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대평무우
성 종 화
아내가 시장바구니를 내려놓으며 하는 말이다. 우리 고향 대평무우는 이 시장에서는 영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시장바닥을 한참을 헤맸는데도 없더라는 말이다. 내가 자란 곳은 진주의 대평이라는 들녘 마을이다. 그 고장에는 가을철이 되면 무우 농사가 주 밭농사다.
대평 무우는 빛깔이 곱고 질이 연하며 생김새가 길쭉하다. 그러면서도 약간 배가 불러서 잘 생긴 아가씨들의 미끈한 다리통을 연상하게 한다. 가을이 오기 전 한 더위가 절정의 고비를 넘기고 낮에는 불볕 늦더위가 그래도 기승을 부리는 양력 팔월 보름을 전후하여 2. 3일간에 무우 씨앗을 파종 한다.
무우는 약간의 사질 토지에서 잘 된다. 우리 고향은 강을 끼고 있어서 토질에 모래 성분이 많은 편이다. 먼저 흙을 잘 다듬어 팥고물 같이 부드럽게 만들어 밭이랑을 짓는다. 그리고 그 두둑에 콩 심듯이 한 발자국씩 걸음을 떼면서 그 발자국에 씨앗을 넣고 그 발뒤꿈치로 씨앗이 든 흙을 살짝살짝 덮으면서 앞으로 걸어 나간다. 그렇게 파종을 한다. 얼마 지나면 그 발자국마다에서 소복이 씨앗이 싹이 터 나온다. 그러면 바로 여린 싹 잎을 한번 속아내고 얼마큼 자랐다 싶으면 다시 그 중 튼실한 한포기만 남기고 나머지를 또 속아 낸다. 두 번째 솎은 것을 솎음 무우라 하여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나물을 해 먹기도 하고 빨간 고추가 든 젓갈 김치를 담기도 한다. 연하고 부드러워서 그 맛 또한 일미다.
무우 철이 되면 온 들녘이 녹색으로 장관을 이룬다. 내가 한때 면 사무소에 임시서기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집에서 면 사무소 까지 걸어가는 중간에 땅 고개라는 산 고갯길을 넘어가야한다. 그 너머가 벗들이라는 넓은 들녘이다. 온 들녘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 오르는 무우 밭길이다. 그 싱싱하고 탐스러움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정경이다. 얼마간 지나면 무우 뿌리가 땅위로 솟아오르면서 약간의 푸른빛을 띤 흰 살결을 들어낸다.
서리를 맞히고 무우를 걷어 드리는데 서리 맞은 무우 잎은 시래기라 하여 집집마다 추녀 아래에 매달아 말려서 겨우내 시래기 국을 끓여 먹기도 하고 삶아서 나물반찬을 한다. 지금은 그 시래기가 귀한 웰빙 식품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대평 무우는 질이 연하고 수분이 많은 데에다가 맛이 달착지근하여 무우 시장에서는 인기가 있다. 그래서 일찍이 종묘상에 대평 무우의 씨앗이 상품으로 나와 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아오고 있었다. 그런 좋은 품종이 이 시장에 없다는 것은 다른 품종으로 개량이 되고 재배를 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철 대평 무우로 동 김치를 담겨서 살얼음이 뜨는 국물을 그릇 가득히 담고 거기에 싱싱한 매운 고추나 몇 개 띠워 상위에 올리면 그 시원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숙취에 머쓱한 속이 몇 숟가락의 김치 국물에 그대로 풀려 버리게 된다.
내 어릴 때 동지 긴 긴 밤을 어머니들이 모여 동네 두레 길쌈(시골 아낙네들이 모여서 목화로 실을 뽑는 협동 작업)을 잣는다. 어렵게 살 때여서 간식이 별로 없는 시절이다. 어머니는 방안 구석에 엎드려 공부하는 나를 집 앞 밭에 나가 묻어둔 무우를 파오는 심부름을 시킨다. 무우 구덩이는 한쪽에 볏단으로 손을 넣어 꺼내도록 입구를 해 두었기 때문에 그 볏단을 뽑고 안으로 손을 넣어 무우를 꺼내면 된다. 무우를 머리 쪽을 잡고 부엌칼로 아래쪽으로 껍질을 벗긴 다음 위에서 아래로 길쭉길쭉하게 쪼개어서 하나씩 쥐고 먹는데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맛이 그저 그만이다. 한 조각을 다 베어 먹기도 전에 뱃속에서 트림이 바로 올라온다. 무우의 소화 효소가 트림으로 나오는 것인데 그 시원함이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물론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스 냄새를 풍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나는 내 고향의 이 무우에 대한 기억을 지금도 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쯤 이다. 10여년을 동네 구장 일을 맡아 하시던 아버지가 그 동안에 가용에 쓴 외상 비료대금 정리를 하면서 전답을 매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다. 가세가 갑자기 어려워 졌다. 그래서 하숙을 못하고 자취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주말에 집에 가면 반찬 하라고 어머니가 자동차가 지나가는 밭머리 까지 따라 나오셔서 무우를 밭에서 뽑아 밭머리에 흐르는 봇도랑 물에 씻어서 보따리에 싸 주셨다. 그때 어머니는 무우를 뽑아 그 흐르는 물에 씻으면서 물 씻어 먹는 나라 없다더라 하셨다. 무우는 씻으니 금방 깨끗해 졌다.
