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李恒福 1556 ~ 1618 신도비명-상촌 신흠/행장-계곡 장유
유명 조선국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오성부원군 이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선조 대왕(宣祖大王) 25년에 일본(日本)의 추장(酋長) 수길(秀吉)이 대대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옴으로써 경도(京都)가 함락되고 거가(車駕)가 파천하였다. 오직 이때 신하가 있어 천조(天朝)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재차 종사(宗社)를 회복시켰으니, 그가 바로 백사(白沙) 이공(李公)이다. 폐주(廢主)가 즉위하여서는 동기(同氣)를 죽이고 자전(慈殿)을 폐하려고 꾀하자, 간신(奸臣) 이이첨(李爾瞻)ㆍ정조(鄭造) 등이 그 일을 더욱 종용함으로써 천상(天常)이 절멸되어 조선 삼천리 강토가 거의 요괴(妖怪)의 지역으로 빠지게 되었다. 오직 이때 신하가 있어 항거하여 말하고 바르게 고해서 이륜(彝倫)을 붙들어 세웠으니, 그가 바로 백사 이공이었다. 그래서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중흥(中興)의 업적은 해동(海東)에만 입혀졌을 뿐이지만, 백성의 윤기(倫紀)를 세운 것은 곧 만세의 효순(孝順)을 수립한 것이니, 이 도리는 천하에 널리 입혀질 것이다.” 하였다. 공이 말 때문에 죄를 얻어 북쪽 변방에 유찬되었을 적에는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공은 진실로 죽을 곳을 얻었으나, 나라는 어찌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윽고 공은 배소에서 작고하였는데, 금상(今上)이 계해년에 반정(反正)하여 공을 복관(復官)시키고 사제(賜祭)함에 이르러서는 담론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거의 잘 되어 가는구나. 나라에 교화가 있게 되었다.” 하였으니, 대체로 공의 존망(存亡)과 영췌(榮悴)로써 세운(世運)의 흥상(興喪)을 점친 것이었다. 동양(東陽) 신흠(申欽)이 온 나라의 담론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사실을 듣고 말하기를, “이것이 여정(輿情)이요 이것이 공의(公議)이니, 이것이 어찌 천명(天命)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그 사업과 공렬을 차례로 엮어서 신도(神道)의 빗돌에 다음과 같이 기재하는 바이다.
공의 휘는 항복(恒福)이고, 자는 자상(子常)이며, 씨족(氏族)은 계림(鷄林)에서 나왔다. 그 처음에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 알평(謁平)이란 분이 있어 신라(新羅) 시조(始祖)를 도와 종신(宗臣)이 되었는데, 그의 주손(冑孫)과 지손(支孫)이 마침내 면면히 이어져 오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더욱 성해졌으니, 그 중에 드러난 이가 바로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으로,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 일컫는 분이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낸 휘 연손(延孫)이 있어 이분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숭수(崇壽)를 낳았는데, 숭수는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曾祖) 성무(成茂)는 안동 판관(安東判官)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 예신(禮臣)은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찬성공은 은덕(隱德)이 있어 일찍이 포천(抱川)에 묘역(墓域)을 가려 정하고 말하기를, “내 뒤에 반드시 이세(二世)가 연하여 현달(顯達)할 것이다.” 하였는데, 공의 고(考) 참찬공(參贊公)이 과연 그 예언에 부응하였다. 참찬공의 휘는 몽량(夢亮)인데, 삼조(三朝)를 내리섬기면서 청검(淸儉)과 충효(忠孝)로 명성이 있었고, 영의정(領議政), 시림부원군(始林府院君)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결성 현감(結成縣監) 최륜(崔崙)의 딸이며 눌헌(訥軒) 이공 사균(李公思鈞)의 외손(外孫)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고, 규범(閨範)이 있었다.
가정(嘉靖) 병진년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막 태어나서 젖을 빨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므로, 가인(家人)들이 놀라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마침 고사(瞽師)가 문에 이르자, 참찬공이 그에게 아이의 점을 쳐 보게 하였다. 점을 다 쳐 보고는 축하하며 말하기를, “삼공(三公)에 관한 점사(占辭)를 보니, 공보다 이급(二級)이 높습니다.” 하였다. 겨우 두어 돌이 지나서는 뛰어나게 영리하여 장난하고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조금 자라서는 마음이 침착하고 도량이 있어 행동거지가 기특하고 어묵(語黙)이 구차하지 않았으므로, 식견 있는 이들이 하늘 높이 치솟는 재목이 될 줄을 알았다. 8세 때에는 시(詩)를 지었는데, 말을 내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9세 때에는 참찬공이 작고하자, 너무 슬퍼하여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예(禮)와 같이 하였다.
14, 5세 때에는 이미 재물을 아끼지 않고 의리를 좋아했으며, 웅건(雄健)하여 어디에도 속박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씨름과 공차기를 잘하여 길거리에서 용맹을 뽐내곤 하면 여러 소년들이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 대부인(大夫人)이 그 사실을 듣고 경계하여 이르기를, “미망인(未亡人)은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인데, 네가 무뢰한 자제(子弟)들과 종유를 하니,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니, 공이 울면서 가르침을 받아 호탕한 습성을 닦아 없애고 신실한 태도를 지녔다.
신미년에 대부인이 작고하자, 죽(粥)만 마시면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복(服)을 마치고는 민씨(閔氏)의 아내가 된 자씨(姉氏)에게 의탁해 있으면서 경서(經書)의 의리를 분석하고 학습의 취향을 변별하여 학업을 마침내 독실히 함으로써 문사(文思)가 방일하여 차츰 고인(古人)의 문사에 가까워지자,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공의 얼굴을 알기를 원하였다. 상국(相國) 권철(權轍)이 그 명성을 듣고 손녀를 공에게 시집보냈으니, 바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소생이었다. 상국이 공을 한 번 보고는 공보(公輔)의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만력(萬曆) 경진년에는 알성 문과(謁聖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 부정자에 보임되었다. 신사년에는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계미년에는 선묘(宣廟)가 장차 《주자강목(朱子綱目)》을 강(講)하려고 재신(才臣)을 미리 간선하여 궁중에 비장된 《주자강목》을 내려 익히게 하였는데, 이 간선에 응한 사람 5인 가운데 공이 참예되었으니, 율곡(栗谷) 이공 이(李公珥)가 실로 공을 천거했던 것이다. 율곡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온 세상을 압도했는데, 공이 한 번 만나 보고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계합(契合)된 바가 있었다. 그 후 이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에 천거되어 정자, 저작, 박사를 역임하였다.
을유년 봄에는 예문관의 대교ㆍ봉교,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지제교, 고공랑을 제수받았다. 이상의 관직을 세상에서 열관(熱官)이라 일컬었는데, 공은 이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에 담박하기가 마치 한산한 관서(官署)와 같아서, 관청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좌중에는 낯선 빈객이 없었으며, 날마다 같은 마을 사람들과 종유하여 조촐하게 앉아서 서로 만나 보곤 하였다. 한 번은 두 현관(顯官)이 한때의 명망을 믿고 공에게 천거해 주기를 요구하여 공이 이미 전조(銓曹)에 들어간 뒤에는 중간에서 공을 꾀는 짓을 수없이 하였으나, 공이 그 행위를 증오하여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므로, 두 현관이 서로 공에게 앙심을 품었다. 이어 수찬, 정언, 교리, 이조 정랑,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기축년 겨울에는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참국(參鞫)하였다. 이 때 선묘(宣廟)께서 친히 임어하여 죄수를 논죄하였는데, 공의 응대(應對)가 주도하고 민첩하며, 임금 앞에서 총총걸음하는 것이 절도에 맞았으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묻고 손으로 기록하곤 하니, 동료 관원들은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이서(吏胥)들이 모두 눈여겨보고 놀라면서 공을 신(神)처럼 여겼다. 선조는 자주 공의 재주를 칭찬하고 매사를 반드시 공에게 맡겼다. 공은 연루된 죄수가 많은데다 조속히 판결을 하지 못함으로써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기는 자들의 흉심을 발단시키게 되는 것을 민망히 여겨, 정의(亭疑)를 당해서는 힘써 평번(平反)하여 생의(生議)를 붙여 주고, 죄안(罪案)의 문서(文書)를 상세히 검토하여 혹 불분명한 사실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당사자(當事者)에게 정밀히 조사해서 처리하였으니, 한갓 붓대를 잡고 옥안(獄案)만 작성할 뿐만이 아니었다.
경인년 여름에는 응교에서 의정부의 검상, 사인에 전임되었다. 가을에는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책록되었는데, 이는 공이 문사랑으로 노고가 많았었기 때문에 관례대로 삼등훈(三等勳)에 책록되었던 것이다. 이어 전한에 전임되었는데, 일찍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했을 적에 선조가 공을 앞으로 가까이 불러 놓고 공의 국옥(鞫獄) 때의 일을 말하면서 수십 마디를 연해서 고재(高才)라 칭찬하고 작질(爵秩)을 올려서 권장하였는바, 직제학으로 승진시켰다가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를 특별히 더하였으니, 장차 공을 크게 쓰려는 것이었다.
신묘년 봄에는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호조의 일을 본 지 겨우 한 달 만에 조무(曹務)가 막힌 것이 없게 되고, 창고의 비축도 부족함이 없게 되자, 당시 호조 판서로 있던 상국(相國) 윤두수(尹斗壽)가 공(公)을 드러내서 존중하여 말하기를, “문한(文翰)을 다루는 선비가 다시 전곡(錢穀)도 잘 다스린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 얼신(孼臣) 홍여순(洪汝諄)이란 자가 온 세상 선비들을 모조리 그물질하여 장차 다 죽이려고 하는 바람에 공 또한 승지로서 그 파급(波及)을 입어 파면되었다. 이해 여름에 서용되어 다시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공을 해코지하는 자들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전에 공에게 앙심을 품었던 두 관원이 이 틈을 타서 일어나 공을 중죄(重罪)에 빠뜨리려고 꾀하였는데,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마침 대사헌이 되어 몸소 친히 쟁론을 벌임으로써 이 일이 무사하게 되었다.
임진년 4월에는 왜구(倭寇)가 갑자기 이르자, 공은 지신사(知申事)로서 매우 분개하여 몸소 순절(徇節)하려고 작정하였다. 그래서 적보(賊報)를 듣고부터는 퇴청하여 사제(私第)로 가서 안집과 통행을 금하고 집안 일로 자신을 혼란시키지 못하도록 경계하였으며, 측실(側室)은 한 번만이라도 대면(對面)하기를 요구했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나갈 때에 미쳐서는 백관이 다 흩어져서 궁중(宮中)은 텅 비어 사람이 없고 비는 쏟아지고 밤은 칠흑 같았는데, 밤 4경에 중전(中殿)이 홀로 여사(女史) 10여 인을 데리고 인화문(仁和門)으로 걸어서 나갔다. 이때 공이 홀로 촛불을 잡고 앞에서 인도하니, 중전이 돌아보면서 물어 보고 위로와 면려가 갖추 지극하였다. 대가가 임진(臨津)에 다다라서는 상하(上下)가 서로 분열되었으므로, 공이 병조랑(兵曹郞)과 함께 도보(徒步)로 가면서 진창 가운데에서 도중(徒衆)을 불러모았다.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러서는 상이 대신(大臣) 및 윤두수를 불러 계책을 물었는데, 공이 맨 먼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병력(兵力)으로는 이 적을 당해 낼 수 없으니, 오직 서쪽으로 달려가서 부모(父母)의 나라에 우러러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송경(松京)에 이르러서는 이조 참판 오성군에 제배하고 가선대부를 더하였다. 그리고 공에게 왕자(王子)를 호위하고 먼저 평양(平壤)으로 가게 하였다. 대가가 평양에 이르러서는 형조판서 겸 도총관을 임명하고 자헌대부를 더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적이 이미 경성(京城)을 크게 유린하고는 급히 양서(兩西)를 짓밟아 치면서 노략질을 하려고 할 적에 조정의 의논이 정해진 계책이 없어 허둥지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공이 한음(漢陰)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함께 계책을 협찬하여 사신을 보내어 천조(天朝)의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건의하였고, 또 삼도(三道)에 조도사(調度使)를 파견하여 군흥(軍興)을 관장하도록 하였으니, 마침내 재조(再造)의 공렬을 이룬 데에는 이것이 그 조짐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 병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에 제배되었다.
임진(臨津)이 함락되자, 혹자는 평양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혹자는 함흥(咸興)이 의거할 만하다고 말하므로, 공이 좌상 윤두수와 함께 함흥으로 가는 것은 계책이 아니라는 뜻을 강력히 진술하고 영변(寧邊)으로 행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뭇 사람들의 의논은 굳이 함흥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중전과 세자빈(世子嬪)이 먼저 덕천(德川)을 향하여 함흥의 길을 취하였는데, 적들은 이미 대동강을 핍박해 왔다. 그러자 한음공이 자기가 나가서 적장(賊將) 현소(玄蘇)와 조신(調信)을 직접 만나서 군대의 진격을 늦추도록 꾀하겠다는 뜻으로 청하여 말하기를, “군대를 만일 늦추어 주지 않으면 의당 두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 하니, 공이 그리 하지 못하게 말리면서 말하기를, “당당한 국가에서 어찌 도적의 행위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가가 평양을 떠난 뒤에는 공이 한음과 함께 영변으로 가서 머물 것을 거듭 청하고, 또 요동(遼東)에 가서 구원병을 요구하겠다고 자청하여 양공(兩公)이 서로 다투어 자신이 가려고 했는데, 밤중에 이르러서야 선조가 심충겸(沈忠謙)의 말을 받아들여 한음을 요동에 보내기로 하였다. 공은 한음을 남문(南門)까지 전송하고 자신이 타던 말을 한음에게 풀어 주면서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그대는 의당 나를 중획(重獲)에서 찾아야 할 것이네.” 하니, 한음이 말하기를, “구원병이 나오지 않으면 나의 시체는 의당 노룡산(盧龍山)에 버려질 것이네.” 하고, 서로 눈물을 뿌리며 작별하니, 듣는 이들이 얼굴빛을 고쳤다.
