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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시,글,음악) 스크랩 ABBA - 동화같은 성공이야기! 그 맴버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빌세 추천 0 조회 147 05.11.28 08: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팝 그룹 역사상 가장 성공한 그룹중의 하나인 아바. 그들은 3억6천만 장이 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음반을 팔아 다 쓸 수 없을 만큼 돈을 벌었다. 아직도 프리다, 아그네따, 뷔욘 그리고 베니가 전 세계적에서 팬들로부터 열광을 받고 있는 걸 보면 그들의 출세는 상상을 초월한 성공사례이다. 아바그룹이 해체된 지 23년이 넘었는데도 그들의 노래는 아직 살아있고 그리고 뮤지컬 "마마 미야"가 또 새로이 아바열광으로 몰고 간다.

 



 

뷔욘과 베니의 "Isn´t it easy to say"으로 싹을 틔운 아바그룹이 1970 11월에 공개석상에서 처음으로 4명이 같이 모습을 내보였다노래는 그들의 여자친구들인 아그네따와 프리다가 불렀다. 뷔욘과 베니는 스웨덴에서 당시 가장 잘나가던 밴드인 후테나니 싱어스와 헤프 스타스에서 각각 연주를 시작했었다. 처음엔 "Björn, Benny, Agneta & Anni-Frid"이란 이름으로 시작했는데 아바의 매니저였던 Stig Anderson이 이름이 너무 길다고 생각해  

(A)Agneta Fältskog

(B)Björn Ulvaeus

(B)Benny Andersson 

(A)Anni-frid "Frida" Lyngstad

이름 첫 자를 따서 ABBA로 이름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미 그 이름은 스웨덴의 한 생선통조림공장이 사용하고 있어서 양해를 구하고 그 이름으로 정하였다. 1972년 ABBA란 이름으로 활동이 시작되었다.

 

 

 

성공은 갑자기 왔다.

1974 유로 페스티벌에서 그들의 히트송인 " Waterloo" 당당히 금상을 받았다.

역사상 가장 나간 밴드중의 하나로 사이 없이 순회공연을 하였다. 하지만 성공 뒤엔 많은 다른 사연들이 있었다.

 

 

 

옛날에 애기를 낳았을 때만해도 기자들을 산부인과 병동으로 초대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청중 앞에 나서는걸 무지하게 꺼린다.

 

그 많고 긴 순회공연들이 아그네따를 힘들게 했다. 그녀와 뷔욘사이에 딸 린다와 아들 크리스티안이 태어났는데 아그네따는 순회공연보다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림하기를 원했다. 

- 많은 여 스타들이 나와 같은 문제를 같고 있으리라. 두 쪽으로 나눠진 느낌, 하나의 반쪽 나는 세계적인 스타로 성공한 기쁨에 죽을 것 같고 또 다른 한쪽인 나는 엄마로서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은 맘이었다고 최근 "Super Troupers-ABBA 30 years"도큐먼트에서 아그네따는 이야기했다.

 

 

 

 

 

항상 보호, 감시 그리고 주시되는 그룹맴버들은 피곤에 지쳐있었다. 프리다는 그 힘들었던 순회공연 생활에 대해 이렇게 털어 놓는다.

- 호텔 밖을 나갈 수 없는 우리는 우리가 간 도시들을 둘러보며 즐길 수도 없었다. 정말 이상한 생활이었다. 오로지 우리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곳은 저녁에 서는 무대밖에 없었다.

프리다는 메조 소프라노이고 아그네따는 소프라노였다.

대부분의 악보들이 아그네따의 목소리가 제일 크게 들리게 쓰여졌었다.

-난 가끔 뷔욘과 베니가 아그네따를 선택했던 것에 대해서 질투를 느꼈던 걸  난 인정한다, 고 프리다는 말했다. 한 그룹에서 두 여자가 선두에 서다 보면 당연히 경쟁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론 그건 좋다고 본다. 우리는 청중을 향해 경쟁을 하였고 그러므로 해서 우리는 최선을 다 할 수 있었다고 본다고 또 프리다는 말했다. 

  

 

 

 

 

 

ABBA그룹 해체.

 

하루 24시간 같이 일하면서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그네따와 뷔욘은 1978년에 프리다와 베니는 1981년에 이혼을 하였다. 1982년 그룹은 해체되어 각각 헤어졌다. 

다시 그룹이 합칠 계획은 없다

-우리에게 1.4조 억의 제의가 들어왔는데 거절했다고 프리다가 말했다.

 

http://www.mamma-mia.com/

 

 "Mamma Mia"가 올려졌던 2년전만해도 뷔욘과 베니는 처음엔 그렇게 세계적으로 성공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한데 지금 1.7천만이 넘는 청중이 11개국에서 관람을 하였다. 모음 CD와 ABBA Gold가 지금까지 팔렸던 어느 다른 앨범보다 더 많이 팔렸다.

지금은 그 네 사람들이 문제없이 만나지만 정규적으로 만나지는 않는다. 아바의 시대는 갔지만 음악은 계속 살아있다.

