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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편 23절-32편 1절.
31편 23절-24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32편. 다윗의 마스길.
1절: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31편 23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교만한 자, 겸손한 자에 대해 많이 말을 하는데, 기독교계에서는 교만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지만 안 믿는 세상에서는 교만하다는 말은 잘 안 쓰고 건방지다고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겸손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일반세상에서는 겸손이라고 하기보다는 ‘순하다. 얌전하다’ 라고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보고 ‘순하다. 얌전하다’고 하느냐? 남의 말에 순순히 따라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순순히 따라주는 사람이 영리하고 똑똑한 거냐, 분별을 못하는 사람이냐? 분별을 못하는 사람이다.
성경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이냐? 일반사람들이 보는 그 차원으로 봐야 되겠느냐, 신앙사상이나 영적인 차원에서 봐야 되겠느냐? 영적인 차원에서 봐야 한다.
그러면 신앙의 세계에서 어떤 사람이 교만한 거냐? 세상을 자랑하는 것.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건 모두가 하나님 앞이다. 그러니까 성도들 앞에서건, 예수를 안 믿는 사람 앞에서건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기준을 가지고 말을 해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기준을 가지고 말을 하게 되면 이건 교만이 돼버린다. 왜 그런가 하니 세상을 기준해서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 것을 내세우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력이나 업적이나 공로를 자랑하거나, 종교적인 명예, 종교적인 사업을 내세우는 교만이 많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의사성을 무시하는 것이니 이 속에는 우리의 영원 궁극적인 구원을 무시하는 게 들어있다. 이렇게 세상을 기준하고 말하는 사람의 지식을 보면 선악과 따먹은 인간 주관적인 자기 지식이고, 자기 신념에서 나오는 하나의 종교성이다. 어쨌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천국의 것이 아닌 것으로 주장하고 내세우고 자랑하는 것은 전부가 교만에 속한다.
이런 교만성은 일반 도덕성적인 면으로 볼 때 별로 하자가 없으니까 굉장히 좋은 사람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있는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성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교만하게 제 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믿는 우리는 일반적인 도덕성도 귀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일반 도덕성 기준이 아닌 진리기준으로 사는 거지만 에덴동산에서 생명과와 일반과를 따먹으라고 하셨는데, 일반 도덕성은 이 일반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우리는 일반적인 선은 따먹어야 한다. 행해야 한다. 이게 일반과다. 이걸 안 하면 믿는 사람에게 건 안 믿는 사람에게 건 어떻게 영적으로 관계성을 맺겠느냐? 안 된다. 일반적인 선행이나 의행으로 관계를 지어야 그 다음에 사람과 영적인 관계성이 되어지는 거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일반과를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은 신앙을 어디로 끌고 가기 쉬운가 하니 은둔주의로 끌고 가기 쉽다. 굴속에 처박혀서 기도나 하고, 일반적인 청렴결백 위주로 나가기 쉽다. 이건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은 세계에서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다. 이걸 영적인 차원으로 얘기를 하자면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의사성이 안 맞아 들어간다. 팽팽하게 맞서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일반적으로 겸손한 사람과 같은 지식의 수준이냐?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과 악을 다 분별할 줄 알고, 영과 육, 임시성과 영원성을 분별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들어가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그리고 일반과를 따먹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주 안에서 공경이 되어야 겸손한 사람이다. 주 밖은 안 된다. 이를테면 부모가 ‘술 사 와라. 담배 사 와라’ 할 때 그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된다. 이건 주 밖이다. 이런 순종을 안 하자니 목숨을 걸어야 하고,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영육 간에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게 죄다. 겸손한 자는 지혜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잘 분별을 한다.
교만히 행하는 자는 그 속에 거짓 것이 가득 들어있는데, 거짓 것이란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세상성적인 요소, 세상적인 사고방식, 세상적인 모든 욕심 이런 것들이다. 그러니까 교만한 사람 속에는 생각도 마음도 물질욕심이 가득 들어있다. 교만히 행하는 사람은 이런 것을 의지하고, 이런 것으로 자기의 힘으로 삼고, 사람 앞에서 그런 것으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으로 교만히 행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엄격한 처벌이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의사성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처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게 해서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못 쓰게 만들기 때문에 처벌이 있게 되는 거다. 이런 면에서 가르치는 자의 형벌이 크다고 하는 거다.
