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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生과 歿의 사이 活이다. 사이를 제대로 살아가려면 건강한 몸과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려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관찰하며 상태를 점검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명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과연 명상만으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그건 절대 아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그 위에서 관찰하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성품이다. 바른 성품을 지니고 있어야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성품이란 것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자기 수련이 필요하고. 이와 더불어 지혜가 자신 속에 항상 살아 있어야 한다. 역사를 깊이 있게 살피는 이유는 어떤 원인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전개되어 후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 순기능과 역기능은 무엇이고 이어갈 것은? 다시 반복될 수 없게 만들 것은 무엇인지 하고 성찰하는 이유도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함 인 것이다.
몸, 마음, 지혜, 성품 이 모든 것을 섞어 아름다운 영성으로 나아가는 길!. 바로 금년 순례와 걸음 여행의 화두다. 나의 성품은 세상의 모든 것들과 제대로 소통하기 위하여 열려 있고 지혜로 준비되어 있는가? 자신에게 물어가며. 아직 남은 100회 차 까지 스스로 완성해 나가는 것을 함께 모색하기 위하여 이러한 순례와 걸음에 대한 기획을 세우려 하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으로만 머무는 일과 알고 있음을 실천하는 것은 분명한 천지의 간격이다. 2018년 01월 첫 순례와 걸음 여행의 시작은 바로
峴으로 시작하였다. 높은 곳을 오르면 비로서 보이는 곳이 많이 생긴다. 운니동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서울 사대문 안에 있다. 운니동이란 동명은 이곳에 있던 고개 이름인 雲峴과 泥洞에서 각각 머리글자를 따서 합성한 데서 유래되었다. 雲峴은 교동초등학교 뒤에 있던 얕으막한 고개다. 비만 오면 땅이 질퍽거려 구름재 또는 운현이라 하였다. 泥洞은 땅이 질어 생긴 이름인데 운니동 일대는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 1396년 4월 초하루 한성부 5부 坊名의 표지를 세울 때 한성 중부 정선방이라 하였다.
이곳에 雲峴宮이 있다. 대궐건축 기법으로 지은 이 궁엔 안채 二老堂이 있다. 이는 바로 興宣 大院君 과 府大夫人 餘興 閔氏를 기리는 말로 그들이 살던 집이다. 대원군, 조선말 정권을 잡은 조대비와 밀약하여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운다. 그가 바로 조선 26대 고종황제다. 어린나이에 등극한 왕이기에 일정 기간 섭정이 필요하였다. 대원군이 정권에 중심이 되어 조선을 다스린다.
갖은 수모를 고관대작들의 능멸을 참아내며 흥선 이하응 대원군은 세상을 바꿀 꿈을 꾼다.그 첫걸음은 아버지 남연군 묘 이장이었다.2대에 걸쳐 군왕이 나올 자리를 찾아 경기도 연천 남원군 묘를 충남 예산 가야산으로 옮긴다. 7년 뒤 아들 명복은 고종이 되었고 손자는 순종 황위가 된다. 비장의 한 수가 통한 것이다. 풍운아 대원군은 1898년 광무 2년 당시 고양군 만리현부근 공덕리 운현궁 별서 아소당에서 세상을 등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묻힌다. 10년 후 흥원(興園)이라 불리던 흥선의 묘는 경기도 파주 운천면 대덕동, 현재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로 이장된다. 첫번째 천봉이었다. 천봉이라함은 왕실의 묘를 이전하는 일을 말한다.
흥원의 천봉은 융희(隆熙 원년) 1907년 11월 10일에 시작하여 융희 2년 1908년 2월 1일에 마무리 된다. 천봉 책임자는 제실회계 심사국장 김각현이 임명되었다. 김각현은 산지관으로서 신택두, 최홍준과 함께 파주 일대 묘자리를 살펴 장릉을 천봉한 자리를 점지해 준다. "용세(龍勢)는 경행(慶幸)하고 존귀한 기상이 많고 혈국(穴局 : 묘자리와 그 주위의 형국을 이름)은 지극히 정수하고 안온합니다. 또 골육수(무덤이 있는 산 밑에서 흐르는 강물)는 수백 리를 흘러 정면으로 들어와서 명당을 지나가니, 천만년토록 복록을 누리실 자리입니다."
