금(尹金)두 자 만 노출되어 있어서 이것으로 인하여 일컫게 된 것인데 뒤에 투장한 자가 감춰 버렸다고 전한다.

   그 땅의 좌향과 사사기록이 틀리지 않고 두 글자는 또 복야공의 성자와 휘자 중 윤금강(尹金剛)의 위 두자이니 또한 어찌 다른 것을 증거 하겠는가? 정조3년(1779) 기해년 봄에 모든 자손이모여 의논하여 광내를 조사하여 과연 지석을 얻었는데 위 무덤에는「윤선지(尹先之)」라고 석자가 새겨있고 아래 무덤에는「복야윤금강(僕射尹金剛)」이라고  다섯 자가 새겨 있었다.  이와 같이 양세의 성과 휘자가 틀리지 않고 고적이 어긋나지 않으니 경향  간에 윤씨 성을 가진 자가 기뻐하여 서로 경사롭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에 후손들에게 통고해서 각각 힘을 모아 산소를 보수하고 석물을 마련하고 제답을 두어서 오래고 멀도록 틀리지 않게 하였고 또 그 곁에 가깝게 있는 두어 개의 무덤을 파버리게 하였다.

  그런데 후손 수인(守仁)이 이곳을 지키고 다스리게 되어 이 일을 주관하게 되었다. 아아! 공은 곧 우리 시조 태사공 휘 신달의 아들이시다.

  부의 산소가 경주에 있는데 이제 사사기록 가운데에 상여가 경주로 향했다는 것은 대개 선조께 따라서 장례 모시려는 것으로 또 인질로 머물렀다는 말로는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전하기를 혜종이 태사공의 모습이 비상함을 꺼려하여 나아가 동경(경주)을 지키다가 돌아가시니 아마도 혜종의 의심이 풀리지 않아서 공을 머무르게 하여 인질로 삼았던가보다.

  또 보첩에는 다만 공이 공신이라는 것만 써 있고 직책 이름이 없어서 이에 가히 의심스럽더니 이제 지석에 공의 이름을 아울러 기록하면서도 직명을 쓰지 않는 것은 어찌 된 것인가? 모두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히 서로 전해와 옛날 지석이 없어지지 않아서 양대 산소를 근 천년의 뒤에 얻었으니 이 어찌 선세신령이 음으로 도우고 후손들로서도 대단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공의 뒤에 증손 문숙공(文肅公) 관(瓘)에 이르러서 더욱 크고 창성하여 명신을 볼 수가 있겠다.

  이에 드디어 묘표의 뒤에 그 사적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후인에게 알리려  한다.        이십오세손 이조판서 동섬(東暹)은 삼가 기록한다.

             이십오세손 사간원대사간 면승(勉升)은 삼가 쓰다.


                  3세 복야공 금강(僕射公 金剛)

  공의 휘는 금강(金剛)이오, 성은 윤씨이니, 파평 사람이다. 고려조의 공신

선지의 아들이오 태사 휘 신달의 손자이니 벼슬은 상서성 좌복야이시다.

  선묘의 언덕에 같이 장례 모셨다가 중간에 실전 하였는데 다행히 다시 찾았다. 자세한 것은 선묘의 음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가히 돌아오는 후일 증거 될 만 하겠기에 다시 이르지 아니한다.

  이십사세손 공조판서 동석(東晳)은 삼가 쓰다.

                  4세 문정공 집형(文靖公 執衡)

  옛날 사람들이 장사 지내는 법에 빗돌과 지석을 중하게 여겨서 말하기를 집에 가구를 마련하는 것은 못하더라도 선세의 비석과 지석은 안 할 수 없다 하더니 이 뜻을 지금 우리 선세 산소의 일에서 더욱 알게 되었다.

  우리 윤씨의 고려시대 선세 산소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이 모두 다섯 분이다. 시조 태사공의 산소와 풍덕의 공신공, 복야공의 산소와 파주의 문숙공의 산소는 모두 조각돌을 가지고 찾게 되더니, 이제 공의 산소도 역시 몇 백 년 뒤에 찾게 되니, 그 찾게 된 까닭을 상고하면 묻어둔 지석의 세 글자 때문이었으니, 비석과 지석을 않을 수 없는 것이 이러하였다. 공의 휘는 집형(執衡)이오, 태사공 휘 신달과 공신공 휘 선지와 복야공 휘 금강은 곧 공의 삼대  이시다.

  공의 장례를 모신 곳이 연안부 신성면 자달산에 있었는데, 세월이 멀어지자 수호를 못하고,  다만 보책의 기록에 의심을 전한다는 것만 있었다.

  지금 임금님 (순조7년. 1807) 정묘년에 후손 군수 광부(光孚)가 남이 가리키는 말을 따라서 종인 각(殼)과 평산군수 상중(相重)을 보내어 가서 수색하게 하여, 공의성과 휘자 석자를 크게 쓴 것을 고총의 광위에서 발견하였다.  그런데 백회가 돌과 같이 단단하고 먹으로 쓴 자획이 완연하였다. 다만 벼슬 이름이 갖추어 써 있지 않으니 대개 옛날에 묘비의 글은 간략함을 숭상하고 묘의 제도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던 것이니, 풍덕 양대의 산소에서 실례를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다만 성과 휘자만을 광의 주변에서 얻었으니 삼대의 산소 제도가 같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러기에 모든 종인들이 뛸 듯이 기뻐하여, 온 후손들에게 두루 알려서 자금을 모아서 보수하여 선세를 추모하고, 높이고 받드는 것이 이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이 어찌 우리 선세의 신령께서 도우신 바가 아니겠는가?

   다만 산소 뒤에 가까운 곳을 오래 전부터 최씨 사람이 점유하였고, 제절아래 지척지지에도 또한 침식하여 묘를 쓴 사람이 많아서, 여러 차례 관에 소송하되 마침내 해결되지 못하더니 병자년(1816년) 여름에 행직(行直)과 참판 상규(尙圭)와 경향의 모든 종인이 안사영(按使營)에 가서 송사 하였는데, 이때 후손 광심(光心)이 마침 이 부(府)를 지키고 있던 까닭에 관에서 다 파낼 것을 기약하더니, 그중 최희천 양보(崔熙川良輔)의 무덤은 수백 년이나 오래 되어 옮기기에 유난하고, 최씨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석물만 걷어 버리고 봉분을 작게 깎아 내리고 그대로 두기를 원하니, 관에서도 또한 과단치 못하고 다만 제절 밑에 세 개만 파 옮기는데 그치고 말았다.

   비록 사세이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자손으로 하여금 통한한 것을 그 칠 수가 있겠는가? 공의 언행과 사적은 문헌이 증거  할 수가 없고 아들 관(瓘)은 덕업과 공훈이 청사에 빛나고 후예들이 번성하여 대대로 계승하고 우리 조정(이조시대)에 이르러서는 경사가 도산(塗山)과 유신(有莘)에 화합하여 사방으로 보첩이 빛나니 적덕한 징험이 곧 여기에 있도다.

  배위 김씨는 아버지가 은열(殷說)이오, 할아버지는 경순왕이신데, 다만 사사기록에만 있어서 바로 믿기가 어려우니, 아직 비문 끝에 기록해서 후일에 고증하기를 기다린다.

  숭정(崇禎) 기원후 넷째 경인년(서기1830년) 오월 일

  이십육대손 가선대부영원군 행직(行直)은 삼가 기록한다.

  이십오대손 가선대부행호군 상규(尙圭)는 삼가 쓰다.

                   5세 문숙공 관(文肅公 瓘)

1. 약사(略史)

  문숙공(文肅公)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시조(始祖)로부터 5세손(五世孫)으로 휘(諱 : 이름)는 관(瓘)이고 자(字)는 동현(同玄)이며 호(號)는 묵제(默齊)로써 1040년 6월 1일 사시(巳時)에 고려시대의 파평현(지금의 파주)에서 아버님이신 문정공(文靖公) 휘(諱) 집형(執刑)과 그 배위이신 신라56대왕인 경순왕(敬順王) 김부(金溥)의 손녀(孫女)인 경주김씨(慶州金氏)사이에서 탄생(誕生)하시었다. 이해가 시조강생 148년(庚辰)으로서 고려 10대 왕인 정종(靖宗) 6년(1040년)이며 아버님이신 문정공(文靖公)께서 태몽을 꾸시었는데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고 전하며, 시호(詩號)는 원래 문경(文敬)이었으나 고려 17대 왕인 인종(仁宗)때 예종비(睿宗妃)의 휘호(徽號)인 문경태후(文敬太后)를 피하기 위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일찍이 학문에 눈이 트이어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보았다고 전해지며 일곱 살 되던 해에는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엽 양 천 충 방 설 한   :   뽕잎은 누에를 길러

   葉 養 天 ? 防 雪 寒   :   추위를 막게 하고

   지 위 강 궁 사 견 술   :   가지는 굳센 활로

   枝 爲 强 弓 射 犬 戌   :   오랑캐를 쏠 수 있다.

   명 수 초 목 진 국 보   :   이름은 비록 초목이나

   名 雖 草 木 眞 國 寶   :   참 국보 일세

   막 전 막 절 계 아 동   :   베거나 자르지 말라고

   莫 剪 莫 折 誡 兒 童   :   아이들에게 타일러야 되리

  한편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문종27년(1073년) 문과에 급제하여, 다음해 28년 4월에 대과에 급제하시고 또 왕명 세자복시에 문과장원으로 뽑히시어 장사랑(將仕郞) 비서동정(秘書同正)이 되셨다. 선종 원년에는 예빈사주부(禮賓寺主簿)가 되시어 과거의 시관(試官)이 되시었다. 동 2년에는 습유지제고(拾遺知制誥)가 되시고 그 다음해 3년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셨으며, 서경유수 판관이 되셨다. 동 4년 12월 합문지후(閤門祗侯)로서 광충청주도(廣忠淸州道) 출추사를 임명받으셨고 그 후에 보궐(補闕)로 옮기셨다. 동 8년에는 전중시어사에 제수 되시어 비금어대(緋金魚袋)를 받으셨다. 동 11년 5월에 시관으로서 이부원외랑에 임명되시고 12월에는 상서이부원외랑을 더 하셨다.

  헌종 원년(서기 1095년) 10월에는 좌사랑중시어사로서 헌종의 종표를 가지고 요나라에 특사로 파견되시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시었다. 그때 왕께서 병으로 정사를 볼 수 없어 신왕에게 양위한다는 뜻과 겸하여 곧 즉위한다는 뜻의 글을 지닌 것으로, 임의를 부사로 삼으시었다.  12월에는 요나라 왕의 회조(回詔)를 가지시고 귀국하시어 어사에 제수 되시고 곧 지수주사(知樹州事)에 제수 되셨다. 숙종 1년에는 동궁시강학사가 되셨고, 숙종 2년(서기 1097년) 12월에는 철로 돈을 만들어 통용케 하는 주전법을 제정할 것을 건의하여 왕이 이를 윤허함으로써 역사상 국내최초로 주전도감이 설치되어 해동중보(海東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화폐주조의 신기원을 마련하였다. 공은 또 숙종 3년 7월 왕의 친서를 가지고 송나라에 가시니 송조(宋朝)에서 크게 환영하고 환대하였는데, 그 곳에 체류 중 그 나라의 석학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의 두 학자는 공의 고매하신 박식(博識)에 놀랐다고 하며 서로 시를 창화하시며 응수하시었고 공이 그곳에서 지으신 다음 시(應制詩:응제시)는 그 글귀를 지금까지도 중국인이 외우고 있다 한다.

    수 도 방 진 난 재 우  :   누가 좋은 때를 두 번

    誰 道 芳 辰 難 再 遇  :   만나기 어렵다 이르느뇨

    아 금 삼 우 제 도 춘  :   내 이제 세 번째로

    我 今 三 遇 帝 都 春  :   봄을 만났노라.

  이 시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문숙공은 세 차례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시어 외교활동에도 진력하신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 4년 4월에는 우간의대부에 제수 되시어 한림시강학사가 되셨다. 동 6년 9월 왕이 양주에 도읍지를 설치할 것을 명하심에 따라 공 등이 삼각산 아래 오늘의 서울에 남경(南京)을 세울 것을 상주하시어 왕이 그대로 창설토록 하여 동 9년 5월에는 공이 개창도감(開創都監)으로 지휘 감독하신 남경의 궁궐이 이룩되었다.

  한편 숙종 6년에는 또 추밀원지주사에 임명되셨으며, 이듬해 7년 3월에는 지공거 이굉과 더불어 진사를 시험 보아 뽑으셨다. 그해 11월에는 추밀원부사에 임명되셨다. 또 12월에는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셨고 동 8년 2월에는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가 되셨고, 6월에는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 승지에 배명(拜命)되셨다.

  여러 요직을 거친 다음 민족(民族)의 성웅(聖雄) 문숙공께서는, 고구려(高句麗)의 옛 강토(疆土)인 북녘 땅을 되찾아 우리 민족의 전성시대(全盛時代)를 구현하겠다는 계획으로 30만 대군을 거느리시고 북쪽 두만강을 건너 700리 선춘령(先春嶺)까지 진격하시고, 여진(女眞)을 정벌(征伐)하신 후 그곳에 9성을 쌓으시고, 40만의 남방민(南方民)을 그곳에 이주(移住)시키므로 서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척지(拓地) 위업(偉業)의 기틀을 마련하시었다.

  서기 1107년(高麗 睿宗 2年, 丁亥) 10월 20일에 여진정벌(女眞征伐)이 조정(朝廷)에서 결정되고 문숙공께서는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로 임명되시었다.  이때 문숙공께서는 위와 같은 왕명(王命)을 받으시고 황공하고 감격하시어 왕(王)에게 일찍이 선왕(先王)의 밀지(密旨)를 받들고 지금 또 엄명(嚴命)을 받자오니 어찌 감히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적(敵)의 소굴을 소탕하고 우리의 강토(疆土)를 개척하여 나라가 받은 치욕(恥辱)을 씻지 않겠나이까?  라고 말씀하시고 맹서를 하시었다.

  공께서는 그해 11월 25일 임금인 예종(睿宗)께서 친히 서경(西京)의 위봉루(威鳳樓)로 거동하시어 문숙공에게 생살권(生殺權)을 맡기는 부월(斧鉞)을 하사하고 즉일로 출사(出師)케 하니, 그동안에 갈고 닦은 맹훈(猛訓)의 신기(神騎), 신보(神步), 항마군(降魔軍) 등 30만 대군을 거느리시고, 그날부터 수륙양면작전(水陸兩面作戰)으로 총공격을 시작하시었다. 이렇게 여진정벌에 나서신 문숙공 윤관장군(尹瓘將軍)께서는 휘하 고려군을 5군으로 나뉘어 노도와 같이 진격하여 천리변경의 수많은 여진촌락들을 석권하면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하시어, 결국은 두만강(豆滿江) 북쪽 700리 까지 여진 군을 몰아내시고 기세(氣勢)를 올리셨는데, 이때 문숙공의 전략에 놀란 여진군은 모두 달아나 버리고, 허허벌판에는 가축(家畜)만이 몰려다녔다고 한다.  이때의 감격스러운 승전보(勝戰譜)를 들은 사가(史家)는 천 여리(千餘里)의 강토를 순식간에 점령하였으며,?수백 년 동안 잃어버렸던 땅을 하루아침에 회복하니 윤관장군(尹瓘將軍)의 기쁨은 한량없는 것이고 모든 장수와 군사들의 기뻐하는 모양은 말로 다 할 수 없더라?라는 표현을 하였다.  문숙공은 여진정벌로 되찾은 북녘 땅에 재빨리 영주(북청), 복주(단천), 옹주(길주), 길주(경성), 함주(함흥), 공험진(연길땅)에 6성(六城)을 쌓고 두만강 북쪽 700리에 선춘령(先春嶺) 아래의 공험진(公險津)에 고려정계비(高麗定界碑)를 세워서, 이곳을 경계로 삼으신 후 종군(從軍)중인 아드님 시어사 언순공(侍禦史 彦純公)을 보내어 국왕(國王)에게 그 사실을 알리셨다. 『성인(聖人)의 덕(德)은 실로 천지(天地)에 합하고 인의(仁義)의 군병(軍兵)은 이미 오랑캐를 평정(平定)하였습니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기뻐서 환호성을 울리고 있습니다. 신(臣)이 절월(節鉞)의 대명을 받자옵고 북을 울리면서 당당하게 진군(進軍)하였습니다. 기세는 군중(軍中)을 움직이고 위엄은 적에게 가해졌나이다.  강하(江河)가 구렁에 닥치는데 한 치아교로 능히 막지 못하고 하석(瑕石)이 산봉우리에서 구르는데 빈 알이 결단코 깨어지는 것입니다.  포로(捕虜)가 반만(半萬)이 넘고 적을 베인 것이 오천에 가까우며 쌓인 곡식은 마을마다 흩어지고 달아나는 사람은 도로에 엇갈렸나이다.  산천(山川)이 험함에 성지(城池)가 인하여서 높고 깊으며 원야(原野)가 기름지어 전정(田井)을 또한 길고 팔 수 있습니다.  옛적에는 사람이 구하여도 얻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이것을 하늘이 주심을 이미 취하였나이다. 위로는 족히 종묘(宗廟)의 재천(在天)하신 영(靈)에게 사례하고 아래로는 족히 조정(朝廷)의 적년(積年) 수치를 씻었나이다.』문숙공께서 이렇게 하여 회복된 북녘 땅에 40만에 달하는 남방민(南方民)을 이주(移住)시켜서 거기에 터전을 잡게 하는 한편 삼성(三城)을 추가로 더 쌓으시니 모두 구성(九城)이 되었다. 이에 예종은 공을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剖事知軍國重事)에 임명하고 내시랑중(內侍郞中) 한교여를 보내어 조서(詔書)와 고신(告身) 및 자수안구(紫繡鞍具)와 궁중의 말 2필을 가지고 웅주에 가서 하사케 하였다. 예종 3년 4월, 공이 개성에 개선함에 왕이 명하여 고취(鼓吹)와 군위(軍衛)를 갖추어 맞이하도록 하고 대방후보와 제안후(齊安候)서를 보내어 동교(東郊)에서 위로 향연 하였다. 공이 경령전(景靈殿)에 나아가 복명하고 부월을 다시 바치니 왕이 문덕전(文德殿)에 거동하여 이견하고 변방 일을 묻고 밤이 되어 파하였다. 같은 해 7월 공이 다시 웅주에 집 결한 적을 토벌하시고 돌아오시자 왕은 공에게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食邑) 2천5백호, 식실봉(食實封) 3백호를 봉하였다.

  또 이듬해 여진이 길주를 포위하자 왕은 다시 공을 보내어 이를 치게 하니 이로써 공은 결국 4차에 걸쳐 여진을 정벌하시었던 것이다. 또한 공께서는 여진을 토벌할 때에 산악지대의 험악한 길을 행군하면서 군마(軍馬)가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말의 칡 집신을 철(鐵)로 바꾸어 마철대갈(馬鐵大葛)을 창안하시어 사용하시므로 써, 오늘날까지 대갈(大葛)이라는 용어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문숙공께서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능이 뛰어나시고 비범하여 명문(名門)의 혈통(血統)과 파평산((坡平山)의 정기(精氣)을 받아 태어나신 어른으로서 과연 문무(文武)를 두루 갖추신, 이 나라의 위대한 공신(功臣)이며 성웅(聖雄)이심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온갖 재능을 겸비하신 문숙공께서는 나라에는 몸을 바쳐 충성스럽고 어버이에게는 극진한 효성을 다하셨으며, 집에 계실 때나 전쟁터에서나 손에서 책을 놓으신 적은 없었다고 한다. 

공께서는 송(宋)나라 등 여러 나라와의 외교(外交)관계에 특출한 재능(才能)을 발휘하셨으며, 공께서는 이처럼 한 평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오신 공훈(功勳)으로 좌사랑중시어사(左司郞中侍御史),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 추충좌이평계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戒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 영평현개국백(鈴平懸開國伯), 동계병마원수(東界兵馬元帥),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師) 등 여러 관직과 직위를 제수(除授) 및 임명(任命)되었다. 공께서 이와 같이 한민족사상(韓民族史上) 전무후무할 위업(偉業)을 이룩하시고, 서기 1111년(고려 예종 6년 신묘(辛卯) 5월 8일 회강웅지(會講雄志)가 좌절되는 천추의 한(恨)을 남기시고 서거(逝去)하시었으며, 슬하에는 7남 2녀를 두시었는데 장자 언인은 합문지후(閤門祗侯)로서 그 아드님은 덕첨이고, 덕첨공의 아드님은 위(威)로서 시랑이니 남원백이 되시어 남원 윤씨의 시조가 되시었고, 그 아드님 극민(克敏)은 태학사이며, 극민공의 아드님인 돈(敦)은 시중으로서 일찍이 함안백이 되시어 함안 윤씨의 시조가 되시었다. 둘째는 언순(彦純)으로 남원부사로서 5남 1녀를 두셨고, 셋째는 언암(彦巖)으로서 신흥사주지였고, 넷째는 휘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선사이고, 다섯째는 언식(彦植)으로서 좌복야이며 4남 3녀를 두셨고, 여섯째는 언이(彦?)로서 정당문학이며 7남 4녀를 두셨고, 일곱째 언민(彦旼)은상의봉경이셨다. 큰따님은 상서우승 황원도에 출가하셨고, 둘째는 평장사 임원준에게 출가하셨다.

  배위(配位)는 국대부인(國大夫人) 인천이씨(仁川李氏)로서 그 아버님은 상장군(上將軍) 성간(成幹)이고 조부는 대장군(大將軍) 눌(訥)이며 외조부는 고려 태조  이시다.  문숙공의 묘소는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坡州市 廣灘面 吩水里)에 예장되시었으며, 국대부인 묘소는 연안자달동 문정공(文靖公) 묘소의 앞에 모셨다고 전하나 현재 실전(失傳)되었다.

   그 후 인종 8년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셨고, 이조에 들어와서 문종 2년에는 숭의전에 또한 배향되셨다. 세종 19년에는 9성 옛터 일부에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장군이 함경도경성에 공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하였는데, 처음에 이를 노당(蘆堂)이라 불렀으며, 선조 16년에 중수되어 시중묘(侍中廟)라 개칭되었고, 경종 1년에 윤문숙공묘(尹文肅公廟)로 고치었다가 헌종11 년(서기 1845년)에 이르러 정북사(靖北祠)로 개칭하였다.

  영조대왕께서는 갑신년(1764년)에 문숙공 묘소에 치제(致祭)하였고, 광무황제도 융희 3년(1909년)에 지방관을 보내어 공의 분묘에 치제하였다.

2. 국왕의 치제문(致祭文)

○ 치제문(致祭文) 갑신 영조어제( 甲申 英祖御製)

  조선국왕(朝鮮國王)은 견도승지(遣都承旨) 윤동섬(尹東暹)하여 치제우 고려시중문숙윤관지묘(致祭于高麗侍中文肅尹瓘之墓)하노니 우차유공(?嗟惟公)은 파산대족(坡山大族)으로 전조수공(前朝樹功)하니 육진회척(六鎭恢拓)이라 자고흘금(自古?今)에 세기팔백(歲己八百)이요 후손번연(後孫蕃衍)하여 금대교목(今代喬木)이로다. 사록유경(沙麓有慶)하니 사광보첩(四光譜牒)이요 공묘언재(公墓焉在)요 분수지북(汾水之北)이로다. 세칭교총(世稱橋塚)을 영역지측(瑩域之側)이나 전문난빙(傳聞難憑)하여 진위막득(眞爲莫得)이러니 건도소소(乾道昭昭)하여 교연차일(皎然此日)하니 불각흥창(不覺興愴)하여 원명수칙(爰命修飭)하고 친철기문(親綴其文)하여 근시짐작(近侍斟酌)하노니 광세감여(曠世感予)라 서기래격(庶幾來格)인져.

○ 제사를 드리는 글(치제문 해설)

  조선 국왕은 신하 도승지 윤동섬(尹東暹)을 보내어 고려시중 윤문숙공의 묘소에 제사를 드리노라. 아아! 생각건대, 공은 파평의 대족으로 전조(고려를 말함)에서 국토를 회복하고 6진을 개척하여 큰 공을 세웠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8백년이 되어, 후손이 번성하여 이시대의 큰 인물이 되고, 왕비를 탄생한 경사가 있고 네 번이나 보첩이 빛나도다. 공의 묘는 분수의 북쪽이로구나, 세상에서 이르기를 가마무덤이 영역의 곁에 있도다. 전해들은 것이  참과 거짓을 증거가 없어 알 수가 없더니, 하늘의 도가 밝고 빛나 오늘에서야 묘를 찾을 수 있었노라, 슬픈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제 묘를 수축할 것을 명하고 친히 이 글을 지어서 가까이 있는 신하로 잔을 드리오니 세상에 다시없을 이번 일에 나는 감격하노니, 바라건대 강림하여 응감하시라.

○ 조칙(詔勅) 융희( 隆熙)年 己酉 正月 初六日 황제서순시(皇帝西巡時)에서 칙왈척강인석(勅曰斥疆靭石)하니, 훈적탁영(勳績卓塋)이라 연로서지(輦路西指)에 송삼입망(松杉入望)이로다.

(조칙해설)

  조칙이란 임금께서 명령이나 문서를 아랫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순종께서 1909년 정월 초6일 서도순행 길에 올라 문숙공 묘소 앞을 지나시는 길에 말씀하시었다.

  ?오랑캐를 물리쳐 국토를 경계 짓고 글자를 새겨 정계비를 새우니 공적은 몹시 뛰어났도다. 연이 지나는 길에서 서쪽을 가리키는 곳에 소나무와 삼나무가 바라다 보이도다.?

3. 순종치제문 (致祭文) 융희(隆熙)三年 己酉 四月 二十九日유

  황제견지방관홍우관(皇帝遣地方官洪禹觀)하여 치제우고려시중윤관묘

(致祭 于高麗侍中尹瓘墓)하노니 산하종정(山河鍾精)하여 간세생공(間世生公)하니  파평화벌(坡平華閥)이요 전조원공(前朝元功)이라.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좌리추충(佐理推忠)하고 회척육진(恢拓六鎭)하여 선무고융(宣武誥戎)하니 북방뢰안(北方賴安)하고 속수무궁(續垂無窮)이라. 원기기상(爰紀?常)하고 추보사숭(追報斯崇)하니 예무의전(睿?義殿)에 일체사동(一體祀同)이요 운잉번연(雲仍蕃衍)하여 교목아동(喬木我東)이로다. 사육사록(四毓沙麓)하시니 방록금홍(邦?錦洪)이라 왈독불망(曰篤不忘)하여 계우짐궁(啓佑朕躬)이로다. 권피분강(捲彼汾岡)하니 송삼울총(松杉鬱叢)이요 신자교총(?玆轎塚)은 식표조궁(寔表?宮)이로다. 월재영묘(?在英廟)하사 은유특강(恩宥特降)하시니 예의계술(禮宜繼述)이요 금고감통(今古感通)이라. 태차서행(?此西幸)하여 흥창유중(興愴由中)일세  팽관전치(?官奠?)하니 서흠여애(庶歆予哀)하라.

