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
성령의 두 번째 인도는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로마서 8:14 "무릇 하우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많은 이들이 로마서 8장 14절을 중요한 결정을 위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글라스 무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 두 구절 중 어느 구절에서도, '인도함을 받는'이란 표현이 신자들이 가끔 상투적으로 말하는 '어떤 일을 하도록 성령의 특별한 '인도'를 받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무의 말의 옳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들의 문맥과 내용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로마서 8장 14절을 그 전에 있는 4절과 비교해보십시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의 "따라 행하는"은 성령의 인도를 전제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 성공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다음 구절도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부정적인 표현이긴 하나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성령의 인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혜로운 선택과 결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므로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세 가지 인도 중 이것을 가장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두 번째 인도를 설명할 때 여러분 모두 집중해서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1) 나는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12제자뿐 아니라 우리에게 하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직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참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고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살 수 있을까요? 베니 힌은 이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읽었을 때 그것이 가능한가 하고 의아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주님과 같이 올라갈 것을 기대하였나요? 물론 아니지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올라가셨을 때 그분은 성령님을 보내셨으며, '너희를 ... 인도하시리니'(요1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나를 따르는 것을 중지하라. 나는 떠난다. 그러나, 성령님을 너희에게 보내리라. 너희는 지금부터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성령님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첫 번째 보혜사입니다. 그런데 승천하신 후 두 번째 보혜사인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예수님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고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마5:17).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율법의 의식법을 온전히 성취하시고(마5:18). 율법의 계명들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심으로 계명들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마5:21-48). 만약 우리가 계명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이렇게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계명들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서만 지킬 수 있습니다(겔36:27). 그러므로 우리는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완전하게 한 계명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로마서 8: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완전하게 한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참 제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요 참 신자입니다. 여러분, 이제 왜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하는지 아시겠지요!
한편, 오늘날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자기 의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십자가와 의롭다 함을 강조해야 정통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의롭다 함만 주는 것이 아니라 다음 두 가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십자가는 "아브라함의 복"인 의롭다 함뿐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한 성령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이 두 가지를 주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구원이 칭의와 중생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으면 칭의가 없고 성령이 없으면 중생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두 가지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입니다.
로마서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만약 믿고 의롭다 함을 받아 천국 가는 것이 전부라면, 하나님께서 의롭다 함만 주고 성령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 신앙생활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줍니다.
신앙생활은 주일성수 하고, 십일조 하고, 셀리더 하고 단지 이런 것들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목상의 신자와 외식자들도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신앙생활은 실제 삶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외식자가 되지 말고 그들보다 나은 의, 즉 예수님이 완전케 한 계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생활입니다!
사도 요한은 거듭난 신자에 대해 요한일서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 의를 행한다. 형제를 사랑한다.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거듭난 자의 특징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누구든 이것들이 없으면 진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신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교회 안의 불신자이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마5:20).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나는 참으로 꼴과 독초를 구분할 수 있는가?
저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자는 참 제자가 아니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활적으로 중요한 진리지요. 이것을 가장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곳은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5장입니다(16-23). 그런데 이 진리를 그릇된 해석으로 무효로 만들려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초고 양들에게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왜 그들의 견해가 잘못된 것인지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은 성령을 따라 행해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지요. 그런데 그 뒤 17절은 상당히 이상하고 그 의미가 모호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치 16절의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을 도루묵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지요!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이 성령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므로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사는 것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 구절을 로마서 7장 14-25절과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로마서 7장의 바울의 고백이 구원받은 신자의 경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바울도 그랬다고 성도들을 위로하고 다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잠, 즉 죽음의 잠에 빠지게 하는 자장가입니다. 왜냐하면 17절은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7절이 그런 뜻이 아니라는 증거는 무려 다섯 가지나 됩니다.
1) 16절이 그 증거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면서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분명한 일들인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로마서 8장 4절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처럼 죄를 짓지 않을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16절로 시작한 17절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의미일 수가 없습니다.
