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외로운 영웅과 술타령 인조(仁祖=西紀 1,623-1,649)는 먼저 왕명으로서 광해군을 강화에 위리안 치(圍籬安置)하라는 처분을 내리고 호위의 법례를 갖추어 인목대비(仁穆大 妃)를 창덕궁으로 모시라는 하교를 내리었다. 그리고 첫 공사로 새로운 조정을 조직하였다. 영의정에는 이원익(李元翼), 이조판서에는 신흠(申欽), 병조판서에는 김 유, 예조판서에는 이정구(李廷龜), 형조판서에는 서성(徐 ), 공조판서에는 이흥립, 대사헌에는 오윤겸(吳允謙), 호위대장에는 이귀(李貴) 등으로 각 각 발령 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영창대군, 임해군, 능창군, 연흥부원군 김제남 등의 관작을 다시 주게 하고 인목대비의 어머니인 노씨(盧氏)는 제주도로부터 영환(迎 還)하도록 영을 내리고, 그동안 부부인 노씨를 학대한 제주목사 양호는 약 사발을 안기어 사사(賜死)하였다. 한편 폐모의(廢母議)를 주장하던 이이첨, 정인홍, 윤인, 정조 등 십육명을 거리에서 차례차례 목을 베었다. 이때부터 반정 의사(反正義士)들이 모여 있는 빈청 내외에서는 논공행상의 발표를 앞두고 서로 의견들이 분부하였다. 누구는 일등이 마땅하고 누구는 이등에 합당하다는 등, 구체적인 토론이 아니고 막연히 각자의 공적만을 토의하여 하나의 여론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장 문제되는 인물은 김유와 이괄 두 사람이었다. 김유의 공적이 크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거사 당일 연서역에 늦게 도착한 그 실책을 문제삼는 것이다. 그것을 가장 문제삼는 것은 이괄이었 다. 이괄은 당일 김유의 모호한 행동은 그 동안의 그의 공적을 상쇄하고 도 오히려 죄목이 남는다는 것이고 더구나 김유가 자기 집 권솔을 사방으 로 헤쳐 숨어 있게 한 사실은 그의 심경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괄의 이러한 강경한 주장에 대하여 김유는 김유대로 이괄은 벌써 군문에 목을 베어 걸어야 할 것을 김유 자신이 반정거사란 대의에 비추어 참았다 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괄은 연서역에 모이는 정각보다 훨씬 빠르게 이 르러서 이귀를 농락하여 군졸에게 호령한 것은 그가 우정 김유보다 일찍이 가서 미리 대장의 지위를 가로채보자는 비열한 행동이었다고 공격하는 것 이다. 세상에 정각보다 늦게 이르른 죄목은 있거니와 정각보다 빠르게 내참한 죄 목도 있느냐고 이괄은 호통을 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누가 옳고 그르든간 에 승리는 김유에게로 돌아갈 것인 뻔했다. 왜냐하면 임금은 김유를 무조 건하고 믿고 대소사 일체를 그의 처단에 맡기고 있는 까닭이다. 이귀는 이괄의 행상(行賞)에 관해서 사전에 김유에게 주의를 하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번 거사에는 이괄의 힘이 큰 바 있고, 앞으로도 모 든 일에 과감한 인물이니 깊이 생각하오." 하였다. 그러나 김유는 "모든 일에 과감하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성급하고 교양 없는 인물을 큰 자 리에 올렸다가는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소." "그럼 낙점(落點)은?" "이등쯤 하려고 하오." "그게 말이 되오?" "그럼 일등으로 하란 말이요?" "그래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일등은 과합니다." 김유는 단연 이괄을 이등공신으로 내려밀 결심을 보였다. "이런 논공행상이란 공평하게 해야지 만일에 지나치게 불공평하다면 큰 화 근이 되는 법입니다." "화근이 무슨 화근이요. 공훈이 이등이라구 해서 상당한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게 아닌즉 상관 없다고 생각하오." 김유는 어디까지나 대수롭지 않게 해석하고 자기의 심산대로 내뻗칠 눈치 였다. 다음날 행상이 발표되었다. 일등 공신이 열사람, 이등 공신이 열여섯 사 람, 삼등이 스물여섯 사람이다. 일 등에 든 사람의 이름은 이러했다. 김유, 이귀, 김자점, 심기원, 이서, 신경진, 최명길, 이흥립, 구굉, 심명 길. 그리고 이 등에는 이괄을 필두로 원두표, 장유, 장신 등이며, 삼등에는 이 기축, 승지 홍봉서 같은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장유, 장신 같은 사람, 그리고 이귀의 아들 이시백, 김유의 아들 김경증 등이 이등으로 올라 붙은 것은 오히려 후한 처분이라고 할 것이지마는 그 들과 선을 같이 하여 이괄을 이등으로 몰아넣은 것은 확실히 불공평하고 가혹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 행장이 발표되자 이괄은 물론 동지들 사이에 불평이 비등하였다. 더욱 조정의 조직에 대해 그러하였다. 영의정 이원익은 누구나 반대 못할 원로이니 당연하려니와 김유 자신은 병 조판서로 앉고, 이귀는 호위대장이란 자리로 돌렸다. 호위대장이니 상감 신변을 호위하는 측근 중신이라고 하겠지마는 뚜렷한 정권을 가진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참는다 하고, 그 이외의 각조 장관의 자리 는 모두가 반정 동지가 아니었다. 말인즉 반정에 이면 협조를 하였다 하니 마는 어찌하여 정면으로 활동한 사람을 제외하고 이면 협조자를 등용했는 가. 김유의 농간이 너무나 심했다. 소위 이면 협조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김유를 지원하는 무리들로 김유는 타일의 비약을 꾀한 것이었다. 이괄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이라는 벼슬 한 자리를 얻었다. 북병사와 한성 좌윤이 그 얼마나 승하가 있는 자리인가. 이로부터 이괄은 두문불출, 나날을 집에 틀어박혀서 술로 날이 새고 술로 날이 저무는 장야의 술타령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