(치제문 해설) 순종께서는 1909년 4월 29일 황제의 서도순행 시에 치제문을 하사하시었다. 대 황제는 지방관인 파주군수 홍우관(洪禹觀)을 보내어 고려의 문하시중문숙공 윤관의 묘에 제수와 제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노라. 산과 물의 정기가 모여 흔치 않는 인물로 공은 태어났도다. 관향은 파평으로 문벌은 빛나고, 고려왕조의 으뜸가는 공신이어라, 출전하면 장군이요 내에서는 재상으로 정도정치를 실천하여 왕실에 충성으로 받들었도다. 잃었던 옛 땅을 다시 찾고 6진을 세우고 무위를 떨쳐 오랑케를 꾸짖었으니, 북쪽지방은 그 힘을 입어 편안함이 무궁하게 이어졌도다. 이에 사적을 기(?)와 상(常)에 기록하여 옛일을 알려서 우러러 공경하게 하였고, 예종의 사당인 무의전에 함께 모시어 제사를 올렸도다. 

  자손은 번성하여 이 나라의 큰 기둥이 되었고 네 분의 왕비를 길러 나라의 역사를 길이 이어 크게 발전시켰으니 그 은혜를 결코 잊지 못하도록 짐(朕)이 몸소 가르쳐 이를 것이로다.  저 큰 언덕을 둘러보니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것이며, 가마무덤이 여기 있음에 틀림없는 공의 묘소임을 나타내 주도다.

  이러하여 영조임금 때에 융숭하게 은혜를 갚은 것은 공의 사적과 뜻을 명백히 기록하여 경의를 표한 것이었으니 지금도 옛일을 마음속에 느끼고 있는 까닭이었도다. 서도(西道)를 순행(巡幸)하는 길에 이곳에 다다르니 마음속으로부터 슬픔이 일어, 관리를 시켜 큰 술잔을 올리게 하노니 흠향하시기를 충심으로 나는 바라노라.


4. 열전 (列傳)    -  고려사열전에서 역재-

  윤관(尹瓘)의 자(字)는 동현(同玄)이요 파평현인(坡平縣人)이니 고조 신달이 태조를 도와 삼한공신이 되었고, 父 집형은 검교소부소감이 되었다. 관이 문종조에 등재하여 습유보궐(拾遺補闕)을 지냈고 숙종 때에 여러 번 옮기어 동궁시강학사 어사대부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가 되었다. 여진은 본시 말갈의 유종(遺種)으로 수 당년 간에는 고구려에 병합한바 있었고 뒤에는 취락으로 산택(山澤)에 흩어져 살아 통일함이 없었다. 그 중에서 정주, 삭주 부근 지방에 있는 자는 혹 내부(內附)하여왔다. 하여도 잠깐 신속(臣屬)하였다가는 곧 배반하곤 하였는데 영가(盈哥)와 우야소(鳥雅束)가 서로 이어 추장이 됨에 미쳐 자못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어 그 세력이 점차로 횡행하였다. 이위(伊位) 경계 상에 연산(連山)이 있으니 동해안으로부터 굴기(屈起)하여 우리 북쪽변경에 이르러서는 험준하고 황폐하여 사람과 말이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한 지름길이 있어 속칭 병목이라 하였으니 그 출입이 한 구멍뿐임을 말함이다. 공(功)을 탐하는 자는 간간이 의논을 드리기를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의 길이 끊어질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내어 평정하고자 하였다. 7년(숙종)에 여진이 정주 관밖에 와서 주둔하거늘 그들이 우리를 도모함인가 의심하여 추장인 허정 및 나불 등을 유인해서 잡아 광주에 가두고 고문하니 과연 우리를 도모코자 함이라 드디어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때마침 변장(邊將) 이일숙 등이 아뢰기를 『여진이 허약하니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 때를 잃고 취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우환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우야소가 또 별부(別部)인 부내노(夫乃老)와 틈이 생겨 군사를 내어 그를 치고 우리 가까운 지경에 와서 주둔하거늘 왕이 임간에게 명하여 가서 방비케 하니 간이 공을 탐하여 군사를 끌고 깊이 들어가 치다가 패하여 죽은 자가 반이나 됨에 여진이 승세를 타서 정주, 선덕관성(關城)에 닥쳐들어 수없이 죽이고 노략질하거늘 이에 관으로 간을 대하여 동북면행영도통을 삼고 부월을 주어 보내니 관이 더불어 싸워 30여급을 베었으나 우리 군사가 함몰되어 죽고 상한 자도 반이 넘는지라 군세가 떨치지 못하므로 드디어 겸손한 말로써 강화하여 맹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니 왕이 분을 내어 천지신명에게 고하기를 『바라건대 음덕을 빌려 적경(賊境)을 소탕케 하겠다』하고 이에 그 땅에 불우(佛宇)를 창건할 것을 허(許)하였다. 관은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겸 태자빈객으로 옮겨 아뢰기를 『신이 적의 기세를 봄에 강성함이 측량하기 어렵사오니 마땅히 군사를 휴양시켜 후일을 기다릴 것입니다. 또 신의 패한 바는 적은 기병이요 우리는 보병이라 가히 당적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건의하여 처음으로 별무반을 세우고 문무산관과 이서(吏胥)로부터 상가(商賈), 복예(僕隸) 및 부 군 현에 이르기까지 무릇 말(馬)을 가진 자는 다 신기를 삼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 도탕(跳蕩), 경궁(梗弓), 정노(精弩), 발화(發火)등 군을 삼아 나이 20이상인 남자는 과거보는 이가 아니면 다 신보에 속하고 무반(武班)과 모든 진부(鎭府)의 군인은 사시(四時)로 훈련하고 또 승도를 뽑아 항마군을 삼고 드디어 군사를 훈련하며 곡식을 저축하여 다시 치기를 꾀하였다.

  관이 중서시랑동평장사에 올랐다. 예종이 즉위하여 상(喪)으로 군사 낼 겨를이 없었다. 2년에 변방 장수가 보고하기를 『여진이 장성하여 변성(邊城)에 침돌(侵突)하는데 그 추장이 한 호리병박에 꿩꼬리 깃을 달아서 모든 부락에 돌려 보이면서 일을 의논하니 그 마음을 측량할 수 없다』고 하니 왕이 듣고 중광전(重光殿) 불감(佛龕)에 감추어 두었던 숙종의 맹세한 글을 내어서 양부대신에게 보이니 대신이 받들어 읽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성고(聖考: 숙종)의 끼친 뜻이 이같이 깊고 간절하시니 어찌 이것을 잊으리까?』하고 이에 글을 올려 선왕의 뜻을 이어 치기를 청하니 왕(예종)이 유예하여 결단치 못하고 평장사 최홍사에게 명하니 대묘(大廟)에 서(筮)쳐 기제괘(旣濟卦)를 얻음에 드디어 출사(出師)하기를 의정(議定)하여 관으로 원수를 삼고 지추밀원사 오연총으로 부원수를 삼으니 관이 아뢰기를『신이 일찍이 성고의 밀지를 받았고 이제 또 엄명을 받으니 어찌 감히 3군을 통솔하여 적의 진을 깨뜨리고 우리 강토를 넓혀서 나라의 수치를 씻지 않겠나이까?』하니 연총이 자못 의심하여 가만히 관에게 말하니 관이 개연히 말하기를 『그대와 내가 아니면 누가 능히 만 번이나 죽을 땅에 나가서 나라의 수치를 씻으리오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또 무엇을 의심하느냐?』하니 연총이 말이 없었다. 왕이 서경에 행차하여 위봉루에 거동하고 부월(斧鉞)을 주어 보내었다.

  관과 연총이 동계(東界)에 이르러 장춘역에 군사를 주둔하니 무릇 17만인데 20만이라고 이름하고 병마판관 최홍정 황군상을 나누어 보내 정장(定長) 2주에 들어가서 여진 추장에게 속여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허정(許貞) 나불(羅弗)등을 놓아 돌려보내려 하니 가히 와서 명을 들을 것이다』하고 복병 하여 기다리니 추장이 이 말을 믿고 고라(古羅)등 4백 여인이 이르거늘 술을 마시어 취하게 하고 복병이 나와 그를 죽이는데 그 가운데 건장하고 꾀 있는 자 5~60명이 관문에 이르러 의심하고 들어오기를 즐기지 않거늘 병마판관 김부필, 녹사 척준경을 시켜 길을 나누어 군사를 잠복시키고 또 홍정을 시켜 정예한 기병을 거느려 그를 응전(應戰)케 하여 거의 다 잡아 죽였다.          

  관이 스스로는 5만 3천인으로써 정주 대화문으로 나가고,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은 3만6천7백인으로써 안육술(安陸戌)로 나가고, 좌군병마사 좌상시 문관은 3만3천9백인으로써 정주 홍화문으로 나가고, 우군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은 4만3천8백인으로써 선덕진안해로 나가 양술(兩戌)의 사이를 방어케 하고, 선병별감 이부원외랑 양유속, 원흥도부서사 정숭용과 진명도부서부사 견을도 등은 선병(船兵) 2천6백으로써 나가게 하였다. 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지나 한나절 행군하니 여진이 우리 군사의 기세가 심히 성함을 보고 다 도망하여 달아나고 오직 가축만 들에 깔려 있었다. 문내이촌(文乃泥村)에 이르니 적이 동음성(冬音城)에 들어가 보존하거늘 관이 병마영할 임언과 홍정을 보내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쳐 깨뜨려 쫓아버렸다. 좌군은 석상하에 이르러 여진이 모여 있음을 보고 통역 대언을 보내어 항복하기를 설유하니 여진이 답하기를 『우리는 한번 싸워서 승부를 결단할 것이오, 어찌 항복한다 하리요』하고 드디어 석성에 들어가서 거전(拒戰)하니 화살과 돌이 빗발 같아서 군사가 능히 못하였다.   

  관이 준경에게 말하기를 『해는 저물고 일은 급하니 그대가 가히 장군 이관진으로 더불어 이를 치겠느냐?』고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일지기 종사(從事)할 때에 과오로 죄를 범하였는데 공이 나를 장사(壯士)라고 하여서 조정에 청하여 죄를 용서하게 하였으니 오늘은 이 준경이 몸을 죽이며 보답할 때입니다.』하고 드디어 석성 하에 이르러 갑옷을 둘러 입고 방패를 가지고 적중에 달려들어 추장 수인을 쳐 죽이니 이에 관의 휘하도 좌군과 합해 쳐서 죽기로 싸워 크게 깨뜨리니 적이 혹은 스스로 암석에 투신하며 노유(老幼)와 남녀가 모두 죽었다. 준경에게 능라(綾羅) 30필을 상주고 또 홍정, 부필, 녹사 이준양을 보내어 이위동(伊位洞)을 치니 적이 역전하므로 오래 싸워 이기고 1천2백급을 베었다.       

  중군은 고사한등 35촌을 깨뜨리어 3백80급을 베고 2백30인을 사로잡았으며, 우군은 광탄등 32촌을 깨뜨리어 2백90급을 베고 3백인을 사로잡았고, 좌군은 심곤등 31촌을 깨뜨리어 9백50급을 베었다. 관의 군사는 대내파지로부터 37촌을 깨뜨리어 2천1백20급을 베고 5백인을 사로잡고 녹사 유영약을 보내어 싸움에 이겼음을 보고하니 왕이 기뻐하여 영약에게 정7품을 주고 좌부승지병부랑중 심후, 내시형부원외랑 한교여를 명해 조(詔)를 사(賜)하여 장유하고 두 원수 및 모든 장수에게 물품을 사(賜)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관이 제장을 나누어 보내어 지계(地界)를 확정하되 동으로는 화관령에 이르고, 북으로는 궁한이령(弓漢伊嶺)에 이르고, 서로는 몽라골령에 이르렀으니 또 일관 최자호를 보내어 몽라골령 하에 터를 잡아 성랑 9백50간을 쌓아 영주라 이름하고, 화관령(火串嶺)하에 9백22간을 쌍아 웅주(雄州)라 이름하고, 吳林金村에 7백74간을 쌓아 복주(福州)라 이름하고 弓漢伊村에 6백70간을 쌓아 길주라 이름하고 또 호국인왕(護國仁王), 진동보제(鎭東普濟) 두 절을 영주성 가운데 창건하였다. 이듬해에 관과 연총이 정예한 군사 8천을 거느리고 가한촌(加漢村)의  작은 길로 나아가니 적이 울밀한 숲 속에 복병 하였다가 관의 군사 오는 것을 기다려 급히 치니 군사가 다 무너져 겨우 10여인만 있었는데 적이 관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함에 연총은 유시(流矢)에 맞아 형세가 심히 위급하거늘 준경이 용맹한 군사 10여인을 거느리고 구원하려 하니 아우 낭장 준신이 저지하여 말하기를『적의 진이 견고하여 가히 깨뜨리지 못할 것이니 헛되이 죽으면 무엇이 유익하리까?』하니 준경이 말하기를『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라. 나는 몸으로써 나라에 허락하였으니 의리상 가히 그칠 수 없다』하고 이에 크게 외치면서 진중에 달려들어 10여인을 쳐 죽이니 홍정, 관진등이 산골짜기로부터 군사를 끌고 와서 구원함에 적병이 이에 포위를 풀고 달아나거늘 쫓아가 36급을 베었다. 추장 아로환(阿老喚)등 403인이 진전(陣前)에 나와 항복을 청하고 남녀 1천4백60여인을 또 좌군에 항복하였는데 적의 보졸과 기병 2만이 와서 영주성 남쪽에 진치고 크게 외쳐 싸움을 돋우거늘 관이 임언(林彦)으로 더불어 말하기를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형세가 당적 할 수 없으니 다만 굳게 지킬 뿐이다』하니 준경이 말하기를『만약 나가 싸우지 않았다가 적의 군사는 날로 더하고 성중은 양식이 다하고 밖으로 구원이 이르지 않으면 장차 어찌할 것이요. 전일의 싸움에 이긴 것을 제공은 보지 못하였소? 오늘 또한 사력을 내어 싸울 테니 청컨대 제공은 성에 올라서 경결하시오』하고 이에 결사대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적과 싸워 19급을 베니 적이 패하고 상하여 피를 흘리면서 도망해 달아났다.

  준경이 군악을 울리며 개선하여 돌아오니 관등이 루에서 내려와 그를 맞아 손을 이끌어 서로 절하였다. 관과 연총이 이에 모든 장수를 거느리고 중성대도독부에서 회합하니 권지승선(權智承宣) 왕자지(王字之)가 공험성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도독부로 오다가 갑자기 여진 추장 사현(史現)의 군사를 만나 더불어 싸워 불리하여 탄 말을 잃었는데 준경이 곧 굳센 군사를 끌고 가서 구원하여 이를 패배시키고 적의 갑옷과 말을 취하여 돌아왔다. 

  여진의 군사 수만이 와서 웅주를 포위함에 홍정이 군사를 독려하니 군사들이 다 싸우기를 생각하거늘 곧 4문(四門)을 열고 함께 나가 용전하여 크게 이를 패배시키고 80급을 부참(斧斬)하고 병차 50여량, 중차 2백량, 말 40필을 얻으니 그 나머지 병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때에 준경이 성중에 있었는데 주수(州守)가 말하기를 『성을 지킴이 날이 오래 됨에 군량이 장차 다하고 외원(外援)이 이르지 않으니 공이 만약 성을 나가서 군사를 거두고 돌아와 성중을 구하지 않으면 사졸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까 두려워한다』하거늘 준경이 군졸의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 정주에 돌아와 군사를 정돈하고 통태진(通泰鎭)으로 가서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에 이르러 적을 만나 더불어 싸워 크게 이를 패배시키니 성중 사람이 감격하여 울었다. 관이 또 영, 복, 웅, 길, 함주 및 공험진에 성을 쌓고 드디어 공험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고 아들 언순을 보내어 표문을 만들어 칭하(稱賀)하였다. 왕이 내시위위주부 강영준을 보내어 관 등에게 양, 술을 하사하시고 아울러 군인에게도 은사라 1면, 은병 40개를 하사하였다. 관이 또 임언을 시켜 그 일을 영주 청벽(廳壁)에 기록하게 하니, 그 글에 말하기를,『맹자 말씀에 약(弱)은 본래 강(强)을 당적하지 못하며 소(小)는 본래 대(大)를 당적하지 못한다. 나는 이 말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이 말을 믿겠노라』고 하였다.

  여진은 우리나라에 비하여 강약과 중과(衆寡)에 있어 그 세력이 현격한데도 변방을 엿보아서, 숙종 10년에 틈을 타고 난리를 일으켜 사민을 많이 죽이고 붙들어 매어 노예를 삼은 것도 많았으므로, 숙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정비하여 장차 대의(大義)를 잡고서 치려 하다가, 애석하게도 그 공을 이룩하지 못하시고 돌아가시었고, 지금 임금이 위를 이어 3년 거상(居喪)하였다가 상기(喪期)를 겨우 마치시고는, 좌우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진은 본시 고구려의 부락으로 개마산 동쪽에 모여 살아서 대대로 조공을 바치어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을 입음이 깊었는데, 갑자기 무도하게 배반하니 선고(先考)께서 깊이 분노하시었다.  

『일찍이 듣건대 옛 사람이 대효(大孝)라 일컬음은 그 뜻을 잘 이음이라 하였으니 내가 지금 다행히 상기(喪期)를 마치고 나랏일을 보게 되니 어찌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한 것을 쳐서 한번 선군(先君)의 수치를 씻지 않으리오』하시고,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守司徒 中書侍郞平章事) 윤관을 명하여 행영대원수를 삼고,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오연총을 부원수를 삼아 정병(精兵) 30만을 거느리고 정벌을 전담케 하였으니, 윤공은 사람이 걸출하여 일찍이 김유신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말하기를, 유신이 6월에 배도 없이 3군을 도강(渡江)케 하였다하니 다름이 아니라 지성일 따름이나 나도 또한 어떤 사람이냐고 하였으니 그 지성이 감동한 바에 영이한 흔적이 많이 들렸으며, 오공은 때에 중망이 있는 이로, 타고난 성품이 근신하여서 일을 당하면 반드시 세 번이나 생각하므로 양도(良圖)와 대책(大策)이 시행하면 맞지 않음이 없었다. 양공이 일찍이 이에 뜻이 있었으므로 명을 듣고 분발하여서 군사를 이끌고 동으로 내려가서 군사를 내는 날에는 몸소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기도 전에 강개한 눈물을 뿌리니 명령을 듣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적경에 들어감에 미쳐서는 3군이 용맹을 떨치어 한사람이 100을 당적 하니 마른 가지를 꺾고 대를 쪼갬인들 어찌 이보다 더 쉬울 수 있으리오. 6천 여급을 참수하니 그 궁시를 싣고 진 앞에 와서 항복하는 자가 5천을 넘었으며 전진(戰塵)을 바라보고 간담이 떨려서 도망쳐 달아나는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아아! 여진이 완고하고 어리석어 그 강약과 중과(衆寡)의 형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함을 취함이 이와 같았도다. 그 지방이 3백리인데 동으로는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로는 개마산에 끼었고, 남으로는 장정(長 定) 2주에 대었으니 산천의 수려함과 토지의 기름짐은 가히 우리 백성을 살게 할만하며 본래 고구려의 소유이라, 그 고비(古碑)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대저 고구려가 전에 잃었던 것을 지금 임금이 뒤에 이것을 얻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리요. 이에 새로 6성을 쌓아 1은 진동군함주대도독부(鎭東軍咸州大都督府)이니 병민이 1천9백48정호(丁戶)요, 2는 안령군영주방어사(按嶺軍英州防禦使)이니 병민이 1천2백38정호(丁戶)요, 3은 영해군웅주방어사(寧海軍雄州防禦使)이니 병민이 1천4백36정호(丁戶)요, 4는 길주방어사(吉州防禦使)이니 병민이 6백80정호(丁戶)요, 5는 복주방어사(福州防禦使)이니 병민이 6백32정호(丁戶)요, 6은 공험진방어사(公?鎭防禦使)이니 병민이 5백32정호(丁戶)라 그 현달하고 현재(賢材)가 있어 능히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뽑아서 그 땅을 진무(鎭撫)케 하니 시(詩)에 이른바 번(蕃)하며 선(宣)하여서 왕실을 번병(藩屛)한다 함이니 편안히 베개를 높이하고 동으로 돌아볼 근심이 없음을 보겠도다. 

  원수(元帥)가 나에게 이르기를 옛적에 당나라 재상 배진공이 회서(淮西)에 출정하여 평정하였을 때 그 막객(幕客)인 한유(韓愈)가 비문을 지어 그 일을 넓게 하였기 때문에 뒷사람이 헌종의 영위절인(英偉絶人)한 덕을 알아서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그대가 다행히 이에 종사하여 그 본말을 자세히 하여  어찌 기문(記文)을 지어 우리 성조(聖朝)위 전무한 위적(偉績)을 무궁토록 전하지 않겠는가 하므로, 언(彦)이 명을 받고 붓을 잡아 이를 기록한다 하였다. 관이 포로 3백46명, 말 96필, 소 3백 여두를 바치고 의주를 비롯하여 통태, 평륭 2진에 성을 쌓아 함, 영, 웅, 길, 복주와 공험진을 아울러 북계(北界)9성을 쌓고 모두 남계(南界)의 백성을 옮기어 채웠다. 왕이 관을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리부사 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 知軍國重事)에 임명하고 연총을 협모동덕 치원공신상서좌복야 참지정사(協謨同德 致遠功臣尙書左僕射 參知政事)에 임명하여 내시랑중 한교여를 보내어 조서와 고신(告身) 및 자수안구(紫繡鞍具)와 구마(廐馬) 2필을 가지고 웅주에 가서 나누어주게 하였다.

  윤관이 개선하니 왕이 명하여 고취(鼓吹)와 군위를 갖추어 맞이하게 하고 대방후(帶方侯) 보(?), 제안후(齊安侯) 서를 보내어 동교(東郊)에서 위로하고 향연 하였다. 관과 연총이 경령전에 나아가 복명하고 부월을 드리니 왕이 문덕전에 거동 하여 인견하고 변방 일을 묻고 밤이 되어 파하였다.

  얼마 안 되어 여진이 또 웅주를 포위하거늘 왕이 연총을 보내어 구원케 하고 다시 관을 보내어 치게 하니 관이 적의 머리 31급을 바치었으므로 조금 뒤에 관을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2천5백호(식실봉3백호)를 봉하고 연총은 양구진국(攘寇鎭國) 공신호을 가하였다. 또 이듬해에 여진이 길주를 포위하거늘 연총이 더불어 싸워 크게 패하였으므로 왕이 또 관을 보내어 구원할 새 근신(近臣)을 명하여 금교(金郊)역에서 전송케 하였다. 관과 연총이 정주로부터 군사를 지휘하여 길주로 향할 때 행차가 나복기촌(那卜其村)에 이르니 함주사록(咸州司錄) 유원서가 치보(馳報)하기를 『여진의 공형(公兄), 노불, 사현(史顯)등이 성문을 두드리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이름에 태사 우야소(鳥雅束)가 화친을 청하고자 하여 나를 시켜 병마사에게 전하라고 하였으나 방금 군사가 서로 싸우므로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니 청컨대 사람을 우리 고장에 보내면 태사의 설유한 바를 자세히 전고(傳告)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하거늘 관등이 듣고 도로 성에 들어와서 다음날 병마기사 이관중을 적의 고장에 보내어 여진의 장수 오사(吳舍)에게 이르기를 『강화함은 병마사의 마음대로 할 바가 아니니 마땅히 公兄등을 보내어 천정(天庭)에 들어가서 아뢸 것이라』하니 오사 등이 크게 기뻐하였다.        

  노불, 사현(史顯)등이 다시 함주에 와서 고하기를 『우리들이 입조(入朝)하기를 원하나 때가 방금 서로 싸우므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성을 들어가지 못하니 청컨대 관인으로써 서로 볼모를 교환하자』고 하거늘 관이 공요(孔沃), 이관중(李管仲), 이현(異賢)등으로 볼모로 삼음에  노불 등이 드디어 와서 구성지(9城地)를 돌려주기를 청하였다.

처음 조정의논이 병목(甁項)을 얻어 그 길만 막으면 오랑캐의 근심이 길이 끊어질 것이라 하였더니 뒤에 쳐서 취해놓고 보니 수륙(水陸)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앞에 들은 바와는 심히 다른 것이었다. 여진이 이미 소굴을 잃었기에 보복하기를 맹세하고 이에 땅을 돌려주기를 강인(强引)하여 여러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다투므로 궤모(詭謀)와 병계(兵械)가 이르지 않는 바가 없되 성이 험하고 굳기 때문에 갑자기 적에게 점령당하는 일은 없지만 싸우고 지킴에 당하여 우리 군사를 상실한 것도 또한 많았으며 또 땅을 개척함이 너무 넓고 9성의 거리가 너무 멀고 계동(溪洞)이 황심(荒深)하므로 적이 자주 복병 하여 왕래하는 자를 노략하는지라 나라에서 군사를 냄이 다단(多端)하며 중외가 소요한데 기근과 질역(疾疫)이 가중하여 원성이 드디어 일어나고 여진도 역시 괴로워하였으므로 이에 이르러 왕이 여러 신하를 모아 이를 의논하여 필경에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기로 하고 싸우는 군수품이나 식량은 내지(內地)에 실어 들여 그 성을 철폐하였다.