가르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의 사람이 되어서 교훈을 받는 사람들을 은혜 받고 복 받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지를 않고 맨 세상을 자랑해서 하나님 앞에 진노와 심판과 형벌과 재앙을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이게 하나님 앞에 교만이다. 그래서 엄격한 형벌이 따르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들의 세계가 이런 걸 별로 크게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하는 게 교회의 일이요, 이게 인도자가 할 일이요, 이게 믿는 일인데, 변할 수 없는 이 하나님의 뜻을 망가뜨리고, 부정하고, 시인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 이단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변하지 않는 뜻을 무시하면 이단이 되는 거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은 뭐냐? 모든 성경이 왜 기록이 되었다고 그랬느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고 기록이 됐다. 우리의 온전이다. 이 온전을 무시하는 것은, 온전으로 만들어져 가는 이 면을 무시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들어가는 거다. 마귀가 이걸 크게 노리는 거다.
그러면 왜 우리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기를 원하시는 거냐? 어느 시대이던, 어느 지역이던, 어느 상황이던 우리에게 향하신 변하지 않는 그 뜻이 뭐냐? 우리에게 향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신령천국을 영원히 누리게 해 주겠다. 너에게 천국을 줘서 누리게 해 주겠다. 이 뜻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이걸 부정하는 교훈이 거짓 교훈이다.
이단자들과 거짓 교훈자들은 그 사상이 직결이 된다. 그래서 이 둘은 같이 손을 잡게 돼 있다. 이들의 교훈은 한 마디로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을 달라고 하고, 세상을 구하라고 한다. 이들의 배후에서 누가 그러는 거냐? 마귀가 그러는 거다. 그러니까 마귀의 꼭두각시가 이단자들이요 거짓 종들이다.
이단자들과 거짓 종들은 아무리 성경구절을 들고 말을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궁극적인 뜻인 우리로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인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도록 하는 것은 무정하고 무시하며 임시적이고 썩고 불타질 세상과 세상 것을 자랑하고 가지라고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옳게 바르게 가르치는 종들을 이단시 한다.
또한 이런 자들은 신학교를 나오고 박사 학위증 등의 종교적인 명예 영광성을 가지고 와서 그런 것이 없으면 제도적으로 참 종이 아니라고 한다. 목사님이나 교인들이나 직분만 다를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 신분은 같은 건데, 그러면 일반교인들이 목사님들처럼 신학교를 나와서 종교적 명칭을 가지고 있느냐? 그런 게 없으니까 이들의 말대로라면 일반 평신도들은 다 이단이라는 말이 된다. 거짓 종들은 영적 차원에서 성격과 성질로 들어가서 이치적으로 분해를 해 들어가면 꼼짝을 못한다.
이런 자들은 자기의 위치를 굳히려고 다른 사람을 보고 이상하다고 하고, 자기가 넘어져 있으면서 남에게 위험스럽다고 한다. 믿는 사람들이 진리이치로 명확히 구별 분별을 못하면 이들의 말에 속기 마련이다.
24절: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진리의 생명 길, 좁은 길을 가는 성도들은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그러면 이 말을 하는 다윗은 무엇이 강하고 담대한 것인지를 알고 말하는 거냐, 모르고 말하는 거냐? 다윗이 무엇이 강하고 담대력을 갖게 하는 것인지를 모르면서 성도들을 보고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라고 하는 거냐? 다윗은 자기가 넘어졌는데 왜 넘어진 줄도 모르고, 넘어진 상태에서 교인들을 보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넘어졌는데 어떤 힘으로 일어나서 이기고 나왔기 때문에 이걸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자기가 알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거다.
그러면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을 듣는 자들은 무엇이 강하고 담대한 것인지를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못 알아듣는 건지? 강하고 담대해진다는 게 ‘주여’ 하고 외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배에 힘을 주면 강하고 담대해지는 거냐?