천봉에 소요된 비용은 구원(舊園)을 헐고 벽실을 봉출한 비용 68환31전 등 총 3만2천51환41전6리로 기록돼 있고 헌의대원왕원지(獻懿大院王園誌)와 순목대원비원지(純穆大院妃園誌), 신도비명(神道碑銘), 상량문(上樑文)이 기재돼 있다. 헌의대원왕원지에는 황제(순종)의 할아버지인 대원군에 대한 인식을 적어 놓았다. "태황제(고종)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은 황제의 본생부로서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필했던 일을 떠맡았다. 구족을 돈목하게 하고 사색의 당파를 평등하게 기용하였으며, 요행의 문로를 막고 언론의 통로를 열며 침체된 사람들을 발탁하고 세도가들을 물리쳤다."
참 역사는 순례자인 나를 기가막히게 하였다. 興園 즉 대원군의 묘는 1966년 파주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천봉하게 된다. 권력을 쥐고 흔들 때 척화비를 세우며 외세 강력하게 배척했던 사람이었는데.. 파주 흥원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들어서기 때문에 천봉을 하게 된 것이다. 아일러니다. 외세에 밀려난 흥선 대원군의 묘를 보면서 천주교 믿던 부인과 손자, 며느리가 떠올랐다.
1864년 2월 28일 (고종 1년) 러시아는 함경도 경원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한다. 이에 놀란 대원군은 심각한 우려끝에 남종삼 승지를 통해 프랑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는 제의를 받고 유화적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러시아가 물러가고 유림과 조정 척화양이를 주장하자 상반된 태도로 돌변한다.
1866년 정월,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베르뇌 신부를 비롯한 9명의 프랑스 신부와 홍봉주·남종삼·홍봉주 등 천주교도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이어서 오가작통법에 따라 천주교도들과 가까운 사람들까지 굴비 엮이듯 잡혀왔다. 조선 방방곡곡에서 천주교 서적과 십자가, 마리아상이 불태워졌다. 병인박해가 시작된 것이다.
이 갑작스런 종교 탄압으로 인하여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황해도 옹진, 풍천, 장연 지방과 홍성, 해미 등 충청도의 내포 주변 고을이었다. 《천주교사》에는 8천여 명,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가까스로 화를 피해 탈출한 리델 주교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북경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은 그해 11월 함대 7척과 군사 600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공했다. 이른바 병인양요였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고 급히 철수해 버렸다. 기세가 오른 대원군은 그때부터 외국과의 교류 자체를 부정하는 고강도의 쇄국정책을 단행했다.
그 무렵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을 타고 충청도 근해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했지만 역시 거절당하자 물러났다. 얼마 후 그는 재차 입국하여 덕산에 있는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다. 이에 분개한 대원군은 전국 요처에 척화비를 세우고 외국인과의 접촉 자체를 틀어막았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부장품을 노린 것이 아니라 조선의 개항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그들은 조선에서 묘를 훼손한다는 것이 충효의 개념을 무너뜨리는 최악의 만행으로 규정된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한 악수였다.
1868년에는 미국 상인 프레스톤이 이끄는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던 도중 주민들과 충돌이 일어나 배가 불타고 선원들이 전원 사망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71년 4월 미국 함대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를 침공했다. 신미양요로 기록된 이때의 싸움에서 미군은 군사적으로 승리했지만 조선 조정의 쇄국의지가 굳건함을 알고 후일을 기약하며 철수했다.
그처럼 흥선대원군은 대내적으로 각종 개혁 조치를 단행했고, 대외적으로 외세의 진입을 봉쇄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 그 무렵 외부와 통하는 조선의 공식 통로는 청나라 쪽으로 의주와 연결되는 책문과 두만강가의 경원, 일본 쪽으로 동래의 왜관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통치 방식은 유림은 물론 처가인 민씨 일족의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장차의 파란을 예고하고 있었다.
갓밝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 興園에 흥선대원군묘 바로 옆에는 납골묘 형태의 운현궁 가족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묘역에는 흥선대원군의 증조부 낙천군 이온(洛川君 李縕, 1720년 ~ 1737년)과 부인 달성 서씨(達城 徐氏), 흥선대원군의 조부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년 ~ 1771년)과 남양 홍씨(南陽 洪氏), 흥선대원군의 장남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1845년 ~ 1912년)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여주 이씨(驪州 李氏),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 ~ 1917년)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광산 김씨(光山 金氏),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문용(李𪣢鎔, 1882년 ~ 1901년), 흥선대원군의 증손 이우 (李鍝, 1912년 ~ 1945년)와 부인 박찬주(朴贊珠), 흥선대원군의 고손 이종(李淙, 1940년 ~ 1966년)이 매장되어 있다.
