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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2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인사회에서 만난 임종석 비서실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
청와대 비서실장과 재벌기업의 회장. 두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만났다. 이 자리에서 별 얘기가 오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과연 이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임종석 비서실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2월 초 비공개 회동을 가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크다. 임 실장이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하기 직전이다. 임 실장과 단독으로, 은밀하게 만난 재벌그룹 총수는 최태원 SK 회장이 유일하다. 그것도 이번 회동은 최태원 회장이 임 실장에게 먼저 ‘만나고 싶다’고 제안해 이뤄졌다.
최 회장의 행보가 뜬금없는 이유는 요사이 기업의 분위기와 사뭇 달라서다. 2016년 벌어진 최순실 사태 이후에 재벌그룹들은 정부 관계자들과 개별적으로 만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재벌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순실 사태 이후에 기업들이 정경 유착으로 오해를 받을까 봐 불필요한 의혹을 살 만한 자리에는 참석조차 안 한다. 정부에 의견을 전달해야 할 때에도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나 경영자총협회 등 협회를 통해서 한다”며 “개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면 경제라인인 장하성 정책실장이나 김현철 경제보좌관을 통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런데 최태원 회장은 협회를 통하지도, 청와대 경제라인을 접촉하지도 않고, 곧장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독대를 요구했다. 의혹을 살 만한 상황이다.
SK그룹은 이에 대해 펄쩍 뛰고 있다. SK그룹 관계자의 얘기다.
“저희도 전해 들은 얘기입니다. 논란이 커지자 임종석 실장이 비보도를 전제로 기자 간사단과 점심을 했다고 합니다. 임 실장이 이 자리에서 ‘최태원 회장이 먼저 보자고 했다. 중국은 반관반민(半官半民)으로 추진해야 하는 일이 많다. 전직 관료와 네트워킹을 맺으면 좋아서 이에 대해 MOU를 맺으려고 하는데, 정부가 도와달라 하더라’고 하더랍니다. 실제로 지난 12월 14일에 대한상의가 중국 관료들과 MOU를 체결했고요.”
― 그런 일이라면 장하성 실장에게 말을 하거나, 아니면 대한상의 차원에서 나섰으면 될 것을요.
“장하성 실장에게도 말을 했다고 합니다.”
― 항간에는 다급한 민원이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요.
“절대 아닙니다. 민원 요청은 절대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으나, 일부 그룹에서는 SK의 이런 행동에 대해 “독대를 좋아하는 것은 기업의 문화인 모양”이라는 시각이 많다.
“사면해 주신 하늘 같은 은혜 잊지 않겠다”
박근혜 정부 때 SK그룹은 이미 ‘대통령과의 독대’를 통해 자신들의 민원을 적극 간청해 왔었다.
2015년 7월, 수감 중이던 최태원 회장을 대신해 김창근 SK이노베이션 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따로 만났다. 그러고 한 달 뒤 최태원 회장은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김 회장은 최 회장의 사면 소식을 미리 전해 듣고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 수석에게 “사면시켜 주신 하늘 같은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김 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최 회장의 사면을 요청했다는 것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 회장이 출소한 지 6개월 정도 지난 2016년 2월 16일 오후 5시.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안가에 최태원 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박근혜 : 요즘 잘 지내시죠?
최태원 : 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저희 집이 편치 않습니다. 저는 (특별사면을 받아 교도소에서) 나왔는데 동생(최재원 부회장)이 아직 나오지 못해서 조카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중략)
안종범 : SK는 워커힐 면세점 사업을 지속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박근혜 : 면세점 선정에 절차상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도개선 방안을 마련 중입니다.
최태원 : 면세점 탈락 이후 직원들의 고용이 걱정입니다.
안종범 : SK의 또 다른 현안으로는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M&A도 있습니다.
최태원 : 신속하게 결론을 내주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근혜 : 알겠습니다.
1980년대 최대 이권 사업인 ‘유공’을 삼성 제치고 인수
SK그룹이 권력자들에게 줄을 대 여러 민원을 해결해 온 것은 처음이 아니다.