적을 수비하던 여러 관군(官軍)이 또 무너지자, 선조가 밤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중국에 내부(內附)할 일을 의논하여 이르기를, “부자(父子)가 함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가 버리면 국사가 가망이 없게 되니, 세자(世子)는 의당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길을 나누어 가야겠다. 나는 약간의 신료(臣僚)를 대동하고 의주(義州)로 들어갈 터이니, 누가 나를 따르려는고?” 하니, 뭇 신하들이 아무도 대답을 못했는데, 공이 울면서 대답하여 따르기를 청하였다. 대가가 박천(博川)에 머무르자, 중전이 덕천(德川)으로부터 와서 서로 회합하였는데, 이어서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이르렀다. 그러자 선조가 대가를 재촉하여 밤에 출발하였는데, 호종(扈從)하던 자들이 대부분 길에서 도망가 버린 가운데 비는 내리고 길은 좁고 하므로, 공이 갑작스러운 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연속(椽屬)에게 말하기를, “전군(前軍)이 매우 허술한데, 우리들은 모두 병관(兵官)이니, 앞에서 인도할 수 있다.” 하고, 말을 속히 몰아서 앞으로 나가니, 선조가 물어 보고 공인 줄을 알고는 공을 더욱 중히 여겼다. 대가가 의주에 들어서자, 공이 말하기를, “한성(漢城) 남쪽의 제도(諸道)에서는 반드시 대가가 이미 요동(遼東)으로 건너갔으리라고 여길 터이니, 급히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호남, 영남에 유시(諭示)해서 군대를 일으켜 근왕(勤王)하도록 하고, 또 행재소(行在所)를 모두 알도록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이때부터 조정의 명령이 사방에 통해져서 근왕병(勤王兵)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요좌(遼左)에, ‘조선(朝鮮)이 왜(倭)를 인도하여 입구(入寇)하게 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자, 병부(兵部)에서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어 은밀히 우리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다. 그런데 공은 조정에 있을 때에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신묘년에 접수한 왜서(倭書)를 찾아 가지고 와 있다가 그것을 황응양에게 보이니, 황응양의 의심이 크게 풀리어 그가 황조(皇朝)에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비로소 구원병을 내보낼 일을 의결하였다. 그 후 조승훈(祖承訓), 사유(史儒) 등이 3천의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자, 조야(朝野)가 모두 반드시 승첩(勝捷)을 거둘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조 장군(祖將軍)은 경조(輕躁)하고 지모(智謀)가 적으니, 그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크게 패하였다. 그런데 조승훈은 황조에 돌아가서 심지어 우리 군대가 도리어 왜적을 돕는다고 속여 말하였으므로, 공이 대신(大臣)을 보내어 신변(伸辨)할 것을 청하고, 또 사신을 보내어 대군(大軍)을 보내 주도록 요구할 것을 청하였다.
겨울에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4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동으로 나오자, 공이 그의 군대 지휘하는 것을 보고 상께 아뢰기를, “반드시 공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막하(幕下)에 정 동지(鄭同知), 조 지현(趙知縣) 두 사람이 용사(用事)를 하므로, 좌절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그런데 계사년에 대첩(大捷)을 거두어 평양성(平壤城)을 탈환하였으나, 이윽고 화의(和議)에 이끌리어 다시 전쟁을 하지 않았으니, 실로 정 동지, 조 지현 두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경사(京師)가 수복되자 환궁(還宮)할 것을 강력히 청하여, 10월에 선조가 구도(舊都)로 돌아왔다.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나왔는데, 선성(先聲)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갑자기 그 사실을 알고 공에게 원접사(遠接使)를 맡기자, 공은 명을 받은 즉시 떠났다. 행인이 이틀 길을 하루로 줄여 급히 달려오므로, 행인이 지나는 군읍(郡邑)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이 앞뒤에서 도와줌을 힘입어 관소(館所)의 접대에 흠결이 없었다. 황조(皇朝)의 칙서에, 세자에게 호관(戶官), 병관(兵官)을 대동하고 나가서 전라도(全羅道), 경상도(慶尙道)의 군무(軍務)를 다스리도록 하였으므로, 공은 병관이었기 때문에 접반사의 직임을 해면하고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갑오년 봄에는 호서(湖西)의 역적 송유진(宋儒眞)이 분조(分朝)에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받들고 대조(大朝)에 회합하여 역적을 피하려고 하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그리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윽고 적이 평정되었다. 이해 가을에 소명을 받고 돌아와서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주함(舟艦)을 계획하고 어염(魚鹽)을 자본 삼아 재물을 불려서 면포(綿布) 3만 필을 준비하여 호조(戶曹)로 실어 보냈다.
을미년에는 이조 판서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병신년에는 황조에서 일본(日本)을 책봉(冊封)하는 일로 인하여 부사(副使) 양방형(楊邦亨)이 나와서 공을 자기의 접반사로 삼고자 하므로, 선조께서 이를 윤허하였다. 공이 조정에 하직을 하고 나서는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해면을 요청하여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양방형이 공을 존경하여 말하기를, “동국(東國)에 이런 사람이 있으니, 어찌 외국(外國)이라 하여 가벼이 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정사(正使) 이종성(李宗城)을 가리켜 말하기를, “한갓 부귀한 집의 자제로 문묵(文墨)이나 다룰 뿐이니, 반드시 왕명(王命)을 욕되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러하였다. 겨울에는 양 부사를 전송하였다.
정유년 봄에는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 때 경략(經略) 양호(楊鎬)가 대군을 거느리고 동으로 나왔는데, 적합한 접반사를 신중히 고른 끝에 공을 추천하자, 공이 사양해도 되지 않으므로, 호관(戶官), 공관(工官)을 대동하고 구련성(九連城)으로 가서 경략을 만났는바, 그때에 조목조목 열거한 문답(問答)은 모두가 찬란하게 나라를 빛낸 것들이었다.
이해 9월에 병으로 해면되었다가 11월에 다시 제수되었다. 공은 병조 판서를 모두 다섯 번, 이조 판서를 한 번 역임했는데, 마음씀이 곧고 신실하여 부정한 청탁이 미치지 못했고, 인재를 의용(擬用)하고 제탁(除擢)하는 데 있어서는 오직 그 재능만을 보아서 일체 공의(公義)를 따랐으므로, 감히 다른 길로 진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방(官方)이 질서가 잡히고 사도(仕道)가 이 때문에 맑아졌으니, 조정에 근근이나마 범할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하고 사대부(士大夫)들이 조금이나마 염치를 알게 된 것은 공이 전석(銓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부(兵部)를 관장했을 적에는 수륙(水陸)으로 천병(天兵)이 모여드는 때를 당하여, 본병(本兵)에 관계된 일의 경우 큰 것은 맹렬한 천둥처럼 화급하였고 잗단 것은 쇠털처럼 번잡하였으나, 공은 이를 자유자재로 적절하게 처리함으로써 일이 많이 쌓여도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양 경략이 매양 긴요한 일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이 상서(李尙書)와 의논하리라.” 고 말하였다. 공이 병부를 떠난 뒤에도 항용수(恒用數) 이외에 만 필(匹)의 면포(綿布)가 넘쳐 있었으므로, 부중(部中)에서는 이 상서가 비축한 것이라고 서로 전하면서 오래도록 이를 지켜 간직하였다. 근세에 유능한 병부의 장관을 일컬을 때 율곡(栗谷) 이공(李公)을 말하는데, 공은 충분히 율곡과 맞설 만하거니와, 시기의 몹시 바쁘거나 수월한 점으로 말하자면 공이 더 우월하였다.
무술년 가을에는 황조의 찬획사(贊畫使) 정응태(丁應泰)가 우리 나라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상주(上奏)하였으므로, 선조께서 크게 놀라 공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를 더하여 부원군을 봉하고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 공이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밤중에 출발해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서 황제께 진주(進奏)하고, 다음으로는 날마다 내각(內閣)과 예부(禮部), 병부(兵部)에 나아가 정문(呈文)을 올려 사실을 진술하였는데, 말이 분명 적절하였고 예절에 맞는 거동이 우아하였으므로, 여러 관원(官員)들이 경의를 표하며 승낙하여 말하기를, “국가의 수치는 절로 씻어질 것이니, 공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황제가 마침내 칙서를 내려 우리를 칭찬하고 정응태의 관직을 파면하였다. 기해년에 복명하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여 공에게 전토(田土)와 노비(奴婢)를 하사해서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의논이 정응태가 무주(誣奏)한 일을 가지고 그 죄를 정응태의 접반사였던 백유함(白惟咸)에게 돌려 그를 하옥(下獄)시키고 처벌하려 하였는데, 공이 위관(委官)이 되어 마음속으로 그의 억울함을 알고는 평의(評議)를 매우 분명하게 아뢰니, 선조가 그를 용서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일로 인하여 관직을 해면하였다.
경자년에는 도체찰사 겸 도원수에 임명되어 남쪽 지방의 군대를 시찰하면서 백성을 편안히 할 것[安民]과 해상을 방어할 것[防海] 등 십육책(十六策)을 올렸다. 여름에 영의정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6월에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였는데, 당시 전쟁을 치른 뒤라서 의궤(儀軌)에 관한 전적(典籍)들이 남김없이 불타 없어졌으나, 공이 지시해 주고 재량한 것이 예문에 어긋나지 않았다. 재궁(梓宮)이 산릉(山陵)에 내려졌을 때 한밤중에 잘못 화재가 나서 상하(上下)가 몹시 당황하였는데, 공은 변(變)을 당하여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처리하는 데에 방도가 있어 마침내 이날 장사를 치르고 반우제(反虞祭)까지 마쳤다.
신축년에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공이 다시 나와서 경비를 절약하고[節經費], 전제를 바로잡고[正田制], 성심을 열고[開誠心], 공도를 펴고[布公道], 염치를 면려할[礪廉恥] 일로 청하니, 선조께서 가납하였다. 가을에 노추(奴酋)가 글을 보내 와서 강화(講和)를 요청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 노추는 천조(天朝)로부터 관작을 받았으니, 인신(人臣)의 의리상 사사로이 사귈 수 없거니와, 또 후세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청컨대 그 사자(使者)를 거절하소서.” 하였다.
임인년 봄에는 삼사(三司)가 서로 소장(疏章)을 올려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논박하므로, 공이 소장을 올려 그를 구하려고 했는데, 소장을 미처 올리기 전에 어떤 사람이 권신(權臣)의 사주를 받고 지레 소장을 올려 공을 오로지 공격하였으므로, 공이 인책하여 사직하자, 공을 흔드는 자가 더욱 많아져서 끝내 이 때문에 자리를 떠났다.
갑진년 원조(元朝)에는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변이 있어 선조가 구언(求言)의 전교를 내리자, 공이 천인(天人)의 사이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끝에 가서 말하기를, “성심을 전하는 것은 의당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공평함을 갖는 것은 의당 사람을 등용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세상에서 말을 제대로 안다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호성공(扈聖功)을 책록하였는데, 공이 원훈(元勳)이 되자,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자, 또한 사직을 고하여 해면하였다.
병오년 가을에는 대마도(對馬島)의 오랑캐 의지(義智)가 임진년에 우리 능(陵)을 침범한 적이라고 거짓으로 칭하면서 두 사수(死囚)를 결박하여 바쳐 와서 강화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당시 유영경(柳永慶)이 영상으로서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하여 장차 종묘(宗廟)에 헌부례(獻俘禮)를 행해서 자기의 공을 과시하려 하므로, 공이 그 두 사수를 부산(釜山)에서 죽여 왜사(倭使)에게 보이고자 하니, 유영경이 짐짓 잡아다가 신문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정미년 10월에 선조(宣祖)의 병환이 위독하자, 공이 명을 받고 종묘에 기도를 드렸더니, 그 이튿날에 병환이 조금 나아졌다. 그랬다가 무신년 2월 1일에 선조가 승하하였고, 2일에 폐주(廢主)가 즉위하였다. 선조는 일월(日月) 같은 밝음으로 건강(乾剛)의 덕을 간직하여 일찍부터 신기(神器)를 이끌어 오다가 폐주에게 기탁하였는데, 폐주는 17년 동안이나 동궁(東宮)에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선조가 여러 해를 병석에 누워 있다 보니, 남의 불행을 즐기고 공을 탐하는 자들이 남의 마음을 추측하는 술책을 가지고서 깊은 속내를 틀어막고 단서를 숨긴 채 불의를 선동하여 종횡 무진한 논변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미혹시켰는데, 마침내 정인홍(鄭仁弘)의 봉소(封疏)가 들어가고 나서는 인정이 더욱 현란해져서 화(禍)의 단서가 끝없게 되었다. 그런데 맨 먼저 임해군(臨海君)을 요주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중외(中外)가 몹시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위사(衛士)들은 갑옷을 입고 대궐을 수비하고, 궁문(宮門)은 대낮에도 열지 않은 지가 여러 달이었다. 이때 한 간관(諫官)이 임해군의 일로 공에게 와서 묻는 자가 있자, 공이 말하기를, “복상(服喪) 중인 왕자(王子)에게 아무런 형적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처벌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 후 삼사(三司)가 ‘임해군이 모반을 꾀하니 절도(絶島)에 유찬해야 한다’고 밀고(密告)하자, 공은 사은(私恩)을 온전히 할 것을 청하였는데, 논자(論者)들이 역적을 비호한다고 공을 지목함으로써, 사은을 온전히 하라는 말이 끝내 선류(善流)들의 화근(禍根)이 되고 말았다.
