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보려면 어둠이 꼭 필요하다/ 정호승
저는 별을 좋아합니다. 달도 좋아하지만 별을 더 좋아합니다. 달이 은근하고 포근한 누
님 같다면 별은 다정한 형님 같습니다. 달빛이 인자한 어머니의 빛이라면 별빛은 왠지 내
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의 빛이라고 생각됩니다. 달빛은 마냥 따스하게 느껴지는 데 비
해 별빛은 따스하지만 다소 차가운 느낌을 줍니다. 그 차가움이 들뜨기 쉬운 마음을 들뜨
지 않게 하고, 때로는 사물을 냉철하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시인의 빛
이 있다면 달빛보다는 별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밤길을 걸어가다가 달을 바라볼 때보다 별을 바라볼 때 더 살아 있다는 감각이 느
껴집니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 말없이 뜬 초승달을 보고 발걸음을 멈출 때도 있지만, 막
어둠의 옷을 입은 검은 산 위로 떠오른 별들한테서 생존의 감각을 더 느낍니다. 달은 초월
의 표상인 듯해서 오히려 더 멀리 느껴지지만, 별은 희망의 길로 인도해주는 구원자인 듯
해서 언제나 손을 뻗치고 다가가고 싶습니다. 달이 감성적이라면 별은 이성적인 것이 아
닐까요. 달이 슬픔이라면 별은 그 슬픔을 껴안고 일어서는 기쁨이 아닐까요. 무엇보다도
달은 매일 변하나 별은 변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제 어른쪽 팔뚝엔 까만 점이 많습니다. 그 점들 중엔 흡사 북두칠성과 북극성 모양을 지
닌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팔뚝을 내려다보며 혼자 빙그레 웃을 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몸에 있는 점에서도 별자리를 찾으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아마 제가 별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릴 때 평상에 누워 여름 밤하늘을 바라보다 잠이 들
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대학생이 되어 뒤늦게 읽은 『어린 왕자』때문이 아
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인이야말로 지구라는 별에 사는 ‘어린 왕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별을 바라보는 일도 젊은 청년 시절에 바라보는 것과 나이가 든 지금 바라보는
것과 그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젊을 때 바라본 별빛은 마냥 푸르고 날카
로웠으나, 지금 50대 중반이 넘어 바라본 별빛은 은근히 붉은빛을 띠고 부드럽게 느껴집
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별을 바라보아도 쓸쓸함을 느꼈으나, 이제는 별을 바라보아도 쓸
쓸하지 않습니다. 쓸쓸하다가도 별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에 위한의 빛이 찾아옵니
다.
저는 이제야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별들이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
다. 저는 이제야 내가 별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별이 나를 바라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
다. 별들이 왜 어둠 속에서 빛나며 그걸 아는 데에 평생이 걸리는지, 왜 제 인생의 어둠이
깊어져야 별이 더 빛나는지 이제야 조금 깨닫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는 반드시 어두운 밤이 있습니다. 질병이라는 밤, 이별이라는 밤, 좌절
이라는 밤, 가난이라는 밤 등등 인간의 수만큼이나 밤의 수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밤을 애써 피해왔습니다. 가능한 한 인생에는 밤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왔습니다. 그
러나 밤이 오지 않으면 별이 뜨지 않습니다. 별이 뜨지 않는 인생이란 죽은 인생이나 마찬
가지입니다.
그 누구도 밤을 맞이하지 않고서는 별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밤을 지
나지 않고서는 새벽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꽃도 밤이 없으면 아름답게 피어
날 수 없습니다. 이른 아침에 활짝 피어난 꽃은 어두운 밤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답게 피어
납니다. 봄에 꽃을 피우는 꽃나무도 겨울이 있었기 때문에 꽃을 피웁니다.
신은 왜 인간으로 하여금 눈동자의 검은자위로만 세상을 보게 했을까요? 눈을 만들 때
흰자위와 검은자위를 동시에 만들어 놓고 말입니다. 그것은 어둠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
라는 뜻이 아닐까요. 어둠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밝음을 볼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별은 밝은 대낮에도 하늘에 떠 있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없기 때문에 그 별을 바라볼 수
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어두운 밤에만 그 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검고 어두운 눈동
자를 통해서만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듯이, 밤하늘이라는 어둠이 있어야만 별을 바라볼
수 있듯이, 고통과 시련이라는 어둠이 있어야만 내 삶의 별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 인
생의 캄캄한 밤, 그것이 비록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밤일지라도 그 밤이 있어야 별이 뜹니
다. 그리고 그 별들은 따뜻합니다. 젊은 날에 제가 쓴 시「별들은 따뜻하다」를 다시 읽어
봅니다.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 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 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2006.비채
첫댓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는 <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 책을 사서 병원에 입원한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두고 두고 고마웠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하루 한 장씩 읽으면서 울기도 했다더군요
개똥벌레를 잡아 호박꽃에 가두어 불 밝히고 하늘에 떠있는 별과 달을 보며 누군가를 막연하게 그리워 했던 동경이 떠오릅니다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