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 2021. 3. 2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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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격차의 시대의 사랑
염창권
1나노초의 사랑을 클릭할 수 있다면
1나노초의 속도로 널 공매도하고,
1나노초의 속도로 널 회수할 수 있다면
메릴린치, 도이체방크보다도 빠르게
초단타의 사랑을 초격차시킬 수 있다면
난 겨우, 33타 퍼초의 스피드일 뿐인데
익명자는 벌새보다 빠르게 붕붕대면서
나노분의 1초의 스피드로 날 작살내버렸다
카카오뱅크를 초격차시키는 스피드였다
소프트방크를 초격차시키는 스피드였다
익명자의 통쾌한 작렬, 작렬, ……, 에
갈채가 쏟아지는
감각의 제국에서
껴입을 만한 사랑은 프로듀싱을 끝냈고
초박막으로 코팅된 스크린으로 스며들었다
초박막으로 코팅된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속수무책, 거리에 흩어진 나, 그리고 동일자들은
월면月面 뒤쪽으로 날아간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다
― 『시와소금』, 2021, 봄.
<시 읽기>
우리는 흔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말한다. 제3차 산업혁명은 반도체와 메인프레임 컴퓨팅(1960년대), PC(1970~1980년대), 인터넷(1990년대)의 발달을 통한 정보기술시대로 요약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도래할 4차 산업혁명은 ‘초연결성(Hyper-Connected)’, ‘초지능화(Hyper-Intelligent)의 특성을 지닌다.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등 정보통신기술(ICT)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 인간과 사물이 상호 연결되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사회로 변화할 것이다. 이 변화의 규모와 범위, 복잡성 등은 이전에 인류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WEF 회장인 클라우스 슈밥은 말한다. 그는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10개의 선도기술을 제시했다. 물리학 기술로는 무인운송수단·3D프린팅·첨단 로봇공학·신소재 등 4개, 디지털 기술로는 사물인터넷·블록체인·공유경제 등 3개, 생물학 기술로는 유전공학·합성생물학·바이오프린팅 등 3개다. 이러한 기술을 기반으로 클라우드 컴퓨팅, 스마트 단말, 빅데이터, 딥러닝, 드론, 자율주행차 등의 산업이 발전하고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전대미문의 변화 앞에서 인간의 삶은 어떤 충격의 바다에 던져질지 짐작조차도 어렵다.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이러한 시대를 ‘초격차 시대’로 규정하면서 ‘사랑’의 문제를 들고 독자 앞으로 온다. 격차(隔差)는 빈부, 임금, 기술 수준 등의 ‘동떨어진 차이’를 말한다. 그러니까 초격차는 이러한 격차가 초월적이어서 감히 한계를 뛰어넘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격(格, level)의 차이를 뜻한다. 이러한 초격차 시대의 인간 존재는 어떤 것일까. 짐작하기 어렵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사랑’은 어떻게 되는 걸까. 서정적 자아는 1나노초의 사랑을 상정한다. 나노(nano)는 ‘10억분의 1’이다. 그러니까 나노초는 10억분의 1초를 말한다. 이는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지극히 짧은 순간이다. 익명자의 초격차 스피드 공격에 작살난 자아의 사랑은 실재할 수 있을까. ‘초박막으로 코팅된 스크린’에나 스며든다면, 속수무책. 자아는 분열되어 흩어지는 동일자들인가. 인간은 존재할까. 사랑이라는 단어의 수명은 얼마나 남은 것일까. 나도 미로에 갇힌다. (서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