평장사 최홍사, 김경용, 참지정사 임의, 추밀원사 이위가 선정전(宣政殿)에 들어가 임금을 대하여 관과 연총의 패군 한 죄를 극론하니, 왕이 승선 심루를 보내어 도중에서 부월을 거두므로 관등이 복명하지 못하고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재상과 대간이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고 간신 김연, 이재등은 대 궐에 엎드려 굳이 다투어 말하기를『관등이 망령되어 이름 없는 군사  일으켜 패군하고 나라를 해되게 하였으므로 죄가 가히 용서할 수 없으니 청컨대 옥리(獄吏)를 내리소서』하는지라 왕이 심후에게 명하여 선유(宣諭)하기를, 『두 원수는 명을 받들어 출정함이오. 예로부터 싸움은 승패가 있는 것이니 어찌 죄가 되리요.』하니 연(緣)등이 또 다투어 마지않으므로 왕이 마지못하여 다만 벼슬을 면하고 공신호를 깎았다가 곧 관을 수태보문하시중 판병부사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 判兵部事上柱國 監修國史)로 제배(除拜)하니, 관이 표문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짐(朕)이 듣건대 옛날 이광리(李廣利)가 대완(大宛)을 쳤을 때에 겨우 준마 30필을 얻어왔는데, 무제(武帝)는 만리 밖에 가서 정벌하였다 하여 그 과실을 기록하지 않았고, 진탕(陳湯)은 질지(?支)를 주벌(誅伐)할 때에 임금의 병을 받지 않고, 함부로 군사를 일으켰는데도 선제(宣帝)가 위엄이 백만(百蠻)에 떨치었다고 하여 봉하여 열후(列侯)를 삼았는데, 경이 여진을 친 것은 선고의 뜻을 받고, 과인의 계술(繼述)하는 일을 체(體)하여 몸소 칼날과 화살을 무릅쓰고 깊이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 죽이고 사로잡음이 이루 헤아리지 못하여 넓은 땅을 개척하고 9주의 성을 쌓아서 나라의 묵은 수치를 씻었으니, 경의 공은 가히 많다고 이르겠다. 그러나 오랑캐는 본래 사람의 얼굴이나 짐승의 마음이라 배반하고 항복함이 무상하므로, 그 남은 무리들이 의거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에 추장이 항서(降書)를 바치고 화친을 청하므로 여러 신하가 다 편하다 하고 짐도 또한 차마 하지 못하여, 드디어 그 땅을 돌려주었거늘 유사들이 법을 지켜 자못 탄핵함이 있으므로 갑자기 그 벼슬을 빼앗았으나, 짐은 끝까지 경을 허물하지 않고 맹명(孟明)이 다시 강을 건넘이 있기를 바라노라. 이제 경에게 주는 것은 곧 경의 본래의 벼슬이니 어찌 사양하리요. 마땅히 돌보는 마음을 살펴서 속히 그대 벼슬에 나아갈 지어다』라고 하니, 관이 다시 글로써 사양하였으나 또 듣지 않았다. 예종 6년에 졸(卒)하니 문경(文敬)이라 시(諡) 하였다.

  관이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장상(將相)이 되어 비록 군중(軍中)에 있어서도 항상 오경(五經)을 휴대하였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것을 즐거워함이 한때에 으뜸이었다.

  인종 8년에 예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수능(綏陵)의 휘를 피하여 시(諡)를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7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언인(彦仁), 언순(彦純), 언암(彦巖), 언식(彦植), 언이(彦?), 언민(彦旼)이며, 언순은 벼슬이 남원부사에 이르렀고, 언식은 천자(天資)가 높고 아담하며 빈객(賓客)을 좋아하였으며, 벼슬은 수사공(守司空)에 이르렀다. 언민은 총명하고 영오함이 뛰어났으며 서화를 잘하고 인종조에 상식봉어(尙食奉御)가 되었다.

5. 신도비명 (神道碑銘)

  해는 어두운 구름 사이에서 한결 더 빛나고 영웅은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더욱 더 우뚝하다. 어허! 역사의 구름을 뚫고 해와 같이 빛나는 민족의 영웅 한 분이 눈부신 업적을 백세에 끼치고 거룩한 뜻과 이름을 천추에 드리운 채 여기 파산(坡山)의 기슭 아래 고요히 잠들어 계시니 이가 바로 저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으로 국토를 널리 열어 거기 아홉 성을 쌓아 겨레의 삶터를 마련하고 나라의 위엄을 떨친 윤관공이시다. 일찍 우리 민족은 아시아의 동방에 나라를 세우고 반만년의 역사를 누려오는 동안 이웃에 있는 강대한 여러 민족과 더불어 피의 항쟁을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은 우리는 실로 굴욕을 모르는 민족이어서 남의 침략 앞에 고개를 숙여본 일이 없었고 다시 한편 자유와 정의를 사랑하는 민족이어서 나아가 남을 침략해본 일도 없었다. 여진족은 본시 말갈의  종족들로서 우리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 아래서 살더니 고려초엽에 이르러선 차츰 그 세력이 커져 국토의 동북과 서북일대에 퍼져 들어와 자리를 잡고 도리어 고려를 배반하고 침략하기를 시작하므로 덕종 때에는 그들을 막기 위하여 유소(柳韶)를 시켜 천리장성을 쌓게도 하고, 또 문종 때에는 문정 등을 보내어 그들을 무찌르기도 했으나 새로 일어난 완안부 추장 우야소(鳥雅束)가 다시 쳐들어오므로 숙종은 임간 등을 보내어 그들을 섬멸하라 했건마는 불행히 패전하고 돌아왔었다. 몇 날이 지난 뒤 숙종 9년 2월 21일에 왕은 당시 추밀원사(樞密元事)이었던 공으로써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을 삼아 출정케 했으나 공도 역시 전세가 불리하므로 방편상 화의를 맺고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공은 돌아와 왕에게 별무반을 조직을 진언하고 여진을 토벌하기 위해 군비를 확충하기에 전력을 기울이니 별무반의 편성 내용은 보직 없는 문무산관과 이서(吏胥)로부터 상고들과 노복들과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사람은 신기군(神騎軍)에 편입하고, 말을 못 가진 자와 또 20세 이상 되는 남자로 과거 안보는 자는 신보군(神步軍)에 입대시키며 또 특과대(特科隊)로 도탕(跳蕩)과 경궁(硬弓)과 정노(精弩)와 발화(發火)등 네 반을 두는 한편 승려로써 항마군(降魔軍)을 만든 것들로 거의 거국적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왕은 천지신명께 고하되, 원컨대 도움을 입어 적을 쓸어버리게 된다면 그 땅에 절을 짓겠나이다. 하며 분한 맹서를 짓더니 원통하게도 큰 뜻을 풀지 못하고 이듬해 10월에 승하하고 그 아들 예종이 뒤를 이었다. 그 또한 선왕의 뜻을 받들어 여진의 동향을 살피기를 게을리 아니하더니 변방 장수로부터 침략의 보고를 받자 분연히 일어나 뜻을 정하고 공으로써 원수를 삼고 오연총으로써 부원수를 삼은 뒤 다시 서경(지금 평양)으로 나가 위봉루(威鳳樓)에서 생살권을 맡기는 도끼를 주어 가게 하니 때는 예종 2년 서기 1107년 12월 1일이었고 병력은 17만 대군이 있었다. 공은 1년을 두고 훈련을 거듭한 정예의 대군을 이끌고 정주(지금 정평)에 이르러 12월 14일로써 전투를 개시했는데 공의 본군과 중, 좌우군, 수군 등 다섯 부대로 나누어 진공하자 적들은 거센 기세에 놀라 모조리 도망하고 가축들만 빈 들판에서 몰려다닐 뿐이었다. 다시 보니 적들이 문내니촌(文乃尼村)(지금 함흥 운홍리 부근)에 이르러 동음성(冬音城)에 들어가 성문을 닫고 숨어 버리므로 공은 특과대의 날랜 부대를 동원하여 성을 깨뜨려 달아나게 하고 또 좌군과 힘을 합해 석성(지금 함흥 고양리 부근)을 쳐서 적의 전부를 섬멸시켰다. 이리하여 고려군대가 여진족들의 촌락을 불사른 것이 135촌, 목 벤 것이 4940명, 사로잡은 것이 1030명에 달했던바 공은 그것을 조정에 보고함과 동시에 여러 장수들을 파견하여 국경을 확정케 하고 몽라골령(蒙羅骨嶺)아래 영주성을, 화관령(火串嶺)아래 웅주성을, 오림금촌(吳林金村)에 복주성을 궁한이촌(弓漢伊村)에 길주성을 쌓고 다시 이어 영주성안에는 두 절을 지어 숙종의 맹세대로 이뤄 드렸다. 해가 바뀌어 왕의 3년 1월에 공은 8,000명을 이끌고 가한촌(加漢村) 병목 좁은 길을 치다가 우야소(鳥雅束) 무리의 포위를 입어 위태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며, 적장 알색(斡塞)의 무리들이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와서 영주성과 웅주성을 칠적에도 매양 곤경에 빠졌지마는, 그때마다 녹사 척준경의 용맹으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3월에는 앞의 네 성과 함주, 공험진 등 여섯 성을 새로 쌓은 뒤에 아들 언순을 보내어 헌공표(獻功表)를 올리고 또 임언을 시켜 영주청벽에 성 쌓은 사실을 적어 붙이게 하는 한편 남방으로부터 무릇 6천4백6십5호의 인민을 옮겨와 거기에 터전을 잡게 하고 또 의주, 통태, 평융등 세 성을 더 쌓아 모두 아홉 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에게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의 직함을 주고 4월 9일 개경으로 개선했을 때에는, 상하의 온갖 융숭한 환영을 이를 길이 없었다. 돌아온 지 몇 날이 못되어 여진족들이 웅주를 포위하므로, 공과 오연총은 다시 나가 큰공을 세워, 공에게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을 봉했으며, 이듬해 4년 5월 길주 싸움에서는 크게 이긴 그대로 두만강 건너 선춘령에 비를 세워 여기까지가 고려의 경계라고 큰 글자를 새겨 고려혼(高麗魂)을 외친 이거늘 어찌해 운명의 신은 시기하기 시작하던고, 이때 여진은 아홉 성을 돌려주면 신사백세(臣事百歲)하겠읍니다하고 고려조정에 애원하자 나약하고 공을 질투하는 평장사 최송사등 이십팔인은 9성 반환을 극력 주장하고, 다만 예부의 박승중과 호부의 한상만이 반대할 따름이라 대세는 결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7월에 철수를 단행했는데 아홉 성중에서 의주, 공험진, 평융진은 빠지고 숭령, 진양, 선화진등 딴 이름이 고려사에 적힌 것은 아마 뒤에 새로 쌓은 것들이리라. 공은 이천리밖에서 이 명령을 받고 분함을 머금고 회군했는데, 왕은 사신을 보내어 떠날 때 내려준 도끼마저 중도에서 도로 거두어 가는 것이므로, 복명할 겨를도 없이 다만 쓸쓸히 집으로 돌아간 채 공신호조차 삭탈당했던 것이다. 그 심경 어떠했으랴. 그 위에 금해하는 대신들은 공에게 죄를 주자고까지 했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셨다. 한해가 지나 5년 겨울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임명했으나, 공은 거듭 사양하다가 왕의 뜻을 받들어 전날의 통분을 되새겨 재기의 뜻을 품던 중 이듬해 6년 서기1111년 5월 8일에 말없이 눈을 감으니 향년(享年)61세, 처음 시호는 문경(文敬)이요, 뒤에 문숙(文肅)이라 고치고, 인종 8년에 예종의 사당에 배향하였고, 이조에 와서는 숙종께서 숭의전(崇義殿)에 공을 배향하셨다. 공의 본관은 坡平, 자는 동현(同玄), 호는 묵재(묵齋), 고려 태조의 삼한공신 휘 신달의 5대손으로 부친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 문정공(文靖公) 휘 집형이었다. 공은 일찌기 젊어서 문과장원에 올라, 습유보궐(拾遺補闕)을 거쳐 송나라에 사신도 갔고, 동궁시강학사어사대부이부상서(東宮侍講學士御史大夫吏部尙書)를 지나 지추밀원사겸한림학사를 역임하며, 평소에 어진 이를 사랑하고 의리를 숭상하여 들어와선 대신이 되고, 나가서는 장수가 되었던 문무를 겸전한 민족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부인은 인천 이씨로서 고려상장군 성간(成幹)의 따님이요, 7남2녀를 낳았는데 1남 언인은 합문지후(閤門祗侯)요, 2남 언순은 남원부사요, 3남 언암과 4남은 출가했으며, 5남 언식은 수사공(守司空)이요, 6남 언이는 정당문학판호병형부사상주국문강공(政堂文學判戶兵刑部事上柱國文康公)이요, 7남 언민은 상의봉어(尙衣奉御)로 서화의 명인이었다. 뒷날 자손들이 번창하여 이제 와서는 남원과 함안과 덕산과 화산 곧 신령 등으로 나뉘었으나, 모두가 문숙공의 후예이니 그야말로 뿌리 깊은 큰 나무인지라 꽃과 열매가 풍성하게 열림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공은 다만 어느 한 가문의 인물이 아니라 민족정기의 표상이었던 분이니, 그러므로 공의 의기는 그대로 민족의 의기요, 공의 한됨은 또한 민족의 한인 것이다. 겨레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금옥같은 아홉 성을 여진의 갈뢰전(曷賴甸) 땅으로 내어주고, 일세의 개선장군이 하루아침에 패전장의 누명을 쓰게 될 적에 얼마나 분했으랴만, 그것은 결코 개인의 영욕무상이 아니라, 실로 민족사의 방향을 좌우했던 것이다. 간신 배들의 승리는 공을 중심으로 한 당시 화랑계통의 민족노선을 짓밟은 것이니 공의 뜻이 꺾임은 그대로 치솟아 올라가던 민족이상의 탑이 밤새 무너진 것이라, 생각할수록 통분하기 짝이 없거니와, 어찌 천추의 한이란 말로만 그치고 말 것이랴. 9성을 철수한 지 겨우 6년에 완안부 추장 아골타가 일어나 금나라를 세웠거니와, 우리가 그 땅을 지켰던들 거란을 엎지를 자가 저들이 아니요 우리가 아니었겠느냐, 뒷날 세종때 김종서장군이 경성(鏡城) 서쪽에 있는 승암산(僧岩山) 위에 공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했으며, 그 뒤로는 사당 이름을 호당(芦堂)이라 부르며 향불이 끊어지지 아니하였고 선조 때에는 시중묘(侍中廟)라 사액까지 했으며, 영조께서 분묘에 치제하셨고, 순종께서는 특히 지방관 홍우관을 보내어 공의 무덤에 제사하는 등 역사를 통해 공을 추모하기를 말지 않았음을 보거니와 다시 한번 생각건대 옛날 김장군의 육진 개척도 공의 9성을 다 못 찾은 것임을 보면 9성은 과연 역사적인 장거요, 또 고구려 옛땅을 되찾을 수 있는 발판이기도 했건만, 슬프다! 꿈은 사라지고 오늘은 그나마 길도 끊어져 소식조차 알 길 없음을 어찌하랴. 이제 나는 옛 터를 찾아와 공의 무덤과 오랜 영정 앞에 머리를 숙여 분향하고, 풍우 속에 흘러간 9백년 세월을 더듬어 공을 그리며, 삼가 노래를 바친다.

       갈뢰전(曷賴甸) 눈얼음 박차고 삼군병마를 몰아치던 날

       고각(鼓角) 소리 구름을 찢고 오색 깃발 바람에 얼어도

       영웅의 불타는 정열에 강산은 되려 훈훈했으리.

       두만강 건너 7백리를 달려 선춘령 아래 큰비를 세워,

       여기까지가 고려 땅이라 굵은 글자로 새기시고서,

       팔 들고 외치시던 님! 그 모습 지금 한번 보고 싶구려,

       동북 몇 고을 귀해서리까 대륙 되찾을 발판이었소.

       땅 조각 잃은게 분함 아니라, 역사 죽은 게 통분해서요.

       세월은 구백 년이나 흘러도 님의 정한은 달랠 길 없소.

       이 무덤에 몸을 끼쳐도 혼이사 구성에 가 계시오리,

       오늘은 붓을 쥐고 님의 묘비에 글을 쓰오나,

       뒷날엔 막대를 던져 북녘 구름을 헤치오리다.

       전주후인 이은상(李殷相)글, 20대손 석오(錫五)글씨

       1966년 10월             29대손 경수(敬秀)세움

6. 심묘사적 (尋墓事蹟: 묘를 찾은 경위)

  여지승람(與地勝覽)에 파주 분수원 북쪽에 윤모공의 묘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옛 족보에 파주 분수원 문숙공 묘소가 있으며 문숙공묘도 동원(同原)에 있다고 하였다. 공의 묘 앞에 교자총이 있고 청룡(靑龍)밖에 전마총(戰馬塚)이 있다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조에 내려와서 연산조 때 양주, 파주, 고양 등  세 고을이 왕의 사냥하는 유행소(遊幸所)로 정해지고 일반 민간인의 출입을 금하여 봉쇄지구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종파가 한때 미약하여 수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병화가 겹쳐서 후손들도 돌볼 기회가 적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정승 심지원이 그의 할아버지 묘를 써놓고 그 후 이어서 수개의 묘를 썼지만 자손들이 선조의 묘소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고 지내기를 수세(數世)에 걸치었다.

  영조 23년(서기 1747년)에 후손 동규(東奎)가 그 아들 광로(光魯)와 함께 혼사로 장단 땅에 가다가 마침, 그 지역을 지나는 길에 분수원에 이르러 선조의 유영(遺塋)을 잃고 있음을 느끼고 산 위에서 방황할 때 홀연히 본즉 심지원 묘의 청룡 위에 다시 사초를 한 위, 아래에 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모두 짧은 비를 세웠으되 위에는「宣略將軍李好文墓(선략장군이호문묘)」라 쓰여 있고, 아래는 「執義德水李謨墓(집의덕수이모묘)」라고 되어 있으며, 심가의 큰 무덤에는 전부터 비석이 없는 모양이었다. 몇 해 후 다시 산 위를 올라가 본즉 심가 묘아래 큰 무덤이 있으되 분묘의 형상이 깎여져 있고 옛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본즉 이호문의 비석이었다. 그런데 그 곳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심가 묘아래 큰 무덤은 즉 윤시중 묘이고, 옛날에는 묘 앞에 돌사람과 비가 있었고, 굽은 담장으로 된 묘지(墓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심가가 여기에 투장(偸葬)을 해놓은 후에 비석 같은 일체의 흔적을 없애 버렸으니, 자손들이 찾으려 해도 찾을 도리가 없고 또한, 근 백년을 그대로 내려 왔은즉 충분한 증거조차 없어 공의 묘소는 잃어버리고야 말 처지에 있어, 자손들도 어떻게 확실한 증거를 잡아내야 할지 고심하던 처지에 있던 때였다. 이에, 그 부자가 곧 산에서 내려와서 모든 종족들과 의논하여 유영 찾을 방도를 연구하게 되었다. 우선 이호문의 손자 형진을 붙잡아다가 힐문한즉 심가가 이가를 매수하여, 상광(上壙)의 이호문 묘라는 것은 허광이요, 아래편이 전광으로서 심가의 변형 묘로서 공의 묘소 상관을 덮쳐 침범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의 묘비를 없애 버리어 흔적 없애려는 모계로서 이호문의 후손들에게 제토를 주어 제사케 하였던 것이다. 교자총이라 함은, 문숙공께서 북정(北征)하실 때 타시던 교자를 이에 묻은 것을 말함이다. 후손 좌윤 면교(勉敎)가 제종의 선두에 서서 왕께 이 연유로써 상소를 하였고, 계속해서 좌상 동도(東度)께서 왕께 아뢰니 영조 대왕께서도 그 간사한 형편을 살피시나 다만 확증될만한 비문이 없고 또한 오랜 세월을 경과하였기 때문에 이가의 비를 빼어 버리는 것만을 명하고, 양가에서 각기 수호하라는 명령이 계시었으니, 자손 된 자들로서 원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후 후손들의 정성으로 다행히 부러진 비석을 고총 좌편 열 발자국 밖의 작은 개천 속에서 발견하였으니, 이는 곧 그 근처 80노인이 묻은 곳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 비석으로써, 공의 벼슬, 성, 시호가 완연하여 가히 분별하기에 어렵지 않았으니, 제1행에 주국문경(柱國文敬), 제2행에 대부추충좌리평(大夫推忠佐理平), 제3행에 숙공윤만지묘(肅公尹漫之墓), 제4행에 1년3월일개(一年三月日改)라 하였으되 위아래가 모두 부러진 것이다. 듣는 자로 하여금 어찌 신기하게 여기지 않으랴, 윤만은 공의 처음 휘(諱)인 것이다. 좌윤공이 다시금 상소를 올리고 또다시 문강공의 유영을 찾고자 하였다. 왕도 또한 기이하게 여기사 이에 비답(批答)하여 가로되 『하늘의 밝고 밝음을 가히 알 수가 있고 경등의 지성으로 천년의 옛 비를 이미 얻었도다』하시고 본 군에 명을 내리시어 역군을 도와 묘를 보수하라 하시고, 심가의 묘를 수영(修塋)하라는 하교를 내리지 않았다. 『후에 옛 정승(故相)의 영이 있다면 그 뜻을 알 것이다. 자손 된 자의 도리로서 어찌 선조의 영을 모른다고 하겠는가?』고 역시 본도에 영을 내려 묘 만드는데 돕게 하였다.『심의 후손인 정최(廷最)가 이 뜻을 좇지 않고 경등도 싸움을 벌리면 마땅히 엄벌하겠다』는 분부였다. 갑신년(1764년) 5월 13일 석강(夕講)때에 승지 김화진이 윤면교등의 상소를 읽어 강을 마친즉 왕이 가로되 『참으로 이상하다. 당초에 서로 싸움이 벌어졌을 때 나도 과연 믿지 않았었는데 마침내 비석을 얻었으니, 역시 성의의 소치라고 본다』고 말하였다. 영상 홍봉한이 가로되『신의 생각에도 이상히 여기는 바로소이다. 백여 년간이나 잃었던 분묘를 지금에 와서 찾는다는 것은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사오리까?』고 말하자 김화진이 아뢰되『신은 윤면교의 집안과는 인척관계이므로 들었사온바 과연 여러 달을 두고 확증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여 구갈(舊碣)을 얻었으니, 그 정성과 함께 신기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왕이 가로되『과연 그렇다』홍봉한이 여쭈어 가로되 『제신이 어찌 외손 된 자가 없을 수 있겠으며 전하 역시 그 외손이 아니시옵니까? 특별히 돌보아 주어야 할 줄로 아옵니다.』고 아뢰었다. 영조께서도 그 윗대의 왕비가 우리 윤씨가 많았으니 외손벌이 되는 것이다. 왕이 가로되, 『백성을 다스리기가 극히 어렵다. 본 고을에서 조묘(造墓)케 하라』고 하교하신 후『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케 하라』하시었다.                         

  당초에 왕께서도 심가의 혼령에 미안하다 하고, 동산소(同山所)로써 수묘를 하라고 하시었으나, 심정최도 왕명을 어기고 자기의 조상에게만 좋도록 하려고 하였고, 우리 종중에서는 심가의 소행에 원한을 품고 있는 터이라, 그 후에도 분규를 수없이 거듭하여 상소가 연달아 올라갔다. 왕명이 비록 엄하였지만 양쪽의 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최후에도 심정최와 첨지공(熙復=문숙공 장파인 남원파)을 왕이 친히 불러서 심정최로부터 비석을 파묻은 것과 옮겨 세운 것을 자복케 하시고, 희복공에게는 공이 지나치게 왕에게 대들었다고 하여 죄를 다스렸으니, 이는 즉 희복공이 왕에게 『대왕은 문숙공의 외손이 아니십니까?』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심가의 묘에 계단을 없애고 공의 묘소를 성분(成墳)케 하고 다시는 유영(遺塋) 찾는 일을 벌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자손으로서 원한을 풀지 못하고, 유한을 천추에 남기게 하였으며, 이로써 문강공의 묘소는 영원히 찾지 못한 것이다. 왕명을 어길 수 없어 후손들이 유한을 억제치 못하고 영조 40년 갑신년(1764년)에는 8도의 제종 약 8백여 명이  묘소 아래 모여 심가의 비석을 파 옮기고 문숙공의 신도비의 감춘 곳을 찾고자 하다가 심가 측과 충돌되어 편싸움을 벌어진 일도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장(門長)인 도사(都事)벼슬을 지낸 희복공께서는 마침내 왕에게 대들어 죄를 다스림을 받아 그 장독(杖毒)으로 원통히 돌아가셨으니 우리 종중의 원한이 어떠했으랴. 그해 영조는 어제(御製)의 제문으로써 「조선국왕은 도승지 윤동섬을 보내어 고려 윤문숙공의 묘에 제사 한다」고 하여 조분(造墳)과 동시에 치제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는 심가와의 통분으로 인연을 맺은 후손들은 그 분함을 억제치 못하여 종종 원한을 풀고자 하는 사단이 일어났다. 철종 11년(1860년) 10월 향사 때에 자산(慈山)종인 면갑이 심가의 비석을 쪼아내고 후손 희배는 향유사로서 경향 3파(파평, 남원, 함안) 제종 중에 통문을 보내어 심가의 비석을 파묻자고 하였던 바, 심가들이 원한을 품고 와서 교자(轎子) 두자를 공의 비에서 벗겨버렸는데, 다음해에 효헌공(敎成)이 교자총비를 개수립(改樹立)하였고, 음기(陰記)는 효문공(定鉉)이 썼다. 8.15광복 후에, 심가의 묘(沈墓)를 상당한 보상을 주어 이장토록 하고자 후손들과 심씨 종중사이에 논의가 있었으나, 여의치 못하여 심가 묘를 파내어 버리자는 의논이 일부에서 일어나, 양주종인 병순(昞淳)이 인부 십여 명을 데리고 밤을 타서 심가 묘를 파헤쳤으나, 워낙 계획적으로 견고하게 회를 사용하여 파묻은 탓으로, 날이 밝도록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으니, 원래 그들이 후일에 어떠한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먼일을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병순은 개성형무소에서 수개월간 옥중생활을 하였다. 백암 안응창 습유록(拾遺錄)에 『고려명상 윤모의 의관과 신발을 파주 분수원에 매장하였으되, 다만 고찰할만한 각석(刻石)이 없어 후손들이 그 묘처를 잃었다. 근세에 와서 심상지원(沈相之源)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장지를 정하였으나, 이곳이 윤상(尹相)의 장산(葬山)이다. 흙을 팔 때 그 묘지를 얻었지만 수습하여 쓰지 않고 묘지를 없애므로, 윤씨가 그 분영(墳塋)을 찾지 못하여, 전부가 심씨 문중으로 귀속되었다.』고 쓰여 있다. 심지원의 조부 종침의 장사 날이 광해군 6(1614)년이니, 안응창의 나이가 12세였고, 그 아버지 심설의 장사 날이 인조 3년이요, 지원의 장사가 현종 3(1662)년으로서 처음에 장사지낼 때에는, 청룡밖 이가산 근처였는데, 그 후에 이장하여 문숙공 산소의 상광(上壙)을 눌러 쓴 것이다. 이와 같이 심가들이 장사지낸 후 영조 정묘년에 발견되었다면 우리 후손으로써는 근 백년 만에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할 것이니, 선조의 묘소에 대해서 너무 등한시하였고, 후손들로서 성실치 못한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후 1950년 6.25사변 이후에도 문숙공의 묘소에 대해서 심가 측과 끊임없는 분규가 일어나고 있다가, 1969년 심가 묘와의 사이에 곡장(曲墻)을 쌓았다. 공의 묘소에는, 묘표음기(墓表陰記)가 있고, 묘지(墓誌)가 있으며, 또한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묘표음기에는 묘소를 실전한 것으로부터 되찾은 경위를 기록하였는데, 21대손 정헌대부 전공조판서 겸 세자시강원찬선 봉구가 지으셨고, 22대손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동지춘추관사 동섬(東暹)은 전면에 큰 자로「고려수태보문하시중영평백문숙공윤관지묘(高麗守太保門下侍中鈴平伯文肅公尹瓘之墓)」라고 쓰고, 22대손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지제교 방(坊)은 음기를 쓰셨다. 그리고 묘지는 공의 행적을 그대로 기록한 것인바, 26대손 숭정대부 이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자승(滋承)이 쓴 것이다. 또한 신도비는 1966년에 서울에 사는 후손 경수(敬秀)가 단독으로 성재를 내어 세운 것이다.                              