2) 18절이 그 증거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면 율법 아래 있을 때와 달리 순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그러나"(데)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는 이렇게 썼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절을 시작하는 '그러나'('데')는 역접이다. 육체와 성령 사이의 동등한 전쟁으로 이해될 수 있는(17절) 것과는 정반대로, 바울은 이제 신자에게는 성령이 승리함을 강조한다."
또, 토마스 슈라이너도 이렇게 썼습니다.
"'하지만'(데)이라는 헬라어는 여기서 반의의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육체와 성령이 큰 싸움을 벌이지만, 성령께 인도받는 자들은 죄에 대해 승리를 거둔다."
이처럼 18절은 말씀대로 살 수 없다가 아니라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17절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의미일 수가 없습니다.
3) 19-21절이 그 증거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바울은 성령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따르므로 육체의 분명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성령을 따라 행해도 죄를 이기지 못한다면, 믿는 자들도 전부 지옥에 가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러므로 17절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4) 22-23절이 그 증거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상식이거니와, 육체를 따르는 자는 육체의 분명한 일들을 행하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분명한 일들과 달리 성령의 열매는 그것을 금지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존 웨슬리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 '성령의 인도를 받는'(갈5:18) 그들은 저주나 유죄판결 아래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것을 파기하는 자 이외 아무도 정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구("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능한 것이고 17절은 이것과 다른 뜻일 수가 없습니다.
5) 24절이 그 증거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구원받은 모든 참 신자를 의미합니다. 또,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입니다. 육체와 정욕과 탐심 즉 육체의 분명한 일들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기로 진지하게 결단했다는 뜻입니다. 참 신자는 이런 사람입니다. 실제로 참 신자는 이렇게 결단한 후 성령으로 따라 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17절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이 구절과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17절은 절대로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 알쏭달쏭한 17절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구절은 서로 방해한다는 뜻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뜻이 못 이루어지게, 성령은 육체의 소욕이 못 이루어지도록 방해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성령이 주어졌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자동적으로 되거나 쉽지 않습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쉽게 되진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성령을 따라 행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바로 전 16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했는데, 왜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토마스 슈라이너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했습니다.
"이 구절(17절저자 주)의 마지막 부분("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저자 주)은 특별히 해석이 어렵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여러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1) 성령과 육체는 대조되며, 그 결과 신자는 성령이 촉구하시는 일을 할 수 없다. 이 견해는 거절해야 한다. 이것은 5:17이 로마서 7:14-25과 유사한 것처럼 잘못 해석하는데, 두 본문은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는 성령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견해는 어떻게 5:17이 5:16에 대한 근거로서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전체 논증(5:16-18)은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마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끊임없이 실패만 한다는 듯, 그리스도인의 삶에 그토록 부정적 견해를 제기하지 않는다. ...
여기서 '하려 함이니라'는 목적을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것이 최선의 설명일 것이다. 바울은 육체와 성령이 대립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즉, 육체의 욕구도 실현되지 않고, 성령이 원하시는 바도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새로운 종말론적 실체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육체와 성령의 대립이 일어났고, 이것은 신자가 성령 안에서 행하고 성령께 인도받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순풍에 돛단 듯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육체는 성령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고, 성령은 육체에 맞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성령에 의해 행하며 성령께 인도받을 때, 육체에 맞서 실제적이고도 중대하며 가시적인 승리를 얻는다고 주장하며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관점을 취한다."
그러므로 17절을 로마서 7장과 연결시켜서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이길 수 없고 죄 가운데 사는 것을 신자의 정상적인 상태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를 신자라고 주장하고,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주장하며, 지옥에 갈 자를 천국에 갈 자라고 속이는 전형적인 미혹이며, 영혼들을 구원의 길이 아니라 지옥으로 이끄는 악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혹 제 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분이 여러분 중에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은 조금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실은 이것은 거의 모든 신학자가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많아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극히 일부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토마스 슈라이너는 『강해로 푸는 갈아디아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육체의 일을 행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육체의 일을 실천하는 자들이 종말론적 왕국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나머지 악한 자들과 함께 심판에 직면할 것이다(6:8). ...
