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이 왜(倭) 남제왕(男弟王)을 위하여 만든 청동 거울에 있는 기록에 대한 해석: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이 기원 후 약 503년 계미년에 궁전에 있는 대왕(大王) 남제왕(男弟王)을 오래도록 섬길 것을 생각하며 만든 청동 거울이다라는 뜻으로 해석됨.
(일본 서기에는 남제왕(男弟王)이 기원 후 약 507년에 왕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 같으나, 청동 거울 기록에 따르면 남제왕(男弟王)은 기원 후 약 503년 계미년에 이미 왕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청동 거울에는 야마토계 왕복을 입은 대왕을 섬기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는 것 같음)
기원 후 약 503년 왜국(倭國)의 국제적 지위: 기원 후 약 502년에 양나라 무제가 왜왕(倭王) 무(武)를 진동대장군에서 정동대장군으로 승격함. 정동대장군은 기원 후 약 502년 백제왕(百濟王)의 국제적 지위로 추정되는 진동대장군보다 높은 지위로 생각됨.
곤지왕, 무녕왕(武寧王) story는 한일 학계 논쟁의 중심에 있음.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 서기에 곤지왕이 일본에 간 이유가 천황을 섬기기 위해서라 기록되어 있으니 무녕왕이 왜(倭) 남제왕(男弟王) 오래도록 섬기기 위해서 청동 거울을 만들었다는 해석도 논리적으로 이해된다는 의견이 있는 것 같음.
하지만, 중국 문헌에 기록된 왜왕의 이름들은 일본 서기에 기록된 천황의 이름들과 다른 경우가 많아서 일본 서기의 논리는 비판적 검증이 필요한 경우가 있음.
중국 문헌에 기록된 왜왕(倭王) 제(濟), 흥(興), 무(武)라는 이름들은 일본 서기에서 정확히 연대나 정황이 대응되는 왜왕(倭王)의 이름들을 찾기가 쉽지 않음.
(왜왕(倭王) 제(濟), 흥(興), 무(武)라는 이름들이 기록된 중국 문헌은 국서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아 왜왕(倭王) 제(濟), 흥(興), 무(武)가 재위 하였던 때에 기록된 기록인 반면에, 일본 서기는 왜왕(倭王) 제(濟), 흥(興), 무(武)가 재위 하였던 때로부터 약 몇 백년 이후에 쓰여진 문헌인 것 같음.
일본 서기에 있는 천황이란 용어는 기원 후 약 7세기 이후에서야 처음으로 일본에서 활용되었으며, 칠지도나 기원 후 약 503년 계미년에 무녕왕(武寧王)이 만든 청동 거울에도 천황이란 용어는 기록되어 있지 않음.)
특히, 중국 문헌에 있는 기원 후 약 462년, 약 477년, 약 502년 왜왕(倭王) 관련 기록은 백제(百濟)계 왕들의 행적과 놀랍도록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 기원 후 약 503년에 백제 무녕왕(武寧王)이 왜(倭) 남제왕(男弟王)을 위하여 만든 청동 거울에 있는 기록은 새로운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됨.
<기원 후 약 458년: 곤지는 좌현왕 지위를 받다>
개로왕, 문주왕, 곤지왕은 형제이다.(개로왕, 문주왕, 곤지왕 순서로 나이가 많은 것 같음.)
개로왕의 적극적인 역할로 곤지는 좌현왕 지위를 받는다.
무녕왕(武寧王)과 동성왕이 형제라는 의견을 학계에 처음으로 낸 분께서 쓰신 책을 읽어본 결과, 곤지가 기원 후 약 458년에 받은 좌현왕이란 지위는 한반도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왼쪽에 있는 일본에서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받은 지위로 추정 가능함.
<기원 후 약 461년: 곤지는 왜국(倭國)으로 가다>
일본 서기 기록 1: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는 개로왕의 아내와 함께 왜국(倭國)으로 이동하다가 기원 후 약 461년 한반도~일본 큐슈 중간에 있는 가카라시마(가당도)에서 개로왕의 아내가 무녕왕(武寧王)을 낳음. 무녕왕(武寧王)의 아버지는 개로왕임. 곤지는 왜국(倭國)에 정착하여 생활하지만 기원 후 약 461년에 무녕왕(武寧王)은 가카라시마(가당도)에서 백제로 오게 됨.
