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관한 시모음 32)
눈 /가혜자
죄악으로 물든 세상
나
순백의 하양으로
덮어주리라
욕심으로 채워지는 세상
나
순백의 하양으로
씻어주리라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맘
나
순백의 하양으로
닦아주리라
그리하여
나
이 세상을 하양의 눈꽃으로
아름답게 변화시키리라
눈 /주금정
네 가지런한 齒列의 나라에도
오늘 눈 내리고 있는가.
눈 내려 잘 정돈된 세월의 또아리
풀고 있겠는가.
해발 몇 만 킬로미터 상공 어디쯤서
지금도 찢어지고 있을 구름의 육신
그 살점들 하늘을 덮어
숲과 숲의 경계를 지운다.
간혹은 불빛 고운 창가에 모여
몇 시간이고 맴돌다가
커튼이 열리면 와락 달려들어
유리창에 부딪혀 스스로 울음이 되어가는
서서히 슬픔이 되어가는
하얀 겨을 /사랑아 곽기용
하늘과 땅이 온통 하얗게
하나가 되어 거울이 된다
어른이 되어가는 색칠이다
철없이 파아란 시절
꿈만으로도
배부른 그림자가 문득
한아름의 아픔으로
성큼 다가 선다
모자람도 넘침도
애궂은 남 탓의 핑계는
지워도 벗겨도
후회의 채찍자국으로
먹물 붓는다
하얀겨울의 날개짓은
아픈 자리에서만 맴돌다
봄날을 우러러
하얗게 불태운 속앓이 한다
눈이 내리면 /박고은
펑펑 눈이 내려
산천은 온통 적막의 韻운
그 누구의 연서인가
쓸쓸한 겨울 풍경에
소복이 눈이 쌓이면
이 몸은 날뛰는 꽃사슴
치렁치렁 그리움 매달고
소식 뜸한 벗에게 달려가
보고픈 마음 전하리
'잘 가라' 작별의 잔 데운
님의 입술이라도
시린 영혼에 담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리
한 세상 고적하기만 했던
깡마른 씨앗 한 알
가슴에 떨구어
향기로운 꽃 피워 보리
눈 내리는 내재율 /김경주
저물 무렵 내리는 눈은 방마다 조용히 불고 있는 마을의 불빛들을 닮아가는군요
눈들은 한 송이 한 송이 저마다 다른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 고요한 시간마다 눈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눈을 가장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 2004년 1월 26일
뚜껑이 열린 채 버려진
밥통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들의 운율이
바닥에 쌓이고 있는 것이다
어린 쥐들의 깨진 이빨 조각 같은 것이
늦은 밤 돌아와 으스스 떨며
바닥을 긁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 같은 것이
양은의 바닥에 낭자하다
제 안의 격렬한 온도를,
수천 번 더 뒤집을 수 있는
밥통의 연대기가 내게는 없다
어쩌면 송진처럼 울울울 밖으로
흘러나오던 밥물은
그래서 밥통의 오래된 내재율이 되었는지
품은 열이 말라가면,
음악은 스스로 물러간다는데
새들도 저녁이면 저처럼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음역으로
열을 내려 보내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
속으로 뜨겁게 뒤집었던 시간을 열어 보이며
몸의 열을 다 비우고 나서야
말라가는 생이 있다
봄날은 방에서 혼자 끓고 있는
밥물의 희미한 쪽이다
눈이 와서 /이경림
눈이 와서
문득 하늘이 있다 막 퍼붓는
하늘을 쓰고 눈 쪽으로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
잔가지에 쌓인 눈
위태롭고 안온해서 아름다운 눈을 어루며
미친 척 부는 바람이 있다
눈이 와서
문득
유리 안에 소파가 생겨나고
후우욱
긴 숨을 내쉬는
네가 생겨난다
유리(琉璃)속을 번지다
유리(遊離)로 가라앉는 그림자
어딘지 외따로 서 있을 오두막같이
앞이나 뒤나 안이나 밖이나 온통
눈이 와서
오솔길은 뱀처럼 숲의 가슴을 파고들고
적송은 풍파 소리로 지나간다
눈 /이선영
눈이여, 너는
땅에 닿지 말아라
너는 하늘에서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유리창, 공기의 하얗게 벌어지는 열매여서
땅에 내린 너는 깨어진 조각이고 으깨어진 열매이다
눈송이여, 잠깐만 나를 가두어다오
땅 위에서 나의 종적(踪迹)을 찾을 수 없게
눈이여, 너는
땅에 살지 말아라
공중으로 잠깐씩 들어올려지고 싶은 육체들을 거두어 들이는
날아다니는 밀실(密室)이 되어라
눈(雪) /신성호
하늘의 기쁨을 전하려고
서둘러 내려 온 진객인 양
회색빛 구름길을 한걸음에
