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 22일 수요일.
베를린을 향해 달리는 야간열차의 아침은 분주하다.
승객의 대부분은 독일인이고, 종종 나처럼 외국인 여행객도 있지만, 동양인은 나 혼자.
역무원의 아침인사에 눈을 눈을 뜨니, 호기심 가득한 백인남자아이가
수줍게 인사를 건네더니 후닥탁 어디론가 뛰어가버린다. 아마도 내가 신기한 모양.
커튼을 열어보니 아직 밖은 어둡지만 하늘이 푸르스름한 빛을 띄는 걸 보니 이제 곧 동이 트려나보다.
느릿느릿 일어나 역무원에게 커피한잔 부탁하고, 세수도 하고,
주섬주섬 짐도 챙기고 하다보니, 기차는 어느덧 베를린 추역에 도착해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와 오이로파 센터.
진짜 베를린에 왔나 싶다.
한국에서 예약한 숙소 Propeller island lodge.
세 명의 예술가(?)가 모여 만든 이 호텔은 각각 방마다 테마를 가진 독특한 인테리어가 이색적이다.
우연히 웹서핑에서 이 호텔을 발견했을 때, 만약 베를린에 간다면 꼭 이곳을 들르리라고 다짐했다.
어쩌면 이곳에 들르기 위해서 베를린을 왔는지도 모르겠다.
여튼 한국에서 미리 예약을 하고, 내가 가진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둔터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줄 알았다. --;;;;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친절한 아주머니의 도움 덕에 숙소로 가는 버스도 타고,
제대로 정류장에도 내렸다만.... 걸어도 걸어도 호텔은 보이지 않는다.
뭐가 문제냐. 이리 저리 헤매는데, 갑자기 흑인청소부 아저씨가 불쑥 나타나더니,
어디를 찾느냐고 묻는다. 호텔 앞에 있는 광장이름을 대니 아저씨는 방향이 틀렸단다.
내가 온길을 그대로 따라가서 길건너가 그 광장이란다. --;;;;
그렇다. 지도를 거꾸로 본 것이다. 누구를 탓하랴.
여튼 어렵게 찾아간 호텔은.... 글쎄. 역시나 아시아권의 호텔과는 사뭇 다르다.
그냥 보통 건물의 2-4층을 호텔로 사용하고 있는 듯.
직원이 로비에 상주하고 있는 보통의 호텔과는 달리
이 직원의 출근시간에 맞추어서 체크인도 하고,체크 아웃도 해야하는 모양이다.
내가 묵을 방은 2번 방. Symbol room.
역시나 1번방과 복도, 주방, 화장실을 공유한다. 꼭 우리나라의 투룸과 같은 구조.
직원은 열쇠 한뭉치를 건네면서 갖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나는 여기저기 둘러보기에 바쁘다.
집기를 훼손하거나 가져가서도 안되고, 늦은 시간에 소음을 내서도 안되고 블라블라..
이어지는 주의사항들은 그렇다치고, 왜 실내에서 신발을 신어서는 안되는 것이냐고 물으니
바닥에 있는 그림들이 훼손될까 싶어서 그런단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곰발바닥처럼 보이는 슬리퍼를 꺼내더니 신발 위에 이것을 덧신고 다니란다. --;;;
체크 아웃을 하기 전에 잠시 들러서 정돈된 상태를 보고 문제가 있으면,
배상을 청구한다니 조금은 살벌하지만, 그다지 큰 기업이 아니니 이해할 법도 하다.
2일 동안 혼자 묵을 방. 친구들 말로는 난해한 나의 정신세계에 딱 어울린다나 뭐라나.
어쨋거나 나는 대만족, 블랙과 화이트만으로 채색된 이 아방가르드한 인테리어가
내맘에 쏙 들어서, 이안에서 자는 시간도 아까웠다.
