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지명(墓誌銘)
분성 허공 묘지명 병서(盆城許公墓誌銘 幷序)
공의 휘는 양(壤)이고 자는 문일(文一)이며 호는 인묵재(忍默齋)이다. 허씨(許氏)의 선조는 가락국왕(駕洛國王)이니, 그의 아들 중 한 명 모(某)가 봉지(封地)를 받아 분성군(盆城君)이 되었는데, 그는 왕후의 허씨 성을 전수받았고 그 자손들은 분성으로 본관을 삼았다.
고려 시대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낸 휘 염(琰), 충목공(忠穆公) 휘 유전(有全), 가락군(駕洛君) 휘 창(敞), 증성군(甑城君) 휘 귀년(龜年)을 지나서, 조선조에는 휘 치(錙), 휘 선(譔), 휘 정련(禎連)에 이르러 3대에 걸쳐 직제학(直提學) 관직을 지냈다.
정련의 아들 휘 백기(伯奇)는 호가 삼송당(三松堂)으로 조정암(趙靜庵) 문하에서 배웠는데, 증직이 이조 판서이며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이분의 아들은 휘 응길(應吉)이니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창산(昌山 창녕)에 은둔하였으니, 공의 9대조이다.
증조부는 휘가 염(溓)이며 조부는 휘가 환일(桓逸)이며 아버지는 휘가 찬(燦)이다. 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하근(河勤)의 따님이며 충경공(忠景公) 량(亮)의 후손이다. 순조 신사년(1821, 순조 21) 11월 5일에 공을 교촌리(校村里) 집에서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총명하여 전후로 부모님 상을 당하여 비록 지극히 가난하였지만, 장례와 제례를 치름에 예절대로 하였다. 선영 아래에 은거하면서 다시는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옛 책을 읽고 자제를 가르치는 것을 일삼았다.
효도와 우애로 가정을 다스림은 동생을 면려하는 방도이고, 농사와 독서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이고, 좌우(座右)에 ‘공경충신(恭敬忠信)’이라는 네 큰 글자를 걸어둔 것은 자기를 다스리는 공부였다. 더욱 사서(四書)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사람의 질문에 답하기를 물흐르는 듯이 하였다.
제가예설(諸家禮說)과 주자(朱子), 퇴계(退溪)의 중요한 말씀을 주워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가정을 가진 사람의 일상생활의 상도(常道)와 조석으로 자신을 살피는 자료로 삼았다. 금상 정축년(1877, 고종 14) 2월 15일에 돌아가셨는데, 함안(咸安) 대현(大峴) 서쪽 노치봉(鑪峙峯) 아래의 자좌(子坐)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인은 달성 배씨(達城裵氏) 영우(永祐)의 따님이니, 장수하여 지금 80세이다. 아들은 굉(鍠)과 준(鎨)과 후(𨩿)이다. 굉의 아들은 태성(泰宬)이고 준의 아들은 태주(泰
)이며 후의 아들은 태우(泰宇)이다. 공의 아들 준이 가장(家狀)을 갖추고 나에게 와서 묘지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다. 돌아보건대 80세의 혼미한 내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었으나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삼가 위와 같이 찬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으로 잇는다.
재야에 버려져도 곤궁함을 견고하게 지켜서 / 遺野固窮
독서에 힘써서 의리를 즐겼네 / 劬書嗜義
선으로 보답함은 속일 수 없는 일이니 / 善報不誣
마땅히 후손에게 선을 줄 것이네 / 宜爾錫類
<끝>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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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盆城許公墓誌銘 幷序
公諱壤。字文一。號忍默齋。許氏之先。駕洛王。封一子某爲盆城君而傳后姓。子孫因以貫。歷高麗三重諱琰。忠穆公諱有全。駕洛君諱敞。甑城君諱龜年。至我 朝諱錙。諱譔。諱禎連。三世官直提學。子諱伯奇。號三松堂。學于趙靜庵門。贈吏判。謚正憲。子諱應吉。乙巳士禍。遯于昌山。是公九世祖也。曾祖諱溓。祖諱桓逸。考諱燦。妣文化柳氏。河勤女。忠景公亮后。以 純廟辛巳十一月五日。生公于校村里第。天姿穎悟。値前後艱。雖至貧。葬祭如禮。屛居楸下。不復應擧。專以讀古書訓子弟爲事 。如孝友爲政。勉弟之道也。耕讀勿替。敎子之方也。座右揭恭敬忠信四大字。律己之工也。尤深四子書。答人叩問如流。諸家禮說。朱退要語。摭成一冊。爲有家日用之常。朝夕觀省之資。今 上丁丑二月十五日考終。緬葬于咸安大峴西鑪峙峯下枕子原。室達城裵氏。永祐女。壽今八十。男鍠,鎨,𨩿。鍠男泰宬。鎨男泰(우)
。𨩿男泰宇。公之胤鎨。齎家狀。請福樞以墓銘。顧昏耄不敢當此役。然孝懇攸至。謹撰次如右。繼以銘曰。
遺野固窮。劬書嗜義。善報不誣。宜爾錫類。<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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