전쟁터에서 무장도 안한 채 총알이 비 오듯 퍼붓는 적진을 향해서 ‘주여’ 하며 달려가면 총알이 자기를 피해서 날아가고, 결국은 원수들의 총알이 다 떨어지고 자기에게 항복을 하겠느냐? 아니면 총알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다가 내가 용기가 없으면 그 총알이 용기가 없는 나에게로 날아오는 거냐?
이방 세상 사람들도 담대해지려면 실력을 닦는다. 주를 믿는 성도들도 담대해지려면 실력을 닦아야 한다. 이방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것으로 강해진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무엇으로 강해지느냐? 무엇으로 강해지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느냐? 그 바람성이 세상 요소적으로 담대해지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느냐, 아니면 진리생명의 말씀, 진리로 자체화 되는 그 무장을 염두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는 거냐? 세상 속화된 교인들은 어느 쪽을 바라느냐? 그 바람성이 다른 거다.
우리는 행동 자체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신앙의 행위 속에 그 행위를 하게 되는 요소가 들어있으니 그 요소란 ‘그 정신 사상이 어디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어디로 향해 있느냐?’ 이걸 말하는 거다. 이걸 알려니 신앙의 성질이나 성격으로 파고 들어가는 거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철야기도를 한다고 할 때 밤새도록 기도를 하는 그 성도의 요구성이 세상 쪽으로 되어있다면 그 기도는 무효가 되는 거다. 이런 기도는 안 하니 만도 못한 것이니 이런 기도는 아예 하지를 말아야 한다. 왜 그러냐? 이런 기도를 하면 너에게 시험이 들어오고, 그 다음에 악한 사람이 돼버린다. 다시 말하면 귀신이 들린다 그 말이다. 돌려서 말하면 그런 기도 대신 옳은 교훈을 받으라는 거다.
죄에 넘어지지 않는 무장, 유혹과 미혹에 넘어지지 않는 무장, 세상적 종교적인 것에 넘어가지 않는 무장, 비진리 사상을 볼 줄 아는 무장, 영들의 활동과 그 감화성을 볼 줄 아는 무장, 모든 것을 정복을 할 수 있는 무장. 이런 무장을 할 수 있는 것은 살아서 역사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말씀밖에 없다. 말씀을 무시하지 말아라.
‘예수 이겼네. 예수 이겼네’ 라는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예수의 신이 자기에게 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구절을 암송한다고 해서 강하고 담대해지는 것이 아니다. 은밀계시를 자기 인격화 시켜야 강하고 담대해진다. 말씀으로 자체화 된다 그 말이다. 믿는 사람이 강해지려면 평소에 말씀의 이치로 자기 인격화 시켜라. 정신 무장화 시켜라.
32편. 다윗의 마스길.
‘마스길’이란 ‘교훈의 시’라는 뜻이다. 안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일반적으로 선악과 따먹은 차원에서의 교훈적인 시가 있다. 예를 들면 일반 세상 사람들이 자연을 읊는 시가 있고 노래가 있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지은 시나 노래를 들으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진리이치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거다. 즉 예수 믿는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이 지은 자연의 시나 노래를 읊고 부르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구원도리와 이치를 끄집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 인생을 노래하는 시도 있다. 무슨 사랑의 시라든지, 고독의 시라든지, 인생의 허무함의 시라든지, 인생의 영광의 허무함의 시라든지, 나그네로서 고향을 그리는 시라든지 많이 있다. ‘인생은 나그네 길’ 하는 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 가사에 인생은 나그네이기 때문에 세상에 정을 두지 말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사람들은 영원을 못 잡아서 그냥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는 것뿐이다.
우리 믿는 입장에서도 이 노래를 부르거나 들을 때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나그네 인생이기 때문에 허무에 빠지는 게 아니라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정을 들이지 말되 하나님과 사귐성을 갖고, 하나님의 옳은 것을 뿌리고 가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나그네들의 마음 속에 천국을 뿌리고 가야 한다. 인생은 다 나그네이니 이 나그네들에게 최고의 좋은 것을 뿌리고 가야 한다.
