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설주·이설주·최룡해·최용해…. 신문과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북한 인사들의 이름이다. 사람은 둘이지만 이름은 넷이다. 동일 매체에 실린 기사에서도 네 이름이 중구난방으로 등장한다. 혼란이 빚어진 것은 지난 5월 30일 국립국어원(원장 민현식)이 “최룡해(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와 리설주(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부인)의 이름을 각각 ‘최용해’와 ‘이설주’로 표기해줄 것”을 요청한 직후다.
국립국어원은 “리설주의 경우 성(姓)의 첫글자가 ‘리’기 때문에 ‘이설주’가 맞고, 최룡해의 경우 이름(룡해)의 첫글자가 ‘룡’이기 때문에 ‘용해’로 표기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판단한다. 그간 국내 언론은 북한의 인명, 지명 표기를 존중해 최룡해, 리설주로 표기해 왔다. 이 같은 혼란은 지난 2004년 북한 ‘룡천역’ 폭발사건 직후에도 국립국어원이 “룡천역이 아닌 용천역으로 표기해 달라”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벌어진 바 있다. 두음법칙 폐지론이 국내 일각에서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두음법칙을 두고서는 수십 년간 어문학자와 한글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분분했다. 일부 학자는 남북통일에서 앞서 언어통일을 위해 가장 먼저 폐지해야 할 어문규칙 가운데 하나로 두음법칙을 꼽기도 했다. 동일인을 두고도 두음법칙 적용 여부에 따라 남북이 ‘이명박’과 ‘리명박’ 식으로 달리 표기하는 일이 벌어져서다. 배경지식이 없는 외국인들은 별개 인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마르퀴즈 후즈 후’ 세계인명사전에 등재된 국어학자인 국립경상대 려증동 명예교수는 “북한의 동생은 리씨인데, 남한의 형이 이씨가 말이 되냐”고 두음법칙 폐지를 주장해 왔다. 국립국어원이 표기 수정을 요청한 것은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의 1992년 결정에 따른 것이다. 당시 문화부 국어심의회 한글분과위원회는 “인명, 지명 등 북한의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도 한글맞춤법을 준수할 것”을 심의·결정한 바 있다. 1988년 고시된 한글맞춤법 제5절의 제 10~12항은 ‘어두에 ㄹ음을 써서는 안 된다’며 두음법칙 적용을 규정하고 있다. 또 제10항은 한자음 ‘녀·뇨·뉴·니’가 단어 첫머리에 올 적에는 ‘여·요·유·이’로, 제11항은 ‘랴·려·례·료·류·리’가 단어 첫머리에 오면 ‘야·여·예·요·유·이’로, 제12항은 ‘라·래·로·뢰·루·르’가 단어 첫머리에 오면 ‘나·내·노·뇌·누·느’로 적는다고 규정한다. 국립국어원 정호성 어문연구팀장은 “두음법칙은 어문학자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알타이어에 있는 특수한 음운현상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우리말의 뿌리인 알타이어는 말머리에 ㄴ, ㄹ 등을 피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있고 이에 따라 두음법칙이 생겼다”는 게 정 팀장의 설명이다. 이에 따라 고유어인 ‘니름’은 ‘이름’으로 ‘님금’은 ‘임금’으로 ‘(옷)닙다’는 ‘입다’로 바뀌었다. 두음법칙은 국내에서도 성씨(姓氏) 표기 등을 예외로 인정하면서 흔들린 측면이 있다. 대법원은 지난 2007년 ‘호적에 성명을 기재하는 방법’ 제2항을 개정과 동시에 ‘호적상 한자 성의 한글 표기에 관한 사무처리지침’을 제정하면서, “한자 성(姓)의 한글표기에 두음법칙의 예외를 인정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성과 이름에 두음법칙을 강제하는 것은 ‘국민행복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 판단 요지였다. “두음법칙은 전통적인 고유 성씨를 말살시키는 창씨개명과 같다”는 비판을 일부 수용해서기도 하다. 림(林)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중국 주나라 때 사람 림견(林堅)을 시조로 하는 림씨는 장림산(長林山)에서 유래됐는데, 두음법칙에 따라 림씨가 임씨로 바뀌어 유래가 흐려졌다는 것. 풍산 류(柳)씨 일족들도 두음법칙을 거부하고 있다. 류(劉), 유(兪)씨 등이 도매급으로 ‘유’로 표기되며 생긴 혼란 때문이다. 이에 조선 중기 유학자 ‘류성룡’과 탤런트 ‘류시원’씨는 각각 ‘유성룡’과 ‘유시원’이 아닌 ‘류성룡’과 ‘류시원’이라고 쓴다. 