조선말 동북아 정세와 국내 혼란에 대하여 역사적 발자취를 걸어 보다 興園 숲을 빠져 나왔다. 찬 공기도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되짚어 興園을 오르고 내리는 산길을 걸어 내려섰다. 작은 경작지가 산 아래 아파트군을 마주하면 펼쳐져 있었다. 지세를 보아 꼭 아침가리 모양이었다. 잡풀이 무성하였다. 철에서 벗어난 농한기이기에 생긴 황폐함일까? 두리번거리며 살피자 답은 금세 나왔다. 오래 휴농된 땅이었다. 곡식을 얻지 않는 땅은 금세 원시의 형태로 돌아간다. 작은 농막이 있었다. 잠시 서서 촌로와 인사와 덕담을 나누었다. 어디서 오셨는지요? 서울에서요. 능 참례를 오셨군요! 네 흥원을 둘러보고 가는 중입니다. 능지기 촌로이시다. 농지를 부쳐 먹으며 그 대가로 興園을 돌보는 분이시다. 새해 더 더 건강하십시오. 네 선생님도 그렇게 되십시오. 목례를 한 후 차에 올랐다.
이영관 군에게 의정부 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이동하자 일렀다.
조촐하고 단순한 규모의 옛성전 돌 집이었다. 1953년 전쟁 휴전과 더불어 미군 군종신부의 도움과 미군 신자들의 봉헌금과 헌신적인 교우들의 힘으로 재건된 성당이다. 입당하여 앉아 상당시간 묵상의 시간을 갖었다. 성당 실내 환경이 주는 영향으로 마음에 고요가 쉽게 찾아 왔다. 남북한 갈린 삼팔선 따라 설치된 공간을 DMZ이라 부른다. 서부전선 일대의 사목중심지가 바로 의정부교구이다 평화의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잠시 찾은 곳이다.
평화의 참례와 묵상을 끝내고 다음 일정을 찾아 떠났다.
한국 천주교 신자중 당시 최고의 지위에 있던 남종삼 승지, 그의 세례명은 요한이다.
남종삼(1817~1866). 본관(本貫)은 의령(宜寧). 자(字)는 증오(曾五). 호(號)는 연파(煙波). 중재(重齋)로 쓰기도 한다. 1984년 5월 . 통덕랑(通德郞) 이우(履佑)의 아들인 탄교(坦敎)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장성하여 큰댁인 상교(尙敎)의 아들로 입양(入養)하였다 남인계의 농학자(農學者)이며 충주부사(忠州府使)를 지낸 부친 상교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22세 때인 1838년(憲宗 4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 영해 현감(寧海縣監)을 지냈고 철종(哲宗) 때에 승지(承旨)가 되어 국왕을 친근에서 보필하였다. 고종(高宗) 초에는 그의 학덕(學德)으로 말미암아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가 천주교를 믿은 것은부친의 영향이었다.
남종삼이 나서게 된 것은 러시아제국[露西亞帝國] 남침에 따라 야기된 조선왕국이 위기(危機)에 직면하게 됨으로써였다. 1860년(哲宗 11년) 영불군(英佛軍)의 청국(淸國) 공격으로 벌어졌던 애로우호 사건(Arow號事件)[제2차 阿片戰爭]의 전쟁상태를 거중조정(居中調停)하여 북경조약(北京條約)을 성립시킨 대가로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하게 된다. 이리하여 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조선왕국에 접경(接境)하게 된 러시아제국이 1864년(高宗 1년) 이후 거듭 통상(通商)을 요구하며 월경(越境)해 오게 됨으로써 조선왕국 북변(北邊)에 국제적 긴장이 감돌게 되었다.