7. 묘소 (墓所) 약기 (略記)

  국가사적 제323호 이곳은 고려(高麗) 중기의 명신 윤관(尹瓘)장군 묘소이다. 윤관장군의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문종(文宗)때 과거(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104년(숙종 9)에 동북면 행영도통려 태조를 보좌한 삼한익찬공신(三韓翊贊功臣) 윤신달(尹莘達)의 후손으로 돈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에 임명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女眞) 정벌에 나섰으나, 군세 부진으로 강화를 맺고 회군한 후 별무반(別武班), 신기(神騎), 신보(神步), 항마군(降魔軍)을 창설하여 3년간 훈련을 시킨 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오연총과 더불어 1107년(예종 2년)에 정병 30만을 이끌고 함경도 지방의 여진을 정벌하고 9성(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숭령진, 통태진, 진양진)을 설치하여 수비케 하였다.  1108년 재침하는 여진을 30만 대군으로 정벌한 후,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정계비(高麗政界碑)를 세우고 개선하였다.  공은 또한 되찾은 옛 강토에 남방의 백성 40만을 이주시키는 한편, 계속 북변(北邊)을 침범하는 여진을 재 정벌하여 확장된 우리 국토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 후 모함을 받아 벼슬과 공신의 호마저 삭탈 당했으나 1110년 다시 수태보문하시중(守太保門下侍中)에 복관되었다. 공은 문무겸전(文武兼全)한 공신으로 1111년(예종 6년)에 돌아가셔 이곳에 예장되었는데, 위패를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셨고, 조선조에서는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다.

8. 문숙공 동상 (文肅公 銅像)

  1976년 11월 21일 파평윤씨 대종회정기총회에서 문숙공 동상을 세우기로결의하고 동년 12월 28일 임원총회에서 동상건립 장소를 문숙공 묘역으로 하기로 하였다. 1977년 1월 25일 「문숙공 윤관장군 기념사업회」가 거족적(3,000명)으로 발족되어, 회장에 이선근(李瑄根) 박사가 추대되었다. 동년 9월 28일 동상제작의 권위자인 민복진(閔福鎭)씨에게 제작을 의뢰하였다.(고증 金東旭 박사) 1978년 8월 24일 동상건립 장소를 서울 갈현동 통일로 옆 도로공원으로 변경하여 기공식을 가졌었으나, 건립 장소가 부적당하다는 여론이 많아 서울시와 협의하여 서울역 옆에 있는 서소문공원안에 동상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여, 1979년 9월 25일 착공식을 갖고, 1980년 5월 8일 2만 여명의 종인 및 각계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동상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동상이 건립되기까지 당시 대종회장이던 남의(南儀)씨가 전국의 조직을 정비하고, 각 군 단위까지 화수회를 조직하게 하는 등 동상건립성금을 모금하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동상건립성금은 경향각지 및 해외동포들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 참여하여 거족적 후원 속에 이루어진 것이다.

동상의 규모는 동상높이가 5.8m, 좌대높이 5.9m, 총높이가 11.7m이며, 4면은 돌로서 9성을 부각시켰으며, 4면 모서리에는 성을 수호하는 해태 상을 세웠다. 동상의 총공사비는 111,250,000원이 소요되었다.

                   6世 어사공 언순 (御史公 彦純)

  관(瓘)의 二子. 언이의 둘째 형. 공이 일찍이 아버님이신 문숙공을 모시고, 여진정벌에 수행하여 함주를 비롯한 6성을 완성하시고 공험진에 경계비를 세우자, 문숙공은 공을 왕께 보내어 표(表)를 올려 성덕(聖德)을 하례 하였다. 예종 10년(을미)(서기 1115년) 10월에 공은 시어사(侍御史)가 되시었을 때, 요(遼)나라에 가시어 천흥절(天興節)을 축하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이 시어사로서 요나라에 가시어 천흥절을 축하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에 금(金)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길이 막히고 또 고영창(高永昌)이 동경(東京)에서 반란을 일으켜 점령하고 있었던 바, 공은 서방(徐昉) 이덕윤(李德允)등과 함께 영창에게 붙들려서 도저히 절조를 지킬 수 없어 부득이 그들에게 글로써 축하의 뜻을 표시하였다. 귀국하여 그 사정을 숨겼으나, 일이 누설되어 유사(有司)들이 그에 대한 치죄를 주장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병신년 봄, 정월에 왕은 비서교랑(秘書校郞) 정양직(鄭良稷)을 안북도호부아(安北都護府衙)라는 가칭 직첩을 가지게 하여, 요의 동경에 보내 지절일사(地節日使) 윤언순(尹彦純)과 진봉사(進奉使) 서방(徐昉), 하정사(賀正使) 이덕윤(李德允)등의 사고를 조사케 하였다. 공은 지절일사로서 진봉사가 되시었으며, 관직이 남원 부사에 이르시었다. 5남 1녀를 두시었다.

                  6世 복야공 언식 (僕射公 彦植)

  관(瓘)의 오자. 언이의 다섯째형이다. 공은 관직이 접반정봉대부 형부상서 주국 사자금어대(接伴正奉大夫刑部尙書柱國賜紫金魚袋)에 이르시었다. 고려 주경(周經)에 의하면 공은 평소에 유학(儒學)으로 이름이 알려져 아버님이신 문숙공이 공경(公卿)의 반열에 계시어 중국에 조공가실 때는 그 아드님이신 공을 수행케 하시었다. 세교가 이씨(李氏)와 친밀하여 통혼하고 또한 자질(資質)이 겸후(謙厚)하고 착하시었다. 해(楷= 고려인종의 이름)가 세자로 있을 때 공이 그 측근에 있었으므로 그분이 즉위하자, 벼슬이 올라 귀하게 되시었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인격이 위대하여 완연히 선비의 풍도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배위는 경주 김씨인바, 그 아버지는 공부랑(工部郞) 자우(自瑀)요, 조부는 복야(僕射) 지구(之球)요, 증조는 시중(侍中)인 여흥(餘興)이다. 의종(毅宗) 2년(서기 1148년)에 공을 수사공(守司空)에 삼고, 3년 기사(己巳) 5월에 수사공 복야 윤언식이 졸(卒)하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언식이 천성이 고매하고 빈객을 좋아하였다고 적혀있다. 10년 12월에 왕이 수사공 윤언식의 집에 납시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인종 14년에 금나라의 태황태후 상에 사신을 우리나라에 보내 와서 고려에서는 3일간이나 거족적으로 소복을 입게 하였고 전중감(殿中監) 윤언식과 좌사간(左司諫), 최윤의(崔允儀)를 금나라에 보내어 조상케 하였다.

                     6세 문강공 언이(文康公 彦?)

1. 약사 (略史)     (고려사 열전에서 역재)

  윤언이(尹彦?)는 등제하여 인종 조에 누천(累遷)하여 기거랑(起居郞)이 되었는데, 좌사간 정지상과 우정언 권적으로 더불어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니 임금이 이를 좋게 받아 들였고, 국자사업으로 옮겨 경연에 나아가 경의를 강혼하니 화서대(華犀帶) 일요(一腰)를 하사하였으며, 보문각직학사로 옮기었다. 1135년 묘청이 반(叛)함에, 조(詔)하여 김부식, 임원애로 장수를 삼고, 언이로 보좌를 삼아 이를 치게 하였다. 이에 앞서 관이 조를 받들어 대각국사 비문을 지었는데 공교하지 못하다 하여. 그 문도가 비밀리 임금에게 아뢰어 부식을 시켜 고쳐 짓게 하니 때에 관이 상부(相府)에 있었으나, 부식이 사양하지 않고 드디어 지었으므로, 언이가 마음에 이를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임금이 국자감에 행차하여 부식에게 명하여 역(易)을 강론케 하고 언이를 시켜 묻고 논란케하니, 언이가 역에 매우 정(精)하여 종으로 횡으로 변론하고 힐문하니 부식이 대답하기가 어려워 땀이 흘러 얼굴을 적시었다. 그 후 언이가 막하가 되어 부식이 아뢰기를 『언이가 정지상과 깊이 서로 결납(結納)하였으니 죄를 가히 사할 수 없습니다.』하므로 이에 양주방어(梁州防禦)로 폄(貶)하였다가 뒤에 광주목사를 삼으니 사은(謝恩)하는 표문을 올리고, 다음과 같이 자해(自解)의 글월을 인종께 올렸다.「쫓겨난 지 6년이 되니 분수로는 이미 만사(萬死)를 감수하겠사오나 하루아침에 은덕을 입게 되니 형세가 재생하여 나온 것 같아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할 말이 없고 몸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뿌리나이다.」

  간절히 생각하건대 위에서 아래를 어거함에는 충성을 바라지 않음이 없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는 신의를 보이기를 기대하나이다. 그러나 가히 기피할 수 없으므로 혹 서로 어기게 되나이다. 주공도 유언(流言)을 면하지 못하였고, 강후(絳候)도 오히려 급히 잡아맴을 당하였습니다. 망지는 제의 스승이로되 마침내 독약을 마시었고, 굴원(屈原)은 왕의 친족이로되 필경 강물에 빠졌으니, 현성(賢聖)으로도 오히려 혹 이와 같으니 보잘 것 없는 사람이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으리오. 신 같은 것은 타고난 자질이 박비(薄卑)하고 받은 성품이 편벽하여 지모(智謀)가 족히 몸을 가루지 못 하온데 학술이 어찌 능히 나라를 빛나게 하리요. 젊어서 일찍이 요행하게도 성고(聖考=睿宗)께서 현과(賢科)를 사하시고, 다시 폐하에게 인연하여 요로에 빼어 올렸으며, 때로는 국정에 참여하여 듣고, 자주 경연에도 들어가 모시었습니다. 망령되어 때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지나치게 하여서 일을 만나면 곧 그 맞고 안 맞음을 말하고, 몸을 마음대로 하여 시비를 돌보지 않으니 선진들은 이를 위하여 한심하다 하고 후생들로 하여금 지목하여 단점을 잡아 가지고 부연하여 꾸며서 탄핵하는 글이 여러 번 승문(升聞)함에 이르러 가히 죽여야 된다고 하였으나, 인자하신 임금이 비록 어리석고 강직함을 알아도 관대하게 할 수가 없으므로 인하여, 먼 곳으로 축출하여 그 여명이나 보전케 하고자 하시므로, 신이 폄출(貶黜)당한 때와 임행할 때에 죄를 얻은 연유를 알지 못하고 한낮 근심스러운 생각만이 지극하였더니, 뒤에 중군(김부식)이 아뢴 바를 보게 되니, 말하기를 『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서로 죽기로 맹세 한 당이 되었으니 대소의 일을 함께 의논하였고, 임자년 임금이 서경으로 행차하실 때에 글을 올려 건원하고(황제를)칭호하기를 청하고 또 국학생을 충동하여 전건의 일을 아뢰게 하였으니, 대개 대금(大金)을 격노시켜 일을 내게 하고, 그 틈을 타서 뜻을 빙자하여 자기 붕당이 아닌 사람은 처치하고 불궤(不軌)하기를 꾀하고자 함이니 인신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를 두세 번 읽고 난 뒤 마음이 이에 안정되었습니다.    아아! 이 건원하고자 청함은 우리 임금을 높이는 정성에 근본 함이니, 우리 본 조에서는 태조와 광종의 옛 일이 있고, 그 옛 문헌을 상고하건대 비록 신라와 발해가 그러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대국이 일찍이 그 군사를 내지 않았으며 소국이 그것을 과실이라고 의논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성세(聖世)에는 도리어 참담히 행함이라고 하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 의논을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죄라 하면 죄이오나 저 결탁하여 죽기로 당을 삼아 대금을 격노케 했다 함은, 말은 비록 심히 크나 본말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령 강적(强敵)이 와서 우리 강토를 침략하면 오직 한란을 방지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 온데 어찌 틈을 타서 그러한 일을 할 수 있으리오.    그 지독한 붕당은 누구이며, 그 처치하고자 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지, 여러 사람이 만약 화합하지 않으면 싸운즉 패하여 용신할 곳도 없을 것인데 어찌 뜻을 방자히 하여서 불궤를 모책하였겠습니까? 하물며 신은 대화(大華)란 말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지상과도 같지 않아서 수한(壽翰)의 천(薦)에도 참여하지 않았음은 오직 폐하께서 밝게 아시는 바입니다. 한번 강호(江湖)에 떨어짐으로부터, 이미 한서(寒暑)를 여섯 번이나 바꾸었음에 녹봉이 오래 궐하여 의식을 이어가기 어려우니, 친구가 다 사귐을 끊고 처자가 함께 있을 곳을 잃어서, 형해(形骸)가 초췌함이 심하여, 마른 나뭇가지와 같고, 정백(精魄)이 놀래고 당황함에 망연하여 취한 꿈과 같은데, 살아서 오늘에 이르게 됨은 폐하의 알아주심을 힘입음에서 입니다. 신은 지극히 약한 자질로서 서정(西征)의 전역(戰役)에 종사하여 몸을 잊고 나라를 방위함은, 이것이 의분의 마땅함이요 성사함은 모두 사람으로 인함이었으나 무슨 근로를 족히 말하겠습니까? 이제 말하려 함은 공로로 삼고자 함이 아니 오며 다만 보잘 것 없는 정성을 조금 펴고자 하옴이니 혹시나 폐하의 마음이 한번 살피시기를 원하나이다. 지나간 을묘년에 중군은 적의 양식이 다하기를 기다리는 방책을 썼으나 그러나 흉당은 아직 항복하지 않고 시일만 점점 오래되어 강에 얼음이 다 녹게 되어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신이 3월에 성벽에 붙여서 토산을 만들자는 의논을 세우다가 사람들의 저지한 바가 되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11월에 이르러 중군이 양명문(揚命門)에 비로소 토산을 만들고 지병마사 지석숭(池錫崇)과 신 언이 등을 시켜 번갈아 그 곳에 가서 적토(積土)의 다소를 점검하여 보게 하였는바, 계산하여 보니 수개월이 되어야 가히 성 위에까지 닿겠는지라, 신이 또 전 군사 진숙(陳淑)으로 더불어 화공(火功)하기로 의정하고, 판관 안정수 등을 시켜 화구 오백여석을 만들고 다음 9일 새벽에 이르러 조언이 만든 석포(石砲)를 방사하니 그 불꽃은 번개와 같고 그 크기는 수레바퀴와 같았습니다. 적이 처음에는 계속해서 불을 끄더니 날이 저물어 불기운이 크게 성하므로 적이 구하지 못하는지라 철야하여 방사하니 그 양명문 및 행랑의 20간 정도와 적이 쌓은 토산을 모두 다 불태워 버리고, 20일에는 인마가 가히 함께 출입할 정도로 무너진지라 신이 곧 중군에 이르러 이 본말을 상세히 진술하고 청하기를 때를 맞추어 공격하여 적으로 하여금 방비하지 못하게 하자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있어 분연히 불가하다고 하는지라, 신도 또한 기색을 하고 힘써 다투었으며, 14일에 또 전군에 이르러 급히 치면 가히 깨뜨릴 것이라고 말하니, 사람마다 모두 말하기를 흙 쌓는 것을 필함을 기다려 적을 칠 것이라 하였습니다.  적은 이미 전방에 목책을 설치하여서 막는지라, 신이 급히 치기를 간청하여도 오히려 결단하지 않았습니다. 16일에는 원수가 전군(前軍)에 이르러 5군의 요좌(僚佐)를 다 모아 놓고 의논하니 사람마다 모두 지난날의 의논을 고집하였습니다. 이날에 적은 또 중성을 쌓아 그 형세가 늦출 수 없었습니다. 이에 앞서 지석숭이 군에 있어 감역(監役)함에 신과 뜻이 합하였고, 이어 부사 이유, 판관 왕수, 이인실 등 8인이 이에 화응(和應)하니, 이에 원수가 비로소 그 의논을 쫓아서 19일에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닥쳐 들어가 일을 치르니 마른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아서 하나도 지체되고 어려움이 없는지라, 신이 이날에는 중군을 맡아 판관 신지충, 김정황, 장군 권정균, 방자수, 녹사 임문벽, 박의신 등으로 더불어 비밀리 군사를 정돈하고 일찍이 7성문 밑에 이르러 나무를 쌓고 불을 지르니 불이 붙은 뒤에야 적이 깨닫고 놀라 당황하였으나, 갑자기 구하지 못하고 문랑(門廊) 97간을 소탕하여 바라보니 텅 비었거늘 곧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마침 하늘이 음우(陰雨)를 내리므로 군사를 거두어 영에 들어왔나이다. 이튿날새벽 적괴(賊魁)인 정덕환, 유위후와 소관 4인이 가만히 성에서 나오거늘 방자수가 휘하를 시켜 잡아 영에 이른지라, 신이 덕환, 위후는 원수의 곳에 보내고 별도로 별장 김성기 등을 시켜 잡은 소관 2인을 거느리고 경창문에 가서 적에게 설유하니 적장 홍걸이 나와서 항복하였습니다. 이날에 전군(前軍)은 광덕 함원문(含元門)밖에 있었는데, 적이 아직 문을 닫고 항거하거늘 홍걸이 의민과 더불어 의논하여, 위원수 최영을 잡고서 이령의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온 뒤에, 적의 대장 소황린, 정선곡, 박웅소 등 문무 20여인이 서로 이어와서 항복하니, 그 나머지 잡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신이 자수를 보내어 이휘정 및 항적(降賊) 서효관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서 궁궐, 창늠(倉?), 부고(府庫)를 봉쇄하고 휘정을 시켜 궐을 지키게 하고, 그 자물쇠와 열쇠 67개를 거두어 영에 들였는데, 좌군이 북문으로부터 들어가서 군사를 풀어 대부의 재백(財帛)을 낸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의신을 보내어 이를 금지토록 하여도 듣지 않으므로, 다시 정균을 보내어 이를 제지케 하여 대부가 완전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신의 아들 자양을 원수의 처소에 보내어 사실을 보고하니, 낮이 되어 원수가 중군에 이르러 다시 이인실, 이식 등을 명하여 궁궐, 부고를 봉쇄하고 표문을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이상은 그 대략이요 상세히 진술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스스로 국사에 조금이나마 정성을 들였다고 생각하더니, 어찌하여 그 후에 번복되어 홀연히 무고 하는 말을 만들어, 드디어는 이 우둔한 사람으로 하여금 억울한 죄에 빠지게 하였으니, 전일의 연좌한 바를 생각하오며 또한 신이 스스로 끼친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이 엎드려 소식이 귀양 갈 때의 표문을 읽어보니,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주(徐州)를 맡았을 때에 하수(河水)가 성을 침식하여 거의 잠기게 되거늘, 낮밤으로 지키고 막아서 마침 안전함을 얻었고, 또 일찍이 기주(沂州)백성 정비(程비)를 뽑아 써서 흉당을 잡아 반역을 꾀한 요적(妖賊) 이탁, 곽진등 17인을 잡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요행한 인연으로 공(功)과 과(過)를 상제(相除)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자첨(子瞻)(소식의 字)의 호매한 재능으로도 오히려 구구한 변명이 이와 같았사옵거늘 하물며 언이의 외롭고 위태한 형적으로 마침내 침묵만 지켜야 하겠나이까. 궁박하여 그러하오니 감히 진술함을 어찌 그만 두겠나이까. 또 금정은 일찍이 옥리의 심문을 겪었으되, 7개월을 지나서 현관에 복구되었고, 유충은 신과 같이 강남에 폄출(貶黜)되었으나 3년에 이르러 구위(舊位)에 돌아왔는데, 오직 신은 불초하여 세상으로 더불어 많은 어김이 있어 이름이 이미 가혹한 법문에 걸려 사람들이 다투어 그 부허(浮虛)한 말을 함부로 하여서 죄를 논하여 풀리지 않기를 우금(于今) 해를 지나니  감히 몸의 죽음을 아껴서 스스로 해명함이로소이다. 진실로 임금을 생각함이 간절하여 오래도록 능히 모욕을 참고 살아 있어 신원(伸怨)할 수 있음을 기다림이더니 뜻밖에 임금께서는 특히 관대하신 도량으로 신의 크게 궁한 형상을 민망히 여기시고 신의 두 마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매양 유사에게 훈유(訓諭)하여 두 번째 고충(孤忠)을 먼 귀양살이에서 일으켰나이다. 우러러 신화(新化)를 입으며 점차로 평민에 섞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침내는 악명을 씻고 그윽이 다시 후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지인(至人)으로 다스리고 후덕으로 허물을 용납하심이니 견마(犬馬)도 혹 덮어주는 은택에 젖음을 생각하시고 사환(仕宦)의 신하를 차마 버리지 못한다 하시와 신의 여생을 뭇사람의 분노가 번갈아 일어나는 즈음에서 구출하시고, 신의 잔질(殘質)을 몇 해나 유락(流落)한 가운데에서 거두어 특히 실관(實官)을 제수 하시고, 구록(舊祿)을 다 돌려주시니 무망(誣罔)함이 풀림은 마치 해가 떠오르니 초옥도 밝아짐이요, 고후(枯朽)하였던 몸이 다시 살게 됨은 마치 봄이 돌아와 시우(時雨)가 내림과 같사오며, 신이 진실로 목석의 정이 없음에 비할 바가 아니오니 어찌 천지의 조화이신 은덕을 모르겠나이까. 장기(將氣)는 이미 쇠하였으므로 다시 평소와 방불함은 없사오나 단심(丹心)은 아직 있사오니, 맹세코 만절의 치구(馳驅)를 다하여 비록 구렁에 죽더라도 감히 풀을 맺어 은혜 갚기를 잊겠나이까』 의종(毅宗)3(1149)년에 정당문학으로 졸 하니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문강이라 시(諡)하였다.  언이는 문장에 공교하고 일찍이 역해(易解)를 지어 세상에 전하였으나 만년에는 불법을 심히 좋아하고 청노(請老)하여 물러가 파평에 살면서 스스로 금강거사(金剛居士)라 호(號)하였다. 일찍이 중 관승과 더불어 공문(空門)의 벗을 삼았는데 관승이 한 초암(草庵)을 만들어 다만 한 사람만이 앉도록 하고 약속하기를 먼저 가는 자가 이에 앉아 죽기로 하였다. 하루는 언이가 소를 타고 관승에게 가서 작별하고 곧 돌아가거늘 관승이 사람을 시켜 초암으로 보내니 언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師)가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도다.』하고 드디어 붓을 가지고 벽에 쓰기를「봄에서 다시 가을됨이여, 꽃이 피었다가 잎이 떨어지도다. 동에서 다시 서로 감이여, 참된 임을 잘 받들었도다. 오늘 도중에 돌이켜 이 몸을 보니, 만리장공(萬里長空)에 한 조각 한가한 구름이로다.」라고 쓰기를 마치고 그 암자에 앉아서 고요히 잠드셨다. 아들은 인첨(鱗瞻), 자고(子固), 돈신(惇信), 자양(子讓)인데 인첨, 자고, 돈신이 다 등제하였으므로 나라에서 해마다 그 母에게 녹을 주었고, 돈신은 병부시랑이요, 그 아들은 상계(商季)이다.

2. 문강공 묘지해설                

  황통(皇統) 8(1148)년(高麗 毅宗 2년) 임금께서 나라의 원로들을 요직에 임용함에 있어 그해 십이월 공에게「은청광록대부 정당문학 판상서형부사」의 직을 내리시니 명해주신 것으로는 우대하고 흡족한 것이었다. 공이 절하여 사양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부임하여 도(道)의 변하는 것을 의논하고 음양의 이치를 다스려서 안으로는 백관을 감독하여 바로잡고 밖으로 오랑캐를 진압해서 왕도로 하여금 만세토록 무궁한 복을 받게 하였다.    이듬해에 중군병마판사 겸 동북면 행영병마판사의 직을 더하여 이에 3군을 새로 일으키고 사졸을 훈련시키더니, 얼마 안 되어서 형혹성(화성)이 남두성에 범하니, 식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상부(相府)에 반드시 일이 있겠다하더니, 9월 3일에 공이 군영에 나가려 해서 문을 나서다가 몸이 좋지 못하여 곧 돌아와서 방에 들어가 말씀하시는 동안에 드디어 운명하셔서 광제사(廣濟寺)에 빈소를 차리니 향년이 육십이셨다. 임금께서 들으시고 슬퍼하시어 사흘을 조회 보는 것을 폐하시고, 유사를 명하여 호상하도록 하고, 「은청광록대부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형부사 주국」을 증직하였다.

