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태극기 특별전(기증전)
인천에서 다시 태어난 백범 김구
전시일정 : 2020. 8. 13(목) ~ 19.(수) 전시장소 : 계양구청 아트홀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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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태극기 특별전(기증전) 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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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나라의 독립과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투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던 독립운동가. 본관은 안동, 자는 연상, 호는 연하 또는 백범으로 1919년 상해로 망명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동학농민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을 거쳐 국무위원과 주석을 지냈다. 이후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민족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고자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고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이루었다. 해방 이후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했고 완전자주독립노선을 주장했으나,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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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구한말 국내에서 동학농민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다가 1919년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며 통일민족국가 건설운동을 전개했으며, 완전자주독립을 주장하면서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1949년 6월 경교장 서재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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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침략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내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통일민족국가건설운동을 전개한 반외세 민족주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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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엽서 후면
김구의 초년기 :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백범(白凡). 아버지는 순영(淳永)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887년 11세 때 아버지가 집안에 세운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혔다.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와 〈대학〉을 공부하고 과문(科文) 등을 익혔다. 17세때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관상학·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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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활동 :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귀국하여 안악(安岳)으로 오는 도중 치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 를 때려 죽인 뒤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었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었으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했다. 1898년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 환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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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활동기 : 1900년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인사들과 교유하고 교육과 계몽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한 뒤, 대한문 앞에서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을 했다. 1911년 안악(安岳) 부호들을 협박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빼앗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했다는 소위 안명근(安明根:안중근의 종제)사건의 관련자로 5월에 체포당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중 감형되어 1914년 7월 가출옥되었다. 학교를 세우고 소작인을 교육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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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에 찍어주는 도장을 이용해 만들어본 자료 3종
상해 임시정부 활동기 : 상해로 망명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제기된 창조론(創造論)과 개조론 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련된 국민대표회가 분열로 치닫자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1924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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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기의 할동 :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과 임시정부는 빠른 시일내에 곧 입국할 것 등 14개항으로 되어 있는 '임시정부의 당면정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김구가 주도한 임시정부는 독립을 위해 서울 진공작전을 계획했으나,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해방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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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3일에 찍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기념사진. 김구가 주도한 임시정부는 독립을 위해 서울 진공작전을 계획했으나,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해방을 맞이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서둘러 귀국하려 했으나,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임정 국무위원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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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맥시머는 30장이 한셋트임 여기에거는 2장만 제시함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하여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신탁통치안이〈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로 결의되자 반탁투쟁을 주도, 이 단체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치기로 하고 비상국민회의로 개칭하였다.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5월5일 서울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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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되기 한달전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고 소신을 밝히고, 이승만과의 합작은 통일정부가 설 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수립이 그의 최대의 목표였다.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다음백과)
첫댓글 잘 보고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13일 개막식날 구경하고 왔습니다
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귀한 자료 잘보고갑니다.
전시회 축하 드립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우표의 태극기는 맞는데 기념인 속의 태극기는 엉터리 태극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