강대한 침략세력의 접근에 집권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부심하게 된다. 이때에 국내에 잠입하여 전교활동을 펴고 있던 프랑스 성직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교인 홍봉주(洪鳳周) · 김면호(金勉浩) 등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이라는 난국 타개의 건의를 대원군에게 올렸다. 관심을 끌지 못하자 흥선대원군과 면식(面識)이 있는 남종삼이 국태민안(國泰民安)의 결의와 신앙자유(信仰自由)의 구현을 위해 나서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에게 ‘이이제이의 방아책’ 실현의 방안을 설명하고 그것을 추진하기 위해 국내에서 전교활동하던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회동하여 협의토록 내락(內諾)을 얻었다. 남종삼의 의도는 이들 프랑스 주교의 힘으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긴급 연락을 취하여 프랑스 · 영국등과 조선왕국이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정책을 제어하는 동시에, 쇄국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여 신앙생활의 자유를 얻으려는 데 의도가 있었다. 러시아의 월경이 잠잠해져 북변의 긴장이 완화되었고 한편으로 반대원군 정객(政客=趙斗淳, 鄭元容, 金在根, 金炳學 등)들이 대원군의 천주교 접근책을 탐지하고 압력을 가하며 정치적 공세를 취하였다.
때마침 청국에서 천주교 박해가 강행되고 있다는 와전된 정보가 동지사(冬至使) 이흥교(李興敎)에 의해 전해졌다. 이에 정치적 생명의 불안을 느끼게 된 대원군은 천주교 접근에서 표변하여 박해로 급전하게 되어 1866년 구정(舊正)을 전후하여 박해령을 내려 최대규모의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벌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남종삼은 흥선대원군을 운현궁(雲峴宮)으로 찾아 주교의 입경(入京) 사실을 전하고 교회 측과의 회담을 요청하였으나 냉대(冷待) 받았고, 오히려 하향(下鄕)을 권유받았다. 사태의 급전을 예기할 수 있었던 남종삼은 관직을 버리고 충청북도 제천(堤川) 땅 묘재[山尺]에 은거 중이던 부친 남상교(南尙敎, 아우구스티노)를 찾아 하향하였다.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된 남종삼은 부친의 격려를 받고 다시 상경하기에 앞서 묘재에서 10리 상거인 배론舟論]의 신학교(神學校)를 찾아 성사 (聖事)를 본 후 서울로 향해 떠났다. 통외(通外)의 공작을 추진한 장본인이라 하여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남종삼은 상경 도중 체포령의 하달을 알고 일시 시세(時勢)를 관망하기 위해서 피신하였었으나 결국 서울을 가까이 한 고양군(高陽郡) 축베더리 마을에서 체포되어 의금부(義禁府)로 연행되었다(음 정월 15일). 국청(鞫廳)이 마련되고 다음 날부터 6차에 걸쳐 홍봉주, 이선이(李先伊), 최형(崔炯), 정의배(丁義培), 전장운(全長雲) 및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과 함께 엄중 문초당하였다.
남종삼은 국사(國事)가 어려울 때 러시아 남침의 위험을 경고하였고, 그리하여 방아책(防俄策)을 제시하고 개방(開放)을 추진하였음을 거듭 밝혔다. 또한 천주교가 사교(邪敎)가 아님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요언(妖言)으로 세인을 현혹(眩惑)케 하고, 초구지도(招寇之圖)를 꾸몄다 하여 모배잠종(謀背潛從)의 죄로 모반부도(謀叛不道)로 결안(結案)되었고, 다음 날인 정월 21일(양력 3월 7일) 서소문(西小門) 밖 네거리에서 홍봉주(洪鳳周, 토마스)와 같이 참수형(斬首刑)을 받고 순교(殉敎)하였다. 향년(享年) 50세. 남종삼의 처형 후 가족을 노륙지전(孥戮之典)에 처하라는 상소가 거듭되었으나 왕명으로 각하되었다. 그러나 결국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南尙敎)는 공주진영(公州鎭營)으로, 장자인 남규희(南揆熙)는 전주진영(全州鎭營)으로 잡혀가 마침내 공주와 전주에서 순교하였고, 처 이소사(李召史)와 차남 남명희(南明熙)와 두 딸은 응좌죄인(應坐罪人)으로 경상도 창녕(昌寧)으로 유배되어 노비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이소사도 창녕에서 순교하니 남종삼 가문은 3대에 걸쳐 그 자신을 포함하여 4명이 천주신앙에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월 24위 병인순교자(丙寅殉敎者) 시복(諡福)으로 복자(福者)가 되었고, 1984년 5월 6일 103위 한국복자의 시성(諡聖)으로 성인(聖人)의 위에 올라 세계 가톨릭 교회의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모반부도(謀叛不道)의 그의 죄명은 1885년에 취해진 조선 왕국의 복권조치(復權措置)로 탕척(蕩滌)되었다.