4월에는 좌의정이 되어 도체찰사를 겸하고 총호사(摠護使)가 되었다. 6월에는 목릉(穆陵)의 봉분(封墳)을 마치자마자 삼사가 임해군을 죽이기를 청하고 또 상부(相府)가 정쟁(廷爭)하지 않은 것을 허물하였으며, 정인홍은 이를 이어서 사은을 온전히 하라고 한 잘못을 배척하였다. 그러자 공이 차자를 올려 두 번이나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해년에는 정인홍이 봉소(封疏)를 올려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해서는 안 된다고 대단히 헐뜯었으므로,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그것을 변명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그러자 정인홍의 무리인 박여량(朴汝樑)이 그 사실을 폐주에게 고자질하여 아뢰니, 폐주가 정인홍의 삭적(削籍)에 대한 의논을 수창한 자를 조사해 내어 금고(禁錮)시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공이 경악하여 망국적인 거조라고 말하고, 밤새도록 차자를 작성하여 새벽에 올렸다. 제생(諸生)들은 이때 폐주의 명을 듣고 일제히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 버렸으므로, 공이 또 차자를 올려 그 사실을 진술하였다. 그 후 인대(引對)할 때에 미쳐서는 회재에 관한 일을 네 조목으로 갖추 기록하여 올렸는데, 정인홍이 이로 말미암아 공에게 대단히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돌발적인 화의 조짐이 점차 일어남으로써 명경 선사(名卿善士)들이 발을 포개고 숨을 죽이는 가운데 참소가 고슴도치 털처럼 수없이 모여들어 공을 밀어내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서, 이에 체찰부(體察府)의 병권(兵權)이 너무 중하다는 말을 제창하여 기필코 공을 사지(死地)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날마다 떠나기를 요청하는 것만 일삼았는데, 마침내 임자년에 이르러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폐주는 날마다 국청(鞫廳)에 나가서 털끝만한 것 이상의 일은 모두 몸소 결단하였으므로, 공이 일에 따라 억울한 사연들을 바로잡아 구원하였다. 이때 시인(詩人) 권필(權鞸)은 시(詩)로 죄를 얻어 함께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는데, 공이 자리를 옮겨서 간절히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 술관(術官)이 천도(遷都)의 설(說)을 올린 자가 있어, 재신(宰臣)들이 대부분 그 설에 부화뇌동하여 상의 뜻에 영합하였는데, 공이 직언(直言)으로 그 설을 거절하였다.
이해 4월에는 박응서(朴應犀)가 상변(上變)하였는데, 일을 차마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무신년의 일보다 혹렬하였다. 그 피고(被告) 가운데 무인(武人) 정협(鄭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공은 평소 알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른 대신(大臣)이 그를 천거함에 따라 공이 그를 변방의 수령에 의용(擬用)했을 뿐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련(辭連)으로 연좌되자, 공은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때 삼사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기를 청하였는데, 정부(政府)에서는 정청(廷請)의 거조가 없었으므로, 재신(宰臣) 두 사람이 잇달아 밤낮으로 공의 처소에 찾아와서 화복(禍福)으로 달래었는바, 그 협박적인 말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털이 곤두서게 하였다. 그리하여 자제(子弟)들이 울면서 서로 번갈아 간하자, 공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의연히 말하기를, “나는 양조(兩朝)에서 은혜를 입어 재상 지위에 오른 지 16년이 되었는데, 어찌 거의 죽게 된 나이에 스스로 더러운 이름을 취하여 양조의 은혜를 깊이 저버릴 수 있겠느냐.” 하니, 그 재신이 공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 한음(漢陰)에게로 가서 또한 공에게 말한 것처럼 하였다. 후일에 공이 한음과 함께 국청(鞫廳)에 있을 적에, 대관(臺官)이, 대신(大臣)이 복합(伏閤)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드러내어 배척하자, 한음이 공에게 말하기를, “자네는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의 의논은 무신년의 의논에 있네.” 하였다. 옥사(獄事)가 날로 급해지고 화염(禍燄)이 날로 일어나서 대관 정조(鄭造), 윤인(尹訒) 등이 앞장서서 폐모론(廢母論)을 주창하자, 공이 한음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을 곳을 얻었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위해서 죽는다면 용맹을 손상할 것이거니와, 모후(母后)를 위해서 죽지 않는다면 의리를 손상하게 될 것이네. 어찌 차마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정조, 윤인에게 가리운 바가 되어 천하 후세에 누(累)를 끼치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이 이미 《춘추(春秋)》를 속여 인용하고 있는데, 나도 《춘추》를 조금은 익혔으니, 의당 경(經)을 인용하여 의리에 의거해서 그들의 사설(邪說)을 깨뜨려야겠네. 그들이 말하는 역적에 대해서는 참으로 역적임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신하를 토벌하지 못하고 임금의 어머니를 폐하려는 것이니, 그들이 참으로 역신(逆臣)일세. 혹 헌의(獻議)를 하게 되면 한 장의 차자를 올려야겠네.” 하고, 이날 저녁에는 집에 가서 조의(朝衣)도 벗지 않고 외랑(外廊)에 앉아 있었다. 그러자 자제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절멸되었는데, 나는 불세(不世)의 지우(知遇)를 입은 대신(大臣)으로서 어찌 남은 목숨을 아끼어 이 광경을 차마 볼 수 있겠느냐. 의당 들것에 실린 시신(尸身)으로 돌아오기를 기할 뿐이다.” 하였다. 대사헌 최유원(崔有源)이 와서 공을 만나자, 공이 말하기를, “만대(萬代)에 숭앙(崇仰) 받는 일이 이번 거조에 달려 있다.” 하였는데, 최유원은 본디 공을 존경해 왔던 터라, 이에 의논을 결정하여 2, 3인의 동료와 함께 정조, 윤인과 의논을 달리하였으니, 그 즉시 모후를 폐하지 않은 것은 바로 공의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이 소(疏)를 작성하여 한음에게 보여서 다듬어 놓고 기다리던 중에 공이 일찍이 정협(鄭浹)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떠남으로써 일을 이미 이룰 수 없게 되었다. 폐주가 마침내 공의 상직(相職)을 체직시키고 서추(西樞)에 임명하였다.
을묘년에는 공의 장자 성남(星男)이 적노(賊奴)의 고발로 인하여 하옥(下獄)되자, 가인(家人)이 세속을 따라 뇌물을 쓰자고 청하니, 공이 정색을 하면서 그리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옥사가 이윽고 변백(辨白)되었다. 겨울에는 정인홍이 상소하여 공의 죄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하자, 삼사가 공을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상소문은 궁중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공은 동쪽 교외에 셋집을 얻어 우거하다가 망우리(忘憂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그 곳으로 옮겨 가 살았는데, 얼굴에 조금도 근심스러운 빛이 없이 산수(山水) 사이를 배회하였고, 거친 음식도 넉넉지 못했으나 마음 편히 지냈다. 한번은 청평(淸平)의 수석(水石)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노새[騾]를 타고 가서 완상하면서 전부 야로(田夫野老)들과 섞여 놀았는데, 아무도 공이 귀인(貴人)인 줄을 알지 못했다.
정사년 11월에는 폐모론(廢母論)이 마침내 결정되어 이이첨(李爾瞻), 김개(金闓), 허균(許筠) 등이 역적 무리들을 불러서 상소문을 들고 대궐로 들어갔는데, 외람되이 태학생(太學生)이라 칭하는 자들 또한 사주(使嗾)를 받고 모여들어 날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온 나라 안이 물끓듯 소란하고 생명을 가진 자마다 모두가 기(氣)를 잃어버렸다. 이때 공은 침식(寢食)을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비분 강개해 마지않았는데, 갑자기 큰 천둥 소리가 집을 흔들자, 공이 말하기를, “하늘이 경계하여 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추부랑(樞府郞)이 상지(上旨)를 가지고 와서 헌의(獻議)를 하게 하므로, 공이 한창 병을 앓던 중이라, 시자(侍者)가 붙들어 일으키니, 공이 붓을 휘둘러 다음과 같이 썼다.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 계책을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임금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옛날의 밝은 교훈입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완악한 아비와 어리석은 어미가 항상 우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파게 하고 창고를 수리하게 하였으니, 위태롭기가 또한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순은 부르짖어 울고 원망하면서도 사모하여 부모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아비는 비록 인자하지 않을지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춘추》의 의리가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기(禮記)》에 의하면 “공급(孔伋)의 아내가 된 사람은 분명히 공백(孔白)의 어머니이다.”라고 하였으니, 성효(誠孝)가 중한 곳에 어찌 간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리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 안에 장차 점차로 교화될 희망이 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전하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금에 하실 도리로 말씀드리자면, 우순의 덕을 본받아서 능히 효로써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여움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이 의논이 들어가자, 보는 이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심지어는 몰래 서로 눈물을 닦는 이도 있었다. 삼사가 공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하기를 청하여 무릇 네 번이나 배소(配所)를 바꾸어 삼수(三水)로 결정하였는데, 폐주가 명하여 북청(北靑)으로 옮기게 하였다. 무오년 정월에 배소에 도착하였다. 3월에 병을 얻었는데, 이상한 꿈을 꾸고 말하기를, “내가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또 노추(奴酋)가 요광(遼廣) 지방을 침범하므로, 황조(皇朝)에서 우리 군대를 보내 달라고 요구했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라가 다시는 경쟁(競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작고하니, 이달 13일이었고 향년이 63세였다. 공이 일찍이 가인(家人)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잘못 섬겨 이런 견책을 입었으니, 내가 죽거든 조의(朝衣)로 염(殮)을 하지 말고 입고 있는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를 사용하라.” 하였다. 7월에 포천(抱川)의 선영(先塋)으로 운구(運柩)해 두었다가 8월에 참찬공(參贊公)의 묘(墓) 왼쪽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앞서 도하(都下)의 인민들은 공이 유배된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는 조신(朝臣)으로부터 아래로는 여러 조(曹)의 고리(故吏), 시대(廝臺), 여졸(輿卒)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뵙기를 요청하였고, 일로(一路)의 촌민(村民)이나 여염집 부인들도 서로 다투어 와서 우러러 절하였으며, 선비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공의 풍의(風儀)를 사모하여 존경해서 본보기로 삼았다.
공이 작고함에 이르러 원근에서 부음(訃音)을 듣고 회곡(會哭)한 사람들로 말하자면, 부의(賻儀)를 가지고 와서 조문한 수재(守宰), 변장(邊將)과 제문(祭文)을 지어 가지고 와서 술잔을 부어 제사한 시골 사부(士夫)들이 그 얼마였는지 알 수 없었고, 초종(初終) 때부터 문 밖에 와서 지키고 있다가 빈소(殯所)를 마련한 뒤에야 돌아간 사람들 또한 그 얼마였는지 알 수 없었으며, 영남(嶺南)의 선비 중에는 평소 공과 서로 알지 못한 처지인데도 천리 길을 와서 부의한 이가 있었다. 장사를 마친 뒤에는 손수 술 한 잔, 고기 한 접시를 갖추어 3수(首)의 시(詩)와 제문(祭文)을 가지고 묘하(墓下)에 와서 곡(哭)하고 상주(喪主)도 만나지 않은 채 떠난 이가 있었는데, 그 또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청과 포천의 제생(諸生)들은 재목을 모아서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공을 향사(享祀)하였는데, 조정에서 여기에 대해 금령(禁令)까지 내렸으나 끝내 저지할 수가 없었다. 아, 공이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이런 존경을 받았던가. 의열(義烈)이 충분히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였기에 인심을 깊이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 누가 공론(公論)이 후세에 있다고 말하였던가.
공은 풍채가 엄중하고 도량이 활달하였으며, 널찍한 이마와 우뚝한 코에 뺨은 두툼하고 살결은 희었으며, 긴 수염은 이리저리 휘날렸다. 키는 보통 사람을 넘지 못했으나 기개는 온 세상을 덮었고, 행실은 외면적인 것을 꾸미지 않았으나 동작마다 규칙이 있었다. 월등하게 세속을 초월하였고, 여유 있게 사물에 잘 대처하였으며, 광명(光明)하여 잗단 일에 얽매이지 않았고, 정대(正大)하여 특별히 뛰어났으며, 마음이 안온하여 순리대로 처신하였고, 정취가 담박하여 때가 끼지 않았다.