그날 어머니와 나는 그 씻은 무우를 밭머리에 나란히 앉아서 맛있게 깎아 먹었다. 지금도 그 때의 어머니의 물 씻어 먹는 나라 없다 하시던 말씀이 생각이 난다. 공해가 없던 그 시절은 비록 밭머리로 흐르는 물도 깨끗했었다. 지금처럼 물을 화공약품을 넣어 정수를 해야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세월이 가고 내 고향 진주 대평은 남강 땜 공사로 인하여 호수 물에 다 잠겨 버렸다. 가을철이면 온 들녘이 녹색의 무우 밭으로 덮였던 그 밭들이 이제는 철렁거리는 호수 물로 가 득하다. 고향의 아련한 기억과 함께 다시는 그 시원하고 맛있는 대평 무우를 내 생전 다시 먹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아쉬움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첫댓글 작년에 텃밭에 배추 무우 심려고 종로5가에 씨를 사러갔더니 무우는 대평무우 씨만 팔더군요. 서울을 제패한 고향 대평무우에 뿌듯한 긍지를 느꼈습니다.
옛날 진주 김장시장에서 대평무우 하고 독골 무우 하고가 난형난제였지요.그런데 지금 대평은 호수로 덮이고 독골은 아파트로 덮여 있습니다.금석지 감이현현하지요..
님의 수필을 읽으니 마치 그 대평무를 먹던 시원한 맛이 납니다. 동김치 맛이 일품이었지요. 그때는 그것이 대평무인지는 모르고 그냥 먹었는데 그것이 대평무구나 하는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시원스레 고향을 한 바퀴 돌고 온 듯한 상쾌한 기분이 듭니다. 좋은 글에 오래 머물다 갑니다.
진주서 살때는 대평무우가 그렇게 맛있는것 몰랐는데 서울와 살면서 그맛을 알았습니다 학교다닐때 지리 선생님 별명이 대평무시였습니다 그래서 늘 대평무시에 대한 기억을 갖고 살았는데 오늘 뜻밖에도 천성산님의 글을 읽으니 대평무우맛도 그립고 그 지리선생님도 보고싶습니다 고향을 생각케 하는글 고맙습니다 봉화
ㅎㅎㅎ!봉화선배님 대평무시가 진짜 진주말이네요.
입에 군침이 돕니다.대평무시 정말 맛있었지요.종화님이 대평분인줄 알지만 어떻게 여자도 아닌데 그 맛이며 요리까지 아는지 놀랍습니다.내가 이글을 늦게 보는 바람에 이글을 보며 지리선생님 생각이나서 쓰려고 했더니 봉화에게 선수를 뺐겨버렸습니다.그 지리선생님은 진짜 대평무시같이 미끈하셨답니다.이제 많이 늙으셨을 선생님! 지금 어느곳에 살고 계시는지?
대평! 한들이라고 불렀죠? 그러나 지금은 물 밑으로 사라진........잃어버린 고향이 돼버렸군요. 한들 무우는 크고 달아서 김장무우 뿐만 아니라 무우밥으로도 많이 먹었던, 배고픔의 아련한 어릴적 추억을 회상하며 한동안 주제넘은 행복을 누려봅니다.
수석님 학생시절 대평에 놀다온 기억이 나네요. 강태중친구가 그곳에 살았어요. 소나무 숲속을 거닐던 그시절 대평 무우맛있게 먹었어요.그때 수석님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호수속에 숨어버린 후 그 친구가 울먹이고 같이 마음이 찡했다오. 김상환
대평무시를 꼭 닮은 친구가 있어 별명을 2개로 칭하였는데....한 개는 대평무시, 또 한개는 말뚝무시.... 대평무시를 우리할머니가 겨울철 간식으로 밑둥을 잘라서 주셨는데 달작지근 하였습니다. 빈 속에 많이 먹으면 속이 쓰립니다.
대평무우 많이 듣던 이름 입니다.살다보니 그무우도 추억속에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