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名은 인도이래 중요시되고 있다. 그것은 이름이 體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보기를 든다면 한역에 근거한『大無量壽經』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경은, 법본에서는「世尊a 量光明如來의 樂有讚嘆, 諸菩薩入不退轉地, 無量光明品, 樂有莊嚴大乘經」으로 그 經名이 말미에 적혀 있다. 이 여러 이름에 의하여 우리들은『대무량수경』의 내용의 요점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또『勝 經』은 페이지 수로 한다면 작은 경이긴 하지만, 경의 끝에「歎如來眞實第一義功德」으로부터 「說勝 夫人獅子吼」에 이르는 열다섯의 경명을 들고 있을 뿐 아니라, 제16에「이 경이 설명하는 바는 모든 의심을 단절하고 了義를 결정하여 一乘道에 든다고 한다」라고 있다. 이것에 의해서도 경명의 중요성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중국에서는 敎相判釋 때문에 경명은 더욱 중요시 되었다. 그 까닭은 경명이 각 종파의 근본적 주장과 떼어낼 수가 없는 것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경명은 題號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제호의 풀이가 중요하다. 또 경명은 제목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으로써 또한 淨土宗의 稱名念佛과의 관계가 생기고, 天台宗 속에 이미 있었던 사상경향을 강화하여 日蓮은 39세에『唱法華題目 』를 쓰고, 43세에『題目彌陀名號勝劣事』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 日蓮의 주장의 최대 거점은 天台智者大師 智 (538년∼597년)의『妙法蓮華經玄義』(略稱은『法華玄義』또는 단지『玄의』)전 10권(각 권에 상·하가 있음)이다. 日蓮에 의하면「천태대사」가『玄義』10권을 만드셨는데, 제 1권에는 간략하게 妙法蓮華經 5글자의 뜻을 말씀하신다. 제 2권부터 7권에 이르기까지는 또한 널리「妙」의 한 글자를 말하고, 8권에서 9권에 이르기까지는「蓮華經」 3자를 풍이하며, 제10권에는「經」이란 한 글자를 말씀하였다. 경이란 한 글자에 華嚴·阿含·方等·船若·涅槃經을 수록하였다.」 이것이 日蓮이 읽은 방법이다.『玄義』는 釋名·辯體·明宗·論用·判敎, 즉 名·體·宗·用·敎의 5장을 세우고 (1) 우선 제 1권 下의 끝 근처까지를 사용하여 이 5장을 總說하고 (2) 제 1권 下의 끝 근처부터 이하를 사용하여 이 5장을 각기 설명한다. 즉 제 1권 下 끝 근처부터 제 8권의 앞 3분의 2에 이르기까지를 이름풀이에 충당한다. 제2권 上에서 제7권 下의 전반까지에「妙法」을 풀이하고, 제7권 下의 후반에서「蓮華」를, 제8권의 앞 3분의 2에서「經」을 풀이한다. 그리하여 이것에 연이어 제9권 下의 전반에 明宗을 충당하며, 후반에 論用을 할당하고, 제10권의 상·하에 判敎를 충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불교에서 경명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불교인들은 그들의 所依經 (또는 論)의 이름에 붙여서 그들 또는 그들 자신의 불교철학을 나타냈던 것이다.『玄義』라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智 의 것은 그 집대성인 것으로서 5장으로 나위었기 때문에 五重玄義라고 불리워서 후세에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경탄하여야 할 학문적인 노력과 畏敬하여야 할 지성의 예리함이 발견된다. 화엄경에 관해서는 至相大師 智儼(602년∼668년)에게『華嚴經搜玄記』(10권.『60화엄』의 주석서)가 있으며, 그의 제자 賢首大師 法藏(643년∼712년)에게는『華嚴探玄記』(20권.『60화엄』의 주석서)가 있다. 우리들은 이「玄」에 주목하여야 한다. 淸凉 징冠(738년∼838년)은『大方廣佛華嚴經疏』(60권.『80화엄』의 주석서) 등에 의하여 杜順(557년∼640년)·智儼·法藏의 정통 화엄종의 취지를 발휘함과 동시에 새시대에 적응시키고 있다. 智儼의『搜玄記』(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는 우선「지금 문장의 뜻을 分判하고 5문으로써 분별한다. 첫째는 거룩하신 臨機의 德量의 由致를 칭탄하다. 둘째로 藏攝의 分齊를 명확하게 한다. 셋째로 敎下所詮의 宗趣와 能詮의 敎體를 말한다. 넷째로 경의 제목을 푼다. 다섯째로 문장을 나누어서 해석한다.」고 말하고 있다. 5문이라는 것은 5장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중 앞의 4문은 이 주석서 안에서의「玄義」또는「懸談」이다. 이것은 경의 宗敎문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 생각하기로 한다. 