방안 가득 빽빽히 들어선 묘한 기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역시 민망하다. --;;;
저 작은 문을 여니 옷장이 있었다. 칸칸이 구분된 공간이 수납하기에 편리했다는.
복도. 보다시피 페인트로 칠한 것이라 구두를 신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
옆 방은 오렌지 룸. 전체적으로 화사하고 평온한 느낌이기는 한데,
저 안에 오래 있으면 몹시 지루해질 것 같은 느낌. 뭔가 컬러테라피라도 하기 위함인지.
부산하게 짐도 풀고, 샤워도 하고, 정리를 다 해놓았더니,
막상 나가기가 싫어지는 건 또 뭔지. 그냥 이대로 눌러앉아 푹 낮잠자고, 쉬고 싶은 마음 뿐.
어디를 가면 좋을까 가이드북도 살펴보고, 자료들도 둘러보니,
유레일 패스가 살아있는 김에 근교의 포츠담에 다녀오기로 결심.
상스시 궁전이나 둘러보고 와야겠다 싶어서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숙소를 나섰다.
포츠담으로 가는 RER안. 한적하고 조용하다못해 쓸쓸하기까지 하다.
활기가 넘치는 다른 곳들과는 달리 이곳은 왜이렇게 조용한지.... 못내 불안하기까지 하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베를린은 서울의 3배의 면적에 서울의 1/3에 해당하는 인구가 살고 있다.
말하자면 서울보다 9배 한산하고 넓직한 도시. 해서 어디를 가도 한적한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도로들은 반듯하고 넓직한 8차선이 흔한지라 더욱 광활한 느낌이 든다.
차들도 많지가 않은 지라 몹시도 쌩쌩달려서 무단횡단은 엄두도 못낼듯하지만...
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무단횡단을 잘만 하더라는.... --;;;
한국에서는 무단횡단하다가 교통사고가 날 경우 무조건 운전자의 과실인데, 독일은 조금 다르다.
우선 누가 교통법규를 위반했는지 과실부터 따진다.
만약 무단횡단이었다면 한푼도 보상을 못받는 것은 물론, 심지어 벌금까지 내야한다.
철저하게 합리적인 이 사람들을 서울 인구의 1%만 풀어놓는다면,
우리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를일. --;;;
브란덴부르거 거리. 저 문을 들어서자마자 빽빽이 들어선 크리스마스 마켓.
이미 여기저기서 크리스마스마켓 구경을 실컷 한 터라 그닥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저 상수시 궁전을 향해 가던 길에 한 컷.
한 겨울이라 그런지 원래 그런건지 궁전도 역시나 한산하다. 사실 궁전이라기 보다는 공원에 가깝다.
끝없이 펼쳐진 큰 숲속에 아주 드문드문 나타나는 건물들이 궁전인가보다 싶을 정도.
오늘은 무엇도 보고 싶지 않고, 머리속에 무엇도 집어 넣고 싶지 않다.
그저 공기좋고, 상쾌한 이곳을 터벅터벅 걸으리라.
아주 마음속 깊숙이 담아두었던 아주 작은 근심마저도 다 이곳에 털어버리리라.
해서 이곳의 이름이 상수시(근심이 없다는 뜻.)가 아니던가.
얼어붙은 호수. 얼어붙은 상수시 궁전.
실제로 보면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당한다.
저 끝없이 펼쳐진 계단을 오를 자신이 없어 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
궁전안의 광활한 숲. 삼림욕장이 따로 없다.
차가운 겨울 호수. 여름이었다면 더없이 상쾌하고 맑은 기분이었을텐데.
궁전에 붙은 예배당인 듯. 궁을 가로지르는 작은 호수가 이곳부터 시작되는 모양.
주욱 늘어선 저 기둥들에는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건들이 가로새겨져있을지도 모를 일.
공기가 맑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산소가 쌀쌀한 겨울바람과 함께 적당히 청량한 느낌을 준다.
그저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걷고 또 걷다보니 기분이 꽤나 좋아졌다.