그룹의 출발은 최태원 회장의 큰 아버지인 고(故) 최종건 창업주가 1953년에 선경 직물주식회사를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순수 민간기업을 창설한 데서 비롯했다. 고 최종건 창업주가 작고하면서 동생인 고 최종현 회장이 1973년부터 경영을 맡았고, 선경 직물주식회사는 선경화학섬유를 합병하고 상호를 주식회사 선경으로 변경했다. 선경그룹(SK그룹의 전신)은 1970년대 중반까지 건실한 중견 섬유업체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최종현 회장은 선경화학(1976년), 선경건설(1977년)을 잇따라 설립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워가게 된다.
이러던 와중에 재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국내 최대 정유회사인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선경그룹이 인수한 것이다. 유공은 미국의 걸프사(社)가 지분 50%를 갖고 있었는데, 돌연 미국 회사가 유공에서 손을 떼기로 한다. 걸프사는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로 국내의 정치가 불안한 점, 또 오일 파동의 여파로 인해 하루아침에 철수를 선언했다. 자연스럽게 유공의 민영화가 논의됐다. 1980년대 중반이었는데, 당시 업계에서는 ‘기름이 재계의 새로운 강자를 낳을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유공 인수전은 5공 정부의 최대 이권 사업이었다. 삼성이 오랫동안 기름 사업에 눈독을 들여왔고, 다른 그룹도 호시탐탐 이 사업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1980년 11월 28일, 박봉환 당시 동력자원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유공의 인수자로 선경그룹을 선정한다. 선경은 상당량의 원유를 유공에 공급하고 있고, 앞으로 원유를 추가 확보할 능력이 충분하다. 산유국과 친분이 두터워 오일머니를 유치할 능력도 있다고 평가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재계는 경악했다. 당시 선경은 10대 재벌그룹 반열에도 끼지 못하는 중견기업인데 ‘새우’가 연 매출 1조원이 넘는 ‘고래’를 삼킨 격이어서다. 선경은 유공을 인수해 단숨에 재계 서열 5위의 그룹으로 뛰어올랐다.
“사우디에서 기름 가져올 수 있습니다”(최종현, 5공 실세 설득)
삼성이 인수하기로 했던 유공을 선경그룹으로 돌린 것은 최종현 회장의 권력자와의 독대 덕분이었다. 1980년의 어느 날, 최종현 회장은 손길승씨를 통해 수도방위사령부 정보참모인 안병호 장군(나중에 수도방위사령관 역임)을 접촉했다. 안병호 장군은 과거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최종현 회장과 알지 못했다. 손길승을 통해 요청이 왔는데 ‘왜 봐야 하느냐’고 했더니 ‘설명할 일이 있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뭐 굳이 만나야 할까 싶었는데, 간곡하게 할 말이 있다기에 만났습니다.”
― 최종현 회장이 나왔습니까.
“네. 순박하고 리버럴합디다. 최종현씨가 사우디에서 기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삼성은 멕시코와 콜롬비아에서 기름을 가져온다고 했었지요. 사실 사우디에서 우리한테 안정적으로 원유를 주겠다고만 하면 사우디가 훨씬 좋은 상대국이었습니다. 안 줄 것 같아서 문제였지. 그런데 최종현씨는 이미 그 얘기(안정적 공급)는 끝났고, 자신이 있다는 겁니다.”
― 삼성이 사우디와 선이 닿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일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나중에 보니 최종현씨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사우디 왕족 중 한 명이랑 공부를 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그때부터 쌓은 친분으로 오일 파동이 났을 때에도 사우디에서 받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때는 사우디 국왕이 자기 마음대로 다른 나라에 기름을 주고 말고를 결정하던 때였거든요.”
안병호 장군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최종현 회장의 말의 신빙성을 확인했고, 어느 정도 판단이 섰다고 한다.