제5문은 智 의 저작과 비교하여 말하면『妙法蓮華經文句』(略稱『法華文句』)에 해다오딘다. 제4문「경의 제목을 푼다」라는 장소에서 그는『대방광불화엄경』「世間淨眼品」을 들어, 계속하여 大와 方과 廣과 佛과 華와 嚴과 화엄과 경과 世間淨眼과 品의 뜻을 밝히고서「따라서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말한다」라 맺고 있다. 따라서 화엄경이라고 약칭되고 있는 이 경의 구체적인 이름은「대방광불화엄경」이다. 智儼에 의하면, 法藏은『화엄경探玄記』의 서문에서 大와 方과 廣과 佛과 華와 嚴과 經에 대하여 略說하고「따라서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이어서「世間淨眼」과「品」에 대해섣 略說하고는 또 이르기를「바야흐로 이 경을 풀이하려고 하는데 간략하게 10문을 개설한다. 첫째로 敎가 일어난 所由를 밝히고, 둘째로 藏部에 관론시켜서 所攝을 밝히며, 셋째는 立敎의 차별을 나타내고, 넷째는 敎의 所被의 機를 가리며, 다섯째로 能詮의 敎體를 말하고, 여섯째로 所傳의 宗趣를 밝히며, 일곱째로 구체적으로 경의 제목을 풀고, 여덟째로 部類의 傳譯을 밝히며, 아홉째로 文義分齊를 말하고, 열째로 글에 따라서 해석한다」고 하였다. 門은 章으로 해독하여도 좋다. 앞 6문은 玄義 또는 懸談이다. 이것의 상세한 것은 그의『화엄일승교의분제장』(즉『화엄 5교장』)에서 알 수 있다.「10문을 개설한다」고 말한 것처럼 완전 원만을 뜻하는「10」이란 수를 사용하는 것은 所依經典인 화엄경에 근거한 法藏의 주석이나 논술방법의 하나다. 이 방법에 의하여 제7문에 관하여「경의 제목을 풀이한다」에 대해서도 그는 첫째로 數名, 둘째로 法名, 셋째로 喩名, 넷째로 義名, 다섯째로 德名, 여섯째로 事名, 일곱째로 開名, 여덟째로 具名, 아홉째로 合名, 열째로 品名의 열가지 이름을 요약해서 풀이한다. 이 十名 속에서 경명을 묻고 있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제6의 事名이다. 다른 아홉가지는 玄義 또는 敎相判釋 또는 立敎開完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이것은 나중에 고찰되어질 경의 종교와 떼어낼 수가 없는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그는 말한다. 「여섯째로 事名이라는 것은, 화엄의 명칭의 범어명을 健拏驃訶(Ga avy ha)라고 한다.建拏(Ga a)는 雜莘라고 이름하며(vy ha)는 嚴飾이라고 이름한다. 日照三藏이 의 事名이다. 다른 아홉가지설하여 이르기를 '西域에는 따로 하나의 供養具가 있는데, 이름하기를 驃詞라고 한다. 그 모양은 여섯겹으로서 아래가 넓고, 위가 좁으며, 장식하는데도 華寶로써 하고 하나 하나의 겹 안에 모두 불상을 안치하고 있다' 고 하였다. 참으로 이 경에 있어서는 六位가 중첩되고, 位마다 성불하는 것으로써 한다면 참으로 그 일은 닮은 것이다. 따라서 그 이름을 세운 것이다. 사람과 하늘과의 八會고 역시 그것에 닮게 하여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法藏이 인도인인 日照(Divasakara, Dinakara)三藏의 설을 참고하여 말하는 바에 의하면, 대방광불화엄경의 「華嚴」은 "gandavy ha"이며 雜華嚴飾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경의 구조는 <뷰우하>라고 이름붙여진 인도의 어떤 供養道具의 구조와 서로 비슷한 성질에서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인 것이다. 淸凉澄觀의 『80화엄』의 주석서인『대방광불화엄경소』는 참으로 경의 뜻을 풀이하는 데에 통털어서 10문을 개설한다. 「첫째로 敎가 일어나는 인연, 둘째로 藏과 敎의 所攝, 세째로 義理의 分齊, 넷째로 敎의 所被의 機, 다섯째로 敎의 體의 얕음과 깊음, 여섯째로 完과 趣의 通과 局, 일곱째로 部類와 品과 會, 여덟째로 傳譯과 感通, 아홉째로 통틀어서 경의 제목을 풀이하고, 열째로 따로 글의 뜻을 푼다. 아홉째의 통털어서 경의 제목을 푼다고 하는 속에서 그는 말한다. 「지금의 梵本에 의하면 摩詞毘佛略勃陀建拏驃詞修多羅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大方廣佛雜華嚴飾經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은 雜과飾의 두 글자를 생략하였을 따름이다」 하였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경의 梵語名은 "mah-vaiqulya-bu-ddha-ganda-vy ha-s tra"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經名을 이런 점에서 大·方廣·佛陀·雜華·嚴飾·經인 것이다. 그런데 西藏大藏經總目錄에 의하면 대방광불화엄경[80화엄]의 西藏語名은 "Sa s-bya-ba in-tu-rgyas-pa-chen pohi mdo이며 그 뜻은 「拂華嚴이라고 이름하는 大方廣經」이고, 그 梵語名은 Buddha-avata saka-n ma-mah vaipulya-s tra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phal-po-che다. 