이래서 이곳을 근심없는 곳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름과는 달리 한 가지 근심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화장실을 찾을수가 없다. --;;;;
사람도 얼마 없는터라 붙잡고 불어볼 이도 없고, 표지판도 쉽게 찾지 못하겠고.
어디 근처의 궁이라도 뛰어들어갈까 싶었는데, 원췌 정원이 큰 지라 궁까지의 거리 또한 만만치 않다.
어쩌란 말이냐. --;;;; 할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서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밖에.... --;;;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산책을 접고, 다시 숙소로 들어오는 길.
뭐라도 사먹을까 하다가, 주방도 있고하니, 직접 솜씨를 부려보기로 결심.
숙소 근처의 aldi에 들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할인 마트와 비슷한 식료품점인데 가격이 엄청나게 싼편.
한국보다야 싸겠느냐만 여기 현지 물가로 볼때 싸다는 이야기.
생각보다 물건의 질은 그렇게 좋지 않은 편이다.
(사실 aldi보다는 penny나 kaiser라는 슈퍼체인이 조금 물건 질이 나은 편.
로텐부르크에서는 penny에서 장을 보았고, 후에 kaiser에서도 이것 저것 사보았지만
역시 aldi보다는 좀 나았다. kaiser는 꽤나 깔끔하고 상품구색도 다양하다.)
공산품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니 이곳에서 사고, 야채나 과일은 근처의 작은 식료품점을 들렀다.
각 대륙에 따라서 인종이 차이나는 것처럼, 이곳의 식자재들도 굉장히 다르다.
요컨데, 양파는 우리네보다 한참이나 작고, 기름한 편인데,
파는 알로에나 샐러리로 착각할만큼 길고 굵다.
이것저것 한아름 사들고 들어오는길... 이번엔 제대로 찾았다.
문제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분명 가르쳐준대로 열심히 돌리고 또 돌리고...
풀었다가 다시 돌리기를 반복해도 역시나 굳게 잠긴문.
당황해서 로비로 뛰어내려갔지만 아무도 없고..... 대략 난감. 지대 절망.
위층에 뭔가 사람의 소리가 들리기에 이번엔 쪼르르 올라가보니,
웬 아주머니와 아들로 보이는 이가 귀가하는 길...
물론 그들은 호텔이 아니라 일반 가정집에 살고 있는듯했다.
난감한 표정으로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들에게 상황설명을 하니 선뜻 도와주겠단다.
문이 낡아서 종종 열리지 않는 경우가 있단다.
여튼 열쇠를 돌릴때, 조금 힘을 주어 밀어야 열린다며, 문을 열어주는 고마운 학생에게
거듭 고맙다 인사하니 대뜸 한다는 소리가!
"아리가또!" --; 나는 일본인이 아니란 말이다! 마음속으로 절규하고...
학생을 자세히 보니 독일인은 아니고 터키계 이주민인듯하다.
서구적인 이목구비이지만 조금 가무잡잡한 피부톤하며...
약간은 남루한 차림새지만 해맑은 미소의 소년을 보니 문득 기분이 묘해진다.
독일의 이민정책으로 많은 터키계사람들이 대도시에 살고 있다.
독일의 아니 유럽의 현지인들이 기피하는 궂은 일, 험한 일을 하며 타향살이를 하는
이들을 보는 현지인들의 시각이 예전과는 달리 곱지만은 않은듯.
이민자들이 경제적으로 위협적인 존재가 될리는 만무하다.
힘든일, 궂은일을 해도 보수가 그다지 높지도 않을 뿐더러
그나마 길에서 케밥집을 운영하는 터키인들은 굉장히 성공한 편이다.
실제로 이들을 보는 시선이 좋지않은 것은 유럽내 국가들이
이민족에 대해 보다 배타적인 성향이 있기도 하지만
아마도 현지문화에 융화되기 보다는 독특한 그들만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
꽤나 거슬리는 모양. 우선 종교부터 다르니까.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카톨릭이나 기독교나 유대교나 이슬람교나 불교나....