그리고 선영을 받듦에 있어서는 의절(儀節)이 물(物)보다 돈독했고, 꾸밈은 정성에 가리워졌다.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범하면서 숨김이 없었고, 꺾이어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동기간에 우애함에 있어서는 큰형 받들기를 마치 어버이 섬기듯 하였고, 중형과 숙형을 마치 한몸처럼 대우하였다. 종족들과 서로 친함에 있어서는 빈궁한 이나 현달한 이에게 각각 도리를 다하였고, 소원하거나 친근함에 서로 간격이 없었다. 향당(鄕黨)에 있어서는 친구와의 사귀는 정을 변치 않았고, 지우(智愚) 간에 모두 원만하게 대하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깊은 방구석을 마치 번화한 대로(大路)처럼 여기고, 침실(寢室)을 마치 조정처럼 여기어 매우 근신하였다. 관직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마치 포정(庖丁)이 자유자재로 쇠고기를 바르듯, 편작(扁鵲)이 담장 너머에 있는 사람을 환히 보듯, 능란한 솜씨와 밝은 안목으로 여유 있게 처리하였다. 교제(交際)를 함에 있어서는 신의(信義)를 두터이 부지하고, 승낙(承諾)하는 것을 반드시 신중하게 하였다. 남에게 물건을 주거나 취함에 있어서는 청렴하면서도 명예를 취하려 하지 않았고, 구분을 하되 이견(異見)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집안을 위함에 있어서는 수묘(數畝)의 토지도 없고, 바구니에 남겨 준 돈도 없었다. 남의 시비(是非)를 논함에 있어서는, 선(善)을 좋게 여기는 데는 넉넉하고 악(惡)을 증오하는 데는 부족하였다. 훼예(毁譽)의 사이에 처신함에 있어서는 고운 것이나 추한 것이 밝은 거울에 거짓 없이 제대로 비치듯 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갖추고 대절(大節)로 이것을 통괄하였으므로, 벼슬을 처음 시작한 때부터 선조(宣祖)에게 알아줌을 입었던 것이다.
임진년의 난리 때에는 분골쇄신토록 충성을 다하였으니, 첫째도 공심(公心)이요 둘째도 공심으로, 중병(中兵)을 총괄해서 거느리고 참혹한 난리를 평정해 내었다. 들어와서는 사류(士流)의 으뜸이 되고, 나가서는 사방 변방의 울타리가 되어, 마침내 왕운(王運)이 거듭 밝아지게 하고, 재상의 자리에 올라서 중흥(中興)의 원공(元功)이 되었으니, 그 위대한 사업(事業)은 충분히 당(唐) 나라 초기의 명상(名相)인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와 서로 오르내릴 만하거니와, 정사년의 한 마디 말은 천지(天地)를 지탱시키고 일성(日星)처럼 빛나서, 몸은 비록 꺾이어 패했으나 인도(人道)가 이로 말미암아 서게 되었으니, 임진년의 공에 비하면 또한 더욱 훌륭하지 않겠는가.
공이 소싯적에는 기개와 의리로써 자부하다가 늦게야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기해년에 상직(相職)을 해면한 이후로는 세상일을 끊어 버리고 경사(經史)에만 전념하였다. 그리하여 학문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전모수사(典謨洙泗)로부터 염락관민(濂洛關閩)에 이르렀고, 문장(文章)을 하는 데 있어서는 《좌전(左傳)》과 《국어(國語)》로부터 진한(秦漢) 시대의 문장까지 연구하여, 20년 동안을 일찍이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자품이 고상하기 때문에 견해 또한 고상하였고, 욕심이 적기 때문에 이치가 절로 밝아졌다. 도(道)의 오묘함으로 말하자면 밝고 광대한 근원을 홀로 깨달았고, 실천한 것을 관찰해 보면 털끝만큼의 세세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조복(朝服)을 입고 묘당(廟堂)에 앉아 있으면 구정 대려(九鼎大呂)와 같은 존재였고, 옷깃을 풀어 헤치고 편히 쉬던 곳은 구학 운수(丘壑雲水)의 사이였다. 인품이 매우 고상하여 세속 밖에 뛰어났으니, 칼 차고 신 신은 채로 황각(黃閣)에 오르는 영광이나 영원토록 국가의 운명과 함께하는 공신(功臣)의 책록 같은 것들은 다만 공에게는 하나의 뜬구름일 뿐이었다. 그런데 세속의 천박한 자들이야 공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겠으나, 비록 공을 안다고 칭하는 자들도 또한 공을 고작 세상 따라서 명성이나 세운 사람의 반열에 놓아 버리니, 사람을 알기가 참으로 쉽지 않도다.
조정이 당파(黨派)를 만들어 서로 다툰 지 40여 년 동안에 현불초(賢不肖)를 막론하고 누구나 어느 한쪽을 표방(標榜)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홀로 중립(中立)하여 한쪽으로 기울지 않아서 우뚝하기가 마치 태산 교악(泰山喬岳)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공을 헐뜯지 못하였다. 그런데 임인년 이후로는 시사(時事)가 날로 어그러져서 뭇 정인(正人)들이 자취를 감춤으로 인하여 공이 비로소 조정에서 편치 못하게 되었다. 그 후 비록 재차 상위(相位)에 오르긴 하였으나, 사양하고 떠나 버렸다. 그리고 폐주(廢主)의 초정(初政) 때에 다시 중서(中書)에 들어간 것은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인 까닭에 마지못해서 다시 나갔던 것인데, 세도(世道)는 이미 크게 어긋나 버린 뒤였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공은 문장(文章)에 대해서는 본래 하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법을 취한 것은 고아(古雅)하여 웅건하고 뛰어나서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래서 장차(章箚) 등의 글은 품격이 높아서 위로 서한(西漢), 동한(東漢)의 문장에 근접하고 간혹 강좌(江左)의 기풍도 섞였으며, 척독(尺牘)은 명쾌하여 일정한 법식을 초월하였고, 필적(筆跡)은 호방하면서도 법칙이 있었다. 그리고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현방(玄放)함과 선도(仙道), 불도(佛道)의 묘오(妙悟)에 대해서는 그 본지(本旨)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 없고, 천문 지리(天文地理)의 이론과 서화 의술(書畵醫術)의 기예까지도 모두 통효(通曉)하였으나, 더 끝까지 연구하지는 않았다. 일찍이 함양명(涵養銘)과 치욕(恥辱), 서상(書床), 양야(養夜), 계주(戒晝), 경석(警夕) 등 다섯 편의 잠(箴)을 지어서 스스로 일과(日課)의 수양 공부로 삼았다. 시문(詩文) 약간권(若干卷)과 조천창수(朝天唱酬) 1권, 주의(奏議) 2권, 계사(啓辭) 2권, 《사례훈몽(四禮訓蒙)》 1권, 《노사영언(魯史零言)》 15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소싯적의 호는 필운(弼雲)이고 혹은 청화진인(淸化眞人)이라고도 칭하였는데, 만년에는 백사(白沙)라 호칭하였고 또는 동강(東岡)이라고도 불렀다.
아들이 두 명인데, 큰아들 성남(星男)은 음보(蔭補)로 벼슬하여 광흥창 수(廣興倉守)가 되었고, 다음 정남(井男)은 임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또한 군수(郡守)가 되었다. 딸 한 명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이 두 명인데, 큰아들 규남(奎男)은 계축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다음은 기남(箕男)이다. 딸이 두 명인데, 하나는 학관(學官) 권칙(權侙)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어리다. 성남의 초취(初娶)는 판서 권징(權徵)의 딸로서 1녀 1남을 낳았는데, 딸은 진사(進士) 최욱(崔煜)에게 시집갔고, 아들은 시중(時中)이다. 계취(繼娶)는 판관(判官) 김계남(金季男)의 딸로서 4녀 3남을 낳았는데, 아들은 시정(時挺)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정남은 참의(參議) 윤의(尹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술(時術)이고 딸은 어리다. 규남은 권대순(權大純)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시행(時行)이다. 기남은 박제남(朴悌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내가 소싯적에 청강(淸江)의 문하(門下)에서 공을 만났는데, 한 번 보고 즉시 망년교(忘年交)가 되었고, 그 후로 공과 한 골목에 마주하여 30년을 살았다. 생각건대, 공은 남을 쉽사리 허여하지 않았고, 나 또한 세인(世人)들과 잘 부합하지 못했는데, 공과는 형해(形骸)를 초월하여 서로 허여하여 정취와 의향이 간혹 말하지 않고도 서로 똑같을 때가 있었고, 만년에는 더욱 서로 계합(契合)하였다.
공은 매양 고금(古今)을 담론할 때마다 논의가 넘쳐나왔는데, 전인(前人)의 법칙을 답습하지 않고 스스로 가슴속에 주관을 세워서, 고명(高明)하고 투철(透徹)하면서도 처음부터 고현(古賢)에 위배된 적이 없었으니, 그 호쾌(豪快)한 자품은 근대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항상 세상에 나를 알아줄 이가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었는데, 공이 떠남으로써 나 혼자 외롭게 될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일찍이 공을 논하기를, “공이 추로(鄒魯)에서 났더라면 조만(操縵)의 무리를 벗어났을 것이고, 열국(列國) 시대에 났더라면 거의 정(鄭) 나라 동리(東里) 자산(子産)의 정사(政事)를 했을 것이다. 문정공(文靖公) 사안(謝安) 같은 인품을 지녔으나 시대와 서로 맞지 않았고, 충헌공(忠獻公) 한기(韓琦) 같은 덕량(德量)이 있었으나 화(禍)의 그물에 걸렸다. 그렇다면 공보다 뒤에 나온 사람은 또한 조석간에 좋은 시대를 만나는 이도 있을 법하다.” 하였다. 인하여 기억하건대, 공이 유배되어 갈 때에 글에 이르기를, “오늘에야 요동공(遼東公) 적흑자(翟黑子)를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 하였는데, 이는 한음(漢陰)을 가리킨 것이었으므로, 나는 여기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의 문장은 돈사(惇史)를 지을 수 없는 게 부끄러우니, 어떻게 공의 행적을 영원히 전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그 옛날 우리 선조 대왕께서 / 昔我宣祖
훌륭한 덕으로 왕위에 올라 / 秉德當乾
영재를 기르고 축적하기를 / 毓才貯英
밭에서 곡식 가꾸듯이 하여 / 若苗藝田
제철에 비 내려 적시어 주고 / 時雨膏之
따스한 바람으로 잎 피우니 / 條風發之
오직 이때 뛰어난 선비들이 / 惟時髦俊
배출하여 창성한 시대 이뤘네 / 蔚乎昌期
이때에 누가 그 으뜸이었던고 / 孰爲其宗
바로 우리 이공이었다네 / 曰我李公
아, 왕께서 공에게 명을 내리되 / 繄王有命
군신 간에 우리 서로 계합하니 / 契合昭融
동관의 빛나는 저 서적들을 / 煌煌東觀
너는 모두 융회 관통할 것이요 / 汝其會通
나에게 화려한 곤룡포 있으니 / 我有華袞
네가 분미를 수놓아 꾸미어라 / 汝其粉米
국운이 큰 재액을 만났으니 / 邦運百六
홍수를 누가 건네 줄꼬 하였네 / 滔天疇濟
그래서 공은 배와 노가 되어 / 公爲舟楫
해진 옷으로 물 샌 틈을 막으니 / 繻有衣袽
임금의 자리가 다시 안정되고 / 斗極天奠
국운이 처음같이 되었도다 / 國步如初
왕이 이르되 네가 가상하구나 / 王曰汝嘉
너는 나의 팔이요 다리로다 / 汝我股肱
무슨 직임을 너에게 줄거나 / 畀之伊何
영상의 직임을 받아라 하고 / 元輔是膺
공을 맨 뒤에까지 남겨 두어 / 遺之于後
국가의 원대한 계책 돕게 했네 / 卑贊洪圖
옛날의 인재를 이미 거두어서는 / 故劍旣收
큰 계책을 거의 펴게 되었는데 / 庶展訏謨
일이 그렇지 못한 게 있었으니 / 事有不然
세상은 창날이요 공은 방패였네 / 世矛公盾
그래서 지주가 중간에 꺾어지고 / 砥柱中摧
정승의 별이 밤중에 떨어졌도다 / 台階宵隕
그 변론한 말은 하도 당당하여 / 其說堂堂
소인들의 예봉을 꺾었거니와 / 折彼之角
그 절의는 이와 같이 우뚝하니 / 其節卓卓
참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 何有謠諑
아, 훌륭하신 선조 대왕이여 / 於皇宣祖
선조 대왕께는 신하가 있었도다 / 宣祖有臣
금석은 혹 부스러지기도 하련만 / 金石或泐
해와 달은 영원히 새로우리라 / 日月長新
삼대를 추존하고 제사를 내리니 / 貤官賜祭
성대한 예가 이에 두루 미쳤네 / 殷禮斯溥
천도는 본디 미리 정해진 것이라 / 天固有定
은혜가 실로 특별한 대우였도다 / 恩實異數
영화가 공에게 무슨 상관이며 / 榮於公何
욕됨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리요 / 辱於公何
영화와 욕됨이 가거나 오거나 / 榮辱去來
공에게는 좋고 나쁠 게 없어라 / 公不少多
천지간에 하나의 참다운 것 / 一味眞腴
신령한 성정은 온전히 지니었고 / 靈性則全
탁세에 남은 쓸모 없는 공명은 / 濁世粃糠
섶 다 타도 불은 전하듯 할 뿐이네 / 火盡薪傳
공은 서쪽 바다로 동쪽 바다로 / 咸池扶桑
바람을 타고 훨훨 날아다니리 / 乘風飄然
후일에도 백세가 돌아올 게고 / 百世在後
이전에도 백세가 지나갔는데 / 百世在前
공은 그 사이에 있어 / 公在其間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도다 / 不愧不怍
내가 명을 지어 후세에 알리노니 / 我銘詔之
사리에 어두운 자들이 진작하리라 / 昧者其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신흠(申欽)은 찬(撰)하다.