일본 서기 기록 2: 무녕왕(武寧王)의 아버지는 곤지왕이며, 무녕왕(武寧王)과 동성왕은 이복 형제로서 무녕왕(武寧王)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음.
<기원 후 약 462년: 흥(興)은 왜왕(倭王)이 되다. 기비씨 관련 세력 이야기가 기록에 있다>
왜왕(倭王) 흥(興) 이전의 왕은 왜왕(倭王) 제(濟)이며, 기원 후 약 462년에 흥(興)은 왜왕(倭王)이 된 것으로 추정됨.
기원 후 약 462년 왜왕(倭王) 흥(興)은 안동장군 왜국왕(倭國王)이란 지위를 받음.
기원 후 약 462년에는 기비씨 관련 세력이 新羅와 협력하여 야마토 관련 세력과 전쟁을 했는데, 야마토 관련 세력의 공격에 의해 혼슈 지방에서 기비씨 관련 세력이 약해졌다(新羅는 야마토 관련 세력의 공격을 방어해 냄)는 기록이 있는 것 같음.
◎ 쟁점: 왜왕(倭王) 흥(興)은 곤지왕 또는 곤지왕과 관련된 인물인가.
왜왕(倭王) 흥(興)의 재위 기간은 기원 후 약 462년~기원 후 약 477년으로 추정되는데, 곤지는 기원 후 약 461년에 왜국(倭國)으로 가서 기원 후 약 477년에 백제로 옴.
기록에 나타난 정황으로 보아 왜왕(倭王) 흥(興)은 곤지왕이거나 곤지왕과 관련된 인물일 확률이 높음.
곤지왕 또는 곤지왕과 관련이 인물이 기원 후 약 462년 왜왕(倭王) 흥(興)이 되어 왜국(倭國)에 있던 가야계 왜왕(倭王)과 협력하여 기비씨 관련 세력에 대항하면서 왜국(倭國)에서 권력을 얻게 되었을 확률이 있음.
<기원 후 약 477년: 곤지는 문주왕을 만나러 백제로 이동함. 왜국(倭國)에서는 무(武)가 왜왕(倭王)이 됨.>
기원 후 약 475년 高句麗의 한성 백제(百濟) 공격.
백제(百濟)는 기원 후 약 475년 도읍을 한성에서 공주로 이전함. 개로왕을 이어 문주왕이 백제(百濟) 왕이 됨.
문주왕을 만나기 위해 기원 후 약 477년 곤지왕이 왜국(倭國)에서 백제(百濟)로 옴.
기원 후 약 477년 백제(百濟)에서는 문주왕을 중심으로 해씨 관련 세력, 곤지 관련 세력 등의 치열한 권력 경쟁이 있었음.
기원 후 약 477년 왜국(倭國)에서는 왜왕(倭王) 흥(興)의 다음 왕으로서 무(武)가 왜왕(倭王)이 됨.
(왜왕(倭王) 흥(興)과 무(武)의 아버지가 왜왕(倭王) 제(濟)이며, 왜왕(倭王) 흥(興)의 동생이 왜왕(倭王) 무(武)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비판적 검증이 필요한 것 같음.
왜왕(倭王) 제(濟)의 이름과 백제(百濟)의 나라 이름에서 ‘濟’라는 동일한 용어가 활용된 점이 특별하게 생각됨.)
<기원 후 약 478년: 왜왕(倭王) 무(武)는 안동대장군 왜왕(倭王)이라는 지위를 받음>
기원 후 약 478년 왜왕(倭王) 무(武)가 요청한 안동대장군 관직 중에서 왜(倭), 新羅, 임나, 가라, 진한, 모한은 포함되었으나 백제(百濟)가 빠진 것은 기원 후 약 425년 백제(百濟)가 진동대장군 백제왕(百濟王)이란 지위를 받았기 때문임.