 

 

Agneta Fältskog

나이: 55세.

거주: 스톡홀름외각의 에께르왜(섬)에 있는 저택.

가족: 뷔욘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린다(31세)와 아들 크리스티안(28세).

년수입: 1 083 298 Kr.(약 1억5천만원).

공식으로 등록된 재산: 35 390 000 kr. 

 

 


 

 

아바그룹이 해체된 이후에 1983년에 "Wrap your arms around me"이란 싱글앨범을 내고 2년 후에 " Eyes of a woman"로 냈다. 그리고 그녀의 3번째 앨범인 "I stand alone"을 Peter Cetera와 같이 냈을 때 모든 주목을 다시 받는다. 1996년 그녀의 자서전을 친구이자 저널리스트인 Brita Åhman과 같이 썼다. 그런데 시비가 엇갈려 나중에 헤어진다.

 

1990년 12월 15일에 의사인 Tomas Sonnenfeld와 재혼을 했는데 2년 후에 헤어지고 만다.

 

아바시절에 겪었던 많은 불행과 슬픔 때문에 아그네따는 고립되어 광신 팬들이 무서워 자신의 집밖을 거의 나가지 않았다.

 

1997년에 홀란드인 Gert van der Graaf를 만났다. 그는 아그네따를 집중적으로 만났고 연인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병적으로 팝스타에 매달렸고 아그네따가 헤어지길 원했을 때 그녀를 괴롭히고 테러를 가했다. 법적으로 접근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그네따에게 전화하고 편지를 보냈다. 그는 아그네따를 따돌리려는 그녀의 이웃을 차로 치는 사건으로 인해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도 당연히 많은 환상적인 순간들이 있었다. 올해 17년 만에 처음으로 싱글로 "My Colouring album" 앨범을 냈다. 아그네따는 마이크로폰 앞에 서는데 공포감을 갖고 있어서 다시 노래를 부르는 데는 무단 한 노력이 필요했다. 시작하고 몇 주가 지나서야 그 힘든 느낌이 사라지고 녹음하는 걸 마칠 수 있었다.  무자비하게 비춰지는 시선이 두려워 앨범출판기념행사도 거창하게 하지 못했다.

-하루도 아바그룹을 잊지 못하고 그리고 아바의 꿈을 꾼다. 프리다, 뷔욘 아니면 베니 그리고 나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생각한다. " Super Troupers- ABBA 30 years"는 항상 나와 함께 존재하며 나에게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아그네따는 설명을 한다.  

 

올해 2월에 있었던 스톡홀름의 "Mamma Mia" 개막공연 시 공개석상에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ABBA그룹의 네 명이 모두 함께 모였다.

 

 

스웨덴 왕비 Silvia와 친한 친구가 된 프리다.

 

 

Anni- Frid "Frida"  Lyngstad

나이: 59세.

거주: 스위스에 살고 있으며 Fribourg에 성을 가지고 있고

Mallorca에 주택을 가지고 있다.

가족: 아들 Hans Fredriksson(42세).

 

 

프리다가 스웨덴 혈통인 왕자 Ruzzo를 만나면서 스웨덴 왕족과

잦은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프리다가 왕비가 믿는 친구중의 한 사람으로 발전했다.

 

 

스웨덴 왕비인 Silvia와 프리다.

 

ABBA 시절은 프리다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다 가져다 주었다. 독일 팝 잡지인 "Bravo"를 통하여 아버지 Alfred Haase와 만나지게 된다. 제 2차 대전 때 독일군인이었던 아버지는 노르웨이의 애인이었던 프리다의 엄마가 임신된 걸 전혀 모르고 전쟁이 끝난 후 자기 나라 독일로 떠났다. 그가 잡지에서 프리다의 기사를 읽었을 때 자신의 딸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프리다가 아버지를 외면하였다고 한다. ( 그 당시 독일군의 침공을 받았던 노르웨이에서는 독일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와 그 가족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아바가 해체된 이후에 프리다는 여러 싱글앨범을 냈는데; 1982년에 "Something´s Going On" 을 Phil Collins에 의해 제작되었고 1984년에 "Shine" 그리고 오래 동안 무대를 떠났다가 1996년 앨범 "Djupa andetag"을 내어놓았다.

1986년 왕자 Ruzzo Reuss를 만나 스위스로 옮겨갔다. 성의 안주인이 된 프리다는 노래와 음악에 쏟을 시간이 별로 없었으며 대신 자선사업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Ruzzo를 통해 스웨덴 왕과 왕비를 알게 된다. 그 동안 프리다는 왕비와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어 왕비가 참석하는 많은 행사에 같이 참석하며 부부끼리 같이 휴가를 즐기기도 하였다.

프리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두 비극적인 죽음; 1998년 그녀의 딸 Liselotte가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그 일년 뒤 Ruzzo가 49세의 나이에 암으로 죽었는데 하지만 프리다는 스위스에 그대로 머물기로 결정했다.  

 

 

- 뷔욘과 베니의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Björn

 

 

 

Be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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