이것은 범어의 avata saka는 에져튼(Edgerton)에 의하면 영어의 a large number, collection이란 의미이며, 따라서 baddha-avata saka는 영어의 a collection or large number of buddhas의 뜻이다. 서장어의 sa s-rgyas phal-po-che도 이 의미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화엄경의 내용으로서도 긍정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화엄경이 서장에 전하여진 것은, 그 경명이 이 의미로 해석되어진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범어의 avata saka 에(avata sa)는 영어의 Wreath, diadem;ring-shaped ornament를 뜻한다. 그렇다면 「華嚴」즉 「雜華嚴飾」에 가까운 뜻을 가지는 것이 된다. 荻原雲來박사는 飜譯名義大集의 Buddh vata saka 에 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ga a-vy ha라고 하는 中國所傳도 존중하여 '이것은 「雜華嚴飾」이며「華嚴」이다'라고 하고 있다. 윌들은 法藏이 日照로부터 배웠다고 하는 것도 무시할 수가 없다. 따라서 화엄경의 범어명은 西藏所傳과 中國所傳의 두 가지가 있었다고 하는 것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둘중 어느 하나를 참으로 선택하고 다른 것을 거짓으로 가려버릴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경우에 경의 중국어 역명은 音譯서도 義譯도 함께「大」(摩訶)로 시작되고 있다. 따라서 이 중국어명을 遂字的으로 범어로 환원한다면 "mah "를 시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이와같이 경명이 "mah "로 시작된 것도 있다. 예를들면"mah -nibb na-suttanta"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서장소전은 이mah 를 vaipulya로 첫머리를 삼고 있다. 그리하여 이런 예도 발견된다. 즉 中部 제43경은mah -vedalla이며, 같은 제경은 c la-vedalla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두가지 所傳이 있다고 할 수 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兩傳이 모두 끝에 s tra란 문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들에게 의문을 일으킨다 라고 하는 것은 첫째로 mah 는 s tra를 형용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묻지 않으면안되기 때문이다. 9부경이란 nav gabuddhas sana 또는 anva a g n 이며,12부경은dv da ngadharmapravacana 이다. 따라서 九分敎 또는 十二分敎가 정확하다. 그러나 한역에는 「分校」가 아니고 「部經」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이「經」의 사용법에도 의문을 둔다. 經藏 suttapitaka 속에 9분교도 12분교도 함께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經이라 하고 方廣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經經」이라고 불리어야 할 것인데도 사실상 그렇게 불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大方廣經」 mah vaipulya-s trs의 표현도 역시 의문이 생기게 되므로 연구되어져야 할 여지가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의문을 남긴채 다음에는「方廣」부터 고찰하자. 『탐현기』나 『經疏』에 대하여 본다면 이 「方廣」에 대하여서도「廣」을 풀이하며 그리고「方廣」을 풀이한다. 그러나 이 경우 한자에 의한 표현으로서의 方廣을 기초로 삼고 있다. 이와같은 것은 중국불교의 방법이다. 현대에 있어서는 이 방법으로써 완전한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원래「方廣」과「方等」은 같은 어원에도 불구하고 方等經을 열등하고 方廣經은 수승하다고 말하여지고 있다. 이것은 이유가 서지 않는 일이다. 이 方等 또는 方廣은 직접적으로는 사안스끄릿어인 vaipulya의 역어이며, 이 범어는 빠알리어의 vedalla로 기원이 소급된다. 이 vedalla의 어원, 따라서 뜻이 명백하지 않는 것은 칠다아스사전도 리스·데이비즈사전도 함께 明記하고 있다. 연구의 여지가 남겨져 있는 것이다. 