남상철(1891~1978). 성인 남종삼(南鍾三)의 손자로서 재속회원이었다. 세례명 프란치스코. 경기도 안성군 미양면 갈전리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생후 1개월 만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외가(外家)에서 자랐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통신강의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한 후, 충북 장호원(현재의 감곡)본당에서 운영하던 매괴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1921년부터 충북 음성군 감곡면 면장 겸 도(道)의회 의원으로 20여년 동안 재직했으며 광복 후 1947년에는 영친왕(英親王) 환국추진위원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영친왕의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교회사와 교회사적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주어사강학(走魚寺講學)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 주어사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경향잡지> 1962년 11월호에서 1963년 1월호까지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5명의 순교 선조를 가진 순교자의 후손답게 항상 봉사하는 자세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자손들에게는 사심 없는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따르라고 가르쳤다. 1978년 7월 13일 노환으로 서울 삼양동 자택에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3남 5녀가 있는데 이들 중 3명은 현재 수녀로 있다.
병인박해와 관련되어 있는 성 남종삼 요한 찾아 그의 손자 남상철 프란치스코 묘역까지 참배하였다. 재속회 초기회원으로서 본 받을 만한 프란치스칸으로 살았기 때문이었고 대원군과 연관된 성 남종삼 요한의 가족이란 점도 참례의 영향을 미쳤다.
울대리에 있는 천주교 묘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 남종삼 요한 가족묘, 가파른 길이다 보니 순례자들의 호홉도 가파르고 장단지에도 힘이 들어 간다. 그리고 길이 많이 망가져 있었다. 시급하게 보수가 필요한 곳이다. 다음 일정은 백서로 유명한 황사영 묘택이다.
천재 소년 황사영은 17세에 진사에 합격한 후 정조는 어느 날 황사영을 불러 만난다. 그리고 아직은 어리니 좀 더 성장한 후 나를 도우라 한다. 그리고 정표로 비단 띠를 손목에 감아 주고 학자금을 준다. 각별하게 정조는 사영을 아꼈다. 인재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정조에겐 있었던 것이다. 사영은 이 보은을 화답하듯 죽을 때까지 비 단끈을 놓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그는 정약용 형제들에게 학문을 배우러 갔다가 약용의 이복형인 정약현, 약현은 이벽의 누이와 혼인을 맺어 정난주를 얻는다. 정난주는 황사영 못지않게 영민하였다. 그런 조카를 약전은 공부를 가르친다. 훗날 황사영과 혼인을 맺어 아들을 두지만 남편 황사영은 백서 사건으로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천주교를 믿다 순교를 당한 교인 중 가장 처참하게 순교를 당 한다. 어머니와 누이들은 거제도의 노비가 되고 사랑하는 아내 난주는 제주도로 유배되어 관비가 되지만 동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오래 머물다 제주도에서 생을 마치지만 아들 경환을 살리기 위하여 동행하던 관리들을 매수하여 아들을 추자도 갯바위에 올려놓고 제주도로 향한다. 그리고 한 시도 아들을 잊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간다. 황사영의 백서 영향으로 약전과 약용은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를 가 약전은 자산어보를 저술하고 흑산도에 유명을 달리하고 약종은 18년간 강진에서 머물다 18년 만에 해배되어 마재로 돌아와 여유당에 머물다 뒷산에 묻혀 한 많은 여생을 마감한다
황사영이 이곳에 묻힌 것은 능지처참 형을 받은 후였다. 이곳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부곡리에 있는 가마골 홍복산 자락이다. 이곳에서 1980년에 황씨 집안의 후손이 사료 검토 작업과 사계의 고증을 거쳐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이 황사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황사영백서
감히 바라옵건대 교황께 자세히 아뢰시어 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쓰셔서 세계 각국에 알려 주님의 박애정신을 본받은 성교회가 그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어 죄인들을 간절한 희망이 채워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이 나라(조선)의 병력은 본래 미약하고 모든 나라 가운데 맨 끝인데다가 태평세월이 二OO년을 게속해 왔으므로 백성들은 군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위에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어진 신하가 없어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흙더미처럼 무너지고 기와장처럼 흩어질 것이나 그대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할 수 있다면 군함 수백척과 정예군 五六만명을 얻어 대포와 무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말도 잘하고 사리에도 밝은 중국선비 三,四명을 데리고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고 교종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에 생령을 구원하러 온 것이니 귀국에서 한 사람의 정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 들이신다면 우리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도 