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떠나는 길-스토리 구조와 담론 구조의 어긋남
길 떠나는 소녀가 있다. 정든 시골집을 떠나 서울로 가는 소녀가 있다. 그녀가 길을 떠남
은 무언가에 대한 충족요구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무언가를 충족하려 한다. 하지만 그녀가
진입한 서울은 그녀를 거부한다. 그녀를 그 거부를 헤쳐나가기 위해 서울에 순응되어 간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시골에서 서울로의 그리움만을 간직한 채 정착성 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그녀가 이제는 서울이라는 비인간화된 공간에서 아무것도 그리워할 수 없는 공허
함으로 정착성의 힘을 잃고 부유하게 된다. 뜬 구름처럼 살던 그녀는 이제 다시 그가 살던
시골을 찾게 된다. 하지만 이제 그 시골은 예전에 그녀가 살던 시골이 아니다. 예전과는 달
리진 시골에서 그녀는 예전처럼 살기를 고집한다. 그리고 서서히 세계로부터 잊혀져 간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그 삶을 고집한다. 그녀는 이제 무엇을 그리워할지도 모른 채 그냥
그리움만으로 삶을 억지로 끌고간다. 그리고 막이 내린다.
"게릴라 극장 21세기 동시대 연극전1"이라는 만만찮은 슬로건을 내걸고 가마골 소극장
팀이 일본인 노다 히데끼 원작, 이병훈 번안 연출로 [농업소녀]라는 다분히 촌스러운(?)제목
의 연극을 공연한 바, 그 내용을 문자 그대로 거칠게 요약해 본다면 이렇게 될 것 같다. 통
상 연극이 거의 끝나갈 무렵 보는 습관을 가진 내가 이번에는 공연 이틀 째인 5월 20일날
보게 되었다. 극의 컨텍스트는 상당히 난삽하고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 와서 가만히 생
각해 보면 그 뭐 별 이야기 아니다. 그런데 그 별 이야기가 아닌 스토리구조를 가진 이 극
의 담론구조(챼트만)은 대단히 '별나다.' 나는 지금부터 그 별 이야기 아닌 스토리구조의 별
난 담론구조화 과정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이 연극의 별난 구조는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진행되고 있다. 가마골 소극장 관계
자들은 좌석을 지정해 두고 관객들을 안내하는데, 관중석은 가운데 무대를 좌우로 길죽하게
비워둔 채로 무대 뒤쪽 평소라면 연극이 공연되는 공간인 이를테면 합창석 유사한 좌석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관중석 둘로 나뉘어 있다. 덕분에 관중들은 상당히 여유롭게 자리를 잡
을 수 있었지만 무대 공간은 거의 반으로 줄어든 셈이 된다. 길죽하게 늘어선 무대 바닥은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고 그 가운데로 흡사 철도 레일같은 두개의 선이 그어져 있다. 그리고
무대 양옆은 초록색 버티칼 블라인더로 장막이 드리워져 있고, 그 앞에는 흡사 철도 간이역
의 의자같은 것이 좌우로 각각 하나씩 있다. 그 앞에서 배우들과 극단관계자들이 차를 서비
스한다. 찻잔이 상당히 많은데, 아마 관중들 모두 다 한잔씩은 마신 것 같다. 그리고는 연극
이 시작된다. 아까 차를 서비스하던 그 사람들 중 세 명이 연극을 한다. 누군가가(김경익분)
등장하더니 도시 농업의 모임을 열겠다면서 관객들을 그 모임의 참가자로 만든다. 그런데...