어떻든 이 veipulya는 vipula 「廣博한」의 명사이기 때문에「廣博性」또는「廣傳」을 뜻한다. 따라서 「方廣」의 「方」은 「커다란」또는「두루 다 미치는」의 의미로서「광」과 동일한 뜻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 方廣은 9분교 또는 12분교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9분교라는 것은 첫째 suttam契經, 修多羅, 둘째 geyyam應頌, 祗夜, 셋째 Veyy kara am授記, 記別, 和伽羅那 , 넷째 g th 諷頌, 伽陀, 다섯째 Ud nam自說, 讚嘆, 優陀那 여섯째 Itivutta-kam 本事, 伊帝曰多伽, 일곱째 J takam本事, 陀伽, 여덟째Abbhutadhabmmam 希法, 未會有, 阿浮陀達磨, 아홉째 Vedallam 方廣, 方等, 廣大, 毘佛略이다. 12분교라는 것은 첫째Str m, 둘째Geyam, 셋째Vy karav am, 넷째 G th , 다섯째Ud nam, 여섯째 Nid nam 因緣 尼陀那, 일곱째Avand nam, 譬語, 譬喩, 하파타나(聖者의 行狀記) 여덟째Itivrttakam, 아홉째 J takam, 열째 Vaipulyam,열한째Adbhutadharmah,열두째 Upade ah 論議 優波提舍다. 이와같은 것인 즉「方廣」은 9분교와 12분교에 공통이다. 다음에 그렇다면 이것은 불교buddhas sana 또는 법어 dharmapravacana 중에서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일 것인가. 우선 vedalladml 方廣부터 고찰하자. 붇다고사 buddhaghosa에 의하면「cullavedalla, mah vedalla, samm di hi, sakkapa h , sa kh rabh jan ya, mahapu ama등의 모든 경, 이들 모든 경은 모두 심오한 지식과 만족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질문을 하는 경(pucchita-sutta 所問經)이며, 이와같은 모든 경전이 모두 方廣이라고 알아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方廣은 대승경전의 方廣 또는 方等이라고 불리우는 것과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또 실제로 위의 Cullavedalla등 中部五經과 長部一經을을 음미하여보니 「方廣」이라고 하는 한자표현이 직접적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는 것과는 무관계하다는 것에 가깝고, 所問經인 사실을 본질로 삼고 있다. 所問은 불교 또는 법어의 내용, 즉 불교의 진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질문을 하여 정확하고도 간절한 답을 얻을 경우에는 질문한 자가 깊은 만족의 기쁨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또 그것으로써 불교의 심오한 지식 veda는 릭, 야쥴, 사아마의 3베에다 또 아달바를 더한 4베에다도 아니고 심오한 불교의 지식이며, 지혜이며 智 nam, j nam이다. 그런 까닭에 불타는 veda-gu 즉 최고의 지식을 얻은 자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까닭이라 하여 vedalla를 이 veda에서 도출하는 것에는 의문이 개재하게 된다. 이 점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다음에 이 vedalla를 계승한 대승경전인 vaipulya의 方廣은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인 것인가. 『대반열반경』권 제15「법행문」 제8의1은 梵行으로써 일곱가지 善法에 머무르는 일이라 하고, 이 七善法의 첫째를 知法(법을 아는 일)이라 하고, 그 知法이란 12부경을 아는 일이라고 한다. 그 12부경의 설명 속에서 方廣(毘佛略)에 관하여 경은 말한다. 「무엇을 이름하여 毘佛略經이라고 하는가, 이르기를 대승의 방등경전이다. 그 뜻이 광대하여 또한 허공과도 같다. 이것을 毘佛略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물론 方廣의 뜻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또 이것만으로 보아서도 方等과 方廣이 동일한 원어의 다른 번역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대로는 우리들은 구름 잡는 것 같은 느낌이다. 따라서 다시 구체적인 정확한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안된다. 『瑜伽師地論』권 제82는 攝釋分이며,「體와 釋과 文과 義와 法과 起와 義와 難과 次와 師와 衆에게 說함과 들음과, 부처를 찬탄한 略과 廣과 學의 勝利」를 명백히 한다. 그 중「法이라는 것은 요약하면 12종류가 있되, 契經등의 12분교 속의 方廣에 대하여 말하기를