1980년 8월 초, 종로구 소격동 국군보안사령부 회의실에서 안병호 장군이 말을 꺼냈다. 참석자는 전두환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허화평 국보위 상임위원장 비서실장, 허삼수·정도영·권정달 보안사 처장 등이었다. 안 장군은 “삼성이 유공(대한석유공사)을 가져가면 안 되지 싶습니다. 선경은 사우디에서, 삼성은 멕시코에서 기름을 받을 예정이랍니다. 최종현씨 얘기를 들어보니까, 사우디는 우리한테 안정적으로 기름을 준다고 약속을 했답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참석자 중에 안 장군의 얘기를 거드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뒤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안병호 말이 맞네. 장관 불러서 선경에 주라고 해”라고 말했다. 이렇게 ‘유공’의 쟁탈전은 싱겁게 끝났다. 최종현 회장의 말, 그리고 군부에 줄을 댄 손길승 회장의 공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인수 자금 없이 유공을 품에 안았다. 그러고 사우디 친구들이 운영하던 아랍계 은행으로부터 1억 달러를 빌려 유공 대금을 갚았다. 이것이 지금의 SK에너지다. SK에너지는 2015년 총 27조8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최종현 회장은 유공을 각별히 챙겼다. 그는 그룹의 모태와 주력인 ㈜선경과 선경인더스트리, 유공의 회장직을 겸했다.
제2 이동통신 사업권 때, 대통령 사돈기업 특혜설 나돌아
선경그룹은 유공 인수를 통해 섬유, 종합에너지, 화학 분야의 종합산업 그룹으로 발돋움했다. 미국 유학파 출신인 고 최종현 회장은 미국 현지를 방문하는 일이 잦았다. 1986년에는 아예 미주경영기획실을 설치하고, 매년 4월에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선경의 미주경영기획실은 선경그룹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위한 일종의 산실 격으로 취급을 받았다. 1989년에 정보통신 관련 기술을 조사하고 용역을 제공하기 위해 유크로닉사를 설립해 국내 이동통신사업 추진의 교두보 역할을 한 것도 이들이다. 이즈음 고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 회장이 1988년 9월, 노태우 대통령의 맏딸 노소영씨와 결혼해 선경그룹은 최고위층과의 사돈이라는 특수 신분까지 갖게 됐다.
6공이 무르익던 1992년 7월 29일. 체신부가 통신위원회를 열고 선경, 코오롱, 포철을 제2 이동통신 사업의 2차 심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당시 제2 이동통신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면서 재벌그룹들이 눈독을 들여왔다. 이동통신 사업은 선경의 몫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대통령의 사돈이라는 특혜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고 최종현 회장은 1992년 《매일경제》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최 회장의 얘기다.
“정보통신 사업을 생각한 것은 그동안 선경이 추구해 온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 계열화 작업 완성이 가시화될 즈음이었다. 기존 업체들이 진출한 업종(자동차, 은행, 전자 등을 지칭)은 국가적인 낭비만 초래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보통신 사업은 나이도 없고, 국가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선정했다.”
― 선경의 제2 이동통신 참여가 특혜가 아니냐는 시각이 있는데.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80년대 유공만 해도 73년부터 수직 계열화를 염두에 두고 꾸준히 원유 도입 등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생각한 끝에 성사된 것이다. 정부도 힘들었던 1억 달러는 회사의 힘으로 끌어온 것이 아니냐….”
선경그룹은 1992년 8월 21일, 항간의 예상대로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냈다. 그룹 관계자들은 “현 대통령과의 특수 관계 때문에 오히려 ‘선경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며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로써 선경그룹은 제5공화국 때 유공을, 제6공화국 때는 제2 이동통신 사업을 따냄으로써 서슬이 퍼렇던 군부 정권에서 가장 실속을 챙긴 재벌로 평가받았다. 기름과 통신의 두 축은 오늘날 SK그룹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다. 선경그룹은 1998년 1월 SK그룹으로 사명을 바꿨다. 그리고 그해 8월, 최종현 회장이 세상을 타계하고 최태원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광복절 특사’ 받자마자 한 일이 불륜 고백
최태원 회장이 SK그룹의 수장으로 취임하고 SK그룹은 안팎으로 시련이 많았다. 2003년 4월에는 헤지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이 경영권 퇴진 등을 요구하면서 최씨 일가에 대한 경영권이 흔들렸다. 소버린은 SK㈜의 지분 14.99%를 확보해 2대 주주로 앉은 후 현 경영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SK와 소버린의 경영권 분쟁이 지루하게 이어질 즈음, 최태원 회장은 2003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소버린과 SK의 다툼은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며 계속됐지만, 결국 2005년 3월 주주총회 표 대결에서 소버린이 완패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당시 주총에서 최태원 회장의 이사 선임안에 대해 60% 이상이 찬성표를 던졌다. 소버린 사태로 인해 화들짝 놀란 SK그룹은 2007년에 지주회사 체제를 도입했다. SK㈜에서 에너지 분야를 떼어내 SK에너지를 만들고, 기존의 SK㈜는 그룹 지주회사로 역할을 바꿨다.