없고 저대로 대포 한방이나 화살하나 쏘지 않고 티끌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는 북치고 춤추며 떠나 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반듯이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으리니 왕께선 한사람을 받아들여 나라에 벌을 면하게 하시려는지 아니면 나라를 잃더라도 그 한사람을 받아들이지 아니 하실는지 그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서양 여러나라가 참된 천주를 흠승하므로 오래 태평하고 길게 통치하는 결과를 동양 각국에 미치게 하리니 서양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 드리는 것은 매우 유익하며 결코 해 받는 것이 없음을 거듭 타이르면 반드시 온나라가 놀라고 두려워 감히 붸지 아니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함에 척수와 군대의 인원수가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은 숫자면 대단히 좋겠지만 힘이 모자란다면 배 수십척에 군인 五六천명이라도 족할 것 입니다. 수년 전에 서양상선 한척이 이 나라에 동네에 표류하여 왔을 적에 한 교우가 배에 올라 자세히 보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그 배 한척이면 우리나라 전함 백척은 족히 대적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양으로 말하면 성교의 본 고장으로 二천년 이래 모든 나라에 성교가 전파되어 귀화되지 않은 곳이 없는데 이 탄알 만한 이 나라만이 순종치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완강히 대항하여 성교를 잔인하게 박해하고 성직자를 학살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동양에서 二OO년 동안 없었던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문책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거룩한 가르침에 의거하면 선교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그 죄가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중하다 했으니 이 나라를 전멸한다 해도 성교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없을 진대 지금의 이 밥법은 오직 명성과 기세를 크게 벌려 전교를 용납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하는 백서는 원본과 사본의 2종이 있으며, 이것은 신유박해 후 근 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뒤 의금부 관리에게 발견되어 관리가 당시 조선 천주교회를 지도하던 뮈텔주교에게 전달하고 .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복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될 때에 교황에게 전달되어 지금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고 있다. 현재 영인본이 있으며 불어로 번역된 것도 있다.
이로서 순례를 매듭지은 후 고려 시조 왕건 후손이 운영하는 고려가든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 나눔의 시간을 갖었다. 오후 결혼식 행사가 있는 헬레나 자매님을 먼저 보내 드리고 남은 일행은 걸음 여행을 시작하였다.
날은 봄날이었다. 바람도 없었다. 다만 미세먼지가 시야를 가려놓았다. 임진강 얼음도 전부 녹아 있었다. 유빙이라도 있을 만한 계절인데 유빙도 거의 볼 수 없을 만큼 강물에 봄이 이미 깃들어 있었다. 걷고 걸어 임진강 뚝에 올라서서 걸었다. 노곡리에서 장남교 까지 10.5 km. 지금 정도의 속도라면 4시 참회와 속죄의 성당,특전미사를 참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걸음 여행을 시작하다 보면 몇몇 팀으로 구분된다. 보폭과 마음이 닮은 사람들 끼리 모이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돌아 보니 후미에 모니카, 수산나, 작은 마틸다 자매님이 걷고 있었다.
앞을 다시 본 후 소리쳤다. 그리고 누름 단추를 눌러 화인더에 그 모습을 담아 두었다.
이제는 뚝에서 내려서야 한다.
징검다리 건너 억새 그리고 초지, 전부 황토를 닮은 빛이다. 하늘아래 모든 것들은 흙과 인연을 맺고 있다.
징검다리를 건너 잠시 등을 돌려 걸어 온 길을 조망해 보았다. 인적이 끊겼다. 적막함과 동시에 고요한 평화를 느꼈다. 숲에 새들이 사라지면 허망한 쓸쓸함이 들지만 풍경 안에 사람의 흔적이 자취를 감추자 역시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는 것 같은 감정이 생겼다. 역시 자연도 인간이 필요하고 인간 역시 자연이 필요한 숙명적인 관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등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물을 좋아하는 양근 상목이 숲을 조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무 기둥마다 흙빛이 감지되었다. 우기때 물이차오르면서 흔적을 남긴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드나무 뿌리를 양근이라 하는데 물 속에서도 잘 자란다. 깊고 넓게 퍼져 자라면서 웬만한 물살은 강인하게 견딘다. 수방대책용으로 옛부터 한강변에 많이 심던 나무가 바로 버드나무다. 그 대표적인 한강변이 바로 양평이다. 양평이 옛지명을 양근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한강변에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생긴이름이다. 나중에 지평과 합치면서 양평이란 이름을 얻게되어 현재에 이르지만 양평에 있는 천주교 성전 이름은 양근성당이라 부르고 있다. 조선시대 양근에는 대학자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살아 강학을 통해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강학하면 주어사도 중요하지만 현재 양근성당 부근에 있는 감호도 중요한장소다 감호가 있는 강변에 있던 정자에서도 강학이 열렸던 곳이다.