거침도 소리도 없이 내려왔네
오는 길이 멀기도 한데
하얀 천사처럼 곱게도 내리었네
없는 집 식량이 되어질까
어린아이 솜사탕이 되어질까
있는 듯 쌓이던 적설봉(積雪峰)이
숨었다 나타나는 해맑은 햇살에
왔던 길 잃어 버리고
눈물(雪水) 지으며 가버리네
눈 내릴 때면 /김지하
이리 눈 내릴 때면
여기면 여기고 저기면 저기지요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게 안 부를 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당신 당신이지요
너 이제 동백 함께 삽니다
나 이제 사철 함께 삽니다
내일 내 소식 들으세요
산사에 오는 눈 /김시천
오신 자리도 없이 가신 자리도 없이
그냥 다녀가신다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대 오실 때마다
내 마음 견디지 못하고
하얗게, 하얗게 들판에 누워
마냥 웁니다
잊으려고, 잊으려고 하였으나
끝내 잊지 못하고
들판에 쓰러져 마냥 웁니다
그대 가시는 걸음 눈에 밟혀서
내 마음 기어코 견디지 못하고
그대 오시길
다시, 기다립니다
창밖에 눈이 내리네 /이채
눈이 오면 누군가 올 것만 같아
창 너머 먼 산 바라보면 내 지난날이 하얗게 흩날리네
정녕 내가 기다린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네
바로 나라는 사람이었네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다고 쓸쓸할 것도
누가 불러 주지 않는다고 슬퍼할 것도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등불 하나였다네
나무와 나무 사이로 오가는 바람이 낮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눈 덮인 산 속에서 겨울 나무가 되어
그대마저 떠나고 보내야만 고요해질 수 있는가
나조차도 멀리 떠나고 보내야만 평온한 잠이 오는가
생명의 간절한 고동소리가 흰 눈발에 섞고 섞이며
뿌리 깊숙이 눈은 녹아내리고
파닥이는 숨결로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네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 산 속에서 벗어나
몽마르트 언덕의 보헤미안이 되기도 하지
그저 살아 있으므로 통속 하는 세월이여!
아직은 아무도 겨울 나무의 죽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일까
누가 물어 온다면...
창밖에 눈이 내리네
눈 길 /오보영
그 길
내가 먼저
내딛고 싶어서
내 자욱 또렷이
남기고 싶어서
서둘러 간다
가쁜 숨 몰아쉬며
뛰어서 간다
눈 내리면 /푸름 김선옥
작은 꽃잎들이
피아노 선율을 타듯
춤추며 내려온다
너인 듯
창밖으로 달려나가
활짝 두 손을 벌려 안아 보지만
허공으로 흩어지는 애절함
말없이 하얀 눈 맞으며
떠나던 너
아득해질 때까지 돌아서지 못했다
이젠, 잊어야지 다짐하건만
눈 내리면
내 마음은 언제나
그 자리에 가 있다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황의성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오고
어쩌자고 이리도 혼란합니까
내 의지할 곳 달랑
세상 하나 뿐인데
돌고
돌고
돌고
돌고
어쩌자고 이리도 어지럽습니까
내 살아 갈 곳 달랑
자구 하나 뿐인데
세상을 핑계로
술을 마셔 보지만
나는 아직 마시는 법을 몰라
날마다 술에 취합니다
그리움을 핑계로
사랑을 꿈꾸어 보지만
나는 아직 사랑하는 법을 몰라
날마다 사랑에 취합니다
생명을 핑계로
인생을 이야기해 보지만
나는 아직 살아가는 법을 몰라
날마다 삶에 취합니다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처럼
실존하지 않는 세상은
한 폭의 그림으로 펄럭이고
나와 내 생명의 꿈은
바람도 구름도 되어
허공을 떠돕니다
눈 내리고 빛이 /임영준
눈 내리고 어둠이 열려야
추억이 돋나요
세상이 잠들고
숨결이 가벼워져야
꿈이 펼쳐지나요
깊디깊다고 넓디넓다고
기다리다 보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던
그 많은 사랑 노래가
모두 거품은 아니겠지요
시들은 꽃잎은 아니겠지요
멀리 돌아올진 몰라도
깃들지 못해
허공을 떠다닌다 해도
눈 내리고 어둠이 짙어지면
다시 펼쳐질 수 있겠지요
바래져 있더라도
선연히 나타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