[주-D001] 정의(亭疑) :
의법(疑法)에 대해서는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균평하게 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 생의(生議) :
미결수(未決囚)에 대하여 되도록 죽이지 않기 위해서 사죄(死罪) 이하로 논죄(論罪)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D003] 중획(重獲) :
원래의 뜻은 거듭 찾는다는 의미인데,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진(晉) 나라 대부(大夫) 봉씨(逢氏)가 패전(敗戰)하여 두 아들을 전차(戰車)에 태우고 도망하다가, 두 아들이 다른 사람을 구하고자 차에서 내리려고 하므로, 봉씨가 말하기를, “내가 저 나무 밑에서 너희들의 시체를 거듭 찾으리라[重獲在木下].” 하고, 두 아들을 내려 주었는데, 과연 두 아들이 다음날 그 나무 밑에 죽어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곧 반드시 죽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左傳 宣公 十二年》
[주-D004] 조만(操縵)의 무리 :
조만은 거문고의 줄을 조정해서 음색(音色)을 고르게 타는 것을 이른다. 옛날 태학(太學)의 교육에서, 가령 거문고를 배울 경우에는 거문고의 줄을 조정해서 음색을 고르게 하지 못하면 거문고를 자유자재로 탈 수 없다고 하였다. 조만의 무리를 벗어난다는 말은 곧 도학(道學)의 경지가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禮記 學記》
[주-D005] 요동공(遼東公) …… 되었다 :
위 태무제(魏太武帝) 때에 요동공 적흑자(翟黑子)가 포(布) 천 필을 뇌물로 받았는데, 그 사실이 발각되자, 적흑자가 저작랑(著作郞) 고윤(高允)에게 꾀하여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물으시면 사실대로 고해야겠는가, 숨겨야겠는가?” 하니, 고윤이 말하기를, “공은 유악(帷幄)의 총신(寵臣)으로서 죄가 있으면 사실대로 고할 경우 혹 용서를 받을 수도 있겠거니와, 거듭 주상을 속여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적흑자는 끝내 사실대로 고하지 않아서 죽고 말았다. 그 후 고윤이 사초(史草)에 관한 일로 최호(崔浩)와 함께 잡혀 죽게 되자, 태자(太子)가 고윤을 살리고자 하여, 고윤에게 최호에게만 덮어씌우고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도록 권하였으나, 고윤은 임금 앞에 불려 가서 자기가 관여한 것을 사실대로 말하니, 임금이 신의 있고 정직한 사람이라 하여 죄를 용서해 주었는데, 고윤이 물러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궁(東宮)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은 적흑자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해서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6] 돈사(惇史) :
덕행(德行) 있는 이의 언행(言行)을 기록하여 후인(後人)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7] 화려한 …… 꾸미어라 :
신하가 임금을 지성으로 보좌하는 것을 이른다.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이르기를, “신하는 바로 나의 팔다리요 귀와 눈이다 …… 내가 옛사람의 모습을 보아서, 해[日]와 달[月]과 별[星辰]과 산(山)과 용(龍)과 꿩[華蟲]을 무늬로 만들고, 종묘의 술그릇[宗彛]과 물풀[藻]과 불[火]과 흰쌀[粉米]과 보[黼]와 불[黻]을 수놓아 옷을 만들고자 하니, 네가 그것을 만들어다오.” 한 데서 온 말인데, 특히 흰쌀은 백성을 기르는 의미를 취한 것이라 한다. 《書經 益稷》
추충분의평난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공(李公)의 행장(行狀)
공의 휘(諱)는 모(某)이고 자는 모이며, 그 선대는 경주인(慶州人)이다. 원조(遠祖)인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은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으로 고려(高麗)의 명상(名相)이 되었는데,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 일컫는다. 고(考) 몽량(夢亮)은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을 섬겨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렀고, 최 부인(崔夫人)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병진년 10월 경자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막 태어나서 2일 동안은 젖을 빨지 못했고 3일 동안은 울지도 못했으므로, 가인(家人)들이 이를 걱정하였다. 그러자 참찬공(參贊公)이 고사(瞽史)를 시켜 점을 쳐 보게 하니, 고사가 축하하며 말하기를,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 아이는 의당 귀(貴)가 인작(人爵)의 극에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재주가 뛰어나고 식견과 도량이 있어 보통 아이들과 월등히 달랐으므로, 참찬공이 기특하게 여겨 이르기를,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가문(家門)을 창성하게 만들 것이다.” 하였다. 8세 때에 비로소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뛰어나게 총명하므로 참찬공이 명하여 검금(劍琴) 두 글자로 변구(騈句)를 짓게 하니, 공이 즉시 부르기를, “칼에는 장부의 기상이 있고, 거문고엔 천고의 소리가 담기었네[劍有丈夫氣 琴藏千古音].”라고 하였으므로, 들은 이들이 장차 대성(大成)할 것을 알았다.
9세 때에 부친을 여의고는 마치 성인(成人)처럼 너무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졌고, 소식(素食)만 먹으면서 삼년상을 마쳤다. 12, 3세 때에는 이미 기백을 자부하고 의리를 좋아하여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공이 일찍이 새 저고리[襦]를 입었을 때 다 해진 옷을 입은 이웃 아이가 그것을 보고 입고 싶어하자, 공이 즉시 벗어서 그에게 주었고, 또 일찍이 자기가 신고 있던 신을 벗어서 맨발로 다니는 사람에게 주고 돌아왔다. 그러자 최 부인이 공의 뜻을 시험해 보기 위해 거짓 성을 내어 나무라니, 공이 대답하기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차마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므로, 최 부인이 감탄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하였다. 겨우 15세가 되어서는 건장하고 용맹을 좋아하여 씨름이나 공차기 같은 소년(少年)들의 유희를 잘하였으므로, 최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준절히 나무라자, 공이 통렬히 반성하여 지난날의 생각을 바로잡고 학문에 힘썼다.
16세 때에 최 부인이 별세하자, 공은 거상(居喪)하면서 너무 애통해하여 거의 죽을 뻔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는 학궁(學宮)에 유학하여 학문이 더욱 성취되자 명성이 성대하였다. 25세에는 경진년의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그 명년에는 예문관(藝文館)에 뽑혀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는데, 선조(宣祖)께서 장차 《통감강목(洞鑑綱目)》을 강(講)하려고 태학사(太學士)에게 명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한 재능 있는 신하들을 미리 선발하게 하자, 당시 태학사이던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5인을 천거하여 올렸는바, 공이 실로 여기에 참예되었다. 그러자 선조께서 대내(大內)에 소장한 《통감강목》 한 질을 하사하고, 또 명하여 이문(吏文), 한어(漢語), 시사(試射) 등 여러 가지 번잡한 기예로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윽고 오랫동안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옥당(玉堂)에 뽑혀 들어가서 정자(正字)가 되었다.
갑신년에는 저작(著作)으로 승진되어 붕당(朋黨)을 짓는 대사간(大司諫) 이발(李潑)을 당연히 체직해야 한다고 논했는데, 이 때문에 당로자(當路者)에게 크게 거슬리어 마침내 병을 핑계로 세 차례나 사직을 고하자, 선조께서 하교하기를, “이모(李某)는 옥당을 떠나서는 안 되니, 사직장을 올리지 못하게 하라.” 하고, 이내 박사(博士)로 승진시켰다. 을유년 봄에는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옮겨 제수되었고, 차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어 천거에 의해 이조 좌랑(吏曹佐郞), 지제교(知製敎)가 되었는데, 전랑(銓郞)을 세상에서 열관(熱官)이라 호칭하였으나, 공은 전랑의 생활이 마치 한사(寒士)처럼 쓸쓸하였다. 일찍이 관직(館職)에 있던 두 조사(朝士)가 은밀히 전조(銓曹)에 들어가기를 꾀하여 빈객(賓客)들이 그를 위해 많은 설득을 벌였으나, 공은 본래부터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전혀 듣지 않은 것처럼 하였다. 이윽고 수찬(修撰)으로 체직되었다. 병술년에는 또 정언이 되었고, 정해년에는 교리(校理)로 승진되었다가, 무자년에는 다시 이조(吏曹)에 들어가서 정랑(正郞)이 되었다.
기축년에는 체직되어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이해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謀反) 사건이 일어나서 상(上)이 친히 임어하여 죄수를 국문할 적에 공이 문사랑(問事郞)으로 입시(入侍)하였는데, 명민(明敏)함이 상의 뜻에 들었으므로, 선조가 매양 이름으로 공을 불러 이르기를, “이모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라.” 하니, 동료들은 공수(拱手)만 하고 있을 뿐 감히 공의 재능을 바라지 못하였다. 매양 대신(大臣)이 죄의 경중을 평의(評議)할 적에는 공이 그 사이에 주선하여 애써 평번(平反)을 따름으로써 온전히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경인년에는 응교(應敎)로 승진되었다가 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 사인(舍人)을 거쳐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다. 일찍이 강연(講筵)에 입시했을 때 선조가 특별히 공을 앞으로 불러 놓고 문사랑으로 있을 때의 일을 이르면서 연거푸 고재(高才)라 칭찬하고, 이어 직제학(直提學)에 임명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되었고, 문신 정시(文臣庭試)에서 공이 장원하여 구마(廏馬)를 하사받았다.
신묘년 봄에는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전임되어 재정(財政)을 정밀히 조사하고 계산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니, 겨우 한 달 남짓 만에 창고가 충만하여졌다. 그러자 호조 판서(戶曹判書) 윤공 두수(尹公斗壽)가 공을 대단히 중하게 여겨 감탄하며 말하기를, “문필(文筆)에 종사하는 선비가 능란하게 전곡(錢穀)을 다스려 내니, 참으로 통달한 재주로다.” 하였다. 역적을 치죄한 공훈을 책록하여 공에게는 추충분의평난공신(推忠奮義平難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때마침 사화(士禍)가 일어나서 상공(相公) 정철(鄭澈)이 화수(禍首)가 되었는데, 삼사(三司)가 죄를 꾸며 얽어서 장차 부도죄(不道罪) 이상으로 꾸미려고 하므로, 정공(鄭公)은 강가로 나가서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화기(禍機)가 매우 급박하여 정공의 문생(門生)이나 친구들도 두려워서 감히 그를 방문하지 못하였는데, 공만이 유독 방문하여 장시간 동안 조용히 담화를 나누었으므로, 남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공이 승지(承旨)가 되었는데, 대간(臺諫)이 정철의 죄안(罪案)을 조당(朝堂)에 써 붙여 게시하기를 청하고, 직무 수행에 태만하다는 것으로 공을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얼마 있다가 다시 승지가 되었다. 당시에는 명류(名流)로서 시의(時議)에 거슬린 사람들을 일체 당인(黨人)으로 지목하여 차례로 거의 다 폄적(貶謫)시키던 터라, 한 대관(臺官)이 전날의 유감을 가지고 장차 공을 찬출(竄黜)하는 가운데 끼워 넣으려고 하였는데, 대사헌(大司憲)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힘써 공을 구해(救解)함으로써 공이 이를 힘입어 죄를 면하였다. 이어 차례에 따라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임진년 4월에는 왜노(倭奴)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신립(申砬)이 패했다는 보고가 이르자, 중외(中外)가 모두 두려워하고 놀랐다. 상(上)은 이미 서쪽으로 몽진할 계책을 정하고 좌상(左相) 유성룡(柳成龍)을 명하여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자, 공이 동료에게 말하기를, “좌상이 여기에 머무르면 일을 할 수가 없다. 지금 장차 상국(上國)에 가서 하소연할 사명(辭命)이 반드시 그의 손에서 나와야 한다.” 하고, 유도대장을 고쳐 임명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적보(賊報)가 날로 급박해지자, 공은 스스로 순국(殉國)하기를 결심하고, 매양 퇴청(退廳)하여서는 외사(外舍)에 거처하면서 안쪽으로 통하는 문을 걸어잠그고 집안 일로 자신을 관련시키지 못하도록 금지하여 손위의 누이와도 서로 결별하였고, 측실(側室)이 한 번만이라도 대면(對面)하기를 울면서 청했으나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달 그믐날 밤에 대가(大駕)가 장차 출발하려 하는데, 백관(百官)은 모이지 않고 비는 내리고 밤은 칠흑 같았다. 이때 중전(中殿)께서 홀로 시녀(侍女) 십수 인을 데리고 인화문(仁和門)으로 걸어 나가자, 공이 촛불을 잡고 앞에서 인도하였다. 거가(車駕)가 이날 밤에 임진(臨津)을 건넜다. 그 다음날 상이 수행한 여러 재신(宰臣)들을 불러 놓고 말채찍으로 땅을 두드리면서 묻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계책을 써야겠는가?” 하자, 여러 재신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므로, 공이 맨 먼저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병력(兵力)으로는 적(賊)을 방어하기에 부족하니, 오직 서쪽으로 천조(天朝)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는 일이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좋은 계책이라 하였다. 송도(松都)에 이르러서는 공을 특별히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승진시키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하고 명하여 두 왕자(王子)를 호위하고 먼저 평양(平壤)으로 가도록 하였다. 이윽고 어가(御駕) 또한 평양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이모는 오랫동안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생각이 바르고 신실하였으니, 의당 올려 발탁하여 중임(重任)을 위임해야 한다.” 하고, 얼마 안 가서 형조 판서 겸 오위도총관(刑曹判書兼五衛都摠管)을 제수하였다. 얼마 후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어서는 이공 덕형(李公德馨)과 함께 입대(入對)하여 속히 천조에 가서 구원병을 주청(奏請)할 것을 청하니, 대신(大臣)들이 처음에는 공과 의견을 달리했으나 공이 극력 논쟁하여 그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또 삼도(三道)에 조도관(調度官)을 나누어 파견하여 군흥(軍興)을 관장하게 해서 끝내 재조(再造)의 공을 이루어 낸 것도 공의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어 병조판서 겸 홍문관제학 지경연춘추관동지성균관사 세자좌부빈객(兵曹判書兼弘文館提學知經筵春秋館同知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에 임명되었다.