최태원 회장의 업적 중에서 현재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것은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한 것이다. SK그룹은 2011년 하이닉스를 인수해 그룹의 사업영역을 정유와 통신에서 반도체로 확장했다. 그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내수 재벌기업’이라는 이미지를 털어 버리는 데 일조를 했다. 2012년 3월에 SK하이닉스로 새롭게 출범한 회사는 오늘날 SK그룹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2017년도 매출(가트너 집계)은 28조원으로 전년보다 79% 증가했다.
2013년 1월, 최태원 회장은 SK 계열사 자금 465억원을 국외에서 불법적으로 쓴 횡령 혐의로 징역 4년 유죄 판결을 받고 법정 구속이 됐다. 재계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내막이 알려지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최태원 회장이 무속인 출신의 증권맨 김원홍씨에게 속아서 회삿돈으로 선물 투자를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주가를 잘 맞혀 ‘부채도사’라고 불렸던 김씨에게 홀딱 빠진 최 회장은 그를 SK해운 고문으로 앉히고, 수천억 원을 맡겨 선물과 옵션에 투자했다. 사건이 터지고 김씨는 해외로 도주했다가 국내로 송환됐고, 뒤늦게나마 최 회장은 속았다고 주장을 했다.
그룹의 총수가 법정에서 구속되자, SK그룹은 전문경영인인 김창근 SK이노베이션 회장,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SK그룹 수석 부회장 비상체제로 그룹을 이끌어갔다. 김 회장이 박근혜 대통령을 독대했을 때는 2015년 7월로, 최태원 회장이 구속된 지 2년이 넘어서다. 그는 이 자리에서 최 회장에 대한 민원을 건의했고, 최 회장은 다음달에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전문경영인이 대통령과 독대까지 해가며 특사를 받아 낸 오너 경영인의 이후 행보는 충격적이었다. 최태원 회장은 감옥에서 나온 지 넉 달 만에 《세계일보》를 통해 자신의 불륜 사실을 스스로 공개했다.
〈기업인 최태원이 아니라 자연인 최태원이 부끄러운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항간의 소문대로 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성격 차이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한 저의 부족함 때문에, 저와 노소영 관장은 십 년이 넘게 깊은 골을 사이에 두고 지내왔습니다.(중략) 우연히 마음의 위로가 되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수년 전 여름에 저와 그분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동안 이런 사실을 세상에 숨겨왔습니다. 적어도 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와 아이 엄마를 책임지려고 합니다. 가정사로 실망을 드렸지만, 경제를 살리라는 의미로 최근 제 사면을 이해해 주신 많은 분께 다른 면으로는 실망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최태원 회장은 개인사와 기업인으로 자신의 처지를 분류해 편지를 공개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최 회장이 편지를 공개하기 전 25만4500원(2015년 12월 28일)이었던 SK의 주가는 편지 공개 후 25만500원(12월 29일)으로 떨어졌다. SK텔레콤의 주가는 하루 만에 23만원에서 21만5000원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는 1964.06에서 1966.31로 반등을 했지만, SK 관련주들은 일제히 하향세로 돌아선 것이다. 당시 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 관계자는 “CEO 리스크에는 오너 경영진의 개인 비리나 신변 문제, 경영승계 등 많은 것을 포함한다. 언론사를 통한 불륜 고백을 단순 개인의 문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최고 권력자의 인근을 맴돌았던 SK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임종석 비서실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 12월 초 비공개 회동을 가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크다. 임 실장이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하기 직전이다. 임 실장과 단독으로, 은밀하게 만난 재벌그룹 총수는 최태원 SK 회장이 유일하다. 그것도 이번 회동은 최태원 회장이 임 실장에게 먼저 ‘만나고 싶다’고 제안해 이뤄졌다.