따라서, 기원 후 약 478년에는 백제왕(百濟王)의 국제적 지위가 왜왕(倭王) 무(武)의 국제적 지위보다 높았던 것으로 생각됨.
<기원 후 약 479년: 동성왕이 백제왕(百濟王)이 되다. 왜왕(倭王) 무(武)는 진동대장군으로 승격됨>
기원 후 약 479년 백제(百濟) 왕위가 공석이 되었을 때, 왜국(倭國)에서 백제(百濟)로 온 동성왕이 백제왕(百濟王)이 됨. 동성왕의 아버지는 곤지왕.
기원 후 약 479년에는 왜왕(倭王) 무(武)는 진동대장군으로 승격되면서 백제왕(百濟王)과 왜왕(倭王) 무(武)의 국제적 지위가 동일하게 된 것 같음.
일본 서기에 기원 후 약 479년 천황이 동성왕에게 백제(百濟)로 가서 백제왕(百濟王)이 되라 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은데, 왜왕(倭王) 무(武)가 기원 후 약 479년 진동대장군의 지위를 받아 동성왕이 백제왕(百濟王)이 되도록 도왔던 것 같음.
<기원 후 약 501년: 동성왕과 백가 관련 세력과의 갈등 과정에서 백제(百濟) 왕위가 공석이 됨.>
<기원 후 약 502년: 백제(百濟)에서는 백가의 난이 제압됨. 왜왕(倭王) 무(武)는 정동대장군으로 승격됨>
기원 후 약 502년 왜왕(倭王) 무(武)의 이름이 중국 문헌에 기록된 이후에는 중국 문헌에 왜왕(倭王) 무(武)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음.
백제 무녕왕(武寧王)이 왜(倭) 남제왕(男弟王)을 위하여 만든 청동 거울에 있는 기록 해석에 따르면 기원 후 약 503년 계미년에는 남제왕(男弟王)이 왜왕(倭王)이었음.
남제왕(男弟王)은 기원 후 약 502년에 왜왕(倭王)이 되었을 확률도 있음.
기원 후 약 502년 정동대장군으로 승격된 왜왕(倭王) 무(武)는 어디로 간 것일까.
◎ 쟁점: 무녕왕(武寧王)이 백제왕(百濟王)이 된 때는 기원 후 약 501년 음력 12월인가, 기원 후 약 502년인가.
동성왕 다음 왕으로 무녕왕(武寧王)이 바로 백제왕(百濟王)이 되었다면 기원 후 약 501년 음력 12월에 무녕왕(武寧王)은 백제왕(百濟王)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녕왕(武寧王)이 백가의 난을 제압하면서 나타났다면 무녕왕(武寧王)은 기원 후 약 502년에 백제왕(百濟王)이 되었을 것이다.
◎ 쟁점: 무녕왕(武寧王)은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다가 백제왕(百濟王)이 되었던 것일까?
무녕왕(武寧王)이 백제왕(百濟王)이 되기 이전에는 기원 후 약 461년 가카라시마(가당도)에서 백제(百濟)로 보내어졌다는 기록만 나타날 뿐인 것 같다.
무녕왕(武寧王)은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다가 강력한 군대를 갖추어 백가 관련 세력을 제압하게 되었던 것일까.
백가 관련 세력은 왜 동성왕과 갈등이 있었던 것일까.
곤지왕이 왜국(倭國)에 있을 때에 동성왕을 낳았는데, 동성왕의 아버지는 곤지왕이지만 어머니는 백제(百濟)계가 아니라 왜국(倭國)에 있던 가야계라는 의견이 있다.
그래서, 백가 관련 세력은 동성왕을 견제했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 후 약 461년 곤지가 왜국(倭國)으로 가던 중에 가카라시마(가당도)에서 개로왕의 아내가 무녕왕(武寧王)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무녕왕(武寧王)의 어머니의 지위는 백제(百濟)계 지배 계층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무녕왕(武寧王)과 동성왕이 이복 형제라는 일본 서기 기록도 옳은 것으로 보인다.