누군가 뒤늦게 도착한 관객인 것처럼 뛰어들더니 괜시리 시비를 건다. 배우들은 "실례지
만 좀 정숙" 운운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침입자가 조영진씨임을 알겠다. 한참 무대
에 있는 배우들을 상대로 관중석에서 싱갱이를 벌이더니 내 옆자리에 넙죽 주저앉는다. 배
우들이 관중석 사이에 앉아, 관중을 배우의 한 부류로 만들어내는 구조는 이제 그리 낯선
구조가 아니다. 이런 형태는 이 극에서 나중에 관중석 한 가운데서 손 전화가 울릴 때도 그
렇다. 처음에는 관중들을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었지만 결국 넓은 범주로 보면 무대 공간
이 관중석으로까지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무대공간을 입체화시키면서 상대적으
로 좁아진 무대공간을 관중석으로까지 넓히려 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하든 관중들을 무대위로 끌어오려는 의도는 다른 곳에서도 감지된다. 관중석에
서 소란을 부리던 사나이(조영진분)가 독초학자 이강토로 밝혀지는데 그 와중에 그는 아까
관중들이 마신 차 속에도 자신의 독초를 넣었음을 과시하여 관중들의 마음을 뜨끔하게 한
다. 설마...... 이렇게 하여 이 연극은 처음부터 시종일관 관중들을 극 속에 끌어들이려고 유
난히 공을 드린다. 웰까?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관중들을 무대로 끌어오려고 집요하게 집
착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연극이 진행되면서 곧 밝혀진다. 아까 말한 단순한 스토리 구조를 가진 이 연
극은 모두 26개의 장면을 빠르게 전환시켜가면서, 시간적으로 보아 단속적으로 플래쉬백을
시켜가며 인물들의 배역을 순간순간 교체하면서, 심지어는 한 인물의 내면에 존재하는 두
개의 자아까지 노출시켜가면서 복잡 다단한 담론구조로 펼쳐지기 때문에, 관중들이 극을 받
아들이기를 포기하고 그냥 낮잠을 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초보적인 이해를 하는 데만
도 엄청난 노력을 요한다. 만약 이런 식으로 나간다면 관중들에게서 나올 반응은 두 가지
밖에 없을 것 같다. 하나는 뭐가 뭔지 모르지만 그냥 배우들따라 즐겁기만 했다는 반응과
이해하려고 발버둥치며 보긴 했지만 대본을 다시 읽어 보든지 한번 더 보든지 해야겠다는
반응 말이다. 배우들이 관중들을 무대로 끌어오려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공간
이 우리에게 까맣게 멀어 보였던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20일 공연에서 나온 관중들
의 반응은 위의 것 가운데 후자가 아니었을까?
2. 들어선 길-참을 수 없이 기벼운 존재들.
연극을 보면서 관중들은 자신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하나하나의 장면을 재해석한다. 사람
들은 흔히 객관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연극 관람 행위의 경우, 난 그런 것을 별로 신뢰
하지 않는다. 더구나 나처럼 비전문가가 보는 연극은 내 식으로 주관화 될 수 밖에 없다. 나
는 이제부터 그런 내 주관을 기록해 보고자 한다. 그 주관속에 부조된 [농업소녀]의 모습은?
시골 방구석 그러니까 백미(박유밀분)의 집 안방에서 어른들끼리 벌거 아닌 문제를 가지
고 티격대며 싸우고 있을 때, 백미는 자신의 삶이 참 무기미하다고 느끼게 되고 무작정 집
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된다. 하지만 어린 백미로는 놓친 것 혹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하
나 있다. 그것은 벼를 심는다는 것의 그 정착 이미지다. 인류가 농경사회를 열게 된 것은 한
곳에 정착생활을 하게 된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그 농경 사회를 떠나게 되면 정착의
토대는 사라진다. 그때부터 인간은 끊임없는 갈증에 시달리면서 무언가에 탐욕스럽고 게걸
스럽게 달려드는 한 마리의 외로운 불나방이 된다. 백미가 서울에 와서 부딪힌 세계의 모습
은 그녀가 지금까지 발 디디고 살았던 농촌 사회의 모습과는 너무나 상반된 이질적인 그리
고 비인간적인 모습이다. 그것에서는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축구응원의 모습도 마치 전쟁
치는 모습으로 비치고, 거리에 어지럽게 나붙어 있는 광고판들도 너무나 비인간적인 모습으
로 생경한 알몸을 드러내는 세계이다. 이런 세계라면 한 자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
서 지탱할 수가 없다.
자아의 분열은 비서(정동숙분)와 백미의 자아가 양분되는 모습에서 구체화된다. 하지만
그것은 연극의 근본적 토대에서도 근원적으로 똬리를 틀고 있다. 모든 것의 분열! 한 배우
가 수많은 역으로 역할 분화가 되면서 분열되고, 관객들도 무대 양쪽으로 나누어지면서 서
로가 서로에 의해 상대화되면서 분열된다. 어찌 보면 26개의 장면분화도 장면 분열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인간으로서 한 자아가 발 디디고 살아야 할 근본적인 토대가 이렇게 분열
되고 풀어지기 시작하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오갈데 없이 끊임없는 방황을 거듭하게 된다.
에로영화에 출연하다가 환경 단체에 들어갔다가 난민 돕기 자원 봉사단체에 뛰어들다가 하
면서 어느 한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부유하는 인생이 된다. 그러
다가 유기농업 쌀 "농업소녀"의 인터넷 판매로 큰 성공을 거두며 정착을 하는 듯 한데.... 그
런데...