최 회장의 행보가 뜬금없는 이유는 요사이 기업의 분위기와 사뭇 달라서다. 2016년 벌어진 최순실 사태 이후에 재벌그룹들은 정부 관계자들과 개별적으로 만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재벌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순실 사태 이후에 기업들이 정경 유착으로 오해를 받을까 봐 불필요한 의혹을 살 만한 자리에는 참석조차 안 한다. 정부에 의견을 전달해야 할 때에도 대한상공회의소(이하 대한상의)나 경영자총협회 등 협회를 통해서 한다”며 “개별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면 경제라인인 장하성 정책실장이나 김현철 경제보좌관을 통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런데 최태원 회장은 협회를 통하지도, 청와대 경제라인을 접촉하지도 않고, 곧장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독대를 요구했다. 의혹을 살 만한 상황이다.
SK그룹은 이에 대해 펄쩍 뛰고 있다. SK그룹 관계자의 얘기다.
“저희도 전해 들은 얘기입니다. 논란이 커지자 임종석 실장이 비보도를 전제로 기자 간사단과 점심을 했다고 합니다. 임 실장이 이 자리에서 ‘최태원 회장이 먼저 보자고 했다. 중국은 반관반민(半官半民)으로 추진해야 하는 일이 많다. 전직 관료와 네트워킹을 맺으면 좋아서 이에 대해 MOU를 맺으려고 하는데, 정부가 도와달라 하더라’고 하더랍니다. 실제로 지난 12월 14일에 대한상의가 중국 관료들과 MOU를 체결했고요.”
― 그런 일이라면 장하성 실장에게 말을 하거나, 아니면 대한상의 차원에서 나섰으면 될 것을요.
“장하성 실장에게도 말을 했다고 합니다.”
― 항간에는 다급한 민원이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요.
“절대 아닙니다. 민원 요청은 절대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으나, 일부 그룹에서는 SK의 이런 행동에 대해 “독대를 좋아하는 것은 기업의 문화인 모양”이라는 시각이 많다.
“사면해 주신 하늘 같은 은혜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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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근 회장(오른쪽)은 박근혜 대통령을 독대해 최태원 회장의 사면을 건의했다. |
2015년 7월, 수감 중이던 최태원 회장을 대신해 김창근 SK이노베이션 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따로 만났다. 그러고 한 달 뒤 최태원 회장은 ‘광복절 특사’로 석방됐다. 김 회장은 최 회장의 사면 소식을 미리 전해 듣고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 수석에게 “사면시켜 주신 하늘 같은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김 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최 회장의 사면을 요청했다는 것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 회장이 출소한 지 6개월 정도 지난 2016년 2월 16일 오후 5시.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안가에 최태원 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박근혜 : 요즘 잘 지내시죠?
최태원 : 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저희 집이 편치 않습니다. 저는 (특별사면을 받아 교도소에서) 나왔는데 동생(최재원 부회장)이 아직 나오지 못해서 조카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중략)
안종범 : SK는 워커힐 면세점 사업을 지속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박근혜 : 면세점 선정에 절차상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도개선 방안을 마련 중입니다.
최태원 : 면세점 탈락 이후 직원들의 고용이 걱정입니다.
안종범 : SK의 또 다른 현안으로는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M&A도 있습니다.
최태원 : 신속하게 결론을 내주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근혜 : 알겠습니다.
1980년대 최대 이권 사업인 ‘유공’을 삼성 제치고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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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시절에 정부로부터 받았던 유공은 SK에너지로 사명을 바꿨다. |
그룹의 출발은 최태원 회장의 큰 아버지인 고(故) 최종건 창업주가 1953년에 선경 직물주식회사를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순수 민간기업을 창설한 데서 비롯했다. 고 최종건 창업주가 작고하면서 동생인 고 최종현 회장이 1973년부터 경영을 맡았고, 선경 직물주식회사는 선경화학섬유를 합병하고 상호를 주식회사 선경으로 변경했다. 선경그룹(SK그룹의 전신)은 1970년대 중반까지 건실한 중견 섬유업체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최종현 회장은 선경화학(1976년), 선경건설(1977년)을 잇따라 설립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워가게 된다.
