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정중심 복합도시건설 특별법에 의거 연기 및 공주 지역에 건설된 도시 명칭이 世宗市다.
이 세종시로 이전 하게된 총리실, 경제부처, 교육과학부 등을 놓고 여론이 분분했다. 이 법은 노무현 정부 때
만든 법인데, 이명박 정부가 행정의 비능률을 들어 이들 행정부처를 제외한 세종시 수정案을 내 놓차, 집권당
내에서 조차 여론이 양분 되었다.
당시 여당의 주류세력(이명박계)은 정부의 수정안이 옳다며 행정중심 복합도시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
고, 비주류 세력(박근혜계) 및 야당은 본법 제1조(목적) " 이 법은 수도권의 과도한 집중에 따른 부작용을 시정
하기 위하여 행정중심 복합도시를 건설하는 방법 및 절차에 관하여 규정합으로써 국가의 균형발전과 국가경쟁
력의 강화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에 따라 이들 행정부처가 포함된 원안을 고수하여 여당내의 양 세력간
첨예하게 대립되어, 결국 수정안은 국회에서 부결되어 원안대로 추진하게되어 행정중심 복합도시인 세종시가
탄생 하게 되었다.
2. 역사적으로 볼때 수도 이전 문제는 개혁세력과 기득권 세력간의 치열한 권력 다틈이 많았다.
가. 고려초 왕식렴등 서경세력이 제3대왕 정종(제2대 혜종의 이복동생)을 추대하는 과정에서 개경세력 300
여명을 처형한 후 서경(평양)천도를 추진하다 정종의 단명으로 중단 되었고, 185년 뒤인 고려중기 인종 때
외척세력의 거두인 이자겸이 역성혁명을 꾀하다 실패했다.
이사건를 빌미로 묘청 등 서경세력이 개경은 풍수적으로 지력이 쇠하여 이런 사건이 발생 했다며, 다시 서경
천도를 추진하다 개경세력에 의해 좌절되자, 묘청이 국호를 大爲國, 연호를 天開, 군호를 天遣忠義軍이라 선언
하고 반란을 잃으켜 1년 만에 진압되었다. 이 사건이 묘청의 난이다.
나. 조선왕조도 개국초 천도를 위해 계룡산 신도안과 한양을 놓고 검토하다가,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직접 행차
하여 답시한 후 한양으로 천도하고 1395년에 漢城府라 수도명칭을 정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이방과(정종)가 왕이된 후 개경으로 환도 했다가, 실권자 이방원(태종)이 등극
하며 1405년 다시 한성으로 천도하여 현재에 이른다. 항간에는 정조대왕도 수원천도를 검토했다는 설이있다.
3. 세종(世宗)이란 세종대왕의 묘호(廟號)다. 왕이 승하하면 몇개의 호(號)를 지어 올린다.
가. 왕의 시호(諡號) : 조선은 중국에 예속되어 있어 왕이 승하 하면 중국에 주청사를 보내 고부와 함께 왕의
시호를 청하여 받고, 승습(承襲) 왕의 인준을 받는다.
- 중국에서 세종대왕께 내린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이는 행동이 착하고 밝아 본보기가 될만 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 자체적으로 여덟 글자를 올려 王의 시호는 열字가 된다. 세종대왕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
명효(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이다.
- 중국을 여진족인 청나라가 통치 할때는 시호를 청하여 받고 신주에는 기록하지 않았으며,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중국으로 부터 받은 시호는 모두 삭제했다.
나. 능호(陵號) : 국장을 치르며 능의 이름을 지어 올린다
- 세종대왕의 능호는 영능(英陵)이다.
다. 묘호(廟號) : 국장 절차가 모두 끝나고 3년상 후 위패를 종묘에 모시며 묘호를 올린다.
- 세종대왕의 묘호는 세종(世宗)이다 그래서 세종대왕인 것이다. 이의 "世"字는 세상에 널리 덕을 쌓은
왕에게 붙이고, 宗"字는 덕을 베풀어 왕위를 유지한 왕에게 붙이는 것이다.
- 조(祖)字는 한 집안을 나라로 만든 임금을 太祖 또는 高祖라 하며, 이 창업주의 4대조까지, 황제는 5대
조까지 祖를 추존하고, 또 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한 것을 다시 잃으킨 왕을 창업군주에 준하여 祖를
붙인다.