무녕왕(武寧王)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동성왕이 먼저 백제왕(百濟王)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무녕왕(武寧王)은 동성왕이 백제왕(百濟王)으로 있을 때 왜국(倭國)에 있었기 때문일까.
백제(百濟)에서 무녕왕(武寧王)은 왕권 계승의 정통성을 많이 존중받는다.
무녕왕(武寧王)의 어머니의 지위가 백제(百濟)계 지배 계층이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녕왕(武寧王)의 아버지가 곤지왕이 아니라 개로왕이었기 때문일 확률도 있는 것 같다.
기원 후 약 461년 개로왕은 高句麗의 공격이 있을 것을 알았기에, 곤지로 하여금 왜국(倭國)에 가서 백제(百濟)를 돕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개로왕은 아내를 곤지와 함께 왜국(倭國)에 가게 했던 것이다.
기원 후 약 461년 무녕왕(武寧王)의 어머니가 가카라시마(가당도)에서 무녕왕(武寧王)을 낳았는데, 무녕왕(武寧王)이 가카라시마(가당도)에서 백제(百濟)로 보내어졌다는 기록 내용이 납득이 되는가.
가카라시마(가당도)에 무녕왕(武寧王)의 어머니와 무녕왕(武寧王)은 남아서 생활했을 것이며, 곤지는 가야계 왜왕(倭王)과 협력하여 기비씨 관련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왜국(倭國) 혼슈 지방으로 이동했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가카라시마(가당도)에는 무녕왕(武寧王) 관련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오는 것일 것이다.
곤지왕은 왜국(倭國)의 정세가 안정되었을 때 무녕왕(武寧王)의 어머니와 무녕왕(武寧王)을 궁전이 있는 혼슈 지방으로 오게 했었을 것이며, 무녕왕(武寧王)과 동성왕은 우애를 키우며 함께 생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곤지왕이 백제(百濟)로 가던 기원 후 약 477년,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은 무녕왕(武寧王)이 왜왕(倭王)이 되었다면, 기원 후 약 479년 백제(百濟) 왕위가 공석이 되었을 때 동성왕이 백제(百濟)로 가서 백제왕(百濟王)이 되는 것은 나이 순서에 적합한 일이다.
아마도, 동성왕은 아직 정세가 안정되지 않은 백제(百濟)로 가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 서기에 천황(왜왕(倭王) 무(武)로 추정됨)은 동성왕을 다독이며 백제(百濟)에 가서 왕이 될 것을 권하였다는 내용이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 쟁점: 왜왕(倭王) 무(武)는 무녕왕(武寧王)과 동일 인물인가.
왜왕(倭王) 무(武)는 무녕왕(武寧王)과 동일 인물일 확률이 높다.
무녕왕(武寧王)의 어머니가 무녕왕(武寧王)을 기원 후 약 461년에 낳았으므로 무녕왕(武寧王)이 기원 후 약 477년 왜왕(倭王)이 되었다가 기원 후 약 501년 또는 기원 후 약 502년에 백제왕(百濟王)이 된 것은 무녕왕(武寧王)의 나이로 보면 가능한 일이다.
왜왕(倭王) 무(武)가 기원 후 약 479년에 쓴 국서에는 高句麗와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나는데, 왜왕(倭王) 무(武)가 무녕왕(武寧王)과 동일 인물이라면 무녕왕(武寧王)의 아버지가 곤지왕이 아니라 개로왕일 확률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왜왕(倭王) 무(武)가 무녕왕(武寧王)과 동일 인물이라면, 동성왕을 아꼈던 왜왕(倭王) 무(武)는 기원 후 약 502년 백제(百濟)로 와서 백가의 난을 제압하면서 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이 되었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기원 후 약 502년에 왜국(倭國) 왕위는 왜왕(倭王) 무(武)가 양나라로부터 받은 정동대장군의 지위와 함께 동성왕의 친동생인 남제왕(男弟王)에게 이양된 것 같다.