이러던 와중에 재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국내 최대 정유회사인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선경그룹이 인수한 것이다. 유공은 미국의 걸프사(社)가 지분 50%를 갖고 있었는데, 돌연 미국 회사가 유공에서 손을 떼기로 한다. 걸프사는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로 국내의 정치가 불안한 점, 또 오일 파동의 여파로 인해 하루아침에 철수를 선언했다. 자연스럽게 유공의 민영화가 논의됐다. 1980년대 중반이었는데, 당시 업계에서는 ‘기름이 재계의 새로운 강자를 낳을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유공 인수전은 5공 정부의 최대 이권 사업이었다. 삼성이 오랫동안 기름 사업에 눈독을 들여왔고, 다른 그룹도 호시탐탐 이 사업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1980년 11월 28일, 박봉환 당시 동력자원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유공의 인수자로 선경그룹을 선정한다. 선경은 상당량의 원유를 유공에 공급하고 있고, 앞으로 원유를 추가 확보할 능력이 충분하다. 산유국과 친분이 두터워 오일머니를 유치할 능력도 있다고 평가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재계는 경악했다. 당시 선경은 10대 재벌그룹 반열에도 끼지 못하는 중견기업인데 ‘새우’가 연 매출 1조원이 넘는 ‘고래’를 삼킨 격이어서다. 선경은 유공을 인수해 단숨에 재계 서열 5위의 그룹으로 뛰어올랐다.
“사우디에서 기름 가져올 수 있습니다”(최종현, 5공 실세 설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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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에너지의 브라질BMC-8 해상광구. 사진=SK에너지 제공 |
“뭐 굳이 만나야 할까 싶었는데, 간곡하게 할 말이 있다기에 만났습니다.”
― 최종현 회장이 나왔습니까.
“네. 순박하고 리버럴합디다. 최종현씨가 사우디에서 기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삼성은 멕시코와 콜롬비아에서 기름을 가져온다고 했었지요. 사실 사우디에서 우리한테 안정적으로 원유를 주겠다고만 하면 사우디가 훨씬 좋은 상대국이었습니다. 안 줄 것 같아서 문제였지. 그런데 최종현씨는 이미 그 얘기(안정적 공급)는 끝났고, 자신이 있다는 겁니다.”
― 삼성이 사우디와 선이 닿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일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나중에 보니 최종현씨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사우디 왕족 중 한 명이랑 공부를 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그때부터 쌓은 친분으로 오일 파동이 났을 때에도 사우디에서 받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때는 사우디 국왕이 자기 마음대로 다른 나라에 기름을 주고 말고를 결정하던 때였거든요.”
안병호 장군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최종현 회장의 말의 신빙성을 확인했고, 어느 정도 판단이 섰다고 한다.
1980년 8월 초, 종로구 소격동 국군보안사령부 회의실에서 안병호 장군이 말을 꺼냈다. 참석자는 전두환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허화평 국보위 상임위원장 비서실장, 허삼수·정도영·권정달 보안사 처장 등이었다. 안 장군은 “삼성이 유공(대한석유공사)을 가져가면 안 되지 싶습니다. 선경은 사우디에서, 삼성은 멕시코에서 기름을 받을 예정이랍니다. 최종현씨 얘기를 들어보니까, 사우디는 우리한테 안정적으로 기름을 준다고 약속을 했답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참석자 중에 안 장군의 얘기를 거드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뒤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안병호 말이 맞네. 장관 불러서 선경에 주라고 해”라고 말했다. 이렇게 ‘유공’의 쟁탈전은 싱겁게 끝났다. 최종현 회장의 말, 그리고 군부에 줄을 댄 손길승 회장의 공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인수 자금 없이 유공을 품에 안았다. 그러고 사우디 친구들이 운영하던 아랍계 은행으로부터 1억 달러를 빌려 유공 대금을 갚았다. 이것이 지금의 SK에너지다. SK에너지는 2015년 총 27조8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최종현 회장은 유공을 각별히 챙겼다. 그는 그룹의 모태와 주력인 ㈜선경과 선경인더스트리, 유공의 회장직을 겸했다.
제2 이동통신 사업권 때, 대통령 사돈기업 특혜설 나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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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텔레콤의 ‘이상한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를 캐치플레이즈로 내건 ‘이상하자’ 광고 시리즈. |
6공이 무르익던 1992년 7월 29일. 체신부가 통신위원회를 열고 선경, 코오롱, 포철을 제2 이동통신 사업의 2차 심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당시 제2 이동통신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면서 재벌그룹들이 눈독을 들여왔다. 이동통신 사업은 선경의 몫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대통령의 사돈이라는 특혜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고 최종현 회장은 1992년 《매일경제》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최 회장의 얘기다.