또한 고린도전서 6:9-10과 에베소서 5:5은 모두 종말론적 유업에서 사람을 제외시키는 죄들을 명시한다. 이것은 바울이 선포하는 주요주제임이 분명하다.
이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실제로 갈라디아 사람들은 육체의 일이 지배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이전에 구두로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악이 가져오는 끔찍한 결과가 여기서 매우 엄숙하게 되풀이된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죄의 삶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또, 권연경 교수는 『로마서 산책』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피하고 성령을 따라야 하는 것은 현재의 신분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실질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8:13, 6). 현재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로마서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사항중 하나다(1:18; 2:6-11; 6:19-23). ... 만일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산다면 죽음이라는 종말론적 결과를 피할 수 없다. ... 만일 우리가 죄의 종처럼 살아간다면 그 필연적인 결과는 최종적인 죽음이다(6:16, 21, 23). 반면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다'(8:13)."
그리고 다시 한 번 권연경 교수는 『행위 없는 구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의 요구는 분명하다. 곧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16, 18).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지('유업으로 받지')못할 것이다. ... 바울의 논지는 이렇다. 곧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갈라디아 성도들은 육체의 욕심을 이루고(16절) 육체의 행위들(19-21절)을 산출하는 삶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육체의 행위들을 낳는 삶은 미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자격을 상실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바울이 말로 적지는 않고 있지만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경고이다) 동전의 뒷면 역시 분명하다. 곧 성령을 따라 살아가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갈라디아인들은 약속된 유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도 바울은 성령 안에서의 삶을 미래 구원을 위한 불가결한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 이신칭의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갈라디아서는 소위 오직 믿음의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의 일관된 신념은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우리가 의의 소망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성령의 길을 떠나면 그 결과는 멸망이며,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의 위기의 핵심이었다. ... 갈라디아서의 칭의 교리는 행위와 무관한 칭의 혹은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은 칭의를 미래종말론적 구원을 가리키는 전통적 의미로 사용하면서, 이 '의의 소망'이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삶의 결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에 대해 무지한 목사와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만 압니다. 즉,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둘은 모릅니다. 즉, 성령의 인도를 따름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가져야 하고 오직 그런 자들만 천국에 간다는 것에 대해 무지합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만, 총신대 총장 물망에도 오른 권성수 교수가 인터넷에 제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가져야 천국에 간다."고 설교한 것을 두고 율법주의 이단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저는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에수님이 말씀한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마5:20). 더구나, 로이드 존즈와 존 스토트도 저와 똑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참으로 무지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나 교수들 중에 이처럼 무지한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일이 실제로 수많은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사야 9:16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마태복음 15:14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몇 차례 들어서 아시겠지만, 오래전 제가 울산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그 당시는 교회가 아주 작았는데, 울산극동방송에서 와서 "우리 교회 좋은 교회!"라는 프로를 녹음했습니다. 저는 그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라는 설교를 했고 그 설교가 방송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방송국에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마비되고 난리가 났습니다. 청취자들의 "그 설교를 다시 들을 수 없느냐?", "설교 테이프를 구할 수 없느냐?"라는 문의 전화가 폭주했기 때문입니다. 담당 피디는 저에게 울산극동방송 사상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설교를 들어보니까 성경적입니다! 또, 사활적으로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난생처음 들어보는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화들짝 놀라서 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얼마나 심각한 미혹이 교회들을 뒤덮고 있는지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끝으로, 저는 성령의 첫 번째 인도를 설명할 때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순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성령의 두 번째 인도가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인도를 잘 받아도 두 번째 인도를 따라가지 않으면 지옥행이기 때문입니다. 드물긴 해도, 성령의 첫 번째 이도를 정확하게 받지 못해 사람의 계명에 속고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천국에 가고, 하늘에서 큰 상을 받습니다. 반대로, 성령의 첫 번째 인도를 아무리 정확히 받았어도 성령의 두 번째 인도를 따라가지 않으면 지옥 불에 던져집니다. 성령의 두 번째 인도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아는 데서 멈추지 말고 반드시 성령을 따라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