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이 왜(倭) 남제왕(男弟王)을 오래도록 섬긴다는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 기록과 그림이 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이 왜(倭) 남제왕(男弟王)을 위하여 만든 청동 거울에 있는 이유는 남제왕(男弟王)에게 이양된 것으로 생각되는 정동대장군이란 지위가 기원 후 약 502년 백제왕(百濟王)의 국제적 지위로 추정되는 진동대장군 지위보다 높은 지위였기 때문인 것 같다.)
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은 백제(百濟)의 국력을 키워서 기원 후 약 521년에는 양나라에 백제(百濟)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국서로 알렸습니다.
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은 양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 지위를 받게 됩니다.
공주군에는 양나라식 전축분이 2개 있다.
2개의 전축분 중 나중에 만들어진 전축분은 무녕왕(武寧王) 릉인데, 먼저 만들어진 전축분은 동성왕릉으로 추정된다.
왜 동성왕릉과 무녕왕(武寧王) 릉이 양나라식 전축분으로 만들어졌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무녕왕(武寧王)은 정성과 예우를 갖추어 동성왕릉을 만들었을 것이다.
무녕왕(武寧王) 릉은 양나라식 전축분 형태이지만 무녕왕(武寧王) 릉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왜국(倭國)과 관련된 유물도 있다.
일본산 소나무를 재료로 만든 유물이 무녕왕(武寧王) 릉과 함평군에 있는 전방후원분에서 발견되었다.
함평군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에서는 기마 관련 유물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한반도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들이 동성왕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무녕왕(武寧王) 때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무녕왕(武寧王)이 거느리던 군대 중에는 백제(百濟)계 군대 뿐만 아니라 왜국(倭國)계 군대도 포함된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무녕왕(武寧王) 릉에서는 일본에 있는 인덕릉에서 발견된 청동 거울과 모양과 크기가 거의 동일한 청동 거울이 발견되었다.
왜 일본 학계에서 인덕릉을 인덕 천황과 관련이 있는 릉이라 평가했는지는 이유를 모르겠으나, 인덕릉에서 발견된 청동 거울도 지진으로 인하여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 하므로, 인덕릉에 대한 정식 발굴이 이루어져 인덕 천황 관련 유물들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인덕릉이 인덕 천황의 릉이라는 의견도 비판적 검토가 가능하다 하겠습니다.
인덕릉이 만들어진 시기가 대략적으로 기원 후 5세기 중반이라 하는데, 저는 인덕릉이 기원 후 5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졌을 곤지릉일 확률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제왕(男弟王)은 야마토 통일 왕국을 확립하여 일본 천황가 계보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라 합니다.
백제 무녕왕(武寧王)이 왜(倭) 남제왕(男弟王)을 위하여 만든 청동 거울에 있는 기록 등을 해석할 때 남제왕(男弟王)은 기원 후 약 503년에는 이미 왜왕(倭王)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나, 일본 서기에는 기원 후 약 507년에 남제왕(男弟王)이 왜왕(倭王)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중국 문헌에 기록된 왜왕의 이름들은 일본 서기에 기록된 천황의 이름들과 다른 경우가 많은데, 특히 중국 문헌에 기록된 왜왕(倭王) 제(濟), 흥(興), 무(武)의 행적은 일본 서기에서는 정확히 연대나 정황이 대응되는 왜왕(倭王)의 행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비하여 백제(百濟)계 왕들의 행적과는 관련이 많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본 서기에는 백제 문헌을 출처로 하는 내용이 많으며 정확한 내용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서기의 출처가 되는 백제 문헌이 전하여져 오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일본 서기의 내용 중 어떤 것이 옳으며 그렇지 않은가를 검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 서기의 내용 중에 유물의 기록, 중국 문헌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는 검증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이 왜(倭) 남제왕(男弟王)을 위하여 만든 청동 거울에 있는 기록과 그림이 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이 왜(倭) 남제왕(男弟王)을 오래도록 섬긴다는 내용을 표현한 것이라도 이를 다르게 해석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백제(百濟王) 계보와 왜왕(倭王) 계보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것 같은데, 이것 또한 쉽지만은 않은 과정인 것 같습니다.
첫댓글 무녕왕이 개로왕 아들이고, 동성왕이 곤지의 아들이면 둘은 이복형제가 아니라 사촌지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