方廣이라는 것을 보살도를 설하는 것이다. 七地의 5가지 보살행을 설하고 나아가서 모든 부처의 140가지의 不共佛法을 설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4가지의 모든 종류의 淸 내지 모든 종류의 妙智다. 보살지에서 이미 널리 설한 것과 같다. 또한 이 법은 넓기 때문에, 많기 때문에 극히 높고 크기 때문에, 때로는 매우 심원하게 대문에, 말하자면 지극히 용맹한 사람도 三大劫 阿僧企耶를 걸쳐 비로서 원만하게 성취할 수가 잇는 까닭에 方廣이라고 이름한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方廣이라는 것은 보살의 깨달음의 길을 설하는 법 즉 불타의 가르침이며,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유가사지론』의「보살지」에 의하여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미 우리들은 구름을 잡는 것은 아니다. 그 梵本도 현존하는「菩薩地」에 의해서 우리들은 方廣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荻原박사의 범본「보살지」에 근거하여 玄裝譯『유가사지론』의「本事分」속의 菩薩地의 16권 및「攝決擇分」중의 菩薩地의 9권, 曇無讖譯의『菩薩持地經』의 10권, 求那跋摩譯의 『菩薩善戒經』의 9권과 기타를 참조하여 지금 여기서 대승의 보살지를 논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을 채택한다.『현양성교론』권 제12의「섭쟁의품」 제2의 8은 方廣을 설명하는 데『유가사지론』과 동일한 말로 하고 있다.『大乘阿毘達摩集論』권 제6의 決擇分 중 法品 제2는 方廣을 설명하여 이르기를
무엇이 方廣인가. 菩薩藏이다. 知에 相應하는 언설을 方廣이라고 이름하고, 또 廣破라고 이름하고, 또 無比하고 이름한다. 무슨 뜻 때문에 이름하여 方廣이라고 하는가. 일체 有情의 이익과 안락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광대하고 매우 깊은 법을 宣說하기 때문이다. 무슨 뜻 때문에 이름하여 廣破라고 하는가. 그것으로서 능히 일체의 장애를 널리 파괴하기 때문이다. 무슨 뜻으로 이름하여 無比라고 하는가. 모든 가르침은 능히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즉 方廣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진여에 상응하는 언설이며 佛法을 성숙시키는 비교할 것이 없는 진리이다.『大乘阿毘達摩雜集論』권 제10의 決擇分 중 諦品 제1의 5는 方廣을 위의 集論과 완전히 동일한 말로써 우선 설명하고 곧 이어서 이르기를
이 方廣등은 모두 이것이 大乘差別의 이름이다. 일곱가지의 大性과 상응하기 때문에 大乘이라고 이름한다. 어떤 것들을 이름하여 일곱가지의 大性이라고 하는가. 첫째로 境의 大性이다. 보살도는 백 천가지와 같이 한량없는 모든 경전에서 연유하여 광대한 교법을 경계로 삼기 때문이고, 둘째로 行의 大性이다. 바른행위는 일체의 自利와 他利에 관하여 광대한 행위이기 때문이며, 셋째는 智의 大性이다. 푸드가라와 법과의 無我를 了知하는 것이 광대하기 때문이며, 넷째는 정진의 大性이다. 3大劫阿僧企耶에 있어서 한령없는 백천가지의 행하기 어려운 행위를 방편으로써 勸修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로 方便善巧(up yakau alya)의 大性이다. 여래의 모든 힘, 無畏, 不共佛法 등의 無量無數한 큰 공덕을 증득하기 때문이며, 일곱째로 업의 大性이다. 생사의 끝을 규명하여 일체의 깨달음을 서우치하는 것 등을 시현하여 광대한 모든 佛事를 건립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方廣과 廣破와 無比는 동일한 뜻으로 귀착하는 것이지만, 그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은 대승이란 뜻의 차별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이 대승으로 불리우는 것은 일곱가지의 大性에 상응하게 때문이다. 만일 위와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대승의「方廣」고 이런 뜻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와같은 것이라면 「方廣」은 대승인 것으로서 소승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미 명백한 것처럼 이른바 소승에서 대승이 이것을 계승하고 여기에 대승의 사상을 담아 넣은 것이다. 이들 모든 논이나 화엄경(특히 입법계품)도 소승을 억제하고 대승을 들고 있다. 이 억제와 앙양의 운동세력이 지금의 경우에는 이와같이「方廣」을 대승만의 것인 것처럼 말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광」vaipulya는 vedalla로 계승되고 전개되어진 것이다. 