전도서에 있듯이 세상은 돌고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했다. 이 말씀의 속을 들여다보면 천국을 말하는 거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천국을 못 보는 사람은 꼭 자살하기 좋은 말로 돼 있다. 전도서의 맨 뒤로 가서 보면 ‘청년들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고 있다.
우리 젊은이들은 사랑의 시를 많이 읊는데, 어떤 사랑의 시가 있느냐? ‘진달래 꽃’ 시가 있느냐? 거기에서는 영원을 끄집어 낼 게 없다. 그것만 자꾸 씹고 있으면 임시성에 머물고 만다. 그러나 어쨌든 사랑은 좋은 거다. 우리는 이 임시성적인 사랑을 영원으로 늘어뜨려서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받는다면 이건 하나님의 사랑이 되는 거다. 하나님을 모르면 임시성으로 끝나는 거다.
또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 가사에 꽃잎에 멍이 들었다고 하는 게 있는데, 꽃잎은 멍이 들기 쉽듯이 여성이 사랑에 상처를 입는다면 그 마음속의 상처는 엄청난 거다. 이 상처를 치유 받으려면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면 된다.
‘빨간 구두 아가씨’ 노래도 보면 빨간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길을 가면서 한 번 뒤를 돌아볼 만도 한데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것을 쳐다보면서 한 번이라도 돌아보기를 기다리는 그 마음이 오죽하겠는가를 생각해 봐라. 사랑은 좋은 거다. 진리의 성도들은 이런 일반적인 사랑을 보면서 생명과를 따먹는, 그리고 일반과를 따먹는 사랑이 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에게 육신을 입혀놓은 것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오각의 오감성으로 희로애락을 느끼라는 거다. 손을 준 것은 만져주고, 쓰다듬어 주며 때로는 권고 권면을 하라는 게 들어있다.
아가서에 솔로몬의 사랑의 시가 있는데, 물론 그 안에는 은밀계시가 들어있는 건데, 주님과 성도와의 끊을 수 없는 애정의 극치의 관계성을 노래하고 있다. 믿는 우리는 그 사랑이 현실에서 표면화 되면서 아내와 남편에게도 쓰임이 되어야 한다. 일반과로 따먹어야 된다 그 말이다. ‘예수 믿는 것은 교회에서만 하는 거고, 일반생활은 안 믿는 사람처럼 살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면 안 된다. 진리로 연관 관계성이 제일 가깝게 되어야 할 관계가 아내와 남편인데, 부부가 서로 멀어진 목사님들이 상당히 많다. 이건 문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그러니 병도 이기는 거다. 이게 이해가 되느냐? 아내의 병을 고치는 제일 가까운 사람이 누구냐? 남편이다. 남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제일 가까운 사람이 누구냐? 아내다. 이런 부부가 사랑이 약해진다거나 사랑이 없으면 병이 들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에서 사랑이 없으면 신앙에 병이 들어버린다. 정신 병, 마음의 병이 들고, 나아가서 육신의 병도 든다. 성경을 많이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거지 싫다면 안 듣고, 안 믿고, 제 마음대로 사는 거다.
내가 살던 고향은 저기 충무 쪽인데, 거기에 다도해가 산 너머 산을 그린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 그걸 바라보면 꿈속에서 천국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그걸 바라보면서 천국을 그리워하고, 먼저 믿다가 앞서 간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언젠가 천국에서 그 분들을 만나려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분들의 신앙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천국이라고 하는 항구에 다다랐을 때 믿음의 선진들이나 선지 사도들을 만나면 즉시 그 분들을 알아볼 수 있는 거다. 그 분들을 보자마자 ‘아, 기다렸다. 어서 와라’ 하면서 반갑게 맞아줄 거다. 왜냐? 생각이나 사고의 수준이 같으면 굳이 서로 소개를 하지 않아도 그냥 아는 거다. 만일에 천국 항에 다다랐는데 아무도 맞아주는 성도가 없다면 그렇게 서운할 수 없을 거다.