국립중앙박물관도 풍산 류씨 문중의 의견을 반영해 ‘류성룡전(展)’을 개최한 바 있다. 당시 국립국어원도 “대법원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르면, 만약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부인 리설주가 “리설주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겠다”고 주장할 경우 ‘리설주’란 이름을 인정해줘야 하는 셈이다. 국립국어원의 정호성 어문연구팀장은 “정확한 표기법대로라면 ‘이설주’로 쓰는 것이 맞다”며 “하지만 북한의 모든 이씨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지 않냐”고 반문했다. 외래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두음법칙을 적용한 표기법도 상당수 깨진 지 이미 오래다. 라디오, 뉴스, 라면 같은 외래어도 원칙대로라면 두음법칙에 따라 ‘나디오’ ‘유스’ ‘나면’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뉴욕’ ‘로스앤젤레스’ ‘루이지애나’ 같은 미국의 지명들도 원칙대로라면 두음법칙을 적용해 ‘유욕’ ‘노스앤젤레스’ ‘누이지애나’로 표기해야 한다. 이 때문에 두음법칙이 한국인들의 ‘R’ 발음과 ‘L’ 발음 구별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국립강원대 국어국문학과 남기탁 교수는 “옛날 사람들은 라디오 같은 발음이 잘 안 됐다. 근래 들어 외국어·외래어가 많이 들어 오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했다. 특히 조선족 동포들도 두음법칙에 대한 불만이 많다. 조선족 인구는 약 190만명. 특히 연변(延邊)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동포들이 쓰는 말은 함경도말이 근간인데, 문화어(평양 표준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선족 동포 주요 매체인 연변일보, 길림신문, 흑룡강신문, 료녕신문은 모두 ‘리설주’ ‘최룡해’ 등의 표기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한글 사용의 한 축인 북한은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북한은 1966년 제정한 ‘조선말규범집’을 통해 “두음의 ‘ㄹ’과 ‘ㄴ’은 제대로 발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한 바 있다. 중국과 국경을 접한 북한은 일찍부터 교류가 많았다. 북·중 간 교류에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알타이어 고유의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고 한자음 그대로 표기를 했다고 한다. 이에 ‘력사’ ‘로동’ ‘리해’ ‘려행’과 같은 한자어는 한자음 그대로 표기하는데, 이 같은 표기법은 60대 이상 고령층을 제외하고는 거의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남한도 중국과 교류가 급증하며 이 같은 문제가 불거지는 셈. 그간 남북 어문학자들은 두음법칙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였으나 입장 차만 확인했다. 남북관계까지 경색되며 언어통일을 주관하는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권재일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에 따르면, 남북한은 다른 쟁점인 사이시옷과 띄어쓰기 등은 조금씩 입장을 양보하는 식으로 의견을 좁혔으나, 두음법칙을 두고서는 의견 접근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과 대만·홍콩의 어문학자들이 간체자(簡體字)냐 번체자(繁體字)냐를 놓고 수십 년간 지속했던 논쟁과 비슷하다. “7000만밖에 안 되는 한글 세계화에 두음법칙이 발목을 잡는다”는 지적은 이 때문에 나온다. 권 교수에 따르면, 현재 남측은 “두음법칙은 자연적 언어현상이다”란 입장이고, 북측은 “위치에 따라 한 글자가 두 개의 표기를 갖는 것은 맞지 않다”는 입장이다. 권재일 교수는 “1933년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1945년 광복 이후 남한은 그대로 지켜왔고, 북한은 인위적으로 바꿨다”며 “우리 학계에서는 언어현상을 인위적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아직 대다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