임진(臨津)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적들이 진격하여 대동강(大同江)을 핍박해 오자, 이공 덕형이 청하기를, “배를 타고 가서 적장(賊將) 현소(玄蘇)와 조신(調信)을 만나서 진격을 늦추도록 도모하되, 그들이 따르지 않으면 장차 두 적의 머리를 베어 오겠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두 적은 매우 하찮은 존재이므로, 그들을 죽여 보았자 적에게 손상을 입히기에는 부족하고 한갓 우리가 먼저 불의(不義)의 명칭을 부담하게 되니, 그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여,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상이 여러 수행한 신하들을 모아 놓고 행행(行幸)할 곳을 의논할 적에, 혹자가 말하기를, “함흥(咸興)은 한쪽으로 치우쳐 멀고 군량(軍糧)도 많아서 지킬 만합니다.” 하므로, 공이 이공 덕형과 함께 누차 쟁론하여 말하기를, “함흥은 상국(上國)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행행할 수 없고, 의당 영변(寧邊)으로 행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또 공이 이공과 함께 각각 요동(遼東)에 가서 구원을 요청하겠다고 청하였으나 상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본병(本兵)은 멀리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있자,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이공에게 명하여 가도록 하였다. 그러자 공이 자기가 타던 말을 이공에게 풀어 주고 눈물을 뿌리면서 서로 작별하였다. 적병(賊兵)이 차츰 진격해 옴에 따라 관군(官軍)이 서로 잇달아 무너지자, 상이 밤중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 놓고 의논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나는 의당 중국으로 귀부(歸附)해야겠다. 다만 부자(父子)가 함께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버리면 나라에 주인이 없게 되니, 세자(世子)는 머물러서 묘주(廟主)와 사주(社主)를 받들 수 있게 하라. 여러 경들 가운데 누가 나를 따라서 서쪽으로 건너가려는고?” 하니, 뭇 신하들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공이 울면서 대답하기를, “신은 몸이 건강하고 부모도 없으니, 원컨대 죽기로써 전하(殿下)를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어가가 박천(博川)에 머물렀을 때 급보(急報)가 이르자 상이 명하여 어가를 재촉해서 출발하였는데, 밤이 이미 2경이었다. 비는 내리고 길은 사나운데, 시위(侍衛)하는 사람은 수십 인도 채 되지 못하므로, 공이 관속(官屬)들에게 이르기를, “앞쪽의 시위가 매우 허술하니, 우리들이 어가 뒤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하고, 마침내 말을 채찍질하여 앞에서 인도하였다. 어가가 의주(義州)에 당도하자, 성중(城中)의 주민들이 모두 놀라 흩어지므로, 공이 상께 청하여 해사(廨舍)를 수리해서 오래도록 머무를 뜻을 보이니, 이민(吏民)들이 과연 차차로 다시 모여들었다. 공이 또 건의하기를, “호서(湖西), 호남(湖南), 영남(嶺南) 삼로(三路)에서는 행재소(行在所)가 어딘지를 모를 것이니, 의당 급히 사신을 보내어 선유(宣諭)하여 군대를 일으켜 근왕(勤王)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좇아서 윤승훈(尹承勳)을 보내어 해로(海路)를 따라 호남으로 가게 하였다. 이로부터 조명(朝命)이 비로소 제도(諸道)에 통하여 근왕하는 군사가 차차로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금군(禁軍)의 단약(單弱)함을 염려하여 전사(戰士)를 나누어서 들어가 시위하게 하기를 청하자, 공이 그 제의를 물리쳐 말하기를, “전사는 적을 격파하는 데에 써야 하니, 별도로 민정(民丁)을 뽑아서 금위(禁衛)에 보충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요좌(遼左) 지방에 우리가 왜인(倭人)이 쳐들어오도록 인도했다는 와언(訛言)이 전파됨으로 인하여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지휘(指揮) 황응양(黃應暘)을 보내 와서 사실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황응양이 처음에는 우리를 퍽 의심하여 왜서(倭書)를 보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공이 도성에 있을 때에 이미 여기에 생각이 미쳐 신묘년에 왜추(倭酋)가 보낸 교만 방자한 내용의 서계(書契)를 손수 싸 가지고 와 있다가, 이때에 미쳐 황응양에게 보여 주자, 황응양의 의심이 크게 풀리어 심지어는 가슴을 치면서 대단히 애통해하기까지 하고 돌아가서 갖추 사실대로 보고함으로써 조선(朝鮮)에 구원병을 파견하자는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천장(天將) 조승훈(祖承訓)과 사유(史儒)가 7000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자, 공이 말하기를, “조 장군은 경조(輕躁)하고 꾀가 없으니, 그 군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였는데, 평양으로 진병(進兵)했다가 과연 크게 패하여 사유는 죽고, 조승훈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가서 도리어 우리가 왜구(倭寇)를 돕고 있다고 무함하였다. 그러자 공이 상에게 청하여 대신을 광녕(廣寧)으로 보내어 변무(辨誣)하게 하고, 또 청하여 사신을 보내 상주(上奏)해서 대군(大軍)의 발견(發遣)을 재촉하도록 하였다.
이해 12월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5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는데, 공이 이 제독의 행군(行軍)하는 데에 기율(紀律)이 있음을 보고 상께 아뢰기를, “이 군대는 반드시 공을 세우겠으나, 다만 막하(幕下)에서 정 동지(鄭同知)와 조 지현(趙知縣)두 사람이 용사(用事)를 하고 있으니, 후일에 큰 계책을 저지시킬 자는 필시 이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계사년 정월에 제독이 평양의 적을 진격하여 승첩을 거두고 다시 적을 추격하여 벽제(碧蹄)에 이르러서는 패전하여 불리하게 되자, 제독의 기가 꺾이어 마침내 화의(和議)에 소신을 굽히고 말았는데, 정 동지와 조 지현이 실로 이 계책을 주관했었으니, 공의 말이 과연 꼭 들어맞았던 것이다. 경성(京城)의 적이 물러간 뒤에는 공이 환궁(還宮)하기를 강력히 청하였다.
10월에 거가가 경성으로 돌아왔다. 11월에는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오므로, 공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가서 그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마침 황제의 칙서에서 왕세자(王世子)로 하여금 호관(戶官), 병관(兵官)을 대동하고 전라도, 경상도 지방으로 나가서 군사를 시찰하도록 하였으므로, 공이 바로 병조의 장관이었기 때문에 마침내 접반(接伴)의 직임을 해면하고 세자를 모시고 떠났다.
갑오년 봄에는 호서(湖西)의 반적 송유진(宋儒眞)이 분조(分朝)를 배반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세자를 받들고 환조(還朝)하여 적을 피하려고 하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것이 옳은 계책이 아님을 논박하니, 세자가 공의 의견을 따랐는데, 적 또한 얼마 안 가서 평정되었다. 세자가 홍주(洪州)에 있으면서 보령(保寧)의 수영(水營)으로 옮겨 머물고자 하여 공으로 하여금 가서 현지를 살펴보고 오게 하였는데, 공이 돌아와서는 머무를 수 없는 곳이라고 속여 대답하였다. 혹자가 그것을 의심하자, 공이 말하기를, “영보정(永保亭)의 좋은 경치는 호중(湖中)의 으뜸이니, 소주(少主)가 그 곳에 거처하는 것이 후일의 방탕한 마음을 인도하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하니, 식견 있는 이들이 그 원대한 식견에 감복하였다.
을미년에는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하였다. 병신년에는 황조(皇朝)에서 사신을 보내어 일본(日本)의 추장(酋長)을 책봉하였는데, 부사(副使)인 양방형(楊邦亨)이 공을 접반사로 삼아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이 이미 사조(辭朝)하고는 이조 판서, 대제학의 해면을 요청하여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임명되었다. 양 부사(楊副使)는 공을 매우 극진히 존경하고 중히 여겨 항상 말하기를, “동방(東方)에 이런 인물이 있는데, 어찌 외국(外國)이라 하여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미 왜영(倭營)에 들어간 뒤에는, 정사(正使) 이종성(李宗城)이 잘못 ‘적이 장차 무도한 행위를 가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밤중에 탈신 도주함으로써 원근(遠近) 사람들이 크게 놀란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양 부사가 급히 공으로 하여금 조정에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아뢰게 하므로, 공이 이틀 밤낮을 급히 달려 경성에 이르니, 이 정사(李正使)는 이미 와 있었고 적은 또한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 공이 이 정사를 보고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부귀한 집의 자제로서 한갓 문묵(文墨)이나 일삼았을 뿐이니, 반드시 왕명(王命)을 욕되게 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윽고 과연 그렇게 되자, 사람들이 공을 일러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하였다. 이해 겨울에 양 부사가 돌아가자, 공이 국경까지 배웅하였다.
정유년에는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 황조(皇朝)에서 재차 왜(倭)를 정벌하게 되어, 경리군무(經理軍務) 어사(御史) 양호(楊鎬)가 격문(檄文)으로 호조(戶曹), 병조(兵曹), 공조(工曹)의 장관(長官)을 불러 경상(境上)에 나와 기다리게 하였으므로, 공이 구련성(九連城)으로 가서 그를 맞이했는데, 응대(應對)한 것이 모두 기의(機宜)에 적중하였다.
그 후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이윽고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 공은 임진년 이후로 모두 다섯 차례 병조 판서가 되었다. 대적(大賊)이 전국에 그득하고 천병(天兵)이 수륙(水陸)으로 모여드는 때를 만나서 모든 군려(軍旅)에 관계된 일은 병조에 귀속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공은 편의에 따라 조처하여 성대히 여유가 있었고, 항상 여분으로 베[布] 만 필을 비축해 놓아서 급할 때의 용도에 대비하였다. 그래서 양 경략(楊經略)이 공의 재능과 모유(謀猷)에 감복하여 매양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말하기를, “이 상서(李尙書), 이 상서를 기다려서 해야겠다.” 하였다.
무술년 가을에는 황조의 찬획사(贊畫使) 정응태(丁應泰)가 양 경략을 무핵(誣劾)하였으므로, 국가에서 양 경략을 위해 상주(上奏)하여 보류(保留)시켜 주기를 청했더니, 정응태가 이 때문에 우리 나라에 앙심을 품고 절치부심하여 주문(奏文)을 올려 우리 나라를 무함하였는데, 그 말이 몹시 참혹하였다. 그러자 선조(宣祖)가 대단히 놀라서 장차 대신을 보내 변명하게 하려 하면서 영상(領相) 유성룡(柳成龍)을 의중에 두었는데, 유공(柳公)이 제때에 가기를 청하지 않으므로, 선조가 유공에게 노하여 그가 탄핵받은 것을 인해서 파직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공을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임명하고 부원군(府院君)에 진작(進爵)시켜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 그러자 공이 두 차례나 차자를 올려 강력히 사양하고 가함(假銜)으로 사신에 충원되기를 원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무(辨誣)를 하려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면 되겠는가.” 하였다. 공이 마지못해 명을 받고는 날마다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서 북경에 도착하여, 이미 주문(奏文)을 올리고 나서는 각부(閣部)에 두루 나아가 정문(呈文)을 올려 통렬히 변명하니, 각부의 제공(諸公)들이 이미 공의 의표(儀表)를 존경하던 터에 또 문사(文辭)가 분명하고 간절함을 보고는 더욱 감탄하며 칭찬하고, 서로 다투어 다주(茶酒)로써 공을 맞이하여 친절히 말하기를, “국가의 수치는 절로 씻어질 것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였다. 천자(天子)가 마침내 명하여 정응태를 파직시키고, 인하여 우리 나라에 칙서를 내려서 위유(慰諭)하였다.