. 창업주의 추존 : 태조(이성계) 1대 父 子春 桓祖, 2대 祖父 椿 度祖, 3대 曾祖父 行理 翼祖,
4대 高祖父 安社 穆祖.
. 고종이 황제가 되어 5대 추존
1대 문조(효명세자, 헌종의 父로 기 익종으로 추존, 고종의 양부)
2대 순조(홍경래의난 평정 및 천주교를 물리침으로 철종때 기 높임)
3대 정조(正宗을 正祖로)
4대 장조(세도세자),
5대 영조(이인좌의난 평정으로 고종27년에 기 높임).
. 창업주에 준한왕 : 세조(김종서의 국정 전횡 및 독단으로 나라가 망할 경지에 처한 것을 바로 잡았다는
이유 ?), 선조(임진왜란 극복), 인조(병자호란 극복)
- 왕위를 잃은왕 : 군(君)자를 붙인다. . 노산군(숙종때 단종으로 추존), 연산군, 광해군.
4. 조선시대 국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시호는 원칙적으로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현 장관급)이상 에게
만 내린다.
가. 시호를 받으면 가문의 영광알 뿐만 아니라 족보에서(문헌공파, 안경공파, 충무공파 등) 분파할 수 있으며,
특히 文字 시호는 학문적으로 존경받은 분에게 만 내린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이 문성공(李珥 文成公),
이황 문순공(李滉 文純公), 김장생 문원공(金長生 文元公), 송시열 문정공(宋時烈 文正公) 등이 있다.
나. 시호의 유래는 중국 周나라 때부터 시행되어 오다, 秦나라 始皇帝 때 폐지 되고, 漢나라 때 다시 복구되었다.
우리나라는 新羅 법흥왕 1년(514년)에 승하한 왕에게 智證이란 시호를 올려 智證王이 된 것이 최초다.
그 후 중국과의 문화접촉 과정에서 臣下들 에게도 시호 제도가 도입되게 되었다.
다. 시호의 절차는 원칙적으로 正2품이상 종친 및 文.武官에게 내리는데, 그 외의 守 大提學(文衡), 儒賢과 節義
에 죽은 사람으로서 顯著한 자는 正2品이 아나더러도 특별히 賜諡를 許한다.
시호를 받을 사람이 사망 하면 그 자손 들이 생전의 業績과 行狀을 작성 하여 준호구와 합께 禮曹에 올리
고 예조에서 奉常寺로 보내면 吏曹의 확인을 거쳐 홍문관에 보내어 奉常寺正과 弘文館應敎 이상이 모여 3망
을 작성 하여 國王에게 올리 그 중 1망을 落點 받아 司憲府와 司諫院에 署經(관료임명시 受職者의 자격을
심사 하는 告身署經 : 署經동의, 作不納, 正曹外, 限品을 결정하고, 立法, 改法 및 起復出仕 동의 여부를 심
사 하는 依牒署經)을 거쳐 吏曹에 보내면 이조에서 諡號 敎旨를 작성 王에게 奏啓하여 시호 敎旨를 내린다.
※ 시호를 정하는 글자는 301字 중에서 정한다.
라. 이조판서(증 영의정) 윤행임 시호 교지
해제 : 교지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행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규장각검교 직제학
윤행임 증 시 문헌공자.
- 충신접예 왈 문 : 충성스럽고 믿을수 있으며 예로써 손님을 접했다 하여 "문"
- 향충내덕 왈 헌 :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덕있다 하여 "헌"
갑자 6월 초4일(1864년)
※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으려고 간지를 사용한 경우가 더러 있음)
마. 윤행임은 정조의 총신(寵臣)으로써 정조가 승하하자 시파를 추방하기 위해 일으킨 신유박해 때 참형당했다.
헌종1년(1835년)에 복관 되었고, 아들 윤정현이 1품으로 귀하게 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 되었다.
-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부터 관상감사 까지는 영의정의 당연 겸직이고, 행 이하 자헌대부
이조판서 부터는 생존시에 거친 중요한 직책으로써 시호 교지에는 이러한 중요 직책을 기재한다.
첫댓글 김문홍 선생님 오래 간만 입니다.
요즈음 책 모임 에서 못 뵈었습니다.
세종 이라는 말이 분분 한 세태에 좋은 말씀,좋은 해설 필요한 글 감사합니다.
올한해도 건강하시고 좋은일 많이 있으시기를.....노소남
교수님의 그 자세한 수업이 그립네요~
설명 잘들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모습으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