고의 휘는 언이(彦?)요, 자는 원로(元老), 성은 윤씨니 영평현(鈴平縣)사람이다. 증조부는 증군기감으로 휘는 금강(金剛)이오, 조부는 증태자태보로 휘는 집형(執衡)이오, 고(考)는 개부의동삼사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이시고 수태보 문하시중판상서 병부사 영평현개국백감수국사 상주국으로 휘는 관(瓘)이니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하사하고 예종 묘에 들어가셨다. 공이 어려서부터 늠름하게도 성인의 태도와 같았고, 손에 책을 놓지 아니하여 배고프고 목마르고 춥고 더운 것을 알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모든 것을 한번 보면 곧 입에 외우고, 박학해서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천문이나 지리, 명서 같은 것도 모두 묘하게 알되 일찍이 속인들처럼 하지 아니하고 문숙공이 말하기를 『반드시 우리문호를 크게 할 것이니 내 다시 무엇을 걱정하겠느냐』고 하였다. 건통 7년 십이월에 아버님의 음으로 벼슬에 올라, 홀연히 동북면행영병마사로 나아가 사령이 되었다. 가한촌(加漢村)을 공격함에 촌락이 떨고 적병이 급히 쳐와서 군장들이 무너지고 어지러운데, 공이 홀로 원수를 받들어서 용맹으로써 쫓아냈다. 공(功)을 이룸에 유사가 천거하여 포상하니 원수(元帥)는 즉 공의 아버님이었다. 계사년에 산정도감판관이 되었고, 갑오년 봄에 진사 제일등에 급제하고, 을미년에 금오위녹사겸 보문각교감으로 옮기고 경자년에 첨사부사직으로 옮기고, 임인년에 한림원직에서 또 전중 내급사로 옮겼다가, 십이월에 예부원외랑, 지제고로 승진하고, 갑진년에 예부랑중이 되어 비어대를 하사 받고, 이날로 전주목사로 나가셨다. 병오년 조서에 응하여 대궐에 들어가서 십이월에 호부원외랑 지제고를 지내다가 우사간으로 바꾸고, 나머지는 전과 같이 하고서 사관의 수찬관을 더하고, 또 기거사인으로 옮겼다가 기거랑으로 바뀌었다. 정미년에 예부랑중 지제고로 옮기고, 기유년에 추관에 있으면서 옥사를 다스리는데 옥이 이십 삼일이나 비었고 원통하고 잘못된 것을 모두 한번에 풀어주고서 이부랑중으로 옮기시었다. 그 후 국자사업 보문각대제지제고에 옮겨서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고, 계축에 동궁시강학사를 더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이하고, 십이월에 어사중승으로 옮겨서 이해를 극진하게 말하여 간악한 자를 탄핵하였다. 갑인년에 예부시랑 보문각직학사를 더하고, 오래지 않아서 우간의대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았다. 공이 일찍이 추충수정안사공신 수태보문하시중 판상서호례부사 감수국사 상주국시호사정공(諡號思靖公) 김약은(金若溫)의 딸에 장가들어서 일곱 아들을 낳았다. 맏이는 시경시령(試京市令)으로 이름은 인첨(鱗瞻), 임자년에 진사과에 급제했고 평장사 한유충(韓惟忠)의 딸에 장가들어 아들 다섯을 낳으니 맏이 종악(宗?)과 다음의 종회(宗誨)는 조부의 음덕을 이어받아, 모두 조정에 이름을 얻었다. 넷째는 상의직장동정으로 이름은 자양(子讓)인데 전중소감 최온(崔溫)의 딸에 장가들었고, 둘째는 직사관(直史관)으로 이름은 자고(子固), 갑자년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형부상서 문공유(文公裕)의 딸에 장가들고, 여섯째는 조계종 종래사로 이름은 효돈(孝惇) 계해년에 상품(上品)에 크게 선발되었다. 셋째는 상식직장동정(尙食直長同正)으로 이름은 돈신(惇信), 정묘년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국자감 대사성 김단(金端)의 딸에 장가들었고, 다섯째는 군기주부동정으로 이름은 돈의(惇義)인데 당시 태학생이었고, 일곱째는 요서 하였고, 네딸은 모두 일찍이 하세 하였다. 공을 바라보면 엄연하게 두려웁고, 가까이 보면 온화해서 세상에서 모두 재상의 그릇이라고 말하였다. 공이 장가들면서부터 중국과 외방으로 출입함에 일찍이 다른 여자와 사귀는 일이 없었으니, 이 또한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움이 지극함이었다. 공이 그릇되기 꺼려하는 바가 있어서 죄명이 정부 책상에 기록되니 인종(仁宗)이 더욱 통석하게 여기어, 특별히 지휘를 내려 삭제하게 하였으나 유사들이 굳게 고집하였는데, 지금 임금이 즉위하자 단안을 내려 드디어 삭제하였으니 이른바 신을 알기를 인군만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황통 5년에 호부상서에 제수 되고, 6년에 집현전학사에 제수 되고, 8년에 한림학사를 배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다. 인종과 지금 임금께서 정사에 나가는 날에 모구 용(龍)이 따랐으니, 첫 번째는 동북면병마부사가 되었고, 두 번째는 서북면병마사가 되었으니 모두 뜻에 맞는 것이었다. 또 남성좌주와 동지공거가 되어서 모두 인재를 취하는데 어진 이를 많이 하였다. 갑인년에 때마침 가뭄이 드니 임금께서 명하여 월령(月令)을 지어서 강해서 대의(大義)를 발명하게 하니 하늘에서 곧 비가 내리니라. 매양 경연(經筵)에서 진강할 때마다 인종이 보배로운 띠를 하사하신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정묘년에 선군별감(選軍別監)이 되어서 여러 해를 두고 해결하지 못했던 백성들의 소송하던 것 일체를 올바로 처결하였다. 또 군대 20만 여명을 훈련시켰는데 사람들이 모두 열복하였다. 임술년에 공으로써 인종의 책봉을 위해서 접반사로 남에 공이 회포를 열어, 더불어 말하니 이적(夷狄)으로 대하지 아니하였다. 무진년에 지금 임금의 책봉을 예행함에 임금으로 하여금 승평문 밖으로 나와 맞이하지 않게 한 것은 전례에 따른 것이었다. 나라의 제향등 국가의 대례(大禮)에 참여하여 자세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고 하나도 부끄러울 만한 것이 없었다. 세아들로 하여금 함께 과거에 급제하게 하여 이것으로 해서 어지신 부인 광양군대부인 김씨가 나라의 하사품을 받았다. 경오 4월 14일에 임강현(臨江縣) 용봉산 숭복사 동쪽 산마루에 장사지내니 곧 아버님 시중 문숙공의 능침과 한 경내이었다. 사람들이 일찍이 자의(子儀)와 같이 말기를 공은 곧 해동의 공자(孔子)라고 하였다. 아래와 같이 명(銘)한다. 높은 덕이로구나 공이여! 모든 남아의 우두머리로다. 총명하고 정직하니 그 즐겨함은 하늘이로다. 배움은 육경을 다하고 이에 여러 사기에까지 이르렀도다. 한 경서를 마음에 두면 문득 입에 외워서 성과 명의 이치와 도덕의 근원을 누가 우리 공의 통치 않는 바가 없는 것과 같겠는가? 나라의 사직이요, 백성의 아버지며, 스승이로다. 충과 효를 둘다 세워서 한 가문을 빛냈도다. 써 내놓으면 문장이 되고 관(冠)이 천고에 비치 도다. 오랑캐가 소식을 듣고서 두려워하여 담(膽)이 떨어지도다. 간사함을 돌려서 덕을 바라보고 송연(悚然)히 다리를 떠는도다. 공명이 영원히 빛나 책속에 전해질 것이로다.     

                   6世 봉어공 언민 (奉御公 彦旼)

  관(瓘)의 七子. 언이의 막내 동생. 고려사에 의하면 「인종 21년(서기 1143년)에 상의봉어(尙衣奉御) 윤언민을 송나라에 파견하여 정월을 축하하였다」고 쓰여 있다. 여지승람에는 의종(毅宗) 6(1152)년에 만수정(萬壽亭)에서 연회를 베풀어 새벽녘에야 파하였다. 이보다 앞서 윤언민이 기이한 돌을 모아 수창궁(壽昌宮) 북편에 가산(假山)을 만들었으니, 여기를 만수산이라 하였는데, 그 벽을 누런 능라 비단으로 씌워 그 사치스럽기가 이를 데 없이 찬란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황홀케 하였다. 잔치가 파하자 가산이 무너지고 닭이 울었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동국통감(東國通鑑)에 묘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부상서 김부의(金富儀)가 좌장군이 되었는데, 공이 김단(金旦) 이유개(李有開)등과 함께 그를 보좌하였다고 적혀있다.

                    7世 문정공 인첨 (文定公 鱗瞻)

  언이(彦이)의 장자이시며 공의 자는 태조(胎兆)인데, 예종(睿宗) 5년 (1110년)에 출생하시었다. 배위는 대흥군부인(大興君夫人) 한씨로서, 그 아버지는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이 毅宗 朝에 과거에 급제하시어, 여러 번 직위가 바뀌어 시어사(侍御史)가 되시었으나, 바른 말을 하시다가 왕의 비위를 거슬려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내려 가시었다가, 毅宗17(1163)년에 기거주(起居注)가 되시었다. 공이 후에 형부시랑으로서 서북면 병마부사가 되시었다. 의종 23(1169)년 12월에 간의대부가 되시었고, 24년에는 추밀원사가 되시었다. 1171년 명종이 즉위하자, 국자감 대사성이 되시었고, 2년에는 참지정사판병부사(參知正事判兵部事)로 승진되어 행영병마사겸중군병마판사(行營兵馬使兼中軍兵馬判事)가 되시었다. 3년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시었다. 『동년 6월에 평장사로서 진사 과거의 시관이 되시어 최시행(崔時幸)등 32인을 급제시켰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그후 상장군을 겸하시고, 중방(重房)의 의군(議軍)에 참서(參署)하시고 수태사(守太師)를 더하시었다. 명종4년(서기1174년)에 서경에 있던 조위총(趙位寵)이 모반하여 군사를 일으킴에 왕은 공을 명하여 원수를 삼으시고 이를 치게 하셨다. 조위총은 병부상서가 되었다가 서경(평양)유수가 되었는데, 정중부 이의방등이 문신(文臣)들을 죽인 후에, 의종을 거제도에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왕의 아우 호(皓)를 왕으로 세웠으니, 그가 명종이 된 것이다. 위총이 정중부등을 치려고 모반하여 동북제성(함경도 방면)에 격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서울에서 장차 북녘 제성을 치고자 크게 군사를 몰고 온다하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겠는가? 내가 군마를 규합코자하니 빨리 서경으로 달려오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정중부 이의방등이 살육(殺戮)을 자행한 후 나라의 정치를 손아귀에 넣고 휘둘러 모든 정치가 혼란하여 사람마다 분함을 참지 못하던 때라, 위총의 그러한 격문을 보고 절령(절嶺)이북의 40여성이 이에 호응한 것이다. 공은 군대를 거느리고 절령에 이르러 군대를 집결시켰다. 때마침 모진 바람과 눈이 퍼부었으나 서편 군대로 하여금 고개를 타고 내려가서 급공격을 가하다가 적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관군이 혼란을 일으켜 무너짐에도 불구하고 공은 적에게 포위를 당하면서 까지 적과 싸워 죽음을 각오하고 쳐들어간 즉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정균(鄭筠)이 말려 가로되 『주장(主將)이 경솔하게 위험한 곳을 자취(自取)하여 화를 입고자 함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공도 이 말을 옳게 여겨 말머리를 돌이켜 다시금 포위망을 뚫고 겨우 벗어나 군대를 수습하여 돌아왔다.』고 동국통사에 기록되어 있다.

  11월에 왕은 다시금 공을 원수로 삼고, 추밀원부사 기탁성(奇卓誠)을 부원수로 삼아 서경의 조위총을 토벌케 하였다. 『지추밀사 진준(陳俊)으로 좌장군 병마사를 삼고, 동지밀원사(同知密院事) 경진(慶珍)으로 우군병마사로, 상자군 최충렬(崔忠烈)로 중군병마사 겸 대장군을 삼고, 대장군 정균(鄭筠)으로 병마사를 삼고, 상장군 조언(趙彦)으로 전군 병마사겸 대장군을 삼고, 그리고 문장필(文章弼)로 지병마사(知兵馬使), 상장군 이제황(李齊晃)으로 후군병마사, 사재경(司宰卿), 하사청(河斯淸)으로 지병사(知兵使)로 하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따로 승군(僧軍)을 편성하여 이에 따르게 하였다. 7월에 공이 비서소감(秘書少監) 유세적(庾世績)을 왕께 보내시어 표를 올려 서경의 평정을 하례하시였더니 왕은 이부시랑 오광척(吳光陟)을 서정군에 보내어 와서 장졸들에게 조칙(詔勅)을 내리어 그 공을 치사하고 공에게 추충정난 광국공신 상주국 감수국사(推忠靖難匡國功臣上柱國監修國史)를 가자(加資)하시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진준(陳俊)을 파송하여 금교역(金郊驛)에서 제장을 위로하고 동시에 왕의 아우 평량후(平량侯)를 보내어 마천정(馬川亭)에서 잔치를 내리셨다. 그리고 나서 서울에 돌아온즉 또다시 잔치를 베풀어 그 공을 위로하였다. 이해 12월 계사일에 향년 67세로 공이 졸하시었다. 조정에서는 시호를 문정(文定)이라 내리시고 3일간 철조한 후 관원을 보내어 호상케 하였다. 다음해 4월 27일에 임강현 경내 동북 산록(임강현경내동북산록)에 장사하였다. 현재 장단군 강산면 임강리(長湍郡江山面臨江里) 봉화산(烽火山) 동북 산록 자좌원(子坐原)이다. 그후에 명종묘정(明宗廟庭)에 배향하였다. 

  아드님에 종악(宗?), 종회(宗誨), 종함(宗?), 종알(宗謁)을 두시었으니 종악공은 대부주부(大府注簿) 벼슬을 하시다가 공보다 먼저 정중부의 난에 화를 입으시었고, 종회공은 음(蔭= 추천에 의하여 벼슬함)으로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에 나아갔고, 종알공은 형부시랑이시었다. 공의 형제 세분이 과거에 급제하셨고, 그 아드님이신 종악, 종함, 종알 세분이 또 등제(登第=과거에오름)하시니 그 시대 사람들이 양대에 걸친 그 영화를 부러워하였고 그 집안을 일러서 「삼제댁(三第宅)」이라고 하였으니, 세분이 과거에 급제한 집이라는 것이며, 또 호를 지어 「양원수댁」이라 하였다. 이리해서 공의 어머님이신 김씨는 매년 나라에서 녹을 받았는데, 이는 공의 3형제가 과거에 급제한 까닭인 바, 또한 공의 부인께서도 아드님 3형제가 과거 하셨으므로 또한 나라에서 녹을 주셨으니, 고부(姑婦)가 모두 나라에서 녹봉을 받은 예는 드문 일이다. 더욱이 종알공은 덕을 쌓아 세상을 위하여, 혹은 남에게 베풀어주기를 좋아하여 사회에 끼친 바가 많아 칭송을 들었다. 공의 묘소는, 가승과 구보(舊譜)에 장단(長湍)북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나 자손들이 각 고을에 흩어져 살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병화를 겪는 통에 수호를 못하는 틈을 타서, 김(金), 이(李) 양성이 묘소 지광을 범하였으나 정확한 증거가 없어 찾지 못하고 오랫동안 실전되어 내려왔었다. 그런데 丙申年(서기 1916년)에 도적이 옛 보물을 탐내어, 묘를 발굴함으로써 공의성과 휘와 관함이 노출되어 마침내, 그 역사적 사실이 소명하게 드러나 의심할 여지가 없을 만큼 판명되어 실전 되었던 묘소를 찾기에 이르렀다. 공의 배위 군부인 한씨도 가승에 그 묘소의 위치가 전함이 없었던 바, 그 묘지로써 상세히 알게 되었으니, 이 어찌 천우신조가 아니랴. 임술년(서기 1922년) 3월에 문정공파 종계사무소(宗계事務所)를 설치하고 분묘를 개수하였는데, 신도비명은 종(從) 25대손 정헌대부(正憲大夫) 용식(容植)공이 지었다.

                  7世 시랑공 돈신 (侍郞公 惇信)

  언이(彦이)의 셋째 아들. 공의 자는 우경(友卿)인데, 관직은 중봉대부(中奉大夫), 상서이부시랑, 동궁내시강학사, 자금어대를 하사 받으셨다. 파주읍지에 윤돈신은 언이의 아들인데 관직은 병부시랑이라고 하였다. 또한 여지승람에는 『파주인물 고려 윤돈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는 실전되고 있는데, 자손 사록에는 묘소가 장단 임단 석주원 남향원(長湍臨湍石注院南向原)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 의종 19년(송 효종 건도(乾道) 원년, 금나라 세종 대정 5년(서기 1165년) 12월에 이부상서 이지심(李知深)과 중서사인(中書舍人) 윤돈신을 파견하여 존호(尊號)를 하례 하였다고 되었다. 송사(宋史)와 금사(金史)를 참고한 바에 의하면 금 세종 대정(大定) 5년에 중서사인인 공을 보내어 표로써 존호를 하례 하였는데, 이는 송나라가 아니요, 금나라의 존호를 하례한 것이다. 또한 사기에 의하면 『병부시랑인 공이 고려 인종조에 문좌에 올라 맑은 덕망과 문장이 최포(崔褒)등과 함께 명성를 나란히 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의종이 황음하여 정치를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잔치며 풍류를 즐기면서 문신들과 함께 시를 읊는 것을 일과로 하여, 무신들을 학대하니 정중부등이 원한을 품고 왕이 보현원에 납시면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호종 문신들을 대대적으로 죽이고, 날랜 군사들로 하여금 도성에 돌아와 서울에 있는 문신들을 찾아내어 살육을 감행하였는데, 돈신공은 이부시랑으로서 집에 계시다가 참화를 당하셨고, 조카벌인 주서(注書) 종악(宗?)공도 또한 해를 입었다. 그 후 중부등은 왕을 거제도에 유폐하였다가 죽였다. 의종 24(1170)년 8월 30일에 왕이 보현원에 순행하였을 때, 공은 동궁시강으로 이지심과 함께 천동댁에 입시(入侍)하였다. 그때 왕은 문신들과 시를 읊으면서 술에 취하여 즐길 때 장병들은 모두 주려서 배가 고팠다. 정중부가 이의방, 이고등과 함께 난을 일으켜 거짓 왕명을 빙자하고 군사를 모아 문관을 쓴 자는 닥치는 대로 모조리 죽인 후 그 시체를 연못 속에 던졌다. 뒷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정문관이 연못 속에 잠긴 곳은 도원역(挑源驛) 상류에 있다고 하며 그리고 김돈중을  찾아 내여 죽인곳은 감악산(紺岳山)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돈중은 김부식의 아들로서 일찍이 문과장원으로 급제하여 무신들을 멸시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서 태운 일이 있었기 때문에 무신들의 원한을 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슬프다! 문강공께서 문장으로서 김부식에게 감정을 품어 참소를 당하여 위태로운 것을 몇 번 겪으셨으나, 신명이 도우사 결국 무사하였는데, 그 아드님이신 공과 그 손자님이신 종악공은 또한 김부식의 아들 돈중이 중부의 수염 끄슬른 혐원이 원인이 되어 비명의 참해를 입으셨으니, 김가와 우리윤문이 어찌 이러한 원한이 있을 줄이야 누가 뜻하였으랴. 공의 묘소는 실전 되어 추원단(追遠檀)에서 제향을 받든다.

                     8世 남원백 위 (南原伯 威)

  공의 호는 벽송거사(碧松居士)라 하시었다. 배위는 문화유씨(柳氏)로서 그 아버지는 정당문학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이요, 조부는 소감(少監) 총(寵)이며, 증조는 소감 보춘(寶春)인바 남원윤씨는 공을 시조로 삼았다. 공이 고려 명종(高麗 明宗)때 문과에 급제하시어, 동16(1186)년(丙午)에 국자감(國子監) 박사(博士) 벼슬에 오르시어, 상장군(上將軍) 최세보(崔世輔)와 함께 국사(國史)를 저술하였다. 동22(1192)년에는 예부시랑(禮部侍郞) 지제고(知製誥) 벼슬에 오르시어 중국에 초빙되시었다. 그때, 송나라 광종(光宗) 임금은 비단옷과 물소뿔로 만든 각대를 내리고 공을 특별히 사랑하였다. 때에 주자(朱子)의 문인 섭적(葉適)이 접빙관(接聘官)이 되어 공과 서로 시(詩)를 많이 읊고 사귀었다. 공이 귀국하심에 조정의 공론이 송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요(遼)나라나 금(金)나라를 친해야 한다고 하여 의논이 분분할 때 공이 송나라와 친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써 조종의 대의를 밝혔다. 신종(神宗)때 공이 사업(司業) 벼슬에 계실 때 염찰(廉察)이 되시어 나가셨는데, 남원(南原) 지방에 도적이 들끓어 그 도적 떼가 산중에 진치고 있어 그 기세가 자못 험악하였다. 공이 혼자서 말을 달려 도적의 괴수인 복기남(卜奇男) 형제를 찾아가 사람으로서의 화와 복이 무엇인 것을 들어 달래었더니, 적이 감동되어 울면서 명령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면서 양민이 될 것을 호소하는지라, 공이 그 중에서 흉학한 자는 베이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하였더니, 그 도적의 무리들 수 만 명이 해산하여 그 일대가 평안하였다. 왕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남원백(南原伯)을 봉하였다. 희종(熙宗)때 공이 모략을 당하여 서경(서경= 평양) 유수(留守)가 되심에 당시 태학생(太學生) 수백 명이 대궐에 몰려와 상소하였으나, 돌이키지 못하고 필경 그곳에서 하세(下世)하시니, 공의 상을 남원사람들이 울부짖고 발상하는 자 2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제각기 재물을 모아 남원 땅으로 반장(返葬)을 하였고, 손으로 흙을 옮겨 묘 봉분을 만들고 높고 크기가 보통 묏자리보다 더했다고 한다. 그 후에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고 한다. 고려 고종(高宗) 19(1232)년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증직(贈職)되었고, 이조 정조(正祖)23(1799)년에 호남의 유림 백여 명이 발기하여 서원을 세울 것을 의논하여, 그 이듬해인 경신(庚申)년에 방산서원(方山書院)에 향사(享祀)하였는데, 방산서원은 즉 공의 7대손인 문효공(文孝公)을 받드는 원(院)으로 공으로서 주향(主享)을 하게 되었다. 이규보(李奎報)의 공에 대한 애사(哀辭)에 의하면, 공은 위인이 인후 온화하고, 자질이 방정하며 겸하여 덕행과 문장이 출중하고, 술을 몇 말 마셔도 실수가 없었다고 하며, 공 자신이 말하기를 『장가 든 후부터 다른 여자를 가까이한 일이 없다.』고 하니, 이는 역시 사람으로서 어려운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8世 화산군 인직 (花山君 仁直)

  공은 문강공(文康公)의 둘째 아드님이신 자고(子固) 의 아드님이시다.

고려 명종(明宗) 6(1176)년에 동북병마사(東北兵馬使)로서 서경(西京: 평양)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에 백부님이신 문정공(文定公)과 함께 출정하시어 이를 토벌한 큰 공로로 인하여 화산군(花山君)을 봉하였고, 채읍(采邑)이 5천호이었다. 동 9(1179)년에 거란(契丹)을 쳐서 파한 공으로, 관(貫)을 신령(新寧)으로 내림으로써, 신령윤씨는 공을 시조로 삼았다. 묘소는 영천군(永川郡) 화산면에 있다고 전하고 있다.

                   8世 유수공 상계 (留守公 商季)

  공의 자는 수익이다.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의하면, 공은 자질이 강직하고 청근(淸謹)하여 덕망과 재국이 알려져 있었으나, 벼슬을 않고 있다가 음(蔭= 과거에 급제치 않고 추천으로 벼슬함)으로 현직(顯職)에 나아가 치적이 높았는데, 신종 4년에 서경 부유수(西京 副留守)로서 졸하시었다. 유수는 正三品 벼슬이다. 아드님에 복원(復元)이 등제하여 태상부녹사(太常府錄事)요, 손자님 순(純)이 등제하여 감찰어사이고, 증손은 보(珤)로서 첨의정승(僉議政丞)이다. 공은 일찍이 아버님 시랑공께서 참화를 입으시어, 겨우 그 몸을 보전하셨기 때문에 도무지 벼슬하고 싶은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었는데, 명종께서 공의 자질이 강직하고 검소하며 청근하다 함을 듣고 불러 보시고 나와서 벼슬하라고 분부하므로, 마지못해 벼슬길로 나가 현달하여 치적이 높아 칭송을 받았다. 공이 최씨의 난을 만나고 나서, 조위총이 모반하였던 서경에서, 덕의로써 완강한 백성을 다스려, 그 치적이 세상에 자자하셨으니, 그 인격이 어찌 위대하시지 않은가. 파주읍지에 『윤상계는 윤돈신의 아들인 바 벼슬이 위위소경(衛尉少卿)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여지승람에는 『파주인물 고려 윤상계』라 기록되었다. 배는 강릉김씨로서 그 아버지는 감찰어사 각(殼)이요, 그 할아버지는 평장사 영윤(永胤)이요, 증조는 태부문성공(太傅文成公) 인존(仁存)이다. 묘소는 자손사록에 임해석전곡유좌원(臨海石田谷酉坐原)에 있는바, 가대 뒤에 선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실전되어 추원단에 비위(碑位)를 모셨다.      

                  9世 덕산군 은형 (德山君 殷衡)

  공의 아버님은 문과 형부시랑(刑部侍郞) 종문(宗文)이요, 조부는 부사공(副使公) 평수(平壽)이고, 문숙공의 둘째 아드님 언식(彦植)공의 증손이다.    공이 고려 때 합문지후(閤門祗侯) 벼슬을 하시었는데, 그 아버님을 따라 큰 공을 세웠으므로, 덕산군(德山君)을 봉하여, 이로써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삼았다.

                 9世 녹사공 복원 (錄事公 復元)

  공은 유수공 상계의 아드님으로서, 고려 신종(1198)조에 문과에 오르셨으나, 그때 당시에 권리 있고 간사한 무리들이 나라 정치를 전횡(專橫)하여 조야가 소연하므로, 공은 지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조정의 혼란 속에 끌려들지 않도록 조심하시면서 처신을 하시어, 많은 세월을 초야(草野)에 계셨기 때문에 태상부녹사(太常府錄事)외에는 뚜렷한 관직이 없었다. 그러다가, 손자님이신 문현공(文顯公)께서 귀해지시매, 공의 관직도 추증(追增= 돌아가신 후에 벼슬을 보냄)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성 좌복야 한림학사로 되시었다. 묘소는 실전하고 있는데 자손 사록에는 덕현 남일리자원(德峴南一里子原)이라 하나 실전되고 있어 추원단에 그 비위를 모셨다. 배는 인천이씨로서, 부는 남부녹사(南部錄事) 유온(惟溫)이요, 조는 평장사 정의공 광진(光晋)이며, 증조는 좌복야 언림(彦林)이다.