그 명년에 공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니, 선조가 크게 기뻐하여 공에게 전토(田土)와 동복(僮僕)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그 후 논하는 자들이 정응태의 일 때문에 정응태의 접반사였던 백유함(白惟咸)에게 죄를 돌려 하옥(下獄)시키고 삼성(三省)이 모여서 국문했는데, 이때에 공이 위관(委官)이 되어 평의(評議)를 올려서 그의 억울한 정상을 밝히니, 선조가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후 조정의 의논이 더욱 강력하게 유상(柳相)을 공격하였으니, 이는 갑오년에 화의(和議)를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공 또한 소장(疏章)을 올려 ‘일찍이 화의를 찬성하였으니 감히 요행으로 면할 수 없다’고 자핵(自劾)하고 마침내 병을 핑계로 사면하였다. 오랜 뒤에 선조가 하교하기를, “남과 일을 함께 해 놓고 끝에 가서 반복(反覆)하는 자는 이모(李某)의 죄인이다.” 하였다.
경자년에는 도체찰사 겸 도원수(都體察使兼都元帥)에 임명되어 호남, 영남 등 제도(諸道)를 선무(宣撫)하면서 호남 지방의 부역(賦役)을 늦추어 주기를 청하고, 또 백성을 편케 하고 해상을 방어할 일[安民防海]에 관한 십육책(十六策)을 올렸는데, 상이 그 말을 많이 채용하니, 남방의 백성들이 순종하여 의뢰하였다. 이해 여름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임명되어 소환(召還)되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했을 적에는 공이 상여(喪輿)를 따라 산릉(山陵)에 갔는데, 궁인(宮人)이 실수로 불을 내서 불이 영악전(靈幄殿)에 옮겨 붙었다. 창졸간에 생긴 변이라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이 조용하게 지휘하여 불을 다 끄고 나서는 예관(禮官)을 불러 위안제(慰安祭)를 속히 거행하게 하고, 마침내 재궁(梓宮)을 받들어 장사(葬事) 지내는 일을 의식대로 모두 거행하면서 또 치계(馳啓)하고 끝내 이날 반우제(反虞祭)까지 마치니, 그 사실을 들은 이들이 공이 변(變)에 잘 대처한 것을 탄복하였다.
그 후 누차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매우 간절히 돈유(敦諭)하므로, 공이 그제야 나가서 일을 보았다. 상이 명하여 학행(學行) 있는 선비를 천거하게 하자, 공이 김장생(金長生), 신응구(申應榘), 이기설(李基卨)을 천거하여 분부에 응하였다. 일찍이 입대(入對)하여 치도(治道)를 논하기를, “위에서 능히 성심(誠心)을 열고 공도(公道)를 펴면, 아래에서는 능히 붕당(朋黨)을 깨뜨리고 염치(廉恥)를 면려하는 것이니, 오늘날의 급선무는 여기에 벗어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건주위(建州衛)의 오랑캐 추장(酋長)이 글을 보내 와서 통호(通好)하기를 청하자, 공이 의논하기를, “이 추장은 천조(天朝)로부터 작(爵)을 받았으므로, 우리 나라로서는 의리상 사적으로 사귈 수 없고, 또 반드시 후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청컨대 그 사자(使者)를 사절하소서.” 하였다.
임인년 봄에 이르러서는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여 삼사(三司)에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장차 추가로 죄줄 것을 논하자, 공이 ‘성혼은 유림(儒林)의 중한 명망을 입고 있으니 죄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으로 차자를 초하였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권신(權臣)의 지시를 받아 상소하여 공을 공격하면서 공을 정상 철(鄭相澈)의 당(黨)이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마침내 인책하여 사직하고 차자는 결국 올리지 않았다. 공은 끝내 이 일로 상직(相職)을 해면하였다.
공이 이미 한가한 데에 나아가서는 집에만 들어앉아 빈객을 사절하고 경전(經傳) 및 염락(濂洛)의 제서(諸書)를 두루 읽으면서 과정(課程)을 매우 엄격히 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젊은 시절에 중흥동(重興洞) 골짜기에서 많이 노닐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는 매양 좋은 때를 만나면 반드시 한두 자질(子姪)을 데리고 필마(匹馬)로 가서 노닐며 읊조리다가 밤을 지새고 돌아왔다. 선조가 본디 공을 중히 여겼으므로, 공이 비록 자리를 떠났으나 은례(恩禮)는 줄지 않았다.
갑진년 원일(元日)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한[白虹貫日] 변이 있었으므로, 공이 구언(求言)의 분부에 응하여 차자를 올려 잘못된 일을 자세히 논했는데, 여기에서 말하기를, “성심(誠心)을 전하는 것은 의당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데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공평(公平)을 기하는 것은 의당 인재를 등용하는 데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말이 아주 적절함을 탄복하였다. 그 후 호종공신(扈從功臣)을 책록할 때에는 공이 원훈(元勳)이 되어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의 호가 내려졌다.
도적이 재신(宰臣) 유희서(柳熙緖)를 살해했는데, 그 도적을 잡지 못하여 포도대장(捕盜大將) 변양걸(邊良傑)이 그 옥사(獄事)를 끝까지 캐내어 다스리다가 폄적(貶謫)되었고, 유희서의 아들 또한 장류(杖流)되었으므로, 수상(首相)인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상소하여 이 일을 논했다가 선조의 뜻에 거슬리어 마침내 파직되고 공이 이공 대신으로 영상에 복직되자, 공이 누차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변양걸이 폄적된 일에 대해서는 신의 마음도 실로 가슴아프게 여겼으나, 다만 미처 말을 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덕형은 곧 이미 말을 한 신(臣 이항복 자신을 가리킴)이요 신은 곧 미처 말하지 못한 이덕형일 뿐이니, 죄는 아무리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어찌 차마 심정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직장을 무려 여덟 번이나 올려서야 윤허하였다.
병오년에는 대마도(對馬島) 오랑캐 의지(義智)가 사자를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였으므로, 유영경(柳永慶)이 영상으로서 건의하여 임진년에 우리 능(陵)을 침범했던 적을 잡아 보내게 하자, 의지가 거짓으로 두 사수(死囚)를 취하여 바쳐 왔는데, 모두 나이가 어려서 임진년 당시에는 7, 8세 아이에 불과했던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유영경은 자기의 공으로 삼고자 하여 장차 종묘(宗廟)에 헌첩(獻捷)하고 그들을 사면하려 하므로, 공이 그들을 경상(境上)에서 죽이어 왜사(倭使)에게 보이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끝내 유영경의 의논을 따랐다.
그리고 김계(金稽)란 자가 상소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존(追尊)하기를 청하였는데, 대체로 유영경이 그를 유도한 것이었다. 상이 그 일을 하문(下問)하자, 빌붙기를 희망하는 무리들이 서로 다투어 그 일을 억지로 합리화시키었다. 그러자 공이 의논하기를, “이 일을 윗사람으로서 행한 사람은 한(漢) 나라의 애제(哀帝), 안제(安帝), 환제(桓帝), 영제(靈帝)이고, 아랫사람으로서 이 일을 그르게 여긴 사람은 송(宋) 나라의 주자(周子), 장자(張子), 정자(程子), 주자(朱子)였습니다.” 하니, 뭇 사람의 의논이 이에 정해져서 그 일이 중지되었다.
처음에 선조께 적사(適嗣)가 없어 광해(光海)가 세자(世子)로 있었는데, 오랜 동안에 실덕(失德)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마침 선조가 오래도록 앓아누워 생명이 위독하게 되자, 남의 불행을 즐기는 자들이 거짓말을 선동 고취함으로써 정인홍(鄭仁弘)의 상소가 들어가니, 인심이 의혹하여 중외(中外)가 몹시 당황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선조가 승하하자, 그 이튿날에 광해가 왕위(王位)를 승습하였다. 이때 임해군(臨海君)은 나이가 가장 많고 사는 집이 대궐과 가까웠으며, 본디 과실이 많은데다 집에는 무뢰한 병졸들을 모아 두고 있었으므로, 광해가 오랫동안 그를 의심하여 꺼려 온 나머지, 명하여 군대를 모아서 대궐을 호위하고 궁문(宮門)을 낮에도 열지 못하게 한 지가 한 달을 넘었다. 그러자 한 언관(言官)이 공에게 찾아와서 임해군의 일을 의논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왕자(王子)가 상차(喪次)에 있어 배반한 정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무슨 근거로 처벌을 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런데 수일 후에 삼사(三司)가 임해군이 모반(謀反)을 했다고 밀계(密啓)하여 그를 교동(喬桐)에 유찬(流竄)하므로, 공이 다른 일이 있을까 미리 걱정하여 동기간(同氣間)에 서로 온전히 편안하게 해야 하는 의리를 극력 진술하였는데, 수상(首相)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대사헌(大司憲) 정공 구(鄭公逑)의 논의도 공의 말과 합치하였다. 그러자 논자(論者)들이 역적을 비호한다고 시끄럽게 떠들어 댐으로써 마침내 조신(朝臣)들의 화(禍)의 계제가 되었다.
인산(因山)의 자리를 이미 정한 뒤에는 기자헌(奇自獻)이 그 자리에 대해서 좌도(左道)를 끼고 이의(異議)를 선동하자, 공이 차자를 올려 그의 망녕됨을 변론함으로써 마침내 처음에 잡은 자리를 그대로 쓰게 되었다. 그리고 창원 부사(昌原府使) 정경세(鄭經世)가 상소하여 외척(外戚)이 정권을 잡은 데 대한 잘못을 논하니, 광해가 말이 선조(先朝)에 관계된다 하여 그를 장차 하옥(下獄)시키려 하므로, 공이 재차 계(啓)를 올려 극력 구함으로써 정경세가 형벌을 면하고 관직만 삭탈되었다.
4월에는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총호사(摠護使)가 되었다. 목릉(穆陵)의 일을 마치고 나서는 삼사(三司)가 임해군을 처벌하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전일의 의논을 변치 않고 굳게 주장하니,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동기간에 은의(恩義)를 온전히 할 것을 주장한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공이 두 차례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해년 여름에는 정인홍이 차자를 올려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과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두 선정(先正)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에 합당치 않다고 헐뜯었으므로,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글을 올려 시비를 변명하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지평(持平) 박여량(朴汝樑)은 정인홍의 무리였으므로, 그 사실을 고자질하여 아뢰자, 광해가 노하여 그 의논을 주창한 사람을 조사해서 금고(禁錮)시키게 하니, 제생들이 명을 듣고는 일제히 성균관(成均館)을 비우고 떠나 버렸다. 그러자 공이 두 차례나 차자를 올려 ‘정인홍이 사심을 품고 선현(先賢)을 헐뜯었으니, 다사(多士)들이 이를 다 같이 분개(憤慨)한 데 대해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극력 말하니, 공을 이어서 또 말한 이가 더욱 많아졌으므로, 광해가 마지못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앞서 거인(擧人) 임숙영(任叔英)이 대책문(對策文)에서 궁금(宮禁)을 기척(譏斥)하였던바, 고관(考官)이 이 글을 취하여 이미 방중(榜中)에 이름을 올렸는데, 광해가 명하여 그를 삭제하게 하므로, 공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입대하여 두 선정에 대해서는 이의할 만한 것이 없고 임숙영의 과방(科榜)은 삭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죽 진술하니, 광해의 뜻이 풀리어 다시 명하여 임숙영의 과방을 회복시키게 하였다.
공이 이미 정인홍에게 거슬림이 많아서 정인홍이 기필코 공을 중상하려 하여, 그의 무리로서 소장(疏章)을 올려 공을 헐뜯은 자가 전후로 수백 인이나 되었으므로, 공이 매우 강력하게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공이 체찰부(體察府)를 개설함으로부터 광해 또한 공의 덕망을 존중하여 자못 공을 믿고 위임해서 무릇 서북 지방에 차견(差遣)할 수령(守令)들을 모두 공에게 맡겼는데, 공은 매양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했으므로, 군소배(群小輩)들이 이 때문에 공을 더욱 심하게 해코지하였다. 정인홍이 또 사람을 사주해서 상소하여 ‘체찰부의 병권(兵權)이 너무 중하니 혁파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므로, 공이 또 매우 다급하고 절박한 말로 해면을 요청하였는데, 사직장을 무려 20차례나 올렸지만, 상이 그래도 윤허하지 않았다.
임자년에는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서 시인(詩人) 권필(權韠)이 시어(詩語)로 인해서 체포되어 고신(考訊)을 받게 되자, 공이 자리를 옮겨 엎드려 울면서 간하였으나 광해가 듣지 않아 권필이 끝내 장사(杖死)하였으므로, 공이 통한(痛恨)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이 요망한 말을 주창하여 교하(交河)로 천도(遷都)하기를 청하자, 광해가 그 말에 퍽 미혹되므로, 공이 그 말을 통렬히 배척하였다.