“정보통신 사업을 생각한 것은 그동안 선경이 추구해 온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 계열화 작업 완성이 가시화될 즈음이었다. 기존 업체들이 진출한 업종(자동차, 은행, 전자 등을 지칭)은 국가적인 낭비만 초래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보통신 사업은 나이도 없고, 국가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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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 회장을 3번 역임한 고 최종현 회장은 미국 유학파 출신으로 매년 4월, 미국에서 경영 구상을 했다. |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80년대 유공만 해도 73년부터 수직 계열화를 염두에 두고 꾸준히 원유 도입 등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을 생각한 끝에 성사된 것이다. 정부도 힘들었던 1억 달러는 회사의 힘으로 끌어온 것이 아니냐….”
선경그룹은 1992년 8월 21일, 항간의 예상대로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냈다. 그룹 관계자들은 “현 대통령과의 특수 관계 때문에 오히려 ‘선경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며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로써 선경그룹은 제5공화국 때 유공을, 제6공화국 때는 제2 이동통신 사업을 따냄으로써 서슬이 퍼렇던 군부 정권에서 가장 실속을 챙긴 재벌로 평가받았다. 기름과 통신의 두 축은 오늘날 SK그룹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다. 선경그룹은 1998년 1월 SK그룹으로 사명을 바꿨다. 그리고 그해 8월, 최종현 회장이 세상을 타계하고 최태원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광복절 특사’ 받자마자 한 일이 불륜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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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들어서고 있는 최태원 회장. |
최태원 회장의 업적 중에서 현재 가장 높이 평가받는 것은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한 것이다. SK그룹은 2011년 하이닉스를 인수해 그룹의 사업영역을 정유와 통신에서 반도체로 확장했다. 그동안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내수 재벌기업’이라는 이미지를 털어 버리는 데 일조를 했다. 2012년 3월에 SK하이닉스로 새롭게 출범한 회사는 오늘날 SK그룹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2017년도 매출(가트너 집계)은 28조원으로 전년보다 79%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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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8월 30일,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 내 제이드가든에서 거행된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의 영결식. 최태원·노소영 부부의 사이는 사실상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
그룹의 총수가 법정에서 구속되자, SK그룹은 전문경영인인 김창근 SK이노베이션 회장,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SK그룹 수석 부회장 비상체제로 그룹을 이끌어갔다. 김 회장이 박근혜 대통령을 독대했을 때는 2015년 7월로, 최태원 회장이 구속된 지 2년이 넘어서다. 그는 이 자리에서 최 회장에 대한 민원을 건의했고, 최 회장은 다음달에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전문경영인이 대통령과 독대까지 해가며 특사를 받아 낸 오너 경영인의 이후 행보는 충격적이었다. 최태원 회장은 감옥에서 나온 지 넉 달 만에 《세계일보》를 통해 자신의 불륜 사실을 스스로 공개했다.
〈기업인 최태원이 아니라 자연인 최태원이 부끄러운 고백을 하려고 합니다. 항간의 소문대로 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성격 차이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한 저의 부족함 때문에, 저와 노소영 관장은 십 년이 넘게 깊은 골을 사이에 두고 지내왔습니다.(중략) 우연히 마음의 위로가 되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수년 전 여름에 저와 그분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동안 이런 사실을 세상에 숨겨왔습니다. 적어도 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와 아이 엄마를 책임지려고 합니다. 가정사로 실망을 드렸지만, 경제를 살리라는 의미로 최근 제 사면을 이해해 주신 많은 분께 다른 면으로는 실망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최태원 회장은 개인사와 기업인으로 자신의 처지를 분류해 편지를 공개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최 회장이 편지를 공개하기 전 25만4500원(2015년 12월 28일)이었던 SK의 주가는 편지 공개 후 25만500원(12월 29일)으로 떨어졌다. SK텔레콤의 주가는 하루 만에 23만원에서 21만5000원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는 1964.06에서 1966.31로 반등을 했지만, SK 관련주들은 일제히 하향세로 돌아선 것이다. 당시 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 관계자는 “CEO 리스크에는 오너 경영진의 개인 비리나 신변 문제, 경영승계 등 많은 것을 포함한다. 언론사를 통한 불륜 고백을 단순 개인의 문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최고 권력자의 인근을 맴돌았던 SK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