일반적인 시나 노래나 그림 중에는 일반적으로 건전한 게 있다. 이런 건 우리가 가까이 해도 괜찮겠지만 너무 속된 것은 멀리하는 게 좋다. 믿는 사람이 회사나 친구들이 모였을 때 무슨 노래를 부르느냐? 해미에 있을 때 전OO집사가 있었는데, 동네에서 복무하는 게 뭐냐? 방위근무를 했는데, 저녁에 동료들끼리 회식을 하게 됐는데 동료들이 이 집사님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하니까 신앙이 돈독한 집사님이 처음에는 안 부르려고 했는데도 자꾸 부르라고 하니까 ‘안개와 같은 인생아, 네가 얼마나 살겠냐? 고운 해가 지치면 너는 쓰러져’ 라는 노래를 부르니까 그만 회식판의 분위기가 확 가라앉아 버렸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아예 노래를 부르라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노래하는 시도 있는데, 삼일절 노래나, 광복절 노래나, 6. 25 노래 같은 것은 내가 그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그런 걸 부르면 내 속에서 애국심이 불끈 솟아 올라온다. 믿는 우리는 일반적으로도 애국심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에게 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결국은 없어질 땅을 주신 거냐? 안 믿는 사람이야 내 나라니까 지킨다고 하겠지만 믿는 우리에게도 보이는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를 주셨는데 왜 준 거냐? 내가 사는 나라는 이룰구원을 이룰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6. 25를 겪은 사람은 북한정권이라고 하면 학을 떼는 거다. 왜냐? 그들에게 죽고, 피난 가고, 고생하고 했으니까 북한이라고 하면 이를 가는 거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북을 찬양해도 잡아가지를 않는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고 외친 후에 간첩들에게 입이 찢어져 죽은 아이가 누구냐? 이승복이냐? 그 아이의 동상이 지금도 있느냐? 물론 안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그래야 옳은 거다. 그것마저도 없다면 뭐가 되겠느냐? 어느 나라이던 국가의 민족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서로 어깨동무도 하고 잘 통하고 무역도 한다면 모르겠지만 한 동족이면서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를 지키는 일에 더 힘을 써야 한다.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한다. 성경에 보면 야곱과 에서는 철천지원수다. 지구상에서 인간끼리 서로 원수를 삼고 있을지라도 올라가고 올라가면 다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왜 서로 원수가 되는 거냐? 사상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기식이 있는 것은 씨도 남기지 말고 다 죽이라고 하신 거다. 그럼에도 그들을 살려놨더니 그 후로 살려놓은 그 후손들로 인해 이스라엘에 후유증이 얼마나 심한지?
원리 원칙적으로 서로가 사상이 다르면 통일이 안 되는 거다. 서로 양보해서 평화롭게 살자고 해도 안 되는 거다. 결국은 어느 한 쪽이 죽어 없어져야 만이 평화가 되는 거다. 그래야 통일이 되는 거다. 그런데 싸우지 않고 통일이 되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가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하나가 되는 거다. 그러면 통일은 자동화로 되는 거다. 이게 아닌 인간끼리 서로 양보해서 평화롭게 살자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타락성이 들어있기 때문에 불가능한 거다. 성경에서 이런 원리를 깨닫는 거다.
우리나라만 해도 정치인들이 다 진리의 사람으로 되어서 정말 옳은 교회를 키우도록 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도 애국자이지만 국가 안에서도 애국자가 되는 거다. 그리고 이런 나라는 튼튼해진다. 애국자는 사람을 살리고 사랑한다. 사람을 죽이고 해치는 것은 애국이 아니다. 이런 원리가 성경에서 나와야 하고, 성경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성격적 성질적으로 말씀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 앞에 의사단일성으로 하나가 되는 거고, 이게 옳은 건데 이건 안 되고 성경구절을 액면적으로만 따라 하게 되면 소련의 누구냐? 마르크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이 사람이 액면적인 측면에서 성경대로 한다고 하면서 공산주의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민족과 문화가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되겠느냐? 억압 강압적으로, 무력으로 하나가 되게 한다고 해도 이건 언젠가는 막 반발을 하게 되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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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귀한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