그 까닭은 대승의 거의 모든 경전은 화엄경도 역시, 지식과 만족을 획득하기 위하여 열심히 질문을 하는 所問經의 형식을 명백히 가지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은 8분교와 12분교와의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더욱 명백하게 된다. 대승이 법으로 삼는 12분교 9분교에서 인연과 비유와 논의를 증가시킨 것으로서,「방광」은 두 가르침에 공통된 것이다. 그렇다면 vedalla의 方廣이 보살도인 vaipulya의 方廣으로 계승되고 전개된 것은 무엇에 의한 것인가. 그것은 vedalla의 所問經이 지식veda와 만족tu hi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에 의한다. 이 지식과 만족은 생활로서는 道諦의 聖八支道를 걷고서 滅諦의 苦滅을 증득하는 일에 의하여 얻어진다. 이 苦滅을 얻은 자가 知苦하고 斷集하고 修道하고 證滅한 자가 vedag 다. 즉 부처다. 따라서 그는 聖諦를 現觀한 자다. 聖諦는 서로 섭수하는 성질 때문에 道諦에 섭수되어진다. 다른 3가지 聖諦를 섭수한 이 道諦를 계승전개한 것이 보살도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보살도는 불타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vedag 가 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보살도도 菩薩地도 菩薩藏도 진여에 상응한 언설도, 요컨대 대승의「方廣」도 즉vaipulya도, 또한 지식 veda 도 만족 tu hi를 얻으려고 하는 자인 한에 있어서는 vedalla의 「방광」도 그 실체를 동일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vedalla의 「方廣」도 그 실체를 동일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vaipulya의 方廣은 vedalla의 方廣의 역사적인 전개이며, 둘사이에는 말로써는 감출 수 없는 역사적인 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vaipulya 의 方廣이 불교 buddhas sana 도, 법어 dharmapravacana 도 아닌 것이 되고, 따라서 대승은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승도 역시 분명히 불교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의 「方廣」에 대한 고찰은 잠시 이상으로써 중지하고 다음에「佛華嚴」을 고찰하자. 「불화엄」은 경명의 일부이다. 경명에 대해서만은 이미 고찰하였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시 되는 것은 이 경명의 중요한 부분인「불화엄」의 의미다. 「불화엄」은 西藏所傳에 의하면 "Sa s-rgyas phal-po-che"이며 Buddha-avatamsaka 다. 이 phal-po-che도 avata saka 다. 이 phal-po-촏 도 avata saka 도 함께 영어의 a large number, collection 이라든가 a troop or set를 의미하는 것이라면「불화엄」은 당연히「불타가 수 많은」을, 「수 많은 불타」를 의미하는 것이된다. 화엄경에는 틀림없ㅎ이 수 많은 부처가 있다. 따라서 이「불타가 수많은」이 경명으로서 경의 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또 경 속에는 그름처럼 수 많은 보살이 있어서 활동하고 있다. 보살은 불타가 될자니, 따라서「불타가 수 많다」가 경명으로서 경의 내용을 나타낼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엄경은 어느 정도까지, 정연한 구조와 체계적인 사상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이점을 고려에 넣는다면「불타가 수 많은」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막연하여 정리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사라트· 챈드라· 다아스는 위에서 인용한 곳에서 이르기를
phal-po-che, avata saka는 6권으로 된 대승경전의 일부로서 모든신, 모든 악마(Yaksa), 태양신, 月神 등의, 또한 세계의 生成 廣 (역주:廣은 동서의 길이가 가로의 연장, 는 남북의 길이나 세로의 연장, 즉 시간과 공간을 의미), 持續의 각각의 모든 불타·모든 보살의, 또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기도하여야 하는가 하는 등의 간단한 성명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들의 Buddha-avata saka 경전의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다만 「불타가 수 많은」라고 말한 것만으로는 이와같이 막연해서 정리가 너무나 안된 것을 연상케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음에 그렇다면 avata saka 가 꽃다발이나 도는 귀걸이 등의 장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때에는 Buddha-avata saka는 전술한 것과 같이「佛陀雜華」로써 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뜻을 지니는 것일까. 