버드나무에 강관을 걸어 그네를 만들어 놓았다. 걷다 동심이 발걸음을 잡아 한번씩 올라탄 후 그네를 탔다. 이젠 나이들을 먹어 이 마저 마음대로 구를 수가 없었다. 뒤짚히고 거꾸로 메달리고 하여 .. 아무튼 돌발이 많이 생겨 가슴을 여러차례 쓸어 내려야 하였다.
징검다리 건너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다시 걸음을 옮겨 비탈을 올라섰다. 시간을 보자 3시 30분경, 아차 시간이 촉박하였다. 4시 정각 미사, 약 3km 남겨 놓고 장남교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를 불렀다. 서둘러 버스에 승차 후 참회와 속죄 성당으로 향하였다. 간신히 도착한 시간, 제 2독서가 시작될 즈음이었다. 다행이었다. 우선 앉아 숨을 골랐다. 그리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독서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어서 복음과 강론, 전례의 중심이다. 구약과 신약에 이어서 이어지는 말씀은 핵심이다.
눈을 감고 마음으로 듣는다. 그리고 익히고 배우며 반성하고 참회의 시간도 갖지만 동안 일치하고 살아 온 흔적이 발견되면 환희심에 잠시 머무는 행복도 수확된다. 이러한 시간이 흐른 후 봉헌을 하고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실체인 성체성사의 시간을 받아 모셨다.
양손을 모아 십자가 형상을 만들고 걸어와 자리에 앉아 기도를 드렸다. 진정한 사랑은 끝없는 용서가 이어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을 알고 있나이다. 사랑이 부족한 것은 제 자신이 용서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의 병입니다. 주님께 이 점을 의탁하오니 고쳐주옵소서. 그리고 스스로 노력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하겠나이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파견성가를 부르고 특송을 듣고 성전밖으로 나오려 할 때 광적성당 전 주임신부님이 찾아오셔서 기쁨의 인사를 나누었다. 봉사를 마치고 떠나기 전 성당 부근 단골식당으로 가 점심을 챙겨 주시던 신부님이셨다.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이 많이 다니던 성당이라 영어로 미사를 집전해 주시던 사제셨다. 너무나 반가운 조우였다. 영욱간에 건강하시기를 기도중에 신부님 기억하겠습니다. 또한 작은 마틸다를 통해 이북에 있었던 메리올 수도원 전경, 신의주 성당, 원산베네딕도 수도원 전경의 사진을 보고 묘사한 사실적으로 그린 엽서를 주셔서 오늘 참가 형제들에게 나누어 드렸다. 이어서 민족화해 센타 내부 일부와 봉안당 한반도 제대를 참관한 후 서울로 돌아 오기 위하여 버스에 올랐다. 2018년 01월 순례와 걸음 여행, 나름대로 소기의 목적을 완성하고 주님과 함께한 순례와걸음 여행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해 주시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여 못하신 형제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월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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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해 첫 걸음여행이라 부푼 마음에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깨어 짐을 챙겨 장소에 도착~
반가운 모습들에 훈훈한 마음까지....
안개는 짖었지만 포근한 날씨에~
첫번째 경기도 남양주시 대원군묘소 참배, 주교좌성당, 남종삼가족묘,
황사영 묘역,
리더님께서는 가는곳마다 순교자에대한 역사의 설명을 자세히 해 주셨다.
현장에서도 열심 해주시고 카페에도 자세히 올려 주시고~
잊지 말라고 ~~~~
ㅎ ㅎ
역시 울 리더님 쵝오
18년도 걸음여행의 화두로 ㆍ
몸, 마음, 지혜, 성품 이것을 섞어
아름다운 영성으로 나아가는길로 정하셨다 하신다.
아름답고 마음에 와닿는 화두~~
영성으로 나가는길...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면서~
리더님께 감사 드립니다.
걸음여행 자매님들 사랑 합니다.
올해도 한 형제애로 함께 걷기를 기도 합니다.^^ 샬롬&샬롬
자매님도 샬롬, 우리 모두 샬롬, 이 민족에게도 영원히 샬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