                    10世 함안백 돈 (咸安伯 敦)

  공의 아버님은 문평공 극민(문평공 극민)이다. 벼슬이 시중(侍中)이라는 최고위에 오르셨다. 일설에는 전의랑(典議郞)이라고도 한다. (고려사 참조) 고려 때 함안(咸安)땅에 도적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차사(差使)를 파견하여 무마코자 하였으나, 도리어 피살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적의 무리에 휩쓸려 들어가 예속되어 그 형세가 자못 강성하여 왕의 근심거리가 되어 공으로 자사(刺史: 지금의 군수)를 삼고, 조덕(趙德)으로 통판(通判)을 삼았던 바, 고을을 다스리기 수년 만에 완강한 백성들이 모두 공에게 복종함에 왕이, 그 공적을 가상히 여겨 임기가 끝났는데도 바꾸지 않았다. 그 후에 조정의 의논이 공의 공적으로서 함안백(咸安伯)을 삼도록 하였다. 공과 조공(趙公)이 왕께 아뢰기를 『신들이 자손으로서 함안에 있는 자는 함안 고을의 소임을 맡게 하면 그들 백성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더니 왕이 허가하였다. 이로써 윤씨와 조씨의 두 집 자손이 이 고을에 살게 되어 성씨의 본이 되었다. 공은 문평공의 장자로서, 문무의 재질이 뛰어나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가 노후에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시골집에 돌아가시어, 은행나무 수백 주를 심으셨으므로 호를 행촌거사(杏村居士)라고 하시었다. 이로써 공의 아드님 희보(希甫)께서 고려 원종(1260)때 흥위위주부(興威衛注簿)로서 그 어머님과 함께 함안의 서북 용화산(龍華山)밑에 살면서 군인(郡人)이 되었으며, 이로써 함안 윤씨는 공을 시조(始祖)를 삼고 있다.

                     10世 어사공 순(御史公 純)

  공은 녹사공 복원(復元)의 아드님이시고 고려 고종(1214) 때 문과에 급제하시어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이르셨을 뿐인데, 그 때 나라의 정세는 간사한 무리들이 권세를 잡고 득세하여 나라의 정치를 마음대로 하고, 왕은 한낮 허수아비 모양 이리 밀리고 저리 쫓기어 폐하고 바꾸기를 마음대로 하던 때라, 이것이 고종으로부터 원종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무릇 7왕) 달하였다.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조신 중에 지조 있는 분들은 산림 속에 파묻혀 자취를 감추는 때라, 공도 그와 같은 시끄러운 소용돌이에서 떠나 오로지 덕행을 닦고 계셨다. 그 후 그 아드님 문헌공이 귀하게 되시매 공을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수태위 부나시중 평장사 판상서형부사라는 높은 직위에 증직(贈職)하였다. 「녹사어사 2공의 가보에는 공의 이름은 써 있지 않으나 이목은집(李牧隱集)에 파평군(坡平君) 해의 지명(誌銘)이라 운운하여,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집은 시중공(태사공)이하 무릇 세세로 등과 했다고 하는데, 해는 문헌공의 손자님으로서 밝혀 말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공의 배는 홍주이씨(洪州李氏)로 부는 예진소경 윤이요, 외조는 지추밀원사 여흥 민희관(閔曦官)이다.

  묘소는 장단 유관솔현 동남돌하동(長湍踰貫率峴東南乭何洞)이라고 하지만 실전 되고 있으며 자손사록(子孫私錄)에는 매송현(梅松峴)위에 있다고 하였다. 공의 비위(碑位)를 추원단에 모셨다.

                     11世 문현공 보(文顯公 珤)

  공은 고려 충렬왕 2년(서기 1276년)에 이익방(李益邦)의 방(榜)에 의한 문과에 등과하여 장사랑비서동정(將仕郞秘書同正)에 제수(除授=임명)되시었다. 4년에 담사성 녹사(擔事省錄事)에 배임 되고, 10월에 필도지 (必?赤= 몽고의 벼슬 이름)에 발탁되어, 우사 사의대부(右司司議大夫) 보문서직학사지제고(寶文署直學士知製誥)에 배임되셨다.

  22년(원나라 성종 원정 2년) 9월에 밀직사(密直司) 좌승지로서 국가시(國家試)를 관장하셨다. (고려사에 왈 병신 9월에 좌중지 윤보가 최응(崔凝)등 70인을 뽑다) 23년 12월에 직밀사학사(直密司學士)에 배하시고, 24년 5월 홍문학사 의조상서(弘文學士儀曺尙書)에 배하시고, 7월에 밀직사 부사, 성균관 대사성, 수문전학사에 배하시었다. 10월에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셨다. 25년(원 대덕 3년)(서기 1299년) 3월 인후(印侯= 몽고 사람임)를 만류치 못하였다 해서 파면되시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3월에 윤보의 서북면 도지휘사를 파면되었다고 쓰여 있다. 당초에 만호 인후(萬戶 印侯)가 김헌, 환정(桓貞)등이 찬성사 한희유(韓希愈)등과 뜻이 맞지 않음을 기화로 하여 마침내 김헌, 원경(元卿)등과 결탁하여 자의로 군사를 동원하여 한희유와 영주(英柱)등 10여인을 체포하여 행성좌승(行省左丞) 합산(哈散= 몽고인)에게 고발하여 말하기를 한희유등이 김헌을 죽이려고 하여 왕을 끼고 그를 섬으로 귀양 보내고자 한다 하거늘, 합산이 밀령을 내려 비밀리에 조사한 결과 그 사실이 무고이며 허위사실임을 알았지만 벌써 이미 사건을 만들어 한희유 등을 체포하였는지라 왕과 함께 심문하기 8일째 되어 한희유는 마침내 불복하고, 오직 영주 등은 고문에 못 이겨 복종하였다. 인후와 김헌, 환정등이 장차 원나라 왕에게 이 사건을 소청코자 하므로 왕이 승지 김심(金深)을 시켜 만류하였으나 인후 등이 왕명을 좇지 않고 원나라로 갔다. 여기서 우리의 국내 정세를 살피면 원나라의 세력이 우리나라에 침투하여 압력을 가하고 몽고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고문 격으로 모든 정치에 간섭을 하던 때이라 합산, 인후 등이 와 있었고 그들에게 아첨하여 매국행위를 하는 역적들도 있었던 것이다. 정세가 이러한 때인 만큼 인후가 원나라로 갔으니 또 하나의 불씨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원나라로 갔음에 대하여 노하여 가로되 『인후 등이 간 것은 지휘사(指揮使)가 만류치 않고 음식과 역마를 내어 주어 가도록 편의를 제공하였으니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지휘사는 즉, 공이요 여기에 재상들도 감히 아무 말을 못하였고, 다만 홀로 도첨의(都僉議) 최유엄이 왕께 아뢰어 가로되『대왕께서 만류치 못한 것을 윤보가 어찌 만류할 수 있겠나이까, 재상들이 조정에서 만류할 수 없었거늘 변방에 있는 신하가 어떻게 음식을 못 먹게 하며, 역마는 그들 임의로 타고 간 것이요, 보(珤)가 준 것이 아니 오며, 재상들이 일을 이렇게 되도록 방치하였는데, 재상들은 죄를 묻지 않으시고, 보를 죄주는 것이 어찌 옳다고 하겠나이까』하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마침내 공을 파면하였으니, 공이야말로 엉뚱하게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공은 물러나고 김부윤(金富允)이 대신하여 서북면 도지휘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인후가 우리나라에 온 것은 원나라 공주를 따라 와서 우리나라에 벼슬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지위가 여간이 아니었고 왕도 소중히 여겨왔는데 당시 고려의 왕비는 원나라 공주였던 것이다. 29년 때에 과거로 인재를 등용할 때 공평치 못하거늘, 왕이 좌우에게 일러 가로되 『인민의 절조가 점점 옛날 윤보, 이혼(李混)이 주선(主選= 상석시관)할 때만 같지 못하니 과인이 혼의 아우 자화(子和)로써 행수(行首= 수석)를 삼고 보의 아들 안비(安庇)로써 권무(權務)를 삼고자 한다』 함에 혼이 주선을 사양하고 공도 가로되 『신의 아들이 연소하여 장전(掌銓= 시험을 맡는 일)을 할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나 왕은 또 말하되 『지금의 주선자는 우선 좋은 벼슬은 자기들 친척에게 주려 하는 것을 과인이 아는 바인데 하물며 사양함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는 그만큼 염치가 날로 저상되고 세상의 도의가 날로 땅에 떨어져 가는 것이니 내가 슬프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말하였다. 대개 공의 성품이 침착하고 냉정하여 자기의 직분을 올바로 지키어 편벽됨이 없고 더욱 문명(文名)에 중점을 둠으로서 당세에 오랫동안 전선(銓選)을 맡아 모든 사람이 그 공평함에 감복하였다고 동국통감에 기록되어 있다. 33년 3월에 밀직사 부사에 배하시었다가, 판선부사우문관대제학(判選部事右文館大提學)에 배하시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선왕(忠宣王) 원년(1314)에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배하시다. 2년에 또 밀직부사에 배하시고, 3년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4년에 수문관학사, 5년에 직학사에 배하시다. 충숙왕(忠肅王) 원년에 의주상서(儀注尙書), 2년에 우문관대제학겸 판선부사(右文관大提學兼判選府事), 그리고 3년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배하기고, 4년 10월에 첨의찬성 치사(致仕)를 배하시었다가, 이해에 첨의정승(僉議政丞)이라는 최고의 관직에 이르시었다. 파주파평산중 웅담정사(熊潭精舍)에 은퇴하시었으니, 이곳은 즉 여러 대에 걸쳐 은퇴하시어 노후를 평안하게 휴양하시던 땅이다. 마을이 굉장히 깊고 우물이 깨끗하고, 돌들이 정하며 시내위에 상서대가 있으니, 문숙 선조께서 상서로 계실 때 대를 쌓고 그 좌우에 문숙공께서 손수 심으신 수주(數株)의 고목인 괴목이 있어 녹음이 아름다워 공이 이 풍경 속에서 한유한 생활을 하시다가 충숙왕16년(서기 1329년) 7월 21일에 웅담정사에서 고요히 세상을 떠나셨다.(판도공 자손 가승에는 공이 5월 10일에 졸 하셨다고 하니 어느 편이 옳은지 알 길 없다) 부인의 기일(忌日)도 2월 12일 혹은 5월 11일이라고 한다. 왕이 철조(輟朝)를 명하시고 부의를 보내신 후 시호를 문현(文顯)이라 내리었다.

고려사에는 『충숙왕16년 7월에 첨의정승이 졸 하였다. 또 수가 78세까지 벼슬했다.』고 써 있다. 배는 군부인 박씨인바 원나라에서 벼슬을 준 무덕장군 관군천호(武德將軍管軍千戶) 보(保)의 따님이시다. 장자 계종(繼宗)은 삼재(三宰)요, 차자 안적(安적)은 문과 대언(代言)이요 3자 중조는 봉록(奉祿)이며, 4자 안숙(安淑)은 좌찬성(左贊成) 鈴平府院君(영평부원군)이신데 시호는 양간공(良簡公)이시고, 5자 암(?)은 문과 소부(少府)이시며, 6자 안비(安庇)는 문과장원으로서 태위(太尉)이시다. 묘소는 장단부 치동면(長湍府治東面) 30리 고현 작고곡 갑좌원(古縣作古谷甲坐原)인바 부인과 함께 쌍분으로 모셨다. 묘표(墓表)를 이조 숙종 을해년(1695) 7월에 고쳐 세웠는바, 14세손 자헌대부 공조판서겸 세자 시강원 찬선(資憲大夫工曺判書兼世子侍講院贊善) 증(拯= 호는 명제)께서 지으셨고, 15세손 숭정대부 이조판서겸 의금부사 지경연(崇政大夫吏曺判書兼義禁府事 知經筵) 지선(趾善)께서 쓰셨으며, 묘지(墓誌)는 20대손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홍문관 부제학 태준(泰駿)이 지었다. 파주읍지에 명환(名宦) 고려 윤 모라고 기록되어 있다.

                  12世 찬성공 계종 (贊成公 繼宗)   

  보(珤)의 장자이시다. 공의 관직은 찬성사(贊成事)에 이르셨다. 고려 충숙왕후 8년(서기 1321년)에 왕이 윤계종(尹繼宗)을 명하여 마시(馬市)를 금하였다고 동국통감에 기록되었다. 공의 따님은 고려충혜왕비(忠惠王妃)로서 충정왕(忠定王)을 낳았다. 배는 여흥 민씨로서, 부는 여흥군(驪興君) 적이요, 조는 찬성사 종유(宗儒)이며, 외조는 한성사 안동 김헌이다.

                  12世 대언공 안적 (代言公 安적)

  공은 문현공 보(珤)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문과에 급제하시어 벼슬이 대언에 이르시었다.

  배는 장흥임씨(長興任氏)로서, 그 아버지는 병무상서 급(伋)이요, 조부는 평리(評理) 태열(台列)이시고, 외조부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능성구예(綾城具藝)이시다. 공의 묘소는, 실전되어 후손들이 서기 1961년에 공을 비롯한 공의 아드님 낭장공 이(郞將公 釐), 시령공 보(侍令公 輔), 손자님 복야공 탁(僕射公 鐸), 그리고 공의 증손이시고 밀직공의 아드님이신 판서공 창(判書公 敞)의 5위를 모시는 추모단설립위원회를 조직하여, 이해 9월에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관산리(京畿道 高陽郡 碧蹄面 官山里) 일명 시묘동(侍墓洞)에 있는 공의 손자님 제학공 취(提學公 就)의 묘소 옆에 단을 모아, 시사를 받들고 있다. 대언공파의 중시조이시다.

                      12世 봉록군 중조(奉祿君 中?)

  문강공 언이의 셋째 아드님 시랑공 돈신의 현손이신 문현공(文顯公) 보(珤)의 셋째 아드님인 휘 중조(中?)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중조는 시조 태사공의 11대손고 문숙공 관의 7대손이며 언이의 6대손이다

  시랑공 돈신, 유수공 상계, 녹사공 복원. 어사공 순을 거쳐 문현공 보의

셋째아드님이 되시고 봉록군에 봉군되셨으므로 그의 후손들을 봉록군파라 부르고 있다.

                  12世 양간공 안숙 (良簡公 安淑)

  보(珤)의 四子이시다. 고려사에 의하면, 윤신걸(尹莘傑)로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삼고, 윤안숙(尹安淑)으로 추성 좌리공신 삼사 좌사(推誠佐理功臣三司左使)를 삼고, 윤시우(尹詩遇)로 순성협덕 찬리공신(純誠協德贊理功臣)으로, 좌우부대언(左右副代言) 윤침(尹?2001년 11월 3일)으로 순성보리 익위공신 영평군(純誠輔理翊衛功臣鈴平君)으로 봉하고, 윤인귀(尹仁貴)로 전리판사(典理判事)를 삼았다고 하였다.

  공은 즉 충정왕(忠定王) 원년(1349) 윤 7월에 추성 좌리공신호를 받으신 후 삼사좌사에 배하시고, 8월에 첨의사사 찬성사(僉議事司贊成事)를 배하시었으며, 삼중대광 영평부원군(三重大匡鈴平府院君)에 봉함을 받으셨다. 충숙왕 14년(서기 1327년) 11월에 왕이 하교하여 가로되 『과인이 도성(원나라 서울)에 5년이나 있는 동안, 간신들이 나라를 옮기려고 음모하였으나 시종한 신하들이 충절을 다하여 끝내 한마음 한뜻으로 보좌하였기에 그 공을 기록 한다』고 하였다. 이때 공신에 책공(策功)한 분으로서는, 전답과 노비(종)을 내리고 부모, 처자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충혜왕비 윤씨는 즉, 공의 형 계종의 딸이다. 아들 저를 낳았으나 그가 원나라에 가서 있었다. 충목왕이 돌아간 후, 아들이 없었으므로 공과 이제현(李齊賢)이 저를 맞이하여 왕으로 세우자고 상의하고, 이제현이 원나라에 가서 원순제(元順帝)에게 표를 올려 저를 세워 왕의 뒤를 이을 것을 간청하였더니, 원순제가 허락하여 저가 왕위에 올랐으니, 곧 충정 왕이다. 왕이 즉위한 후 공을 좌리공신으로 책공하고 찬성사를 배한 것이다. 처음 원순제의 명에 의하여 저가 원나라에 들어갈 때 삼재(三宰) 윤신계「윤신계= 본은 기계(杞溪)인데 공의 매부임, 따라서 윤신걸과는 다른 사람임. 신걸은 아들이 없음」 아들 시우(時遇)는 공의 누이의 아들(생질)인바 도첨의(都僉議) 최유(崔濡)등과 함께 저를 받들고 원나라에 갔었는데 원순제가 저로써 왕의 뒤를 이어 환국케 되니, 그 어머니 희비(嬉妃)를 높이어 경순비(敬順妃)로 하고 윤시우로서 찬성을 삼고, 최유를 참리(參里)로 승진시키니 즉 육재(六宰)가 된 것이다.   

  최유가 공(功)을 다투어 흥분하여 왕에게 말하기를『왕을 추대하여 세운 공로가 신보다 더한 자 없거늘 직위가 시우보다도 아래인즉 그가 무슨 공이 있다고 삼재(三宰= 세 번째의 재상)에 직배(直拜)하고 또 그 아버지 윤신계와 그 외숙 윤안숙이 또한 모두 삼재가 되었으니, 삼재는 오직 그들만의 전가지물(傳家之物)입니까?』하고 따졌다. 민사평(閔思平)이 있다가 말하기를 『그대로서는 6재면 만족하지 않은가? 어찌 분수를 모르냐?』고 말한즉, 최유가 노하여 민사평을 마구 때렸다. 때에 공은 신계, 시우와 더불어 3재하였고, 계종공의 아드님 인귀(仁貴), 안비공의 아드님 침(?), 그리고 공의 아드님 이(?)와 척(陟), 손자사위들이 모두 빛나는 관직과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며, 도첨의(都僉議) 한대순(韓大淳), 정당문학 한중례(韓仲禮) 형제도 또한, 공의 처외종들이라, 사람들이 그 영화를 시기하였다. 그때 왕이 어림에 시우가 왕의 측근에 있어 쓰이는 데가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눈짓하여 가로되 윤왕(尹王)이라고 평하였다. 공의 배는 청천군부인(淸泉君夫人) 교하노씨(交河盧氏)인바 부는 민부전서(民部典書) 승서(承緖)요, 조는 상장군 수(壽)요, 증조는 삼중대광 창성군(昌城君) 진이며, 외조는 제학 청주 한사기(韓謝奇)이다. 기일은 2월 10일이다. 공은 공민왕(恭愍王= 연호미상) 2월 10일에 졸하심에 시호를 양간(良簡)이라 하였다. 부인의 기일(忌日)도 또한 2월 10일이라 한다.(보책에 의함) 공의 묘소는 장단부 동강남면 밀암 손원(長端府東장단부 동강남면 밀암 손원(長端府東江南面密岩巽原)에 합장하고 표석이 있는데 속칭 말하기를 구절비룡(九折飛龍)이라 한다.(여지승람에 의함) 장단의 공 묘소로 말하면, 원래 학사 주당(周?)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분이 난리를 피하여 중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공의 댁에 와서 유숙하고 있었는데, 공이 보시기에 그분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아시고, 항상 후대하였더니 주당이, 공을 위하여 복된 자리를 구하여 말하되 『이는 비룡구절(飛龍九折) 즉, 나르는 용이 아홉번 꺽이는 형상이니 권세가 9대에 이를 것이며 영화가 빛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하세(下世)하시자 여기에 장례를 모셨다.

                     12世 소부공 암 (小府公 ?)

  소부공파의 파조로써 시조 휘 신달(諱 莘達)의 12 세손(世孫)이며 삼중대광 수첨의정승(三重大匡守僉議 政丞), 우문관 대제학(右文館 大提學),감 춘추관사(監 春秋館事), 판 선부사(判 選部使),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문현공(文顯公) 보(珤)의 다섯째 아들로 생년(生年) 및 기일(忌日)은 전해지지 않으나 문과에 급제(伋第)하고 소부시(少府侍) 윤(尹)의 벼슬을 하였다. 배위(配位)는 함양박씨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낸 지량의 딸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영윤(令尹)의 벼슬을 한 휘 주보(周輔) 이고 차남은 보리공신(輔理功臣)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냈으며 대광(大匡)의 품계에 오르고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封)해진 휘 해(해)이다. 묘는 장단 송림현(長湍 松林縣)이라 기록돼 있으나 실전(失傳)되고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에 설단하여 시사를 모시며 또한 진주시 동사동 덕산재(德山齋) 에서도 위패를 모시고 시사를 지낸다.

                   12世 태위공 안비 (太尉公 安庇)

  첨의정승 문현공(文顯公) 휘(諱) 보(珤)의 여섯째 아드님으로, 어려서부터 온화한 성품으로 매사에 공경하며, 예절과 재예(才藝)와 용모가 출중하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며, 학문에는 남달리 집중력이 강하시어, 진리를 깨우치지 아니하고서는 손에서 책을 떼지 않으셨다 한다. 고려 충렬왕 20년(서기 1294년) 10월 갑신대과에 소년의 몸으로 장원급제하시니, 왕이 공으로 하여금 권무를 삼자 부친 문현공께서『신의 아들은 등과는 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신이 또한 전선을 맡았으므로, 감히 받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굳이 사양하시니, 왕이 이르되『전선을 맡은 벼슬아치들은, 거의가 다 자기네 친척과 친분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권무를 삼으려 하는데, 하필 경은 과인이 시키는 자제의 권무자리를 그다지도 사양 하는가』라고 감탄하면서, 후세에까지 전하도록 하였다.(고려사 이혼열전). 그 뒤로 공은 더욱더 학문에 집착하시다가 입사하시어, 전중시어사, 한림학사, 좌간의대부, 우좌대언, 정당문학, 문하시랑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성균관대사성 등으로 두루 역임하며 삼사삼공의 태위(太尉)에 이르셨다. 충렬왕을 비롯하여 공민왕(1359년)에 이르기까지 7대왕에 걸쳐서 공헌하시다가, 80노령에 이르러 모든 관직을 사퇴하시고, 사저에 상시공 휘(諱) 인달께서 북병사로 북청지방에 부임하심에, 공께서는 손자를 따라 가시어, 그 곳에서 지내셨는데, 마침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손자와 함께 화를 입으셨다. 공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음은 유감이다. 후손들이 1986년에 예산군 광시면 시목리에 단소(麗岡齋)를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에 추원단을 설치하여 매년 10월 7일 시향(時享)을 지내고 있다.

    태위공파의 파조이시다.

                    13世 영평군 척 (鈴平君 陟)

  공은 양간공 안숙의 둘째 아드님으로서, 충정왕 2년(서기 1350년) 5월에 우부대언(右副代言)에 배하시고, 공민왕 임인년(1362) 정월에 원수 안우(安祐), 그리고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등이 홍두적 사유관(紅頭賊沙劉關)을 격파하고 이를 참한 후 서울을 수복할 때, 공은 군부전서(軍簿典書)로 정벌에 종군하시어 공이 있으므로, 계묘년(1363) 윤 3월에 성익대 보리공신(成翊戴輔理功臣) 2등으로 책봉되어 영평군(鈴平君)에 봉하고, 전답과 물품을 하사하였다. 중라장 윤선동(尹善同)도 함께 2등이었다. 우왕(偶王) 10(1384)년 3월에 졸 하시었다.(고려사) 장단동 저가사리경원(長湍東 猪加士里庚原)에 장례를 모셨다. 군부인 전의 이씨도, 그 부근에 모셨는데 부인은 판소부사(判少府事) 광기(光起)따님이며, 명신 문의공(文義公) 언충의 손녀이다. 5자 2녀를 두셨으니, 아드님 승휴(承休)는 판전의시사(判典儀侍事)요, 승도(承度)는 판한성사(判漢城事)요, 승순(承順)은 문하평리(門下評理)요, 승경(承慶)은 삼사좌윤(三司左尹)이요, 승례(承禮)는 판도판서(版圖判書)이시다. 따님은 그 사위가 정당문학 이보림(李寶林), 개성유수(開城留守) 안원(安瑗)이다. 손자님에는 소정공(昭靖公) 곤(坤), 소도공(昭度公) 향(向)과 보문제학(寶文提學) 규(珪), 정정공(貞靖公) 번이시며, 그 중에서 번이 가장 영달하였으니,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대왕비)를 낳으셨다. 이렇게 고손 호(壕)도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대왕비)를 낳으시고, 5대손 영돈령(領敦寧) 여필(汝弼)은 장경왕후(章敬王后= 중중대왕비), 그리고 6대손 영돈령 지임(之任)은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대왕비)를 낳으셨다. 이렇게 대를 이어 네분의 국모(國母)를 탄생하시었은즉, 이조세가(李朝世家)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영화이다. 그리고 공의 관력(官歷)이나 행적은 세상에 전해짐이 없음은 유감된 일이다. 파평읍지 인물에 고려 윤척이라 하였고, 윤척은 안숙의 아들로서 관직이 영평군에 이르렀다고만 여지승람에 기록되었다. 공은 음(蔭)으로써 벼슬하시고, 공민왕 8(1359)년에 홍건적 즉 머리에 붉은 수건을 쓴 도적이 도처에 횡행하여 적의 괴수 관선생(關先生)이라는 자라, 처음 원나라의 도읍을 함락시키고, 요양(療陽)으로 옮기어 약탈을 자행하다가 그일당인 모거경(毛居敬)이라는 자가 3천여명을 인솔하고 압록강을 건너 서경(평양)을 함락시킴에, 조정에서는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등을 파견하여 이를 격파하였더니 적은 도망쳐 돌아갔다. 2년후인 신축년에 적의 우두머리 사유관 선생(沙劉關先生), 주원수(朱元帥)라 일컫는 자들이 군대 2십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쳐들어옴에, 안우로 하여금 이를 치게 하였더니, 도리어 적에게 패한바 되어 적은 승승장구하여 동으로 내려오므로, 왕은 태후를 모시고 복주(福州= 지금 안동)로  피난 갔다. 그 이듬해, 마침내 서울(송도)를 함락시키고 숭인문(崇仁門)에 진을 쳤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성계와 원수 안수 그리고 정세운(鄭世雲), 군부전서 윤침이 역전 분투하였다. 이성계가 휘하 정병 3천여명을 인솔하고 선두에 서서 쳐서 크게 깨뜨려 사유관 선생이라는 자를 참하여, 그 우두머리를 죽인 후 10여만 명을 짓밟고 빼앗긴 원나라 옥새를 되찾았다. 그리하여 적은 밤을 타서 동문으로 궤주하였다. 우리 군은 개가를 올리고 왕도 환궁하였다. 이리해서 계사년에 그 공훈을 기록된 것인바, 그 공적으로서 공은 2등공신에 책봉된 것이다. 부모와 처자까지도 벼슬 직첩을 내렸으니, 부모는 3등 봉작이요, 그 아들은 7품관을 내렸고, 논 50두락과 노비(종) 5인도 내렸다.