모두가 그냥 심드렁한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질 따름인데....
막상 종교를 가진 이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지난 인류사에 있었던 사상이나 종교로 인한 전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현재 지구 어딘가에서도 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물론 이민족에 대한 경계가 반드시 종교에서 비롯된다는 법은 없지만,
어디가나 타향살이는 쉽지 않을터.
여튼 오늘의 저 고마운 모자가 이곳에서 즐겁고 기쁘게 살기만을 바랄 따름.
그들의 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는 바가 부디 이루어지길.
이미 저녁시간이 지난터라 딴 생각할 겨를이 없다. 한참을 썰고, 끓이고, 굽고, 볶고...
한상 차리고 보니 혼자임이 문득 쓸쓸하게 느껴진다.
항상 궁금했고, 마침내 도착했지만, 떠나기도 전에 그리워지는
이 아방가르드한 도시 베를린을 위해 건배!
아주 조금씩도 살수 있어서 더없이 합리적이다.
오렌지에 비해 너무 작은 양파. 달걀보다도 작다니.... 한입에 쏙 들어가는 싸이즈.
단홀한 저녁식사. 눈치챘겠지만 저것은 스프가 아니라 죽. --;;;
치우고, 정리하고, 이런저런 일기도 쓰고. 시간은 잘도 간다.
아무리 쿠셋이라도 야간열차를 타고난 다음날은 역시 피곤하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긴장이 풀려서인지 눈꺼풀도 무겁고.
이 어엿한 아파트 한채를 독채로 쓰는 재미가 쏠쏠하긴하다.
내멋대로 휘젓고 다녀도 누구하나 뭐라할 사람없고.
여튼 베를린에서의 첫밤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가나보다.
이게 무언가 싶겠지만 보시다시피 변기.
아래쪽을 누르면 물이나오고, 위쪽을 누르면 나오던 물이 멈춘다.
저 버튼위에 그려진 의미심장한 돼지저금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기도.
정녕 물도 돈쓰듯하는 이들의 절약정신이 오늘날 독일을 선진국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
첫댓글 저도 저숙소에서 지내고 싶네요,, 근데 일정상 베를린은 못간다는..ㅡㅡ;; 아쉬워여,, 하루 렌트 하는데 얼마예요?? 유스보단 비쌀테고,,흠 40유로 정도 하나요?? 다음 일정이 궁금해지네요,, 기대할께요,,^^
제가 사이트에서 보니깐 40유로가지고는 택도 없네요. 들어가 보세요. http://www.propeller-island.de/
그러게요,, 95유로,,, 비싸다,, 긴여행중에 하루정도는 이런곳에서 지내는것도 좋을꺼 같네요,,, 베를린,, 넣을까 고민중,,,ㅋ
문슈 : 베를린 너무 좋은데, 서유럽 루트에 끼우기는 쉽지 않죠. 저 갔을때는 이벤트해서 할인 많이 받았어요. 저 때가 크리스마스 직전이었거든요. 게다가 2일은 저 혼자지내고 3일째는 친구들이 와서 나누니까 부담이 덜되더라구요. 거기다가 미리 예약하고 간거라서, 메일로 할인 부탁하니까 조금 더 할인해주더라구요.
그래도 비싼 편이었는데.... 하루에 65유로였거든요.... 거기다가 전체적으로 15유로 또 할인해서 하루에 60유로 정도? 일행이 있었으면 1인당 30유로 정도의 비용이 들었을텐데.... 성수기엔 에누리 없을거에요. 그래도 좋긴 좋았어요. 언제 또 저곳에 갈 수 있겠어요.... 뭐... 평생에 한번이 아닐까 해요.... ^^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베를린 왕 기대중인데. 저도 이 숙소에서 잤으면 좋겠네요.ㅠ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