계축년에는 위성(衛聖), 익사(翼社), 형난(亨難)의 세 가지 공훈에 책록되었으나, 이는 공의 뜻이 아니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사수(死囚) 박응서(朴應犀)가 간인(奸人)의 지시를 받아 거짓 고변(告變)을 함으로써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은 온 가족이 죽임을 당했는데, 공은 하찮은 누(累)로 인하여 성 밖에 나가 대죄(待罪)하다가 광해의 부름을 받고 국청(鞫廳)에 나아갔다. 이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은 나이 겨우 8세였는데, 삼사(三司)가 그를 역적의 괴수로 지목하여 서로 소장을 올려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정부(政府)만이 유독 정청(廷請)을 하려 하지 않으므로, 군소배들이 끝없이 기세를 부리어 화(禍)를 장차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런데 두 재신(宰臣)이 밤에 공을 찾아와서 화복(禍福)으로 공을 회유하고 협박하였으나, 공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므로, 자질(子姪)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온 가족을 위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공이 의연하게 수염을 뽐내면서 이르기를, “나는 선조(先朝)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지금은 늙어서 곧 죽을 목숨인데, 어찌 차마 뜻을 굽히고 임금을 저버려서 스스로 명의(名義)를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兩司)가 날로 상신(相臣)들을 침범하였는데, 공만이 유독 앞서의 의논을 굳게 주장하였다. 그런데 장령(掌令) 정조(鄭造), 윤인(尹訒) 등이 광해의 뜻에 영합하여 ‘대비(大妃)가 모도(母道)를 잃었으니, 의당 폐해야 한다’고 주창하자, 공이 이상 덕형(李相德馨)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이 죽을 곳을 얻었네. 이 무리들이 사람을 씹을 적에 걸핏하면 역적을 토벌한다는 뜻으로 말을 하고, 또 《춘추(春秋)》를 속여 인용하여 상청(上聽)을 미혹시키고 있으니, 대체로 신하로서 임금의 어머니를 폐하는 것이 참으로 역적이 아니겠는가. 또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춘추》의 대의(大義)가 아니던가. 내가 의당 경(經)을 인용하여 의리를 의거해서 사설(邪說)을 통렬히 깨뜨리겠네.” 하니, 이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공이 시험 삼아 초고(草稿)를 작성해 보게.” 하였다. 이날 공은 집에 돌아와 조의(朝衣)도 벗지 않은 채 외당(外堂)에 앉아서 눈을 똑바로 뜨고 말없이 있으므로, 자제(子弟)들이 들어가서 그 까닭을 물으니, 공이 길게 한숨지으며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없어졌으니, 나라 꼴이 될 수 있겠느냐. 나는 의리상 이 상황을 차마 좌시(坐視)할 수 없으니, 의당 목숨을 걸고 할 말을 다하여 죽은 시체로 들것에 실려 돌아오기를 기할 뿐이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최유원(崔有源)이 본디 공을 존경하였으므로, 공이 의리로써 그를 면려하자, 최유원이 공의 말을 듣고 마침내 정조, 윤인을 배척함으로써 정조, 윤인의 말이 행해지지 못했으니, 이는 공의 힘이었다. 공이 소장(疏章)을 초하여 이상에게 보이니, 이상이 좋다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마침 공이 정협(鄭浹)을 잘못 천거한 일로 탄핵을 받고 떠나게 되어 소장을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공은 탄핵을 당한 뒤에 한 동복(僮僕)에게 말고삐를 잡히고 동곽(東郭)을 나가서 강가에 우거(寓居)하였다. 가을에 이르러서는 노원(蘆原)의 촌사(村舍)로 옮겨 우거했는데, 오두막집에 쑥대로 문을 엮어 단데다 거친 밥도 넉넉지 못했으나, 아주 태연하게 지냈다. 그리고 오직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혀 글을 읽고, 한가할 때면 지팡이 짚고 짚신을 신은 채로 산계(山溪) 사이에 배회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위로하였다. 한번은 공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나귀를 타고 청평산(淸平山)에 가서 노닐었는데, 만난 사람들이 그가 공인 줄을 알지 못했다.
공의 장남 성남(星男)이 역적놈의 무함을 입어 옥에 갇히자, 가인(家人)이 뇌물을 주고 석방시키려 하므로, 공이 그리 하지 못하게 통렬히 금하였다. 그러자 정인홍이 더욱 몹시 공을 꺼리어 양사(兩司)를 충동질해서 삭출(削黜)을 청하도록 했는데, 광해가 그 소장(疏章)에 관한 일을 잠재워 버렸다.
병진년에는 망우리(忘憂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노원에서 그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 명년 겨울에 이르러서는 폐모(廢母)의 논의가 또 일어나서 이이첨(李爾瞻), 허균(許筠) 등이 무뢰배를 사주하여 상소를 하게 했던바, 자전(慈殿)의 죄상을 나열함에 있어 말이 대단히 패역(悖逆)스러웠는데, 광해가 그 소장을 내리어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이때 공은 이미 중풍(中風)을 앓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둥 소리가 크게 울리자, 공이 경악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경계하여 고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추부랑(樞府郞)이 와서 수의(收議)를 청하므로, 공이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서 붓을 휘둘러 의(議)를 초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누가 전하(殿下)를 위하여 이 계책을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순(虞舜)은 불행하여 완악한 아비와 어리석은 어미가 항상 우순을 죽이기 위해 우물을 파게 하고 창고를 수리하게 하였으니, 위태롭기가 또한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순은 부르짖어 울고 원망하면서도 사모하여 부모의 옳지 못한 점을 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아비는 비록 인자하지 않을지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춘추》의 의리가 ‘자식은 어머니를 원수로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예기(禮記)》에 의하면 “공급(孔伋)의 아내가 된 사람은 분명히 공백(孔白)의 어머니이다.”라고 하였으니, 성효(誠孝)가 중한 곳에 어찌 간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효(孝)로써 국가를 다스리는 때를 당하여 온 나라 안에 장차 점차로 교화될 희망이 있는데, 이런 말이 어찌하여 전하의 귀에 들어갔단 말입니까. 지금에 하실 도리로 말씀드리자면, 우순의 덕을 본받아서 능히 효로써 화해시키고 차차로 다스려서 노염을 돌려 인자함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이 어리석은 신의 바람입니다.”
이 의논이 이르자, 조야(朝野)에서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공을 위하여 두려운 마음에 머리털이 곤두섰고, 혹은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으며, 저리(邸吏)는 공의 의논을 기록할 적에 심지어 손이 떨려서 종이에 붓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삼사(三司)가 공을 먼 변방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기를 청하였는데, 오랜 뒤에 다만 먼 데로 유찬하라고 명하였다. 금부(禁府)가 배소(配所)를 정하면서 모두 여섯 번이나 지역을 바꾸다가 비로소 북청(北靑)으로 배소를 정하였다.
무오년 정월에 비로소 유배 길에 올랐는데, 공은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줄을 스스로 헤아리고 가인(家人)에게 명하여 의금(衣衾)과 염구(斂具)를 다 챙기게 해서 스스로 휴대하였다. 또 여러 자식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나라를 잘못 섬겨 이런 죄벌을 얻었으니, 내가 죽거든 조의(朝衣)로 염(斂)을 하지 말고 심의(深衣)와 대대(大帶)만을 사용하라.” 하였다. 배소에 이르러서는 묵은 중풍이 다시 발작하여 증세가 더 중해졌다. 5월에 이르러 공이 꿈을 꾸니, 선조(宣祖)가 정전(正殿)에 나와 있고 유상 성룡(柳相成龍), 김상 명원(金相命元), 이상 덕형(李相德馨)이 함께 시좌(侍坐)했는데, 이상 덕형이 왕명으로 공을 부르기를 청하였다. 공은 그 꿈을 깨고 나서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가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하겠구나.” 하였는데, 며칠 후에 병이 마침내 위독해져서 이달 13일에 작고하니, 향년이 63세였다.
공이 작고하자, 부음을 듣고 와서 곡(哭)하는 인근 고을의 사민(士民)들의 숫자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함흥(咸興)의 전 정랑(正郞) 한인록(韓仁祿) 등, 정평(定平)의 사인(士人) 장응시(張應時) 등, 영흥(永興)의 사인 주사룡(朱士龍) 등, 안변(安邊)의 사인 장응정(張應井) 등이 각각 제문(祭文)을 가지고 치제(致祭)하였고, 영남(嶺南)의 사인 정심(鄭杺) 등은 천리 길에 사람을 보내어 치부(致賻)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공이 평소에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공의 여러 아들이 상여(喪輿)를 받들고 돌아와서 이해 8월 4일에 포천(抱川)의 선영(先塋)에 장사 지냈다. 북청 및 포천의 인사(人士)들이 심지어는 공을 위해 재목을 모아서 사당을 건립하기에 이르자, 국가에서 이를 금하였으나 막을 수가 없었으니, 인심(人心) 속에 있는 공의(公議)를 속일 수 있겠는가.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고상하고 탁 트여서 큰 도량이 있었다. 신장(身長)은 보통 사람을 넘지 못했으나, 의모(儀貌)가 걸출하고 풍채(風采)가 엄정하였다. 청백(淸白)하고 효우(孝友)함은 대체로 타고난 천성이었고, 화목을 도타이 하여 종족을 단결시키는 데는 고인(古人)의 가법(家法)이 있었다. 소싯적에는 성품이 호탕하여 일찍이 한 관기(官妓)를 좋아했는데, 갑자기 ‘정이 치우친 데가 있으면 반드시 신심(身心)에 해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여, 마침내 그를 통렬히 끊어 버리고 그 후로는 성색(聲色)을 전혀 가까이하지 않았다.
임진년의 변란 때에는 말고삐를 잡고 임금을 호종하여 노숙(露宿)을 해 가면서 이리저리 주선하고 앞뒤에서 보좌하여 지혜와 힘을 다하였으니, 중흥(中興)의 계책이 대체로 공에게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공이 39년 동안 벼슬을 하는 가운데 이조 판서를 한 번, 병조 판서를 다섯 번, 의정을 네 번, 원수(元帥)를 한 번, 체찰사를 두 번 지냈는데, 출장 입상(出將入相)한 20여 년 동안에 규획(規畫)하고 건백(建白)한 일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혁혁히 남아 있는 것들을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가 없다. 공훈은 사직(社稷)을 보존한 데에 있고, 은택은 생민(生民)에게 미쳤으며, 청백하기는 빙옥(氷玉)과 같았고, 존중되기는 교악(喬岳)과 같았으니, 국가(國家)의 주석(柱石)이요 사류(士流)의 관면(冠冕)이었다. 그리고 정사년의 한 상소(上疏)에 이르러서는 윤기(倫紀)를 부지하고 정기(正氣)를 수립한 것이 우뚝히 천지간에 드높아서, 비록 일월(日月)과 빛을 겨루더라도 될 것이다.
공이 처음 벼슬할 적에 일찍이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을 찾아가 배알하니, 문성공이 공의 위인이 국기(國器)임을 알아보고 이르기를, “나는 돌아갈 뜻이 있으니, 자네는 석담(石潭)으로 나를 찾아오게나.” 하였다. 이때 문성공이 막 이조 판서가 되어 공을 등용하려고 했는데, 공이 형적(形迹)을 혐의롭게 여겨 문성공을 자주 찾아가 묻고 배울 수가 없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문성공이 작고하였으므로, 공은 종신토록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공은 늦게서야 학문을 좋아하여 잗달게 장구(章句)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홀로 본원(本原)을 터득하여 일찍이 함양명(涵養銘)을 저술했는데, 사의(詞意)가 뛰어나서 자득(自得)한 의취가 있었다. 또 치욕(恥辱), 서상(書床), 양야(養夜), 계주(戒晝), 경석(警夕) 등 다섯 편의 잠(箴)을 저술하여 스스로 성찰(省察)하였다. 문장(文章)을 짓는 데는 뛰어난 기운이 있어 호방 초탈하고 웅건 민첩하여 본래의 법식을 따르지 않았고, 필적(筆蹟)은 호탕하여 법이 있었으며, 화법(畵法)도 약간 알아서 묘치(妙致)가 있었으나 이윽고 그만두고 다시 하지 않았다.
공이 저술한 시문집(詩文集) 약간권(若干卷)이 있다. 조천창수록(朝天唱酬錄) 1권, 주의(奏議) 2권, 계사(啓辭) 2권, 예경(禮經)의 요어(要語)들을 분류 편찬한 《사례훈몽(四禮訓蒙)》이란 책 약간권, 좌씨 내외전(左氏內外傳)을 참합(參合)하여 편찬한 《노사영언(魯史零言)》이란 책 15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이 작고하자 광해 또한 놀라고 애도하여 공의 관작을 명하여 복구시켰고, 금상(今上)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였다. 아, 하늘이 만일 공에게 수명을 더 연장해 주어 오늘날을 만나게 하였다면 중흥(中興)을 크게 보좌한 공렬(功烈)을 어찌 한량할 수 있겠는가. 공의 별호는 필운(弼雲)이고, 만년에는 백사(白沙)라 칭하였으며, 이미 견책을 입고 야외(野外)에 있을 때에는 또 동강(東岡)이라 칭하였다. 공의 배(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권씨(權氏)이다. 아들 2인은 성남(星男), 정남(井男)이고,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은 규남(奎男), 기남(箕男)이다.
그윽이 생각건대, 공의 훌륭한 덕업(德業)과 상세한 이력(履歷)은 국사(國史)에 기재되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전해지는 바이니, 헛된 말로 찬양할 바가 아니므로, 삼가 그 드러난 것만을 뽑아서 이상과 같이 논찬(論撰)하여 말을 아는 군자(君子)의 채택(採擇)을 기다리는 바이다.
분충찬모입기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신풍군(新豊君)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춘추관사 세자우부빈객(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經筵春秋館事世子右副賓客) 장유(張維)는 삼가 행장을 쓴다.
[주-D001] 평번(平反) :
원죄(寃罪)를 다시 조사하여 무죄(無罪)나 감형(減刑)으로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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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