                    14世 야성군 혁 (野城君 赫)

  공은 양간공 휘(諱) 안숙(安淑)의 장자이신 판서공 이의 막내(3남) 아드님이시다. 공은 고려 27대(1314~1339) 충숙왕의 부마(사위)로서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이셨으며, 야성군(野城君: 야성은 경북 영덕의 옛이름)에 봉함을 받으시고 식읍지(食邑地)인 궁허촌(지금의 영덕군 달산면 용평동)에 궁궐같은 저택을 짓고 백성들에게 바르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셨다. 궁촌(宮村)이라 불려졌던 그 곳에서 공은 평생을 우민선치하시면서 사시다가 개경에 올라가시지 않고 여생을 보내시다가 영면하셨다. 조선개국 후 고려 왕실의 인척을 모조리 잡아 살육할 때 공의 후손들이 피신하여 사셨기 때문에 한때 계보를 알지 못하여 공을 시조로 삼아 야성으로 본관을 쓰다가 계대(系代)가 확인되어 1863년 파평으로 환본하였다. 야성군(野性君): 세사일 음10월 15일(경북 영덕군 달산명 용평동)

                  14世 전의공 승휴 (典儀公 承休)

  공은 양간공 안숙의 손자님이고 영평군(鈴平君) 척(陟)의 큰아드님으로서 충혜왕 원년(서기 1331년)에 탄생하였다. 공의 천성이 나면서부터 영리하고 활발하면서 또 충직하였는데 성장하여 공민왕에게 벼슬하시어 판전의시사 숭록대부지추밀부사(判典儀寺事崇祿大夫知樞密府事)가 되셨다. 갑자년에 영평군 상을 당하시어 아우님이신 충간공 승순(忠簡公 承順), 판도공 승례(版圖公 承禮)와 함께 치상 3년을 정성껏 효로써 극진하게 하셨다. 공양왕 원년 1389년에 둘째 아우님이신 충간공께서 문하평리(門下評理)에 배하셨지만 공은 홀로 김저(金佇)의 옥사(獄事)에 추사(推辭= 문초에서 불은 말)로 연좌되어 문하평리 정지(鄭地),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이을진(李乙珍)과 함께 강도(江都= 지금 강화)로 유배(流配) 되시어 끝내 신원을 하시지 못하고 거기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乙巳年(1389) 12월초 4일이다. 연안 자달동 선룡갑원(延安紫達洞先龍甲原)에 장례를 모셨는데, 지금은 그곳을 알지 못하여 실전하고 있다. 배는 철원 최씨인바 평장사 임의 딸로서 4남 4녀를 두셨다. 영평군 척은 슬하에 아드님 다섯을 두셨는데 둘째 아드님 판한성공 승도와 넷째 아드님 좌윤공 승경은 대를 잇지 못하였고 큰 아드님이신 전의공 승휴와 셋째 아드님 충간공 승순, 그리고 다섯째 아드님 판도공 승례의 세 파만이 대를 이어 왔다. 공께서는 고려 때 전의사(典儀寺)의 벼슬을 하셨으므로 전의공이라 하고 그 후손을 전의공파라 부르고 있다.

                  14世 충간공 승순 (忠簡公 承順)

  공은 영평군 척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공은 일찍이 과거에 오르시어, 형님 전의공 승휴(承休)와 공민왕조에 벼슬하시어 영화를 누리시었다. 공이 여러 번 벼슬을 바꿔 응양군 상호군겸 군적전서(鷹揚軍上護軍兼軍籍典書)가 되셨는데, 그때 요승(妖僧) 신돈(辛頓)일가 권세를 부리면서 횡확을 제멋대로 하지만 조정 측에서는 감히 누구도 말을 못하였다. 공민왕 16년(서기 1367년)에 공이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과 상호군(上護軍) 조린(趙璘), 전시중(前侍中) 경천흥(慶千興) 판소부사(判少府事) 강원보(姜元甫)등과 함께 신돈을 죽여 없앨 것을 밀의하여 말씀하시기를,『신돈이 음험하고 간사하며 교활하여 왕에게 아첨만 하고 사람은 배척하여 무고(無辜)한 사람을 살육하기만 일삼아, 그 당이 날로 성하여 가는데 도선(道詵= 중으로서 비결을 지어 예언함)의 소위 비승비속(非僧非俗)으로서 정사를 문란하고 나라를 망친다고 한 말이 반드시 이 사람이라, 장차 국가의 큰 환이 될 것이니, 마땅히 왕께 아뢰어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후 이일을 강원보가 판사(判事) 신귀(辛貴)와 만나 누설하니 신귀가 신돈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신돈이 왕을 뵙고 변을 고하여 말하기를『돈이 생각건대 간악한 무리를 제거하고, 현량한 사람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나라가 할 일이옵니다. 지금 나라에서 일하는 사람이 돈을 죽이고자 하오니 상감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간사한 말로써 아뢰었다. 왕이 놀래어 그 연유를 물은즉, 신돈이 신귀의 말로서 고해 바치니 왕이 명령을 내려 공과 오인택등이 순군(巡軍)에게 검거되어 국문(鞠問=심문)케 하였다.    11월에 형장(刑杖= 볼기맞음)을 맞고 오인택과 공, 그리고 조린이 각기 유배되었다. 그 후에 조린은 다시금 신돈을 죽이려고 하다가 필경 죽음을 당하였다. 7월에 辛未日에 공이 적소(適所= 귀양가 있는 곳)에 계시는 동안 신돈이 왕을 시(弑= 왕을 죽임)하자는 역적  모의를 하다가 참을 당하였다.    왕이 크게 깨닫고, 공을 배소(配所= 적소와 같은 말)에서 불러 다시금 상호군을 배하였다. 당시에 조린은 그때까지 장사도 못 지내었다. 공이 돌아오시어 조린의 어머니를 찾아가 절하고 슬피 울고 검은 관과 흰옷을 입으시고, 조린의 뼈를 추려다가 장사를 지내시니 듣는 자마다 감탄치 않은 자 없었다. 왕도 이 소문을 듣고 공의 신의를 가상히 여겨 공을 보내 조린의 묘에 제사케 하였다.(이상은 명재 증(明齋 拯)의 기록에 의함) 그해에 수충양절보리공신(輸忠亮節輔理功臣)에 책록(策錄)되시어 영평군(鈴平君)을 봉하였다.    우왕 원년(1375)에 경상도 부원수가 되셨는데, 8월에 왜구(倭寇=일본해적)가 호남의 낙안(樂安), 보성(寶城)등 군에 침입함에 공이 군사를 옮기시어26급의 목을 베었으며, 정사년에 계림(鷄林= 경주) 부윤이 재임할 때, 왜구가 언양현(彦陽縣)에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약탈함에 공이 또 이를 쳐서 4급을 참하는 공을 세우셨다. 공이 여러 번 왜구를 쳐서 무찌르니 계림에 2년간 계시는 동안 변방을 경계치 않아도 좋을 정도라 군사들이 편안하였다. 우왕때 정권 다툼으로 인하여 성석린, 윤승순, 유만수, 임의, 이귀, 조회등은 형장 끝에 유배하였는데, 그 대다수가 적소에서 죽었다. 양중연, 양자연만은 다행히 풀리어 나와서 고향에 돌아갔고 전천길도 또한 옥중에서 죽었다. 최영이 이러한 형을 내려 살육이 과중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김도가 처음 붙잡혔을 때 옥관(獄官)에게 말하되『나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무고한 사람을 죽이면 그 앙화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여 옥관도 아무 말을 못하고 그 원통함을 알았던 것이다. 공은 그 후 얼마 안 있어 죄가 놓여 돌아오시었다. 우왕 10년(1384, 甲子) 3월에 아버님 영평군의 상을 당하시고, 창왕 원년(1389. 기사년)에 문하평리(門下評理)에 배하시여. 그해 6월에 사신으로 명나라 서울에 가셨는데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부사가 되었다. 이조에 내려 와서 의정부 좌정승(議政府左政丞)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에 추증되셨고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이 명나라에 가신 것은 고려군위(高麗君位)가 왕씨인바 왕(공민왕)이 살해를 당한 후에, 후사(後嗣)가 없어 비록 왕씨를 가장은하였다 할지라도 다른 성이 왕이 된 것은 부당한 일이다. 과거의 역사와 지금 정세를 지켜온 현명한 사람은 모두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신하로서 임금을 정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본분일진대 10여년 동안을 조정다운 조정이 없었으니, 이 어찌 걱정이 아닐 수 있으랴. 나라의 모든 종친들이 바라는 공론이 그렇고 대소 신하들이 다 말하기를 종친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요(瑤)는 이에 태조 정파인 신종왕(神宗王)의 7대손 이어서 족속으로는 가장 가까운 만큼 공민왕의 후사로서 요를 왕위에 즉위케 하여서 종묘사직을 받들도록 명하고, 우(禑)와 창(昌)은 페하여 서인으로 만들게 하심을 바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은 한(漢)나라에서도 있은 일로서 4백년 태평한 왕업을 누린 것이 옛일의 일례라고 하시었다. 이는 즉 공민왕이 피살된 후에, 우왕과 창왕이 즉위하여 대를 이었지만, 이것은 왕씨가 아닌 것을 지적하여 부당한 일이니 종친인 정창부원군 요가 태조의 정파손인즉, 그로 하여금 왕위에 즉위시키는 명나라 황제의 승인을 받자고 가신 것이다. 공의 배는 군부인 단양이씨(丹陽李氏)로서 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거경(居敬)이요 조부는 직제학 선간(先幹)이며 증조는 대호군 구(玖)다. 공의 묘소는 장단 저가사리(長湍猪加士里)라 하고 삼배동(三倍洞)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실전 되고 있다. 추원단에 비위를 모셨다.

                  14世 판도공 승례 (版圖公 承禮)

  공의 자는 문중(文仲)인바 영평군 척의 막내이다.

  고려 공민왕 16 년(서기 1367 년)에 신 돈(辛旽)의 살해를 모의하다 누설되어 유배되었다가 공민왕 20 년(서기 1371 년)경에 신 돈(辛旽)이 주살된 후에 풀려나서 응양군 상호군(鷹楊軍 上護軍)이 되어 수차에 걸친 왜구(倭寇)들의 침입을 막아 공(公)을 세웠으며 창왕 1 년(1389) 문하평리(門下評理)로 권근(權近)과 함께 명나라 사신(史臣)으로 갔다 와서 명제(明帝)지시에 따라서 공양왕을 즉위케 하였다. 이어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와 판도 판서(判圖判書)를 지냈다. 고려조의 국운이 이미 끝나 뜻있는 사람들이 몸 가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도중에 홀로 공은 두 번 절조를 굽히지 않으시고 파평산에 들어가시어 노후를 길야은(吉冶隱), 서장령(徐掌令)등 제공과 함께 지내셨다. 후에 손녀(孫女)인 번의 딸이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로 책봉(冊封)됨에 따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또한 손자인 공간공 형(炯)이 좌익공신에 책훈되어 순충보조공신에 추증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후손들 중에서 많은 고관대작과 학자(學子)가 배출되어 집안이 크게 번창하였다.  배는 경안택주(慶安宅主) 창평 성씨인바, 부는 시중 문정공(文靖公) 여완(汝完)이요, 조는 총랑(摠郞) 군미(君美)이며, 증조는 부령공(副令公) 필(弼)이요, 외조는 지중사 나주 나천부(羅天富)다. 기일은 10월 19일이다. 후배는 경안택주 안동 권씨인바 부는 지밀직 항(恒)이요, 조는 찬성사 겸(謙)이요, 증조는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부(溥)요, 외조는 좌의정 사숙공(思肅公) 청주 한악(韓渥)이다. 기일은 9월 24일이다. 공의 묘소는 문현공 묘소의 좌편 동원으로서 단표(短表)가 있으며 배묘는 파평군 묘우요, 후배 묘는 파주 교하 와동 성재정동 유원(聖齋井洞酉原)인데 표석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판도공파의 파조(派祖)이시다.

                    15世  소정공 곤 (昭靖公 坤)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 106호로 1987년 지정)

  공은 충간공 승순의 첫째 아드님이시다. 일찍이 아우님이신 소도공 향(向)과 함께 등제하여 모두 문학으로써 조정에서 중하게 쓰이셨다. 이태조 7년(서기 1398년)에 대장군이 되시고 정종(定宗) 2년에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방간(芳幹) 부자를 끼고 정종과 태종 그때는 정안군(靖安君)을 제거코자 군사로써 대궐을 범하므로 공은 상장군 이저(李佇) 등과 함께 태종을 도와 토벌하여 진압하였다. 태종이 왕위에 오른 원년(서기 1401년) 정월에 추충익대 좌명공신(推忠翊戴 佐命功臣)을 책훈(策勳)하시고 공으로써 의흥삼군 우군 동지총제(義興三軍右軍同知摠制)3등 제7인에 녹(錄)하여 파평군(坡平君)으로 봉한 후 충성을 다하여 힘을 쓰셨다는 것으로 교지(敎旨= 왕이 내리는 문서)로 표창하고 부모, 처자에게 직함을 내리는 동시에 전답과 노비(奴婢), 은과 비단, 말 등을 하사하였으며, 둘째 아우님 목(穆)은 4등에, 막내아우님이신 소도공(向)도 또한 높고 빛나는 벼슬에 계시니 그 훈벌이 두드러지게 영화로웠다. 그해 2월에 마암단(馬岩壇) 아래에서 공신들이 모여 피를 뽑아 마시며 왕께 충성을 맹세하였다. 왕은 도감사(都監使) 김첨(金瞻)으로 하여금 글로 써서 일제히 나누어 배부하였다. 상(왕)이 좌우공신들을 초대하여 북정(北亭)에서 연회를 베풀고 손수 교서록을 주어 패(牌)를 내린 후에 다시금 영을 내려 모든 공신들의 화상을 그리도록 하셨다. 이 달에 사신으로서 명나라 서울에 가시어 태종이 사위(嗣位)를 받았다는 것을 고하는 뜻을 전달하시고 돌아오심에 왕은 말을 내려 주시고 청화정(淸和亭)에서 위로연을 베푸시고 또 전답과 노비를 내리셨다. 12월에 사건에 관련되시어 파평 고향으로 귀양을 가시었으니 이것은 즉 공이 명나라에 가셨을 때 명나라에서 우리나라 산(産) 말을 교역하자는 의논이 성립되어 상마는 비단 네 필이요 중마는 견직(絹織) 10필로 정하였던 것인데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말의 숫자를 모자라게 계산하여 청산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서 공은 그 죄를 묻게 되어 붙잡히고 우사(右使) 이직(李稷)도 죄로써 다스리었다. 왕이 공에 대하여는 공신이므로 벼슬을 파면만 하도록 명하고 대간(臺諫)들의 말을 좇아 고향에 안치(安置= 귀양의 일종이니 그 지역 밖에 나가지 못함) 보냈다가 얼마 안 가서 놓이시었다. 당시로 말하면 명나라는 천자(天子)의 나라여서 우리나라는 나라의 큰일은 일일이 승인을 받아야했으므로 그들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되는 시절이고 보니 공이 비록 공신이지만 그 과오에 대한 문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태종 4년(甲申) 11월에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佐命) 세 종류의 공신이 대청관북(大淸觀北)에서 회맹(會盟)하였다. 그때 왕은 세 종류의 공신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할까 염려하시어 서로 동맹을 하여 한 마음으로 합심 협력하라는 것이어서 여기에 참여한 사람이 무릇 66명에 달하였다. 맹세가 끝난 후 대궐에 들어간즉 왕은 옷감을 하사하시고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丙戌年에 이 3종의 공신이 무일전에서 헌수(獻壽= 왕이 오래 살도록 축하함)하여 혹은 시를 지어 올리고 혹은 춤을 추어 밤이 들도록 즐기었다. 戊子(1408년) 4월에 사신으로서 명나라에 가셨으니 이번은 사은사(謝恩使)로 가신 것이다. 세종이 즉위 하신 후 공은 평안도 관찰사(평안감사)를 배하셨다. 공이 부임하시고자 하실 때 양궁(兩宮= 왕과 왕비)께서는 친히 침전(寢殿= 왕의 자는 방)에 부르시어 연석(宴席)을 베푸시고 전송하셨으니 왕께서 공을 얼마나 우대하셨는가를 엿볼 수 있다. 공은 평안도에 가신 후 상소를 올려서 기악(妓樂)을 없애시고 풍속과 교화를 바로 잡으시라고 왕께 건의하셨고 공은 또 이를 실천하셨다. 공은 그 후 이조판서로 종1품에 오르시고 후에 우참찬을 배하셨다. 세종 4년(1422) 3월 10일에 자택에서 별세하시니 왕이 들으시고 3일간 조회를 폐하시고 왕께서도 슬퍼하셨다.  태상(太上= 태종을 말함)께서는 내시 김중귀(金重貴)를 보내시고 왕께서는 예관을 보내시어 제사케 하셨다. 시호를 소정(昭靖)이라 내리셨다. 배(配) 전 부인은 순정택주(順靖宅主) 고흥유씨(高興柳氏)인바 첨의정승 탁(濯)의 따님이시고, 후 부인인 청주한씨로서 도평의 문렬공(文烈公) 상질(尙質)의 따님이시다. 유부인이 두 아드님을 낳으시고 희이(希夷)는 상호군이요, 둘째 희제(希齊)는 검참의(檢參議)로서 찬성(贊成)을 증직 받으셨다. 한부인은 아들 한 분을 두셨으니 삼산(三山)인바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이시다. 그런데 공은 고려 혁명 후에 이조에 벼슬하시어 나라에 훈공을 세우시고 공신호까지 받은 영광을 누리셨으나 마음속으로는 항상 고려를 사모하시고 절의를 존중히 여기시어 아드님 3형제분의 이름을 희이, 희제, 삼산(三山)으로 하신 것은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같은 절조를 바란다는 뜻에서 그를 따신 것이며 삼산(三山)은 수양산(首陽山)의 일명이기 때문에 그로써 명명(命名)하신 것이다. 공의 묘소는 파주 치동(治東) 5리 용지동(龍池洞= 지금 용주골)에 그해 7월18일 장례를 모셨다. 유부인의 묘소는 충간공 묘아래 있고 한부인 묘소는 전의현 동면에 모셨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실전되었다. 그 후 공의 종손이 8세(八世)에 이르러 대가 끊어져서 9세손 대사헌 문거(文擧), 10세손 판서 강(絳)등이 서로 공의 후사를 상의하셨는데 종사(宗嗣)가 이미 없어 계승할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지파(支派)에서 적당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나라 옛날에도 있는 예라 이제 그를 모방하여 실행하는 것도 좋지 않느냐는 의견이어서 마침내 연명으로써 조정에 보고하였더니 즉시 허가가 되어 공의 둘째 아드님 계통의 9세손 승지 비경(飛卿)으로써 공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이 일이 효종(孝宗) 때이었다. 효종 8년(1657) 7월 15일에 비경공께서 모든 종인을 거느리고 새 사당에 정성껏 제사를 받들었고 그러므로 다시금 뒤를 이어 국가의 유공한 어른의 종사(宗祀)를 계승하여 받들게 된 것이다.                           

치제문(致祭文): 世宗大王

惟靈器宇寬弘而能斷襟懷明智而不苛或補袞銀臺出納惟允或連長州牧遺愛在人

巡問關西權衡銓部所在稱副綽有聲名方賴匡救之功遽何乘化而歸百身難贖九重深悼玆遣侍臣遙祭英靈英靈不미?庶幾格斯

永樂二十年壬寅三月戊午朔十六日癸酉

                         세종대왕의 치제문 해설  

  오직 영기의 성품이 관대하고 마음에 깊이 품은 생각과 총명한 지혜로 능히 판단해서 어전과 승정원을 드나들며 보필 하였고 연천 장단 주목으로 나아가 백성을 사랑으로 감쌌고 평안도관찰사 재임 시는 사리판단을 똑바로 하여 선정을 폈으며 이조판서 재임 시는 여유 있고 침착하게 잘못을 바로잡고 백성을 도운 공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승화하여 급히 돌아와 백가지화신이 난속이라 구중궁궐에서 깊이 슬퍼하고 신하를 보내 멀리서 제사를 바라보니 영령이여! 영령이여! 밝게 이 자리에 임하소서.

  영락20년(1422년)임인 삼월 무오 삭 16일 계유

                    15世 원평군 목 (原平君 穆)

  충간공의 둘째 아드님이며 소정공의 아우님이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1400년(정종 2) 전중군장군(前中軍將軍)때,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한 공으로 1401년(태종 1)에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5번째 공신으로 원평군(原平君)에 封하였던 바 그해 4월에 이무(李茂)의 추천으로 지합주사(知陜州事)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불만을 품고 임지로 떠났다. 그는 임지(任地)인 합주(陜州:지금의 합천)에서 몽계사(夢溪寺)의 백종법회를 금지시키고 많은 양곡을 빼앗아버린 죄로 탄핵을 받았다. 1405년 9월에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왔고, 1407년에

평양부윤이 되었다. 1409년 9월에 사은부사로 재차 명나라에 갔다 왔다. 태종 9년에 이무(李茂), 유기(柳沂) 조희민(趙希閔)과 공 등 4인이 정부에 계사(啓辭)를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난신(亂臣)이라고 규탄 받아 처벌받게 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여 귀양 가셨다가 별세하였다. 그때 국론(國論)으로서 죄를 지게 되면 친족이 모두 죄를 면치 못하지만 그 형님이신 소정공과 아우님이신 소도공은 워낙 나라에 공이 크시고 또 충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죄를 면한 것이다. 배는 정씨(鄭氏)로서 부는 종부(宗簿) 진(璡)이다. 묘소는 진주북말항촌(晋州北末項村)에 있다. 합천지(陜川誌)에 징심루(澄心樓)라는 객관에 있는데, 남지군(南知郡) 윤목(尹穆)이 건립하였다고 쓰여 있다.

    그의 후손들을 원평군파라 부른다.

                    15世 소도공 향 (昭度公 向)

충간공 승순(承順)의 셋째 아드님이시고 소정공의 아우님이시며 계동(季童)의 아버지이며 홍여방(洪汝方)의 매부이다. 공이 일찍이 두 분의 형님들과 함께 아버님의 3년 상을 정성껏 효로써 마치시고 태종 조에서 소정공, 원평군과 함께 3형제가 문학으로써 명성이 8도에 떨치시어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왕정(王政)을 보필하는데 있어 충의로써 다하시었다. 때문에 그 둘째 형님인 원평군(諱: 穆)이 옥사에 관련되시어 죄를 받게 되시어 그 친족도 처벌을 받게 마련인 당시의 법으로도 공의 충성은 그러한 법의 테두리에서 모면하는 특전을 입으신 것이다. 한편 고려 우왕 때 생원으로서 박초(朴礎) 등과 같이 불교망국론을 역설하고 유학을 권장하라고 주장하기도하였으며, 1404년(태종 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복직(復職)되었으나, 남재(南在)의 부정사실을 탄핵하려다 오히려 공주로 귀양 갔다.

  1405년(태종 5)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1406년(태종 60 왜적의 침입으로 인하여 경차관(敬差官)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1407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다시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옮겼다가, 곧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고, 1409년 상평보(常平寶)를 설치하도록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참지의정사(參知議政事)를 거쳐, 1410년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 겸 계림부윤으로 임명되었다. 한때 그의 형 윤목(尹穆)의 죄에 연좌되었다 하여 중요관직에 임명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그가 먼저 형의 죄를 고발하였기 때문에, 태종이 그를 중요관직에 임명시켰다.

  1412년 한성부윤을 거쳐 참지의정부사에 다시 임명되었다.

  1413년 공조판서로 발탁되고, 1415년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공신(威化島回軍功臣)들의 죄를 ‘자기 임금을 배신하고 한고조(漢高祖)를 도운 ' 정공(丁公)의 일'에 비유하여 논하고, 또 그들의 전지(田地)를 회수하게 하라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어, 적성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참찬(參贊)을 거쳐 강원도(江原道) · 경상도(慶尙道)의 관찰사를 지내고, 곧 형조판서로 다시 발탁되었다.

  1408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라도관찰사 재직시 전주부에 속하지 않았던 다른 현(縣) · 향(鄕) · 소(所) · 부곡(部曲) 등을 전주부에 합치시켜놓았다. 시호는 소도(昭度)이며 후손들을 소도공파로 부른다.

  배는 남양 홍씨인바 문경공(文景公) 길민(吉旼)의 따님이시고 추밀부사 문정공(文貞公) 보현(普賢)의 손녀이시다. 3남 2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경동(敬童)이요 차남은 효동(孝童)이요 그리고 3남은 계동(季童)인바 계동공께서 태종의 정신옹주(貞信翁主)께 장가들어 부마가 되시어 영평군에 봉함 받고 시호는 의간(懿簡)이시다. 공의 묘소는 실전되었고 부인 홍씨의 묘소는 광주군 오포면 능평리 용상동(廣州郡五浦面陵坪里龍上洞)이라고 하지만 오래되어 실전 되었었는데 그 후 인조(仁祖) 10년 6월에 다시 되찾았다.

                    16世 창화백 숭 (昌化佰 崇)

  공은 그 아버님의 휘가 기(璣)이며, 조부는 전의공(典儀公) 승휴(承休)요, 증조는 영평군(鈴平君) 척(陟)이다. 공이 고려조에 벼슬하시어 삼중대광 보국금자광록대부(三重大匡輔國金紫光祿大夫)로서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오르시었고 창화백(昌化伯)을 봉하였으나 공의 행적에 대한 사기가 없음이 유감이다. 공의 묘소가 양주석적면백윤능사혈신원(楊州石積面白尹陵蛇穴辛原)인바 이로써 공은 양주(楊州)로 본관을 삼아 그 후손들은 공을 양주윤씨 시조로 하고 있다.