불타 및 정리된 雜華(의주석)인 것일까. 또는 불타로부터 생긴 雜華(依主釋)인 걸까. 이 경우에는 이 雜華를 현실의 것으로 해석하는 일은 경의 내용에 비추어보아 허용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은 경의 내용에 비추어 보아 허용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은 경의 내용에 비추어보아 허용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은 경의 七處八會에 雜華가 있기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은 이런 종류의 雜華를 문제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이 雜華가 불타 및 보살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경의 내용은 이것을 시인할 것이다. 7처8회의 불타와 보살은 바로 雜華이기 때문이다. 이뜻은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의 하나의 도움으로서 十地經의 주석자인 世親의 淨土論의 두 게송을 대조하여 보자.
正覺의 아비타·진리의 왕 훌륭히 住持하였도다. 如來淨華의 무리는 정학의 꽃으로부터 화생한다. 불법의 맛을 사랑하고 즐기며 禪의 삼매를 음식으로 삼는다. 오래도록 몸과 마음의 번뇌를 떠나서 즐거움을 받음이 항상하고도 끊임이 없다.
이것을 親鸞은 고승 和讚에서 일본 고유의 말을 써서 찬양하여 이르기를「如來淨華의 성스런 무리는 正覺의 꽃으로부터 化生하여 중생의 願樂을 모두 다 신속하게 만족시킨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如來淨華의 무리는 정각의 꽃으로부터 化生한다」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도불교적인 사고방식이다. 이 게송에 있어서「여래」는 두 말할 필요없이 아미타여래다. 지금 이것을 비로자나여래도라고 하여보라. 7처8회의 각처 각회에 雲集하는 보살들은 비로자나여래 및 시방 세계 각 불국토의 여래의 正覺의 꽃으로부터 化生한, 그리고 또 여래의 淨華인 그 성스런 무리인 것이다.그리하여 당면한 비로자나여래도 각 불국토의 여래들도 모두 다 똑같이 理實法界인 自性法身의 能生根本佛陀 m labuddha의 본각으로부터 화생한 淨華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은 能生根本佛陀의 正覺으로부터 생긴 如來性起 또는 如來出現의 淨華이며, 世間淨眼 또는 世主인 毗盧遮那如來에 주의를 집중하면 된다. 그때 7처8회의 각처 각회가 비로자나불타와 그의 잡화인 것이며 이 7처8회로 된 화엄경 전체가 비로자나 불타와 그의 雜華다. 따라서 이 경은 전체에 대하여 보아도, 또 각처 각회에 보아도, 모든 경우「佛陀雜華」인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理實法界인 能生의 根本佛陀를 기초로 하여 觀하는 경우에도 7처8회의 각처 각회가 또한 7처 8회로 된 경의 전체가 能生根本佛陀와 그의 雜華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佛陀의 雜華」인 것이다, 화엄경의 梵語名이 Buddha-avata saka인 경우에도 이 경명의 의미는 여기에 존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雜華」가 花環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장식되어서 아름답다고 하 는 것 외엔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아니, 장식되어져 있다는 것도, 아름답다고 하는 것도 모두 다 질서가 있기 때문인 것이며, 질서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며, 질서를 세우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을 비교에 의하여 요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어의 꼬스모스(Kosmos) 또는 딱시스(taxis)를 연상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생각할 때 中國所傳의 經名이 함부로 처리될 수가 없는 것이 된다. 그 까닭은, 그것이「佛華嚴」또는「佛雜華嚴飾」즉 ga da-vy ha이기 때문이다.