그들은 무대 바닥에 마치 벼를 심듯이 손 전화를 심는다. 마치 무슨 제의행위를 하는 듯
손 전화를 심고 있지만 그것은 벼가 아니다. 벼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모성인 땅에 튼튼
히 뿌리박고 정착되어야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벼가 아닌 손 전화는 무엇인가? 손전화를
통해 인터넷 판매가 되는 유기농 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성의 튼튼한 이 땅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말대로 '하늘에다', 그러니까 공중에다 심는 벼다. 똥으로서 똥 냄새
를 제거한다는 그럴 듯한 슬로건을 내걸고 그들이 하는 짓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이
땅에 발붙이며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더더욱 외롭게 만들
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음란한 망상은 작은 히틀러가 되는거야"라고 도범(김경익분)이 말하
는 경지, 그러니까 인간이 결국 괴물로 전락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말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서로서로 총을 들고 나타나 쏘아 죽이려드는 기괴한 세계가 되어 버린다. 기껏 잘
된다고 해 보아야 유기농업 모임을 웰빙 도시당으로 바꾸어 사이비 정치단체화시키는 파렴
치한 행위가 될 뿐이다.
이것이 백미가 바라던 것이었을까? 그녀가 이것을 위하여 시골이라는 그 튼튼한 토양을
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그 도시의 관심에서 멀어져 다시 시골로 돌
아간다. 그녀가 시골에 돌아와서 한 일은 이제 정말 벼를 심는 것이다. 하지만 삶의 진정성
은 그녀로부터 사라진지 오래다. 정착성이라는 자체에 몰입하지 못하고 떠난 뒤에 다시 찾
아온 그 땅은 이미 그녀의 땅이 아니다. 그녀는 벼를 심으면서도 벼에게 필요한 정착성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벼를 들고 손전화 거는 행위를 하는 부유하는 행위로 대응을 한다.
이것은 그녀를 양쪽으로 고립시킨다. 즉 땅이라는 정착성으로부터도, 도시라고 하는 현대적
공간으로부터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겠는가? 아무 것도 없다. 그냥 '자신은 아
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릴 뿐인 여자. 남자로부터 씨가 뿌려져, 때로 키워져, 계절에 성
숙해, 바람에 말라가'는 여자가 될 뿐이다. 그녀는 자신을 농업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농업이 아닌 사이비 농업이다.
아! 이 허망한 삶이여! 지평없는 막막함이여! 그런데 이 막막함은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
나에 물샐틈 없이 틈입해 들어간다. 조영진, 정동숙, 김경익, 박유밀, 등 중량급 배우들이 펼
치는 연기들인데도 불구하고 그 연기가 너무나 삭막하다. 순간순간 역할 변화를 시켜가며,
의자 위치를 바꾸어 가며 어떨 때는 개가 되었다가 어떨 때는 기차가 되었다가 눈부신 변신
을 거듭하며 연기에 몰입하지만 연기가 배우 한사람 한 사람만으로 보면 너무나 탁월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이 잡히지 않는다. 배우의 연기가 마치 사막에 외롭게 서 있는 선인장처럼 혼
자서 화려하게 솟아오를 줄만 알았지, 그들이 모여서 화려한 화원을 꾸밀 만큼 유연성이나
자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담론구조 자체가 어려운데다가 연기마저 이렇다면 이 연극,
관객들에게 그리 썩 흥미롭게 다가오지는 못할 것 같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몇몇 관중
들은 연극을 보면서 졸기까지 했다는 소문이다. 그것은 드보르작의 신세계교향곡 2악장의
감미로운 선율이 끊임없이 정착을 갈구하고 있는데도 결국은 정착할 수 없었던 인간들의 외
로움이 배우들의 연기에까지 침투한 결과가 아닐까?
3. 길을 떠나며-주관화된 부호, 그 어두운 그림자
이 연극은 지금 이틀 째 공연을 하고 있다. 출연하는 배우들도 만만치 않고 작품성 또한
만만치 않다. 6월 6일까지 공연이 거듭되면서 또 어떤 식으로 변모를 할지 그것은 오로지
연출자의 손에 달렸다. 내가 떠난 그 연극무대는 이제 나에게 지극히 주관화된 부호로만 그
어두운 그림자로만 남아 있다. 그 어두운 그림자에 한줄기 햇살이 비칠 날이 오기를 기대하
며 이 후기를 닫는다. 정착을 갈구하는 외로운 도시인 부산시민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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