               16世 상호군공 희이 (上護軍公 希夷)

  공은 소정공의 장남이시다.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서 도감부사 상호군(都監副使上護軍)에 제수 되셨으나 공의 성품이 약관시절부터 벼슬에 뜻이 없으셨다. 이조가 되면서 공은 서산 채미시(西山採薇詩=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는 시)를 지으시어 전절(全節)을 발표하셨다. 태종 9년 己丑에 중부(仲父)이신 원평군의 옥사로 말미암아 광주(廣州)로 귀양을 가셨다가 3년 후인 임진년에 풀리어 돌아오신 후, 壬寅年 아버님이신 소정공의 상사를 당한 이후 더욱 상심을 하시어 벼슬을 버리시고 전야(田野)에 돌아가시어 밭갈이를 하시면서 항상 자손들에게 훈계하시되『벼슬이나 과거에 뜻을 두지 말고 힘써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自給自足)하게 살도록 전하라』고 하셨다. 6월 9일에 세상을 하직하셨다. 부인은 한양 조씨로서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온(溫)의 따님이시고 그 조부는 인벽(仁壁)이며 증조는 용성군(龍城君) 돈(暾)인데 부인의 별세하신 날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4남 1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이(利)니 첨추(僉樞)요 다음은 정(貞)이니 통정(通政)에 재령군수(載寧郡守)요 그 다음은 선(善)이니 병절교위(秉節校尉), 그 다음은 좌랑으로 벼슬하시지 않으셨다. 묘소는 적성 치남 암태정 임원(積城治南巖苔井壬原)에 합장하였으며 단표(短表)가 있다.

                  16世 한성공 희제 (漢城公 希齊)

  공은 소정공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공의 벼슬은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 판서에까지 이르셨다. 그 후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촤찬성 판한성부사(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判漢城府事)로 증자(增資)되시었다. 배는 연안차씨(延安車氏)인데 부(父)는 창성 문절공(文節公) 호는 설암(雪岩) 부요 후배는 남양홍씨(南洋洪氏)로서 부(父)는 찬성 조부는 검참찬 잠(檢參贊 潛)이시다. 공의 묘소는 적성 입암산 축원 유혈(積城笠岩山丑原 乳穴)인바 본래 소정공 사패지지(賜牌之地= 공으로 나라에서 내려준 땅)로서 옛날부터 실전 되었다가 숙종(肅宗) 37년(1711) 겨울에 연천(漣川)사는 종인 원교(元敎)가 산소 자리를 구하려고 산 밑에 이르러 단표(短表) 하나를 얻어 본즉 세 조각으로 분질러져 넘어져 있었다. 이를 모아 본즉 공의 휘와 벼슬하신 것과 부인 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모든 후손들에게 통고하여 후손들이 영역(瑩域)을 개수(改修)하고 제전을 마련하였으니 이는 곧 예전 은사(恩賜)하신 구토를 환퇴한 것이다. 매년 10월 초길일에 제사하는데 임진년 8월에 새로 묘표를 세웠다. 아드님에 경(坰: 白川公) 은(垠: 參議公) 증(增: 副使公) 배(培: 掌令公) 훈(壎: 牧使公) 5형제를 두셨다. 공의 묘표는 공의 10세손인 판서공 지인(趾仁)이 지으셨다.

               16世 영천부원군 삼산 (鈴川府院君 三山)

  공은 소정공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공의 자는 수옹(壽翁)인바 나면서부터 출중하시고 성장하시어 글에 능통하셨다. 음(陰)으로 벼슬하시어 종묘령(宗廟令)에 제수 되시어 상서주부(尙瑞主簿) 삼군 친종(三軍 親從)을 두루 지내시고 한성부윤이 되시어 너그러운 행정을 하셨다. 공은 병인년에 양근군수(楊根郡守)로 나가셨다가 지통례문사(知通禮門事)가 되시었다. 문종(文宗)이 동궁에 계실 때 감례(監禮)가 되셨는데 좌우에 모신 모든 신하를 명망 있는 사람으로 뽑았는데 공을 첨사(詹事)로 삼았다. 세종 32년(庚午)(서기 1450년)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제수 되셨다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로 옮기셨고 병자년에는 지병조(知兵曺)를 겸하시었는데 신병으로 사퇴하셨다. 그 후에 첨지중추(僉知中樞)가 되시었다. 세조가 공으로써 정희왕후의 근친이라고 대우가 극진하여 여러번 사신을 보내어 문병을 하시고 약제를 하사하였으나 병이 점점 더하시어 치료의 효험을 보시지 못하고 정축년 8월 임인일(壬寅日)에 별세하시니 향년 52이시다. 그해 12월에 죽산현 풍정리 을좌 신향(竹山縣楓井里乙坐辛向)에 장례 하였다.(현 안성군 보개면 남풍리 풍정부락) 부인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좌의정 원(原)의 따님으로서 묘소는 양지고현서 자좌 오향(陽智古縣西子坐午向)인바 두 산소의 상거가 근근 백보에 불과하다. 신도비명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지었고 좌리공신 이조판서 동래(東萊) 정난종(鄭蘭宗)이 썼다. 공의 손녀께서 성종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시어 공은 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16世 교리공 돈(敎理公 惇)

  공의 휘는 돈이요 전서공의 셋째 아드님으로 조선조 태종14년(1432년)에 문과에 급제하시어 통례원 봉례랑, 과천현감을 역임한 후 한양으로 돌아올 때 박강생(朴剛生)과 금천현감 김문(金汶)이 안양사(安養寺)에서 전별하였더니 김문이 약주에 상하여 갑자기 죽자 사헌부에서 죄를 청하니 임금께서 술을 권하는 것은 본시 사람을 죽이고자 함이 아니고 인관(隣官:이웃동관)을 전별함도 상사(常事:흔한일)이라 하고 불문에 붙이었으며, 이즘 온 나라에 기근이 들어 공은 평안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계하기를 본도 44읍에 굶주리는 백성이 4만 5백 명이라고 보고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 후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후 이조판서를 추증(追贈)되셨다. 묘소는 원래 의정부 신공동 산30-1 갑원으로 모셨으나 국가토지수용령으로 부득이 배위묘역내로 이봉하였으므로 새로 재실도 건립하여 태위공이하 실전된 선조님 단소를 설립하여 음력10월7일 시향을 지낸다.

                    17世 참의공 은 (參議公 垠

  공은 한성공의 둘째아드님이시며 음관으로 참의에 이르고 광주목사를 역임, 성품이 맑기를 대쪽같아 마음이 청렴하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셨다.    천순 병진(1460년)2월 초팔일에 광주목사로 재임하시다가 관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6세라 장남 충경공이 귀하게 되므로 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영천부원군으로 추서되시었다.

  9남 2녀를 두시었는데 장남 사로는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겸 판이조사 영천부원군으로 봉작되시고 시호는 충경이며 배위는 세종대왕의 따님 정현옹주이시다. 차남 사석은 사헌부 집의이고 호는 만돈암이고 연산조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청주 옥화대에 은거하였으며, 옥화서원과 용궁의 죽고향교에서 향사를 지낸다. 3방 사유는 통훈대부 영월군수이고 4방 사화는 분화별좌이고 5방 사공은 충무위 좌사정이요 6방 사하는 통훈대부 장악원정 좌통례이고 증직으로 집의이시다. 7방 사건은 충우위 좌사직이며 8방 사연은 충좌위 호군이요 9방 사맹은 어모장군이시다.

                  17世 상호군공 오 (上護軍公 塢)

  공은 부원군 삼산(三山)의 첫째 아드님이시고 소정공의 손자이다. 공의 관직은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역임하셨다. 배는 전주 이씨로서 부는 성령군(誠寧君) 곤(梱)이다. 묘소는 안성북 간첨산건원(安城北肝瞻山乾原)에 합장하였다.    

                    17世 주부공 당 (主簿公 塘)

  공은 부원군 삼산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세조 4년(서기 1458년) 임인 생이시며 어려서부터 지혜가 많으셨다. 가문의 공훈으로 등용되시어 일찍이 사재주부(司宰主簿)로서 벼슬길이 열릴 듯 하더니 의외로 외방벼슬인 찰방(察訪)에 제수 되시고 본즉 그러한 작은 벼슬로써 만족할 수 없으시매 단종 원년에 뜻을 결단하시고 물러가신 후에 교남(嶠南)의 화산(花山)땅에 자리를 잡으시고 문을 닫고 글을 읽으시면서 다시는 벼슬길로 나가시지 않으셨다. 그 후 수를 누리시고 별세하시매 내성면 유곡후 간좌(乃城面酉谷後艮坐)에 장례를 모셨다. 공의 성품이 강직하시고 지조도 또한 굳으시어 불의와 부도덕한 일에는 추호도 굽히시지 않고 자효(慈孝)와 충의(忠義)로써 몸가짐에 있어 근본을 삼으셨으니 이는 장인이신 황보인정승께서도 그 선성(先聲)을 들으셨다. 그때는 화산재사(花山齋舍)에 계실 때다. 정서와 노끈 꼬는 일로 곤궁한 것을 스스로의 낙으로 삼으시고 충효를 준수하는 것으로 유업을 삼으시며 시와 예의로써 후진(後進)을 면려 하시다가 천수(天壽)로써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배는 황보씨로서 영의정인 황보인(皇甫仁)이 그 아버지다. 1남 1녀를 두셨는데 그 아드님 여필(汝弼)은 현감(縣監)이다. 공의 행장은 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이 지었다.               17世 영원부원군 호 (鈴原府院君 壕)

공은 부원군 삼산의 셋째 아드님으로서 세종6년(서기 1424년) 12월 13일에 탄생하셨다. 공이 출생하시면서부터 골상이 기위(奇偉)하여 사람들이 기이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점점 성장하여 글 읽기를 좋아하시어 문장이 상당하였다.

  세종 29년(정묘)에 생원과에 급제한 후 문종 2년에 문종의 장례를 현능(顯陵)에 모시자  능직(陵直)에 보직되고 갑술년에 종묘승(宗廟丞)으로 옮기셨다. 군기주부(軍器主簿)를 거쳐 세조 3년에 어머니상의 복을 마치신 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시었다가 신창현감(新昌縣監)으로 출사(出仕)하시고 세조 12년에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승진되시었으며 다시 의금부 경력(經歷)이 되셨다. 예종원년(己丑)에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시니 무릇 삼부(三部) 죽소(竹所)에 까지 그 명성을 떨치셨다. 공이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공은 벼슬의 지위가 높아지시어도 항상 손에는 서책을 놓지 않으시고 읽기를 즐기셨다. 성종 3년(서기 1442년) 봄 친시(親試)에 오르시어 병조참지(兵曹參知)로 뛰셨다. 사람이란 뜻이 있고 노력하면 성공하는 법이다. 성종 5년(甲午)에 가선대부가 되시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로 오르셨다. 그리고 본직에다 경상도 관찰사를 겸하여 나가시자 공사를 척척 속결 처리하여 옥중이 비도록 민완(敏腕)을 휘두르셨다. 왕이 들으시고 국새(國璽)를 찍은 포장(褒狀)으로 표창하시어 안마(鞍馬)를 하사 하셨다. 과만(瓜滿= 만기)이 되시자 동지(同知)에 제수 되시어 돌아 오셨다. 성종 8년(丁酉)에 정사(正使)로서 명나라에 가시고 돌아오신 후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셨다가 한성부윤에 옮기셨고 공조참판으로 전임되셨다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시었다. 공이 밀양을 거쳐 영남의 도백(道柏= 감사) 그리고 양주를 거쳐 경기 도백 등 불과 7,8년간에 지위가 오르시어 병조참판에 이르셨으니 모든 사람들이 영화로 여기었다.    성종 11년(서기 1480년) 10월에 그 따님이 왕비가 되시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배하시고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시었으며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하시었다. 성종 19년(戊辛)에 인수왕대비(소헌왕후)께서 편치 않으실 때 내의도제(內醫都提)가 되시어 시약(侍藥)을 조제 하시여 효험이 있으므로 성종께서 심히 기뻐하시고 계급을 더하여 대광보국(大匡輔國)으로 하셨다. 성종 24년(癸丑)에 춘추가 70이어서 물러 날 것을 빌었더니 궤장(机杖= 지팡이)을 하사하시었다. 갑인년에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배하시고 춘추관사가 되시자 여러 번 상소하여 사퇴코자 하셨으나 모두 불윤(不允= 허가되지 않음)하시고 그 비답(批答)에서 나라를 위하여 장인은 백성을 돌보아 경륜을 펴셔야 할 것을 더욱 믿는바 이오니 머물러 주시기를 권고한다는 뜻으로서 상의 의사가 매우 간곡 하셨으나 글을 올려 굳이 사양하시니 성종께서도 부득이 이 뜻을 좇아 돈녕부사만을 환수(還授)하시었다. 연산조(燕山朝) 2년 봄에 공이 병으로 누우시매 내의(內醫)로써 치료케 하시고 어약과 반찬을 내려 병이 낫기를 바랐고 왕대비도 친임 하시어 문후를 하였다. 4월 9일에 별세하시니 수가 73이었다. 왕이 듣고 슬퍼하여 3일간 철조하고 특히 승지를 보내어 조상하고 따로 부의를 내리고 또 4등관으로 회장(會葬)케 하여 그해 12월 정유일에 마전군치서 두모동 축산 계좌 정향(麻田郡治西豆毛洞丑山癸坐丁向)에 장례를 모셨다. 공의 천품과 도량이 거짓과 꾸밈이 없고 사람대접하는데 있어 안팎이 없어 한결 같고 가난한 선비나 친척이거나 혹은 친소가 있고 없는 사람을 불문하시고 진심과 성의로써 접대하고 관혼상례에 있어서도 마음을 기울여 도와주시었다. 공은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의 위에 계시어 인민으로서 최고의 영화와 복록을 7년 동안 누리실 때 왕대비께서 두 번이나 임행(臨幸)하시고 상감이 동궁에 있을 때 또한 따라서 온 일이 있어 만인이 이목을 집중시킨 일이 있으니 이것은 세상에 드문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성종께서 어찰(御札= 임금의 편지)과 병풍 그림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의 물품이나 어제시(御製詩= 임금이 친히 지은 시)를 내리어 반드시 공으로 하여금 화답(和答)하여 올리게 하셨다. 이렇게 왕복하기를 수 없이 하였으니 그 은총 또한 드문 일이다. 이와 같은 물품도 굉장히 많은 것이로되 공은 이런 것들을 반드시 친구에게 나누어주시었고 사시는 주택이 큰 길옆에 있으므로 어떤 사람들이 간혹 그 협착함을 공에게 말하면 공은 말씀하시기를 『이만하면 족하지 더 호화로워서 무엇 하느냐』고 하시었다. 가산을 늘리는 것을 생각지 않으시고 첩을 두시지 않으셨다. 항상 자손에게 훈계를 하시기를 사치를 하지 말라고 간절히 당부하셨다. 유명(遺命)에 의하여 치상 범절은 검소하게 할 것이며 불공 같은 것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공은 이렇게 독학(篤學)과 정의에 의하여 처세의 기본을 삼으셨음은 공의 행장으로서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배는 전씨(全氏)로서 연안세족(延安世族)으로서 증우의정(贈右議政) 좌명(佐命)의 따님인바 연안부부인(延安府夫人)을 봉하였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대비는 그 다음이시다. 공의 신도비명은 대제학 어세겸(魚世謙)이 지었다.

궤장(?杖) : 상신이나 1품의 관리가 70이 지나면 퇴임을 만유(挽留)하던 제도로 검은 지팡이와 안석을 내려주었다.

                    17世 정호공 탄 (丁胡公 坦)

  공의 자는 탕보(蕩甫)인데 부원군 삼산의 다섯째 아드님이시다. 공은 세종 17년(乙卯)(서기 1435년) 3월 25일에 탄생하시어 젊어서 음사(蔭仕)로 벼슬이 제천(堤川) 천녕(川寧) 양현감과 성천 부사(成川府使)를 역임하시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내섬(內贍) 내자(內資) 사도(司導) 종부(宗簿)등 네 시정(寺正)과 통례원 좌우통례(通禮院左右通禮)를 지내시고 마침내 형.공 양조의 참의를 배하신 후 다시금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가시어 동부(同副)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셨다가 갑자기 한성부 우윤에 오르시고 그 후에 충청도 관찰사로 옮기셨다. 그 후 돌아오시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등 빛나는 벼슬에 배하셨다가 다시 동지중추부사로 옮기셨다. 중종 원년 9월에 성주(聖主)를 익대(翊戴)함에 있어 그 훈공을 논하여 정국공신호(靖國功臣號)를 하사 받으시고 영성군(鈴城君)에 봉하였다. 다음해 4월에 숭정(崇政)에 오르시어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셨다. 공은 이렇게 가벌로써 과거도 치르시지 않고 벼슬길로 나가시어 순조롭게 승진되시어 영화를 누리시게 된 것은 공이 항상 분수를 지키시고 부지런하시고 근엄하신 소치라고 볼 수 있다. 중종 2년 7월 25일에 세상을 떠나시니 수(壽)가 73이시다. 시호를 정호(丁胡)라 하시었다. 부인이 이씨는 공보다 三년 먼저 작고하시었다. 과천현 남수리산하 술좌원(果川縣南修理山下戌坐原)에 장례를 모셨고 합장하셨다.     

                  19세 효성공 인경(孝成公 仁鏡)

  공의 이름은 인경(仁鏡)이요 자는 경지(鏡之)이며 성화(成化) 병신년 성종7년.1476년)에 태어났으며, 어릴 적부터 영민(英敏)함과 강의(剛毅)함이 숙성(夙成)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문사(文辭)가 저절로 진보하였다고 한다. 홍치(弘治) 갑자년(연산군 10년. 1504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상사생(上舍生)이 되었으며, 정덕(正德)병인년(중종원년. 1506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록(學錄)을 거쳐 예문관에 뽑혀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 두 번 벼슬이 바뀌어 봉교(奉敎)에 이르렀으며, 성균관전적에 승진되었다. 예조(禮曹), 병조(兵曹)의 좌랑(佐郞),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한성부(漢城府)의 판관(判官), 황해도 도사(都事),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또 사간원 헌납(獻納), 형조 정랑(刑曹 正郞)을 거쳐 세 차례의 예조의 정랑과 두 차례의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을 역임하며 춘추관(春秋館)벼슬을 겸대(兼帶)하였다.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에 올랐다가 봉양(奉養)을 위하여 태안(泰安) 군수(郡守)가되었으며, 춘추관벼슬은 그대로 겸대하였다.  당시 훌륭한 치적(治績)으로 여섯 차례나 연달아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 도보로 운구(運柩)를 부호(扶護)하여 양주(楊州)에 안장(安葬)하였다. 여막(廬幕)에서 나오지도 않고 죽만 먹으면서 삼년상을 마쳤다. 탈상 후 사간에 제수(除授)되신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몇 곳을 더 역임 뒤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후 예조참의(禮曹參議)와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으며 충청도 안무사(按撫使)로 외직에 잠깐 나갔다가 좌부승지를 세 번 전임하여 도승지에 이르렀다. 호조참의를 거쳐 이품에 올라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동지사(冬至使)로 뽑혀 중국을 다녀온 뒤 경상도에 사건이 번잡하여 조정에서 안찰사(按察使)를 찾던 중에 공이 적임자로 임명되어 적체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니 영남인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뒤 여러 곳을 두루 거쳐 드디어 형조판서에 제배(除拜)되었다. 몇 달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공조판서, 의정부 우참찬, 예조판서, 호조판서 3차례, 이조판서 2차례를 역임하며 경연관(經筵官)과 춘추관(春秋館)의 벼슬을 겸대하였으며 숭반(崇班)에 올라 찬성, 병조판서, 우찬성, 우의정에 제배되어 영경연(領經筵)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겸대하였다. 5년이지나 중종께서 승하(昇遐)하시자 공은 좌의정에 올라 산릉총호사(山陵總護使)를 겸대하였으며 인종이 상중에 있을 때 공이 정사를 섭찬(攝贊)함에 조야(朝野)가 모두 의지하였으며 얼마 뒤 일인지하(一人之下)요 만인지상(萬人之上)인 영의정에 올라 경연(經筵), 관각(館閣), 관상감(觀象監)의 일을 통괄하는 직책을 겸대하니 임금을 보좌한 공로가 더욱 빛이 났다. 을사년(1545년) 여름 인종의 병이 깊음에 공이 내의원 제조(內醫院 提調)로서 주야로 보살펴 모셨으나 왕이 붕어(崩御)하자 즉시 병조판서를 불러 명종의 사저(私邸)를 호위케 하여 그날로 즉위토록 하였다. 공은 어사공신(御社功臣)에 참록(參錄)되었으며 파성부원군(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명종 2년(1547년)에 공이 치사(致仕)하니 임금께서 허락하지 않고 궤장을 하사하셨다. 이듬해 7월 공이 병이 들었다고 아뢰자 임금이 특별히 어의(御醫)에게 명령하여 여러 차례 진료하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문후(問候)하였으나 끝내 수73세로 별세 하셨으니 왕께서는 삼일동안 조회를 열지 않고 후한 부의(賻儀)와 제문을 내렸다.

                          先 祖 祭 亨 日

太師公 : 歲祀日(묘제)陰10月 1日(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別廟致尊日 每年 寒食日 別廟(별묘)

功臣公 : 歲祀日 陰10月 5日(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僕射公           "  (2세~4세까지는 문숙공 세사와 병행)

文靖公           "

文肅公 : 歲祀日 陰 10月 5日(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麗忠祠 歲祀日 陰 3月 10日(여충사내)

瑞岡祠歲祀日 陰 3月18日(광주시 서구 방림동)

            (太師公, 文肅公, 文康公, 南原伯, 咸安伯, 文顯公)

文肅公 : 湖南祠歲祠日 陰 3月 10日(청원군 북이면 내추리)

文肅公 : 花南祠歲祠日 陰 3月 10日(예천군 유천면 화지리)

文肅公 : 修闢祠歲祠日 陰 3月 10日(함평군 해보면 모평리)

文康公(碑位)追遠壇祀日 陰 3月 10日(파주시 법원읍 웅담리)

侍郞公( "  )   (여충사세사후 상서대에서 봉행)

留守公( "  )   (        "        )

錄事公( "  )   (        "        )

御史公( "  )   (        "        )

忠簡公( "  )   (        "        )

文顯公( "  )   (        "        )

良簡公( "  )   (        "        )

鈴平君( "  )   (        "        )

文定公 侍中壇祀日 陰 10月 7日(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代言公 단사일 음 10월 7일(경기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관산리)

少府公 단사일 음 10월 6일(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太尉公 단사일 음 3월 첫일요일(충남 예산군 광시면 시목리) 

典儀公 단사일

版圖公(부윤공)단사일 음 10월 6일(파주시 법원읍 법원리)

昭靖公 기일 음 3월 11일(파주시 파주읍 연풍리)

       세사일 음 9월 9일

提學公 세사일 음 10월 7일(의정부시 녹양동)

貞靖公 세사일 음 10월 3일(파주시 교하면 와동리)

魯宗丙舍 세사일 음 3월 첫일요일(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梅軒公 세사일 음 4월 29일(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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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첫댓글 귀중한 자료 올려주셔서 잘 보고있습니다.2. 문강공 묘지 해설 부문에보면 자녀 순서가 맏이(인첨),넷째(자양),둘째(자고),여섯째(효돈) 셋째(돈신) 다섯째(돈의)순서로 ,일곱째요서하였다로 되어있습니다.상식적으로 첫째,둘째,셋째가 아니고....이상하게도 그 순서는 그 시대 (별세시)당시에 인물인 김자의가 지은 묘비명의 자녀순서, 인첨,자양 자고,효돈,돈신,돈의의 순서와 일치하는지????시기적으로 당시에쓴 묘비명과. 몇백년뒤에(360여년) 쓴 기록물중 어느것이 정확할가요? 위 글들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고려사에 의하면 어쩌고 저쩌고 한두줄 인용하고, 나머지 내용은 몇백년뒤 다른사람의 글을 써넣고 고려사에서 인용한양?

  • 11세 문현공할아버지 고려사에는"충숙왕16년 첨의정승이 졸 하였다, 또 수가78세까지 벼슬했다"
    그 다은 기술된 장자부터 6세까지자손순서 내용은 1695년(서거약367년후) 명재선생께서 다시세우신비문내용
    인줄 아는데문현공의부인 흥례군대부인 박씨 묘지명(최원중 지음,사위 이 계영씀) --즉 그당시에쓴묘비명--에는
    자녀의 순서가 안비-암 -충탄-안숙-안승-계정으로 되어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본 카페 공지사항 51번 글을 참조 하십시요...연구를 해볼 가치가 있는 사항인줄 사려됩니다.

  • 불초 소생이 주장하는 근거는 국립중앙박물관소재 묘비명과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과 한림대,사학과 교수이신 김용선박사가쓴 역주 고려묘지명집성 상.하 책에 근거하였습니다.김용선 박사는 고려묘비명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박사학위 받은 줄 알고있습니다.묘비명들은 모두 그 당시에 기록된 겄입니다.본인은 시조님의 일휘가 화자신자인것을 밝혀낸 종사에 무척 관심이 많아
    계속 연구하는 늙은이 입니다.또 世와 代,세손 대손, 세조 대조에 깊이 연구하여 바로 쓰고있지요..

  • 중요한 좋은 자료가 많아서 본인 카페로 스크랩해갑니다.
    남북이 통일이 되면 지금보다 더 많은 정확한 자료들을 구할 수 있을것입니다.
    북쪽에서는 고려사에 관한 연구가 우리쪽보다 자료가 더 많은 줄 압니다.
    11세 문현공부터 13세 영평군 휘척 까지 자료가 미흡하고
    문숙공 문정공 양원수댁.문강공 언자이자 후손의양대 삼재댁.언자이자 후손부터10세어사공 순까지과거급제 등 문음으로 벼슬많이한 명문인데도 그들 대부분의 묘지가 북쪽에 있다보니
    남쪽에 있는 자료들도 도굴 파손 도적맞고 그나마 일부가 묘비명으로 중앙박물관에 남아있긴 하나
    자료를 구할길없어 딱한 사정입니다.씌여진 자료들도 책임감없이 함부로 쓰고....

  • 11세 문현공 보 내용중 ..... 고려사에 의하면, 충선왕원년(1314)에 홍문관학사에 배하시다. 충숙왕 원년에 의주상서......
    위 내용에서 본인 생각으로는 충선왕 원년(1309)로 정정해야 옳을것 같습니다.충숙왕원년이(1314년)입니다.
    여기에 기록되었다고 반드시 옳다라고 주장하면 않될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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