「성스러운 가안다·뷰우하의 대법문으로부터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취하여진 것이며, 선재동자의 善友尊崇行이라고 하는 部分인 성스러운 가안다·뷰우하 大乘經王을 마친다.」" aryagadavy h nmah dharmapary y dyath labhb sudhanakaly amitraparyup sanacaryaikade a ryaga avy homah y nasutrar ja sam pta " 이때에 ganda는 식물의 뿌리·가지·잎·꽃·열매와 구별되어지는「줄기(莖)」인 것이다. 고로ga a-vy ha는「줄기의 장엄」이다. 그러나 ga a가 그것만으로 荻原博士가 적고 있는 것처럼,「장엄」을 의미하는지의 여부는 나로서는 판단할 수가 없다. ga a는 더욱이「조각(장)」,「부분」을 의미한다. 이 경우이는 오히려 이 ga a가 식물따위의 각 부분을 즉 줄기만이 아니라 뿌리도 꽃도 열매도 의미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부분의 장엄」으로 택하게 된다. 그리고 「장엄」은vy ha다. 이것은「戰列」「신체」와 같이 질서가 세워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vy hana는 질서 세우는 작용을 의미한다. 에져튼이 vy ha를 영어의 supernatural arrangement, supernatural manifestation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이 말속에서 작용과 그 결과를 의미할 수 있는 것으로서 ga a-vy ha를 대할 때에는 어떠할까. 경의 7처 8회의 각처 각회가 모든 부분의 질서수립과 그 결과인 것이며, 각처 각회의 순서를 뒤쫓는 7처8회가 모든 부분의 질서수립과 그 결과다. 이와같이 각처 각회에 대하여 보아도, 또 그 전체에 대하여 보아도, 모든 부분의 질서수립과 그 결과, 요컨대 질서의 역동인 것이 우리들의 화엄경이다. 이 질서의 力動은 能生의 根本佛陀인 理實法界에 근거하여 사람이 如法(tath -gata)하고, 如來(tath - data)하는 질서의 역동인 것이다. 따라서 경의 모든 부분은 여래의 출현과 信과 住와 行과 廻向과 菩薩地와 佛陀인 것이다. 이 일은「세간정안품」내지「이세간품」과「입법제품」으로된 경의 내용에서 당연히 시인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서 法藏이 日照로부터 배운 印度의 뷰우하라고 불리우는 하나의 공양도구가 암시하는 바를 따라서, 또한 아바따앙사까의 花環을 중시하며, 또 뿌리·줄기·가지·잎·꽃·열매로 나누어 본다면, 어떻든지 가안다는 줄기이지만, 그러나 가안다를 부분의 뜻으로 해석하면, 가안다는 오히려 부분인 꽃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까닭으로 만일 하나하나의 부분을 雜華로 해석한다면,「佛陀雜華嚴飾」생략하여「佛華嚴」은 能生의 根本인 法身의 佛陀 즉 理實法界에 근거하여 사람이 하는, 부분적으로도 전체적으로도 질서가 있는 如法하고 如來하는 코스믹한 力動이다. 이 理實法界의 각(bodhi)의 반야역동을 다음에 우리들은 경의 구조에서 알 수 있도록 노력하자. 「追記」:이상과 같이「佛華嚴」은 그 의미를 결정하는 일이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위와 같이 해석하여 틀림은 없을 것이다. 이 경우 buddha-ga a-vy ha는 buddhasya ga asya -vy hana 또는 buddham ga ena vy hana다. 따라서「佛陀雜華嚴飾」은「佛陀의 雜華를 嚴飾하는 일」또는 「雜華로써 佛陀를 嚴飾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嚴飾은「질서수립의 力動」을 그 의미의 핵심으로 삼는 것이다. 이 중의 어느 것은 취한다고 하더라도 이 佛陀를 혹은 理實法界인 能生根本佛陀, 혹은 初成覺佛陀인 毘盧遮那로 해석하여도 좋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더라도 사람의 理實法界(本住法)에 근거하여 如去하고 如來하는 力動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위와 동일한 취지가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만일 ga a를 글자 그대로「줄기」로 해석한다면 ,이 줄기는 연꽃의 줄기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弟10地의 菩薩灌頂의 자리인 大寶王蓮華나 成覺者의 華嚴世界海의 연상으로써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大毘盧遮那成佛神加持經』「入秘密曼茶羅位品」제13의 持金剛主菩薩로써 그 줄기를 삼아 無盡大海에 處하고 있는 意生八葉의 大蓮華王이 觀想되는 것이 된다. 까닭은 우리들의 華嚴經 사상이 계승되고 전개되어져서『大日經』의 如來華嚴이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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